4. 파독 간호사, 독일에 오다
1966 년 1월 31 일은 우리나라 이주노동사에나 대한 간호 협회 역사에서 잊혀 질 수 없는 귀한 한 페이지를 장식한 날이다. 바로 이날 이후부터 수천 명에 이르는 한국 간호사들이 서독의 각 병원에 취업 진출하게 되었고, 또한 그 중의 제 1 진이 서독에 첫 발을 디뎠던 날이기 때문이다.
당 시 서독 최대 일간지의 하나인 프랑크푸르트시의 「Allgemeine Zeitung」등 독일언론들은 이미 지난 1 월 28 일자로 한국 간호원들의 서독 진출을 알리는 특보를 내 보낸 후, 다시 1 월 31일에 커다란 화보와 함께 이들의 도착 상황을 상세히 보도했었다. 당일 일본 JAL기 편으로 첫 도착한 128 명 한국 간호원들의 오색 찬란한 한복 차림은 공항 주변에 화려한 꽃밭을 이루었고 이방인들의 벽안의 눈길을 황홀하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또 이들은 당시 주 서독 최덕신 대사의 융숭한 영접과 함께 역사적으로 유명한 프랑크푸르트 시청 황제 실에서 시장과 시의회 의원들이 주최한 환영 식에 참가하는 영광도 가졌다.
이렇게 시작된 한국 간호사들의 파독의 역사는 크게 보면 3단계로 나눌 수 있다.
1966년 이전에는 종교단체 등을 통해 산발적으로 간호사들이 파견됐고 1966년을 기점으로 민간 차원에서 대규모 파독이 시작되고, 1969년부터 1976년까지는 정부 차원에서 대규모 파견이 이루어진 과정이 그것이다.
1960 년대 초부터 민간차원에서 비롯된 우리나라 간호사의 해외취업이 효시인 파독간호사는 한국의 초기 산업화 과정에서 경제발전의 든든한 밑거름이 됐다. 1965년 이전까지 이루어졌던 개별적인 진출과는 달리 1966년부터는 집단으로 독일에 취업하게 되었으며 아울러 1969년 이후부터는 정부의 인력수출정책과 맞물려 한독간호협정이 체결되어 민간차원에서 정부차원으로 전환, 간호사 파독은 1976년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우리나라 간호사의 독일 파견은 여성 전문인력 최초의 집단 해외취업으로, 한국과 독일 간의 교류 증진에도 일익을 담당했단 평가를 받고 있다.
간호사들의 독일 취업은 한국 여성사에 있어서도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 국의 간호사들이 1966년부터 1976년까지 마르크를 벌어들여 한국의 산업화는 큰 기여를 하였으며 이와 더불어 파독 간호사들이 한국 특유의 문화와 정을 통해 독일인에게 한국의 혼을 불어넣고 인간적인 감동을 주게되었고, 이를 통해 독일인들이 한국에 대해 긍정적인 시선을 갖게 됨은 물론이고 한국의 문화가 독일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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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1월 15 일 명동 YMCA 대강당에서 열렸던 128 명의 간호사 환송식 (이 수길 박사 소장 자료) |
간호사 서독 취업을 이끈 두 사람의 공헌자들
1. 마인츠의 이수길 박사
한 국간호사 1진이 서독에 도착할 당시 서독 신문이나 TV 라디오를 통틀어 각 언론 기관에서 대대적으로 보도하는 관심을 보였는데, 이들이 취업하게된 전 과정을 전폭적으로 주선하였고, 또 이들의 취업이후에도 생활의 안정이 생길 때까지 그 뒤를 돌보아 줘, 항상 빠지지 않고 소개된 인물이 바로 마인츠의 한독 협회」 회장 이 수길 박사다.
1966 년 1월 31일 파독간호사 제 1진 128명이 독일에 도착하게 된 것은 순전히 이박사님의 노력의 결과였다. 마인츠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며 당시 독일 의료계가 간호사부족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접하고 이수길박사는 한국의 간호사들을 독일로 오게 할 수는 없을까 하고 백방으로 수소문하였다.
십 여군데의 병원에 서신을 내고, 직접 정치가와 의료인들을 방문하여 계획을 설명하며 노력한 결과 마인츠대학병원과 헤센주 의사협회에서 긍정적인 대답을 얻었다. 또한 마지막 어려움이었던 전세 비행기편도 천신만고 끝에 이제는 작고한 타이저 박사와 당시 일본항공(JAL)에 근무한 Winter씨의 도움으로 한국의 간호사들을 독일로 데려올 수가 있었다.
한 국에서의 파독간호사 선발에 직접 면접을 담당하여 우수한 재원을 확보한 이수길 박사는 1966년 1월 31일 이들과 함께 독일로 돌아왔다. 이렇게 파독간호사의 시대를 열게된 것이다. 세간에는 한국 정부가 차관을 얻기 위해 한국간호사들을 차관상환 보장의 수단으로 독일에 보냈다는 이야기는 많이 왜곡된 것으로 파독간호사는 이수길 박사 개인의 노력으로 그 물꼬를 트게된 것이다.
당 시 독일 신문을 보면 이들의 눈에 비친 한국인들이 얼마나 신기하고 새로웠는지 알 수가 있다. 그리고 멀리 동양에서 온 젊은 여성들을 위한 대접에 얼마나 각별한 신경을 썼는지 지금 독일의 외국인 적대감이 오히려 무색하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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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독간호사들의 첫 독일 도착을 관심있게 보도한 일간 Frankfurter Rundschau에 게재된 사진 (이 수길 박사 소장 자료) |
' 프랑크푸르트 룬트샤우'는1966년 2월 10일자에는 서울을 'Seoul' 로, 한국 간호원의 독일어 수업 참관기는 "한국 여성들이 ae ,ue 발음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며 "gruen → grin, fuenf → finf" 로 읽는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독일 신문 보도의 공통점인 '한국 젊은 여성의 친절, 상냥한 미소'는 어느 신문에도 빠지지 않고 나타나고 있다. 한 독일 간호원과의 인터뷰 내용을 보면 한국 간호원에 대한 느낌이 거의 경이의 수준에 이름을 알 수가 있다.
"우리 또한 직업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하지만 가끔씩 힘들 때는 스트레스와 화를 다스리기 힘든다. 그러나 한국간호원들은 늘 친절하고 웃는 얼굴이다. 아마 이 사람들은 감정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 같다."
당 시 한국 간호원이 근무했던 '훽스트(Hoechst)' 병원의 구내 식당의 요리사는 특별히 한국인의 입에 맞게 밥짓는 법을 배우기도 했다며 "한국 간호원이 우리에게 베푸는 친절과 배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1년이 지나 훽스트 병원에서 개최된 '한국의 밤'을 보도하는 1967년 4월 18일자 FAZ는 한복에 관한 설명으로 지면의 거의 절반을 할애하였을 정도로 한국간호사들에 대해 호평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