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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선생과 윤봉길 의사 관계의 새조명
이 선 주 (미주 Korea Today 주필)
1. 반세기만의 상해 방문
감동적인 역사기행
지난 5월 22일, 모든 일을 접어 두고 상해 여행에 나섰다. 뉴욕에 사는 구익균 선생을 모시고 동반 여행에 오른 것이다. 그가 나에게 동행을 제의한 것은 벌써 2년반 전의 일이다. 그 때 뉴욕에 사는 구 선생이 이따금 이곳 로스앤젤레스에 들려 쏟아 놓았던 이야기를 <새 역사의 여명에 서서>라는 회고록으로 써서 드렸었다. 그 책이 나온 직후 어느 날엔가 '내가 눈을 감기 전에 도산을 모시고 일했던 상해를 다시 찾아가 보고 싶다" 며 나에게 동행을 요구한 것이다.
사실 구 선생을 통해 도산을 처음 안 것은 아니었다. 지난 70년대에도 로스앤젤레스 근교 딸집에 와 계셨던 장리욱 박사를 만나 일찍이 도산 선생이 일하던 흥사단 단소와 동포 노동자들과 함께 일하던 리버사이드 지역 오렌지 밭이며 그들에게 야학을 가르쳤던 클레어몬트 기숙사를 답사한 적이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1905년 하와이에 농장 노동자로 건너와 도산 선생이 세운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을 지낸 강영승 옹을 비롯해서 이제는 타계한 흥사단 일꾼 한장호, 김원용, 김성락, 차상달, 조균환, 편무선 선생과 흥사단 미주위원장을 지낸 윤병욱, 안재훈, 송재승 씨 등과 만나서 도산 선생의 생애와 가르침을 많이 이야기해왔다. 나는 샌프란시스코의 김동우, 최봉윤 옹과도 친교가 있다.
그러나 도산 선생이 3․1운동 직후 현순 목사의 편지를 받고 임시정부의 조직을 앞두고 미주동포사회의 결사였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의 자격으로 상해에 건너가 국무총리서리 겸 내무총장으로 일하였던 상해에 함께 가자고 구 선생이 제의했을 때 나는 가슴이 뭉클해오는 기쁨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상해는 도산 선생에게 전방(前方)이 아닌가. 나는 그가 잘 다져놓았던 후방인 미주 땅에서 이제 그가 총사령관으로서 전투를 지휘하던 전방 견학을 가게 된 것이다.
구 선생이 이번에 상해를 가자고 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올해 90세인 그로서 눈감기 전에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 젊음을 보냈던 그곳을 되돌아 보고픈 짙은 향수 때문이었고, 둘째는 세상이 잘 모르고 있는 민족혁명가로서의 도산의 진면모를 현장답사를 통해 새롭게 증언해보려는 강한 의욕 때문이었다. 거기에다 올해는 윤봉길 의사의 의거 65주년이 아닌가. 1932년 4월 29일에 있었던 대사건 65돌을 맞추어 계획했던 여정이 다소 늦어진 것이었다.
구 선생은 바로 그 날 도산을 잃었다. 윤 의사가 조선에 이어 만주를 집어삼킨 뒤 중국까지 본격적으로 침략하기 위해 상업과 공업 그리고 군사의 요충인 상해를 점령한 일제의 선봉 시라카와 파견군 사령관을 비롯한 군관민 요인들에게 폭탄세례를 퍼부은 직후 도산 선생이 사건의 배후인물로 프랑스 경찰을 앞세운 일제 경찰에 의하여 잡혀간 것이다. 구 선생은 그 당시 도산의 비서로서 흥사단 원동위원부의 일과 대독립당 조직과 이상촌 건설 그리고 당시 1천여 상해지역 한인거류민사회의 지도를 돕고 있었다.
지난 20년대와 30년대에 한편으로는 소련 볼세비키 혁명과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 군국주의를 앞세운 세계 제국주의의 틈바구니 속에서 자주와 독립, 그리고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던 아시아 여러 민족의 혁명운동에 앞장서서 지도했던 혁명가로 도산을 이해하는 구 선생은 한국 사회 일부에서 독립상실을 민족성의 결함에서 찾는 나머지 민족성 개조운동이나 펴면서 자치주의 실현에 만족해하던 인물로 평가하는 경향에 분노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도산과 윤봉길 의사의 관계를 재조명함으로써 도산의 혁명가적 면모를 밝히고 84년된 흥사단 운동의 원류를 재확인하려고 나와 함께 상해를 찾아 나선 것이다.
옛길을 따라서
서울에서 상해로 가는 직행 항공편도 있지만 홍콩을 거쳐가자고 구 선생이 말했다. 도산 선생도 두 차례나 홍콩을 거쳐 상해로 들어갔다는 설명이었다. 초행 때는 1919년 4월 10일 로스앤젤레스에서 떠나 홍콩을 거쳐 5월 25일 상해에 도착했었고, 두 번째는 1924년 연말 미국에 건너가 1년을 지내다가 26년 봄 오스트리아와 홍콩을 거쳐 5월 16일 상해에 도착했었다. 물론 그 때에는 여객항공편이 없던 때여서 기차 편을 이용해 상해에 갈 수 있었다. 선생이 두 번째 상해에 도착했을 때에도 처음 도착 때와 마찬가지로 국무총리 자리를 맡아달라고 주위에서 매달렸지만 홍진 선생을 내세우고 끝까지 사양한 뒤 대독립당 조직과 이상촌 건설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틀을 홍콩에서 쉬고 중국 동방여객기 편으로 상해에 도착한 것은 5월 28일 정오쯤이었다. 홍콩과 상해를 잇는 이 비행기는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초만원이었다. 동남아시아에 진출하고 있는 화교들의 모국 방문객이 절대다수였다. 대만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오간다는 승무원들의 설명을 들으면서 우리의 형편에 비추어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상해국제공항에는 그곳에서 태어나 자란 김희경 여사가 마중 나왔다. 구 선생과는 60년만의 재회라고 했다. 김 여사가 13세 때 헤어졌다는데 현재 74세라고 한다. 그녀가 어렸을 때 구 선생은 오빠처럼 프랑스 공원에 데려가 아이스크림도 사주고 사진도 찍어주었다며 옛날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김 여사의 아버지 김시문 선생은 도산 선생의 소개로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편집실에서 조동호 선생과 이광수 선생을 도와가며 일했었다. 그 뒤 그는 1929년 여운형 선생이 일본 관헌에 붙잡혀 서울로 떠날 때 넘겨준 집에서 아이스크림과 맥주를 팔게 되었다. 그의 이름을 따서 금문공사라는 간식업을 경영한 그는 마침 프랑스 조계지를 행정하던 프랑스공무국에서 일하는 프랑스 장교들이 자주 찾아주어 심심찮게 돈을 벌어 오가는 동포들을 대접한 탓으로 '한국총영사' 라는 별명까지 달게 되었다.
이 금문공사가 자리잡고 있던 회해중로는 그 때 하비로라고 불렸다. 하비로는 어느 프랑스 장군의 이름이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 서안광장이라는 새 플라자가 섰다. 도산 선생의 최후와 인연이 깊은 곳이다. 금문공사 뒤에 흥사단 단우이자 임시정부 요인이던 김붕준 선생과 조상섭 목사가 살고 있었고, 그 건너편에 역시 흥사단 단우이자 국무총리서리를 지내고 상해거류민단장이던 이유필 선생이 살고 있었는데, 바로 그의 집에서 도산 선생이 잡혀가신 것이다. 그러므로 보강리라고 불리는 이곳은 우리 민족사의 한이 서려 있는 역사현장의 하나다.
다음날인 5월 29일, 그곳에 살고 있는 조선족 배준철 씨를 앞세우고 그의 아들이 운전하는 택시를 타고 먼저 도산 선생의 거소이자 흥사단 원동위원부 단소를 찾았다. 현재는 회해중로 1270번지에 위치한 30호 아파트였다. 위층이 도산의 거실 아래층이 흥사단 단소였다.
도산 선생이 즐겨 꽃을 심었던 앞마당에 새로 집 한 채가 들어섰을 뿐 5칸짜리 옛 건물은 그대로라고 먼저 구 선생이 확인해 주었다. 한인교포들이 많이 모여 살던 이 지역에 도산 선생이 태평촌이란 이름을 지어 붙였다고 했다. 동포끼리 오순도순 상부상조하며 살아가자는 그의 교훈이 새겨있는 이름이었다.
흥사단 원동위원부 단소
흥사단 단소에는 젊은 중국인 부부 주건평, 심빙 씨 부부가 두 살 짜리 아들을 데리고 살고 있었다. 찾아간 우리 일행을 반겨주었다. 그들은 이 집의 역사와 옛주인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설명해 주었기 때문이라며 방안으로 안내해 주었다.
구 선생은 약간 흥분된 얼굴빛을 띄고 가스 레인지로 개량된 부엌을 둘러보며 회의실 겸 사무실로 쓰던 방 모습이 다소 달라졌다고 말했다. 같이간 배씨를 탁상 앞에 앉힌 뒤 마주 앉아 그날 아침 도산 선생과의 대화 모습을 재연하는 것이었다. 그날은 바로 65년 1개월 전인 1932년 4월 29일을 뜻한다. 그 당시 장영신 권사는 함석헌 선생의 먼 친척뻘 되는 독신녀로 언니를 따라 상해에 와서 한인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있었던 차에 주위 사람들이 선생을 돌볼 파출부로 그녀를 추천해 방 한 칸을 쓰며 일하고 있었다.
"아침 9시쯤 평소와 다름없이 장 권사가 지어준 조반을 잡수신 뒤 나와 이렇게 마주 앉아 계셨습니다. 몇 가지 흥사단 회무를 지시하신 뒤 10시쯤 되면서부터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을 텐데 소식이 없으니 매우 궁금하구려."
이런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셨던 선생은 몹시 초조해 보였다는 것이다.
"무슨 일인데요? 혹시 손님을 기다리십니까?"
하고 구 선생이 물어보았지만 대답을 안하시더라는 것이었다.
얼마 뒤 다시 "무슨 일이 있을 텐데" 하시기에 "누구를 기다리시면 제가 나가 볼까요?" 하고 여쭈어 보았더니 "아니, 손님을 기다리는 것은 아니네. 무슨 일이 있을 거라 해서 그 소식을 기다리고 있네" 라며 한 벌뿐이었던 회색 외출복을 챙겨 입고 짙은 회색의 중절모자를 찾는 모습을 바라본 구 선생은 "무슨 일인데요?" 라고 재차 물어보았지만 설명을 하지 않고 잠깐 바깥에 나갔다 오겠다며 집을 나섰다는 것이었다. 그 때가 정오 12시를 좀 지난 시간이었다고 그는 기억하고 있다.
그 때에는 가정집은 물론 웬만한 사무실에도 전화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 뒤 도산 선생은 영영 돌아오시지 않았다. 이유필 단장집에 대사건의 소식을 듣기 위해 갔다가 붙잡힌 것이다. 구 선생은 그 때 선생을 따라 나서지 않았던 일을 무척 후회하고 있다. 그의 생애 최대의 실수라는 생각이다.
Ⅱ. 윤봉길 의거의 배경
한인소년척후대의 '선물'
윤봉길 의사가 상해 홍구공원(현재 로신공원)에서 일제의 군관민 수뇌들에게 폭탄세례를 퍼붓고 붙잡힌 날 오후 4시경 한인거류민단장 이유필 선생 집에서 도산 선생이 체포되었는데, 왜 그때 그 집에 갔느냐에 대한 의문이 있다.
구 선생에 따르면, 이 단장집에 찾아갔을 때 도산 선생에게 코코아차(茶)를 대접한 사모님에게 원망하는 소리가 당시 상해한인사회에 빗발쳤다고 한다. 이 단장은 사건발생을 미리 알아서였든지 집에 있지 않았을 때였으니 차대접을 않고 서둘러 피하기를 권했던들 경찰에 붙잡히지 않았을 것이라는 짐작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도산 선생이 어느 누구하고의 약속을 어떤 경우에라도 잘 지키는 인격자임을 강조한 이광수는 <도산 안창호>에서 어떤 소년의 생일을 맞아 선물을 준다고 약속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선물을 가지고 그의 집을 찾았다가 잡힌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윤봉길 의거 사건을 미리 알지 못했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광수의 서술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구익균 선생은 그날 도산 선생이 이유필 거류민단장 집에 가는 길에 윤 의사 폭탄사건을 알리는 신문호외(號外)를 샀기 때문에 의거를 확인한 뒤였다는 것이 당시 한인들의 지배적인 견해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단장 장남 만영 군의 생일선물이 아니라 그 소년이 속해있던 한인 보이스카웃에서 5월 첫 일요일에 있을 어린이날 축제를 위한 기부금을 전달하기 위해서 찾아간 것이라고 덧붙인다.
이 사실은 당시 한인소년척후대 부대장이었던 배준철 씨가 확인해 주었다. 이번 상해여행중 만난 80세의 배씨는 한인소년척후대가 1928년 창설되었으며, 박성근 씨가 단장이었다는 것과, 자기가 만영 군을 따라 이틀전인 27일 도산 선생을 찾아갔던 일을 아래와 같이 회상하는 것이었다.
"분명히 27일 태평촌으로 도산 선생을 우리 둘이서 찾아갔지요. 그랬더니 저희 들을 보시고 '너희들은 돈달라 할 때만 나를 찾아오는구나'하시며 '모래 오후에 내가 직접 갖다 줄 테니 다시 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그날 오후에 만영 어머니에게 전해 주셨지요."
도산 선생이 만영 군에게 소년척후대 행사 기부금으로 준 돈이 5불이었다고 말하는 구 선생은 윤 의사가 일본경찰에 붙잡혀 취조를 받는 자리에서 "민단장이 시켜서 했다"고 말한 탓으로 거사 며칠전 김구 주석이 겸직하고 있던 거류민단장 자리를 이어받은 이유필 선생집으로 그들이 몰려온 것이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윤 의사는 사실 백범을 두고 한 말이었다는 것이다.
한 처마밑에 산 윤봉길 의사
윤봉길 의사가 도산 선생이 살며 일하던 연쇄아파트에 살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리고 그가 도산 선생이 이끌던 흥사단 원동위원부 주체 월례강좌에 참석했었다는 것도 세상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더구나 윤 의사가 어떻게 김구 주석을 만나 거사를 계획하게 되었는지를 정확히 말해주는 사람이나 기록을 찾아볼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임중빈 지음 <윤봉길 의사 일대기>(서울: 범우사, 1993년)에는 윤의사가 23세 되던 1930년 고향 충남 예산을 떠나 만주와 청도를 거쳐 31년 5월 8일 상해로 건너가 동포 박진 씨가 경영하던 피혁회사와 일본인 거주지역 홍구에서 채소상을 하다 그 해 겨울부터 김구 선생을 비롯한 임시정부요인들을 접촉하게 되었다고 쓰여 있다. 그 해 겨울 어느 날 밤 박진 씨의 소개로 그의 집 2층방에서 백범과 윤 의사가 감격적으로 만난 것으로 되어 있다.
<백범일지>는 두 사람의 만남을 그해 1월 8일 동경에서 일어난 이봉창 의거사건 직후임을 암시한다. 그러면서 그 전에도 만나본 일이 있음을 백범은 아래와 같이 쓰고 있다.
"나는 종전에 공장 구경을 다니며, 윤 군이 진실한 청년 노동자로 학식도 있는 것을 보고, 다만 생활을 위해 노동을 하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백범이 청년노동자 윤봉길을 거사계획 얼마 전에 알게 된 배경을 구 선생은 잘 알고 있다.
"나와 동갑인 윤 의사를 처음 만난 것은 1931년 여름 어느 날이었다. 마당로 보경리 4호에 있던 임시정부 청사 1층에 있던 거류민단 사무실에서 그를 대면했다. 그 때 윤 의사는 교포 박진 씨가 경영하고 있던 말총으로 모자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고 있던 한낱 노동자였는데, 노동쟁의를 해결해 달라고 민단을 찾아온 것이다. 자신에 관련된 쟁점이었다기 보다는 동료들 모두의 처우개선과 노동환경개선이 쟁점이었다고 생각된다. 민단장이던 김구 선생의 의뢰로 임시정부 노동참판을 지낸 도산 선생이 나서서 경영주와 근로자 사이를 화해시키며, 양쪽다 좋도록 분규를 풀어 주었다. 그때 도산을 따라간 나는 민단사무실에서 그를 처음 만난 것이다."
그 때 처음으로 한 처마 밑에 살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고 구 선생은 말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흥사단이 지척에 있으니 월례회에 나오라고 권해서 윤 의사도 거사 때까지 너다섯차례 흥사단 모임에 나와 도산 선생과도 만났다고 그는 설명한다.
홀로 살고 있던 윤 의사는 역시 독신이던 고영선 씨와 하비로 1270번지 27호 2층 정자간에 살고 있었다. 그 아래층에는 105인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뒤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한 도산 선생의 동지 안태국 선생의 사위 홍재형 씨 가족이 살았다. 홍씨는 해방후 이광수에게 도산의 상해활동을 이야기 해주어 <도산 안창호>를 쓰게 한 사람이었으나 당시 정치정세에 익숙하지 못해 도덕적 인격자로만 소개하는데 그쳤다고 구 선생은 아쉬워한다.
해주출신으로 프랑스계 전차 검표감독원이었던 고영선 씨는 도산 선생의 권고로 흥사단 단우가 되었지만 윤 의사에게는 그런 권고가 없었다. 아마도 도산 선생은 김구 주석이 그를 눈여겨 다른 목적에 쓸 것을 짐작했던 것이 아니었던가고 구 선생은 말한다.
고영선 씨는 그 뒤 구 선생이 광동으로 내려가 중산대학 조교수가 되어 한국인 청년들을 혁명군으로 훈련시키기 위해 입학주선을 맡았을 때 중산대학 입학준비반에 있으면서 윤 의사의 전기를 써서 학비에 보태려고 노력했었다고 한다. 1934년경 그 책을 중국어로 번역해서 팔았지만 큰 재미는 보지 못했었다고 구 선생은 말한다.
이번에 태평촌을 찾았을 때 윤 의사의 거소 옆집인 28호에 살고 있는 중국인 서미아 할머니는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그때 윗방에 살고 있던 청년이 대사건을 일으켜 중국국민의 칭송을 받은 일을 기억하고 있지요"라며 위층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 할머니는 올해 77세로 65년전 그러니까 12살 때의 일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이 할머니는 그곳 5칸짜리 연쇄아파트에 살고 있던 유일한 중국인 가정의 딸이었다. 물론 이 할머니는 도산 선생을 "매우 점잖고 훌륭한 어른"으로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로신공원 안의 매원
매원(梅怨)은 옛 홍구공원에서의 윤봉길 의거를 기념하기 위해 마련된 정원으로 그의 호 매헌(梅軒)에서 이름을 따 붙였다. 윤 의사가 열아홉살 때 고향인 예산 오치서숙(서당)을 졸업했는데 그때 스승 매곡이 선물로 지어준 호가 매헌이다. 매곡 선생은 자신의 이름에서 '매'자를 떼어내고 이씨 조선 출신이던 성삼문의 <매죽헌>에서 '헌'을 떼어내어 맑고 높은 기풍이란 뜻을 담은 호였다.
내가 구익균 선생과 함께 상해교포 배준철 씨와 함께 매원을 찾아간 것은 5월 29일 오후였다. 태평촌을 둘러본 뒤 도산 선생이 잡힌 이유필 거류민단장집이 있던 보강리와 임시정부청사 그리고 교포학교였던 옛 인성학교건물을 찾아본 뒤였다. 그러니까 윤봉길 의거와 안창호 선생의 체포가 있은 지 꼭 65년 1개월이 되던 날이었다.
우리 일행이 매원을 막 들어서는데 저편에서 한 떼의 젊은이들이 다가왔다. 두쌍의 남녀들이었다. 연변에서 온 조선족 3세들이었다. 조선 연변대학 졸업생들이어서 모국어가 능통했다. 그리고 윤봉길 의거를 조선사를 배울 때 알았다는 것이다.
얼마 뒤 공원내 기념품매점에서 매니저로 일하는 청도출신 교포 2세도 합류했다. 모두들 구익균 선생의 옛 도산의 활동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윤봉길 의사와의 관계를 이야기했을 때에는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65년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황홀경에 빠지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의 화제는 일제의 간담을 싸늘하게 만들고 한국 국민과 중국 국민을 잠에서 깨나게 한 선열들의 영웅적인 애족심에 집중되었다. 윤의사가 일본왕의 생일을 맞아 상해침공의 승리를 노래하던 자리에 수류탄을 던져 일본군국주의수뇌부를 혼비백산시킨 쾌거였다. 그는 상해파견군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그해 12월 19일 사형을 받았지만 그의 순국으로 장개석 총통을 감동시켜 카이로선언을 통해 조국의 독립이 국제적으로 다짐되었다.
도산 선생은 김구 주석과 함께 윤봉길 의거의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일본경찰에 잡혀간 뒤 한달 동안 상해일본영사관내 구치소에서 취조를 받은 뒤 6월 7일 인천을 거쳐 서울로 압송되어 4년 실형을 받고 서대문과 대전에서 옥살이를 하게 된다.
이번 여행중 황포강변에 서 있는 빨간 벽돌집으로 되어 있는 옛 일본영사관도 둘러보았다. 오늘날에는 중국 인민해방군 해군본부와 국내무역부 상해치북공사가 들어서 있다. 황포로 106번지에 자리잡은 두채의 높은 건물이 그곳.
도산 선생은 그 자신이 한국으로 압송되었기 때문에 그가 그해 연초에 부인에게 쓴 편지에서 약속한 연내 귀가를 이루지 못했을 뿐 아니라 미주에 사는 흥사단 단우들을 비롯한 수많은 동지들을 다시는 만날 기회를 잃고 1938년 3월 10일 타계하고 만다.
미주에 사는 흥사단 단우들이 1924년 12월 상해에서 돌아온 도산 선생과 함께 창립 12주년 기념행사를 26년 1월에 가졌으며, 가족이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2월말 경이었다. 그것이 그와의 영원한 작별이 될 줄은 미처 몰랐다.
도산 선생의 상해 마지막 나날들
도산 선생이 이유필 거류민단장집에서 윤봉길 의거의 배후 인물로 일본 경찰에게 잡혀간 뒤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흥사단 단소에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어찌된 일이냐고 구익균 비서에게 따져 물었다. 본래 프랑스조계당국이 도산을 각별히 보호해왔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침통한 표정이었고 음성은 크게 떨고 있었다. 구 선생은 이날 아침에 있었던 일을 상세히 들려줄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 있을 텐데 소식이 없으니 매우 궁금하구려"하시며 홍구공원에서 윤봉길 의거가 발생했던 시간에 맞추어 집을 떠났다고 설명해 주었다. 그랬는데 며칠 뒤 도산이 구 선생에게 소식을 전해왔다.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이던 김봉준 씨 집에서 하숙하고 있던 박모 군이 일제검거에 붙들려 갔다 석방되어 나오면서 "그런 말을 하면 공모자로 걸리게 되니 다시는 그런 말을 말아달라"는 당부를 전해준 것이었다.
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에는 윤봉길 의거 다음날 일제의 대대적인 수사에도 임시정부요원은 단 한사람도 잡히지 않고 8명의 학생들과 11명의 직장인들이 잡혔다고 되어 있다. 여기에는 청년 박 씨가 세명이나 기록되어 있다.
구 선생이 한 말을 누군가가 일본영사관에 알려 도산이 사전에 일을 알고 있었으니 공모자가 아니냐는 추궁을 당한 것이라고 구 선생은 나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이유필 선생 막내아들 준영 씨도 비록 어릴 때였으나 자기 아버지는 그날 거사를 미리 알고 피했기 때문에 찾아온 도산 선생만 억울하게 붙들렸다는 말을 어머니에게서 들었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도산 구출작전
도산 선생의 체포는 뜻밖의 일이었다. 당시 한국민족혁명운동의 중심을 잃는 일이어서 국내외 동포들에게 큰 충격을 던져주었다. 그래서 그의 석방운동이 특히 미주동포사회에서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의 구속이 로스앤젤레스의 그의 가족에게 알려진 것은 5월 1일이었다. 북미대한인국민회와 흥사단 간부들이 일본․프랑스․중국 정부에 항의하면서 석방을 청원하는 동안 서재필 박사와 동서 김창세 박사는 일본에 압력을 가하도록 미국의회지도자들에게 호소했다. 한편 도산의 가족은 상해에 있는 미국인 법률사무소에 의뢰해 법적 대응에 나섰다.
변호사들은 도산이 1923년 7월 북경에서 중국시민권을 얻은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재판을 하더라도 상해에서 할 것을 일본영사관에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측은 구한말의 친족법을 들어 '조선인은 타국에 귀화할 수 없으며 따라서 일본은 대한제국의 법률을 적용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결국 도산 선생은 의사에 반해서 6월 2일 한국으로 강제이송을 당하게 되었다. 그의 석방이 외교적 노력이나 법적 방법으로 실현될 가망이 보이지 않자 구익균 선생에 의해 비상한 수단이 강구되었다.
이번 상해여행중 구 선생은 당시 일본영사관이 자리잡고 있던 황포로 106번지 건물로 나를 데려가 당시의 구출계획을 설명해 주었다. 두 개의 빨간 벽돌집은 양자강 하반의 황포강변에 서 있었다. 이 건물들은 현재 중국 해군기지로 사용되고 있다. 이 두 건물 사이에 있는 좁은 골목에서 도산을 납치(?)하려는 계획이었다.
구치소에 갇혀 있던 안창호 선생은 교포 치과의사 이무상 씨에게 치아치료를 받도록 허락받았다. 구치소에서 나와 골목을 건너 별관에 가서 치료를 받은 것이다. "나는 중국혁명가 손문 선생이 청조에 잡혔다가 구출된 일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를 따라 상해에 와 있던 양애삼 여사를 통해 도산을 별관으로 안내하던 전 씨를 포섭할 수 있었지요"라고 구 선생은 말했다.
평안북도 선천출신인 양 여사는 105인사건으로 상해에 와있던 독립운동가의 딸로 인성학교 교사노릇도 하며 가까이 지냈다고 말한 구 선생은 전 씨에게 도산을 탈출시키는데 협조하면 미국에 건너가 잘 살도록 해주겠다고 다짐해 탈옥방조자로 매수할 수 있었다고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전 씨로부터 이 계획을 전해들은 도산이 '무모한 짓'이라 해서 포기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도산이 한국으로 잡혀간 뒤 그의 주치의였던 이무상 씨도 치과병원이 잘 안되어 일본군을 위한 동전장사를 하러 강서성 상숙지방을 다니다가 중국인 유격대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
도산은 혁명사상가
사실 일제때 해외독립운동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민족혁명이었다. 도산의 경우는 더욱 그랬다.
도산과 함께 약 3년 동안 상해에서 활동한 구익균 선생은 "선생은 단 한 번도 독립이란 말씀을 한 적이 없고 언제나 혁명이라고 말씀했다"고 하면서 도산이 즐겨 쓰던 구호를 상기하였다. "잃어버린 옛나라를 찾아서 복스러운 새나라를 세웁시다."
확실히 도산 선생은 흔한 애국자가 아니었다. 1930년대를 전후해 국내에서 전개되고 있던 신간회 활동을 알고 있던 그는 중국혁명을 주도하던 국민당이나 소련혁명을 지도하던 공산당과 같은 민족유일당으로서의 대독립당을 조직하는 한편 손문의 삼민주의와 같은 자주․민주․평등의 대공주의를 지도이념으로 내세웠다.
민족혁명의 진로로서 제창되었던 대공주의는 중국혁명의 민족․민권․민생과 같은 민족의 해방과 독립 쟁취에 이어질 평등 복지사회 건설을 겨냥하는 것이었고 그 실현을 위해 좌우합작에 바탕을 둔 모든 민족주의자들의 대연합을 이루는 정치조직에 심혈을 기울인 것이다.
최근에 웨스턴 워싱턴대학교 김형찬 교수가 도산에 관한 연구서를 냈는데 그 제목에 '예언자'로 표현한 것은 매우 적합한 은유라고 생각된다.
첫째, 예언자는 위기 속에 태어나는 민족․민중의 지도자다. 안창호 선생은 우리 민족은 물론 모든 아시아 민족의 위기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메신저'였다. 당시 아시아 여러 민족은 북녘의 볼세비키 전체주의와 동녘의 일본 군국주의의 침략을 받고 있었다. 그 뒤에는 서구 제국주의 세력이 도사리고 있었다.
둘째, 예언자는 현상을 뛰어넘는 비전을 제시한다. 모순된 현실을 극복하는 새로운 질서를 '하나님의 백성'에게 다짐한다. 안창호 선생은 한국 민족과 중국 민족은 물론 일본 민족도 평화 속에서 함께 나누며 사는 미래를 가르쳐 주었다.
그는 새로운 사고의 틀과 패러다임을 '무실역행'과 '지도자론', '신의'와 '이상촌건설'로 설명해 주었다. 그가 제시한 방법은 점진적이고 온건하였으나 그의 이상은 혁명이었다. 이 혁명에는 인격의 변화와 함께 사회구조의 변혁이 들어 있었다.
그는 이러한 변화의 힘을 민중의 역동성에서 찾았다. 그에 의하면 누구나 지도자가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남을 내세워 일하기를 즐거워했을 뿐 아니라 누구와도 손잡고 일할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 민족의 과제는 민주화와 통일이다. 그러기에 도산 선생과 같은 지도자를 절실히 요구하고 있다. 그를 따르는 우리는 서로서로가 뛰어난 지도자가 되기를 힘 쓸 것을 다짐하고 나서야 할 것이다.
(1997년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