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랴∼ 끼랴∼” 날카로운 호령과 함께 붉은 철릭을 입은 무사를 태운 말들이 대지를 박차고 달려나가기 시작한다. 말 위에선 은월도와 쌍칼, 기창을 꼬나 든 무사들이 적진을 거침없이 헤집고 나간다. 비록 광활한 몽골대초원은 아니지만 기백만큼은 저 옛날 대륙을 호령하던 고구려 무사의 그것에 못지 않다. 영하 20도의 칼바람에도 달리는 말 잔등에는 땀이 멈출 새 없고, 무사의 호흡은 거칠고 눈빛은 뜨겁다. 오늘은 전국 8도에서 민족무사들이 한데 모이는 날. 이들과 함께 민족무예의 세계로 함께 들어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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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21 김성헌기자 | 여기는 경기도 화성의 한 승마클럽.
살을 에이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승마장에선 칠순의 임동규 선생이 사범들과 마상무술 연습에 여념이 없다. 오늘은 24반무예 지도자 중앙연수가 있는 날. 매년 두 차례씩 열리는 연수는 전국 각지의 사범들과 수련생들이 한데 모여 정해진 주제를 놓고 토론과 실습, 경험과 의리를 나누는 장이다. 이번 연수의 주제는 ‘마상무예’. 그래서 장소도 승마장으로 잡았다. 한편, 이번 연수는 24반무예의 복원자이자 경당의 설립자인 임동규 선생의 칠순기념회도 겸해 열리는 만큼 여느 때보다 더욱 뜻깊은 행사로 치러진다.
성급한 마음에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21세기 첨단시대에 무인으로 살고 있는지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하지만 알아야 면장을 한다고 일단은 24반무예가 무엇이고 24반무예협회는 어떤 곳인지부터 알아보자.
‘남민전’사건으로 무기형을 선고받은 임동규 선생이 감옥에서 복원하기 시작한 24반무예는 1994년부터 체육관을 통해 보급되기 시작했고, 1990년대 중후반 대학가마다 동아리가 만들어지면서 한때 전성기를 구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1998년 IMF가 닥치자 대학가의 관심이 취업에로 쏠리면서 활동이 급격히 위축되었다. 게다가 1990년대 중반부터 빚어진 내부갈등으로 떠나는 사람마저 생기면서 어려운 시절을 보내기도 했다. 24반무예협회는 ‘상무정신’을 가지고 문무를 겸전한 인재를 양성하고, 《무예도보통지》의 24반무예를 연구, 복원 및 보급하기 위해 1998년 민족도장 경당으로 창립되어 2002년도에 사단법인으로 등록한 전통무예단체다.
현재 24반무예는 서울, 부산, 광주를 비롯한 전국에 지역협회를 두고 있으며 노르웨이, 독일, 엘살바도르에도 연맹이 있고 미국, 캐나다, 프랑스에는 준비위원회가 꾸려져 있다. 특히 노르웨이에는 전문대학 과정의 무예학교가 있어 태권도, 검도와 더불어 24반무예가 정식 과목으로 채택되어 있다. 기본상식은 이쯤하면 됐고, 이제 본격적으로 무인들을 만나러 가보자. 그들이 살아온 얘기를 들어보면 24반무예의 역사와 오늘, 그리고 앞날이 보일 것 같아서다.
24반무예와 《무예도보통지(武藝圖普通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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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반무예는 조선시대 정조대왕(1770∼1800) 때 왕명에 의해 이덕무, 박제가, 백동수 등의 학자와 무간이 주도하여 편찬한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24가지 기예를 말하며, 조선시대 과거시험(무과시취) 과목으로, 또 군사들 교육용으로 관군들이 익혔던 군사무예를 말한다. 24반무예는 크게 18가지의 보병무예와 6가지의 기병무예로 구분되는데 창법, 검법, 권법과 마상무예로 구성되어 있다. 24반무예는 중근세에 이르기까지 조선, 중국, 일본, 몽골 등 동양제국을 대표하는 무예로서 임진왜란 등 실제 전투에서 활용되었던 내용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집대성한 《무예도보통지》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만한 세계적 가치를 지닌 도서로 평가받고 있다. | |
잠자는 민족혼을 일깨우는 24반무예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은 (사)24반무예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 강혜숙 전 의원(청주대 무용과 교수). 그는 재일동포 금강산가극단 공연 당시 여러 번 얼굴을 익힌 바 있다. 가극단은 그렇다치고 무술과는 어떤 인연이 있을까?
“전통무용과 민족무예는 민족의 정신, 동적 움직임에 있어 그 뿌리가 같아요.”
그가 민족무예에 관심을 가진 것은 이런 공통점 때문이기도 하지만 고구려의 기상과 기백이 담긴 24반무예를 되살려야 한다는 나름의 소신 때문이다. 요즘 주변에 무술이 많지만 “정신적으로는 빈곤한 게 현실”이라며 “사실 국회의원이 된 직후부터 관심이 많았지만 의정활동과 각종 공연 때문에 실제 배우지는 못했다”며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24반무예에 대한 그의 애정과 소신은 다음과 같은 말에서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잠자는 민족혼을 일깨우는 24반무예를 발전시키는 것은 민족의 숙원이자 민족정기를 선양하는 겁니다.”
이번 연수 참가자 중 최연소는 중학교 2학년 조민강 군. 그는 지금 정규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 ‘홈스쿨링’을 하고 있다. 체력단련이 필요했던 그는 어머니의 소개로 지난 3월부터 24반무예를 배우고 있다. 지금까지 〈본국검〉과 〈예도24세〉를 배웠는데 “검술은 할 만한데 배울 게 너무 많다”는 게 첫 소감. 앞으로 농부가 되는 것이 꿈인 민강이는 “농사만으로는 살림살이가 어렵기 때문에 번역을 하거나 도장을 운영하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단다. 맙소사! 요즘 아이들은 너무 ‘현실적’이야. 안타까운 것은 서울에는 도장이 없어 한 대학의 교정에서 연습한다고. 민강이의 애절한 하소연.
“사범님, 서울에도 빨리 우리 도장 만들어주세요!”
임동규 선생의 첫 제자는 누구일까. 정선원 충남협회장(공주사대 79학번)은 1982년 대전교도소에서 임 선생을 처음 만났다. 재소자들, 특히 장기수 선생들과 학생들의 접촉이 전면 차단된 상황에서 투쟁으로 공간을 확보한 1개월 동안 집단으로 무술을 배웠다. 마땅한 무기가 없어 빗자루로 연습을 해야 했는데 바로 여기서 그 유명한 ‘빗자루도사’전설이 탄생했다. 당시 20여 명이 임 선생으로부터 무예를 배웠지만 그 중 사범까지 된 사람으로는 정 사범이 유일하다.
곽현용 수석부회장(한살림 대표)은 어려서부터 당수와 쿵푸를 좋아했던 ‘무술소년’출신. 노동운동, 수배, 사회생활을 거치면서 전통무예에 대한 고민을 하던 중 《말》지를 통해 여의도에서 전통무예 강습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무작정 달려간 것이 24반무예와 맺은 첫 인연이 됐다. 이후 생태·환경문제로 관심이 옮아가면서 1995년 여주로 귀농했다. 사실 수련관을 운영하면서 “아이들에게 싸워서 이기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과연 옳은가”하는 회의도 들었다. 하지만 요즘은 “싸우고 다투는 단계를 넘어서는 건 지도자와 당사자의 자질에 달려있다”고 본다. 바깥 일에 지쳐 들어왔을 때도 “칼을 잡고 운동하면 마음도 차분해지고 몸도 개운해진다”는 그의 바램은 “여든까지 흐트러지지 않고 무예를 계속하는 것”이다.
반가운 얼굴도 있다. 충북지부장을 맡고 있는 최은섭 사범은 지역에서 청년회 활동을 하면서 창간 초기 《민족21》보급활동을 했다. 그는 6개월 사범코스를 가장 먼저 수료한 사람 중 하나로 “경당을 통해 인생이 변했고, 민족무사로서 이 길을 가게 돼 영광으로 생각”하는 천상 무인이다. 또 다른 반가운 얼굴은 산청 간디학교에서 온 강희석 사범. 그는 기자 일행을 보자 지난해 국가보안법으로 수사를 받고 있던 최보경 선생을 취재(본지 2008년 00호 참조)하던 당시를 회고하며 반갑게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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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21 김성헌기자 | 민족무예 통해 잃어버린 야성을 찾자!
임동규 선생 칠순기념회를 마친 후에도 밤늦게까지 도장운영, 역사 속의 무인, 마상무예 등을 주제로 한 연수는 계속됐다. 마침내 오랜 공부(?)가 끝난 후 벌어진 뒷풀이 자리에서도 24반무예의 정체성과 운명문제를 놓고 진지한 논의는 계속됐다. 정연근 경남협회장은 “이 시대에 칼을 들고 외적과 싸울 일도 없는 데 왜 24반무예를 하는가”하며 존재 이유를 제기했다. 여기에 수원에서 무예24기보존회를 이끌고 있는 김영호 사범은 “정답은 없지만 ‘야성(野性)의 회복’이 아닌가 생각한다”며 “무예는 오랜 세월 우리 조상들에 의해 다듬어진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몸짓이다. 싸워서 이기기 위해서는 야성의 회복이 절실하다. 그것도 몸으로만이 아니라 정신과 문화를 변화시키는 힘이 되어야 한다”며 기염을 토했다.
정연근 사범도 “야성은 에너지 제공의 원천”이라며 “총기가 없던 시절 야성은 곧 전투력이었다. 때문에 무예가 필요했지만 지금은 인류보편적 가치인 정의를 구현해야 하는데 이것을 야성에서 가져와야 한다”고 말했다.
심각한 토론도 좋지만 명색이 뒷풀이 자린데 권주가 한 자락 없으면 무슨 재미. 먼저 선창을 뗀 정연근(이름이 같다) 경북협회장이 부른 곡은 ‘한 고개 넘어 또 넘어로 보인다’로 시작하는 러시아 민요 〈기러기〉. 학창시절 부르던 노래를 20여 년 만에 다시 듣는 감흥이란…. 이어 최은섭 사범의 흥겨운 민요 한 자락이 구성지게 울려나왔고 ‘뽕짝’도 출연했다. 가장 많이 부른 곡은 〈광야에서〉와 〈전화카드 한 장〉 등 80년대 민중가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민족무사들이 ‘문무’는 함께 갖추었는지 몰라도 ‘예무’에는 소홀한 듯 끝까지 이어지는 노래가 별로 없어 쑥스러운 웃음바다를 연출했다. 그만큼 세월이 흘렀다는 반증이리라.
이제 밤도 깊어 사람들은 하나둘 잠자리로 향하고 김영호, 최은섭, 정연근 3사람만 남았다. 무예를 잘 하는 사람은 궁뎅이도 무거운가 보다. 어느 듯 창 밖으로 여명이 희붐해 질 무렵 드디어 3인방도 “90년대 대학가에 경당 열풍이 불었던 것처럼 우리 목검과 창을 들고 힘을 합쳐 다시 옛 영광을 회복하자!”고 결의하며 장렬하게 이부자리로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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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21 김성헌기자 | “북에는 민족무예 연구하는 사람들 없나요?”
“24반무예를 체계화하고 보급하는데 있어 가장 큰 어려움은 ‘문헌만으로’ 복원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일본 식민지를 겪으면서 맥이 끊긴 탓에 정확한 동작의 재현이 어렵고 자의적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에 아직 단일한 매뉴얼이 만들어지지 못하고 있어요.”
이번 연수를 준비한 임한필 사무총장은 1989년 ‘전교조사태’때문에 고등학교 때부터 운동에 뛰어들었다. 대학진학 대신 해병대에 자원 입대한 그는 제대후 20대의 거의 전부를 경당과 함께 보낸 사람이다. 그러다 1998년 28살이 되어서야 조선대학교 북한학과에 늦깍이로 진학한 그는 경남대학교 북한대학원에 진학한 후 독일유학을 꿈꾸었으나 아쉽게도 좌절.
앞으로의 계획에 대하여 임 총장은 “용산 미군기지가 철거되면 역사공원이 조성될 예정인데 여기에 ‘훈련원’을 복원할 계획”이라고 한다. 여기에다 전통무예보존법이 통과된 만큼 정부차원의 체계적인 지원이 있다면 〈국립한국무예학교〉를 만드는 것이 궁극적인 소망이다. 하지만 꼭 해보고 싶은 일이 또 있다. 바로 민족무예를 남북이 함께 연구하고 체계화하는 것. 그가 기자에게 애절하게 부탁한 한 마디가 가슴을 울린다.
“북에는 민족무예 연구하는 사람들 혹시 없나요? 소개 좀 시켜줘요.”
이제 축제는 끝났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헤어져야 할 시각. 세상살이가 IMF 때보다 더 팍팍하다는 요즘, 민족무예로 민족정기와 잠든 야성을 일깨워 세상을 뒤흔들 웅지를 가슴 한 가득 안고 무사들은 하나 둘 자신이 떠나온 곳으로 다시 돌아간다. ‘서산낙일’ 해는 저물어가고, 눈발은 휘날리는데….
인터뷰 고희(古稀) 맞은 임동규 선생 24반 민족무예 복원자, '경당' 창시자 "민족적 정체성과 자존심이 제일 중요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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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21 김성헌기자 | 1부 세미나를 마치고 인근 수련원으로 옮겨 열린 축하연에서 24반무예협회 회장인 강혜숙 전 의원은 “정글의 논리가 횡행하고 있는 현실에서 고구려의 기백과 민족의 얼이 살아있는 전통무예를 복원하고 튼튼한 뿌리를 심어주셔서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며 “역사적 현실이 열악한 만큼 24반민족무예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 질 것”이라며 선생의 백수를 축원했다. 다 아는 것처럼 임동규 선생은 1979년 소위 ‘남민전 사건’으로 구속되어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대전교도소 내에서 학생들에게 민족무예를 가르치면서 ‘빗자루도사’전설을 낳기도 했다. 1988년 출소 후에는 ‘민족도장 경당’을 설립해 24반무예를 복원, 보급하는데 앞장섰다. 이날 축하연에는 한국전통무예총연맹의 설적운 총재(골굴사 주지), 기천문의 박사규 문주, 전통무예한겨레총연합(정도술)의 안호해 총재 등 전통무예인들도 참석해 선생의 고희를 축하했고, 제자들은 그에게 일편심(一片心)이라 새겨진 은장도를 선물로 헌정했다. 한편 그의 칠순을 맞아 지금은 다른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는 옛 제자들도 참석해 사제지간의 정을 다시금 확인하는 뜻깊은 자리가 되기도 했다.
▶먼저 칠순을 축하드립니다. 요즘 건강은 어떠신지요. “사실 그렇게 좋지 못합니다. 징역 살면서 이빨이 완전히 망가졌어요. 그래서 밥 먹는 시간이 지옥이에요. 그래도 최근까지는 새벽에 일어나 진검 수련을 계속해왔는데 요즘은 건강이 허락하지 않아 자제하고 있어요.” ▶지금까지 이룩한 성과도 적지 않습니다만 앞으로 계획하고 있는 사업이 있으시다면. “‘통일학교’라는 대안학교에서 경당에 제휴하자는 제안이 들어왔어요. 지금은 중학교 3학년까지 있는데 내년에는 고등학교 과정이 생깁니다. 매년 30명 가량이 들어오는데 여기서 민족무예를 정규과목으로 채택하자는 거지요. 앞으로 이들에게 민족의술도 가르쳐서 제3세계로 내보내는 것이 꿈입니다. 나아가 대학원 과정까지 개설할 계획도 갖고 있어요.” ▶요즘 경당 본당에 계신데 어떻게 운영하고 계신지요. “본당을 활성화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입니다. 본당을 활터와 승마장, 잔디수련장을 갖춘 종합무도수련장으로 만들고 싶어요. 여기에서 우리의 전통무예와 문화를 재현하고, 그 자부심을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외국인들에게도 널리 알렸으면 합니다.” ▶끝으로 후학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부탁합니다. “지난 시절 정치적 박해에 따른 고통이 오히려 정신적 자산으로, 도덕적 정당성으로 인정받을 날이 머지 않았다고 봅니다. 그 어떤 기술보다도 민족적 정체성과 자존심을 갖추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희망을 가지고 민족무예를 더욱 체계화하고 널리 보급하는데 힘써주기를 부탁합니다.” | | |
첫댓글 임총장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부산협회에서 스크랩해갑니다..^^
곽관장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조만간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