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목정보 11월호 원고
‘도(道)’를 아십니까? 길이 보이십니까?
송용민 신부
길거리를 걷다보면 가끔 다가와서 “참 인상이 좋아 보이십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하면서 말을 건네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과거에는 단도직입적으로 “도(道)를 아십니까?”라고 묻는 사람들도 많았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며 거리 한복판에서 자신의 신앙을 전하는 개신교인들로부터 전철 안에서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웅얼대며 걷는 사람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역사 주변에서 기타와 앰프를 놓고 가두선교를 하는 이들도 있다. 가톨릭교회도 근래에는 선교에 대한 저자세에서 벗어나 가두선교의 필요성을 강조해서 젊은이들이 모이는 곳에서 야외미사를 한다거나 거리에서 선교 팜플렛을 돌리는 경우도 있다.
대부분 가두선교에 감동해서 그 종교를 택하거나 호감을 갖는 사람들은 드물다. 오히려 공공장소에서 특정 종교를 홍보하는 행위가 우리에게는 불편한 감정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선교활동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선교 대상자들에 대한 배려라기보다는 선교하는 당사자가 자신이 신봉하는 종교적 신념을 더 분명하게 의식하고 지키기 위해서이다. 일반적으로 자기 정체성을 찾는 가장 쉬운 방법은 나와 다른 사람이나 가치관을 대조적으로 비교하고 나만의 특수성을 찾아가는 길이다. 남들과 다른 모습이야말로 내 본래의 정체성이라고 믿는 셈이다.
이러한 배타적 정체성을 찾는 노력이 사회에서 강해질수록 그 사회에는 분열과 갈등이 끊이질 않는다. 나와 다르다는 것이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과 가치관들을 만날 수 있는 인생지평의 확대가 될 수도 있지만 정반대로 나와의 이질감 때문에 친밀감을 느끼기 힘들거나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공동의 합의에 이르는 것이 힘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종교적 신념과 맞닿으면 개인에게는 절대적 신념으로 굳어져 대화나 소통에 커다란 장애가 되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최근 일부 종교집단에서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을 펼치기 위해서 기성 교회에 은밀하게 잠입하여 교회 내분을 일으키고 불만을 품은 이들을 자신들의 종교로 유인하는 문제가 자주 발생한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종교적 신념을 살아갈 때 교리적인 확실성 보다는 제도적인 보호와 결속력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개인적인 신앙고백의 진실성 보다는 집단적인 신앙 표현에 더 관심을 갖기 때문에 자칫 기성 종교에서 회의를 느낀 이들이 신흥 종교나 사회악을 동반하는 일부 종교집단에 쉽게 유인되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어떤 종교적 신념이 올바른가에 대한 식별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일부 보수적 개신교의 복음주의 교단들은 오직 성경만을 하느님 계시의 근원으로 삼다보니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는 것을 가르치거나 전승으로 믿어온 가톨릭교회를 이단으로 취급하기도 하고,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종말론적인 요소들을 종교의 핵심으로 여기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참된 종교의 기준은 그 종교적 신념이 얼마나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부합하는 지가 중요하다. 어떤 특정한 조건의 사람들과 문화권에서만 수용될 수 있는 종교라면 그 종교는 세상을 배타시하면서 선과 악의 이원론적 구조로 사람들을 가르치는 경우가 많다. 최근 ‘신천지’나 ‘하나님의 교회’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이들이 대표적이다. 종교가 하나의 제도이기 이전에 인간의 참된 구원과 해방, 자유와 평화라는 보편적 인류애와 부합하지 않고, 오직 개인의 행복과 축복만을 구하는 기복적 신앙으로 치달을 때 그러한 종교는 공동선에 무관심한 이기적 집단주의로 비춰지기도 한다. 한국의 일부 개신교가 지나치게 축복논리로 신앙을 전하면서 사회악과 싸우지 않고 자신들의 교회 밖의 이웃에게로 보편적인 사랑을 전하지 않는 경우가 이에 속한다.
근래 우리 사회가 종교적 신념 간의 대립은 물론 사회 윤리적 가치들에 대한 갈등을 풀어내는 사회적 합의를 찾기 힘들어 한다. 북한 핵 문제 이후 심화된 남북 간의 갈등과 반목은 물론 해묵은 정치권의 권력다툼에서부터 노사 간의 갈등, 인간문명을 위한 개발이냐 창조 질서의 보존이냐를 놓고 대립하는 환경문제, 생명윤리와 관련해서 발생하는 사형제도 존폐여부, 낙태, 사후피임약 문제, 배아세포의 오용이나 무의미한 연명치료와 안락사 문제에 이르기까지 현대 사회가 겪고 있는 윤리적 이슈들에 대한 해답을 찾는 일이 쉬어보이지 않는다. 과거처럼 사회를 통합하는 삶의 가치관이 획일화되어 있거나 단순할 때에는 비교적 사회적 합의에 이르는 길이 단순화 되어 있던 반면 오늘날 가치가 상대화되고 개인적인 신념과 인격적 존엄성이 존중되는 사회 속에서는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합의에 도달한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면 이런 사회적 합의에 도달하는 길(道)은 없는가? 길이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참된 길은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비판적 철학자인 위르겐 하버마스(1929- )는 인간의 비판적 이성이 도구적 이성으로 퇴락하지 않고 공동체 구성원들의 올바른 의사소통행위를 통해 발휘될 때 참된 합의가 가능하다는 입장을 피력한바 있다. 이 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능력인 이성(理性)이 전통적인 사회의 가치기준이나 이미 정형화된 가치체계를 비판적으로 성찰함 없이 어떤 특정 사회의 가치관을 대변하거나 그것을 옹호하는 형태로 퇴색되어서는 참된 합의에 도달할 수 없다는 말이다. 한국 사회에서 남북의 분단 이후 반공 이데올로기가 독재정권을 정당화하고, 보수적 세력들을 결집하는 도구로 활용된 점이나, 대기업들이 근대화 추진 과정에서 국가로부터 받은 특혜와 경제적 불균형의 폐단에도 불구하고 국가 경쟁력이라는 이름으로 비호된 점만 봐도 그렇다.
오늘날 사회적 합의의 바탕이 되는 가정과 학교, 종교 안에서도 참된 권위와 신뢰가 상실되다 보니 겪게 되는 어려움도 생기기 마련이다. 정당하고 올바로 생각하는 훈련 없이 주관적인 선입견이나 개인적인 기호에 따라 사회적 가치를 저마다의 기준으로 판단하다보니 서로 상반되는 가치들을 통합시켜줄 ‘공통감각(common sense)’ 혹은 ‘보편적 상식’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사회가 참된 삶의 길을 찾기 위해서는 서로가 의사소통을 하기 위한 ‘공통감각’을 성장시키고, 사회의 참된 권위에 복종할 줄 아는 지혜도 찾아야 한다. 본래 권위는 제도적 장치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나보다 생각하는 가치관이나 인식 능력이 우위에 있거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의 실천이 공감을 얻고 본받고 싶은 동경의 대상이 있을 때 인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사회적 합의의 길을 찾는 대화는 통상적으로 세 가지 기준을 만족시켜야 한다. 첫째는 그 대화를 주도하는 사람의 도덕적 권위가 구성원들로 하여금 인정받을 높아야 한다. 참된 권위는 그 권위를 요청하는 이들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삶에 뿌리를 둔 것이지 제도나 법률이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합의에 따른 정당한 권위를 인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합법적이지 못한 권위에 대항하는 것은 물론, 비록 합법적 권위라 해도 그것이 정당하게 요청되지 않는 한 양심의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다.
둘째는 합의를 찾으려는 구성원들의 성숙한 자기 이해가 필요하다. 찾고자 하는 합의가 사회의 공동선에 관련된 것이라면 그 대화에 참여하는 구성원들이 자신의 입장과 주관적 판단이 언제나 옳지 않을 수도 있고, 나와 다른 신념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는 개방적 태도로 대화에 임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가정에서 부부 간의 대화에서도, 부모와 자식 관계에서도, 사회의 다양한 공동체 안에서도 언제나 적용될 수 있는 원칙이다. 대화는 언제나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겠다는 전제에서 출발하지 않고, 자신의 입장이 수정 보완될 수 있다는 개방성 속에서만 참된 합의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도 자신의 주관적 신념이 절대적이 될 수 없다는 겸허한 도덕적, 인식적 태도야말로 사회적 합의를 이루는 기초에 속한다.
셋째는 도출하고자 하는 합의의 내용이 보편적 진리에 부합해야 한다. 우리 사회가 홍역처럼 앓고 있는 사회적 갈등은 일부 특권층을 위한 정책이나 보편적 윤리에 부합하지 않는 시대착오적 발상들이 권력을 지닌 사람들과 재력으로 무장된 기득권자들에 의해 왜곡되거나 강요될 때 발생하곤 했다. 가령 4대강 사업이나 새만금 간척공사, 미국산 소고기 파동과 국정원 선거 개입과 같은 사건들은 개발과 독점을 위한 이데올로기가 인간의 삶의 토대가 되는 생태계 파괴와 환경오염, 먹거리에 대한 권리와 인격적 자유가 왜곡되고 침해된 현장에서 발생해온 일련의 사건들이다.
교회가 신적 권위를 위임 받았다고 해서 이러한 사회적 합의구조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보편적 사랑의 참된 표징이자 도구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세상의 질서와 무관한 교회만의 독자적인 질서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교회의 내적 구조가 세상이 걸어야할 참된 길의 모형이 되어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최근 가톨릭교회의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더 이상 교회가 수직적 구조가 아닌 수평적 구조의 친교적 공동체 정신을 회복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 바 있다. 교회라고 해서 그 조직이나 운영, 제도적 장치들이 사회적 합의 방식과 무관하게 일방적일 수는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교회가 사도로부터 이어왔다고 해서 교회가 자신의 권위를 시대착오적 발상으로 요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간혹 사제라고 평신도들에게 납득할 수 없는 아집과 편견을 교회적 권위라고 내세우는 것은 잘못된 전근대적인 교회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미숙한 사제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다.
하지만 진리를 찾아가는 신앙의 길이 단순히 사회적 합의의 제도적 장치를 통해서만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진리를 향한 신앙적 합의는 모름지기 내가 믿고 있는 신앙의 조문들을 내용적으로 믿는 것(fides quae)에 그치지 않고, 그 믿음을 요구하는 하느님을 향해 내 삶을 정화하고, 질서를 세우며, 기쁨과 희망의 삶으로 고백하는 인격적 신앙 행위(fides qua)가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참된 믿음의 고백 없이 교회적 합의만을 도출할 때 교회는 냉담과 무관심의 홍역을 앓거나 교회 안에서 요구되는 참된 삶의 권위를 상실할 위험에 처할 수 있다.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루카 10, 25-37)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누가 내 이웃이냐’를 아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되어주었느냐’는 복음의 실천적 사랑의 실천이 중요함을 일깨워주셨다. 그래서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루카 10, 37)는 예수님의 말씀은 복음서 전체를 아우르는 가장 중요한 말씀이다. 우리가 어디로 가야할지 혼란스럽고 분명하지 않을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느 길이 정말 올바른 길인지 알려고만 하지 말고, 그 길이 올바르다고 생각하면 용감하게 발을 내딛는 결단을 하라.’고 말씀하실지 모른다.
우리 시대와 교회가 나가야할 길은 세상을 향한 감각을 갖고 그 안에서 육화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해명하며 세상의 다양한 표징들을 복음의 빛으로 해석(사목헌장 4항)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가야할 길의 목표는 분명하지만, 그 길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우리 자신에게 맡겨진 과제인지도 모르겠다.
이태리 아씨시의 중세의 향취가 느껴지는 길
프란치스코 성인이 걸은 이 길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봅니다.
첫댓글 신부님 글 잘 읽고 모셔갑니다.
글을 너무 잘 쓰십니다..ㅎ
탄단한 집 구조물 처럼 논리가 정연한
힘있는 글입니다~
신부님 논조 글들은 바로 댓글을 달 수가 없는게
글을 소화하고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기까지 저의 경우
두세번 꼼꼼히
읽는 작업이 필요하거든요~
누가 내 이웃이냐 가 아니라 누가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이제야 깨닫습니다~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은 우리모두의 몫~
글 감사드립니다~ 꾸벅^^
신부님 감사히 읽고 갑니다.
공통감각 = 정치감각 찾아가기.
하나, 인정받을 수 있는 도덕적 권위, 둘, 성숙한 자기이해, 셋, 보편적 진리에 부합한 사회적 합의
그것을 현실에서 살아내기! 우리도 교회도 사회구조들도...
최근 교황님의 행보에 놀라움의 감동을 합니다~~~
교황님의 수평적 변화,,,친교적인 한국 교회로 그듭 나기를,,그 마음이 아래로 아래로 따뜻히 전해지길 바래보며~~
좋으신 말씀에 행복한 시간입니다^^~!!
예전에 시장에서 '불신지옥'아저씨가 졸고있던 염주파는 분께 당신 지옥간다고 저주하는것을 보고 와이프하고 비난했던 기억이 납니다. 같은 예수믿는 사람 욕먹게 한다고요.
근데 솔찍히 또한편으로 불을 지르러오셨다는 말씀도 맘에 걸리고요, 종교적인 신념을 위해 생계를 돌보지않고 피켓들고 돌아다니는 아저씨가 혹시 계약 궤를 모시고 옷을 벗고 춤추는 다윗과 같은 마음이면 어떻하지? 주님 보시기에 제가 사울의 딸 미칼과 같은 모습이면 어떻하나? 하는 걱정이 됩니다. 제가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바가 신비스러운 주님의 뜻과 같을까 하는 걱정이지요. 주님 생각 저에게 보여주심 좋겠는데 미련한 제가 아직 눈치 못채고 있어요.
신부님,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