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011_01) 진리의 터가 무너졌을 때 <시편 11:1-7>
2014-03-13(목) 새벽 설교
다윗과 느헤미아
느헤미야는 바사 황제 아닥사스다의 술관원장이라는 높은 관직을 가지고 있었으나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져있다는 소식에 몹시 슬퍼했습니다. 그는 금식하고 기도한 후 왕의 허락을 얻어 예루살렘으로 와서 52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성벽 재건을 마쳤습니다. 이 일을 방해하려고 원수들은 스마야 선지자를 매수하여 느헤미야를 곤경에 빠뜨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원수들이 죽이러 올테니 성전 안으로 피하자는 스마야의 제안을 느헤미야는 일언지하 거절하였습니다. 나중에 느헤미야는 스마야가 매수당한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스마야가 감언이설로 유혹할 당시 느헤미야가 바른 판단을 하도록 도와준 말씀은 바로 시편 11편이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의 왕궁에 있을 때에 사울의 위협을 받았고 사울이 그를 죽이려고 할 때는 그 자리를 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친구들이 미리 도피하도록 권유할 때에 나는 여호와께 피할 뿐 산으로 피하지는 않는다고 믿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고백은 오늘날처럼 타락하고 진리의 토대가 무너진 시대에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길을 제시해 줍니다. 다윗처럼, 느헤미야처럼 우리는 결정적인 순간에 진리의 터 위에 서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산으로 도망하라는 권유(1~3절)
다윗의 친구들은 산으로 피하라고 권유합니다. 여기서 작은 새는 곤경에 처한 사람을 나타냅니다. 반면에 독수리는 전성시대를 누리는 사람을 뜻합니다.
1~3절을 바로 제대로 이해하려면 1절 끝의 ‘함은 어찌함인가’를 3절 끝에 붙여야 합니다. 그들은 터가 무너진 마당에 의인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고 하지만 다윗은 왜 그렇게 낙담과 포기를 권유하느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온 세상이 문제투성이고 진리의 터가 무너진 세상에서 의인이라고 해도 어떻게 해볼 방도가 있느냐는 친구들의 말은 현실을 제대로 본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달랐습니다. 이런 도전을 받은 다윗은 도리어 이렇게 반문합니다. “터가 무너졌다고 못할 일이 무엇인가?”
우리도 누구나 이런 유혹을 받습니다. “진리의 터전이 무너진 마당에 너 혼자서 뭘 해 볼 수 있다는 말이냐?” 그러나 이럴 때 우리는 다윗처럼 대답해야 합니다. “비록 진리의 터가 무너졌다 한들 못할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나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진리의 터전을 다시 새울 것이다.”
3. 의로우신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믿음(4~7절)
지구상 어디를 가도 태양이 우리 머리 위에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어디에 있은들 감찰하시지 못하실까요? 그 어떤 상황을 당한들 주께서 보호하시지 못하겠습니까? 그의 눈은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십니다. 우리가 뭔가를 집중해서 쳐다볼 때는 미간을 찌푸리죠. 4절의 안목이라는 말은 원문에서 눈꺼풀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눈꺼풀을 찌푸려 나를 집중해서 바라보신다면 세상의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5절에서 의인을 감찰하신다는 말은 시험하신다는 뜻입니다. 결국 악인의 위협은 하나님을 신뢰하게하기 위한 훈련과정입니다. 의인을 위한 훈련이 끝나면 위협하던 악인들의 용도는 폐기됩니다. 그들을 폐기하실 때 소돔 고모라에 내리셨던 불과 유황과 그리고 태우는 바람을 주십니다.(6절) 더 나아가서 이것은 지옥의 꺼지지 않는 불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악인과는 달리 여호와는 의인을 좋아하십니다. 그래서 의인들은 하나님의 얼굴의 뵙게 될 것입니다.(7절) 즉 천국에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 것입니다.
우리는 결정적인 순간에 느헤미야처럼 <시편 11:1>을 기억하여 하나님의 곧을 길로 걸어갑시다. 숫자 1이 세 번 들어간 이 구절을 기억하며 곧은길로 걸어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