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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퇴계와의 사제관계 간재는 그의 나이 18세 되던 명종 13년(1558) 가을에 그의 학구생활을 시작하였다. 그 때 청량산에 머물면서 퇴계의 제자 琴蘭秀에게서 『고문』을 배웠고, 다음해 봄에 琴公이 惺惺齋에 머물러 있을 때 찾아가서 한 달 동안 있었는데, 琴公이 늘 탄식하여 말하기를, “人性은 처음에 선하지 않음이 없으나 私慾에 빠져 본체가 선한 줄 모르니 탄식하지 않으랴”하며 『소학』을 읽도록 권하였다. 1) 琴公으로 인하여 퇴계 문하에 들어가 수업을 받기 시작하였는데 이 때가 그의 나이 19세로 명종 14년(1559)이었다. 간재가 처음으로 퇴계께 급문하였을 때 그 때까지 총각이었으므로 동문들이 그의 兒名을 부르자, 퇴계는 다른 제자들에게 그가 큰 인물이 될 것이므로 공경하라고 주의를 주기도 하였다. 이 때 퇴계는 그의 이름을 ‘德弘’으로 자를 ‘宏仲’으로 지어 주었으며, 또한 그의 이름 ‘德’자의 뜻을 풀이하여, ‘德’자는 ‘行’과 ‘直’과 ‘心’으로 이루어졌으니, ‘곧은 마음으로 행하라’는 뜻이라 설명하고 그 뜻을 체득하도록 타일렀다. 후에 퇴계는 그에게 『주역』 艮卦 彖辭에서 ‘그칠 때에 그치고 행할 때에 행함으로써 動靜에 때를 잃지 않는다’는 뜻인 ‘止’의 뜻을 취하여 ‘艮齋’라 호를 지어 주기도 하였다. 2) 물론 퇴계의 제자들 중에는, 간재 이외에도 李宗道의 아우의 처음 이름이 ‘遵道’였으나 퇴계가 이름을 바꾸라고 명하여 ‘善道’로 한 경우가 있고, 金生溟·琴應夾·琴應壎에게도 호를 지어 준 경우가 있다. 그렇지만 퇴계가 한 제자에게 이름·자·호의 셋 모두를 지어 준 경우는 많은 제자 중에서도 아마 간재가 유일한 것 같다. 여기서 우리는 퇴계가 간재에게 기울인 사랑과 기대가 남달랐던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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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정(영주 평은 소재)> | 간재가 일찍이 재질이 노둔함을 근심하니, 퇴계는 “공자의 문하에서 도를 전한 사람은 바로 자질이 노둔한 曾氏(증자)이다. 노둔함을 어찌 근심하겠는가? 다만 노둔하고 독실하지 못하면, 이것이 바로 걱정일 뿐이다.”라고 하면서 敎學詩 一絶을 지어 주었고, 주자가 여릉에 사는 제자와 친구에게 보냈언 편지를 손수 베껴서 간재에게 보내 면학을 권장하기도 하였다. 어느날 간재가 월천 조목과 함께 퇴계 선생을 모시고 앉아 있으니, 퇴계는 “자네들이 『주역』의 효상(爻象)의 뜻을 정미하게 살펴서 자못 소장의 이치를 깨달았으니 여러 벗들에게 구해 보아도 (자네들 만한 사람을) 쉽게 얻지는 못하였네. 부지런히 힘써서 나의 여망에 부응해 주게.” 3) 라고 말하면서, 가장 아끼던 두 高弟에게 은밀히 당부하고 격려하기도 하였다. 또 일찍이 스승의 명으로 천체운동을 측정하는 기구인 선기옥형(현재 도산서원 옥진각에 소장되어 있음)을 만들기도 하였다. 또 30세 때에 오천의 태조봉 남쪽 기슭에 오계정사를 창건하여 생도를 가르쳤는데, 그 堂名과 齋號는 모두 퇴계께 품정한 것이다. 간재는 퇴계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12년 동안 그의 문하를 떠나지 않고 측근에서 늘 스승을 모시고 독실히 학업에 정진하면서, 의문이 나면 질의하고 얻은 것은 반드시 기록으로 남겼다. 현재 『간재집』에 이와 관련된 많은 기록이 남아 있다. 간재가 퇴계께 비교적 많이 질의했던 책은 『사서』·『주역』·『가례』·『심경』·『주자서절요』 등이다. 이러한 학문적인 질의 문답을 통하여 간재와 퇴계 사이는 점점 더 깊은 사제관계가 맺어졌다. 퇴계가 임종시 간재에게 서적을 관리하라는 유명을 남긴 것을 4) 보아도 이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겠다. 간재는 장례 때에 매우 슬퍼서
伊洛心傳海外身 두 정자의 心法을 전수하신 동방 출신으로 丘林獨樂太平春 숲 속의 언덕에서 홀로 태평한 봄 즐기셨네. 躬行敬義光前哲 몸소 敬과 義를 실천하시어 전대의 선인들처럼 빛나셨고 頭揭明誠啓後人 남보다 먼저 明과 誠을 밝히시어 후인들을 깨우쳐 주셨네. 時雨化中群物茁 때맞추어 내린 비 씨앗을 싹틔워 많은 것을 자라게 하듯 仁風及處萬生新 어지신 풍화가 미치는 곳엔 만 가지 생명이 새로워졌는데, 那知一夕山齋冷 산재가 하룻밤 새 썰렁해 질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執紼今朝漏滿巾 상여줄 잡은 이 아침에 눈물이 손수건에 가득합니다. 5)
라는 만장을 지어, 스승인 퇴계를 추모하였다. 그는 스승의 사후에 ‘心喪三年’의 예를 지켰고, 「묘지서」·「묘지명」·『계산기선록』 등을 지었으며, 다른 제자들과 의논하여 상덕사를 건립하는 등 추모사업에도 전력하였다. 이러한 퇴계와 간재의 돈독한 사제관계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적지 않다. 2. 동문과의 교우관계 『간재집』에 나오는 56인과 타인의 문집에서 발견되는 새로운 인물 22인을 합하면 문헌상으로 간재가 접촉한 인물은 아래의 78인 정도이다.
金富弼·金富儀·金誠一·金明一·白見龍·朴允誠·李安道·金士元·具贊祿·金富倫·朴欐·南致利·金隆(道盛)·權好 文·權宇(伊溪)·李교·金希仲·尹興宗(採蓮)·柳淇·柳成龍·李國弼·姜浩源(松巖)·任屹·李希淸(?)·金圻·許篈·趙穆·裵三益·盧守愼·孫興禮(君立)·李叔樑·琴蘭秀·鄭士誠·柳雲龍·柳景文(仲淹)·柳應霖(?)·金仁甫(?)·權景龍(施伯)·琴應壎·李咸亨·李寂·琴輔·張謹·李潑(景涵)·金垓·金蓋國·張汝山直(?)·金玏·禹性傳·鄭士信·李詠道·金就礪·禹世臣·李三熹(?)·申之悌·閔應祺·趙振·李文樑·吳守盈·琴應夾·權春蘭·宋言愼·金澤龍·裵應褧·文緯世·朴愼·李宗仁(改諱 華春)·鄭琢·琴悌筍·洪胖·李純仁·李浩·洪可信·兪大脩·金瞻·許鏛·朴宜·權應時
위의 인물들 중에서 姜浩源(松巖)·任屹 등 22인은 퇴계 문인이 아니나, 나머지 56인은 모두 『도산급문제현록』에서 그 이름이 찾아지는 동문들이란 점에 큰 특징이 있다. 또 동문 56인 중에서 대부분은 지역적으로 예안·안동 및 그 인근에 거주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이를 통해 볼 때 간재는 퇴계의 주요문인들과는 폭넓은 교류를 하였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겠다. 간재는 퇴계의 사후 동문들과 함께 퇴계집의 교정이나 상덕사의 창건 등 스승추모에 힘을 쏟았다. 아울러 그의 나이 30대 무렵부터 주로 동문들과 강학 내지 왕복토론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특히 퇴계의 손자 안도와는 죽마고우로서 학문적으로나 인간적으로 아주 긴밀한 사이였고, 나아가 유운룡과 『역학계몽』을 강론하였고, 조목과 ‘未發已發’의 문제를 변론하였으며, 또한 권우와도 활발하게 서신을 통하여 학문적으로 왕복 토론한 것이 많다. 뿐만 아니라 금란수·남치리·정사성·김해·유성룡 등과 함께 강학하거나 서신을 주고받았다. 동학 趙振이 서울에서 내려와 함께 공부하다 병에 걸려 위독하게 되었을 때 부지런히 치료하여 병을 낳게 하기도 하였다. 간재가 종묘직장으로 재직시, 종 伊山이 종묘의 金銀寶器를 훔쳐내고 그 흔적을 없애기 위하여 종묘에 불을 놓은 사건으로 평은역에 유배되자 유성룡·김성일·우성전 등의 많은 동문들이 그를 위로하고 도와준 것 6)을 보아도 그가 동료간에 매우 신망이 두터웠음을 알 수 있다. 또 무엇보다도 동문간에 그의 학문적 위상을 짐작할 수 있는 자료들을 발견할 수 있다. 갈암 이현이이 찬한 「간재행장」에서
賁趾 先生 南致利義仲이 일찍이 공과 더불어 『역』 復卦를 논하다가 마침내 말하기를 “오늘 그대에게 무릎을 꿇었습니다”라 하였고, 松巢 權宇와 謙巖 柳雲龍公 또한 ‘그대에게 질의하여 의혹을 떨쳤다’는 말이 있다. 그가 선배 7)들에게 推重된 바가 이와 같았다. 8)
라고 한 것으로 보아 동료들간에 그가 학문적으로 推重되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겠다. 간재와 학문적으로 많이 교유한 사람은 조목과 권우인데, 그의 문집에는 이들 동문과 주고받은 자료들이 실려 있다. 간재가 죽자, 월천 조목은
常恨東西遠 동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항상 한스러웠는데 那知隔九泉 어찌 九泉과 격할 줄을 알았으리요 斯文今已矣 斯文(儒學)은 이제 끝났도다 回首涕漣漣 머리를 돌려보니 눈물만 흐르네 9)
라는 만사를 지어, 동학인 간재의 죽음을 몹시 슬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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