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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氏의 원조 영정을 모신
咸王閣.(그림 上) 咸傅霖의
遺墨.(그림 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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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릉 함씨 뿌리는 한 줄기
"우리 강릉 함씨의 시조는 함자 혁자, 함혁(咸赫) 할아버지입니다.”
춘천시 효자2동 약국 옆 2층 건물에 재춘 강릉 함씨 종친회 사무실이 있다고 해서 찾아가니 평소 안면 있는 함기주
선생이 손을 잡았다. 그분이 앉자마자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함씨의 본관을 강릉, 양근(양평)으로 구별한다는 자체도
별 의미없고, 시조 역시 한 할아버지 밑에서 자손이 뻗어 여러 갈래로 나뉘어졌기 때문에 중시조가 어떻고 하는 따위의
주장도 모두 낭설입니다. 그 점을 분명히 밝혀주세요, 최 선생.”
필자는 함기주 전 종친회장에게 대답 대신 볼펜으로 기록을 남긴 취재노트를 보여줬다. 종친회 사무실에는 가장 먼저
종친회장을 지낸 함재성 씨와 현재 종친회를 맡고 있는 함종학 씨도 함께 나와 있었다.
"시조 할아버지 함자 혁자, 함혁 어른이 중국 한나라에서
건너왔다는 동래설(東來說) 또는 귀화설(歸化說)은 조선시대
때 족보를 만들며 사대사상의 영향을 받아 그렇게 와전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함종학 종친회장은 문서를 내보이며 말을 이었다.
아득한 삼한시대 마한(馬韓)의 한 부족장이 한강을 중심으로 여러 부족이 소국(小國)을 형성할 때 용문산 서쪽(현재,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 7백 고지에 내성과 외성을 모두 갖춘 함왕성을 쌓고 부족국가를 세웠다고 했다.
"석성(石城)의 둘레가 무려 2만9천58척(약 8.7km)이나 된다는 것은 한두 사람이 역사를 한 것이 아니고 수많은 추종자들, 즉 백성들을 거느리고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따라서 우리 시조 함혁 어른은 부족장으로서 함왕(咸王)이라 추대받았을 터이지요.”
그는 52세손 함용익이 쓴 “함씨의 시조와 함왕성(咸王城)에 대한 고찰”이란 소고를 필자 앞에 내밀었다. 지금도
함왕이 축성했다는 함왕성(또는 함근성)의 윤곽이 용문산 산중턱에 남아있다고 한다. 요약하자면 강릉 함씨는 왕족의 자손이라는 주장이었다.
"함왕각 부근에 왕릉을 만들고 왕릉 옆에 영모비(永慕碑)를 세우려고 추진 중에 있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용문산 서편에 함왕성이 있었고 함왕봉 밑에 궁궐터가 발견되었다고 전하기 때문에 얼마 전에 용문산 기슭에다 유허비(遺墟碑)를 세웠고 양평군에서도 마침 군수 명의로 함왕성지(咸王城址)라는 표지석을 만들어줘서 얼마나 고맙던지요.”
여든이 훨씬 넘으셨는데도 함재성 전 종중회장의 음성은
흩어짐이 없었다.
■ 문중 번창 함규·함제 형제
드라마 “왕건”을 시청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신숭겸과 더불어 태조 왕건을 끝까지 옹립하여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해 개국공신으로 책록된 인물 중에
한 사람이 곧 함규(咸規)다. 그는 왕건의 뜻을 받들어 북진정책에도 크게 기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갑자보 세록 편에
보면 몽고란 때 대장군에 임명되어 적을 물리쳐 평정했다고
한다. 후손들이 적을 토평한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백봉령 정상에다 전승비를 세웠다. 벼슬이 평장사(지금의 부총리)에까지 오르니 문무를 겸한 명신이 아닐 수 없다.
"그 어른이 시조의 21세손이 됩니다. 사후에 조정에서 영후공(襄厚公)이란 시호를 내리셨습니다.”
본관지 양근(楊根)이 강릉으로 개관된 계기는 함규의 후손
함제(咸濟)가 강릉에 내려가 세거하면서이다. 함제는 강릉
최씨, 강릉 김씨와 함께 영동의 명문으로 기반을 닦아나갔다.
"중시조를 따진다면 아마 함자 제자, 함제 어른이 강릉에
세거했기 때문에 그렇게 대접을 받아야 하죠. 그러나 함씨의
뿌리는 하나, 함왕의 자손입니다. 그렇게 이해해주세요.”
"문헌기록을 보니, 6.25 한국전란 때 한 형제가 국방군과
인민군으로 나뉘듯이 한 분은 조선 개국공신이요 또 한 분은
고려의 마지막 왕조를 지킨 충절이신데, 부림 부열 두 형제
중에 누가 형이고 누가 아웁니까?”
화제가 무르익어가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세 분 종친회장들이 앞다퉈 말을 꺼내려 했다.
"저기 걸려있는 글씨가 부림 어른의 필체야.”
말머리를 먼저 잡은 사람은 함기주 전 종친회장이었다.
■ 부림(傅霖)은 개국공신, 아우 부열(傅說)은 '不事二君'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지고 신흥 사대부들이 득세하여 마침내 조선을 개국했다.
형 부림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창업의 개국공신 반열에 오르고 대사헌과 형조판서를 역임하는 등 승승장구한다.
"경북 영천에 있다는 조양각 현판이 부림 어른의 글씨지요. 시문으로 뛰어난 분이셨고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답니다.”
동생 부열은 고려 말에 예부상서(지금의 교육부장관)와 홍문관 박사(지금의 정신문화원장) 등을 지냈으나 조선이 개국하자 두문불출하고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켰다. 공양왕이 원주로 퇴출당하자 부열 어른은 은밀히 원주로 숨어들어 2년여 동안 선왕을 가까이에서 모셨고 다시 공양왕이 간성으로
유배되자 따라가 거기서 여생을 마쳤다고 문중에서 간행한
“공양왕 비사”의 기록은 전한다.
"이들 두 형제분들은 그러나 우애가 대단히 깊었습니다.
형 부림 어른이 없었다면 아마 동생 부열 어른은 비참한 죽임을 당했을걸요. 형이 늘 방패막이가 돼줘서 이성계 일파들에게 개죽음 당하지 않고 은둔하다가 지금의 고성군 간성읍
원정동 공양왕이 묻힌 바로 아래에 유택을 마련했지요. 죽어서도 충절과 의리를 지킨 만대의 충신입니다.”
"잠깐요, 방금 공양왕릉이 간성 어디라고 하셨죠? 지난 봄에 취재 차 삼척 근덕면 궁촌리에 있는 공양왕릉을 다녀왔었는데 뭔가 착오가 있는 건 아닙니까?”
필자가 손사래치며 세 분 종친들의 말을 가로막았다.
"의아해하는 게 당연하지요. 자초지종을 내 말씀드리리라.”
함종학 종친회장의 설명을 요약하면 이렇다.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을 간성에다 유배지를 배정하게 만든 것은 선왕을 추종하던 풍수학자와 지관들의 선견지명에 의한 은밀한 권유에서였다. 그들은 간성 땅을 왕권회복의 절호의 기회로 삼으려 했다. 금강산과 설악산의 정기가
고성산 아래 예국의 궁궐지대 부근 수타사(壽陀寺)에 있다고
믿었다. 이같은 사실이 이성계 일파에 알려지자 즉각 공양왕을 삼척 근덕면으로 유치시키고 삼엄한 경계령을 내렸다. 이윽고 태조3년 4월(1394) 지금의 궁촌리 고돌산 살해치 고개에서 공양왕 부자와 왕족들을 모조리 살해했다.
여기까지는 기록으로 전해지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함씨네 문중에서는 공양왕이 궁촌리에서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중추원부사 정남진과 형조의랑 함부림에 의해 공양왕이
궁촌리에서 피살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우리 문중은 아우 함부열이 형 함부림에게 간청을 넣어 교묘하게 공양왕을 빼돌리게 하고 왕족들만 비참한 최후를 마치게 했다고 봅니다.
허나, 부림 어른의 입장도 있고 또 조정의 뜻도 준엄해서 자객을 시켜 간성으로 피신한 공양왕을 시해할 수밖에 없었답니다."
"그래서 공양왕을 고성산 원정동에 모시고 부열 역시 왕의
무덤 아래 묻히게 되었군요.”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대화 도중에
또 불거진 사실 하나가 떠올랐다.
■ 7층석탑 남기고 수타사 홍천 동면으로 옮겨
"수타사는 그럼...?”
"공양왕 시해 직후 국운이 다하자 산의 정기가 뚝 끊어졌는지 절간 방벽에 빈대가 들끓기 시작했다더군요. 그래서 7층 석탑만 남기고 불상을 지금의 홍천 동면으로 옮겼대지요.”
"자, 이제 정리를 하시지요.”
함종학 종친회장이 시켜놓은 점심식사가 식는다며 재촉했다. 필자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양근을 본관지로 삼은 시조의 34세손 부열의 죽계공파(竹溪公派)는 자연 위축될 수밖에 없었고 상대적으로 본관지를 강릉으로 하는 부림의 정평공파(定平公派 또는 東原君派)는 조선시대에 승승장구해서 걸출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했지요.”
부림, 부열의 6촌인 부실(傅實; 예판공파)도 일찌감치 강릉에 터를 잡고 융성했다. 그의 후손 함헌(咸軒; 칠봉공파)은
우리나라에 공자의 영정을 처음 들여온 사람이다. 중종 때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오자도가 그린 공자의 초상을
강릉으로 가져와 오봉서원을 세웠다. 만년에 공자의 영정을
모신 오봉서원에서 후진 교육에 힘썼다.
현대에 와서 가문을 빛낸 후손들로는 우선 부통령을 지낸
함태영, 아웅산 테러 사건 때 아깝게 순직한 함병춘 전 청와대비서실장, 함병선 전 2군단장, 함종환 전 강원도지사, 함석재 함승희 국회의원, 소설가 함대훈, 보스턴의 영웅 함기룡 선수, 한지 화가로 유명한 함섭, 함형구 고성군수 등이 있다.
△도움말 주신 분 : 함재성 전 정평공파 종중회장. 함기주
전 재춘 강릉 함씨 종친회장. 함종학 현 재춘 강릉 함씨 종친회장. 함종득 기획실장.
글=소설가/崔鍾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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