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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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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문해(權文海) , 1534년 ~ 1591년 |
본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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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 |
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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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원(灝元) |
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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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간(草澗) |
출생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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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군 용문면 |
출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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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군 용문면 |
분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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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군 용문면 내지리 용문산 |
입사경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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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2년 진사.1560년 문과에 급제. |
내관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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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간, 집의, 동부승지, 좌부승지 |
외관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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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榮州)군수, 안동부사, 청주목사, 공주목사 | | |
권문해(權文海, 1534~1591)는 용문면 죽림리 ‘대수마을’ 출신이다. 본관은 예천, 자는 호원(灝元), 호는 초간(草澗)이다. 권지(權祉)의 아들로 퇴계 이황에게서 배웠다.
1552년(명종 7)에 진사가 되고, 1560년(명종 15)에 문과에 급제하여 직강, 1570년 영주군수, 1572년 정언, 1573년 안동부사, 1575년 청주목사, 1580년 공주목사, 1582년 사성, 1591년 사간, 집의, 동부승지, 좌부승지에 이르는 사이 당쟁에 휘말리기도 하였으나 항상 청렴과 정직을 신조로 삼았다. 벼슬 수십 년에 충성을 다하고 멸사봉공하였으며, 불의 앞에서는 조금의 굽힘이 없었고, 집안에서는 효도와 우애를 숭상하였다. 학문을 열심히 하여 통달했으며 마을 뒤쪽의 초간수석(草澗水石)을 사랑하여 1582년(선조 15)에 초간정사(草澗精舍)를 창건하였다.
저서로는 수천 년 이래 모든 책을 참고하여 단군부터 당시까지의 모든 역사적 사실, 인물, 지리, 문학, 예술 등을 총망라하여 이것을 운자에 의하여 저술한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20권을 내었다. 이는 일종의 백과사전으로 개인 저서로는 양이나 질에서 우수한 것으로 임진왜란 이전의 사실을 아는 데 좋은 자료다.
또 보물 제879호로 지정된 『선조일록(先祖日錄, 1580~1584)』, 『초간일기(草澗日記, 1580~1590)』, 『신묘일기(辛卯日記, 1590)』 등 34권의 친필 일기를 남겼다. 친필 일기는 권문해의 개인 생활을 비교적 상세히 기술하여 당시 사대부의 생활상을 알 수 있고, 지방관을 지내면서 직장 생활을 통한 여러 문제를 다루어 조정에서 일어난 사건과 당쟁에 관련된 인물뿐 아니라 정치•국방•사회•교육•문화•지리•풍속 등 전반을 알 수 있다.
이는 임진왜란 이후에 나타난 복고운동과 경세주의의 산문 문학의 선구적 작품으로서 주로 쉽고, 따뜻한 문장을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권문해를 실학의 선구자라고 한다. 무덤은 용문면 내지리의 용문산에 있고, 봉산서원(鳳山書院)과 죽림사당(竹林祠堂)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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