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있는 문헌에 보건대 조선 인조대왕 24년 병술년에 의천대사가 중건하고 헌종대왕 12년 병오년에 용운화상이 3차 중건하고 고종황제 13년 병자년에 해령화상이 4차 중건하였다고 되어있다. 그러나 1950년 민족의 비극인 6 25사변이 발발하자 산중에 남아있던 공비들의 방화로 사원이 전소되니 내원사는 또 다시 빈터만 남는 비운을 맞았다.
1955년 9월 비구니 정수옥스님이 주지로 취임하여서 비구니들을 위한 선원을 짓기로 서원을 세웠다. 그리고, 1957년 2월 18일에 전후의 어려움 가운데에 중창불사를 시작하였고 1959년 3월 29일에 선방인 선해일륜(禪海一輪)을 낙성하고 동국제일선원을 개원하게 되었다. 기나긴 세월의 풍화작용속에 대둔사, 상 중의 내원암과 89개의 암자는 조선중엽쯤 이미 거의 다 폐허가 되고 없었으니, 마침내 적막한 천년사지에 새로이 향화를 받드는 감회어린 순간이었다. 수덕사 견성암에 이어 남방에서도 비구니들이 참선수행토록 그 기틀을 다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성우, 혜운, 종현, 자광, 향엄, 혜등, 승혜스님등이 차례로 주지를 역임하면서 옛 하내원인 지금의 내원사는 선나원, 정려헌, 죽림원, 원화당, 간월당, 심우당, 산령각, 일주문등 13동에 달하는 불사를 계속하여 비구니 선찰로써 사격을 갖추어 나갔다. ( 현재는 지형스님이 주지 소임을 살고 계신다. ) 또한, 산내 암자로는 금강대, 금봉암, 노전암, 비로암, 성불암, 안적암, 익성암, 조계암 등이 남아 있다.
그 옛날 천명의 성인이 배출되었던 이 산중은 오늘날 부처님의 혜명을 잇고자 각고의 정진을 아끼지 않는 무수한 눈 푸른 납자들의 깃드는 바가 되었으며.신심있는 선남 선녀들의 참배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 아름다운 계곡에 내눈이 계곡에 물소리는 약하지만 대신 딱따구리가
똑또르르하고 나무 쪼으는 소리. 앙상한 나무가지. 바람소리가 내원사계곡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일요일덴 추운관계로 나의 낭만은 최고로 고조 ▲
★장승은 길가는 나그네에게 마을.절. 위치를 가장먼저 알려주는 길벗이다★
아름다운 돌비석에 쓰여있는 글귀을 보니 나 살아온길을 뒤 돌아보게 한다
욕심을 내려놓자.욕심속에 자신을 망친다는 것을.생을 다 한후 과연 가지고
가는 것은 무엇이 있는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집착.욕심에
살았는지.내려놓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자
내원사 창건주는 원효(元曉 )<617-686>
신라말기에 고승. 속성은 설씨. 아명은 서당(誓幢)
삼국유사에 의하면 어머니가 유성이 품속에서 드는 꿈을 꾸고 스님을 잉태하였으며.만삭
이 된 몸으로 압량군의 남불지촌 율곡 마을을 지나다가 사라수 아래에 이르러 낳았는데
그때 오색구름이 땅을 덮었다고 한다
29세에 출가하여 황룡사에 들어 갈때 집을 희사하여 초개사를 세우게 했으며. 사라수 엎
에도 절을 세워 사라사라고 하였다
■동국제일선원 천성산 내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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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구니 화산당 수옥스님의 속성은 정씨요 본관는 동래이다. 구한말 순종 임인년 (1902년) 11월 12일 경상남도 진해시 자은동에서 아버지 정태익 어머니 어씨의 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였으며 혼기가 닥쳐서도 결혼할 생각이 없이 수도생활을 그리워 하였다. 그런 마음이 점차 굳어지자 16세 되던 해에 부모님 모르게 집을 나와서 해인사를 찾아갔다. 그러나, 그 곳은 비구스님들의 수행처로 받아주지 않자 수덕사 견성암으로 찾아갔다. 그리하여 17세 되던 해에 비구니 법희선사를 은사로 비구 청월선사를 계사로 사미니계를 받고 스님이 되었다. 19세 되던 해에 불교 교학에 공부할 뜻을 두고 불교 전문 강원을 찾아 해인사에서 고경화상의 가르침 아래에 2년간 사집과를 수료하였다. 그 다음 서울에 올라가서 서대문 응선암에서 대은강사를 모시고 사교과와 대교과를 28세 봄에 수료하였다. 이렇게 불교 전문 학과를 이수하고 그 해 4월 해인사에서 용성화상을 계사로 비구니계와 보살계를 받았다. 그 후 선방에 입방하여 수선안거(修禪安居)를 5년간 하였다. 1934년 33세 되던 해 3월에는 해외 유학에 뜻을 두고 일본으로 건너가 경도시(京都市) 묘심사의 불교종립학교인 미농니중학림(美濃尼衆學林)에 들어가서 3년간 전문과정을 수료하였다. 36세 되던 해 3월에 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와서 상주 남장사의 불교전문강원의 강사로 취임하여 3년간 학인을 가르쳤다. 39세 되던 해 10월 다시 견성암으로 돌아와서 7년간 참선수행하였다. 46세 되던 해 3월 서울 동대문구 불교전문강원의 강사로 취임하여 3년간 후진양성에 정진하였다. 50세 되던 해 7월 충남 예산 보덕사(報德寺) 주지에 취임하였고 1955년 54세 되던 해 3월 15일 경남 양산 천성산 내원사 주지로 취임하였다. 동년 4월에는 조계종 종회의원으로 선출되어 이 후 4대를 역임하였다.
동국제일선원 천성산 내원사 선방 이곳에는 비구님 스님 정진기도 하는 곳이다
나에게는 편안함이 내 자신속으로 전해진다 모든이에게 마음을 주는곳 관세음 보살
얼마나 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쉬느냐가 중요하다
당신이 늘 피곤한 이유는 휴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휴식의 방법을 틀려서 이다 진정한 휴식은 회복하게 해주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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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불사가 3년 공사가 마무리 되어 지금 단청만 남기고 있다 옛 대웅전은 스님들의 기도 도량인 선나원 있었다 내원사 스님들의 오랜원력과 좋은 인연들이
만나서 법당에 부처님을 모시게 되었다
불자들에게 차 공양을 보살님이 나 에게 차을 권했다 차에서 나는 향기가 너무 좋
았다 나는 이곳에 와서 많은것을 배우고 간다 내 자신을 다시 볼수 있다는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