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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문화원에서 발간한 책자에 애국지사 춘고 이인식 선생에 관한 글이 게재되어 여러 동문이 볼 수 있도록 까페에 옮겼습니다. 훌륭하신 선생님의 뜻이 길이 빛나기를 기원합니다. |
애국지사 춘고 이인식선생과 항일운동 (春皐 李仁植) 창해 이 영 룡 (滄海 李 營 龍) 군산문화원 감사
춘고 이인식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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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 리 말
일본 제국주의는 소위 을사보호조약(1905년)으로 한국은 독립국가로서의 모든 권한이 박탈되고 일제의 억압체제의 확립과 식민지화로의 방향은 결정적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일제의 강점 36년사를 통해서 우리의 내국적 투쟁의 저항사(抵抗史)를 장식했던 독립운동의 별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그 형태를 분류할 수 있겠으나 그 가운데서 자기의 사재를 털어가면서까지 끈질긴 저항을 벌인 애국지사는 그리 흔하지 않다. 전북 옥구군 임피면 출신의 애국지사 춘고 이인식 선생은 태어나면서부터 가졌던 선천적 부(富)를 오직 독립운동에 바쳤던 당대에 드물게 보는 애국지사이시다. 임피 고을 만석부자의 아들이기도 했던 이인식은 부자의 아들이 교만과 안일에 빠질 수 있겠으나 여기에는 아예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보성고보(普成高普)에 재학하면서 이미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민족적 분통을 평생의 독립운동으로 그 원한을 풀겠다고 결의하였던 것이다.
2. 출생과 당시의 사회상
애국지사 춘고 이인식 선생은 1901년 10월 22일 전북 옥구군 임피면 읍내리에서 당시 옥구지방의 거부(巨富) 이태하씨의 3남 2녀중 막내로 태어났으며 유독 총명하여 부모와 친지 그리고 고을의 여러 어른들로부터 사랑을 독차지 하였던 것이다. 당시의 사회상은 동년 7월 대한해(大旱害)가 계속되어 흉년으로 인한 백성들의 생활이 곤란하므로 조정(朝廷)에서는 방곡령(防穀令)을 반포하였다. 방곡령은 1889년 (이조 고종26)이후 2,3차 행한바 있는 미곡 수출 금지령이다. 이조 고종때는 농민들의 부담이 많아져서 5,6두락(斗落)의 토지에서 4섬 이상의 조세를 바쳐야 되는데다 관리들의 수탈이 날로 극심하여져서 농민들의 생활은 매우 곤란하였다. |
특히 일본 상인들은 물물교환에서 벗어나지 못한 농촌사회에 침투하여 갖은 수단으로 양곡을 매입하여 갔으므로 흉년을 당하면 양곡의 부족을 해결할 방책이 없게 되었다. 더구나 1888년(고종25)부터 큰 흉년을 만나자 각지에서는 폭동이 연달아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함경도 관찰사 조병식은 1889년 9월에 원산항을 통하여 해외로 수출되는 콩의 유출을 금지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일본 상인들은 큰 타격을 받았다.
3. 애국지사 춘고 이인식 선생의 활약상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말을 맞아 윌슨 미국대통령이 제창한 민족자결원칙이 세계만방에 울려 퍼지고 약소민족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자 조국의 독립을 쟁취할 뜻이 고조되어 전국 학생대표들과 민족 대표급 인사들과의 미국영사관 연락임무를 맡는 등 3.1운동 거사 때부터 참가하였다. 1919년 2월28일 서울 정동교회 이필주 목사댁에서 3.1독립운동 실행에 관한 숙의와 거사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백절불굴의 의지로 정진할 것을 결의하였다. 1919년 3월1일 파고다공원에서 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집결하고 태하관에서 민족대표 33인의 3.1독립선언문 발표와 때를 같이하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였으며 시위 군중들을 미국 영사관 쪽으로 유도하고 독립선언문 살포 등 실천적 행동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3월5일 서울 종로 송현동 62번지 (안국동 로타리 백상기념관 앞) 이인식선생의 자택에서 보성고(普成高) 유학생 중에서 각 전문대 대표 및 각 고보생 대표 63명이 그간의 투쟁내용의 평가와 사후대책 등 발전적 토의를 하였고 3.1독립운동과 관련된 학생을 중심으로 체포, 구속되어 4개월간의 예심 끝에 10개월의 형을 받아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었다. 상해 임시정부에 군자금 8천원 헌납은 그가 10개월간 복역을 마치고 1920년 출옥과 함께 그의 모든 재산을 매각하여 정리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이인식의 제2 저항사(低抗史)를 장식하는 것이다. |
이처럼 찬연했던 업적은 그가 막대한 자금을 가지고 만주를 거쳐 중국에 망명하고 거기에서 상해임시정부 요원들의 군자금으로 내놓았다는 것이다. 공식으로는 상해임시정부 헌금액이 8천원으로 되어있으나 이인식 개인에 의해 독립운동 동지들에게 뿌려진 돈은 그 액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다는 것이 그의 만석(萬石)의 재산이 독립운동에 쓰여 졌다는 것만으로 웅변되고 있는 것이다. 실로 한 독립운동가로서의 명성뿐 아니라 이렇듯 막대한 독립자금까지 내놓을 수 있었던 이인식의 저항사는 한말로 말해서 역사가 기록해야할 가장 위대한 독립운동가로서의 면모를 충분히 엿보게 하는 것이다. 1823년 일본 동양대학 철학과에 입학하여 재일본(在日本) 한국인 학생 항일 결사의 일원으로 금우회(錦友會)를 조직하고 월보(月報)등을 발간하면서 항일운동 거사를 도모하다가 일경에 발각되어 일부 체포됨으로써 그 조직이 와해되어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26년 6.10만세 운동 당시에는 국내에 잠입하여 거사활동 정보수집, 군자금 조달 등 국내외에서 암약하였다. 중국의 상해 임시정부 요인들과 독립투사로서의 활동을 하면서 암울했던 민족의 수난기에 소용돌이치던 역사의 한복판에서 살신성인 정신으로 질주하던 격랑의 세월을 만주벌판에서 풍한 노숙을 마다하지 않고 오직 조국광복을 위하여 젊음을 바쳐 그렇게도 염원했던 조국 광복을 맞아 환국하였건만 저마다 권력쟁취에 혼란스럽던 조국의 모습을 개탄하면서 그들과 부화뇌동(附和雷同)하지 않고 고향의 영재육성을 위해 결심하였다.
육영사업 1945년 해방과 함께 귀국한 그는 그토록 훌륭한 독립유공을 쌓았으면서도 그 어떤 논공이 기다리기에 앞서 고향발전을 위해서 전북 옥구군 임피면 소재지에 임피중학교를 설립하고 스스로 육영사업에 전념하였던 것이다. |
1953년 동교 제2대 교장으로 부임하시어 오직 교육입국의 의지로 어려운 여건임에도 임피, 서수, 나포, 오산, 함라, 웅포 등지를 자전거로 찾아다니면서 배움에 굶주린 소년 소녀들을 위해 배움의 길로 인도하셨고, 오늘날의 국가 간성인 4성장군 육군대장 등 유능한 공직자, 법조인, 학자, 기술사, 전도가 양양한 사업가 등 각계각층의 많은 인재를 배출하셨고 독립운동가로서의 시대의 선구자요 또한 헌신적 교육자로써 민족의 스승으로 추앙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4. 일본의 한국 침략상
일본의 한국침략실상은 삼국시대 이후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는 동안에 왜구의 침입으로 괴로움을 당했고 조선 중기에는 임진왜란으로 국토를 황폐화시켰으며, 조선 말기에는 열강과 더불어 침략의 마수를 뻗치기 시작하였다. 곧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양자간의 통상교섭이 잘 이루어지지 않던중 운양호사건을 조작하여 강제로 병자수호(강화도조약, 또는 한일수호조약이라고도함)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열국과도 수교하게 되었다. 이로써 열국은 한반도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고 그 기회를 노리게 되었다.
5. 독립운동의 배경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은 19세기 후반인 개국직후부터 시작된 것이다. 개국과 더불어 국내에서는 개화파, 수구파의 대립 및 국제적으로는 청국과 일본의 세력경쟁이라는 새로운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와 같은 청일간의 각축은 제3자인 러시아의 세력을 끌어들이고 말았다. 이러한 외세에 부딪혀 1894년(고종11년)에 일어난 동학혁명은 청일전쟁을 유발하게 하였고 이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세력은 우리나라 침략의 전초공작으로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또한 청일전쟁에서 자신을 얻은 일본은 러시아와도 전쟁을 일으켜 승리하자 우리나라에 대하여 더욱 강압적으로 침략정책을 수행해 갔다. |
한일 무장 투쟁은 1930년대 이후 민족해방운동에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보이며 항일민족 해방운동의 새로운 지평선을 열어나간 것은 무상투쟁의 발전이었다. 상비적 무장 군대에 의한 무장투쟁 노선은 조선민중의 한일민족 해방운동을 보다 높은 단계로 발전시켜 투쟁의 종국적인 승리를 촉진하는 노선이었다. 무장투쟁의 경험은 의병전쟁이나 1910. 1920년대 독립군의 활동을 통해 어느 정도 축적되어 있었다. 1905년에는 고종 및 정부의 고위 관리들을 협박 매수하여 제2의 조약을 맺었는데 이것이 소위 을사조약이다. 이 조약에 의하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였고 일본은 영일(英.日)동맹조약 등에 의하여 영국, 미국 등을 비롯한 모든 외국의 외교관을 철수시키고 이 조약에 의해 한국에 통감부를 두고 외교권은 물론 일체의 행정권까지 관여하였다.
6. 한일합방
1910년 8월 일본의 강압으로 체결된 한일합방 조약에 의해 한국의 통치권을 일본이 빼앗은 것을 말한다. 1894년 일본은 강화조약에 의하여 한국과 통상을 재개한 후 끈질기게 한국과 접촉하였다. 그동안 국내에서는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으로 인한 배상금 지급으로 국가 재정은 극도의 궁핍을 보게 되었다. 이와같은 체제의 침략이 날로 심할 때 이에 대한 반발로 동학혁명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청일양국은 한국에서 충돌하게 되어 청일전쟁이 발발하였다. 청국세력을 한국에서 축출한 일본은 러시아와 부딪치게 되었다. 남하하는 러시아의 세력을 막기 위하여 1902년 노일전쟁이 일어나 일본의 승리로 돌아가자 한국은 일본세력의 독무대가 되고 말았다. 1905년에는 고종 및 정부의 고관들을 협박 매수하여 제2차의 조약을 맺었는데 이것이 소위 을사조약이다. 이 조약에 의해 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하여 일본은 영일동맹 포오츠머드(portsmouth)조약 등에 의하여 영국 미국을 비롯한 모든 외교기관을 철수시켰다. 이 조약에 의해 한국에 통감부를 두고 외교권은 물론 일체의 행정권까지 관여하였으며 |
1907년 7월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 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여 한국의 입장을 호소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일본은 이것을 계기로 고종황제를 양위시키는 동시에 이완용 내각과 제3차의 새로운 협약을 맺고 사법권마저 빼앗고 군대까지 해산시켰다. 군대 해산의 반발로 국내에서는 반일 사상이 높아져 각처에서 의병들이 봉기하였다. 1909년 10월에는 초대 통감 이등박문이 안중근에게 사살되었다.
7. 3.1 운동
1919년 3월 1일을 기하여 일어난 거족적인 민족독립운동을 일명 기미독립운동이라고도 한다.
가. 원인 한일합방 후 일본의 침략에 항거하는 의병 열사들이 각지에서 일어나 독립운동에 나서자 일본의 조선총독부는 무단정치를 시도하여 민족적 지도세력과 한국 방방곡곡의 유지들을 말살했다. 봉건제도하에서 파경의 경지를 헤매던 한국의 경제는 한걸음 앞선 일본의 자본주의적인 침략세력 앞에는 어쩔 수가 없었다. 선각자들은 민족적인 경제발전을 기할수 없음을 알고 개별적으로나마 경제이론과 기술을 도입하여 경제건설에 착안하였지만 일본의 정치를 배경으로 한 경제탄압에 굴복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러한 탄압에 의하여 싹트기 시작한 민족적인 자각은 때마침 제1차세계대전의 대세가 결정될 무렵인 1918년 1월 미국대통령 월슨이 제찬한 민족자결주의로 한국 백성들의 민족적인 독립의식이 높이 앙양되었다. 이리하여 조직적인 정치운동이 시작되었는데 파리강화 회의에서 우리나라의 독립을 호소하게 하고 미국과 연해주 지방에서 활약하였다. 일본 도쿄유학생들의 독립선언사건은 국내 인사들에게 결정적인 자극을 주었다. |
나. 역사적 의의(意義) 비록 3.1운동은 주권회복이라는 궁극적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하였다 할지라도 그 의의는 실로 컸던 것이다. 이 운동으로 인하여 우리 민족은 그 전통적 주체성과 독립의 의사를 다시금 재인식케 되었음은 물론, 전 세계에 선양함으로써 세계 각국인으로 하여금 한국 민족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다. 종전까지만 해도 일제의 허위선전으로 인하여 한국인을 무기력한 민족으로만 보아오던 세계 각국인에게는 이 3.1운동이 실로 경이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더한층 충격을 받은 것은 제국주의 일본이었다. 한국민족을 무시하며 오직 무력으로 강압해야만 통치할 수 있다고 믿었던 일제는 이제 그 무단정치를 철회하고 보다 고차원적인 통치방법으로 전환시키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하여 새로 내세운것이 소위 문화정치라는 일종의 회유정책이었던 것이다. 한편 우리 민족에게도 이 3.1운동은 새로운 전환점을 안겨다 주었다. 새로운 근대사상의 대두와 조직적이고 합리적인 민족운동의 전개가 그것이었다.
8. 임시정부(1919-1945)
원명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이다. 1919년 3.1운동 후 조국의 광복을 위해 임시로 중국 상해에서 조직 수립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월슨 미국대통령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에 힘을 얻어 1919년 3월 1일 거족적으로 독립만세를 부르는 한편, 일본 통치에 조직적으로 항거하는 기관의 필요성을 느낀 애국지사들은 각처에서 상해로 집결하였다. 이들은 1919년 4월 11일 상해에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에 합의하여 프랑스 조계(祖界) 보창로(寶昌路)에 기관을 두고 임시의정원을 구성, 각도 대의원 30명이 회합하여 임시헌장 10개조를 채택 발표하고, 4월 13일에 임시정부 조직 관계를 선포하였다. • 1932년 5월 임시정부는 일본의 탄압을 피해 절강성 한주로 • 1937년 간소성 진강으로 옮겼다가 동년 11월 중국정부를 따라 중경으로 옮겨 장개석과 협력하여 일본에 항쟁하였으며 |
• 1940년 건국강령 3장을 발표하여 광복군을 대폭 증가하였다.
• 1941년 이후 임시정부는 여러 독립단체를 통합하고 • 1944년에는 광복군을 버마 전선에 참전시켰다. •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자 11월 29일 중요간부가 입국하였으나 광복후 국내의 혼란으로 임시정부의 정책은 계승되지 못하고 •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9. 항일독립운동
일본군국주의의 발악적인 폭정가운데에서도 우리 민족은 굴하지 않고 항일 독립전쟁을 과감하게 전개하였다. 3.1운동의 위대한 교훈과 전통을 이어받아 국내에서는 의사(義士) 열사(烈士)들에 의해 일제요인의 암살기도사건, 침략기관의 폭파사건등이 연달아 일어나 침략자의 간담을 서늘하게하고 또 민중들의 항일 독립투쟁도 성장하였던 것이다. 1926년의 6.10만세 사건 1927년의 신간회의 조직과 그 후의 활약 1929년의 광주학생 사건 등이 일어났다. 이 가운데에서도 광주의 한일 학생간의 충돌에서 발생한 광주학생사건은 1930년까지 국내 각지에 파급되어 시위운동에 참가한 학교가 194교, 참가 학생수는 54,000명에 달하였다. 이는 3.1운동 후 최대의 민족 항쟁이었다.
10.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심
3.1독립만세운동과 관련하여 활동하던 중 일경에 의해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4개월간의 예심 끝에 10개월의 징역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기도 하였다. 옥중에 투옥되어 있는 동안 수많은 독립투사들을 만나게 되었으며 해외에서의 활동상황을 상세히 알게 되었고 독립운동 자금의 필요성과 제2의 항일운동에 투신할 것을 굳게 다짐하게 되었다.
11. 망명 생활
1925년 재일본 학생 항일 결사대의 일원으로 항일 운동을 하다가 일경에 발각되어 조직이 와해될 때 일부 동지들과 중국으로 밀항 탈출하여 망명생활이 시작되었다. 주로 동만주 지역에서 항일운동을 하였으며 임시정부요인과 연락을 하고, 국내 잠입하여 정보의 수집 자금조달 등으로 활약하였다. 당시의 사회상은 국내에서는 통의부(統義府)등이 만주의 독립운동단체와 합동하여 정의부(正義府)를 조직하였고 중국은 3월에 손 문(孫 文) 이 사망하여 5.30 사건의 발생으로 광동(廣東)정부를 수립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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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서 거 가. 1963년 3월 25일 향년 63세로 전라북도 교육위원으로 재직중 별세하셨으며 전라북도 사회장으로 장례의식을 거행하였다. 그 후 1974년 10월 17일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151호로 안정되었다.
나. 조사(弔辭) 나는 오늘 이곳 국립묘지에 옮겨 모시는 독립운동 선렬들의 영령 앞에 다시금 곡하며 조상하는 말씀을 올리옵니다. 세상에 원통한 죽음이란 말이 있지만, 우리들 독립운동 선렬들의 죽음같이 원통한 죽음이 도 어디 있을 것입니까 선렬들이 어지 어버이를 모실 줄 몰라 어버이를 돌보지 않았으며, 처자를 사랑할 줄 몰라 처자를 버렸겠습니까. 그리고 또 어찌 자기 자신의 안락과 영화를 누릴 줄 몰라 자기 몸을 풍우 속에 던져, 스스로 고난과 죽음의 길을 택했겠습니까. 그것은 어버이보다 더 존엄한 것, 처자보다도 더 귀중한 것, 자기 자신의 생명보다 더 보배로운 것, 다만 한 가지 그것 때문에 이 세상 모든 것을 오직 그것 때문에 아낌없이 던져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겨레요 나라입니다. 그러나 그 일이 어찌 사람마다 능히 할 수 있는 일이옵니까 민족의 의기와 정열과 양심과 피가 끓는 사람만이 능히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선렬들이야말로 의기와 정열과 양심과 피를 가졌던 참인간 이었습니다. 참한국인 이었습니다. 우리들의 은인이었습니다. 우리들의 스승이었습니다. 선렬들은 짧은 일생을 영원한 조국에 바쳤습니다. 그래서 몸소 우리들이 가야할 길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민족의 노선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들의 가사와 예배를 받으시기 족하옵니다. 그러므로 선렬들은 결코 한 마을이나 한 고을의 인물들이 아닙니다. 또 어떤 가족속의 인물만도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나라의 인물이십니다. 큰 인물이십니다. 우리들의 숭앙을 받으시는 국사들 이십니다. |
그러기에 선렬들이 각각 인연 있는 자기 고장에 뼈를 묻는 것도 좋습니다마는 실상은 만인이 참배하고 제가 받들 수 있는 이 곳 국립묘지에 옮겨 모시는 것이 보다 더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나라에는 천장하는 풍습이 있습니다마는 옛날의 그것은 부질없이 풍수지리의 미신을 따라다니며 도리어 조상의 유해를 괴롭게 해드리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선렬들의 유해를 여기에 옮겨모시는 까닭은 아무것보다 선렬들의 묘소에 흙이 무너져도 보탤이 없고 풀이 우거져도 제초할 이 없이 무심한 비바람 속에 내버려두기란 너무도 송구스러워 영구히 안전한 곳으로 모셔오자는 정성에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기 선렬들의 유해를 모시고 보매 우리 후생들의 선렬들에게 대한 죄송스러움이 만분의 하나쯤이라도 덜어지는 것 같아 마음이 가벼워짐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들어 바라보오매 선렬들의 늘름하고 강직하고 엄숙하신 모습이 너무도 역력히 나타나시옵니다. 엎디어 이마 조아려 감사와 예배를 바치옵니다.
더욱이 피로써 맹서짓고 원하시던 조국광복이 이루어진 오늘입니다. 그날에 원통하여 참아 감지 못했던 두 눈을 이제는 꼭 감으시고 오늘따라 들국화 향기 그윽한 조국 땅 포근한 흙 속에 미소 지으며 편안히 쉬시옵소서. 그리고 우리로서는 아직도 한 고비 더 남은 통일과업을 위하여 맹서코 우리 힘으로 이루고야 말려하오니 생전에 나라사랑하던 그 지성 그 힘으로 우리들을 이끌어 주시옵소서. 나라의힘이 되어 주시옵소서.
1974년 10월 17일
독립운동자 편찬위원회 위원장 이 은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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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포상:1963. 3.1. 건국공로훈장 국민장을 받으심
라. 송공 시비 (頌功詩碑)
마. 동상 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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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치:전북 군산시 월명공원 동편 정상 • 제막일자:2005. 10. 1. • 규 격:좌대:황등석 통돌 1m 20cm의 4면 • 동 상:구리로 제작 265cm • 동상관리자:보훈청 익산지청 관리 51-1-47 호
바. 애국지사 춘고 이인식(春皐 李仁植)선생의 기념사업회 • 설립일자:2002. 3. 1 • 회칙제정:5장 16조 부칙 4조로 구성되었음 • 연락처:서울지역 - 김홍빈 (02)3477-3664 H.P. 010-2813-2834 군산지역 - 하영태 (063)453-1134 H.P. 016-9882-1134
15. 맺는 말
애국지사 춘고 이인식(春皐 李仁植)선생은 일신의 부귀와 영달보다는 나라와 겨레의 운명을 먼저 생각하셨기에 고난과 형극(荊棘)의 가시밭 길을 걸어가셨으며 따라서 가정적으로 매우 어렵고 곤란한 형편을 면치 못하였다. 그러나 선렬께서 남기고 가신 그 높으신 뜻과 의(義)롭고 성(聖)스러운 희생의 정신은 급기야 잔악무도한 일제를 넘어뜨리고 말았으며 또한 지금껏 우리의 앞길을 밝혀주고 한줄기 빛이 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독립운동사는 이인식의 활동에 대하여 그가 고보생(高普生)들과 독립활동을 숙의(熟議)함으로써 그의 높은 정신연령을 보여주었으며 오직 조국의 독립앞에 몸과 마음을 던질 수 있었던 대인적(大人的) 긍지가 항시 그의 몸에서 불타고 있었다고 적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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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군산 월명공원 정상에 제막되어 있는 동상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애국, 애족의 3.1독립만세운동의 정신을 함양하고 나아가 민족혼을 고취하며 숭고한 애국정신을 널리 펼쳐 자라나는 후세에 귀감이 되도록 하고 살신성인의 열정적 독립운동의 혼과 헌신적 후진양성의 교육입국을 위해 헌신한 위대한 업적을 천추만대에 길이 보존하고 영원한 민족정신으로 계승하여야 할 것이다. 필자는 2005년에 중국 상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적지(史蹟趾)를 탐방한바 있다. 일본의 한일합방으로 인한 원한을 품고 조국을 등지고 오직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활동하신 선렬들의 혼과 맥이 숨쉬는 임시정부 청사에서 빛바랜 태극기를 어루만지니 조국의 혼이 꿈틀거리며 반기고 있었다.
<참고문헌> • 전북일보 전북인맥(군옥지방) 1975.8.16(3면) 제682호 • 전국 독립운동사적(국가보훈처) 1986. 3.1 P68 • 재경군산시향우회 인명부 2001년 창간호 • 선렬 및 애국지사 국립묘지 안장(광복회 주최 약력보고) 1974.10.17 • 한국독립운동지혈사:박은식 • 국사개설:박영사 발행 1972. • 한국사신관 고시원 민병하 1973. • 한국사 원광대학교 출판국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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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애국지사 춘고 이인식 선생님에 대한 책을 만들자는 동문들의 이야기가 있었는데, 군산문화원 감사 이영룡 님께서 군산문화원에서 발간한 책에 글을 올리셨군요.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