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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제3위 고봉인 캉첸중가(Kangchenjunga, 8586m)로 가는 길은 멀고도 힘들었다. 더욱이 등반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사투라 할 수 있다. 네팔 동북단, 즉 인도 시킴과의 국경에 솟아 있는 캉첸중가는 트레킹 기점까지 접근하는데도 카트만두에서 비행기를 두 번 타거나 로컬 버스를 이용한다면 30시간은 족히 걸린다. 그리고 트래킹 기점인 간뎀베에서 얌푸딘을 거처 체람, 알룽빙하를 건너 남면 베이스캠프까지 가는 것도 7일 이상은 걸어야 한다. |
우리 원정대는 카트만두에 도착하자마자 모든 행정과 원정 트래킹을 도맡아 처리하는 세븐 섬미터(Seven Summit) 회사와 계약을 체결하고 일정을 시작했다. 캉첸중가로 가기 위해 카트만두에서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네팔 동남부 대평원에 위치한 바다로프 찬드라가디 공항에 내렸다. 공항에서 지프로 일람과 피딤을 거쳐 카벨 콜라의 간뎀베까지 갔다. 이후 8일에 걸쳐 알룽빙하를 건너 빙하위에 떠 있는 하늘 섬 베이스캠프에 4월 5일 입성했다. 베이스에 입성하기까지는 열대 우림에서 빙하의 나라로 숨 막힐 정도로 자주 바뀌는 주변 환경과 트래킹 전 구간에 7000m 산들만 해도 20여개, 8000m급도 5개나 있다. 하얀 영봉들 얼마나 웅장하고 황홀한가? |
캉첸중가는 히말라야 8000m 14좌 중 가장 동쪽에 있으며 태양이 가장 먼저 정수리에 비친다. 에베레스트, K2에 이어 3번째로 높은 봉우리다. 동서 2400km 길이의 히말라야산맥 동단에 위치한 캉첸중가는 티베트어 4개 단어의 합성어로, ‘Kang’은 눈(雪), ‘Chen’은 크다(大), ‘Ju’는 보고(寶庫), ‘Nga’는 다섯(五)을 의미한다. 즉, 주봉(8586m), 중앙봉(8473m), 남봉(8476m), 서봉(8505m·얄룽캉), 캄바체(7903m) 다섯 봉우리 모두 ‘큰 눈으로 이루어진 보물’이란 뜻이다. 또, 주변에 7000m~8000m 산들을 20여개를 거느려 티베트어로 그들의 ‘아버지’라는 뜻을 갖는다. ‘산들의 아버지’, ‘큰 눈으로 이루어진 다섯 보물’이 캉첸중가다. |
이번 원정은 2013년 4월 20일부터 10월 20일까지 열리는 2013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뿐만 아니라 순천 시민과 그 뜻을 같이 한다. 박람회의 성공은 앞으로 다가올 21세기 순천시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생각으로 뜻을 함께하고 요즘 소외받기 쉬운 장애인과 함께 나누는 아름다운 도전으로 박람회의 성공을 위한 응원의 원정이다. |
* 캠프 건설(4월 13일 ~5월 9일)
우리 원정대는 이번 시즌 타 원정대에 비해 가장 빠르게 베이스캠프에 4월 5일 입성했다. 다른 팀보다 고소 적응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가 많다. 베이스에서는 국제대 팀별로 세 번의 라마제를 치룬 후 캠프 건설에 나섰다. 4월 13일 첫 발걸음을 시작해서 4월17일 캠프1(6000m)을 건설 했고, 24일 캠프2(6400m)가 만들어 졌다. 처음 베이스캠프에 입성했을 때는 정상 공격하기에 참 좋은 날씨였다. 늦춰진 라마제와 다국적 팀들로 구성된 원정대들 때문에 루트를 만들고 고정 자일을 설치하는데 서로 눈치만 보고 앞으로 나가지 않으려고 해 우리를 애타게 했다. |
등반을 하려면 한 계단부터 가야 하는 법 캠프 2개를 건설하는데도 시간이 걸렸지만 캠프 3를 만드는 것도 상당히 어렵게 진행됐다. 좀처럼 기상악화 때문에 루트 작업을 하기가 어렵다. 6m정도 크레바스가 앞을 가로막고 있다. 한국인의 습성상 이를 더 이상 지켜볼 수 없고 타 국가 원정대를 믿고 있을 수가 없다. 우리 한국대팀이 직접 루트 작업을 해서 캠프3가 설치되면 계속 밀고 나가 정상 공격도 시도할 예정이었다. |
4월29일 캠프2에서 다국적팀 셀파(이란, 중국, 이탈리아, 스페인, 방글라데시, 탐세르크팀(스페인)협의 하에 캠프3 루트 건설은 우리가 하기로 하고 다국적팀 셀파들이 장비와 물자를 수송 해 주기로 했다. 우리는 루트를 만들고 있던 셀파들로부터 스노우바 등 장비를 인수받아 6700m까지 진출하게 된다. 캠프3로 가는 중요한 길목 작업을 했다. 타 국가 6개팀이나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갔던 지점부터 캠프3까지는 우리팀 셀파들이 어렵게 건설을 했다. |
5월 2일 캠프3(7000m)가 건설이 됐다. 캠프가 건설되자마자 그간 눈치만 보고 있던 다국적 팀 셀파들은 얄밉게도 정상공격에 필요한 산소와 몇 가지 중요한 장비를 올려놓게 다운을 했다. 타국 원정대는 짐만 올려놓게 내려가는 상황에서 우리는 고소 적응을 하기 위해 캠프3로 닭죽을 먹고 출발을 했다. 날씨가 좋지 않아 화이트 아웃 된 상태에서 김홍빈부대장, 박남수등반대장은 캠프3로 갔고 박현수, 박상훈은 캠프2로 다시 다운을 했다. 그 후 기상 악화로 모두 베이스캠프로 하산을 해서 5월8일까지 날씨가 좋아지기를 기다렸다. |
* 공격 시도(5월 9일 ~ 12일)
5월 9일 아침 7시 베이스 출발! 전 대원은 캠프2에서 캠프4로 셀파들은 캠프3로 그 다음날 캠프4 그리고 정상 공격이라는 시나리오를 갖고 출발을 했다.
우리는 다른 팀과는 다르게 이곳의 독특한 날씨와 정상 등정시 부는 바람 시간대를 계산하여 모닝타임 때 정상공격을 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5월 10일 오후4시30분에 캠프4(7300m)에 도착하니 이란과 방글라데시 팀이 이미 캠프를 구축 하고 정상공격을 준비 하고 있다. 우리팀도 각자에게 주어진 산소를 마시면서 휴식에 들어갔다. 11일 아침 기상이 몹시 나빠졌다. 우리 팀 셀파들은 산소와 장비를 데포 시키기 위해 캠프를 이미 나섰고 모닝타임에 출발하기로 했던 계획이 늦춰져 정상공격 출발 시간을 수정해 오후 4시로 잡았다. 김홍빈, 박남수 2명이 출발을 했지만 1시간 30분후에 몸꼴이 말이 아닌 상태로 되돌아 왔다. 나쁜 날씨 때문에 전진할 수 없다. 이렇게 정상 공격이 끝날 것인가? 식량도 다 떨어져 버리고 마지막 떡국 한 끼분으로 대원들은 굶주려야 했고 다시 베이스로 철수를 해야 했다. |
* 정상공격(5월18일~5월 21)
정상공격의 기회는 왔다. 5일간 날씨가 좋다는 기상정보 데이터를 토대로 베이스캠프에 있는 모든 원정대는 5월 20일을 D-day로 정했다. 모든 다국적대팀 셀파들이 참가한 회의에서 팀별로 셀파 한명씩 루트 메이킹을 하고 정상 공격을 하기로 했다. 17일 다국적대팀들은 베이스캠프에서 출발을 했고 우리 한국대팀은 고소적응이 잘 되어 있어 체력 소모를 줄이기 위해 18일 출발하여 베이스캠프에서 캠프3까지, 캠프4(7300m)로 운행할 계획이었다. |
18일 새벽 4시에 김홍빈, 박남수, 박상훈, 신현한 네명의 대원이 베이스를 출발 했다. 컨디션이 모두 좋아 빠르게 캠프2를 거쳐 고도 1600m를 9시간30분만에 캠프3까지 도착했다. 캠프3에 도착하여 눈을 녹여 수통에 물을 채우고 저녁식사로 야크 김치 찌게와 밥을 데웠다. 김치찌개는 베이스캠프에서 만들어 왔기 때문에 시간도 절약되고 맛도 있어 7000m에서 더 이상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우리 한국대팀은 대행사로 부터 식량 물자 조달이 잘 이루어지지 않아 행동식은 야크튀김, 짜파티, 감자튀김이다. 그리고 추진위원장과 단장님께서 라마제 때 직접 가져온 떡이 고소에서 비상식 역할을 제대로 했다. 쑥으로 만든 인절미는 배고픔과 허기를 해결해주었고 우리를 버티게 했다. 고맙고 감사한 떡이다. |
정상 공격의 기회는 이번 한번뿐이다. 캉첸중가 신이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우리들만의 몸부림이었다면 이제 정말 그 기회가 드디어 왔다. 5월 19일 약25명 되는 다국적 원정대원과 셀파들이 캠프3와 캠프4에서 분주히 움직였다. |
다국적 캠프4는 7400m에 설치되 있고 우리는 7300에 설치되 있으므로 그만큼 우리는 정상을 가기 위해 더 많은 고생을 해야 한다. 더 서둘러야 했다. 모든 정상 공격조는 19일 저녁 6~7시에 출발을 했다. 밤은 어둡고 많은 대원이 줄을 이어 가면서 루트 작업을 했다. 힘든 구간에서는 25명이 고정 로프 하나에 줄줄이 쥬마를 걸어놓고 루트 작업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그때마다 목숨 같은 시간이 흘러갔다. |
이란 셀파 니마가 루트 메이킹에 앞장섰고 꿀루와루 지점까지 도달하니 오전 9시 30분이다. 정상 공격 출발한지 15시간이나 지났지만 고도는 8200m지점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다. 여기까지만 고정로프 작업이 돼 이후부터는 각자 등반을 해야 한다. 신현한과 셀파 앙까미는 여기서 하산을 했다. 등반하는 팀들은 계속해서 한 무리가 돼서 정상으로 한걸음 힘을 쏟았다. |
손톱바위에서(8450m)에서 박상훈은 조금 남아 있는 산소를 파악하고 과감히 하산을 결정한다. 용기 있는 결정이다. 욕심만 있고 진정한 용기가 없다면 우리는 크나큰 희생을 치를 수도 있다. 손톱바위는 다섯 명 정도 앉아서 쉴 수 있는 공간이 분화구처럼 형성 돼 있고 왼쪽에는 손톱바위가 있어 휴식을 취하기 안전한 공간이다. |
박상훈이 하산을 시작하고 8100m 지점을 통과할 때 드디어 2013년 5월 20일 오후 3시 30분 전후로 박남수 김홍빈이 등정을 했다. 드디어 정상에 도착했다. 캉첸중가 신은 우리에게 정상에 오를 기회를 주었다. 이제 등정의 기쁨을 주었으니 하산의 기쁨도 함께 주소서. 하지만 하산은 기쁨이 아닌 슬픔이 돼 버렸다. |
박남수 등반대장이 21일 24:05분 7600m~7700m지점에서 다국적대팀 캠프4(7400m) 근처사면으로 추락했다. 같은 지점에 이탈리아팀 셀파 1명, 헝가리팀 막내 대원의 주검도 함께 있다. 21일 오후에 신현한 대원이 박남수를 확인하고 침낭으로 몸을 감싼 후 안전벨트를 스노우바로 고정한뒤 GPS로 위치를 확인했다. |
시신을 200m 경사진 사면으로 끌어올리고 반대편 사면으로 옮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 했다. 많은 셀파와 장비 인력이 필요했고, 같이 있던 셀파 들도 체력이 탈진 직전이라서 아무런 도움도 줄 수가 없었다. 다시 베이스캠프로 다운하여 구조대를 편성하여 박남수 등반대장 수습작전을 해야만 했다. |
베이스캠프로 하산하여 구조대를 편성하기 위해 셀파들을 설득 시키고 협상을 수십 번을 했지만 현지인들의 비협조와 기상 악화로 시신 수습은 무산되고, 결국은 국내에서 지원팀(박상수부단장, 윤욱현)이 카트만두로 파견돼 셀파를 구해 헬기로 베이스캠프로 들어와서 구조작업을 해야 했다. 다행히 박남수등반대장과 예전 마나슬루를 같이 등반했던 셀파들이 소식을 듣고 구조작업에 선뜻 나섰다. 고인이 된 박남수등반대장의 인품을 알 것 같다. |
* 구조 작업
5월28일 셀파4명이 헬기를 타고 식량과 산소 장비를 가지고 베이스캠프에 입성했고 다음날부터 구조작업에 나섰다. 뒷날 구조대(신현한대원과 셀파4명)는 베이스캠프에서 출발하여 6800m지점까지 진행하여 텐트를 구축했다. 하지만 몬순기후로 습설이 내리고 강한 바람까지 불었다. 또한 작은 눈사태까지 나서 텐트가 찢어졌다. 이런 기상악화로 캠프4(7400m)까지 올라가서 구조작업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구조대원들이 2차 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
구조작업은 베이스캠프에서 대기하면서 기상이 좋아지면 다시 시작 하기로 했다. 그러나 밤사이 폭설과 강한 바람이 불어 본부 텐트와 키친텐트가 무너져 내려 대원들과 셀파들은 급히 람체로 대피를 해야 했다. |
키친 보이 2명과 셀파 4명 그리고 박현수대원과 신현한대원은 눈과 강한 바람에 떠 밀려 1박2일 동안 잠을 자지도 쉬지도 않고 얄룽빙하를 건너 람체를 지나 체람(3780m)까지 다운하여 구조작업을 하기 위해 대기를 했다. |
날씨가 좋아지면 헬기로 셀파들과 대원이 6400m 지점까지 올라가 다시 구조작업을 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4일 동안 기다려 보지만 더 이상 기상은 좋아지지 않고 헬기는 뜰 수가 없었다. 구조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대원들은 눈물을 뒤로한 체 트래킹 기점인 간뎀베로 하산을 했다. |
국내에서 온 지원팀과 유족단 그리고 이성원대장을 비롯 대원이 참가한 가운데 6월 2일 카트만두 와룽궁바 사원에서 천도제를 지내고 故박남수등반대장의 영혼을 위로했다. 원정대는 故박남수등반대장의 유품과 함께 6월 4일 귀국하여 광주산악연맹장으로 고인이 된 박남수등반대장의 명복을 빌었다. |
* 故 박남수 등반대장을 추모하며~~.
이성원 원정대장은 지금까지 본인과 등반을 하면서 등정하지 못한 대원들에게 등정기회를 주기 위해 이번 대원을 편성했다. 故박남수 등반대장도 이번 원정에 이성원 대장의 부름을 받았다고 했다. 박남수는 지난 2000년 이성원대장이 한국 K2원정대를 이끌 때부터 원정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원정대에 여러 도움을 주게 되면서 인연을 같이했다. 그 후 2005년 낭가파르밧 루팔벽 대원으로 선발 되 故이현조와 김창호가 정상에 설 때 캠프4에 김병찬대원과 마지막 보급품을 올림으로써 원정대에 공헌이 컸다. 그 후 2007년 도로공사 로체&에베레스트 원정대(대장 박상수)에 참여하여 많은 경험을 쌓았다. 또, 2011년 한국도로공사 산악팀이 지원한 ‘자유를 향한 2011 마나슬루 원정대’에 박남수는 참가하여 ‘왜 이 원정대에 참여하게 됐는가?’라는 질문에 이런 이야기를 했다. 당시 1년 전 등반사고로 설산에 친구 시신이 남겨져 있어~~ “산에 다니는! 같이 히말라야를 꿈꾸는 동료이자 산 친구인데요. 그 친구가 지금 차디찬 곳에 묻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것은 누군가 해야 하고 또 그것이 내가 산에 다닌 선배들에게 배운 것이기 때문에 저의 몫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젠 그의 시신이 캉첸중가 7400m에 누워있다. 차디찬 곳에 누워 있는데 그도 2011년에 마나슬루로 친구를 찾으러 왔는데. 우리도 그를 찾으러 가야 하지 않겠는가?
故박남수 영결식이 치러질 때 추모 영상이 방영됐다. 박남수 등반대장이 매사에 도와주고 협력하는 영상이 나오자. 유가족들은 울부짖는다. ‘저렇게 돕기만 하니 힘이 남아 있겠느냐! 이제 당신들의 몫이다.’
이성원 대장은 회고한다. “좋은 사람인데, 등정 기회가 없어 안타까웠다.” 이제야 그 꿈을 실현하고 등정을 하더니 왜 못 내려오는 것인가? 다국적대팀 원정대에서 말하는 것을 예로 들어 등반대장으로서 제 역할에 손색이 없었다. 한다. “한국 원정대 박남수 등반대장을 통하면 무엇이든지 된다.” 캠프 3 루트 파인딩과 루트 개척의 공로다.
김홍빈은 “남수가 없었으면 정상에 가지 못했습니다. 마지막 19일 정상에 갈 때 내 곁에는 모두 남수가 있었습니다. 그가 없었다면 내가 어찌 정상에 있겠습니까? 모든 공을 두 배로 남수에게 돌리고 십습니다.” 꿈만 같고 현실로 받아들이기가 어렵다고 했다. 그에게 “너무나 감사하고 고맙다고 한다.”
신현한은 그를 ‘바다와 같은 존재’로 말했다. 항시 중간자의 입장에서 윗사람들과 막내 대원들 사이에서 의견 조율을 했고, 막내 대원들이 힘든 것을 본인이 솔선수범 했다고 한다. 너무나 아쉽다.~~ 이젠 현한이도 그가 아쉽게 살았던 인생을 본인이 더 부지런히 살고 싶다고 한다.
박현수 대원은 아직도 그가 곁에 있는 것 같다고 한다. 큰 형님같이 “현수야 캉첸중가 같이 가자!” 남자다운 기개와 인간미가 넘쳐흘렀고, 발대식 하던 날 무등산 자락에 ‘히말라야’ 등산 장비점을 오픈할 때 그 바쁜 일보다도 원정대를 먼저 챙겼다고 한다. “사나이 중에 사나이 갑바가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막내 박상훈은 날씨 상황이 나빠 구조 작업 진행은 더 이상 할 수가 없었습니다. 유가족 분들에게 고개 숙여 진심으로 사죄 말씀을 드립니다. “남수형과 같이 돌아와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말밖에 할 수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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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으로 돌아간 산 사나이!
[故박남수 등반대장께 바는 글]
길이 없는 곳에서도
길을 갔다.
길이 끝난 곳에서도
길을 가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길이 돼
묵묵히 길을 가는 사람이 있다.
저 산위에 눈발이 멈추고
저 산위에 부는 바람 되돌아오지 않아도
우리 가는 이 산위 얼음 눈들이 강물 돼도
그렇게
산이 된 자가 있다.
이제
아픈 다리 편히 쉬면서
무거운 짐 모두 내려놓고
힘든 가슴 시원히 뚫어서
목마름도 적시고
주린 배 채워
영원히 그곳에 남아
그는 그렇게
스스로 산이 돼
영혼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
원정대명 : 2013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 성공기원 한국 캉첸중가(8586m) 원정대
기간 : 대원 첫 출국일 - 3월 22일(선발대 김홍빈, 박현수)
대원 마지막 귀국일 - 6월 17일(박현수, 신현한)
성과 및 결과 :
: 정상 등정 - 김홍빈, 박남수 (2013년 5월 20일 오후 3시 10분 ~ 30분[네팔현지시간])
: 박남수 등반 대장 추락사 (2013. 20. 24:00 경[현지시간])
: 원정대 방송 - "캉첸중가, 끝나지 않은 동행" KBS1 TV. (2013. 7. 12. 22:00)
참가대원
추진위원장 : 위계룡
단장 : 이흥우
부단장 : 이병철, 박상수
대장 : 이성원
부대장 : 김홍빈
등반대장 : 박남수
식량·장비 : 박현수
기록·촬영 : 박상훈
KBS PD : 김형운
KBS 카메라 감독 : 신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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