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書와 史記에 기록된 부여의 위치는 흑룡강성이 아니라 하북 산서지역이어야 한다, 흑룡강성 부여(푸위)는 동부여지. (운영자 주)
扶餘는 春秋戰國末에 어느 중국왕조도 넘볼수 없었던 北方東夷族이 이룩한 아시아 最强國이었다.
부여족은 수천년전 남진해 중원을 제패한 商왕조의 일부를 이루다가 그후 목야전쟁에서 패한후 하북 부근으로 다시 만주 대평원으로 회귀한 민족으로 한.중 사학계에서는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역사적 의문은 남는다....
부여는 강력한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기원전 4세기경에 古朝鮮을 이어받아 漢나라에서 朝貢을 받을 정도의 막강 세력으로 대륙을 지배했던 부여는 중국사서에 기타 동이국가와 달리 그들에게 우호적으로 서술된다 부여에 조공하던 한나라는 부여를 업고 고구려의 성장을 막고 부여와 고구려간의 전쟁을 꾀했다. 약 700년간 유지되던 기원후 4세기,부여의 帶素王은 고구려의 大武神王에게 참수 당하고 최강,최장의 사직을 고하게 된다.
이 기록물에서 보면 고조선국을 부정하고 신화설에 앞장서며 두계 이병도가 세운 식민사학의 주류를 이어 받은 <송호정>씨가 부여의 건국지 추적에 해설자로 등장하는 슬픈 현실이 아직도 이 나라에서 식민사학의 뿌리가 죽지 않고 온전히 있음을 보여준다!
신화나 설화 그리고 지역에서 발굴되는 유물이 마치 중국사서에 쓰여진대로 짜 맞추어져서 설명되는 듯한 중공 사학자의 모습들도 여실히 본다. (운영자 주)
첫댓글 편집되어 전하는 삼국사기 유리명왕조의 기록
"二十九年,夏六月,矛川上有黑蛙與赤蛙群鬪,黑蛙不勝死.議者曰,黑,北方之色,北扶餘破滅之徵也秋..."의
북방의 동부여를 북부여로 오인하게 편집되어진 것을 그대로 믿고 그대로 해설한 얼빠진 작금의 이 나라 월급쟁이 사학들의 공헌을 좇아서 현금의 얼빠진 이들도 역시 그대로 해설하고 있음인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