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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전씨, 충근정량 호성공신 석릉군 시제를 다녀와서
(旌善全氏, 忠勤貞亮 扈聖功臣 石陵君 時祭)
2012년 11월 04일 일요일
오늘은 광명시 노온사동 산 37-3번지에 있는 석릉군 묘소에 시향 지내러 가는 날이다. 나는 임하군파의 파시조가 계신 곳에 간다고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설렜다.
시계는 오전 05시를 가리키고 있었는데, 따뜻한 보금자리에서 일어나기가 싫다. 그렇지만 스마트폰을 집어 들고 눈을 부비면서 어제 관심지역으로 추가한 광명시의 날씨를 찾아서 살펴보았다.
오전6시 7시 비, 오전10시 비, 12시 비, 오후 3시부터는 쭉 비가 오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었습니다.
비가 전국적으로 온다는 일기예보가 있었기에 옷차림을 어떻게 할 것이며, 우산을 가져갈 것인가 말 것인지 망설여졌다.
바쁘게 준비하고 우산을 가지고 집을 나서는데 필구공 종중 전찬윤 총무한테 메시지도 왔었다.
이번 기회에 창홀에 의한 진행과정을 더 세밀히 관찰하여 더 많이 배워야겠다.
아직도 어두운 6시에 강릉시 택시부광장에 모였다.
작년에는 버스 2대로 갔었는데 올해는 우리 필구공 종중과 임하군파 광순공 문중이 합동으로 가기로 한 첫 해입니다.
우리종중 20명, 광순공 문중18명 그리고 전씨종친회 강릉회장인 전창윤님과 부회장 1명이 동승하였습니다. 채미헌파이지만 강릉종친회 회장을 맡고 있는 전창윤님께서 같이 시향에 가는 것은 뜻 깊은 일입니다.
버스에 타서 우리 유덕댁 장손 전윤재님과 함께 타서 우리 소문중의 문사에 대하여 대화를 하였는데, 장손께서는 벌초를 할 때 제초기가 고장이 나서 2일에 걸쳐서 한 예를 들어가면서 문사 진행에 얽힌 여러 가지 말씀을 하였다. 그래서 장손은 의무만 많지만 권리는 적다고 대답하였다. 여러모로 장손이 소문중을 위하여 노고가 많아서 감사하다는 뜻을 전했습니다.
7시경 원주 미가일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하였다. 우리가 평소 먹는 한식으로 된장국이 특히 맛있었다.
9시경 차창 밖 풍경이 달라지고 있었다. 빌딩숲이 보이며 도시임을 알 수 있었는데, 자세히 이정표를 보니 의왕시임을 알 수 있었다. 조금 더 지나다보니 어느덧 광명시에 있는 선산입구에 도착하였다.
작년에 왔을 땐 내비게이션이 작동이 안 되어서 임하군파 총무에게 전화로 물어보며 길을 헤매던 기억이 났었는데, 오늘은 내비게이션이 작동이 잘 되었는지 아니면 운전기사님이 지리를 잘 아는지 순조롭게 도착할 수 있었다.
10시경 광명시 노온사동 묘소에 도착하니 “정선전씨 임하군파 추계 시향” 플랑카드와 회장단 몇 분이 반갑게 맞이하였다. 전국에서 모이는 행사에 강릉에서 제일 먼저 도착 하였다.
묘소의 첫 인상은 양지쪽에 남향으로 넓게 자리 잡았고 푸근하고 아늑함이 느껴졌다.
묘소 상단에서 주위를 살펴보고 있는데, 전영래 임하군파 부회장님이 제가 강릉에서 왔는지 확인 전화가 왔다. 아래쪽을 바라보니 전화를 거는 모습이 눈에 띄어, 한 걸음에 달려가서 인사를 드렸다.
전 번에 전화로 종중발전을 위해 건설적인 의견을 교환한 인연이 있었다.
조금 있으니 대구에서 "정선전씨 석릉군파 임하군파 카페"를 운영하는 전정구님이 대구에서 올라오셨다.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만났다. 부회장님과 전정구님와 함께 사진도 찍고 종중발전 방안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전영래 부회장님께서는 우리 말(한글)로 시향을 진행하는 것에 관심이 많으셨습니다. 앞으로 대다수가 한글세대이고 컴퓨터가 익숙한 디지털세대로 변화가 되므로 한문으로 구성된 홀기도 한글로 창홀해야 할 시기가 올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전정구님에게는 ‘오늘 사진 및 기록을 담당하여 오늘의 역사를 인터넷에 올려서 이곳에 오지 않은 분들이 현장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라고 부탁의 말씀을 드렸다.
한 시간이나 먼저 왔으므로 시간의 여유가 있었는데, 우리 강릉종중 전세표 원로께서 저를 부르셨다.
제가 예전에 출판한 “정선전씨 양양댁 역사 이야기”책을 정독하셨고 오자를 발견하였다고 하였다. 제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부분을 지적해 주셨다. 관심을 가지고 정독하셔서 부족한 부분을 지적하여 너무 감사했습니다.
요지는 39세 선조 존함이 ‘瑊’이 정상이나 ‘咸’으로 표기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瑊은 컴퓨터에서 찾을 수 없는 글자이기 때문에 오타가 난 것 같다는 말씀도 덧붙여 주셨습니다.
11시가 되어서 수도권, 강릉, 대구 등 경향각지에서 130여명이 모였다.
작년에는 비가 와서 문제가 많았는데 올해는 비가 온다는 예보는 있었지만 다행히 행사하는 시간에는 오지 않았다.
제일 먼저 산신제를 지내면서 시향의 첫 장의 막을 올렸습니다.
제일상단에 있는 임하군 단소에서 시제가 봉행되었습니다.
아래와 같은 홀기에 의해서 엄숙히 진행하였습니다.
笏 記
陳設
제수를 진설하시오.
獻官以下皆序立
각 헌관과 제 집사는 제단 앞에 차례로 서시오.
諸執事者 謁者 詣墓前 鞠躬再拜興平身 復位
모든 집사자와 알자는 묘지 앞으로 나아가 몸을 굽혀 재배하고 일어나서 자기 임무 위치로 복귀하시오.
贊引引 初獻官 詣盥洗位
초헌관을 모시고 관세할 수 있는 위치로 나아가시오.
盥洗 帨手
관세 물에 손을 씻고 닦으시오.
詣墓前 初獻官 點視陳設 跪 三上香 酹酒灌于墓前
초헌관은 묘전에 나아가 진설이 법에 맞는지 점검하고 향로 앞에 무릎을 꿇어앉아 향을 세 번 넣어 피우고 묘전에 술을 부으시오.
初獻官 鞠躬再拜 興平身 復位
초헌관은 재배하고 일어나서 자기 자리로 복귀하시오.
獻官以下參神 鞠躬再拜 興平身
헌관이하 모두 집례의 소리에 맞춰 재배 하시오.
(배~~·흥·) (배~~·흥·)
初獻官 詣墓前 跪 獻酌
초헌관은 제단 앞에 나와 무릎을 굻으시오.
각 술잔에 술을 가득 담아 각 신위 전에 올리시오.
獻官以下俱跪
각 헌관이하 모두 꿇어 엎드리시오
祝取祝板 跪 獻官之左 讀祝
축문판에서 축문을 꺼내서 축관은 초헌관 좌측에 꿇어 축을 읽으시오.
鞠躬再拜 興平身 復位
초헌관만 재배하시고 제 자리로 가시오.
贊引引 亞獻官 詣盥洗位
아헌관을 모시고 관세할 수 있는 위치로 나아가시오.
盥洗 帨手
관세 물에 손을 씻고 닦으시오.
詣墓前 跪 獻酌
제단 앞에 나와 무릎을 굻고 앉으시오.
각 술잔에 술을 가득 담아 각 신위 전에 올리시오.
鞠躬再拜 興平身 復位
아헌관은 재배하고 일어나서 자기 자리로 복귀하시오.
贊引引 終獻官 詣盥洗位
종헌관을 모시고 관세할 수 있는 위치로 나아가시오.
盥洗 帨手
관세 물에 손을 씻고 닦으시오.
詣墓前 跪 獻酌
제단 앞에 나와 무릎을 굻고 앉으시오.
각 술잔에 술을 가득 담아 각 신위 전에 올리시오.
鞠躬再拜 興平身 復位
종헌관은 재배하고 일어나서 자기 자리로 복귀하시오.
初獻官 詣墓前 跪
초헌관은 제단 앞에 꿇어앉으시오.
添酌
첨작하고
鞠躬再拜 興平身 復位
재배하고 일어나서 자기 자리로 복귀하시오.
獻官以下 退休食頃 平身 復位
헌관이하 식사하는 잠시 동안 물러나 기다리고 그 후 제자리로 오시오.
獻官以下肅竢
모두 엄숙히 기다리시오.
祝三稀吟 獻官之右 告利成 復位
축관은 헛기침을 세 번하고 헌관의 오른 쪽으로 이동하고 “이성”을 고하시오. 제 위치로 복귀하시오.
獻官以下 鞠躬再拜 興平身
헌관은 재배하고 일어나시오.
諸執事者 謁者 詣墓前 鞠躬再拜 興平身 復位
모든 집사자와 알자는 묘전에 나아가 재배하고 일어나시오. 제 위치로 가시오.
初獻官 詣墓前 飮福禮
초헌관은 묘전 앞에 나아가 음복하시오.
祝進掇茶器
축관은 나아가서 다기를 치우시오.
祝焚祝
축관은 축문을 태우시오.
掇饌
제물을 치우시오.
祭畢-
모든 예를 마치겠습니다.
홀기 중에 있는 “祝三稀吟 獻官之右 告利成 復位”가 궁금하여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습니다.
옛날에 번역할 때 吟의 의미를 잘 몰라서 향교에 다니는 분에게 문의하였습니다.
【吟 읊을 음, 입 다물 금
1. 읊다
2. 신음하다(呻吟--)
3. 탄식하다(歎息ㆍ嘆息--)
4. (새가)울다, 노래하다
5. 끙끙 앓다
6. 취주하다(吹奏--: 관악기를 불어 연주하다)
7. 말 더듬다
8. 시가(時歌), 읊는 시가(時歌)
9. 주걱턱
a. 입을 다물다(=噤) (금)
형성문자
噤(금), 欽(음)과 통자(通字). 대법원 인명용으로는 음. 뜻을 나타내는 입구(口☞입, 먹다, 말하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今(금)으로 이루어짐. 목소리를 입 속에 머금고 낮은 소리로 읊조리다의 뜻】
그 분의 의견은 ‘입 다물 금’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은 것으로 조언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축(관)은 입을 다물고 조용히 초헌관 오른쪽으로 간다고 해석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집례가 「축삼희음 헌관지우 고이성 복위」하면 축(관)이 초헌관 앞으로 걸어가서 고개를 숙이며 ‘이성’을 고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을 기회로 吟은 ‘입 다물 금’이 아니라 ‘읊을 음’으로 하는 것이 더 옳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吟은 목소리를 입 속에 머금고 낮은 소리로 읊조리다 뜻이므로 祝三稀吟을 “축관의 세 번의 헛기침”으로 번역하는 것이 합리적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장소를 중단으로 옮겨서 제2장의 막을 올렸습니다.
정선전씨 42세 충근정량 호성공신 諱룡(전룡) 선조님 묘소에서 홀기에 의해서 여법하게 진행하였습니다.
公의 약력을 살펴보면
【1593년(선조 26)
수문장이 제수(除授)되었다. 임진왜란 때 종묘의 위패를 무사히 옮긴 공으로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 종6품)가 제수(除授)되었다.
1601년(선조 34)
공이 인정되어 특별히 사복시판관(司僕寺判官, 종5품)이 제수(除授)되었다.
1605년(선조 38)에는
다시 내사복시내승(內司僕寺內乘)에 제수(除授)되었다.
이후 석릉군(石陵君)에 봉해졌다.
다음 내용을 교서에 명시하였다.
(모습을 그려 후세에 전하며, 품계와 관작을 한 자급 초천한다.
그들의 부모와 처자도 한 자급 초천하되, 아들이 없으면 생질과 여서를 가계(加階)하라.
적장은 세습케 하여 녹봉을 잃지 않게 할 것이며, 대대로 영원히 사유를 받게 하라.
이에 반당 4인, 노비 7구, 구사 2명, 전지 60결, 은자 5냥, 내구마 1필을 하사한다.)
사후 자헌대부(資憲大夫)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증직되었다.
1624년(인조 2)에는
정사공신(靖社功臣) 88인의 《회맹록(會盟錄)》에 올랐다.
▶ 반당[ 伴倘 ]
조선시대 종친·공신·당상관들에게 그 특권을 보장하고 신변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지급한 호위병.
▶구사[ 丘使 ]
고려시대 이속(吏屬) 중 잡류직.
관노의 성격을 띠고 세습되었으며, 관인(官人)에게 분급되어 호종(扈從)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국상(國相)에는 30인, 3품 이상의 열경(列卿)에는 15인, 정랑(正郎)에는 15인, 원랑(員郎) 이상에는 10인 등 관인들의 관품에 따라 분급된 수에 차등이 있었다.
▷내사복시:
사복시(司僕寺)의 부속관아(附屬官衙)로서 궁내의 말에 관한 일과 임금의 탈 것에 관한 일을 관장하였다. 병조(兵曹)의 경관직(京官職) 중 산직(散職: 일정한 직무가 없는 벼슬)의 하나로, 대궐 안에 따로 설치한 사복시(司僕寺)이다. 내사복시(內司僕寺)에 대하여 사복시를 외사복(外司僕)이라고 칭하였다.
내사복시 관원으로 내승(內乘)이 3원인데, 1인은 사복시(司僕寺)의 정(正: 正三品)이 예겸하고, 2인은 종이품에서 구품까지 관원이 겸직하였다.】
시향 봉행중 독축의 순서가 되어 집중하여 들어보았습니다.
한문으로 되어 있어 완전히 알아듣기 어려웠는데, 축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墓 祭 祝
維
歲次 壬辰 九月己酉 朔 二十一日己巳
13世孫
敢昭告于
顯12代祖考 忠勤貞亮扈聖功臣 資憲大夫 刑曹判書 石陵君 府君
顯12代祖妣 貞敬夫人 密陽朴氏
顯12代祖妣 貞敬夫人 南陽洪氏
顯12代祖妣 貞敬夫人 海州崔氏
之墓
烈烈我祖 維嶽降神 歲在壬辰 忠義貫日 智勇超倫 禍亂如熇 八年扈駕 草行露宿 藥鍼扶輿 凌統翼主 王庸嘉乃 能奮威武 功存社稷 名登鼎彛 積行垂德 以遺子孫 先蔭是賴 克熾而昌 譬若醴泉 源遠長流 體魄妥寧 堂斧蘬然 歲薦一祭 有踐豆籩 履玆霜露 不勝悽悵 謹以淸酌 庶羞祗奉 尙
饗
중단에서 경건하게 시향을 드리면서, 석릉군의 호국 정신과 숨결이 그대로 느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앞으로 우리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또 어떻게 나라 사랑을 실천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44세
45세, 46세, 47세, 48세, 49세
50세
52세, 53세
축문을 들으면서 문득 석릉군 할아버님이 임진왜란 때 공신이라는 사실이 생각났었습니다.
1592년에 생존해 계셨다는 것을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 약 420여년의 역사를 추정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어느 책에서 읽은 다음과 같은 구절이 생각났었습니다.
“그 지역에 뿌리내리고 사는 집안이라는 정의는 적어도 500년 정도의 역사를 추정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집안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42세 충근정량 호성공신 석릉군 할아버님이 임진왜란 때 공신이시니 1592년이라고 계산할 수 있습니다. 묘소는 경기도 광명시에 있습니다.
43세 선조의 묘소는 경기도 광명시에 있습니다.
44세, 45세, 46세, 47세, 48세, 49세 선조의 묘소는 강릉시 교동, 입암동, 강동면, 사천면 등에 흩어져 있었으나, 강릉시 왕산면 웅좌(곰자리)로 모셨습니다.
50세, 51세 선조의 묘소는 강릉시 성산면 금산리 술좌(개자리)에 있습니다.
52세, 53세 선조의 묘소는 강릉시 지변동에 있습니다.
이런 추정을 통해서 강릉지역에 뿌리내리고 사는 집안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천막을 하단으로 옮겨 제3막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43세 大字 翼字(전대익) 선조 묘소에서 시향을 올리는 순서가 되었습니다.
公은 임진왜란 때 혁혁한 공을 세운 선친 덕분에 과거시험을 보지 아니하고 공직에 나서는 음관의 혜택을 받으시어, 평안도 벽탄군수와 경상도 청송부사를 역임하셨다.
상단, 중단, 하단으로 이동할 때마다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이 사람이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행사진행도우미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제일 처음 묘소에 재배하는 사람이 초헌관이 아닌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주로 행사진행을 돕는 도우미가 제일 먼저 재배하고, 또 제일 마지막에 재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실은 마치 산신제를 먼저 지내고 묘소에 지내는 것과도 같다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렇게 진행되는 취지는 행사진행을 돕기 때문에 재배할 기회가 없으므로 먼저 의례를 올리는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행사진행도우미를 세분하여 알자, 찬인, 봉향(우집사), 봉로(좌집사), 봉작(우집사), 전작(좌집사)로 되어 있습니다.
참고로 시제 진행에 관련된 용어를 알아보겠습니다.
【 * 홀기(笏記) : 혼례나 제례 때 의식의 순서를 적은 글.
* 창홀(唱笏) : 홀기를 낭독함.
* 집례(執禮) : 행사 진행을 맡아 홀기를 낭독하는 사람.
* 알자(謁者) : 헌관과 집사를 행사 위치로 안내 하는 사람.
* 찬인(贊引) : 헌관과 집사에게 절차와 동작을 인도하고 답홀하는 사람.
* 봉향(奉香) : 향합을 받들어 헌관에게 드리는 사람(우집사)
* 봉로(奉爐) : 향로를 받들어 헌관에게 드리는 사람(좌집사)
* 봉작(奉爵) : 술잔을 받들어 헌관에게 드리는 사람(우집사)
* 전작(奠爵) : 헌관으로부터 술잔을 받아 신위 전에 올리는 사람(좌집사)
* 축관(祝官) : 축문을 작성하여 독축하고 불사르는 사람. 】
집례의 창홀에 의해 여법하게 시향을 봉행 완료하여 대단원의 막을 내렸는데, 시계를 보니 오후1시였다.
시제 봉행을 약 2시간에 걸쳐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작년에는 묘소 앞에서 음복하고 모여 앉아서 임하군파 정기총회를 하였으나, 올해는 오후에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어 급히 식당으로 이동하였습니다.
광명토성오리장작구이 식당에서 결산서 심의와 신임회장단
(회 장 : 전한석 고 문 : 전구표 전제욱 부회장 : 전상원 전상환 전영래 전진래
임 원 : 전신재 전영상 전용규 전종표 전진수 전찬용 전청일 전충기
총 무 : 전계표 감 사 : 전성길)을 선출하였습니다.
회의가 끝난 후 점심식사를 하면서 종친간의 화목한 교류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식사시간에 어디선가에서 발음하기 어려운 제 이름을 또렷이 부르는 종친이 있었습니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보니 작년 광명시제에서 만난 전인재 종친이었습니다. 얼굴은 기억이 나는데 이름이 생각이 안 나서 명함을 받아서 이름을 확실하게 기억하였습니다.
대구에서 전정구님이 운영하는 “정선전씨 석릉군파 임하군파” 카페에서 족보를 다운받아 인쇄하여 가지고 다니는 열성이 대단한 분이었습니다. 종중에 애정과 열성을 가진 분들이 많아야 더욱 발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정구님과 더불어 셋이서 젊은 세대로서 종중발전에 기여할 바를 서로 진지하게 대화를 하였습니다.
컴퓨터 세대가 앞으로 더욱 많아질 때를 대비하여 기존 “정선전씨 석릉군파 임하군파 카페”에 있는 족보를 섬세하고 다듬고 널리 종친에게 홍보할 필요성이 있고, 종친회 활동을 인터넷에 체계적으로 기록 관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데 서로 공감하였습니다.
종중회의 진행에는 조금 아쉬운 점이 있었습니다.
식당에 음식을 마련한 상황이라 어수선하였습니다. 그리고 방송시설이 미비하여 이동용 앰프를 이용한 관계로 정확한 내용이 전달되지 않아서 잘 알 수가 없었다.
내년부터는 묘소 앞에서 진행하는 것이 더 좋을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동용 앰프를 성능이 좋은 것으로 개선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오후 2시가 되어서
버스를 타고 강릉으로 출발하게 되어서, 임하군파 회장단이 버스에 올라서 인사말을 하였습니다.
전구표님은 작별 인사말을 통해서 강릉 고향을 떠나 수도권에서 살고 있으나 언제나 고향을 잊은 적이 없고, 가고 싶어도 여러 가지 사정상 지금은 갈 수 없고, 먼 훗날 생이 마감되면 고향에 가고 싶다고 하셔서 일동이 숙연해 지기도 하였습니다.
임하군파 전계표 총무님도 강릉종중에서 늘 버스를 대절해서 많은 분들이 시향에 참여해 주셔서 고맙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버스를 타고 내려오면서 필구공 종중과 광순공 문중 사이에 화기애애한 대화를 하면서 내려왔습니다.
점심은 광순공 문중에서 부담하였고, 저녁은 우리 필구공 종중에서 부담하게 되었습니다.
오후 6시경 강릉 마당갈비 식당에 도착하여서 오늘 시향 참여에 대한 종합적인 점검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식사를 하면서 내년에도 강릉에 사는 임하군파 필구공 종중과 광순공 문중이 광명시 시제를 같이 다니기로 다시 한 번 결의하였습니다.
앞으로 젊은 세대들이 참여할 수 프로그램을 추가하여 더 많은 사람이 광명 시향에 가서 조상의 은덕을 추모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오후 7시경 식사가 끝나고 집으로 오는데 기어이 비가 내렸다.
우산을 가지고 가서 점심식사 시간이나 버스 안에서 가지고 다니면서 오늘 괜히 우산을 가져왔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은 우산을 가져온 것이 잘 되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오늘 시향에 참여함으로서 선조님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다시 새겨볼 수 있는 기회가 되어서 더욱 뜻 있는 하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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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인조 3년 을축(1625, 천계5)
6월 15일(신묘) 비 오다가 오후에 맑음
연양군 이계한 등에게 가자할 것 등을 청하는 이조의 계
또 이조의 말로 아뢰기를,
“개국한 이래 무릇 공신에 대해 회맹제(會盟祭)를 지낸 이후에는 모두 부자(父子)를 추은(推恩)하여 구공신(舊功臣)과 공신(功臣)의 적장(嫡長)에게 상가(賞加)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연양군(延陽君) 이계한(李繼韓), 낙성군(樂城君) 김새신(金璽信), 경양군(慶陽君) 이사공(李士恭), 여양군(驪陽君) 민인백(閔仁伯), 익흥군(益興君) 이응순(李應順),
석릉군(石陵君) 전룡(全龍), 강릉 부사(江陵府使) 강경(姜絅), 후양군(厚陽君) 송강(宋康), 해신군(海愼君) 이희령(李希齡), 풍암군(豐巖君) 박몽(朴夢)은 모두 선왕조(先王朝)의 구공신으로 회맹에 입참(入參)하였으니, 가자(加資)해야 할 듯합니다.
금양위(錦陽尉) 박미(朴瀰), 전창위(全昌尉) 유왕량(柳迋亮), 한평군(韓平君) 이경전(李慶全), 경기 감사 권반(權盼), 능천군(綾川君) 구인후(具仁垕), 서성군(西城君) 한여복(韓汝復), 월천군(月川君) 유영진(柳永津), 행 선산부사(行善山府使) 심륜(沈惀), 전(前) 목사(牧使) 심각(沈恪), 전 목사 정기광(鄭基廣), 장흥 부사(長興府使) 김희(金憙), 고(故) 감사(監司) 김치(金緻), 봉산군(蓬山君) 정중철(鄭衆哲)은 모두 구공신의 적장으로 또한 가자해야 합니다.
전(前) 수(守) 윤환(尹晥)과 전 첨정(僉正) 윤동로(尹東老)의 경우 나이가 70이 되고 4품 실직을 거친 자는 당상에 오르도록 등록(謄錄)에 기재되어 있으니, 구례(舊例)에 따라 시행해야 할 듯합니다.
그 가운데 이덕연(李德演)은 당상관(堂上官)으로 이미 부사의 직임을 행하였고 나이가 70세가 넘었지만, 당상관 실직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본조에서 감히 하비(下批)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당하 4품으로 나이가 70세가 된 자는 오히려 또 당상에 올랐으니, 그렇다면 당상으로 나이가 70세가 된 자가 단지 실직을 거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가자에 참여하지 못하는 예(例)는 억울할 듯합니다.
사안이 보통의 규례와 다르니, 삼가 성상의 결단을 기다립니다.
최언순(崔彦峋), 임우(林祐), 박충경(朴忠敬), 신대용(辛大容)의 경우 내관(內官)이나 서관(庶官)의 신분으로 정훈(正勳)에 참여하여 숭록대부(崇祿大夫)에 그치는 것은 이미 정해진 제도가 있으니, 지금 본품(本品)을 넘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중로(李重老)의 아비 부정(副正) 이인기(李麟奇), 이해(李澥)의 아비 동지중추부사 이효원(李效元), 이항(李沆)의 아비 학생(學生) 이수원(李樹元), 홍진도(洪振道)의 아비 전 현령 홍희(洪憙), 유백증(兪伯曾)의 아비 - 7, 8자 원문 빠짐 -,
박정(朴炡)의 아비 참판 박동선(朴東善), 홍효손(洪孝孫)의 아비 절충장군(折衝將軍) 홍건(洪建), 유□□(柳□□)의 아비 도사 시 - 원문 빠짐 -,
조시후(趙時後)의 아비 절충장군 조옥건(趙玉乾), 김광숙(金光熽)의 아비 행 지돈녕부사 김상용(金尙容) 및 이시백(李時白)의 적장자 현령 이각(李恪), 김완(金完)의 적장자 전 감찰 김여수(金汝水), 변흡(邊潝)의 적장자 감찰 변복일(邊復一), 한교(韓嶠)의 적장자 전 주부 한선길(韓宣吉), 이수일(李守一)의 적장자 봉직랑(奉直郞) 이두극(李斗極), 성대훈(成大勳)의 적장자 선교랑(宣敎郞) 성시하(成時夏), 유백증(兪伯曾)의 적장자 학생 유훈(柳櫄), 장만(張晩)의 장자 학생 장귀한(張歸漢), 정충신(鄭忠信)의 적장자 학생 정빙(鄭砯), 홍서봉(洪瑞鳳)의 적장자 학생 홍명일(洪命一), 문회(文晦)의 적장자 학생 문문룡(文聞龍), 이원영(李元榮)의 적장자 학생 이일뢰(李日磊), 안몽윤(安夢尹)의 적장자 학생 안응창(安應昌), 최응수(崔應水)의 적장자 학생 최변(崔汴), 남이웅(南以雄)의 적장자 학생 남두상(南斗相), 김양언(金良彦)의 적장자 김세호(金世豪), 김기종(金起宗)의 적장자 학생 김만창(金萬昌), 이서(李曙)의 적장자 학생 이민일(李敏日), 최내길(崔來吉)의 적장자 학생 최호(崔好), 홍진도(洪振道)의 적장자 학생 홍부(洪溥), 신경유(申景裕)의 적장자 학생 신담(申墰), 이항(李沆)의 적장자 학생 이상현(李尙賢), 이기축(李起築)의 적장자 학생 이만□(李萬□), - 원문 빠짐 -
□□득(□□得)의 적장자 학생 □응엽(□應燁), 박□□(朴□□)의 적장자 학생 박세홍(朴世洪), 김태흘(金泰屹)의 적장자 학생 김효신(金孝信), 최응□(崔應□)의 적장자 학생 최준(崔峻) 등은 응당 공신과 부자(父子) 관계로 추은하는 반열에 있습니다.
교서를 가지고 살펴보면, 부모 처자를 모두 공로의 고하에 따라 공신과 하나로 보니, 이를 따라 시행해야 할 듯합니다. 하지만 임진년 후에는 문서가 산실(散失)되어 일찍이 선조(先朝) 때에 호성청난선무 공신(扈聖淸難宣武功臣)을 마련할 때의 고사를 찾아낼 길이 없어서 단지 광국평난(光國平難) 때의 견문(見聞)만 가지고 시행하였습니다.
어떤 이는 공신의 등급을 따지지 말고 자궁 준직자(資窮準職者)는 당상에만 올리고 참하관은 6품으로 천전(遷轉)하자는 말을 하였는데, 등급의 구분이 없어서 논의가 정해지지 못했습니다. 성상께서 누차 하교하시어 대신에게 수의(收議)하도록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또한 타당한 결론을 내릴 수가 없어 전조(銓曹)에 돌려보냈습니다.
그 당시 전조에서 필시 처치한 일이 있었을 터인데 그때의 등록이 또한 지난해 변란 때에 유실되어 상고할 수가 없습니다. 아래에서는 감히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으니 상께서 재결하여 시행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다시 대신과 의논하여 결정하겠다.”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건우 (역) ┃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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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仁祖三年
六月仁祖 3年(1625) 6月 15日
연양군 이계한 등에게 가자할 것 등을 청하는 이조의 계
又以吏주D1-001曹言啓曰:“自開國以來,凡功臣過會盟祭後,則皆有父子推恩,舊功臣及功臣嫡長賞加之事。延陽君金주D1-002繼韓、樂城君金璽信、慶陽君李士恭、驪陽君閔仁伯、益興君李應順、石陵君全龍、江陵府使姜絪주D1-003、原주D1-004陽君宋康、海愼君李希齡、豐巖君朴夢[周]주D1-005,皆以先王朝舊功臣,入參會盟,似當應授加資。錦陽尉朴瀰、全昌尉柳廷亮、韓平君李慶全、京畿監司權盼、綾川君具仁垕、西城君韓汝復、月川君柳永津、行善山府使沈惀、前牧使沈恪、前牧使鄭基廣、長興府使金憙、故監司金緻、蓬山君鄭象哲,皆以舊功臣嫡長,亦當應授加資。
前守주D1-006尹晥、前僉正尹東老,則‘年滿七十,已經四品實職者,陞堂上’,載展錄,似當依舊例施行。其中李德演以堂上官,已行府使,年踰七十,而未經堂上實職之故,本曹不敢下批。以堂下四品而年滿七十者,尙且陞堂上,則堂上七十者只以未經實職,不得與加資之列,似爲冤悶。事異常規,恭候睿斷。崔彦恂주D1-007、林祐、朴忠敬、辛大容,則內官、庶官之身參正勳者,止於崇祿已有定制,今不可踰越本品。
李重老父副正麟奇、李澥父同知效元、李沆父學生樹元、洪주D1-008振道父前縣令熹、兪伯曾父【缺七八字】주D1-009、朴炡父參判東善、洪孝孫父折衝주D1-010建、柳[䪷]주D1-011父都事時[輔、趙]주D1-012時俊父折衝玉乾、金光熽父行知敦寧府事尙容及李時白嫡長子縣주D1-013令恪、金完嫡長子前監察汝水、邊潝嫡長子監察復一、韓嶠嫡長子前主簿宣吉、李守一嫡長子奉直斗極주D1-014、成大勳嫡長子宣敎時夏、兪伯曾嫡長子學生櫄、張晩長子學生歸漢、鄭忠信嫡長子學生砯、洪瑞鳳嫡長子學生命一、文晦嫡長子學生仲龍、李元榮嫡長子學生日磊、安夢尹嫡長子學生應昌、崔應水嫡長子學生汴、南以雄嫡長子學生斗相、金良彦嫡長子世豪、金起宗嫡長子學生萬昌、李曙嫡長子學生敏白주D1-015、崔來吉嫡長子學生好주D1-016、洪振道嫡長子學生溥、申景裕嫡長子學生墰、李沆嫡長子學生尙賢、李起築嫡長子學生萬[實、姜]주D1-017得嫡長子學生應燁、朴[炡]주D1-018嫡長子學生世洪、金泰屹嫡長子學生孝信、崔應[一]주D1-019嫡長子學生峻等,應在父子推恩之列。
“以敎書觀之,則父母妻子皆從其功之高下,與其身而一視,似當依此施行。而壬辰之後,文書散失,曾在先朝扈聖、淸難、宣武功臣磨鍊之時,無由尋討故事,只以光國、平難時聞見所及者[爲之。]주D1-020或云‘勿論功臣等級,資窮準職者則只陞堂上,參下官六品陞遷’,而未有分等高下之別,故論議未定。自上屢爲下敎,大臣收議,非止一再,亦不能停當,歸之於銓曹。銓曹必有處置,而其時謄錄,亦失於上年變亂之際,無憑可考,自下不敢擅便。上裁施行。”
傳曰:“更議大臣定奪可也。”
[주D1-001]吏 : 底本에는 “戶”. 奎章閣本에 근거 수정.
[주D1-002]金 : 底本ㆍ奎章閣本에는 “李”. 《仁祖實錄》 03-06-19-04 및 《十九功臣會盟錄》에 근거 수정.
[주D1-003]絪 : 底本에는 “絅”. 奎章閣本 및 《仁祖日記》 03-02-04-20에 근거 수정.
[주D1-004]原 : 底本에는 “厚”. 奎章閣本 및 《光海君日記》 10-09-25-05에 근거 수정.
[주D1-005]周 : 底本에는 없음. 奎章閣本에는 “□”. 《宣祖實錄》 37-06-25-07에 근거 보충.
[주D1-006]守 : 《仁祖實錄》 03-06-19-04에는 “僉正”.
[주D1-007]恂 : 底本에는 “峋”. 奎章閣本에는 “▨”. 《仁祖實錄》 03-06-19-04 및 《十九功臣會盟錄》에 근거 수정.
[주D1-008]洪 : 奎章閣本에는 “▨”. 同一 기사 및 《仁祖實錄》 01-閏10-18-03에 근거할 때 底本이 옳음.
[주D1-009]缺七八字 : 《西溪集ㆍ吏曹參判杞平君兪公諡狀》에 근거할 때 “同知敦寧大逸”인 듯함.
[주D1-010]折衝 : 底本에는 “衝折”. 奎章閣本에 근거 수정.
[주D1-011]䪷 : 底本ㆍ奎章閣本에는 “□”. 《仁祖實錄》 01-閏10-18-03 및 《西坰集ㆍ伯氏贈領議政碑銘》에 근거 보충.
[주D1-012]輔趙 : 底本ㆍ奎章閣本에는 “缺”. 《西坰集ㆍ伯氏贈領議政碑銘》 및 《十九功臣會盟錄》에 근거 보충.
[주D1-013]縣 : 底本에는 “孫”. 奎章閣本에 근거 수정.
[주D1-014]斗極 : 《十九功臣會盟錄》에 근거할 때 “滈”인 듯함.
[주D1-015]白 : 底本에는 “日”. 奎章閣本 및 《十九功臣會盟錄》에 근거 수정.
[주D1-016]好 : 《十九功臣會盟錄》에 근거할 때 “好人”인 듯함.
[주D1-017]實姜 : 底本ㆍ奎章閣本에는 “缺”. 《十九功臣會盟錄》에 근거 보충.
[주D1-018]炡 : 底本ㆍ奎章閣本에는 “□”. 《十九功臣會盟錄》에 근거 보충.
[주D1-019]一 : 底本ㆍ奎章閣本에는 “□”. 《十九功臣會盟錄》에 근거 보충.
[주D1-020]爲之 : 底本ㆍ奎章閣本에는 없음. 《仁祖實錄》 03-06-19-04에 근거 보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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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주 상세하게 설명 하셔서 잘 보았습니다 감사 합니다
▷적장(嫡長)
적파(嫡派)에서 낳은 맏아들과 맏손자(-孫子)
▷ 사유(赦宥)
赦 용서할 사 宥 너그러울 유
혹시 후손 중에 죄를 짓는 경우 너그럽게 용서를 해 주고 모범적인 생활을 할 것을 권고하라는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구마[ 內廐馬 ]
내구(內廐)에 속한 말. 임금의 하사품으로도 자주 쓰임.
고려 시대에는 상승국(尙乘局)이나 봉거서(奉車署)에서, 조선 시대에는 내사복시(內司僕寺)에서 담당함.
[참고어] 내구(內廐). 내사복시(內司僕寺). 봉거서(奉車署). 상승국(尙乘局).
---廏 마구간 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