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중기 경상북도 영천 지역의 열녀.
[가계]
영천 이씨(永川 李氏)는 이광익(李光益)의 따님으로 부군(夫君)은 영천인(永川人) 황보열(皇甫悅)이다.
황보열은 고려 초 상장군(上將軍) 황보능장(皇甫能長)을 시조로 하는 영천 황보씨(永川 皇甫氏)의 후손이다.
고조 황보덕(皇甫德)이 장기(長鬐)에서 영천으로 이주하였으며, 증조는 황보령(皇甫齡), 조부는 황보남(皇甫楠)이다.
아버지는 황보익(皇甫益)이며, 어머니는 월성 이씨(月城 李氏)로 이의강(李義康)의 따님이다.
공은 경상북도 영천시 화남면 별곡(別谷)에서 태어났다.
슬하에 동몽교관(童蒙敎官) 황보성(皇甫星)이 있다.
[활동 사항]
영조(英祖) 신해년(辛亥年 : 1731)과 임자년(壬子年 : 1732)은 거듭된 큰 흉년으로 곡식이 모두 고갈되어 굶주린 얼굴만 서로 쳐다보고 있을 때 이미 비축미가 덜어져 관가에서도 구휼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안 영천 이씨는 사재(社財)를 기울여 40여 호 동민들의 목숨을 살렸다. 이때 동민들이 엎어지고 쓰러지는 모습은 마치 어인아이가 우물에 들어가려는 것과 같았으므로 이씨의 덕은 가엽게 여기는 진심에서 나온 것으로 이른바 명예를 위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관가에 보고하고 그 덕에 감동하여 그 행적이 없어짐을 참을 수 없어 계축년(癸丑年 : 1733) 겨울에 돌을 세워 기록을 남기니, 비문에는 ‘고사인황보열처영양이씨적덕비’라 가운데 크게 적고 양편에 그 사실을 기록하였는데 그를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신임(辛壬) 두 해의 큰 흉년에 굶주린 자가 길을 넘치고 / 빈궁한 마을에는 몇 백 명이 죽게 되자 / 이씨가 재산 쏟아 구렁에서 건지었네. / 부자도 어려운데 과독(寡獨)에서 나오니 / 이웃이 잊지 못해 가슴 깊이 새기었네. / 비석은 썩지 않고 비각은 솟으리라.’
이씨가 영조(英祖) 을해년(乙亥年 : 1755)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 해에도 흉년이 들자 그의 아들 황보성(皇甫星)도 어머니의 뜻을 이어 재산을 헤아리지 않고 힘을 다해 이웃을 구제하였으며, 을해년(乙亥年 : 1779) 봄 보릿고개에는 손자 황보우(皇甫瑀)와 황보완(皇甫琓)도 또한 같은 일을 아였으니 3대 모두 가법으로 지켜 대대로 추락하지 않고 더욱 적덕비를 빛나게 하고 있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영천시 화남면(華南面) 구전리(龜田里)에 있다.
[상훈과 추모]
경상북도 영천시 화남면(華南面) 구전리(龜田里)에 영천이씨적덕비각(永川李氏積德碑閣)이 있다.
[참고 문헌]
『영모정실기(永慕亭實記)』
『영천의 충효 이야기』(포은선생숭모사업회, 2009)
첫댓글 여기 올리는 효열 자료는 나중에 인터넷 서비스 할 자료입니다.. 혹 틀린 부분 없는 지 봐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