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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복음의 기준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너희를 교란시키는 어떤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개시키려는 것이라“(갈 1:7) [한글킹]
바울은 다른 복음이 없다고 말한다. 자신이 전한 복음 이외에 다른 것은 복음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저들이 하나님을 말하고 율법을 말하고 설령 그리스도를 말한다고 할지라도 자신이 전한 이외의 것은 복음이 아니라 그 복음을 변개하려는 다른 복음이라는 것이다.
갈라디아서를 쓴 배경이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얻는데 그 구원을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는 혼합주의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유대인들의 율법으로의 회귀는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내용을 들여다보면, 바울은 행위로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인본주의나 율법을 지킴으로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율법주의를 신봉하는 유대교의 맹점을 여지없이 지적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을 섬겨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교리를 말하는 이론적인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종교라는 것과 이것은 바울이 전한 복음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1.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배우지 않은 복음
다른 복음을 가려내는 첫 번째 기준은 바울이 배운 방법으로 배우지 않은 복음이다. 바울이 말하는 다른 복음의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배우지 않은 복음을 말한다. 즉, 하나님을 만난 후에 제자들과 같이 삼 년 이상의 조정기간을 거치면서 영으로부터 직접 배우지 않은 복음이 곧 다른 복음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정기간을 거치지 않은 다른 복음은 어떤 것인가? 이 복음은 우리에게 익숙한 복음이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배우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법을 사람으로부터 배운 복음을 말한다. 뒤에서 세부적으로 설명하겠지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하지 못하는 복음, 즉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서 완전히 변화되었듯이 예수님을 만나서, 즉 영의 실재를 만나서 그 예수님으로부터 배우지 못한 복음을 말한다. 단순히 사람들로부터 예수님에 대한 정보를 전달받고 지식적으로 이해하는, 인격적인 영접이 없는 복음을 말한다. 이런 복음은 입으로는 예수를 말하고 하나님을 말하고 있지만 생활에서는 자기의 생각과 계획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종교적인 생활을 하게 한다. 복음이라고 말하는 것과 믿음이라는 단어조차도 쓰기가 거북스러운, 종교적인 기독교 생활을 말한다. 자신의 위안을 얻기 위해서 새벽기도 한 시간, 주일예배 한 시간을 내는 교회생활을 말하는 것이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이런 복음이 아니었다. 하루 한 시간, 일주일에 한 시간이 아니라 생활의 전부가 하나님과 함께하는 생활, 어느 때든지 하나님께 묻고 답할 수 있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말하는 것이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그리스도 예수로부터 배우고,(엡 4:21, 각주참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스스로 아는 인격적인 복음이었다.(고후 13:5, 각주참조) 지식적으로 이해하는 복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동행의 실질이 있는 복음이었다. 인격적인 예수를 영접하고 그분이 나의 주인이 되고 그분의 명령에 따라 세상을 살아가는 생활이 있는 복음이었다. 동행의 이야기가 있는 실질적인 복음이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살았던 그런 생활이 있는 복음, 모세와 다윗이 하나님과 함께 하였던 동행이 있는 복임이었다. 하나님과 함께함으로 인하여 세상에 들어갈 수가 없고, 하나님 이외에 어느 것도 신뢰하지 않는 생활, 삶의 문제나 해야 할 일을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응답을 듣고 그 내용대로 움직이는 생활 가운데 인격적인 신뢰를 키워가는 생활 속의 복음이었다. 이런 복음의 바탕에서 생활을 하던 자들이 그렇게 빨리 하나님을 떠날 수가 있는가를 바울은 이상하게 여긴 것이다.
1-1. 적용
모두冒頭에서 “다른 복음이 바울 시대에 등장하여 놀라게 하였는데 그 복음이 변신에 변신을 하며 지금까지 자리 잡고 있다면 지금 바울이 전한 참 복음이 이 시대에 남아 있기나 한 것인가를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고 언급을 하였다.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서 배우지 않은 복음은 다른 복음이라는 이 첫 번째 기준에 비추어 보면 지금의 모든 기독교와 이로부터 전파되는 복음은 다른 복음이라는 것 외에는 달리 말할 수 없다. 우선 스스로가 누구에게 배웠는가를 반문해보라. 골육지친에게 가지 않고, 먼저 된 사도들에게 배우지 않았고, 사람들에게 배우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만 배워서 지금에 이르렀는가를 살펴보라. 지금의 신앙은 하나님을 만나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전달받고 사람을 통해서, 다시 말하면 교회를 통해서 오늘에 이른 것이 아닌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동안에 들어온 복음을 부인하고 교회생활을 한 것을 부인하자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달받고 교회생활을 하기 전이나 후에,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서 배우는 과정이 있었는가를 묻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교회생활을 하였다면 그것은 바울이 전한 복음일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이 없었다면 그것은 다른 복음이라는 것이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배운 복음이라면 성도들은 주님의 말씀대로 지체가 될 것이고 교회의 머리는 주님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손과 발이 서로 싸우지 않듯이 교회의 모든 것은 살아있는 생명체로서 유기적으로 움직일 것이고 교회의 문제는 주님의 명령에 의해서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질 것이다. 주님의 계시로 참 복음을 배웠다면 어떤 잘못을 놓고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고 싸우는 지체들의 분쟁은 교회에서 없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제자들이 배웠던 기간만큼 배웠는가를 묻는 이 첫 번째 질문에 답할 자가 어디에 있는가?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기준에 맞지 않으면 다른 복음이고, 이 다른 복음에는 영생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이 성경의 확고한 태도이다. 앞의 쟁점 2에서 살펴보았듯이 백보좌 심판의 기준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동행 속에서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라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다시 반복해서 살펴보라고 강조하는 이유는 다른 복음이라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이단異端이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이단이 영생을 얻는다고 생각하고 있는가? 아닐 것이다. 바울이 다른 복음을 전한 자들에게 저주를 퍼붓고 스스로 베어지길, 즉 스스로 죽기를 바라는 이유는 그들이 믿는 자들을 다른 복음으로 끌고 가서 실족케 하고 지옥으로 끌고 가기 때문이라는 것을 보아야 할 것이다. 이단은 결코 영생을 얻을 수 없다. 최후의 심판인 백보좌 심판의 기준에서 살펴보았지만 바울이 전한 복음 이외의 다른 복음, 즉 형식적인 거짓신앙의 내용으로는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이제는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아야 한다. 바울이 전한 복음에 부합하지 아니하면 나 자신이 지금 다른 복음에 속해 있는 것이고, 나 자신은 올바르게 간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지금 자신도 모르게 이단이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금 바울이 전한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에 속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나 자신이 이단에 속해 있다는 것을 인식하라는 것이다.
“4 만일 누가 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또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너희가 받아들이지 않은 또 다른 영을 받거나 너희가 영접하지 않은 또 다른 복음을 전파하면 너희가 그를 잘 용납하는도다”(고후 11:4) [한글킹]
본문은 사도 바울이 다른 복음에 대하여 언급한 또 다른 구절이다. 바울은 본문에서 다른 복음의 유형으로 세 가지를 지적한다.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또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너희가 받지 않은 또 다른 영을 받거나, 너희가 영접치 않은 또 다른 복음을 전파하면”이라고 한 세 가지이다. 바울은 이 세 가지의 다른 복음의 유형을 지적하기 전에 성도들이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단순함에서 떠나 부패할까봐 두려워한다.(고후 11:3, 각주참조) 다른 복음에 의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단순함에서 떠나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염려한 것이다.
이 세 가지 유형 가운데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또 다른 예수의 전파”는 그리스도의 계시에 의해서, 즉 영의 실재로부터 직접 배우지 않은 다른 복음을 말하는 것도 있지만 부활 논쟁에서 믿음을 뒤엎는 자들일 수도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딤후 2:18, 각주참조) 구체적인 내용은 다른 복음의 기준, 즉 이단의 기준에서 논하기로 한다.
2.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또 다른 예수
바울은 본문에서 다른 복음을 지칭하면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또 다른 예수의 전파”를 거론한다. 이 부분에서 면밀히 검토해야 할 것은 “또 다른 예수”가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가이다. 이 부분을 부활 논쟁과 결부시킬 수도 있겠지만(딤후 2:18, 각주참조) “영접하지 않은 또 다른 복음”을 거론한 점에서 인격적인 관계 형성에 도움이 되지 않는 예수를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인격적인 관계 형성에 도움이 되지 않는 예수를 말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법은 알지 못하면서 그리스도를 전파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동행과는 거리가 먼, 지식적인 이론만 가지고 그리스도를 전파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법을 말하는 참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적인 이해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 각주참조)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다.
“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바와 같이 과연 너희가 그에게서 듣고 또 그에 의해 배웠을진대”(엡 4:21) [한글킹]
본문에서 바울은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듣고, 또 그에 의해서 배웠을 것이라”고 반문한다. 본문의 내용과 같이 믿는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배우기 위해서는 일정 시간의 훈련이 필요하다. 이 기간을 조정기간이라 칭하였다. 이 기간 동안에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회복하고 형성하는 모든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성경적인 영혼의 구원 과정을 보면, 복음의 전파는 오중 사역의 ‘복음 전도자’(엡 4:11, 각주참조)들이 그 역할을 감당할 것이다. 그리고 그 후에 사도나 선지자, 교사들에 의해서 영의 실재와 함께 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사람과 함께 하는 법을 사람에게 배우듯이 영이신 하나님과 함께하는 방법은 사람으로부터 배울 수는 없고 영으로부터 배워야하는 것이 영의 원리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배워야 하는데 이 배움의 시간이 제자들이 주님께서 배웠던 시간, 바울이 아라비아에서 배웠던 시간이다. 이에 대하 정확한 성경의 기록은 없지만 삼 년은 넘고 사 년은 안 되는 기간, 필자가 이름 짓기로는 ‘조정기간’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기간 동안의 훈련이 없는 복음은 다른 복음이라는 것이 바울이 말한 요지이다. 바울이 전한 복음인가를 분별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배우는 기간 동안에 어떤 문제가 중점적으로 다루어지는지, 핵심적인 내용만 살펴보기로 한다.
2-1.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생활
다른 복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생활을 한다. 반면, 참 복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을 가르친다. 성령의 언어가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고는 하나님과 의사소통을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어떻게 듣는가를 가르친다. 이 과정은 신앙생활의 핵심으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될 핵심 필수과정이다. 모든 성경의 인물들이 처음 하나님을 만났을 때는 하나님과 대화를 하였다는 사실을 상기하여야 할 것이다. 바울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늘에서 “사울아, 사울아” 불렀고 바울은 “누구시니이까?”(행 9:4~5, 각주참조)라고 물었다. 이 대화가 신앙생활 내내, 이 세상을 마감할 때까지 계속되기 때문에 성령님의 언어를 배우는 것은 필수과정인 것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의 보호 아래 자라면서 말을 배우는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 의사표시를 어떻게 하는가에 대해 하나님과 완벽하게 소통할 수 있도록 성경의 기록을 근거하여 성령님의 언어의 모든 것을 배운다. 어린아이가 삼사 년이면 말을 배우듯이 조정기간이 지나면 대부분 성령의 언어를 터득하여 스스로 하나님과 소통을 할 수 있게 된다. 이 기간 동안 성경의 기록이 얼마나 정확한가를 모두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여러 번에 걸쳐 말씀하셔서 그 자녀들이 말을 배우는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도우신다.(히 1:1, 각주참조) 따라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일방적인 기도생활로 일관하고 있다면 다른 복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2-2. 성령 사역의 개관을 모르는 생활
다른 복음으로 점철된 지금의 기독교는 성령님의 일하심의 단계를 구별하지 못하여 혼돈 속에 있다. 지금의 기독교가 문제가 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성령의 사역에 대하여 학문적인 이론을 가지고 접근한다는데 있다. 때문에 성령의 사역에 대한 개념조차 정리하지 못하고 서로 다른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 사도와 같이 영의 실재를 만난 사람들은 성령의 체험에 대해서 그것이 성령의 인침인지, 거듭남인지, 성령 세례가 무엇인지, 성령 충만이 왜 필요한지를 안다. 따라서 참 복음을 전달받은 사람들은 성령님의 사역을 이해하지 못하면 영의 일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성령의 사역에 대한 개념들은 가르쳐 그들이 성령의 체험을 하였을 때 그것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알 수 있게 한다. 지금 기독교 종사자들의 성령 사역에 대한 이해 수준은 거의 바닥이라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학자들도 개념을 정리하지 못하여 서로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연구를 등한시하는 목회자들은 더 말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영생을 얻는 구원의 기준은 교단에 뿌리를 두지 않는다. 내가 어떤 교단에 소속된 누구 밑에서 신앙생활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하나님과 동행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지금의 기독교는 목사들이 대부분의 성도들로 하여금 교단을 신뢰하게 하여 교단의 신뢰 속에 묶는다. 그리고 그 교단에 자신이 속해 있다는 것과 교단에서 인정해주는 목사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신앙이 정당하다는 것을 주장한다.
지금의 목회는 성령님의 사역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목사들의 지배력에 의해서 움직인다. 대부분의 성도들을 목사 밑에 예속시켜 놓고 순종을 강요하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믿음이 없는 자들이고 하나님의 복이 임하지 않는다고 위하감威嚇感을 조성하면서 자신들의 의도대로 이끌어 간다. 이런 행태는 성경의 내용인 참 복음과 완전히 동떨어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경우도 인간에게 조종이나 통제, 억압이나 강요를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이라면 이 방법을 취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고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원리이기 때문에 지금의 기독교와 같이 자율성을 봉쇄하는 것이 아니라 자율성을 보장한다. 성령의 인도에 따라 일을 하는 하나님의 종들은 성경이 스스로의 자생력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것을 안다. 또한 하나님이 살아계신 분이라는 것도 안다.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으로 일을 하지만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은 자신이 행하기보다는 하나님께 맡긴다. 따라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의 원리를 알아야 하는데, 이 영의 원리는 성령 사역의 개관에서 출발한다. 성령님의 일하시는 원리가 무엇인지를 모른다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사사건건 충돌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인간이 의지를 드렸을 때 어떤 영의 원리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가를 아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성령론에 대하여 모든 학자들의 주장이 다른 이유는 저들이 진리에 접근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사건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이것은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론에 대해서는 한 목소리가 나오질 않고 있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고 진리를 말하는데 왜 각자가 다른 목소리를 내는가? 십자가의 대속 사건과 같이 왜 의견 일치가 되지 않는가? 그 이유는 진리에 접근이 안 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 외에는 달리 추론할 것이 없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 올바른 접근이 되어 있지 않은 것은 다른 복음이라는 것이다.
2-3. 하나님을 경험으로 알지 못하는 생활
다른 복음에 의한 생활은 하나님을 경험으로 알지 못하는 생활이다. 바울은 신앙이 경험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는 항상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성령의 음성에 따라 행할 것을 강조하고, 성령님의 일하심이 삶 속에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따라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성경에 기록된 일들과 같은 경험을 하는 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에서 필수라는 것을 바울은 놓치지 않는다.
하나님을 경험으로 알지 못하게 하는 사탄의 방해는 앞에서 지적한 다른 복음의 유인의 요소에 해당하는 부분의 핵심이다. 그들이 왜 그렇게 빨리 하나님의 곁을 떠났을까? 신앙은 실제 생활과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생활의 문제를 하나님으로부터 해결 받을 때이다. 생활의 문제를 해결 받는다는 것은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고 부족함이 없이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럴 때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 것이다.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즉 의식주衣食住 문제를 해결 받지 못하면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갈 수 없다. 날마다 먹어야 하고 마셔야 되는 것이 인간의 생리적인 구조이기 때문에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실존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삶의 필요가 공급되지 않으면 생명의 유지를 위해서 당장 필요한 것들을 자신의 방법으로 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 자들은 이때 이탈된다. 보편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으로부터 신뢰를 얻어서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명한 공급을 확인할 수 있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요구된다.
“5 어찌하여 너희가 우리를 이집트에서 나오게 하여 이 악한 곳으로 데려왔느냐? 이곳에는 씨 뿌릴 곳도, 무화과나무들도 포도나무들도 석류나무들도 없고 마실 물조차 없도다.”하니“(민 20:5) [한글킹]
이스라엘 민족이 40년 동안 살았던 광야의 상태를 가감 없이 표현한 구절이다. 씨 뿌릴 곳도 없고, 무화과나무들도 없고, 포도나무들도 없고, 석류나무들도 없고, 심지어 마실 무조차 없는 곳이었다.
“4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옷이 낡아 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어오르지 아니하였느니라”(신 8:4) [한글킹]
이런 광야생활에서도 의복이 해지지 않았고 발이 부어오르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먹고, 마시고, 입고 사는데 문제가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누구의 도움으로 어떻게 살았는가? 하나님의 도움으로 살았다. 하나님의 공급으로 살았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인 기록인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의 도움으로 살았다. 이것이 신앙이다. 바울이 전한 복음의 실체가 바로 이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공급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다른 복음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하면서 경험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신앙은 다른 복음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의 것을 공급받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조정기간 동안의 훈련의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신뢰를 이끌어냈을 때이다.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하면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 말고는 어떤 방법도 없다. 그리스도를 떠날 수밖에 없고 세상적인 방법으로 먹고살 수밖에 없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생활로의 진입은 끝이 보이지 않는 인내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를 갖고 가지 않으면 이끌어 낼 수 없는 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이다. 세상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말뿐인 하나님과의 동행, 말뿐인 주님과의 연합이 아닌 것이다. 조정기간의 생활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필요만 채우는 기간이다.(상세한 것은 필자의 책 회복 시리즈 ⌜성경적 생활⌟ 02. 조정기간과 성경적 생활을 참조하라.) 이 가간 동안의 삶은 불을 통과하는 기간이기 때문에 대부분 믿음이 약한 자들은 세상으로 다시 돌아간다. 다른 복음이, 즉 사탄이 모든 것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방해하는 기간이다. 지독스러운 믿음만이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는 기간이다. 이 기간을 거쳐 경험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 신앙은 다른 복음이다.
2-4. 적용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면 다른 복음이라는 것을 첫 번째로 지적을 하였다. 지금 신앙의 현주소를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에 다 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는 현실이다. 이런 현실 속에 하나님과의 만남이라는 인격적인 요소는 없다. 알기 쉽게, 이순신 장군에 대해서 지식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과 같다. 이순신 장군과 인격적 교류는 없다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역사 속의 인물이고 죽은 사람이기 때문에 인격적 교류를 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역사 속의 인물이지만 부활하셔서 승천하셨고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시는 분이다.(롬 8:34, 각주참조) 바울은 이 예수님으로부터 배운 것이다. 때문에 예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분에 대한 역사 속의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그분을 소개해서 인격적인 교류를 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소개를 한다면 서로 인사를 하고 말을 주고받으며 통성명을 할 것이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서도 이렇게 서로 주고받는 의사소통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인격적인 관계가 무엇인지는 모르고 그저 성경에 있으니까 성경만 보면 된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버지의 사진이 있으니까 사진만 보면 된다는 것과 같다. 삶에서 문제가 있고 도움이 필요할 때에는 살아계신 아버지와 상의를 하고 조언을 구하고 도움을 청하는 것이지, 사진에게 도움을 청하고 조언을 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 문제가 생기면 성경에게 도움을 청하고 조언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고 조언을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모든 규범이 대법전 속에 들어있으니 대법전 하나 던져주고, 아버지와의 대화는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들은 성경이 없을 때에도 하나님이 계셨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 노아 때 성경이 있었는가, 아브라함 때 성경이 있었는가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의식과 형식뿐인 종교의 영에 지배당하여 본질을 알지 못하는 패역한 독사의 자식들이다. 이들의 잘못된 가르침으로 수많은 영혼들이 영생에서 멀어진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소자 하나를 실족시키면 연자 맷돌을 매고 물속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눅 17:2, 각주참조)는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는다면 지옥이 예비되어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할 것이다.
3. 너희가 받지 않은 또 다른 영을 받거나
“너희가 받지 않은 또 다른 영을 받거나”의 내용은 복음은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성령님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지금의 신앙생활은 성령님으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종교의 영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본문의 내용은 종교의 영에 의하여 움직이는 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종교생활을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지적한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종교의 영에 의해서 조종되는 경우는 의식이 본질을 대처하는 율법주의가 그 전형이다.
이들에게는 종교적인 의식이 신앙생활 전체를 압도한다. 신앙생활의 핵심인 예배의 모습을 살펴보면, 웅장한 파이프 오르간 소리부터 시작하여 예배의 형식이나 진행의 엄숙함 등 혼적인 감각들을 자극하여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연출이 전체를 장악한다. 이들은 설교를 통해 회중들에게 은혜를 끼치기 위해서 은혜를 줄만한 감동의 소재거리를 찾아 필사적인 노력을 한다. 회중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라면 꾸며낸 이야기, 즉 픽션을 인용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픽션을 인용한다는 것은 거짓말을 인용하는 것인데, 진리만을 말해야 하는 설교의 단에서 꾸며낸 이야기를 예로 들어, 즉 거짓말로 감동시키려고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거짓의 아비인 사탄의 종노릇을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자들이 이런 짓을 한다는 것은 그들의 영적인 마비가 어느 정도인가를 가늠할 수 있다.
이런 자들의 설교는 이미 도덕이나 윤리 강의로 전락하였고, 설교가 세상의 코미디 수준을 넘어서서 세상의 오락 판인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의 단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형태는 설교의 단인데 내용은 세상의 것들이 모두 차지하고 있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라고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모습은 거짓신앙의 전형적인 형태에서 나타나는 것으로서 다른 영을 받은, 즉 종교의 영을 받은 자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한마디로 설교가 아니라 생쇼를 하는 자들의 행태이다.
다른 영을 받은 자들이 인도하는 예배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영을 받게 한 사탄을 예배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런 자들이 주도하는 예배는 하나님을 말하지만 자기 과시의 영에 사로잡혀 자신을 드러내기에 바쁘다. 자신을 세상에 자랑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는 카멜레온과 같은 자들이다. 예수님에게 돌려야 할 영광을 자신이 가로채는 전형적인 종교적인 도둑들이다. 말은 예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하고 있지만 예수님이 드러날 때 자신도 같이 드러나야 직성이 풀리는 자들이다.
바울은 다른 영을 받은 자들의 실상에 대하여 고린도후서 11장에서 그 모든 것을 말한다. 그리고 다른 영을 받은 자들로부터 나오는 것은 다른 복음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바울은 이러한 다른 영을 받은 자들이 거짓 사도이고, 기만하는 자들이고,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가장하는 자들이라고 설명한다.(고후 11:13, 각주참조) 여기에 덧붙여 사탄도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기 때문에 놀랄 일은 아니라고 말한다.(고후 11:14, 각주참조)
3-1. 적용
현실 속의 교회의 모습들을 보자. 종교의 영과 과시의 영에 잡혀있는 자들의 실상을 보면 이런 자들이 인도하는 예배에서는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찾아볼 수 없다. 국가적인 기념일의 행사에 일동 기립이 있고, 애국가 제창, 순국선열을 위한 묵념이 있고 기타 순서가 있듯이, 예배가 시작되면 일동 기립이 있고, 찬송이 있고, 신앙고백이 있고, 대표기도가 있고, 설교가 있고 일련의 진행이 있다. 예배가 한두 시간 동안 순서에 의해서 이끌려가는 세상의 행사 진행과 전혀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진행되어 가는 교회의 목회자들을 보면 대부분 과시의 영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런 자들의 실태를 조사해 보면 이들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현수막을 거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택시 광고, 버스 옆구리 광고, 삽지 광고 등 동네 족발집이나 예식장을 광고하듯이 교회 광고를 하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들에게 모든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신성한 공동체라는 의식은 안중에도 없다. 하나의 교회가 잘못되면 전체 교회가 지탄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의식하지도 않는다. 이들에게는 교회의 품격이라는 것도 고려 대상이 아니다. 마치 세상에서 살기 아니면 죽기 식의 막가는 이익집단과 같이 속칭 저인망底引網식 바닥 작업, 즉 바닥 광고 작업에 총력을 기울인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언론매체는 피할 수 없는 유혹이다. 신문 방송의 광고뿐만 아니라 방송을 통하여 예배의 실황을 중계라도 할 때면 마치 나이트클럽 삼류 가수와 같이 자신의 얼굴을 알리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과 같다. 이들의 예배시간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알리고 자랑하는 시간이다. 문제는 비단 이들 뿐만이 아니다. 이런 종교의 영에 사로잡힌 자들 밑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신앙의 진수가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이들을 추앙하고 따르는 수준 또한 거의 숭배에 가까운 수준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교회의 사건 가운데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사건이 2006년에 있었던 “목사님 찬가”사건일 것이다.(각주참조) 이 사건은 실행단계에서 저지되었지만 예행연습까지 되었다는 사실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대한 판단은 주님께서 하실 일이기 때문에 그 판단은 금하기로 한다. 이 사건에서 교훈으로 삼고 자성해야 할 것은 과시의 영이 장악하고 있는 한국 교회의 비참한 실상에 대해서이다. 지구상의 피조물 가운데 찬양받기에 합당한 자는 없다. 찬양은 오직 하나님 한 분에게만 해야 한다. 인간 개인에게 돌아가는 박수와 갈채는 그를 있게 한 하나님께 돌려야 하는 것이 정도正道이다. “목사님 찬가”는 그 당사자가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영적인 리더라고 불리는 자라는 점에서 필자에게는 그 충격이 컸다. 한마디로 배신감과 허탈감을 그를 아는 모두가 감출 수 없었을 것이다. “목사님 찬가”는 마치 “김일성 찬가”와 흡사하다는 세간의 평이 많은 여운을 남긴다. 찬양을 받는 당사자가 알고 모르고를 떠나서 평상시에 그들의 교육이 지향했던 지향점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그 씁쓸함이 지워지지가 않는다.
이런 종교의 영과 과시의 영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이 말하는 복음은 바울이 전한 복음이 아니라 다른 복음이라는 것이다. 이들이 가르치는 것들은 대부분 본질에서 벗어나 있는 인본주의적인 내용들이다. 이들의 가르침에는 하나님을 어떻게 해야 만날 수 있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도 없고 답도 없다. 또한 하나님의 음성을 어떻게 듣는가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고 가르치지도 못하고 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이런 복음이 아니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이 지향하는 생활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분을 우리 안에 모시고 그분의 음성을 듣고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생활 이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바울이 전한 복음이었다.
[회복시리즈 06. 신앙의 진단과 쟁점 中 일부 발췌 / 박찬빈 著]
첫댓글 후원이 없습니다... 김장 난방비도 없는데
하루하루 아슬아슬 곡예하듯 카페운영을합니다
카페운영을 하려면 데이터 통신비 홈데스크 인터넷
비도 듭니다 카페를 접고 이것이라도 아껴야 할 형편입니다
목사님이 운영하는 카페들은 후원이 되는데 평신도인
제가 목사님들만 모이는 카페를 운영하다보니 평신도에게는
후원을 안하십니다 매월1만원 정기후원 백분이 계시면 좋겠습니다
몇분만 정기 후원을 하시는데 1만원 정기후원을 해주세요
치료약값 30만원 공과금30만원 먹거리등을 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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