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의상대(相衣相待)
- ‘나’라는 존재는 수많은 인연의 복합체-
- ‘이것 있어 저것 있다’일체법 성립 원칙 -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생명체를 만나게된다.
그 생명체들은 생명체가 아닌 것과는 좀 다른 특징들을 지니며 살아간다.
그들은 우선 종족 번식을 위하여 생식작용의 기능을 가지며,
개체의 성장이나 생명 유지를 위하여 끊임없이 신진대사 작용을 한다.
신진대사란 간단히 말한다면
생명 유지에 필요한 영양소를 외부에서 섭취하고
생명 활동의 과정에서 생긴 노폐물을
몸 밖으로 내보내는 생리과정이다.
물리학적으로 표현한다면
생명활동에 필요한 자유에너지(free energy)를 외부에서 끌어다 쓰는 과정이다.
(지구상에 있는 생물의 경우에,
이 자유 에너지의 근원은 궁극적으로는 예외없이 태양이다.)
그리고 신진대사 과정은
이러한 자유에너지의 섭취뿐만 아니라,
노후된 우리 몸의 구성 요소들을 교체해가는 과정도 포함한다.
그러므로 ‘나’라는 이 몸은
외부에서 영양소를 공급받아야 하는 존재이고,
이 공급받은 영양소를 에너지로 전이시키기 위하여
외부의 산소를 끌어들여 호흡하여야 하는 존재이며,
몸의 구성 요소를 쉴 새없이 외부와 교체해 가는 존재이다.
이러한 ‘나’라는 존재는
‘외부’와의 밀접한 연관 위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어디까지가 ‘나’이고 어디까지가 ‘나’의 외부인가?
우선 외부에서 들어와서 내 몸 속에 잠시 머물다가 빠져 나가는 음식물이나
공기 같은 것을 내몸이라고 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나의 폐나 위를 들락거렸던
그 많은 분량의 공기나 음식물이 다 내 몸이어야 하며,
그러한 음식물이나 공기를 이루었던 원소들은
다른 사람의 음식이나 호흡에 쓰였을 것이므로
나의 몸과 너의 몸의 구분은 없어지고 만다.
이와는 달리 그러한 음식물이나 공기같은 것을 내몸이 아니라고 하자.
그러면 근육이나 내장, 혈액등 그 모든 것도
다만 나에게 좀 오래 붙어 있기는 하지만
언젠가는 교체되어야 하는 것이므로 나의 몸이라고 할 수 없게 된다.
즉 내 몸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게 된다.
결론적으로 어느 경우에서나 외부와 구별되는 ‘나’라는 존재를
명확히 정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된다.
그러므로 또한 공간상에서
어디까지를 ‘나’라는 존재를 명확히 정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된다.
그러므로 또한 공간상에서 어디까지를 ‘나’라고 해야 하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그러므로 ‘나’라는 존재는
자성(自性)을 가진 것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중중무진(重重無盡)한 인연의 복합으로 이루어진 것 뿐이다.
또한 어떤 인연으로 어떤 개체가 이루어졌다 해도
독립적으로 개체의 생명이 영위될 수 없으며,
끊임없는 외부와의 접촉에 의해서만 생명이 유지된다.
그러므로 ‘나’는 ‘나’아닌 것이 있음으로 해서
비로소 존재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상의상대(相衣相待)라는 존재양식이다.
이러한 상의성이 생명체에서 명확하게 나타나기는 하지만,
상의성이 생명체에게만 작용되는 것은 아니며,
이 우주의 모든 사물이 이러한 방식으로 존재한다.
이를 불교에서는
“저것이 있을 때 이것이 있고, 저것이 생하므로 이것이 생한다.
저것이 없을 때 이것이 없고, 저것이 멸하므로 이것이 멸한다”라는 말로 표현한다.
이렇게 자성이 없이
오직 인연의 화합으로 잠시 이루어지는 것 뿐이므로 무상(無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