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연경에서 배우다(2)
그런데 추사가 연경에 도착했을 때 마침 운 좋게도 절강순무(浙江巡撫)로 8년 동안 항주(杭州)에 내려가 있으면서 <경적찬고(經籍簒?)>니 <적고재종정이기관지(積古齋鐘鼎?器款識)> 등 많은 저술을 내 놓고 있던 완원이 지방반란을 진압한 공로로 포상을 받으려고 가을에 입경해 아직 귀임하지 않고 처가인 연성공저(衍聖公邸)에 있는 자신의 서재 태화쌍비지관(泰和雙碑之館)에 머물고 았었다. 추사는 우선 태화쌍비지관으로 완원을 찾아간다.
이제 47세가 된 장년학자인 완원은 21년전 추사와 비슷한 나이 때 자신과 비슷한 나이이던 박제가와 만났던 기억을 새삼 떠올리면서 그 제자인 추사를 반가이 맞이했을 것이다. 그리고 용단(龍團) 승설차(勝雪茶)를 대접하면서 그의 총기와 학식에 놀라고 진지한 학구열에 감탄한다. 그래서 어느덧 자신의 경학관이나 예술관, 금석고증의 방법론 등을 소상히 얘기하게 되고 추사는 그 해박한 지식과 신예한 관점에 경도되어 바로 사제지의를 맺게 된다.
완원은 귀여운 용모와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나이에 비해 놀랄만큼 많은 학예수련을 쌓은이 해동의 천재를 제자로 맞이한 것이 무척 흐뭇했던 듯 그가 비장하고 있는 당(唐) 정관연간(貞觀年間)에 만든 동비(銅碑)와 남송 우문 구장 송각 <문선(文選)> 같은 진귀품과 태산비(泰山碑)와 화산비(華山碑)의 원탁본 등을 보야주며 양 비 탁모본과 자신의 저서인 <경적찬고(經籍簒?)> 106권, <연경실문집(?經室文集)> 제6권, <십삼경주소교감기(十三經注疎校勘記)> 245권 등을 기증한다.
이에 감복한 추사는 자신의 별호를 완당(阮堂)이라 하여 사제관계가 분명함을 세상에 밝히게 된다. 그리고 옹방강 문인인 심암(心庵) 이임송(李林松)의 서재 진돈실(?敦室)이나 조선사신들이 묵고 있는 법원사(法源寺)에서 옹문(翁門) 주변의 인사들과 만나 사귀게 되니 묵장(墨莊) 이정원(李鼎元), 서계(石谿) 조강(曺江), 몽죽(夢竹) 서송(徐松), 근원(近園) 김용(金勇), 야운(野雲) 주학년(朱鶴年, 1760~1834), 개정(介亭) 홍점전(洪占銓, 1762~1834), 퇴재(退齋) 담광상(譚光祥), 삼산(三山) 유화동(劉華東)과 같은 인물들이 그들이다. 이들과 친교를 트면서 추사는 어떻게 하든지 옹방강을 만나 뵙고자 노력했던듯 하다.
이 때 옹방강은 이미 78세의 고령으로 연경학계를 대표하는 노대가였으므로 함부로 외부인사를 만나지 않는 처지에 있었으나 하도 주변에서 칭송이 자자할 뿐아니라 10년전에 만났던 박제가와의 인연도 있고 해서 추사의 면담을 허락하였다. 문인 이임송을 통해 1월 29일 묘시(새벽 5~7시)에 만나자고 한 것이다.(계속)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구어체 가헌 선생 문체가 어떤지요. 현학적인 주석도 좋지만 전 이런글이 좋습니다...ㅎㅎㅎ
대표적인 몇사람만 알고 있었는데 그 많은 교류문인 ,학자들의 면면들을 잘 ~알았읍니다.고맙고감사드립니다.잘 배웠읍니다.
상정님 읽고 늘 덧글을 달아죽심 감사합니다.
감사하게 보았습니다 다음호도 기대가 됩니다.
뜨락을 어찌하고 이리 납시었는지요. 읽어주심 감사합니다.
스승과 제자와의 귀한 인연,, 별호까지.. 제 소녀쩍 스승님이 생각납니다. 당신의 호 뒷자를 따서 지어주셨던 아호 - 남자호 같아 지금은 쓰지 않지만,, 뵙고 싶어 지네요. 잘 읽었습니다.
예원님의 무지개 동산도 얼마나 멋진 이름이십니까? 츄성허 소치의 관계도 그리 곡진했더군요.
감사하는 마음으로 오늘도 머물렀습니다...개학 하셨지요?
월요일 개학하니 카페에 머무는 시간이 줄어들어 아쉽습니다. 감사합니다.
속속들이 재미를 더합니다.
읽어 주시어 감사합니다.
젊은 추사는 정말 담대한 인물 이었나 봅니다. 글을 통해 추사의 인물됨을 알것 같더이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이 글은 간송문화에서 가헌 최완수 선생의 글을 옮긴 글입니다. 연경에 가서 짧은 기간에 옹방강과 완원같은 대학자들을 만나 대화를 나눈것은 행운이었겠지요. 추사가 연경에 가기 전부터 연경학계와 우리 사신들과의 교류가 빈번했기에 가능한것 같습니다. 물론 추사의 개인적인 노력과 천재성이 있었기에 가능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