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보 제30호 - 공식명칭 :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慶州 芬皇寺 模塼石塔) - 지 정 일 : 1962.12.20
- 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탑 - 시대 : 신라
- 주소 : 경북 경주시 분황로 94-11, 분황사 (구황동)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걸작품으로,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이다. 원래 9층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은 3층만 남아있다. |
분황사(芬皇寺)
경주시내 황룡사 터 옆, 구황동에 있다. 아마도 황룡사, 분황사등 황(皇)자 들어가는 절이 9개 있었던 곳이 아닌가 싶다.
분황사는 선덕여왕 3년(634)에 건립되었으며 우리 민족이 낳은 위대한 고승 원효와 자장이 거쳐간 절이다. 643년에 자장이 당나라에서 대장경의 일부와 불전을 장식하는 물건들을 가지고 귀국하자 선덕여왕은 그를 분황사에 머무르게 하였다. 또 원효는 이 절에 머물면서 「화엄경소 ,「금광명경소 등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원효가 죽은 뒤 그의 아들 설총은 원효의 유해로 소상을 만들어 이 절에 모셔두고 죽을 때까지 공경하였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저술할 때나지는 원효의 소상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좌전 북쪽 벽에 있었던 천수대비 그림은 영험이 있기로 유명했다. 경덕왕 때 희명의 다섯 살 난 아이가 갑자기 눈이 멀자 아이를 안고 천수대비 앞에 가서 '도천수대비가'를 가르쳐주고 노래를 부르면서 빌게 하였더니 눈을 뜨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리고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 벽화가 있었다고 하며, 경덕왕 14년(755)에는 무게가 30만 6,700근이나 되는 약사여래입상을 만들어서 이 절에 봉양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역사가 오랜 분황사에는 허다한 유물이 있었을 터이나 몽고의 침략과 임진왜란 등으로 모두 유실되었고, 지금은 분황사에 둘러놓은 어른 키 만한 담장 위로 석탑의 윗부분만이 보이는 자그마한 절이 되었다.
현재 분황사 경내에는 분황사 석탑과 화쟁국사비편, 삼룡변어정이라는 우물들이 있으며, 석등과 대석 같은 많은 초석들과 허물어진 탑의 부재였던 벽돌 모양의 돌들이 한편에 쌓여 있다. 1965년 분황사 뒷담 북쪽으로 30여 미터 떨어진 우물 속에서 출토된 불상들이 경주박물관 뜰에 늘어서 있다. (분황사 종무소)
모전석탑(模塼石塔) : 국보 제30호
분황사 탑은 벽돌로 쌓은 전탑(塼塔)을 흉내내어 돌을 벽돌처럼 잘라 쌓은 모전석탑(模塼石塔)이다.
높이 9.3m로 현재는 3층만 남아있는데 원래 9층이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대단히 크고 멋진 탑이었을 것이다.
임진왜란때 파손된것을 보수하려다 실패하고 일제 강점기때인 1915년에 수리하여 지금에 이른다고 한다.
1층 네 면에 커다란 감실을 만들어 놓았으며 입구 양쪽에는 인왕상을 세웠는데 힘찬 느낌의 모습이다. 네 귀퉁이에는 돌사자를 깎아 세웠으며, 2층과 3층은 1층에 비하여 매우 낮고 3층 윗부분은 상륜부없이 중앙을 높게하여 모듬지붕 형태로 마감하였다.
1915년 해체, 수리할 때 2층과 3층 사이에서 석함 속에 장치된 사리 장엄구가 발견되었으며 이때 발견된 병 모양의 그릇, 은합, 실패와 바늘, 침통, 금은제 가위 등은 경주박물관에 있다.
<분황사 모전석탑, 현재 남아있는 신라석탑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국보 자격이 충분하다.>
<위 분황사 소개에서 어른 키만한 담장위로 석탑의 윗부분이 보인다는 구절대로 사진을 찍어보았다. 밖에서 본 모습이다.>
<문화재 답사를 다니다보면 문득 상공에서 내려다보고 싶을때가 많다. 드론을 갖고 다녀야하나? 생각해보기도 하는데
마침 분황사 입장권에 위에서 내려다본 분황사 모전석탑 모습이 있었다. 역시 건축학적으로도 미끈하게 잘 생겼다.>
돌사자상
큰 돌을 쌓아올린 기단은 충분히 크고 넓어서 탑이 들어선 자리 밖으로도 꽤나 여유롭게 넉넉하며 기단의 네 귀퉁이에는 돌사자를 깎아 세웠는데 2마리는 숫놈, 2마리는 암놈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사자상을 잘못 이해하여 바닷가 쪽에 있는것은 물개라거나 애매하니까 그저 석수(石獸)라고 하며 넘어가기도 하였는데 이는 그 옛날 사자를 못본채 조각을 해야했던 선조들의 애로사항 때문이며 특히 암사자를 사자가 아닌 물개로 보이게 한건 아닌가 싶다.
불교에서의 사자 조각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분황사 모전석탑처럼 네곳에 사자를 배치한 것은 불국사 다보탑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인도에서는 모두 숫사자만 조각을 했으나 중국, 한국등 동아시아로 넘어 오면서 암수가 함께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분황사탑 사자 네마리나 다보탑 사자 네마리는 모두 암수 각 2마리씩으로 보아야 맞는다.
심지어 세조의 암살을 모면케 했다는 상원사의 고양이 석상도 사실은 돌사자 암수 2마리라고 하니 다시한번 정리해야할듯 하다.
<분황사 모전석탑의 사자 네마리, 각각 방위대로 배치하였다. 여기서 오른쪽 아래, 즉 바다쪽을 물개로 본 듯 한데 암사자이다.>
감실과 인왕상
분황사 모전석탑은 전체적으로 보아 황룡사 구층탑 같은 목탑을 보고 세운 듯 하다.
그래서인지 (원래 9층이었다고하나) 3층만 남은 지금의 모습을 보아도 건축물같은 느낌이 강하다. 벽돌처럼 쌓아 더욱 그렇다.
특히 탑의 1층은 2, 3층에 비하여 월등하게 크고 높아서 사방 네 면의 각 면마다 감실을 큼직하게 파고 돌문을 달았는데 좌우 두짝의 쌍문으로 문고리를 달았던 흔적도 보이고 문지방석과 윗쪽 인방석을 버티는 좌우 문설주 역할을 하는 돌을 큼직하게 박아넣은후 그곳에 불법을 수호하는 인왕상을 돋을새김으로 새겼는데 모두 반라의 모습으로 힘찬 느낌을 준다. 일부가 파손되어 아쉽다.
그런데 위 감실은 애초부터 출입하는 목적이 아니었는지, 나중에 없어졌는지 모르지만 높직한 기단으로 오르는 계단이 현재는 네방향 아무곳에도 안보인다. 그대신 감실 앞에 장방형의 돌을 얹어놓고 다시 갖가지 공양물을 늘어놓았는데 눈에 거슬린다.
<1층의 각면에는 감실을 큼직하게 만들었고 그 좌우로는 인왕상을 세웠다. 2개의 돌문은 절반쯤 열린채로 그 안이 보인다.>
<감실에는 잘 알아보기는 어려우나 부처님을 모신듯 한데, 이 탑을 만들때부터 있었던것 같지는 않다.>
그밖에도 분황사는 정면3칸 측면2칸의 맞배지붕 보광전이 있고, 그 안에는 약사여래입상이 모셔져 있는데 영조때 세워진 것이다.
또한 신라때 3마리의 용이 살았다는 우물이 지금도 있는데 당나라 사신이 물고기로 변하게하여 가져가는 것을 원성왕이 사람을 시켜 뒤쫓아가서 빼앗아 왔다는 삼룡변어정(三龍變漁井)이 모전석탑 앞에 남아 있지만 뚜껑을 덮고 잠가놓아서 물을 마실수는 없다.
그리고 우물 옆에는 비석은 없이 대좌만 하나 남아있는데, 고려 숙종이 원효의 공덕을 기려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석을 세웠지만 비석은 없어지고 대좌만 남아 근처를 굴러다니다가 추사 김정희가 대좌에 새겨진 글씨를 해독하고는 이를 찾았다고 한다.
<분황사 보광전과 안에 모셔진 약사여래입상>
<용 3마리가 살았다는 우물, 삼룡변어정(三龍變漁井)>
<원효대사의 비석 대좌, 옆부분에 '차신라화쟁국사지비적(此新羅和諍國師之碑蹟)'은 김정희가 새겼다는데 잘 안보인다.>
<다 둘러보고 밖으로 나오면 당간지주가 서 있는데 봄이면 유채꽃밭으로 매우 화사하다.
당간지주의 아랫부분은 특이하게 귀부(龜部)로 이루어져 있는데 표정이 재미있다.>
답사를 다니면서 느끼는 것중 하나는 이런 국보급 문화재가 대부분 불교 문화재이다보니 거의 절집 마당이나 소유지에 위치해 있는데, 특히 이처럼 석탑이나 석등같은 경우에는 절집에서 이런 저런 공양물을 앞 뒤 좌우로 늘어놓거나 하늘에는 주렁주렁 등을 달아놓는 바람에 외관상 보기에도 안좋고 사진 한장 말끔히 찍기 어렵다. 실내는 사진촬영금지에 실외는 이것저것 걸린 것들이 너무 많다.
그것도 초파일을 전후해서 정성껏 매단 연등은 이쁘기나 하지, 일년내 철거하지 않아서 낙엽지고 찬바람부는 겨울철에도 마구 찢어진 모습의 등들이 여전히 매달려 있는 경우에는 눈살이 찌푸려 진다. 해당 절집에서 조금 더 신경을 쓰면 좋겠다.
가능하면 문화재에 직접 등을 매다는 일은 삼가하기 바란다.
< 계 속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