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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경전연구회 임제록 강좌 제8강 -1(2009.12.07)
一心頂禮 盡十方三世 一切諸佛 一心頂禮 盡十方三世 一切尊法 一心頂禮 盡十方三世 一切賢聖僧 我弟子等 講論三藏 唯願三寶 爲作證明 南無本師釋迦牟尼佛 南無本師釋迦牟尼佛 南無本師釋迦牟尼佛 無上甚深微妙法 百千萬劫難遭遇 我今聞見得受持 願解如來眞實意 큰스님께 삼배의 예를 올리겠습니다. (죽비)(큰스님께 삼배 올리심) 잠시 입정을 하겠습니다. (입선죽비) (방선죽비) 큰스님 법문 임제록 지난 시간에 ‘밥값을 갚을 날이 있으리라’ 라고 하는 그런 과목 밑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대덕들이여, 산승은 지금 일이 부득이해서 이와 같은 허다한, 그러면서 또 깨끗하지도 못한 그런 말을 내가 이렇게 토해내지마는 그러나 그대들은 그 말을 듣고 착각하지 마라. 진정으로 나의 어떤 견해에 입각해서 본다면은 사실은 말한 그런 내용대로의 허다한 도리는 없는 것이다 그랬어요. 그러면서 자주 쓰시는 ‘要用便用(요용변용)하고 不用便休(불용변휴)라’ 아주 유명한 말이죠. 견문각지 - 보고 듣고 또 느끼고 알고 하는 이러한 작용이 필요하면, 그러한 작용을 要하면은 곧 그러한 작용을 하고,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하고 느끼기도 하고 알기도 하고 그런데 그러한 작용을 필요로 하지 않으면은 그냥 가만히 쉰다, 便休(변휴)라 그랬어요. 그러면서 대개로 다른 불교에서 보면은 육도만행,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이런 것을 이야기하면서 그것이 불법이다고 하지마는 그건 다 장엄상 하는 이야기고 불사 때문에 하는 이야기다, 이건 진짜 불법은 아니다, 심지어 육도 만행 뿐만 아니라 재를 지키고 계를 지키고 擎油不閃(경유불섬)이라, 부처님께 그 등불을 밝히는데 그 기름이 출렁거리면 안된다고 해서 전혀 기름이 출렁거리지 않도록 아주 엄격하고 그러면서도 아주 조심스럽게, 아주 조심스럽게 부처님 앞에서 설사 그런 행동을 한다 하더라도 도에 대한 눈이 밝지 아니할 것 같으면은 모두 빚을 짊어지는 것이라서 결국은 우리가 밥값을 갚을 날이 있을 것이다, 왜냐, 모두 시주의 빚이니까. 무슨 까닭으로 이와 같은가 하면서 옛날 사례를 들었죠. 가나제바 존자 때 있었던 이야기인데 불교의 이치에 들어가서 그 도리를 통달하지 못할 것 같으면은 몸을 회복할 거 같으면은 도리서 시주의 은혜를 갚아야 된다. 그래서 그 유래가 장자 팔십 일 세가 되니까 그 집에서 나무에 있는 버섯이 그때야 다 갚고 팔십 일 세가 될 때까지 다 갚고 비로소 그때야 버섯이 나지 않더라 하는 그런 예화를 들어 가면서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그 이야기의 연속이에요. 14-36 道人(도인)은 자취가 없다 乃至孤峯獨宿(내지고봉독숙)하며 一食卯齋(일식묘재)하며 長坐不臥(장좌불와)하며 六時行道(육시행도)하여도 皆是造業底人(개시조업저인)이요 乃至頭目髓腦(내지두목수뇌)와 國城妻子(국성처자)와 象馬七珍(상마칠진)을 盡皆捨施(진개사시)하야도 如是等見(여시등견)은 皆是苦身心故(개시고신심고)로 還招苦果(황초고과)하나니 不如無事(불여무사)하야 純一無雜(순일무잡)이니라 乃至十地滿心菩薩(내지십지만심보살)도 皆求此道流蹤跡(개구차도류종적)하나 了不可得(요불가득)이니 所以(소이)로 諸天歡喜(제천환희)하며 地神捧足(지신봉족)하야 十方諸佛(시방제불)이 無不稱歎(무불칭탄)하나니 縁何如此(연하여차)오 爲今聽法道人(위금청법도인)이 用處無蹤跡(용처무종적)일새니라 道人(도인)은 자취가 없다 이렇게 표현을 했는데. 乃至(내지), 그랬습니다. 앞에서 육도만행, 그 다음에 뭐 재를 지키고 계를 지키고 아주 조심스럽고 경건한 마음으로 일상생활을 해 나간다 하더라도 도에 대한 눈이 밝아야 된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내지 孤峯獨宿(고봉독숙)하고 一食卯齋(일식묘재)야, 고봉독숙, 저 높고 외로운 봉우리에서 홀로 자는 것, 토굴생활, 깊고 깊은 산중에서 혼자 토굴생활을 하면서. 그게 이제 최상의 수행이라고 하는 거요. 대중 처소는 정말 시간 지켜야 되고 규칙 지켜야 되고 대중의 흐름을 또 따라가야 되고 정말 공부 제대로 하고 싶으면은 이제 토굴생활 해야 되는 거죠. 토굴생활은 사실은 그게 이제 공부를 아주 잘하는 사람이 아주 대중 처소보다 훨씬 더 잘할 수도 있고 아예 영 못할 수도 있고 그렇습니다. 중간은 없어요. 토굴생활이란. 그야말로 이판사판이야. 토굴생활은 정말 공부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정말 소득이 아주 크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늘 잠만 자고 그냥 예불도 안하고 아무 때나 자고 남 눈치 볼 것도 없고 아무 거나 갖다 먹고.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것은, 고봉독숙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원래의 토굴생활의 의미를 살리는 거죠. 일식묘재야 卯時(묘시)에 한번 식사하는 거죠. 일종식한다 그러죠. 長坐不臥(장좌불와)하고 六時行道(육시행도)여. 하루 여섯 번이나 예불을 해. 육시예불이라는 말도 있죠. 그런다 하더라도, 그렇게 난행 고행을 설사 한다 하더라도. 皆是造業底人(개시조업저인)이라, 다 업을 짓는 일이다. 그 뿐만 아니라 또 頭目髓腦(두목수뇌)와, 머리, 눈, 골수, 뇌, 심지어 國城妻子(국성처자)와 象馬七珍(상마칠진), 일곱 가지 보물을. 盡皆捨施(진개사시)한다 하더라도, 전부 그것을 보시한다 하더라도. 자기 뭐 온 육신 다 보시하고 자기의 처자 권속까지 다 보시하고 온갖 진귀한 보물 다 보시한다 하더라도. 如是等見(여시등견)은, 이와 같은 견해는. 皆是苦身心故(개시고신심고)로, 이 몸과 마음을 괴롭히는 까닭에. 還招苦果(황초고과)라, 도리어 고통의 결과를 불러올 따름이다 그랬어요. 不如無事(불여무사)하야 純一無雜(순일무잡)이니라, 무사히 아무 일 없이 순일무잡한 것만 같지 못하다. 순수하게 본심대로 사는 것만 같지 못하다. 여기서 이제 그런 것을 거론해도 어쩔런지 사실은 저도 확신은 없습니다마는 우리 눈에 비춰진 티벳 불교, 특히 포탈라 궁전까지 가기 몇 개월 또는 몇 년을 걸려서 일보일배하면서 거기 가서 포탈라 궁전에 예배하는 것이 뭐 성불하는 것과 맞먹는 것 같이 그렇게 불교 수행, 그 수행 중에서도 최고의 수행이라고 하면서 하고 있습니다. 티벳 불교가, 우리 눈에 비춰진 불교는 대개 그래요. 그런데 그 난행 고행의 그런 수행이 과연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그들은 수많은 생을 그렇게 했지마는 역시 그런 생만 반복합니다. 이걸 알아야 돼요. 자기들 그런 고행을 할 때는 무슨 마음으로 하는지 보도된 바에 의하면은 뭐 좋은데 태어나고 하는 그런 것을 이야기합니다마는 과연 그런 고행이 좋은데 태어나질까, 사실은 내가 아는 불교 상식으로서는 의문이 없지 않아. 그들은 그 나라에서 수십 수백 생을 계속 그렇게 살아왔어. 앞으로도 그렇게 살거야. 왜냐, 그게 원인이니까 그런 결과를 가져오는 거요. 여기 임제스님께서 말씀하신 그런 고행, 두목수족, 국성처자 다 보시하고 고봉에 독숙하고 일종식하고 장자불와하고 이렇게 하는 것이 이 육신을 중심으로 해서 이런 수행을 하는 것이 과연 어떤 결과를 가져오겠는가. 이런 것도 우리가 한번 그동안 어디에 누가 뭐라고 이야기했다고 그대로 쫓아갈 일이 아니고 여러분들의 그 불교 지식으로 또 건전한 사고에 의해서 한번 냉정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하는 것입니다. 한국 불교는 내가 임제록 서두에도 말씀드렸지마는 우리는 죽은 뒤에도 임제 문중에서 임제스님이 드러낸 그 사상과 그 안목을 우리는 숭상하고 그래서 죽은 뒤에도 임제문중에 다시 速環娑婆(속환사바), 빨리 이 세상에, 여기에, 내가 살던 곳에 돌아와가지고 다시 또 한번 이 일을 드날리는 것. 이것이 이제 우리나라 불교에서 스님들이 돌아가시면 축원을 올리는 것이고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바이기 때문에 축원문에 명기돼 있는 것이죠. 그런 정도로 전통 우리 한국 불교에서는 이러한 소견을, 임제스님의 이러한 견해를 가장, 불교의 제반 견해 중에서도 가장 고준하고 정말 우리가 궁극적으로 여기에 따라가야 할 그런 견해다 라고 이렇게 믿고 그렇게 알고 있기 때문에 축원문도 그렇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임제스님의 견해를 우리가 좋아하고 또 사실은 ‘조계종’ 이렇게 했을 때는 당연히 임제록 같은 것이 어록 중의 왕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교과서로 일단 돼야 되지 않겠나 하는 그런 말씀을 자주 드렸죠. 또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乃至十地滿心菩薩(내지십지만심보살)도, 십지만심, 그러니까 십신, 십주, 십행, 십회향, 십지, 등각, 묘각, 이렇게 52위 점차를 대승불교에서 수행 점차, 보살 계위로 나열을 해놨지 않습니까. 그런데 거기서 가장 높은 게 십지만심보살이야, 十地, 제일 올라간 보살이다 이거죠. 그런 보살도 皆求此道流蹤跡(개구차도류종적), 다 이 도류의 종적을, 이러한 도류의 종적을 찾아보지마는 了不可得(요불가득)이라 그랬어요. 이 도류의 종적은 뭡니까. 순일무잡한, 마음 속에 아무 일이 없어서 순일 무잡한 이 사람의 종적을 아무리 찾아봐야 마침내 찾을 길이 없다. 왜냐, 그 정신 세계가 더 높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대이삼장하고 혜충국사하고 그 이야기가 그렇지 않습니까. 대이삼장이 타심통을 해 가지고 우리가 어떤 의식을 작용해서 무엇을 생각하면은 그 생각하는 것을 쫓아서 무엇을 생각하는지를 다 아는, 인도에서 온 대이삼장이 있었잖아요. 그래서 원숭이를 가지고 장난치는데 가서 이렇게 마음을 거기다 두니까, 큰스님께서 어찌하여 일국의 국사로서 원숭이 장난하는 데에 구경을 하고 계십니까, 하고 이런 식으로 하다가 무심삼매에 들어버리니까 이 대이삼장이 아무리 찾아봐도 찾을 길이 없었다, 그런 이야기가 있듯이 了不可得(요불가득)이라는 게 그런 말입니다. 이런 도류의 종적은 순일무잡해버린, 우리 마음이 정말 순수한 경지에 들어가버린 그런… 뭐 뭘 해도 한다는 그 흔적이 없이 그런 경지에 들어가버리면은 그 사람의 어떤 정신 세계를 아무리 타심통 아니라 우타심통을 했어도 찾을 길이 없다 하는 것이죠. 요불가득이니라. 그러니까 뭐 그런 이야기들이 많죠. 누가 하! 도력이 높다고 그렇게 칭찬을 하니까 내 도가 낮아서 네가 나의 정신을 엿본다, 내가 정말 높다면 네가 나를, 내가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를 모를텐데 내 도가 낮기 때문에 네 눈에 들켰다, 이런 표현들도 있고. 그것을 예컨대 담장이 낮으면은 담 안의 집안 살림살이를 담 밖에 있으면서 이렇게 고개로 넘겨다 볼 수 있는 거와 똑같은 이치다 그래요. 그렇죠. 남의 눈에 그것이 들어온다면은 그 사람의 삶은 그만치 별볼일 없다는 뜻이 돼 버리죠. 남이 도저히 요량할 수가 없고 도저히 짐작할 수도 없고 그야말로 하늘도 어떻게 측량할 길이 없는 그런 경지, 그런 것을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이죠. 그래서 所以(소이)로 諸天歡喜(제천환희)하며, 모든 천신들이 환희하고. 地神(지신)이 捧足(봉족)이라, 지신들은 발을 받든다. 十方諸佛(시방제불)은 無不稱歎(무불칭탄)이여, 시방의 모든 깨달은 사람들은 전부 그런 경지에 이른 사람들을 칭탄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다. 縁何如此(연하여차)오, 어찌해서 이와 같은가. 爲今聽法道人(위금청법도인)이 用處無蹤跡(용처무종적)일새니라, 지금 법문하는 소리를 듣고 있는 바로 그 당체, 그 사람, 바로 그 당체 그것은 작용하지마는 작용하는데 종적이 없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그저 좋다 나쁘다 거기에 그저 종적 남기기에 급급합니다. 전부 종적 남기는 일에 급급해. 그런데 정말 이러한 사람의 정신 세계는 그 종적을 찾을 길이 없다, 하는 그런 내용입니다. 14-37 大通智勝佛(대통지승불) 問(문), 大通智勝佛(대통지승불)이 十劫坐道場(십겁좌도량)호되 佛法不現前(불법불현전)이라 不得成佛道(부득성불도)라하니 未審此意如何(미심차의여하)오 乞師指示(걸사지시)하소서 師云(사운), 大通者(대통자) 是自己於處處(시자기어처처)에 達其萬法無性無相(달기만법무성무상)을 名爲大通(명위대통)이요 智勝者(지승자)는 於一切處不疑(어일체처불의)하야 不得一法(부득일법)을 名爲智勝(명위지승)이요 佛者(불자)는 心清淨光明(심청정광명)이 透徹法界(투철법계)를 得名爲佛(득명위불)이요 十劫坐道場者(십겁좌도량자)는 十波羅密是(십바라밀시)요 佛法不現前者(불법불현전자)는 佛本不生(불본불생)이며 法本不滅(법본불멸)이라 云何更有現前(운하갱유현전)이리요 不得成佛道者(부득성불도자)는 佛不應更作佛(불불응갱작불)이니 古人云(고인운), 佛常在世間(불상재세간)호대 而不染世間法(이불염세간법)이라하니라 그 다음 우리가 법화경에서 공부했던 大通智勝佛(대통지승불)에 대한 이야깁니다. 問(문), 어떤 이가 물었어요. 大通智勝佛(대통지승불), 큰 大(대) 자, 통할 通(통) 자, 지혜 智(지) 자, 수승할 勝(승) 자, 그렇습니다. 크게 통달해 갖고 지혜가 아주 수승하다, 뛰어나다 하는 그런 부처의 이름인데 화성유품에 나오지요, 화성유품 전반부에 보면은 대통지승불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지승불은 여기 보면은, ‘十劫坐道場(십겁좌도량) 佛法不現前(불법불현전)’ 이런 말이 있습니다. 십겁 동안 도량에 앉아, 보리수 아래 앉아 있었는데 불법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 말을 해요. 이 대통지승불이 열반에 들고선 수 억만 겁, 수 억만 겁의 세월 이전에 이미 대통지승불은 열반에 들었다, 그런 말을 하고 있어요. 그러면서 죽 연기를 이야기를 하는데 이 연기라고 하는 것이 시간과 공간,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여기에 앉아 있다, 비록 온 우주의 크기에 비교하면은 먼지 하나만도 못한 그런 작은 존재로서 여기 앉아 있고 또 우리가 백 년을 산다 하더라도 무궁한 시간에다가 견주어 보면은 아주 눈 깜빡할 사이에, 아주 짧은 순간을 우리가 사는 그러한 존재이지만, 사실은 이 드넓은 우주 공간과 더불어 함께 하고 있는 것이 우리 작은 몸뚱이, 먼지보다 작은 이 작은 몸뚱이고 또 아주 짧은 순간을 살다 가는 그런 존재지마는 사실은 영원한 과거와 영원한 미래에 전부 관통돼 있다, 걸쳐져 있다, 이러한 소위 법계연기적인 그런 내용을 대통지승불의 이야기로서 드러내고 있습니다. 시간적으로 보나 공간적으로 보나 우리는 다 온 시간, 온 공간에 다 펼쳐져서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단 우리가 이런 순간 이러한 모습으로 여기에 앉아 있는 것은 바로 여기에 이렇게 앉아 있을 그런 어떤 因과 緣과 그런 조건들이 묘하게 만들어졌을 때 그때 딱 이 순간에 이렇게 이러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거죠. 그러나 이것은 한 순간이죠, 순간 중에도 한 순간입니다. 예를 들어서 일식이나 월식 같은 것도 보면은 아주 오랜 세월 중에 묘하게 달과 해와 그리고 지구와 그 어떤 관계가 묘하게 어떤 그림자를 만들 때 해도 가려버리고, 달 그림자에 해도 가려 버리고 그래서 일식 같은 것이 이제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거와 마찬가지로 딱 그 긴 시간 속에서 한 순간이거든요. 그 넓은 우주 공간에서 묘하게 그런 한 순간에 그렇게 잠깐 그런 현상이 나타나듯이. 그러나 늘 함께 하고 있는 거죠. 우주 공간에 늘 함께 하고 있듯이. 우리들 자신도 마찬가지야. 우리들 자신도. 어떤 조건이 됐을 때 이러한 자리에 내가 이러한 모습으로 있지. 때로는 구름이 되고 때로는 푸른 하늘이 되고 흘러가는 바람이 되고… 그 모든 것이 동시에 되기도 하고 저 청청한 나무가 되기도 하고… 그런 거에요, 사실은. 우리 존재의 근원을 좀더 다른 안목으로 생각해보면 그러한 것입니다. 이 사실 대통지승불 이야기가 그러한 모든 존재의 연원을 그리고 그 연원의 연기적인 관계를 표현한 그런 내용입니다. 그런데 여기는 어떤 이가 대통지승불이 십겁 동안 도량에 앉아 있었는데 불법이 나타나지 아니해서 不得成佛道(부득성불도)라, 불도를 이루지 못했다고 하니. 未審此意如何(미심차의여하)오, 미심커라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 뜻이 어떠합니까. 乞師指示(걸사지시)하소서, 스님에게 비노니 잘 가르쳐 주십시오. 師云(사운), 大通者(대통자), 대통이라고 하는 것은, 是自己於處處(시자기어처처), 자기가, 자기 자신들이 처처에서 達其萬法無性無相(달기만법무성무상)을 名爲大通(명위대통)이라, 그랬어요.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모든 존재, 萬法(만법), 모든 존재가 고정된 성품이 없고 또 고정된 형상이 없다, 그랬어요. 그 고정된 성품이 없고 고정된 형상이 없는 것을 통달하는 것, 뭐 앞서 우리들 존재가 이 순간에는 이렇게 돼 있지마는 요러한 모습으로 있지마는 때로는 흘러가는 바람도 되고 구름도 되고 푸른 하늘도 되고 청청한 저 소나무도 되고 과일도 되고 곡식도 되고 흙고 되고 물도 되고, 온갖 것이 다 될 수 있는 거요. 만법이 다 그래.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고 모든 존재가 다 그래. 때로는 한 송이 꽃이 됐다가 꽃잎이 됐다가 줄기가 됐다가 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돼 있어요. 그게 無性無相(무성무상)이야. 만법이 다 그래요, 사람만 그런 게 아니고 꽃도 그렇고 저 소나무가 내가 되고 내가 소나무가 되고 소나무가 구름이 되고 구름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또 흘러가는 물이 되고. 그 모든 것이 동시에 되기도 하고. 만법은 무성무상이야. 이것을 통달하는 것을 名爲大通(명위대통)이라 한다. 그렇죠, 큰 大 자, 통할 通 자. 아 참, 이런 해설은요, 경전의 구절을 이렇게 해설하는 건 이건 임제스님만이 할 수 있는 거요 사실은. 대단한 안목이죠. 그래 소견이 툭 터져 버리면은 무엇이든지 갖다 대면은 그 어떤 이치에 맞게 바른 이치대로 이렇게 설명이 가능해집니다. 智勝(지승), 지혜 지 자, 수승할 승 자는. 一切處不疑(어일체처불의)하야, 어느 곳에 있든지 간에 조금도 의심이 없어서. 不得一法(부득일법)을 名爲智勝(명위지승)이라, 한 법도 얻을 것이 없는 사실을 아는 것, 이것의 이름이 지혜와 수승한 것이다, 그랬어요. 우리가 뭐 네 거냐 내 거냐, 그저 눈만 뜨면 네 거 내 거 분별하고, 얻었다 잃었다, 손해봤다 이익봤다, 늘 그러죠. 그런데 이게 마음이 툭 터져버리면은 사실 하나도 내 손에 들어올 것도 없어. 그야말로 공수래공수거여. 본래 그렇게 돼 있어. 그저 스치고 갈 뿐이야. 스치고 갈 인연이 됐을 때 그 이름이 명예가 됐든지 재산이 됐든지 사람이 됐든지, 그저 스치고 갈 인연이 됐을 때 잠깐 스치고 가는 거요. 부득일법이야, 어느 것 하나도 내 손에 끝까지 잡혀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뭐 이렇게 알면 그게 지승이다, 지혜가 수승한 사람이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참 표현이 아주 근사하죠. 그럼 佛者(불자)는 뭐냐. 부처라고 하는 것은 心清淨光明(심청정광명)이 透徹法界(투철법계)라, 마음이 툭 터져가지고 그러면서도 빛나고 있어. 한 순간도, 마음은 실제적으로… 이 청정이라는 것은 비었다는 뜻입니다. 언제나 그래요, 거의 그런 뜻입니다 청정이란 건. 마음이 텅 비어가지고서 그러면서도 이게 죽은 물건이 아니야. 죽은 물건이 아니니까 계속 빛을 발하고 있어. 무슨 말을 하면 그 말 쫓아가고 뭐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화도 내고… 별별 그야말로 방광을 다 하는 거죠. 스승 목욕하는데 때 밀어 주다가 好好法堂(호호법당)이 佛無靈驗(불무영험)이로다, 참 법당은 좋다마는 부처가 영험이 없구나 하니까 고개를 척 쳐들어서 상대를 쳐다보니까 상대가 또 있다가 佛無靈驗(불무영험)이나 也能放光(야능방광)이로다, 부처가 영험은 없는데 또한 방광은 할 줄 아는구나, 말하는 소리 듣고 이 버릇없는 놈하고 쓱 쳐다보는 그게 방광이야. 그 광명을 놓잖아, 심청정광명이여. 그런데 무슨 한 물건이 있어서 고정된 어떤 무슨 뭐 모터가 있든지 엔진이 있든지 뭐 있어서 하는 게 아니야. 없어, 텅 비었어, 청정이야,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한 순간도 쉬지 않고 광명을 놓는 거요. 透徹法界(투철법계)라, 온 이 우주 법계에 다 사무쳐 있어. 得名爲佛(득명위불), 그것을 이름해서 부처라고 한다. 또 十劫坐道場者(십겁좌도량자), 십겁 동안 도량에 앉아 있었다 라고 하는 것은 十波羅密是(십바라밀시), 십바라밀이 이것이다. 보통 육바라밀을 말하지마는 화엄경에서는 십바라밀을 또 말하지요. 행, 원, 력, 지 라고 해서. 佛法(불법)이 不現前(불현전)이라, 왜 안나타났느냐. 佛本不生(불본불생)이여, 부처라고 하는 것은 본래 생기는 것이 아니여. 본래 있는 것이지 새롭게 생기는 게 아니다 이 말이여. 法本不滅(법본불멸)이여, 그걸 法이라고 했든 佛이라고 했든 본래, 본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소멸하는 것이 아니야. 그냥 여여한 거야. 여여한 거. 그 모습 그대로라. 하등의 어떻게 건드린다고 건드려지는 것도 아니고 건들 수도 없어. 그것이 이제 불법불현전이야. 불법이 본래 나타날 까닭이 없어. 뭐 없던 거라야 나타나지. 그대로 있는데. 그대로 있는 것이기 때문에 새삼 나타날 까닭이 없다. 그런데 云何更有現前(운하갱유현전)이라, 어떻게 해서 다시 현전함이 있으리오. 不得成佛道者(부득성불도자)는, 불도를 이루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뭐냐. 佛不應更作佛(불불응갱작불)이라, 부처가 응당히 다시 부처를 짓지 못한다, 그렇죠, 이미 부처인데 무슨 다시 또 부처 지을 까닭이 있겠어요. 그래 不得成佛道(부득성불도)지. 그런 뜻이다 이 말입니다. 본래로 그런 뜻이다. 그걸 이제 이렇게 심오한 뜻을 법화경에서 드러내고 있는데 옛날 사람들은 그런 소리 다 알아들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런 소리를 이렇게 깊은 뜻으로 이러한 이치로서 제대로 이해를 못하는 것이죠. 그리고 또 이 경전이나 어록은 또 그 시대는 그 시대 사람들이 가장 쉽고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이야기했어요, 사실은. 우정 어렵게 이야기한 게 아닙니다 절대 그런 게 아니에요. 그 당시 사람들은 그게 제일 쉽게 알아듣는 표현이었어요. 지금은 이제 그렇지 못하니까 우리가 열심히 공부하고 자꾸 사유하고 또 경전의 이치를 깨달아가지고 이것을 우리 이 시대에 사는 사람들이 이해하도록 그것을 다시 재해석 해주고 다시 또 설명을 해줘야 돼요. 자기가 아는 만치. 그게 꼭 필요합니다. 정말 필요한 일이 그거에요. 古人云(고인운), 고인이 말하기를. 佛常在世間(불상재세간)호대, 부처님이 항상 세간에 있으되. 不染世間法(불염세간법)이라, 세간법에 물들지 않는다 라고 했다. 佛常在世間(불상재세간)호대 而不染世間法(이불염세간법)이라. 우리가 이제 연꽃을 가지고 불교의 꽃이라 하는 뜻도 바로 불교라고 하는 것은 이런 뜻이죠. 항상 세간에 있으면서도 세간에 물들지 않는 것. 연꽃의 성질이 그렇지 않습니까. 더러운 시궁창에서 피지마는 그 더러운 물은 한방울도 타지를 않죠. 그것이 불교의 의미고 또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가르쳐주고자 했던 것도 그런 내용이다. 14-38 心生法生 心滅法滅(심생법생 심멸법멸) 道流(도류)야 儞欲得作佛(이욕득작불)인댄 莫隨萬物(막수만물)하라 心生種種法生(심생종종법생)하고 心滅種種法滅(심멸종종법멸)이라 一心不生(일심불생)하면 萬法無咎(만법무구)니라 世與出世(세여출세)에 無佛無法(무불무법)하야 亦不現前(역불현전)하며 亦不曾失(역불증실)이니라 設有者(설유자)라도 皆是名言章句(개시명언장구)라 接引小兒(접인소아)하는 施設藥病(시설약병)이요 表顯名句(표현명구)니 且名句不自名句(차명구부자명구)라 還是儞目前昭昭靈靈(환시이목전소소영영)하야 鑒覺聞知照燭底(감각문지조촉저)가 安一切名句(안일체명구)니라 그 다음에 이제 心生法生 心滅法滅(심생법생 심멸법멸), 원효스님 생각나죠. 心生卽種種法生(심생즉종종법생)하고 心滅卽種種法滅(심멸즉종종법멸)이라. 원효스님이 유학 가다가 해골 바가지의 물을 먹고 그렇게 시원한 물을 아주 정말 갈증을 달래주는 그렇게 시원한 물이었는데 아침에 깨어보니까 그게 해골 바가지에 사람의 뼈가 썩은 물이었다 하는 사실을 알고는 아주 정말 저 창자 속까지 뒤집어지도록 토했죠. 토하다가 문득 생각하니까 내가 왜 그토록 시원하고 좋은 맑은 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고통을 겪으면서 토하고 있는가. 아 이것은 오로지 내 한마음의 문제구나. 내 한마음의 문제구나. 지난 밤에는 그게 아주 맑고 좋은 청정한 물이라고 생각했었고 지금은 해골바가지 더러운 오물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한 거지 무슨 해골바가지 물이 무슨 그게 죄가 있느냐, 그 생각이 퍼뜩 들면서 일을 다 마친거죠. 그러면서 하신 말씀이 心生卽種種法生(심생즉종종법생) 心生法生 心滅法滅(심생법생 심멸법멸) 心滅卽種種法滅(심멸즉종종법멸)이라, 가지가지 법이 다 소멸한다. 일체유심조라. 이러한 이치는요, 참 불교 안에서는 이러한 거 뭐 그냥 식은 죽 먹듯이 항상 자나 깨나 하는 소리라서 아주 평범한 이야기고 그저 늘 들어본 소리고 늘 하는 소리이지마는 이게 정말 보통 소리가 아니거든요 또. 이것을 우리가 일상생활에 적용을 해서 이것이 나의 인격이 되어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고 늘 또 공부할 때는 그럴 듯 하다가 또 덮어버리면 경계에 쫓아가고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고 이제 그렇습니다. 실컨 공부했다고 자랑 자랑하고 뭐 자기가 이 세상에 도가 제일 높느니 어쩌느니 그러다가도 어느 순간 명예가 나타나면은 그냥 명예에 눈에 어두워가지고 돈 싸들고 명예 살려고 그냥 한다든지 그건 뭐 발심도 했다고 할 수가 없죠. 도는 고사하고 도 근처에도 못 간 거죠. 道流(도류)야 儞欲得作佛(이욕득작불)인댄, 도 닦는 여러 벗들이여, 그대들이 부처가 되고자 할진댄. 莫隨萬物(막수만물)하라, 만 가지 사물들을 따라가지 마라. 心生種種法生(심생종종법생)하고 心滅種種法滅(심멸종종법멸)이라, 마음이 생기면 가지가지 법이 생기는 것이고 마음이 소멸하면은 가지가지 법이 소멸한다. 一心不生(일심불생)하면 萬法無咎(만법무구)라, 그 한 마음이 생기지 아니하고 잠잠히 조용히 가만히 있으면 萬法無咎(만법무구)야, 세상에 어떤 문제가 일어났다 하더라도 그 일어난 세상법에 대해서는 아무 잘못이 없어. 내가 그 사실을 인식하고 쫓아가고 옳다 그르다 시시비비하고 분노를 터뜨리고 그러니까 왜 그러냐 왜 저러냐 하고 문제삼는 거죠. 허물이라는 게 뭡니까, 때라는 게 뭐에요, 문제 삼는 거요. 아무 문제 없어요. 그 사람은 그저 그렇고 감나무는 감이 열린 뿐이고 밤나무는 밤이 열릴 뿐이여. 만법무구에요. 一心不生(일심불생)하면 萬法(만법)이 無咎(무구)니라. 世與出世(세여출세)에 無佛無法(무불무법)해서, 세상이나 출세간에 佛도 없고 法도 없어서. 亦不現前(역불현전)하며 또한 불도 없고 법도 없으니 나타나는 것도 없어. 그렇다고 잃어버릴 것도 없어. 亦不曾失(역불증실)이니라, 일찌기 잃어버린 것도 없느니라. 設有者(설유자)라도, 설사 불법이니 뭐니 하는 것이 있다손 치더라도. 皆是名言章句(개시명언장구)라, 전부 경전상의 책자상의 그리고 말로 전해지는 그런 거지. 그건 뭐야, 接引小兒(접인소아), 어린 아이를 이끌기 위한 방편에 불과한 것이다. 施設藥病(시설약병)이요, 병에 따라서 약을 베푸는 일이다. 그러니까 감기 들리면 감기약에 그 사람 병에 따른 처방을 하듯이 그 낙엽을 들고 어린 아이에게 돈이다 라고 줘 가지고 그 어린 아이를 유혹한다든지 하는 그런 일과 마찬가지다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어떤 좋은 명칭도, 불교 경전에 얼마나 좋은 말들이 많이 있습니까. 그런 모든 말들도 전부 接引小兒(접인소아)야. 어린 아이를 달래기 위한 하나의 방편에 불과한 것이다. 表顯名句(표현명구)여, 더러 표현해 보는 명구에 불과해. 이름이고 구절이다. 且名句不自名句(차명구부자명구)라, 차명구가, 이름이나 구절이 스스로 명구라고 하지 않는다. 또한 그대들이 目前昭昭靈靈(목전소소영영)해서, 이게 중요한 거죠. 목전에, 눈앞에 소소영령해, 아주 환하게 밝아. 그리고 신령스럽고 신령스러워. 이 한물건은 정말 너무나도 소소영령해. 환해. 아주 신령스러워. 鑒覺聞知照燭底(감각문지조촉저), 감각하고 듣고 알고 환하게 비춰, 조촉. 예를 들어서 등불이 또는 태양빛이 만물을 환하게 비추듯이 그 한 물건이 들어서 만물을 환하게 비추고 있어. 그것이 움직이면서 이렇게 저렇게 이름을 만들어 보기도 하고 글자를 만들어 보기도 하고 그래서 연결해 보기도 하고 그래서 별별 이름을 다 만들어내가지고 무슨 근본불교니 초기불교니 소승불교니 대승불교니 상좌부불교니 대중부불교니 선불교니 비밀불교니 무슨 별별 이름을 다 만들어내는 거지. 그 한 물건이 들어서 그렇게 安一切名句(안일체명구), 그랬어요. 일체명구를 안치, 만들어두었다. 이런 말입니다. 그래 속지 마라 이거야. 그래 이 소소영령한 이 한 물건 외에는 모두 조작한 것이다, 만든 것이다. 그 한 물건 인식시킬려고 그 한 물건 깨닫게 하기 위해서 이리 만들고 저리 만들어 보고 이렇게 설명하면 알아들을까 저렇게 설명하면 알아들을까 하고 그 깨달으신 분들이 자비심으로 노파심에서 이리 설법하고 저리 설명하다 보니까 산적해 진거죠, 팔만대장경처럼 그렇게 많이 쌓이고 쌓인 거죠. 참 이런 거 보면은 정말 임제스님 법문이 제일 아주 속시원하고 툭 터지고 어디에도 거칠게 없고 그리고 근본 종지를, 그 지엽적인 거, 어수선한 그런 많은 우리 불교 상식을 싹 추려버리고 깨끗이 청소해 버리고 딱 그저 청소하는 그놈, 소소영령한, 그것도 멀리 있는 게 아니여, 멀리 가서 찾는 게 아니고 목전에 바로 눈앞에서 소소영령한 그 물건 하나 딱 드러낸 이러한 것이 선불교의 특색이고 또 그것은 임제록에서 말하자면 임제 종지이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참 위대한 거에요 그거는. 정말 모양 그릴 수 없고 이름 붙힐 수 없고 어떤 색으로 나타낼 수도 없는 것이면서 이건 아주 위대한 것이고 참 지극히 고귀한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이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그런 존재다 하는 것입니다.
첫댓글 一心不生(일심불생)하면 萬法無咎(만법무구)라...고맙습니다. _()()()_
_()()()_ 당신은부처님 당신은부처님 당신은부처님 고맙습니다.
모든 존재가 고정된 성품이 없고 또 고정된 형상이 없다는 것을 통달하는 것...고맙습니다. _()()()_
심생즉 종종법생(心生卽 從從法生) 심멸즉 종종법멸(心滅卽 從從法滅)이라.ㅡ 마음이 나면 모든 법이 나고 마음이 멸하면 모든 법이 멸한다. 고맙습니다._()()()_
目前昭昭靈靈하야 鑑覺聞知照燭底가 安一切名句니라...눈 앞에 밝고 신령스러워 듣고, 알고, 환하게 비추듯이 일체 명구를 만들어 두었느니(이 한 물건 외에는 모두 조작한 것이다.)..禪慧珠 님! 고맙습니다.._()()()_
一心不生하면 萬法無咎라..._()()()_
○一心不生(일심불생)하면 萬法無咎(만법무구)라/
○設有者(설유자)라도 皆是名言章句(개시명언장구)라
○接引小兒(접인소아) 施設藥病(시설약병)表顯名句(표현명구)且名句不自名句(차명구부자명구)
○目前昭昭靈靈(목전소소영영) 鑒覺聞知照燭底(감각문지조촉저) 安一切名句(안일체명구)
눈 앞에 아주 환하게 신령스럽게 밝아 감각과 듣고 알고 환하게 비추니
○還是儞目前昭昭靈靈(환시이목전소소영영)하야 鑒覺聞知照燭底(감각문지조촉저)가 安一切名句(안일체명구)니라
감사 합니다.
우리들 자신도. 어떤 조건이 됐을 때 이러한 자리에 내가 이러한 모습으로 있지. 때로는 구름이 되고 때로는 푸른 하늘이 되고 흘러가는 바람이 되고… 그 모든 것이 동시에 되기도 하고 저 청청한 나무가 되기도 하고… 그런 거에요, 사실은. 우리 존재의 근원을 좀더 다른 안목으로 생각해보면 그러한 것입니다. 이 사실 대통지승불 이야기가 그러한 모든 존재의 연원을 그리고 그 연원의 연기적인 관계를 표현한 그런 내용입니다.
내가 그 사실을 인식하고 쫓아가고 옳다 그르다 시시비비하고 분노를 터뜨리고. 허물이라는 게 뭡니까, 문제삼는거요. 그 사람은 그저 그렇고 감나무는 감이 열린 뿐이고 밤나무는 밤이 열릴 뿐이여. 一心不生하면 萬法이 無咎니라.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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心生種種法生 心滅種種法滅 一心不生 萬法無咎 ... 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達其萬法無性無相을 名爲大通이라.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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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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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고맙습니다
接引小兒 ... _()_
고맙습니다_()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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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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心生法生 心滅法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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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
南無無位眞人 南無無位眞人 南無無位眞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