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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들녘에서 한 농부를 만났다. 그 농부는 정도전을 보고 당시 관리들이 ‘국가의 안위와 민생의 안락과 근심, 시정의 득실, 풍속의 좋고 나쁨’에
뜻을 두지 않으면서 헛되이 녹봉만 축내고 있다며 나에게 호되게 질책하였다".....
띠풀을 다듬지 않고 나무를 깎지도 않은 채
엉성한 초사(草舍)를 지어서 백성들의 삶을 직접 목격하고 위민의식(爲民意識)을 키워 역사의 큰 족적을 남겼던 삼봉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이 3년 유배생활을 보내면서 이곳 지금의 나주시 다시면 운봉리의 백동마을 유배지에서 회상한 글이다.
그를 두고 조선의 설계자라고 부르고 있다. 그 말을 듣게 만든곳이 바로 전남 땅에서 출발한다. 그 긴 이야기를 담고자 한다.
그와 전남지방에서의 인연은 나주와 광주지역에 두번의 유배로 시작된다. 그 흔적은 나주, 광주, 장성에서 만날 수 있다.
우선 나주 유배지에서의 인연을 이야기한다.
정도전, "강하면 부러진다"는 진리의 대상이 된 격동기의
풍운아
대나무를 가꾸려고 길 돌려 내고 / 예쁜 산에 작은 누대 지었다오.
이웃 중이
찾아와 글자 물으며/하루 해가 다 지도록 머물러 있었다네.
護竹開迂徑 憐山起小樓 隣僧來問字 盡日爲相留
삼봉(三峯) 아래 하찮은 나의
터전 / 돌아오니 소나무와 계수나무의 가을
집안이 가난하여 병 조리 어려운데 / 마음이 고요하니 근심 잊기 충분하리라.
弊業三峯下 歸來松桂秋
家貧妨養疾 心靜定忘憂
조선의 설계자라 불리는 영웅호걸 삼봉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이 고향땅에서 살면서도 내심에는 또다른 초사(草舍) 한 채가
있었다, 꿈애도 잊을 수 없는 전남 나주 회진현 거평부옥이었다. 그의 3년간의 유배생활에서 그동안 정치활동에서 제시했던 민본사상은 허울 좋은 이름뿐이 였다는 것을
깨닭게 한 곳이기 때문이다.
초당은 그가 버들을 읊은(詠柳) 시의 내용과 같이 나그네를 맞고 있었다.
연기 엉기며 유달리 한들거리고 /
비를 띠면 더 늘어지네
강남은 나무도 하고 하건만 / 봄바람은 여기만 불어오누나
含煙偏裊裊 帶雨更依依 無限江南樹
東風特地吹
마을을 곁에 둘 땐 암담하다가 / 물가에 다다르니 분명하구려
새벽이 가까워 비 개니 / 꾀꼬리 문득 한 목청
뽑아대누나.
傍村初暗淡 臨水轉分明 向曉雨初霽꾀꼬리
".....정도전(鄭道傳)은 신우(辛禑) 초에 원(元)나라 사신을 영접하라고 하자, “내 마땅이 북원 사신의 머리를 베어 가지고 올 것이니,
그렇지 않으면 그를 결박하여 명 나라로 보내겠소.” 했다가 이인임(李仁任)의 뜻에 거슬리어 회진현(會津縣)으로
귀양갔다....." 그에게는 불행이었지만 유배지역에서는 영입이었다.
돌아가지 못하네 오랜 나그네 / 석양에 홀로 누에 멈추었네
한 가락 젓대 소리 어느 곳이냐 /
강머리 버들을 불어 꺾누나
久客未歸去 斜陽獨倚樓 一聲何處篴 吹折碧江頭
춤추는 허리마냥 가늘다 하더니 / 푸른 눈썹이 길다 또
일러 주네
만약 한번 씽긋 웃어 준다면 / 남의 애를 끊는다 이해도 하지
皆言舞腰細 復道翠眉長 若敎能一笑
應解斷人腸
정도전의은 초당을 짓고 쓴 기(記)에서 이곳 사람을 표현하기를 "풍속 사람들이 순박하여 다른 생각이 없으며, 힘써 농사짓는 것을
업(業)으로 한다"고 표현했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실제 백성의 삶을 목격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으로 진정성이 담보된 것으로 그의 혁명정치
향배의 지표가 되는 시발점이라는 곳이라는 점에서 아니 우리나라 역사를 바꿔놓은 모토가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정도전이 유배지 전남 나주 소재동에서 쓴 답전부(答田父)라는 글에서는 그는 자신을 깨우치게 만든 농부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까지 보여
'전부(田父)를 숨은 군자'라 부르며 가르침을 달라고 요청하기까지 해 나주 농민들로부터 깨우침을 얻었다는 회상에서 한 단면을 나타내고
있다.
그는 곧 나주에서의 유배생활은 지식인의 책무를 한 없이 느끼게 한 시련과 성장의 숙성기간이었다. 나주에서 그는 가난(家難)
답전부(答田父) 금남야인(錦南野人) 금남잡제(錦南雜題) 금남잡영(錦南雜詠) 심문천답(心問天答) 등 여러 글을 남겨 이곳에서 그는 3년동안 그의
지식을 유감없이 남긴다. 최근의 그를 기억하려는 이들이 지어낸 작은 정자가 자리하고 있다.
그가 지은 소재동기(消災洞記)에서
초사가 있는 일대를 이렇게 표현했다.
"도전이 소재동 황연(黃延)의 집에 세들어 있었다. 그 동리는 곧 나주에 속한 부곡(部曲) 거평(居平)의
땅인데, 소재(消災)한 절이 있어 동리 이름도 소재동이라 한다. 동리를 둘러싼 것은 모두 산인데, 동북쪽에는 중첩한 산봉우리와 고개가 서로
잇달았으며, 서남쪽의 여러 봉우리는 낮고 작아서 멀리 바라볼 수가 있다. 그 남쪽에는 들판이 펀펀한데 숲 속 연기가 일어나는 곳에 초가집 10여
호가 있으니, 바로 회진현이다. 유명한 산수(山水)로는, 금성산(錦城山)은 단중(端重)하고 기위(奇偉)하며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고 나주의
진산(鎭山)이다. 또 월출산(月出山)은 맑고 빼어나며 우뚝하여 동남쪽을 막아 섰는데, 영암군(靈巖郡)과의 경계이다. 금강(錦江)은 나주 동남쪽을
경유하여 회진현을 지나 남서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소재동은 바다까지 수십 리나 된다. 산의 남기(嵐氣)와 바다의 장기(?氣)는 사람의 살에
닿으면 언제나 병이 나게 한다. 아침저녁 어둠과 밝음에 기상이 천만 가지로 변하는 것 또한 구경할 만하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초사를
짓는 연유에 대해 "하루는 뒷산에 올라가 바라보다가 그 서쪽이 좀 평탄하고 아래로 넓은 들을 내려다볼 수 있음을 사랑하여, 종을 시켜 묵은
풀숲을 베어내고 집 두 칸을 짓기로 하였다. 띠풀을 가지런히 베지 않고, 나무를 깎지 않은 채 흙을 쌓아 뜰을 만들고 갈대를 엮어 울타리로
만드니, 일이 간략하고 힘이 적게 드는데 동리 사람들이 모두 와서 도우니 며칠이 못 되어 완성되었다. 현판을 걸어 ‘초사(草舍)’라 하고 그대로
거처하였다" 고 적고있어 유배와서는 세들어 살다가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잔디로 지붕 이은 두어 칸 집이 / 그윽하고 외져서 먼지가
없네
낮이 기니 글 보기 게을러지고 / 바람 맑으니 자주 이마를 드러낸다오
茅茨數間屋 幽絶自無塵 晝永看書懶
風淸岸幘頻
푸른 산은 때없이 문에 들어오고 / 밝은 달은 밤이면 이웃이 되네
우연히 이곳에서 쉬게 된 거지 / 세상을 마다는
내 아니로세
靑山時入戶 明月夜爲鄰 偶此息煩慮 原非避世人
그리고 초당에서의 삶을 초당(草堂)을 짓고 살았는데, 겨우 한 해를
지냈을 뿐인데 초당의 이름은 천년 후에까지 전하여 온다. 내가 이 초사에 얼마동안이나 살 것인가. 그리고 내가 이곳을 떠나간 후에 초사는
비바람에 떠내려가서 무너지고 말 것인가. 들불에 타거나 썩어서 흙덩어리가 되고 말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후세에도 알려지게 될 것인가, 모두 알
수 없는 일이다.
동(洞) 안에는 다른 초목은 없고 오직 누런 띠풀과 긴 대나무가 소나무나 녹나무[枏]에 섞여 있다. 민가에서 문과
울타리는 가끔 대나무로 나무를 대용하니, 그 소쇄(蕭灑)하고 청한(淸寒)한 것은 멀리 온 사람도 또한 즐겨 안거(安居)할 만하다했다 그리고이곳
초당에는 또 현판 하나가 걸려있다. 기거했던 생활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내용의 시이다.
이엉끝을 아니 잘라 처마는 너절한데/흙을 쌓아 뜰 만드니 형세는 비틀배틀
깃든 새는 슬기로워 저 자는 곳 찾아오고/들 사람 놀래 뉘집이냐
물어보네
茅茨不剪亂交加 築土爲階面勢斜 棲鳥聖知來宿處 野人驚問是誰家
맑은 시내
아름답게 문을 누벼 지나고/푸른 숲 영롱하게 문을 향해 가렸구려
나가보면 강산은 딴 지역 같은데 / 문 닫고 돌아 앉으면 옛 생활
그대로세
淸溪窈窕緣門過 碧樹玲瓏向戶遮 出見江山如絶域 閉門還似舊生涯
그의 유배문학 중 ‘답전보’에서는 고려 말의
부패한 관리들에 대한 깊은 고민을 기록하고 표현하였다. 전보(밭일을 하는 어르신)의 입을 통해 부패한 관리들의 실상을 지적하고 빗대어 꼬집는다.
그의 글은 재미있고 비유적이며, 예리하다. 그리고 초사생활하다 자위하는 마음도 호걸답다.
낙오된 신세지만 마음은 남았는데 / 연래(年來)에
근심 걱정 또 서로 찾아드네
겨울 추위 으시으시 바람 서리 하 괴롭고 / 따슨 봄 어둑어둑 안개 깊이 끼었어라
零落唯餘方寸心
年來憂患又相尋 冬寒冽冽風霜苦 春暖昏昏瘴霧深
산에선 시랑이 성내어 으렁대고 / 바다에선 도적이 넘보고 침노하네
돌아가잔 생각조차
도리어 한가한 일 / 하룻밤 편안한 잠값 따지면 만금일세
山上豺狼長怒吼 海中寇賊便凌侵 思歸却是閒中事
一夜安眠直萬金
유식자들은 어디에 있어도 누리는 여유가 있어 장소가 의미가 없다. 그것이 그들만의 특권이다. 육신의 연령보다 정신의 연령으로 더 길게 살았던 것이다.
봄물은 쪽빛보다 더욱 푸르러 /북녘 눈발 날릴 때 비하면
어떠한가.
편히 앉아 기이한 변화 구경하니 /떠나가는 것은 머무를 때가 없구나.
春水碧於藍
何如飄朔雪 燕坐玩奇變 逝者無停時
다만 쌍쌍이 노니는 갈매기들 /날아와 언제나
이곳을 나는구나.
어허 이내 신세는 새만도 못해 /떠나지 못해 부질없이 생각만 한다.
獨有雙白鷗 飛來長在玆 嗟我不如鳥
未去空相思
조선시대 이전의 선비들의 유배는 유배자에게는 고통의 기간이겠지만 현지인들에게는
영입이었다. 특히 600여년 전 , 백성 중심의 철학을 가진 나라, 공자가 생각한 이데아적 국가를 만들고자 조선혁명에 가담했던 삼봉 정도전을
그저 여말선초의 권력에 의해 사라진 정치가의 한 사람으로 치부하기에는 그의 정신이 너무 크다. 또한 현대에 정치인들에게도 많은 메세지를 남긴
위인으로 남았다. 그의 한금의 감흥이 이곳 초사 어느 한 공간을 스치우며 흐르고 있었다.
한밤중 일어나 홀로 서있으니 /높은 하늘은 해맑아 고요하다.
바다 위 한 조각 밝은 달이 / 만 리(萬里) 멀리 오두막을 비춘다.
半夜獨起立 長空澹自寂 一片海上月 萬里照茅屋
차가운 그림자 짐짓 한들거리니 /귀양살이 나그네를 불쌍히 여기는 듯.
미루어 동정옹을 생각해보니 /응당 이러한 고독을 함께 맛보리라
冷影故依依 還如憐竄客 爲憶東亭翁 應共此幽獨
흔히 조선의
설계자라 불리는 삼봉 정도전은 조선 건국에 가장 큰 역할을 한 혁명가이자 정치가이다. 정도전이 없었으면 조선도 없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정도전은 조선 건국에 절대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지만 대부분의 혁명가가 그렇듯이 정도전 역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혹한 사람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스승인 목은 이색을 죽이려 사주했던 적이 있고 동문수학한 선배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정몽주와
서로 목숨을 노리는 비정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등의 그 근거는 얼마든지 있다.
조선 건국의 중요한 도시인 함흥의 남문 옆에 있던
풍패관(豊沛舘)을 두고 동지였다가 서로 다른 길을 택한 정몽주와 정도전의 시가 남아 있어 인생무상을 느끼게 한다. 정몽주는
시에서
떨어지는 나뭇잎 어지러이 흩날리고 / 그대를 생각하나 그대를 보지
못하네.
원수(元帥)는 변방 깊숙이 들어가고 / 날랜 장수는 멀리 군사 나누어 갔네.
산채(山寨)로 가던 길에 비를 만나고 /
성루에서 일어나 구름 바라보네.
방패와 창 온 나라에 가득하니 / 어느 날에나 학문을
닦으리오.
정몽주의 시를 차운해 정도전도 시를 남겼다.
호수 빛과
하늘 그림자 함께 아득한데/한 조각 외로운 구름 석양을 띠고 있네.
이러한 때 어찌 차마 옛 곡조를 들으랴/함주 벌판은 원래 나라의
복판이었다네.
그의 야심은 정도전은 조선을 이상적인 사대부의 나라로 만들고 싶어했다. 이런 그의 사상은 너무 급진적이고 이상적이어서 현실의 벽에 계속 부딪혀야
했다. 정몽주와의 마찰 원인도 그랬고 이방원과의 갈등 역시 정도전의 급진적이고 이상적인 사상의 영향이 컸다.
조선의 모든 체제에
정도전의 손길이 닿아 있었기 때문에 정적도 많아 결국 조선을 개국한 지 7년만에 왕자의 난을 일으킨 이방원에 의해 죽음을 당하고, 조선 말인
1895년 흥선대원군이 복권시킬 때까지 500년 동안 시신도 찾을 수 없는 역적으로 역사에 남은 비운의 위인이다.
그의 근본적인
통치사상은 권력의 바탕은 백성이며 왕의 권력은 제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왕과 백성 사이에서 좋은 재상들이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왕은 세습되는 존재이므로 늘 성군이 나올 수는 없는 법이지만 재상은 언제나 좋은 재목을 가려 쓸 수 있으므로,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는 재상들이 통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로서는 아주 파격적인 사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정도전의 급진적인 사상은
이방원 쿠데타로 그의 혁명적 야심의 꿈은 모두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회자되고 있는 말중에는 큰 부자나 큰 인물은 인연을 잘 만나야
한다는 말이 있다.정도전도 왕권이 부럽지 않을 권세에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정도전에게서 이성계와의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을 건국을 대표한 두 거두인 정도전과 이성계(李成桂)는 군신 관계였다기보다는 동지 관계에 더 가까웠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정도전은 태조 이성계가 있는 술 자리에서 ‘유방이 한나라를 세운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나라를 세운 것’이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는 태조가 조선을 세운 것이 아니라 자신이 조선을 세운 것이라는 의미였다. 받아들이기에 따라서는 멸문을 당하고도 남을 극히
위험한 말이었다. 그러나 정도전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냈던 태조의 말은 "삼봉이 없었다면 내가 어찌 오늘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겠는가"였다. 얼마나 이성계가 정도전을 신뢰했었는가를 나타내는 대목이다.
이성계와의 인연은
1375년(우왕 1) 원나라 사신이 왔을 때 원나라의 사신을 맞아들이는 문제로 조정에서는 신흥사대부와 권신들 간에 대립이 일어났다. 이인임과
지윤 등은 사신을 맞아들이자고 한 반면, 정도전을 비롯한 신흥사대부들은 이에 반대했다. 그러나 이인임 등은 그들의 주장을 물리치고 원나라 사신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이인임은 성균사예(成均司藝)였던 정도전을 영접사로 보내려고 했다. 이에 정도전은 "내가 의당 북원 사신의
머리를 베어 오거나, 아니면 그를 결박하여 명(明) 나라로 보내겠소."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때 이런 시로 자신의 뜻으로 표한다. (삼봉집
제1권)
내 수레에 기름 칠해 먼 길을 떠나 / 험한 저 태항산을 올라가노라
황하 물이 그 아래로 내리쏟는다 / 삼박(三亳)의 사이를 돌아다보니
膏車邁行役 登彼太行山 黃流奔其下 顧瞻三亳間
아득히 다
달라지고 / 두 무덤만 마주서 우뚝하다
어느 시대 사람이냐고 물었더니 / 용방(龍亳)과
비간(比干)이라 일러주네
茫茫皆異國 雙墳對巍然 且問何代人 龍逄與比干
조국의 멸망을 차마 못본 체할 수 없어서 /
충의의 심간이 찢어지기에
대궐문을 손수 밀고 들어가 / 임금 앞에 언성 높혀 간했더라오
不忍宗國墜 忠義裂心肝 手排閶闔門
抗辭犯主顔
예부터 한 번 죽음 뉘나 있으니 / 구차한 삶은 처할 바 아니지 않나
천 년 지난 광막한 오늘날에도 / 영렬이
가을 하늘에 비끼었구려
自古有一死 偸生非所安 寥寥千載下 英烈橫秋天
1375년 여름에 공이 성균사예(成均司藝)로서 이 시를 짓고
드디어 시정(時政)의 득실(得失)을 따지니 재상(宰相)이 미워하여 전라도(全羅道)회진현(會津縣)으로 추방되었다.
그리하여
이인임·경부흥(慶復興) 등의 권신의 진노를 사 정도전은 나주의 속현인 회진현(會津縣)으로 유배되면서 세에 밀린다. 이때 귀양당시 읊은 봄을 맞이
한다는 '영춘(逢春)'의 시가 전한다.
금성산 아래서 또 봄을 만나니, 금년에도 물상이 새롭군 그려
버들가지 바람 불어 눈이
트이고, 벼는 꽃을 재촉하여 진액 만드네
錦城山下又逢春 轉覺今年物象新 風入柳條吹作眼 雨催花意濕成津
물가라 풀색은 없는 듯
있고, 북정밭 불탄 자국 끊어졌다 잇기네
남방에 귀양 온 가엾는 나그네라, 마음은 고목처럼 정신이 빠졌다오,
水邊草色迷還有
燒後蕪痕斷復因 可惜飄零南竄客 心如枯木沒精神
어느 가을날 노 판관을 보내며(送盧判官) 읊은 이별가가
차량하다.
가을바람 나무 끝에 이니 /나그네 마음 이미 슬퍼진다.
더구나 이러한 때 당하니 / 그대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단다.
)秋風動高樹客意已悲凉 況復當此時 之子歸故鄕
오두막집 처마 아래 마주앉으니 /등잔불은 외로운 불빛 깜박거리고
아름다운 여자를 끼고 있으니 / 마음껏 술잔이나 기울여 보자구나.
相對茅簷下 燈火耿孤光 亦有佳人携
滿意傾壺觴
은근하다, 이 자리 취하지 않으면 /날 밝으면 제각기 아득히 헤어질 것을
殷勤須盡醉
明發各茫茫
삼봉이 귀양 중에 김약항(金若恒)과 하륜(河崙) 설장수(偰長壽)를 만나 시를 지어
이르기를,
이별한 지 3년 만에 처음 서로 만났네 / 지난 일은 그럭저럭 한낱 꿈속이구려
헐뜯고 칭찬하는 시비는 이 몸에 아직
걸렸으나 / 슬픔과 기쁨이 나오는 길은 도리어 같구려
別離三載始相逢 往事悠悠一夢中 毁譽是非身尙在 悲歡出處道還同
유배 기간, 타관 땅에서 추석을 맞아 그도 아쩔 수 없는 감정을 풀어 낸다. (中秋歌)
해마다 보는
한가위 달/ 오늘밤만은 더욱 애처로워라
온 하늘은 바람과 이슬로 적막하고/만리 멀리 바다와 산이 이어져 있도다
歲歲中秋月 今宵最可憐
天風露寂 萬里海山連
고향 땅에서도 같이 볼고 있으려니/ 온 집안 식구들 아마도 잠들지 못하리라
서로 그리는 뜻을 누가
알리오/ 두 곳에서 모두들 시름으로 마음이 망연한 줄을
故國應同見 渾家想未眠 誰知相憶意 兩地各茫然
'지위가
높아지면 몸이 위태로워지고, 재물이 많아지면 생명이 위험해진다”位尊身危 財多命殆
(後漢書)
유배는 3년만에 끝났지만 정도전은 유배 후에도 한동안 기약 없는 야인생활을 해야 했다. 이때 정도전은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길을 나선
것이 동북면병마사로 있던 이성계를 찾아 함흥으로 간 것이다. 두 사람의 만남은 이렇듯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정도전의 강한 의지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이때가 정도전이 48세가 되던 1383년(우왕 9년)이었다.
정도전은 부패한 관료로 인한 피폐한 백성들을 구제하고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하는 길은 오직 혁명 밖에 대안이 없다고 결론 짓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이성계의 군사력이 절실하였던 것이다. 당시
조우에서 정도전은 이성계 휘하의 정예 군대와 일사분란한 지휘통솔에 감탄을 금치 못했고, 이성계 또한 정도전의 심오한 학문과 원대한 국가경영에
대한 경술에 감탄해 마지 않았다.
정도전은 이성계 휘하의 동북면 군사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군령을 엄하게
지킬 뿐 아니라 무기들 또한 잘 정비되어 있으며 훈련에도 열심히 임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정도전은 이성계를 훌륭하다고 칭찬하며 “이 정도의 군대라면 무슨 일인들
성공시키지 못하겠습니까?”라고 자신의 의도를 내보인다.그날 밤 이성계와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날 정도전은 군영 앞에 서 있는 오래된 소나무의 껍질을 벗기고 그 위에 이성계를 위해 시 한 수를 읊는다.
기나긴 세월 동안 한 그루 소나무가/수만겹 청산 속에서 잘도 자랐구나
잘 있다가 다른 날에 서로 만나 볼 수 있을는지?
/인간 세상 굽어보다가 곧 큰 발자취를 남기리니.
蒼茫歲月一株松 生長靑山幾萬重 好在他仙年相見否 人間俯仰便陳蹤
이 시에서
정도전은 이성계를 늙은 소나무에 비유하고 앞으로 때가 되면 이성계는 천명(天命)에 따라 세상을 구원하러 나서야 하며, 자신과 손잡고 큰일을 하여
위대한 역사적 과업을 남기게 될 것이라며 자신의 속마음을 은근히 드러낸다.
이성계는 개혁을 주장하는 정도전에게 협력하기로 하고
지원을 약속했다. 그의 인물됨됨이에 매료된 정도전은 그의 막료가 되었고 이후 역성혁명까지도 논의하게 되었으며 이 일을 계기로 정도전은 이성계의
참모로서 큰 야망을 품게 되었다.야인으로 떠돌던 정도전은 자신의 인생을 반전시킬 수 있는 기회로 이성계를 택했고, 큰 야심을 품었으되 변방의
무장으로 지내야 했던 이성계 역시 용기와 지략을 갖춘 정도전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만남은 결국 조선 개국의 씨앗이 되었고, 두
사람은 정도전이 이방원에게 살해 당할 때까지 동지적 관계를 유지하며 호의호식하며 권세를 누렸다. 결국 나주는 조선을 새로 창국한 두사람, 즉
이성계는 왜구의 토벌하러 왔다가 장화왕후 오씨의 사랑을 얻었고 정도전은 유배를 왔다가 권력을 거머지는
기회의 장소가 됐다.
그러한 정도전도 어느날 어디를 가다 이렇게 읊었다.
가을 구름 아득하고 사방 산은 고요한데
/지는 잎 소리 없이 땅에 가득 붉었구나.
다리 위에 말 세우고 가야 할 길 묻나니 /이 몸이 그림 속에 있는 줄도 모른
채
秋雲漠漠四山空 落葉無聲滿地紅 立馬溪橋問歸路 不知身在畵圖中
방문한 날 공교롭게도 정도전이 읊은 우일(雨日)이란 시와 일치하고 있다.
빗소리 유달리 좋은 곳은/초당에서 낮잠 중일 때로다.
좍좍 흘러 개울을 모여들고/비껴 날아 살랑
바람에 흩날린다.
雨聲偏好處 茅屋午眠中 亂灑侵寒浦 斜飛逐細風
버들은 늘어져 늦 푸른빛 머금고/꽃은 무거워 선홍이
젖어있다.
늙은 농부들 웃고 마주보며/집집마다 풍년들기 바라고 있다.
柳低含晩翠 花重濕鮮紅 田父笑相對
家家望歲功
정도전은 소재동기(消災洞記)의 한 대목이 통했을까? 지금 그 초사가 모델하우스
형식으로 서 있다.
.....나는 이 초사에 얼마나 살까. 내가 떠나간 후 이 초사는 비바람에 허물어지고 말 것인가.
들불[野火]에 타 없어지거나 썩어 흙이 돼 버릴 것인가. 혹시라도 후에까지 남을 것인가, 아닌가. 모두 알 수가 없다. 다만 내가 미치광이 같고
엉성하고 어리석고 고지식하므로, 이 시대에 버림을 받아 먼 지방으로 귀양왔는데, 동리 사람들이 나를 이와 같이 후대해 주니, 혹시 나의 곤궁한
처지를 애처로이 여겨 거두어 주는 것인가. 아니면 먼 지방에서 생장하여 시대의 여론을 듣지 못하여 나의 죄를 알지 못하는 것인가. 요컨대, 모두
매우 후대하는 것이니, 나는 부끄럽고 감격해서 시말(始末)을 적어 나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
초사(草舍) 앞을 흐느러지게 발을
치는 버들가지를 읊은(詠柳) 그의 시로 이곳에서의 감흥을 마무리한다.
적막한 높은 다락 언덕이라면 / 황량한 옛역사
가이구려
저무는 사양을 견디다 못해 / 늦매미 소리를 띠고 있다오
牢落高樓畔 荒凉古驛邊 不堪斜日暮 更乃帶殘蟬
동문
길손을 보내는 곳에 / 때마저 봄바람을 만났네
이 한은 어느 때나 끝이 날 건가 / 이 해 저 해 이별만 잇달았네.
어떤 본에는
다별리(多別離)가 장신지(長新枝)로 되었다.
東門送客處 正値春風時 此恨何時盡 年年多別離
가뿐가뿐 가깝게 가깝게 어울리려나 /
짐짓 따라오는 듯하니
경박하여 도리어 정착 없으니 / 믿고서 정을 주긴 어렵겠는걸
飄飄如欲近 故故似相隨 輕薄還無定 難憑贈所思
참고문헌=고전번역서/고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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