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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신부도(부분)
여사잠도(부분)
열녀도(傳稱 작품이다.)
고개지(顧愷之)
고개지의 이전에도 그림이 있었고, 화가도 있었다. 그러나 이름이 전해 오는 화가가 없으므로 고개지를 중국 최초의 화가라고 부른 다.
고개지(344-405)는 동진 시대에 작품 활동을 한 화가로서 문인 사대부 가문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벼슬이 산기상시(散騎常侍) 였다,. 아버지 고열지는 고향인 무석(無錫)에서 현령을 비롯하여 별가, 상서좌승 등의 여러 벼슬을 하였다. 고개지가 귀족 가문의 출생임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리는 재능이 뛰어 났다. 20세 쯤에 와관사(瓦官寺)에 벽화를 그렸더니 그림을 구경하러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왔다. 그들이 낸 시주금이 순식간에 일만금을 넘어섰다는 일화는 그의 재능과 명성이 당대에도 유명하였음을 말해주는 전설이다.
중국회화의 모든 개설서가 고개지를 다룬다. 그런데도 고개지가 누구인가? 라는 의문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한다. 중국의 고대 역사가 다루는 인물은 역사적 사실보다도 신화적 전설을 기록한 것이 많다. 왜냐면 인물이 활동하였던 당대에는 남긴 기록이 없는 수가 많다. 후대에 와서 명성이 높아지고 난 뒤에 비로소 기록을 남긴 것이므로 허구와 진실이 뒤섞여 있다. 고개지도 마찬가지이다. 중국 회화사에서 두루마리 그림이 널리 유행하고서야 고개지가 명성을 얻어서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고개지는 중국 회화사에서 그림의 제작과 품격, 규범에 대하여 이론을 남긴 화가이다. 그의 이론과 묘사법은 중국 회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중국 회화를 말할 때는 그의 회화가 기준점이 되어서 비교를 한다. 고개지의 그림과 어떻게 다르며, 어떻게 변화하였는가를 말하는 일이 많다. 그만큼 고개지는 중국 회화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고개지는 중국 전통회화에 변화를 일으켰다. 또한 중국의 고대 전통회화의 기준이 되기도 하였다.
고개지에 관한 가장 오래 된 기록은 5세기 중엽에 유의경이 쓴 세설신어 이다. 세설신어는 고개지가 죽고 4반세기가 지난 430년 경에 쓴 책이다. 고개지와는 멀지 않은 시대에 쓴 기록이지만 이 책도 사실보다는 떠도는 전설을 기록한 것이 많다.
귀족의 가문에서 태어난 고개지는 일찍부터 많은 책을 읽고, 시도 쓰면서 문인으로서 교육을 착실하게 받았다. 고개지는 사대부 가문에서 태어나 많은 지식을 쌓으므로 회화에 대한 이론을 갖출 수 있었다. 당시의 대부분의 화가는 단지 그림만 잘 그리는 기술자로서 그림쟁이 였다.
고개지는 귀족 가문의 출신답게 벼슬길로 나아갔다. 환온의 밑에서 참군의 벼슬을 하였으나 환온이 죽자 벼슬에서 물러났다. 이때는 중년의 나이가 되었다. 벼슬에서 물러났다가 다시 벼슬로 나아가기를 반복하였다. 아마도 은거를 할 동안에 그림을 그리지 않았나 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림의 이론서를 남긴 것도 이때 였으리라고 말한다. 그는 화론(畵論), 모탁묘법(摹석妙法), 화운대산기(畵雲臺山記)의 저서를 남겼다.
53세 때는 형주자사 은중감의 참군이 되었다. 은중감이 황현에게 패하야 전사하자 그는 다시 좌절에 빠졌다. 2년 뒤에는 산기상시의 벼슬에 올랐지만 2년 뒤에 즉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405년)
이 시대의 미술 공부는 전문적인 양성 기관이 없었다. 선생에서 제자로 이어지는 도제 제도에 의하여 그림을 배웠다. 자연히 스승의 기 법을 익히고, 스승의 화풍을 따르는 사승 관계가 형성되었다. 고개지의 경우를 보면 조불흥 - 위협 - 고개지 - 육탐미를 사승 관계에 의한 계보로 본다. 아마도 그림의 양식도 닮았으리라 추정한다.
고개지의 제자인 육탐미도 명성이 아주 높았던 화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육탐미의 생애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림도 남아 있지 않다. 인물화를 잘 그렸다고 전해온다. 이 시대의 그림을 알기 위해서는 고개지의 그림을 중심으로 공부를 해보자.
고개지의 작품으로 전해오는 것은 여사잠도(女史箴圖), 낙신부도(洛神賦圖), 열녀인지도(烈女仁智圖)가 있다. 세 그림은 모두 두루마리 양식이다. 두루마리 양식은 고개지가 처음으로 만들었던 양식이라고 말한다. 이중에 산수화의 배경을 그리므로 중국 산수화의 시원으로 일컫는 그림은 낙신부도이다. 그러나 고개지의 그림에서는 인물화 중심인 다른 그림도 다루어보겠다.
고개지가 그림을 그릴 때의 붓 사용법에는 춘잠토사(春蠶吐絲)라는 묘사법을 만들었다. 선의 굵기가 일정하고 가느다른 선이 마치 누에가 실을 토하는 듯 하다 하야 븥인 이름이다. 고개지는 인물화를 그릴 때 끝이 뾰족한 붓을 사용하여 가느다란 선을 그었다. 특히 옷의 주름을 표현할 때 많이 사용하였다. 불교가 유행하면서 사원 벽화를 많이 그렸다. 불화에는 인물화를 많이 그렸으므로 고개지의 선묘법은 육탐미와 더불어 사원 벽화에 하나의 양식을 만들었다.
고개지의 그림으로 전하는 여사잠도와 열녀인지도에는 춘잠토사의 선묘를 많이 사용하였다. 이를 또한 철선묘(鐵線描)라고도 하였다.
낙신부도는 송대의 모본만 전해온다. 모본도 여러 본이 있다. 본마다 차이가 있다. 고궁박물관 본과 요령성 박물관 본이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낙신부도는 위나라 때의 문인 조식의 문학작품을 소재로 그린 그림이다. 문학작품이 회화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는 것은 남북조 시대의 남조 사람들이 갖고 있는 심미의식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그때까지의 그림은 장인(匠人)인 화가가 그렸으므로 정교하고 세밀하게 그렸다. 화려하였다. 회화의 화면 구성도 인물이 중심이고 배경은 부수적 요소였다. 그러나 남북조 시대에는 기술적인 능숙도만을 중요시 하던 예술 전통이 글(文)을 중시하는 쪽으로 바뀌고 있었다. 낙신부도는 그와 같은 변화의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작품의 구성이나 묘사에서 합리적으로 정밀하게 그리던 전통이 색채를 사용하여 생략하고 간략하게 표현하는 기법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형상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보다는 의미 내용을 중시하는 미술의 표현으로 바뀌는 것을 보여준다. 고개지는 이것을 이론화하여 전신론(傳神論)을 주장하였다.
전래되고 있는 낙신부도는 고개지의 진적이 아니다. 후세에 모작한 모본이다. 모본이더라도 작품의 초기 양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특히 낙신부도의 배경으로 그려진 그림을 중국 산수화의 기원으로 보는 학자가 많다. 낙신부도에서 묘사한 나무, 인물, 산의 모습은 고구려 고분 벽화의 산수와 유사하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시기적으로 남북조 시대와 일치한다. 벽화는 모본이 아니므로 고개지 시대의 회화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고구려 고분 중에는 씨름하는 사람이 그려져 있는 각저총이 있다. 씨름하는 사람의 옆에 나무가 그려져 있다. 나무의 모양이 낙신부도의 나무와 닮았다. 잎은 마치 쥐고 있는 사람의 주멱의 모습이다. 무용총에 그려져 있는 인물도도 낙신부도의 인물과 닮았다.
고개지의 그림은 정밀한 묘사보다는 색채를 사용하여 간략하게 묘사하였다. 이것은 형상보다는 정신의 표현을 더 중요시한다는 이론을 반영한 그림이다. 고개지 회화는 정교한 장인의 회화에서 사대부 회화로 넘어가는 중간 단계를 보여준다고 말한다. 중국 회화에 대 한 고개지의 공헌으로 전신론을 꼽는다.
‘ 약(略)과 전신(傳神)’의 이론을 받침하는 또 다른 이론에 풍격(風格)과 기운(氣韻)이 있다. 풍격과 기운을 완성해내는 방법론으로 용필(用筆)을 내세웠다. 붓은 중국 회화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요소이고 붓의 사용은 그만큼 중요하였다. 고개지의 용필은 선 긋기이다. 남북조 시대는 선묘에 의존하여 형상을 표현하고, 형상 표현을 통하여 기운과 풍격을 나타낸 것이 회회의 기본이었다.
후한 말기에는 인체미의 표현을 마른(廋) 몸을 그리는 것을 제 일의 준칙으로 삼았다. 세설신어에서 ‘마르다(瘦)’는 것은 맑고, 깨끗하고, 민첩하다고 설명하였다.
고개지의 회화도 몸을 가늘게 그려서 뼈까지 표현하려 하였다. 인체 표현에서 골(骨-뼈)의 표현은 변하지 않는 기본 형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인체의 윤곽선을 그리고, 관절의 꺾임을 표현함으로 풍운(風韻)을 나타낸다고 하였다. 풍운은 생동감 또는 생명력이고 말할 수 있다. 형태를 닮게 그린다는 것은 순전히 골기(骨氣)에 의한다. 골기와 풍운이 움직임의 느낌을 나타낸다. 움직임의 느낌을 주는 것이 기운(氣韻)이다.
서양 회화가 공간적 개념으로 입체적이고 투시적으로 표현한다면 중국회화는 위치의 조합과 안배로 표현하였다. 고개지의 회화에서 인물의 위치가 가가이와 멀리 있는 것을 표현할 때는 화면의 낮은 곳과 높은 곳에 위치하도록 그렸다. 입체적이 아니고 평면적으로 배치를 하였다. 중국회화는 평면에 배치하는 것이 기본 구도이다.
단일 화폭에서 제재의 변화를 나타낼 때는 좌우나, 상하로 배열함으로 표현하였다. 그림과 그림 사이에 문자를 쓰거나 수목을 그려서 장면을 나누는 기법으로 제재를 나누고 단락을 만들었다. 이것은 문장의 기법이다. 문인들이 그림 그리기에 관여하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고개지의 낙신부도도 이 기법을 따랐다. 화면에 인물 배치로 원근을 표현하였고, 장면의 변화를 중간에 수목을 그려서 단락을 나누었다.
일반적으로(반드시는 아니지만) 가까운 사람의 표현으로는 아래 쪽에 그렸고 먼 곳의 사람은 위쪽에 그렸다. 대상물의 크고 작음도 보이는 데로(원근법에 의하여) 그린 것이 아니고 실재로 크고, 적음을 그대로 그렸다. 보이는 것을 그린 것이 아니고 아는 것을 그린 것이다.
고개지의 그림은 조금 다르다. 대상물이 크고, 작음에 따라서 표현도 반드시 크게 하거나 작게 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크게 그렸다. 주관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므로 전신(傳神)이라고 하였다.
고개지는 말(언어)로서는 전달 할 수 없는 도(道)의 개념을 형상을 통하여 전달하려 하였다. 형상은 사실적인 모습이 아니고 심상(心象) 즉 이미지의 의미가 강하였다. 낙신부도는 낙신부의 서술 내용을 사진처럼 그린 것이 아니다. 생략도 하고 강조도 하여 이미지로 변환하여 표현한 것이다.
낙신부도는 중국의 전통회화에서 두 가지의 발전된 양상을 보여준다. 동일 인물을 반복하여 그리므로 이야기의 연속성을 강조하였다. 다른 하나는 중국 산수화가 한 단계 더 발전하였음을 보여준다. 산, 나무, 강이 각각 독립된 대상물이 아니고 하나의 통일된 회화체계에서 구성물이 되었다. 이것은 한나라 때까지의 회화 전통을 벗어나서 발전된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낙신부도는 여인의 도덕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아름다운 용모를 그렸다. 여인의 아름다움을 통하여 낭만적인 분위기를 표현하였다. 이것은 중국 회화에서 고개지가 새롭게 세운 또 하나의 양식이다.
첫댓글 평소 고개지에 대한 궁금증이 많았는데 좋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