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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念佛)과 참선(參禪)
우리가 불도를 수행함에 있어서 여러 가지 종류와 방법이 많습니다.
그중에도 가장 중요한 방법은 염불(念佛)과 참선(參禪)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고로 염불과 참선에 대하여 피차 우열과 장단을 말할 뿐만 아니라
극단에 있어서는 염불(念佛)하는 자는 참선을 반대하며
참선(參禪)하는 자는 염불을 반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각각 종파의 세력이 벌어짐에 따라서 염불을 주로 하는 염불종에서는
염불성불이 시진종이라 하여 염불이라야만 최후성불이 된다고 하며
참선을 주로 하는 선종에서는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라는 표어를 주장하여
참선을 해야만 성불할 수가 있다는 고집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과거에 훌륭하신 조사나 선지식들이 이 점에 대하여 많은 논란과 해석이 있습니다만
일일이 다 말할 수 없고 그 중 중요한 몇 가지를 들어 여러분의 수도상 참고로써 제공하는 바입니다.
그러면 첫째 염불이라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부처님의 명호를 입으로 외우며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을 염불이라고 하는데,
그 내용에 따라서 칭명염불(稱名念佛). 관상염불(觀像念佛). 관상염불(觀想念佛). 실상염불(實相念佛).
유상(有相). 무상(無相) 등의 차별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염불을 해야 되는가.
그것은 우리는 범부중생이라 우리보다 먼저 깨치신 부처님의 원력과 가피의 힘을 입어서 생전에는 화를 면하고 복을
받게 되며, 사후에는 극락세계에 왕생하여 무량복락을 수용하다가 필경에는 성불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염불로써 왕생극락(往生極樂)한다는 근본출처가
물론 경전에 많이 있습니다만
그 중 제일 중요한 것은 관무량수경에 보면 아미타불께서 서원하시기를
시방중생이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자는 전부 다 극락세계에 왕생(往生)하게 한다는
원력(願力)을 발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아미타불께서는 사십팔원이라는 마흔 여덟 가지 원력을 세우시고 극락세계를 장엄하신 후에
염불중생을 제도하신다는 것이 염불(念佛)하는 중요한 원인이 된 것입니다.
과연 우리 중생은 죄악이 많고 업장이 두터운 까닭에 도저히 우리의 힘으로는 극락세계에 간다든가
또는 대각성불 한다는 것이 그렇게 용이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자연히 나보다 힘이 크고 자비가 많으신 불보살의 가피를 입어야만 속히 용이하게 성취될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염불문(念佛門)을 가리켜 타력이행정토문(他力易行淨土門)이라고 하는 것이 그러한 까닭입니다.
다시 말하면 타력(他力)을 빌어서 정토극락을 쉽게 갈 수 있다는 문이 곧 염불문이라는 뜻인데
한 번 극락정토에 수생하게만 된다면 영원히 육도윤회를 벗어나게 될 뿐만 아니라
항상 불보살 전에서 설법을 듣게 되므로 퇴전이 없이 결국에는 성불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참선(參禪)이라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물론 참선에 대해서도 근기에 따라서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마는
대체로 참선이라는 말은 선의 이치를 참구한다는 뜻이니 선(禪)은 선나(禪那)라고도 하는데 곧 정려(靜慮)라,
사유라는 의미가 포함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참선은 명심견성(明心見性)을 목적으로 하는 까닭에 무엇보다도 심성을 밝히는 데 전심노력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외식제연(外息諸緣)하고 내심무천(內心無喘)이라는 말과 같이 밖으로는 모든 인연(因緣)을 끊고
안으로는 마음에 헐떡거리는 번뇌망상(煩惱妄想)이 없어짐에 따라서 자연히 심성이 안정(安定)되고,
심성이 안정된 후에야 비로소 자성(自性)의 밝은 달빛이 드러나 보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근기가 열약한 범부중생으로서 삼독심(三毒心) 오욕락(五慾樂)을 끊고 모든 번뇌망상을 제거하며
자성(自性)의 근원을 밝혀 대각성불(大覺成佛)한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선문(禪門)을 가리켜 자력난행성도문(自力難行成道門)이라고 하는 것이니
과연 타력(他力)을 빌지 않고 자력(自力)만으로써 성현(聖賢)의 대도(大道)를 성취한다는 것이 심히 곤란한 일입니다.
비유해서 말하면 강을 건널 때에 배를 타고 건너가는 것을 염불문(念佛門)에 비유할 수 있고, 헤엄을 쳐서 건너가는
것은 참선문(參禪門)에 비유할 수 있는데 강을 건너는 결국의 목적은 배를 타고 가든지 헤엄을 쳐서 가든지 마찬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마는 용이하고 곤란한 점에 있어서는 대단한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염불문에서는 주장하기를 조그마한 강물도 헤엄쳐서 건너가기가 어렵거늘 하물며
생사대해(生死大海)라는 큰 바다, 오탁세악의 험난한 파도를 물리치면서 무사히 열반피안에 도달한다는 것은 절대로
용이한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죄악의 업력(業力)이 지중한 범부중생으로서 오로지 자력수행(自力修行)하여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성취한다는
것은 하늘에 올라가 달을 만져보겠다는 것과 같아서 참으로 난사중(難事中) 난사(難事)라고 아니할 수 없으니 차라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지성(至誠)으로 염불하여 왕생극락(往生極樂)한다는 것이 가장 첩경(捷徑)이요 안전한
방법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 반면에 참선문(參禪門)에서는 주장하기를 달마대사 혈맥론에 말씀하시되 약불견성(若不見性)하면
염불. 송경. 지계. 보시가 역무익처니, 염불(念佛)하면 득(得)인과(因果)하고,
송경(誦經)하면 득(得)총명(聰明)하고, 지계(持戒)하면 득(得)생천(生天)하고, 보시(布施)하면 득(得)복보하되,
멱불(覓佛)은 종부득야(終不得也)라 하셨으니, 그 뜻은 아무리 좋은 일을 할지라도 자기의 심성을 밝혀보지 못하면
비록 염불을 한다든가 송경을 한다든가 그밖에 모든 계행을 잘 지킨다 할지라도 아무 유익이 없는 것이다.
가사 지성(至誠)으로 염불하면 좋은 인과(因果)는 얻을 수가 있고 열심으로 송경(誦經)하면 총명한 재지는 얻을 수가
있으며,
계행(戒行)이 청정하면 천상복을 받을 수가 있고, 널리 보시(布施)공덕을 지으면 큰 유루복(有漏福)은 얻을 수 있으나
부처될 가망은 없다고 하셨으니,
그렇다고 하면 염불공덕으로서 타력미타와 타방정토를 발원하는 것보다는 될 수만 있다면
스스로 자기의 심성을 밝혀서 자성미타와 자심정토를 찾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석가는 누구며 아미타불은 누구냐. 피장부(彼丈夫) 아장부(我丈夫)가 아닌가,
아무리 어렵고 또 어렵다 할지라도 금생에 성불 못하면 내생에라도,
내생에 못하면 몇 만겁을 윤회할지라도 위법망구(爲法忘軀)라, 분골쇄신(粉骨碎身)이 된다 할지라도
결국에 내 부처 내가 찾고 내 극락 내가 가는 것이 장부의 떳떳한 일이 아니냐 하고,
오리려 염불중생을 무능하게 보며 불쌍하게 보는 것이 참선문(參禪門)에서 주장하는 생각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쌍방의 주장하는 바를 제 삼자의 입장에서 냉정하게 비판해 본다고 하면
피차 장단(長短)과 우열(愚劣)이 상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염불문(念佛門)에서 주장하는 타력신앙이 정토왕생에 있어서는 비교적 용이하다는 점이
우승한 장처(長處)라고 볼 수 있지만 그 반면에 심성수양에 부족한 결함이 많을 것만은 사실입니다.
또 참선문(參禪門)에서 주장하는 바 명심견성(明心見性)하여 자력성불하는 점은
물론 염불문보다 우승한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그 반면에 불착삼보(不着三寶)라는 정신 아래서
자연히 불. 법. 승 삼보를 경홀히 생각하게 되므로 아만공고하여 일생동안을 허송하게 된다면
그런 애석하고 통분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뿐만 아니라 근기가 열약하고 죄업이 과중한 범부중생으로서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라는 말과 같이
입지성불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올시다.
그러므로 달마대사께서는 선지일자(禪之一字)는 비범부소측(非凡夫所測)이라,
선(禪)이라는 한 글자는 범부가 족히 측량할 수 없는 경계라고 말씀하셨으니 그렇다고 하면 구태여
어려운 참선을 하다가 잘못하여 일생동안 허송세월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염불공덕으로써 왕생정토를 발원하는 것이
비교적 안전하고 첩경(捷徑)이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일반의 견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있어서 한 가지 문제되는 것은 염불을 주로 하는 반면에 심성의 수행이 부족하고 업장소멸이
충분히 못 되었다 할지라도 족히 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있는가 하는 이 점이 가장 큰 문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는 절대로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아미타불께서 사십팔원 가운데 십념왕생원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생전에 설사 악한 일을 많이 했다 할지라도 임종시(臨終時)에
열 번만 지성으로 염불하게 되면 그 공덕으로써 극락세계에 왕생하게 한다고 하셨으니
불불허설(佛不虛設)이라,
어찌 대자대비하신 대성자 아미타불께서 무슨 필요로써 거짓말을 하여 불쌍한 중생들을 속였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하면 아미타불께서는 근기가 약한 범부중생들을 위하여 대자대비로써 특별히 염불문을 열어 놓으시고
고해중생을 제도하여 주시니 우리는 덮어 놓고 아미타불을 절대로 신앙하여 죽을 때가지 일심정력으로
염불공덕을 짓는 것이 가장 안전한 수행 방법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만일 심성수양이 완전히 되었다고 하면 타방 부처님의 제도를 받지 않아도 넉넉히 자력성불을 할 수 있는데
구태여 타방정토로 갈 필요가 있겠습니까. 심성수행이 부족하여 자력성불 못하는 중생들을 위하여
염불문을 만들어 놓으신 것이 아미타불의 자비원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우리가 염불하여 극락 가는 것이 수행이 부족한 우리의 힘으로 가는 것이 아니요
아미타불의 원력의 힘으로 가게 되는 것이니, 누구든지 염불만 하면 갈 수 있다는 염불문의 주장이 당연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선(禪)에 유명하신 영명연수선사께서는 특별히 참선염불 사료간이라는 게송을 만들어
참선보다도 염불(念佛)이 안전(安全)하다고 찬양을 하셨는데
그 게송에 보면 첫째,
유선무정토(有禪無淨土)하면 십인구차로(十人九蹉路)라.
음경이 약현전(陰境이若現前)하면 별이수타거(瞥爾隨他去)라 하셨고,
무선유정토(無禪有淨土)하면 만수만인거(萬修萬人去)라,
약득견미타(若得見彌陀)하면 하수불개오(何愁不開悟)냐 하셨으며,
유선유정토(有禪有淨土)하면, 유여대각호(猶如戴角虎)라, 현세위인사(現世爲人師)하고 내세작불조(來世作佛祖)라
하셨고,
그 다음에는 무선무정토(無禪無淨土)하면, 철상병동주(鐵床竝銅柱)라, 만겁여천생(萬劫與千生)에 몰개인의호
(沒箇人依怙)라 하셨습니다.
그 뜻은 참선만 하고 염불을 하지 않으면 열 사람에 아홉 사람은 잘못되기 쉽다,
그리하여 만일 저승길에 나서면 어느덧 염라사자에게 붙들려 가게 된다.
아미타불만 친견하게 되면 깨치지 못했다고 무엇을 걱정하랴,
그러나 참선(參禪)도 하고 염불(念佛)도 했다고 하면 뿔돋힌 범과 같아서
무섭기 한량이 없다,
이 세상에서는 남의 스승이 되고 내생에 가서는 불조(佛祖)가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참선(參禪)도 못하고 염불(念佛)도 못했다고 하면 지옥에 들어가 동상철주에 묶여갖은 고초를 받을
것이니 몇 천만 겁을 돌아다닌들 무엇을 의지하여 사람이 되고 제도를 받겠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영명연수선사께서도 염불(念佛)만 하면 만 사람이 다 갈 수 있다고 하셨으니 물론 염불을 찬양한 것만은 사실입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참선이 염불만 못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참선은 자력수행(自力修行)이라 상근기가 아니면 성공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요,
염불은 타력신앙의 방편이라 하근기 중생들을 위하여 미타의 원력으로써 틀림없이 왕생된다는 것을 말씀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인도 마명대사께서는 일심(一心)에 의지하여 진망이문(眞妄二門)을 열어 놓고 불변(不變)과 수연(隨緣)
으로써 진여(眞如)의 체용(體用)을 설명하신 대승기신론에 있어서도
최종신심분에 말씀하시되 사바세계 중생은 항상 신심이 퇴전하여 성취하기가 곤란하니
일심으로 서방극락세계 아미타불을 염송하면 그 선근인연공덕으로 왕생정토하여
퇴전치 않게 된다고 하셨고,또 만법(萬法)이 유심소조((唯心所造)라 하여 통만법,명일심(通萬法, 一心)을 주장하신
일승원교화엄경 있어서도 선재동자가 오십삼 선지식을 방문하실 때에 처음에 문수보살을 친견하셨고 나중에
보현보살을 친견하셨는데 보현보살께서 십종광대원을 말씀하신 가운데 원아임욕명종시(願我臨欲命終時)에
진제일체제장애(盡除一切諸障碍)하고 면견피불아미타(面見彼佛阿彌陀)하여
즉득왕생안락찰(卽得往生安樂刹)이라고 하셨으니
그 뜻은 내가 임종할 때에 모든 장애를 제해 주시고 아미타불을 친견하여 극락세계에 왕생케 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선재동자는 환희 용약하여 기쁘고 만족하게 생각했다고 하니 심지법문을 주로 하는
대승경전도 결국은 정토회향을 발원 권장하셨다는 것은 깊이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또 선지에 통하신 법지선사께서도 말년에 정토왕생전을 저술하여 염불선을 권장하셨는데 그가 열반하실 때에
서방 허공으로 좇아 신기한 깃발들이 날아와서 산상을 돌아가며 대숲이 백색으로 변하여 정토왕생의 서기가 대중의
눈앞에 나타났다고 합니다.
또 이밖에도 속가에 있는 거사(居士)로써 경전과 참선에 통하면서도 염불정토(念佛淨土)에 노력하신 분도 많습니다.
진나라 때 유유민. 주속지와 같은 일백 이십 삼인의 대 현인들이 혜원법사의 지도를 받아서
여산 백련사에서 염불공부를 하셨으며, 고려말엽에 유학자 목은 이색 선생께서는 유생의 배척을 받으면서도
남신사에 백련회를 설립하고 동지를 모아 만년에 염불로써 회향하였다고 하며 조선 근대에 문장명필로서 유명하신
추사 김정희 선생께서도 간경. 참선. 염불로써 일생동안을 공부하셨다고 합니다.
이밖에도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선지에 통한 분으로서 염불정토를 권하신 분이 역사상에 상당히 많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점에 대하여 천박한 소견이지만 염불과 참선을 둘로 갈라서 볼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실지에 있어서는 피차 불가분리의 내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까닭에 이 점에 대하여 천견을 말하고자 합니다.
원래 불교에서 수행하는 제일목표가 어디 있습니까.
간단히 한 마디로 말하자면 심(心)과 경(境), 곧 마음과 경계(境界) 이 두 가지만 해결하면 그만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떻게 하면 내 마음의 근원(根源)을 밝혀서 맑은 거울과 같은 심성(心性)의 본체(本體)를 얻어 볼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첫째 문제요, 그 다음은 내 몸 밖에 있는 모든 경계(境界), 곧 내 몸이 처해 있는 이 세상(世上)을
어떻게 해야만 바르게 아름답게 청정하게 정화시킬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둘째 문제가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두 가지 문제만 바로 해결하게 된다고 하면 그가 곧 부처요 대성자라고 할 것입니다.
[현공 윤주일대법사 설법자료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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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 어떻게 하면 내 마음의 근원(根源)을 밝혀서 맑은 거울과 같은 심성(心性)의 본체(本體)를 얻어 볼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첫째 문제요..........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