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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 소중히 소장하고 있는 고문서와 고서적을 정리해서 오래 보관해 보자는 취지에서 물목를 만들어 보려고 시도중이다. 시간 나는대로 연구해서 내용을 파악해야 그 가치를 알 수 있을 것 같고.......
어렸을 때 사랑방에는 항상 주먹보다 더 큰 자물쇠로 잠겨두는 작은 고방이 있었고 거기에는 귀중품과 아버지가 늘 즐겨드시든 경옥고, 토종 꿀, 밀주가 항상 들어있었다. 뿐만 아니라 누렇게 색을 잘 낸 잎담배가 항상 준비되어 있는 곳이다. 늘 썰어서 피시는 엽초와 긴 담뱃대, 그리고 놋 재털이가 잘 어울리셨었지.
건너방(미닫이 칸막이로 나뉜 방)엔 나무로된 큰 장식상 안에 가득 들어있던 그 휘귀하고 값진 좋은 책들! 지금은 찾아 볼 수 없으니 안타깝지만 혹시 희소의 가치를 알고 있는 가족 중에 누구라도 갖고 있다면 다행이련만....
1. 參贊公竪碣告由文 외 6점
2. 祝文 38점
3. 輓詞 10점
4. 査家間의 書翰 22점
5. 壽韻 10점
6. 不動産賣買 等 多數
7. 印章 3점
들여다 볼수록 재미가 있어, 오늘 여기에 고문서류 몇 종과 내용을 올려본다.
'공유물 분할 계약서'
대정12년 3월 15일의 '대정'은 일본 연호이며 '서기 1923년' 이다.
그러니 휘 寧大 할아버지(丙申生, 작은 집으로 출후)가 28세때이다. 지내동 임야를 다섯분이 여섯 지분으로 분할 소유했는데 백전동, 화지동, 금동, 상동 어른들이시다. (당시는 예천면이었다)
참고로 明治元年 (めいじ)이 1868, 大正元年 (たいしょう)이 1912년, 昭和元年 (しょうわ)이 1926년, 平成元年 (へいせい)이 1989년이다.
'장례문서'
아버지가 승중손으로 되어있으니 증조부모님 상인데 증조할아버지는 1915년에 돌아가셨고 증조할머니는 1944년에 돌아가셨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1924년에 돌아가셨으니 돌아가신 순서가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머니 순이니다. 아버지가 승중손이 되자면 증조할머니 상이 틀림없다. 증조할머니(長興林氏,1858~1944, 87세)가 돌아가신 해는 1944년 내가 태어나던 전 해이다. 그러니 나와 작은 형수님 두분이 빠져있다. 다른 내용 해석은 좀도 알아봐야겠다.
'명당경'
무속(巫俗)의 경문(經文)이다. 본시 무(巫)라는 것은 하늘과 땅, 사람과 사람, 영혼의 세계를 이어주는 매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길흉화복을 점지하고, 그것을 치유해보기 위해 노력하고, 중생의 복을 빌고, 또 비는 형태가 무속의 경문이라고 할 수 있다. 경문은 불교의 경문, 성경의 경문 등이 있다.이 명당경은 '불설명당경'으로
「불설명당신주경 안토지신명당경 여시아문일시불 천황대제수명장 지황대제정복수 인황대제액소멸 제석천황관재멸 대법천황오액멸 .........」
언제, 왜 이 경문을 사용했는지......
참찬 노은(휘 명호, 9대조) 권공 묘갈명 초안이다.
譯解해본다.
參贊蘆隱權公墓碣銘(幷序) 참찬 노은 권공 묘비에 새긴 글
蘆隱權公之沒往在 노은 권공이 돌아가신지 오래 되었다.
景宗甲辰距今二百五拾六年之久 경종 갑진년(1724)은 지금부터 256년 전이다.
尙闕顯刻儀物 오래전부터 조상의 드러난 일을 새긴 의물이 빠져
賢裔寧旭,五奎,五鳳諸氏 훌륭한 후손 영욱, 오규, 오봉 등 여럿이
篤志報謀合僉議備治牲石 돈독한 뜻과 보본의 뜻이 모두 비석을 설치하기로 의견이 합쳐서
請余銘 나에게 명을 청하기에
其隧膚識昏○固辭不獲 그 일에 대하여 지식은 얕고 늙어 한결같이 물어봤으나 구할 수 없어
據其蹟而叙之 살아온 자취에 근거해서 쓰니
曰 公諱命祜字受天號以蘆隱 공의 휘는 명호 자는 수천 호는 노은이다.
氏曰權安東巨族高麗太師諱幸其鼻祖 이분은 안동권 거족으로 고려 태사 휘 행이 시조이다.
至中葉有永嘉君諱奕,僖敬公諱用一,文靖公諱希正皆大顯于世 조선 중엽에 이르러 영가군 휘 혁, 희경공 휘 용일, 문정공 휘 희정 모두 드러난 조상들이시다.
高諱汝勤宣務郞,曾諱伯龍,祖諱美胤俱有隱德禰諱迪號鳩谷文司諫邃學危行立朝謇諤 고조부 휘 여근은 선무랑이셨고, 증조부는 휘 백룡, 조부는 휘 미윤으로 모두 은덕을 갖추셨으며 아버지 휘 적 호는 구곡으로 학문이 길고 행동이 발랐으며 벼슬길에 나가서는 곧은 말을 하셨다.
妣淑夫人豊基秦氏必亨女,襄陽權氏克輿女 어머니는 풍기진씨 필형의 따님과 양양권씨 극여의 따님이다.
孝宗九年戊戌生公形貌豊偉性姿超秀動止語黙循蹈軌轍 효종 9년 무술생(1658)으로 공의 모습은 넉넉하고 크며 성품과 자태는 빼어나고 동작은 느리고 말이 적으며 걸음걸이는 법도가 있다.
甫八歲受學聞輒曉解不煩鞭督 겨우 8세에 가르침을 받으면 곧 환하게 이해하며 꾸중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大人公每撫其背以器之 아버지께서 공을 항상 등을 어루만지며 큰 그릇이 될것으로 생각하였다.
稍長進學孜孜不怠解經質疑氷釋毫分 점점 자라서는 학문에 부지런하고 게으르지 않으며 경서를 이해하고 의문을 질문하여 얼음이 녹듯이 터럭을 나누듯이 의혹을 풀었다.
屬文措辭淘瀉暢達志慮堅確筆翰如流 글을 짓고 시문을 지음에 물이 쏟아지듯이 통달하고 뜻과 생각이 굳고 확실하며 글이 물 흐르듯 하였다.
先生長者大加詡獎善事二親如曾氏之志軆 선생이 어른이 됨에 크게 아름답고 권장함을 더해 부모님을 잘 모시니 증자의 뜻을 본받은 것 같았다.
宜兄宜弟如溫公之嬰兒治 형제간의 화목함은 사마온공이 어린애 다스르는 것 같으며 擧子○累試泣璞以志行蒙贈左承旨參贊亦優典也 과거에 여러번 실패하고 뜻과 행동이 성실하고 소박하여 증직으로 좌승지 참찬을 받았으니 또한 훌륭한 벼슬이다.
得年六十七而考終藏于襄陽治小峴山負壬原 연세 67세에 돌아가시니 북으로 소현산을 등지고 양지바른 언덕에 터를 닦아 모셨다.
配淑夫人南陽洪氏鳳九女閨儀甚備生己亥卒丙午 아내 숙부인은 남양홍씨 봉구의 딸로 아내로서의 태도와 교양을 잘 갖추었으며 기해년에 나셔서 병오년에 돌아가셨다.
墓同域異封 묘는 같은 곳에 봉을 다르게 하였다.
擧三男○육次복季옥壽同樞 아들 셋을 두었으니 맏은 육이고 다음은 복이고 막내 옥은 수를 하셨고 동추벼슬을 하셨다.
육男國均陞同樞복男國倫,女張龍弼,張龍河옥男國臣國均出國亨,國民,國隣女鄭世範,申道圭 육의 아들 국균은 동추벼슬에 오르고 복의 아들 국윤과 딸은 장용필과 장용하에게 출가시켰고 옥의 아들 국신, 출후한 국균, 국형, 국민, 국인과 딸은 정세범과 신도규에게 출가시켰다.
曾玄以下繁不載 증손 이하는 많아서 기록하지 않는다.
於乎公挺簪纓之閥 旣賦得豪邁英俊之姿兼繩 어호라 빼어난 고관의 가문에서 이미 호매 영준의 자질과 법도를 받아서
其沈重誠一之功承襲庭訓,薰洽棣樂經史百家博演紬繹 침착하고 성실함은 가정교육으로 이어 받고 풍류에 익숙하고 즐길 줄 알며 경사백가에 널리 헤아려있고
御家之政居鄕之義足爲楷範於世眉目于人 가정을 다스리고 고향을 지키는 의리는 족히 세상의 모범이 되며 남들과 아주 가까이 지냈다.
而竟弢晦林泉誠爲識者之○恨 其剩馥遺蹟歷世未泯繼之以仁孫之密勿闡揚斯不亦簷水之理歟 마침내 도회임천성의 기록한 것에 뉘우친바 있고 그 남긴 유적이 세대가 지나도 없어지지 않고 계속하여 어진 자손들의 자상함은 선양하지 말자 이것이 또한 첨수의 이치가 아니겠는가.
銘曰 烈祖與父世掌絲綸天賦粹美 ○○其仁 훌륭한 조상들은 대대로 벼슬을 하였도다. 타고난 성품도 순수하며 아름답고 정성스럽고 정성스러워 그것이 인이로다.
學貴知行鳥翼車輪 安我素履克篤彝倫 귀함을 배우고 행함을 알아서 두 가지가 서로 돕도다. 나의 평소 행동은 편안하며 떳떳한 윤리를 실천하도다.
潛蹟孔徽昭揭蒼珉 숨겨진 공적이 크게 빛남을 밝혀 비석에 세기도다.
黃羊 葽夏 旣望 星州李進煥 謹撰 기미년(1979) 4월 16일 성주 이진환이 공손히 쓰다.
위 9대조(통정대부 승정원 증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의 기미년(1979년) 10월 묘사 축문(초헌관 8세손 오숙)
※ 1979년 4월 묘비를 새우고 첫 묘사다.
정사년(1977년)이면 69세,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10년전이다. '연원제'(안동 제비원) 도유사를 역임하셨다.
연원제는 14세손 휘 奕 (파시조 휘 至正의 현손, 나의 22대조) 가선대부 이조참판의 문중 문물을 관리하는 재실이다.
파시조 이후 4대의 분묘는 실전되고 분묘를 지키고 있는 제일 윗대 어른 이시다.
주위에 자 휘 용일과 증손 휘 치 두 분묘가 있다. 작년 11월 총회겸 향사로 일박 이일을 처음으로 참석해봤다.
기미년(1979년)에 '지동제' 일을 맡아보셨다. 지동제는 용문의 못골에 있으며 (아직 가보지 못했음) 17세손인 (휘 지) 현감공파 중시조를 모시는 재실이다. 7형제 중에 네째로 여기서 판도공파, 문경공파, 현감공파, 판사공파, 현령공파로 나뉘어지고 두 분은 무후하다.
을축년(1985년)엔 예천향교에서 춘기 석전제시 아헌관(亞獻官. 두 번째 잔을 올리는 제관)을 위임받으셨다.
돌아가시기 2년 전이었다.
석전(釋奠)이란 음력
'만사(輓詞)'
이는 1915년(을묘년) 증조부(휘 衡直) 상때 쓰던 만사로 글은 휘 형도(안골 혁첨이 형님의 증조부로 망인 보다 14세 위 시다.)가 보내온 것이다. 왼쪽은 '족종형 형도 통곡 만'
-매도증서 (뒷면)-
1946년 6월 10일, 매도인: 예천군 농회 재산관리인 예천군 농회장 권대일, 매수인: 개포면 상동 299 권오규, 부동산 표시: 개포면 상동303번지 밭 733평, 대금 1,000원(앞면에 기제)
※ 서기요금 1원 50전 사서법사('사법서사'의 오자인가?) 박우서
'매도증서'
-앞면-
매매목적물: 예천군 개포면 상동 239번지 답 1118평 가격 500원
같은 주소 398번지 답 972평 가격 400원
매매대금: 9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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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화 14년(1939년) 10월 25일 위는 '일본정부 수입인지 20전'이 붙어있고 오른쪽 아래 도장은 '등기제(登記濟)'와 '대구지방법원예천출장소인' 이다.
-뒷면-
예천군 개포면 상동 300번지
매도인 김철진
예천군 예천읍 석정동 122번지
매수인 김도성 앞
서기료 16전 사법서사 강두원 인
※ 이 증서와 같이 붙어있는 또 한장의 증서는 매도인 김도성, 매수인 권오규로 된 매도증서가 붙어있다.
서기 1946년 5월 10일 가격 5700원, 그러니 900원이 7년에 5700원으로 표기되어있다. 어떤 의미가 있을까?
1922년(임술) 11월 26일 부모님의 혼사시 외가(영양남씨)로 부터 받은 '허혼서'
당시의 아버지는 14세(기유생:1909년)이었고 어머니는 16세(정미생:1907년)로 얼마나 설레이셨을까?
'물목'
'홍갑사 상(裳:치마상) 8원 50전~~~~~~ 합계 80원35전이고, 계해 2월 15일'
부모님 혼사시 1923년 2월 15일 장을 본 물목이다. 1923년이면 아버지(1909~1987) 15세 이시고, 어머니(1907~1998) 17세 되는 해이다. 위와 같이 외가에서 허혼서를 작성한 해가 1922년(임술 11월 26일)이니 3개월 뒤에 장을 보셨구나.
'경성부~~ 김종화?'란 고무인에 '일본정부수입인지 3전'이 붙어있다 . 계해년이면 고종이 붕어하시고 三一獨立運動이 일어난지 4년후이다. 일본 연호로 대정12년).
조부모님의 혼사시 진외가로 부터 받은 택일 서한으로 본다. 경자(1900년) 9월 26일로 할머니(1883~1981)는 랑랑18세 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