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세계가 이루어짐을 말하다 2. 세계의 바다 열 가지로 나타나다
☞ 해설 모든 세계가 일어난다는 것은 세계가 생겨난다는 뜻입니다. 세계의 형상과 그 세계의 모양과 성질과 허공에 있는 시간과, 변하여지는 과정의 정도와, 그 세계의 차별되는 모든 것들, 청정함과 장엄되는 모든 것들이 부처님의 지혜와 신통력으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이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이 오셔도 똑같은 말씀이다' 라고 합니다. 이는 중생의 업의 인연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전에 내가 잘 아는 처사님 한 분이 계셨는데 그분은 늘 "나는 늙으면 산 속에 조그마한 집을 짓고 살겠노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어느날 그분은 과연 강원도 삼척의 산 속에 집을 장만하여 살고 있습니다. 이는 그분이 소원처럼 말하던 것이 현실로 바뀐 것입니다. 이것도 업의 한 세계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과거에는 아무 희망도 없고 할 수 없다는 탄식만 가지고 살았는데 모든 국민이 할 수 있다는 업으로 바뀌니까 이렇게 다 잘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중생의 장엄입니다.
⊙ 합론 이제 이 품에서 간략히 세 가지로 말하려 한다. 일(一)은 품의 이름을 해석함이요, 이(二)는 품의 온 뜻을 해석함이요, 삼(三)은 글을 따라 그 뜻을 해석함이라. 첫째는 의주형상(依住形相)이니 세계의 모든 형상과 고락(苦樂)과 정예(淨穢)가 다 이 중생의 업보이니 그것은 자업(自業)으로 장엄하였느니라. 불보살의 세계는 대원력에 의하여 자체(自體) 청정한 법성력(法性力)으로, 또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대자대비의 힘〔力〕에 의하여 부사의변화력(不思議變化力)으로 성취한 바니라. 이러한 까닭으로 세계 성취라 한다. 만일 초심 중생이 이러한 부처님의 말씀이 없다면 어떻게 여래가 중생을 섭수(攝受)함을 알까. 무엇을 의지하여 부처님의 원행(願行)으로 널리 제도함을 받을까. 이 세계는 중생계와 법계(法界)와 불계(佛界)와 보살계(菩薩戒)와 허공계(虛空界)가 둘이 없고 다함도 없어서 형상을 따르는 그림자와 같이 중중무진(無盡)으로 의주(依住)함을 설하지 않을진대 어떻게 초심보살이 보살행을 닦을 것이며 보살행을 닦더라도 불경계를 알지 못하는 까닭으로 중중무진무애(重重無盡無碍) 상(相)과 불(佛)과 보살(菩薩)들의 행원이 합하여 이익케 함이니라 하다.
‡보살의 길 불교도들에게 있어 불사 중의 불사는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그 첫째가 될 것이며, 그 외에 하나가 있다면 법석(法席)을 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오늘은 이 절의 창건주이신 강석진 거사님의 13주기 재일입니다. 거사님의 공덕으로 수많은 불자들이 이 자리에서 공부하고 선근을 심어 나가고 있습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이분과 같은 거룩한 마음을 갖기란 그리 쉽지는 않은 일일 것입니다. 수많은 재산가들이 있지만 절을 지어 중생에게 그 복 밭을 가꾸게 하는 분은 흔히 볼 수 없는 일입니다. 참으로 이분은 부처님과의 불연이 깊은 분인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 이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불교를 상징하는 꽃이 있는데 우리 불자들 외에 다른 사람들도 빨리 알아차리는 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연꽃인데, 연꽃은 아무리 흙탕물 속에서 자라도 그 잎새나 꽃에는 조금의 흙탕물도 묻지 않습니다. 이것은 불보살의 삶을 비유한 것입니다. 보살은 아무리 악도에 있어도, 아무리 두려운 곳에 있어도, 아무리 더러운 세계에 있어도 물들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보살과 같은 경지가 아니므로 작은 일에도 그만 물이 들어 그 삶을 헛되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난번 대통령에 당선된 김영삼 씨가 청와대에 들어가고 나서 연꽃이 수난 받은 사건이 있습니다. 경복궁 안 경회루 연못의 연꽃이 어느날 몽땅 파내어져 버린 일과 독립기념관 앞의 연못의 연꽃도 활짝 피었는데 또 다 뽑아 내버린 일입니다. 기독교를 믿는 이가 대통령이 되니까 경복궁의 연꽃과 독립기념관의 연못에 핀 연꽃은 불교의 상징이므로 격에 안 맞다고 생각한 어느 아부쟁이의 말을 듣고 그렇게 했겠지요. 그래서 법정스님이 동아일보에 기고를 했었습니다. 그러니 무어라고 변명하느냐 하면 '금년에 연잎이 나긴 다 났는데 잉어들이 다 뜯어 먹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럼 작년엔 왜 안 뜯어 먹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물으니 글쎄 '작년엔 식성이 없었는가 보죠' 하였답니다. 그런데 연잎은 줄기가 질기고 가시가 나 있어 물고기가 뜯어 먹을 수 없습니다. 중생들이 갖는 이 같은 편견은 이 사회를 병들게 합니다. 불교의 상징이든 기독교의 상징이든 그것이 무어 그리 중요합니까? 연못에 피어 있는 꽃들은 많은 이에게 기쁨을 주고 행복을 주는데, 이것을 모르니 참으로 그들이 가엾은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영혼의 타락입니다. 이 사바세계에 태어난 우리 모두는 모두가 같은 민족이요, 같은 인간입니다. 같은 인간끼리 서로 적대시 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부처님께서는 우리의 업력에 의해서 그러하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가 같은 한국인인 것도 같은 업력의 힘입니다. 모든 세계가 생긴 이유도 이러하며 모든 사람의 삶도 자신이 지은 업의 소산입니다. 해인사는 가야산에 있는 한국의 큰절인데 왜 절 이름이 해인사일까요? 저는 그것이 참으로 궁금한 적이 있었습니다. 글자를 풀어보면 바다에 도장을 찍었다는 말인데 도무지 처음 출가한 그 때의 저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아 여러 스님들께 여쭈어 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화엄경을 공부하다가 그 절 이름에 화엄경 사상이 담겨져 있음을 알았습니다. 해인은 곧 해인삼매요, 해인삼매는 부처님께서 화장세계해(華藏世界海)의 삼매에 들어 중생을 바라보시며 적광(寂光)을 놓습니다. 이것이 해인사라는 이름의 비밀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을 이해 시키기 위해서 바다 또는 허공, 우주 등에 많은 비유를 해 놓으셨습니다 물이 바다에 도착하기까지는 내, 강 등 여러 이름이 있다가 바다에 이르면 그 이름은 온 데 간 데 없고 오직 바다라는 이름만 갖게 되듯이 미혹하고 번뇌에 가득찬 중생도 깨달음에 도달하면, 오직 한 맛의 깨달음입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의 바다가 있습니다. 화엄경은 이와 같이 많은 바다의 세계를 대표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바다에 도장을 찍었다는 해인! 이 해인 속에는 안 들어 있는 게 없이 다 들어 있습니다. 바다 속도 마찬가지로 무엇이든 들어 있는 무궁 무진합니다.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 마음 쓰는 그 자리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다 찍혀지는 해인의 바다! 내가 악업을 짓든 선업을 짓든 그것은 여지없이 그냥 찍어 놓는단 말입니다. 오늘 내가 이 해인의 정신에 각성을 가져 한 생각이 돌이켜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내 생각을 바꾸면 내 미래가 바뀌어집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우리 부처님의 마음으로 돌아가지 못하느냐 하면, 그것은 단 한 가지 이유밖에 없을 것입니다. 미혹해서 번뇌에 싸여 사는 이 세상을 떠날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부처님의 위대한 가르침은 미망을 떨쳐버리고 "네 갈 길을 바로 찾아 가라. 그러하면 안락이 있을 것이다."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 참 삶의 멀리 있지 않고 오직 이 한 생각, 한마음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공부하고 발원해서 중중무진의 한량없는 부처님의 세계에 다같이 나아가 성불의 인연을 만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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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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