黃氏
본관은 평해(平海)·장수(長水)·창원(昌原)·상주(尙州)·우주(紆州)·덕산(德山)·회덕(懷德)·황주(黃州)·관성(管城)·부안(扶安)·강화(江華)·삼기(三岐) 외에도 문헌상에는 163본이 전하는데, 황씨중앙종친회측에서는 대략 20여 본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모두 평해·장수·창원의 3본에서 분파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 황씨의 원시조는 중국 후한(後漢)의 유신(儒臣)이었다는 황락(黃洛)으로 전해온다. 그는 광무제(光武帝) 건무 4년(유리왕 5:AD 28)에 장군 구대림(丘大林:平海丘氏의 시조)과 함께 교지국(交趾國)에 사신으로 가던 길에 동해에서 풍랑을 만나 평해에 표착, 그곳에 자리잡고 살며 황장군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황씨의 시원(始源)이다.
현재에도 평해(경북 울진군 평해읍) 월송(越松) 지역에는 황장군의 묘가 전해지며, 구(丘)장군이 살았다는 곳을 구미진(丘尾津)이라 부른다. 일설에는 후세에 갑고(甲古)·을고(乙古)·병고(丙古)의 3형제가 있어 각각 기성군(箕城君:箕城은 平海의 옛이름)·장수군(長水君)·창원백(昌原伯)에 봉해져 훗날 평해·장수·창원 등 3관향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오늘날 전하는 20여 본이라는 것도 이 3본에서 갈린 분파라는 것이 통설이다. 예를 들면, 상주·덕산 등은 평해에서, 간주·남원·해주 등은 장수에서, 회덕·황주 등은 창원에서 각각 분적(分籍)된 것으로 전해진다. 인구가 가장 많은 창원황씨는 각각 계보를 달리하는 3파가 있는데, 토황(土黃)으로 불리는 시중공(侍中公)파와 당황(唐黃)으로 불리는 공희공(恭僖公)파, 그리고 호장공(戶長公)파 등이다. 이들 3파 사이의 상호관계에 대해서는 뚜렷하게 밝혀진 것이 없으며, 족보도 각기 따로따로 편찬한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당황’이라 불려온 공희공파의 파조(派祖) 황석기(黃石奇:고려 공민왕 때의 중서문화평장사)가 원래 고려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종래에는 그가 원나라 사람으로 고려 공민왕 때 노국공주(魯國公主)를 수행하여 고려에 온 것으로 전해졌으나, 이미 이전에 그는 고려에서 여러 벼슬을 지내고 ‘조적(趙Z)의 난’(1339)을 평정하는 등 활약한 사실이 《고려사》에 뚜렷이 기록되어 있다. 1348년 고려 제29대 충목왕이 죽자 황석기는 이제현(李齊賢)과 함께 원나라에 가 30대 충정왕의 승습(承襲)을 청하게 되었는데, 그 이듬해에 앞서 원나라에 와 있던 공민왕(江陵大君)이 원 위왕(衛王)의 딸 노국공주와 결혼하여 귀국하게 되자 황석기는 그때 배행(陪行)하여 왔던 것이다. 황씨는 고려 말기에서 조선 전기에 걸쳐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는데, 조선에서는 상신(相臣) 3명, 대제학 2명을 비롯하여 총 171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1960년도 국세조사에서는 6만 1435가구에 인구 35만 907명으로 성별순위는 258성중 제16위였고, 85년도 조사에서는 가구수 13만 4347가구, 전국 가구 구성비 1.4 %로 274성 중 제16위였다
【장수황씨】 조선시대의 4대 명상(名相)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황희(黃喜)가 배출되었다. 그는 정승(政丞)의 지위에 24년간, 그 중 영의정에 18년간 있으면서 농사의 개량과 예법의 개정, 서얼의 천역(賤役) 면제 등 치적(治績)을 쌓았으며, 소신이 굳으면서도 원만하고 청렴하여 청백리에 뽑히는 등 숱한 일화를 남겼다. 그의 아들 세 명도 모두 현달하였는데, 치신(致身)은 중추부판사 등을 역임하고 우의정에 올랐고, 수신(守身)은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1. 장수 황씨 본관
▶ 장수현의 연혁과 본관
장수는 본래 백제 양평현(兩坪縣)이니 신라 때 고택(高澤)으로 고쳐 장계군에 소속되고 고려때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 남원부에 속하였다. 이태조 원년에 다시 장수현으로 갈라져 장계(長溪)를 겸임(兼任)하다가 뒤에 현감을 두었다. 영취산은 현의 동쪽 십리에 위치하니 즉 진산(鎭山)이다. 또 덕유산은 고을 북쪽에 있었고, 여지승람 장수현 성씨조에는 본현 황씨라 하였다.
삼가 상고하건대 장수를 혹은 장계라고도 칭하나 장계는 즉 속현이고 고을 북쪽 삼십리에 있다. 황씨는 장수 본현으로서 관향(貫鄕: 시조의 고향)을 삼고 백씨 유씨 제성(諸姓)은 장계로 관향을 삼으니 한 고을 중에 성관이 스스로 구별되었다.
▶ 시조(始朝) 황경(黃瓊)
신라에 벼슬하여 직위가 시중(侍中)에 이르시었다. 배위(配位)는 경주 김씨니 경순왕 부(傅)의 장녀이시다.
상고하건대 김씨 시조는 알지니 계림으로부터 나와 7세손 미추(味鄒)왕에 이르러 비로소 신라왕이 되었고 경순왕 9년인 을미년 단기 3268년에 이르러 고려에 양여하였으니 대개 시중공(侍中公)께서는 바로 신라말 고려 초에 계셨던 분이었을 것이다.
* 추기(追記)
공이 신라에 벼슬하여 지위가 시중에 오르니 시중은 신라 집사성시중(執事省侍中)을 말함으로 국가기밀과 모든 정사와 백관을 총괄하는 총령이요 행정기관의 장관이다. 배(配)는 경주 김씨이니 경순왕 휘 부(傅)의 장녀이니 정궁(正宮)이신 죽방부인 박씨소생이다. 고찰해보건대 김씨 시조는 알지니 계림에서 나온 후에 7세손 미추에 이르러 비로소 신라왕이 되고 경순왕 9년 을미년에 이르러 고려에 양여했으니 대개 시중공은 곧 신라말 고려 초의 어른으로 익성공(翼成公)이 21세손이요 또 경순왕이 세 따님을 두니 장녀는 바로 시중공 휘 경(瓊)의 부인이니 죽방부인 박씨 소생이요 차녀는 고려 경종에 출가하니 헌숙왕후로 낙랑공주인 왕씨 소생이요 삼녀(三女)는 경주 이금서(李金書)에 출가하니 별빈 순흥 안씨의 소생이다.
▶ 후손(後孫) 공유(公有)
공은 시조 신라 시중 휘 경의 9세 손으로 고려 명종(明宗)을 섬기어 벼슬이 전중감(展中監)에 이르시었다. 그때 權奸 李義方의 專橫을 피해 벼슬을 버리고 장수의 고향으로 돌아오셨는데 또 현관들의 물색(物色)을 피하여 가솔 들을 거느리고 남원 땅으로 옮겨 사시니 자손이 이어 세거하게 되어 지금의 광한루가 곧 그 구기(舊基: 옛 집터)이다. 상고하건대 고려 태조 원년 무인(戊寅) 단기 3504년에 이르기까지 254년이 된다. 고려 의종 14년 해 경진 단기 3493년 무신(武臣) 정중부와 이의방 등이 난을 일으켜 문신들의 죽이고 왕을 거제에 방류(放流)한 뒤 이어 시해하고 고려 명종을 영립하고 국정을 전천(專擅)하다가 뒤에 복주(伏誅)당하는 등의 역사를 상고해 보면 가히 공의 세차(世次)를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 후손(後孫) 감평(鑑平)
공은 시조 신라 시중 휘 경의 15세 손이니 백가보(百家譜)에 이르길 공은 공유의 6세손이라고 하였다. 공은 태학생(太學生)으로 호는 일재(逸齋)이시니 일찍이 태학에 유학하여 화문(華聞: 좋은 명성)이 크게 전파되더니 일조에 명장(名場)을 사절하고 동강(東岡)에 돌아오시어 수절하고 분전(墳典: 서적, 三墳五典)을 탐구하며 후학을 훈육하시니 세상 사람들이 다 고절을 높이 숭상하였으며 이 사실은 동국명현록(東國名賢錄)에 실려있다.
▶ 후손(後孫) 석부(石富)
일재 증손으로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이시니 시조로부터 공에 이르기까지 18세가되며 중세에 족보가 분실되어 증거할 수 없다. 배위는 해주 최씨이시니 고려조의 대제학이요 평장사(平章事)인 경문공(景文公) 최홍윤(崔洪胤)의 여(女)이시고 평장사 최관(崔瓘)의 손(孫)요 문헌공 최충의 후손이요 개부의동삼사상주국 창원(昌原) 최선(崔詵)의 외손이시니 이 어른이 중시조로 일세(一世)이시고 일남(一男)을 낳으시니 휘는 균비(均庇)이시다.
▶ 이세(二世) 균비(均庇)
시조 신라시중 휘 경의 19세손이시고 휘 감평의 현손이시니 글을 읽으셨으나 뜻을 이루시지 못하시고 졸하시니 증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이시고 배(配)는 증정경부인 진주 강씨시다. 일남을 낳으시니 휘가 군서(君瑞)이시다.
▶ 삼세(三世) 군서(君瑞)
공은 신라 시중 휘 경의 20세손이시고 휘 감평의 5세손이시니 증대광보국 숭록대부 영의정 겸 영 경연 판이조사 행자헌대부 판강릉부사이시니 전고(典故)에 익숙해서 사리에 밝게 통달하여 일대의 명신이 되시었다. 배는 증정경부인 용궁 김씨이시니 부(父)는 감문위 호군 휘 우(祐)이시다. 이남(二男)을 낳으시니 장남의 휘는 중수(中粹)시고 차남의 휘는 희(喜)이시다.
2. 장수 황씨 파계도(長水 黃氏 派系圖) ▶파보도를 보기
始祖
시조 황경(始祖 黃瓊)
十八世
(中始祖 一世 )
후손 석부(後孫 石富)
二世
균비(均庇)
三世
군서(君書)
四世
익성공 희(翼成公 喜)
五世
치신(致身) (胡安公派)
보신(保身) (少尹公派)
수신(守身) (烈成公派)
직신(直身) (司直公派)
회의 후손으로 열(悅)의 아들인 정욱(廷彧)은 이조판서·예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광국공신 1등에 책록되었으며, 시와 서예에도 뛰어났는데, 저서로 《지천집(芝川集)》이 있다. 기(璣)의 아들 경원(景源)은 대제학을 비롯해 이조·예조·공조판서를 역임하였다. 또, 문장과 서예가 뛰어났던 맹헌(孟獻)·여헌(汝獻)·효헌(孝獻) 3형제가 유명하고, 성조 때 일본에 다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내침(來侵)을 예고한 윤길(允吉), 숙종 때의 학자로 의학뿐 아니라 지리에 정통하여 《여지도(輿地圖)》를 만들고 《지도연의(地圖衍義)》를 저술한 엽(曄), 순조 때의 명신 승원(昇源), 한말의 야사(野史)를 엮은 《매천야록(梅泉野錄)》의 현(玹) 등은 모두 희의 후손이다.
【창원황씨】 시중공파·호장공파·공희공파 등 3파에서 고루 인물을 배출하였다. 시중공파에서는 자(梓)·인검(仁儉)·인점(仁點) 3부자가 유명하다. 자는 부제학·대사헌을 역임하고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 기행문 《갑인연행록》과 《경오연행록》을 편술하였다. 큰아들 인검은 형조판서를 지냈고, 둘째아들 인점은 영조의 딸 화유옹주와 결혼, 정조 때에는 동지 겸 사은사가 되어 일곱 차례 청나라에 다녀왔다.
호장공파에서는 사우(士祐)·응규(應奎)·섬(暹)의 3대가 두드러진다. 사우는 호조·예조·이조판서를 거쳐 우찬성을 역임하였으며, 아들 응규는 이퇴계의 문하생으로 임진왜란 때 절충장군에 오르고 돈녕부지사를 지냈다. 손자 섬은 소북파의 영수로 영의정을 지낸 유영경(柳永慶)의 처남으로 부제학·대사헌이 되었으나, 계축옥사(1613) 이후 낙향하여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공희공파에서는 파조(派祖)인 석기의 아들 상(裳)이 문하찬성사·서강도원수 등을 지냈고, 상의 현손 형(衡)은 공조판서를, 그의 아들 기(琦)는 직제학·대사간을 거쳐 도승지·경기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형의 증손 신(愼)은 이율곡(李栗谷)의 문하생으로 정여립의 옥사(1589) 때 정언(正言)으로서 대신들이 서로 직언(直言)을 회피한 사실을 논박하다가 좌천되기도 하였으나, 후에 공조·호조판서를 지냈다. 이 밖에 창원황씨의 인물로는 영조 때 노론의 중진으로 이조판서를 지낸 구하(龜河), 신유박해 때 순교한 백서(帛書)사건의 주인공 사영(嗣永), 순조 때의 명문장·명필 기천(基天), 고종 때의 학자 재영(在英)과 명의(名醫) 필수(必秀) 등이 있다.
【평해황씨】 대표적 인물로는 요동정벌 때 이성계(李成桂)를 따라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조선개국공신 2등에 오른 희석(希碩)을 비롯해 현(鉉)·여일(汝一)·윤석(允錫) 등을 들 수 있다. 현은 세종 때 대사성을 지낸 조선 전기의 대표적 유학자이며, 여일은 임진왜란 때 권율의 휘하에서 공을 세우고 뒤에 진주사(陳奏使)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를 다녀와 기록한 《조천록(朝天錄)》 등의 저서가 있다.
윤석은 영조 때의 실학자·언어학자로서 그의 문집인 《이재유고(齋遺稿)》와 그가 저술한 《화음방언자의해(華音方言字義解)》는 오늘날 국어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한편, 우주황씨의 인물로는 명종 때의 정승헌(憲)이 있다. 그는 명종 3년 우의정에, 이듬해 좌의정에 올랐으나, 소윤(小尹)의 윤원형(尹元衡)의 탄핵을 받고 삭직되었다. 또, 제안(齊安:黃州) 황씨의 대표적 인물로는 영조 때 황고집으로 불린 순승(順承)이 있다. 권상하(權尙夏)의 문하생이던 그는 효자로 이름이 났을 뿐 아니라, 기행기벽으로 일화를 남겼다. 중종 때 개성의 한 진사의 서녀(庶女)로 태어난 송도의 명기 진이(眞尹)가 유명하다.
첫댓글 황경할아버지의배위이신경주김씨할머니는경순왕과정궁인죽방부인소생의장녀가아니라경순왕과낙랑공주왕씨의5남3녀중막내(3녀)라고알고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