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느니라,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가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창39:23, 시105:17-19절)
요셉이 형들의 인신매매에 의해 애굽의 바로의 친위대장 보디갈의 집에 팔리고, 그 집 안주인의 성추행을 피하다가 그만 왕의 죄수들이 갇히는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노예 신분으로 보디발의 가정 총무가 되고 드디어는 왕에게 죄를 지은 자들만 들어가는 감옥에 들어가 간수장에게 잘 보여 그 밑에 사무장이 됩니다. 죄수 치고는 대단한 영전(?)입니다. 이 과정을 성경은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셨다(창39:5)고 하고,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셨다(창39:21)고 하십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를 형통하게 하셨다고 진술합니다. 근데 아무리 그가 형통해도 겨우 애굽에 종으로 팔려간 신세요 죄수의 신분입니다.
아마 그 때에 가나안의 땅에는 요셉의 실종사건이 특보였을 겁니다. 야곱의 집은 초상집과 다름이 없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오직 성경만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셔서 형통하게 하셨답니다. 현실은 암담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보질 않습니다. 그건 하나님이 요셉에게 목적을 가지시고 애굽으로 팔려가게 하셨고, 그가 바로 왕의 꿈을 해몽할 수 있는 인적인 네트워크가 연결되도록 사슬처럼 보디발의 집에서 다시 왕의 죄수들만 갇히는 감옥으로 접근하도록 하셨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시고 은총을 베푸시니 그 모습과 행동이 한 마디로 표현하면 반짝거리게 됩니다. 그러나 아직 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요셉을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답니다. 역설입니다.
그게 바로 요셉이 차꼬에 차이고 쇠사슬에 묶여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고 술 맡은 관원장을 만나 바로의 꿈을 해석한 다음 시간이 흘러 드디어 바로를 만나 애굽의 총리가 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작정에 의한 섭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잘 난 것도 선택한 것도 아닙니다. 한 민족을 이루어 가나안으로 이끌고 오시려는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에 의해 요셉은 지금 사용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비록 부족장의 왕자의 신분에서 애굽의 궁중 감옥에 갇힌 신세지만 하나님의 관점인 성경은 형통이라고 표현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형통의 개념을 어디에 두고 계시는지? 저는 주변의 사람들과 이 관점을 두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목회를 크게 하고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아 좀 살만 하게 할 수 없느냐 하는 겁니다.
왜 그렇게 찌그러진 말을 타고 서부로 가는 조연급의 배우처럼 사느냐는 불만입니다. 현실의 차꼬에 채였고 많은 제약의 사슬에 묶였습니다. 몸은 때론 엄청 답답할 때가 많았고 많습니다. 그러나 이게 바로 형통이란 증거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거리가 더욱 가까워지고, 그리스도의 말씀 곧 아들의 말씀이 내게 계속 스며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산 소망 가운데서 저 멀리서 다가오는 하나님의 비전을 즐거워합니다(창1장) 나의 상속이니까요. 요셉이 꾼 꿈 보다 더 찬란하지요. 어떻습니까? 현실이 힘드십니까? 갇힌 게 답답하세요? 어차피 이 세상은 우리의 감옥입니다. 모든 현실은 차꼬와 쇠사슬입니다. 그러나 말씀이 응해 가고만 있다면 그걸 형통을 알고 그 때를 기다리세요. 요셉에 임한 하나님의 훈련 기간이 최소 13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첫댓글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아멘.
형통이라는 말씀은 어느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풀어나갈 수 있는 능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