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불법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궁금한 것이 있어서 불자님들의 의견을 들어보려고 글을 올립니다.
불교를 말하려면 윤회를 빼 놓을 수 없습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윤회를 믿든 안 믿든 또 어느 종교를 믿든 상관없습니다.
어느날 문득 윤회에 대해서 생각해 보다가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49일만에 다시 태어난다 해서 49재를 중요시 합니다.
49일 되는 날 소위 재판이라는 것을 받아서 다른 사람이나 동물이나 ...등등 몸 속에 들어가는 날 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재판의 기준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지만 이 세상에서 살던 삶을 기준으로 재판을 하리라 생각 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가정형편이 어려워도 돈을 모아서 49재 비용을 마련해서 49재를 잘 치러드리는 것으로 인해서 못다한 마지막 효도를 합니다.
그런데 늘 말 이전 자리를 가르치고 그 자리가 해탈의 경지라 해서 모든 수행자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선 수행을 계속하고 있는 현실을 보면 49재 라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말에 속지 말라고 가르치면서...
그러면 49재 또한 말이 아닌가요?
오늘 죽은 사람이 죽은 순간이 49재 일수도 있고 내일 이나 모레나 아무때나 49재 일수도 있는 것 아닌가요?
굳이 49일을 꼽아서 49재라 하는 것이 고정 관념 아닌가요?
이렇게 말하면 고귀하신 스님들 방편이라 말씀 하실텐 데 말입니다.
스님들이 하시는 말씀은 방편이고 불자들이 궁금 해서 여쭤 보면 분별심이라 하시는 뜻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군요.
또한 49재날 재판을 받아서 누군가의 몸을 받아 모두들 태어났을 텐데 계속해서 죽은 날 제사 지내고 천도재 지내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지 알 수가 없군요.
주인 없는 집 앞에서 문 열라고 문 두드리는 격 아닐까요?
그러면 스님들께서는 천도 안된 영가(죽은자)를 위해서 천도재를 지낸다고 말씀하실 수 있는데 천도 됐는지 안됐는지는 누가 구별 하시는 건가요?
깨달음의 자리(말 이전 자리)에 가면 모두가 허공을 치는 소리라는 것을 압니다.
그 자리는 감히 말을 할 수 없는 허공과 같은 자유로운 자리라는 것은 알지만...
조상에게 잘하려고 하는 마음이 진정 조상을 위한 것인지 조상을 잘 섬기면 내가 복을 받는 다는 나의 이기심 때문인지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 입니다.
진정 조상을 잘 받들고자 한다면 49재, 천도재를 없는 살림에 돈을 들여서 하고자 하지 말고 49재날 천도되어서 누군가의 몸을 받아 나온 우리의 이웃(여기서 말하는 이웃은 사람뿐 아니고 이 자연계전체를 말한다)을 아끼고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지 않으셨던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그 모든 이웃이 진정한 우리의 조상임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 윤회설을 이어나가려면 49재나 천도재중 한가지는 하지 말아야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야만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과 어깨가 조금은 가벼워 질듯합니다.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는 이 평범한 도리가 석가모니가 말씀하신 자비요, 예수가 말씀하신 사랑임을 우리는 깊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평범이 진리임을 그대들은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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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윤회설과 49재
제 목 이렇게 아십시오.
작성자 유마 [불교] [ ip: 211.62.77.51 ]
(날짜 : 2001-12-15 오후 12:46:06)
홈페이지 : http://yuma.cafe24.com
안녕하십니까.
님의 이 글을 진즉 보았지만,별로 흥미가 없어서,그리고 다른 분이 대답 해 주시리라 알고 넘어 갔습니다.
그런 데 아직 아무도 말씀 하지 않으시는 것을 보니 아마 저 처럼 흥미롭지 못한 듯합니다.
본래 기독교인 집에서 태어나서 4대째 기독교를 믿어 오는 저희 집안 내력을 다 말씀 드리지 못해 그렇습니다만,우리 집에 목사님이 세 분이시고,장노님은 물론,최하가 안수 집사입니다.다 모이면 약 40명은 족히 넘는 대 가족입니다.모여서 예수 이야기 아니면 별로 대화도 없을 정도이지요.
저 혼자 어쩌다 부처님 법을 만나(저는 집안에서 어려서부터 목사가 되리라고 말하기도 하고 기대 받았던 장남입니다. ^^)
집안 일의 대소사는 당연히 기독교의 절차와 의범을 따르며,아버님이 돌아 가셨을 때에는 교회장으로 치뤘을 정도입니다.교회 장노님이 돌아 가셨다고 다 교회장으로 치루는 일은 아닌 것을 비추어 볼 때에 그 입지를 충분히 추측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1.49제는 사람이 죽은 후 49일 째 되는 날을 기려 불교인 사이에서는 대단히 크게 의식되고 있는 일종의 천도재입니다.천도재라 함은 하늘 나라(즉,천국이나 극락으로 가시도록 제를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대부분 천국 보다는 극락으로 가시도록 바라는 것같습니다.천국과 극락은 일반적으로 같이 쓰이는 것 같으나 판연히 다릅니다) 로 인도하는 일종의 길을 닦는 작업입니다.이 49제는 확실히 불교 특유의 세계관에 의하여 생겨 난 것입니다.
2.불교에서는 흔히 생로병사라고 하는 것을 많이 들으셨지요? 하지요? 이 4가지 생존형태를 카데고리로 삼아 돌고 도는 것을 또 윤회한다고 도합니다.
이 중에서 生老까지는 기독교인들도 무난히 이해 하시는 현상이리라 생각합니다.즉,사람은 태어나서 늙는다 고 하는 이 카데고리는 기독교인들도 우길 수 없는 듯합니다.
또 老病 도 무난히 이해하시죠?즉,늙으면 병 든다 는 것까지도 다 이해 한다고 봅니다.
또 病死도 다 이해 한다고 봅니다.,즉,병들면 죽는다 하는 것까지도 더 이상 말해 무엇하나 할 정도로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그 다음을 기독교인들은 이해 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死生을 말입니다.
즉.죽은 다음에 태어남을 이해 하지 못하는 부분이 기독교인들을 괴롭히거나 다투게 만들거나 분노하게 하거나 심지어는 코 방귀뀌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뭐 저도 한 때는 그랬으니까요.만일에 이 死生만 알면 또는 이해 한다면 기독교인들 대부분은 대번에 그 하늘을 찌를 듯 하던 "믿음"을 어떻게 처리 하여야 할지 혼란에 빠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이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생로병사라는 긴 줄을 하나 가지고 노는데,이 긴 줄은 그 사이사이에 아무런 매듭도 없고 그냥 고무줄과 같은 하나의 줄 인데,줄의 처음은 生이요 그 다음은 老이요 그 다음은 病,맨 끝은 死라고 하지만,그냥 하나의 줄이지요.그런데 1차원의 세계라면 이 고무줄 위로 만일 개미가 기어간다면,그 개미는 死의 끝에 가서는 더 이상 갈 곳이 없다고 해야 합니다.그 개미는 뚝 떨어져 온갖 事象(사건)의 지평선 뒤로 숨어 버릴 것입니다.
이 사상의 지평선 뒤로 숨는다 함은 천국이나 지옥과 같은 사건의 지평선에서 조차도 사라진다는 말입니다.지구 위에 현존하는 어떤 종교나 철학의 교리나 개념으로써도 결코 설명될 수가 없습니다.즉,의미가 아주 없다는 말이지요.
그러므로 이런 것은 종교도 철학도 관여할 일이 못되므로 당연히 우리도 관여할 일이 아닙니다.불교도 말입니다.불교도 관여 할 일이 아니니 부처님도 관여할 일이 아닙니다.따라서 부처님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3차원에 사는 사람이 와서 이 고무줄의 끝과 끝(혹은 처음과 처음)을 가만히 잇게 되면 死는 곧 生으로 가는 절차임을 금방 계산 하게 됩니다.
이 때부터 생로병사는 의미를 가진 채 사람들은 종교도 하고 철학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이렇게 둥그렇게 되어진 것을 가지고 사건 마다에 이름 부친 것이 바로 생로병사입니다.
즉.태어남이라는 사건이 있으면 그것을 생이라 하고 늙음이라는 사건이 있으면 그것을 노라 하고 병듦이라는 사건이 있으면 그것을 병이라하고 죽음이라는 사건이 있으면 그것을 사라하고 다시 태어남이라는 사건이 있으면 그것을 생이라합니다.
어떻습니까? 이 둥근 카데고리 중에서 어느 지점이 처음이고 어느 지점이 끝인지를 지적할 수 있겠습니까? 과연 어느 것이 원조이겠습니까? 생이 원조,즉 처음 이라고 하고 싶으신가요?
노나 병은 어떻습니까? 아무래도 상관이 없습니다.둥근 것에는 동남나북 상하가 다 그냥 이름 뿐이니 아무것을 삼아서 상이라 해도 되고 하라 해도 되지 않겠습니까?.그래서 윤회라 하게 된 것입니다.
3.그러면 불교에서는 왜 이렇게 보느냐?
단순히 머리를 굴려서 철학하여 그렇게 보는 것이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신이 직접 나타나거나 꿈에서 신(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써서 그런 것이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신의 대변자(선지자)나 아드님이 나타나서 가르쳐줘서 그런 것이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착한 일 많이 해서 그 상으로 누가 알려줘서 그런 것이냐?아닙니다.
그렇다면 벌레가 나뭇잎을 갉아 먹다가 글자를 만들어서 알려 줬느냐?아닙니다.
그렇다면 누가 한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부활) 샅샅히 알려줘서 그런 것이냐?아닙니다.
이것은 바로,태어난 사람이 늙는 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압니다.
이것은 바로,늙으면 병든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압니다.
이것은 바로,병들면 죽는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압니다.
죽으면 태어난 다는 것을 아는 것은 이렇게 바로 알아 버리는 것이지 누가 계시하여 주거나, 대변하여 알려주거나,부활하여 알려주거나,철학하여 알거나,착한 일 하여 그 대가로 아는 것이 아니랍니다.
고무줄을 이은 것 그 하나만을 보고도 어린아이조차도 그것이 일직선과는 다른다는 것을 압니다.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만일 일직선이라한다면,그야말로 끝임없이 가거나 중간에 뚝 떨어지거나 둘 중에 하나 일텐데,그렇다면 사람은 태어나거나 늙거나 병들거나 죽지 않은 상태에서 태어나거나 늙거나 병들거나 죽어야 하고,우주는 끝이 없는 상태에서 끝이 있어야 하고,
아니면 사건의 지평선뒤에서 사건을 만나야 합니다.이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현실과 맞지 않는 일입니다.
4.윤회라는 말은 이 정도로 해두고요,그러면,
사람이 죽으면 49일 째를 기려 49재라는 것을 불교에서는 하는 데 왜 하는지를 이제 짐작 하시겠죠? 아직도 좀 그렇다구요? ^^
사람이 태어나면 온 집안 이며 주위 사람들까지 다 모여 축하를 해 줍니다.케익을 짜르기도 하면서 그 앞날에 좋은 일만 있고 나쁜 일은 생기지 말기를 축복해 주지 않습니까?
어떻습니까? 사람들의 이런 관습이 미신 같아 보입니까?
또 사람이 늙어 육십 또는 칠십이 되면 친척들이나 아는 이들이 와서 아직은 병든 것도 아니니 오래 오래 사시라고 다 위로하며 축하하는 환갑잔치도 해 드리고 칠순 잔치도 해드립니다.
어떻습니까 이런 사람들의 관습이 잘 못된 관행 같아 보입니까?
또 사람이 병이 들면 친척들이나 아는 사람들이 와서 기도도 해주고 찬송도 불러주고 하면서 속히 건강해 지라고 기원해 줍니다.
어떻습니까? 이런 사람들의 기도와 기원이 이루어 지지 않을 일을 가지고 사람들이 하는 것 같습니까?
불교인들이 부모나 친척 등이 돌아가시면 안으로는 자기의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하고 밖으로는 戒와 定과 慧를 고루 갖춘 청정한 스님네들을 모시고 일주일씩 일곱번을(7x7=49) 재를 지내주면서 좋은 곳에 태어나기를 기리며 기도하고 축복해 주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위의 3가지 일을 가지고 각각 그에 맞게 축복해 주며 좋은 일이 생기기만을 바라는 것과 똑 같습니다.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인심이므로 굳이 종교 철학까지 들먹이지 않아도 나무랄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걸 왜 하냐구요? ^^ 그럼 사람이 태어 났을 때에는 그런걸 왜 하겠습니까?
5.왜 49재냐 하면 말이죠.49일 동안 일주일 단위로 일곱번을 제를 올리며 죽은 이의 앞날을 좋은 곳으로 인도하는 것이므로 49재라 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목숨이 바로 끊어 지는 그 순간이 가장 중요합니다.이 때에 극악과 극선은 극명하게 되는데,극악한 사람은 목숨이 딱 끊어지는 그 순간에 자기가 행한 악행들에만 마음이 쏠려 몹시 두려워합니다.
이 사람은 그 두려움 때문에 급하게 피난처를 찾게 되는 데 자기는 피할 만한 곳이라고 가는 곳이 지옥입니다.마치 목이 매우 마른 사람은 아지랑이만 보고도 물인 줄 알고 뛰어들다가 사막 한 가운데서 목숨을 마치는 것처럼.
이렇게 급한 마음 상태-(이 때의 마음을 불교에서는 아뢰야식이라 합니다.풀이 하자면,없어지거나 함몰하지 않는 저장된 마음인데 일반 사람들은 흔히 영혼이라고도 하는 것 같습니다.사람이 죽으면 의식들은 다 소멸합니다.마치 컴퓨터가 다운 되면 메모리에 있는 것은 다 휘발하여 날아 가 버리는 것 처럼.그 의식에는 소위 무의식이라는 의식까지 포함 됩니다.이에 대하여는 너무 방대한 논이 기다리고 있어 생략합니다.말씀 드린다 하여도 이해 하실지는 의문입니다.)-에서는 남의 말이 잘 들리지 않습니다.따라서 그를 위하여 어떤 좋은 말이나 기도를 해 주어도 그의 마음에는 전달되기 힘듭니다.
즉. 그 영혼은 그대로 49일은커녕 단 한 시간도 지체하지 않고 지옥으로 가버립니다.이 경우 그 어떤 제도 그를 위하기 힘듭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작정 49제를 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남아 있는 사람들의 최선인 까닭입니다.목숨이 곧 죽을 것을 알지만 의사는 끝까지 최선을 다하지 않습니까?
그와 같은 것입니다.
극선자도 마찬가지입니다.약간 도력이 있는 영가(영혼)인 경우에는 스스로의 의지력으로 조금 남아 살아 있는 자들의 천도재를 지내는 공덕을 그들 자신의 것이 되도록 회향(도로 돌려줌)해 주기도 하지만,이들 아뢰야식도 곧 바로 해당하는 천국이나 극락에 이르기 때문에 하루나 이틀까지도 필요치 않습니다.
문제는 바로 극악한 사람도 아니요 극선한 사람도 아닌 경우인데, 이들의 다음 생이 선과 악의 행업의 기억 중에서 왔다 갔다 하여 최장 49일 동안을 음계(저승)에 머무는데 이것은 영가의 수명입니다.
이 때에 그 영가의 마음을 좋은 기억에 머물게 하고 여러 깨끗한 스님네들의 원력과 후손들의 바램이 한데 어우러져서 그 영가의 마음을 삼보께 안정시켜주면 마치 바람이 부는 데 깃발을 묶어 두는 것처럼 그 영가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게 삼보를 생각하게 되어 道心이 생기고 이 도심으로 바른 마음(直心)이 형성되고 이 직심으로 곧 바로 자기가 가야 할 곳을 바로 알아 태어나므로 악도에 태어나지 않게 되는 까닭에 정성을 들여 49제를 지내는 것입니다.
만일 이 49일 동안에도 마음이 정하지 못하는 영가는 그것 자체가 그 영가의 머무는 곳이 되어 이른 바 구천에 머문다 또는 귀신이 된다 하는 것입니다.
이 귀신의 세계는 삼악도 중의 하나 입니다. 이 삼악도에 태어 나지 않을 원인으로서는 당자사자의 행업이 7할이요 나머지 3할이 그를 위한 기도재입니다.
후손으로서는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종교를 떠난 일입니다.
만일 돌아가신 분이 기독교인이면 기독교식으로 하되 일주일에 한 번씩(다 하면 더욱 좋고) 일곱 번을 정성을 다하여 평소 그 분이 즐겨 부르시던 찬양과 기도로 예배를 드려주면 그 은혜를 하늘 천국에 가서도 갚을 것입니다. 왜 종교를 떠난 것이냐 하면 그것은 하나의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현상을 가지고 종교 마다 해석을 달리 할 순 있어도 현상 그 자체를 부인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기회에 기독교인들에게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돌아 가신 분의 신앙을 헛되이 하지 않게 하려면.또는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게 하려면,부디 이 불교의 49제를 차용하여 기독교식으로라도 장엄하게 하여 보십시오.
저는 이렇게 하여 아버님의 장례를 치루었고( 물론 나 혼자 만 입니다 ㅠ.ㅠ),아버님은 훗날 꿈 속에 나타나셔서 불효의 괴로움에 가슴 아파 하던 나를 오히려 위로 하시고 웃으시며 쓰다 듬어 주셨습니다. ‘네가 내 앞길을 잘 닦아 주어 고맙다” 고 하시면서….
님께서 이 방언(?)을 잘 이해 하시기 바라며.
유마 올림.
ps.아참 심판 문제가 빠졌군요.
아무도 심판 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짓고 스스로 받는 까닭에 완존 자동입니다.
^^
아직도 수동으로 하는 곳이 있다고 합니다.
즉,염라대왕이나,옥황상제나 하나님이 심판 하여서 돌과 가라지를 가려 낸다고 합니다만,전자동에 비하면 한참 구식이라 얼마 안가 없어질 것이라고 합니다.(이상 인터넷 뉴스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