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연은 이곳으로 이주해 온 후 해를 거듭할수록 어머니가 내놓은 서책들을 공부하면서 시문에 더욱 열중했고, 특히 공령시(功令詩)에 심취돼 잠시도 글공부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나 형인 병하는 글공부에 실증을 느끼기에 이르렀다.
이토록 방구석에 틀어박혀 공부해봤자 무모한 일 같았고, 집안에 토대가 있고 조그마한 양반 끄나풀이라도 있으면 희망을 가지고 공부에 전념할 텐데, 남의집 행랑채나 전전하면서 가난하고 천민인 처지에 아무리 공부를 한다고 해도 솟아날 구멍이 없다는 것을 느끼면서 병하는 점점 글과의 거리가 멀어졌다.
청년기로 접어든 병하의 생각이 옳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미 며칠 전에 장가든 입장에서 늘어나는 가족을 어머니 혼자 감당하기란 벅찼고, 다 큰 맏이의 입장에서 앉아서 끝이 보이지 않는 글만 읽을 수는 없었다.
실로 집에 재산도 없이 이 시대에 여자의 몸으로 두 아들을 데리고 잦은 이주를 하며 먹이고 입히고 어려운 글공부까지 가르치면서 살아왔다는 것이 함평 이씨에겐 너무도 힘에 벅찬 일이었다.
지금도 근근히 하루 종일 삯일을 해주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품삯으로 받는 것이 잡곡 한두되였고, 그나마 품삯을 하루라도 미루든가 일거리가 없으면 다음날의 양식에 위협을 받아야 했다.
그뿐이랴.
두 아들이 쓰는 지필묵은 함평 이씨가 밤새워 일한 삯바느질 값을 한두 푼씩 모았다가 손수 읍내에 나가 지필묵을 구입해 오는 형편이었다.
형 병하 서책 놓고 삯일로 동생 병연 뒷바라지
어느 날 병하는 혼자서 동강을 거닐다가 강가의 언덕 밭에서 밭일을 하고 계시는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어머니. 힘드시죠?"
"아니. 공부는 안하고 여기는.....?"
병하는 대답 대신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심했던 말을 털어놓았다.
말의 취지는, 글공부는 그만하고 농사일이든 아무 일이라도 하겠다고 말하면서 병연이의 칭찬도 함께 덧붙였다.
"어머니. 저도 병연이를 믿습니다.
이젠 아우가 공부하는 공령시도 굉장한 수준에 있어 어떠한 과시에도 이를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해 있습니다.
앞으로 병연이가 더욱 마음 놓고 공부할 수 있게 저도 일을 해야겠습니다."
어머니는 병하가 의중의 말을 털어놓았는데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흘러가는 동강의 물길을 주시했다.
어쩌면 병하가 택한 그의 행보가 옳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실은 병연이의 글공부가 더해갈수록 함평 이씨의 마음도 우울했다.
역적이니 폐족이니 하는 족쇄가 그의 머리를 짓눌렀기 때문이었다.
이후로 병하는 쟁기를 들고 작은 뙈기나마 어머니가 소작으로 얻어 경작하는 밭일도 열심히 했고, 일거리를 얻어 삯일도 마다하지 않고 다녔다.
틈틈이 동강에 나가 물고기도 잡아와서 찬거리의 보탬도 했고, 잡은 물고기를 들고 재 너머 읍내에 있는 주막에도 가져가 몇 푼씩 손에 쥐어오기도 했다.
병하가 글공부에서 벗어나 일을 하고나서부터 지난날 잦은 이주와 굶주리던 생활 중 지금이 가장 넉넉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는 시기라고 할 수 있었다.
병연 20세에 몰락한 양반집 규수 황씨와 혼인
병연이가 스무 살 들던 해에 장수 황씨와 혼인을 했다.
그 당시 스무 살의 혼인은 만혼(晩婚)이었다.
혼인 전에도 여러 곳에서 혼담이 왔으나 번번이 병연의 의중을 맞추지 못하다가 몰락한 양반 댁의 규수인 장수 황씨를 아내로 맞이하게 됐다.
그 시대에 '몰락한 양반'은 나라에 죄를 짓고 벼슬에서 쫓겨나거나 선대에서 벼슬은 했어도 후대에서 벼슬을 하지 못하는 가문을 가리켜 부르는 말이었다.
장가든 다음날 어머니인 함평 이씨의 권유로 병연이의 자(字)를 성심(性深)으로 부르게 했다.
그 당시 주로 양반댁 자제들이 장가든 뒤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던 시대라 자는 본이름 대신 부르던 이름이었다.
성심이 장가든지 달포가 지난 어느 봄날, 영월읍내에 나가서 일하고 돌아온 병하가 성급히 집안으로 들어서며 아우인 성심이를 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