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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의 땅을 향한 로드맵(14)하세롯에서 므리바 샘까지(민 20:10-13)
5월은 가정의 달이고,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풀러 신학교에서 가족학을 강의하던 잭, 주디 볼스윅(Jack/Judy Balswick)은 저서 ‘크리스챤 가정’에서 오늘날의 모든 가정 유형을 세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전통적 가정’과 ‘현대적 가정’, 그리고 ‘성경적 가정’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가 세 가지 유형의 가정을 나눈 기준이 무엇이냐 하면 ‘권위’였다는 것입니다. ‘전통적 가정’은 권위가 가장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있는 경우인데, 그 결과 엄격한 질서가 존재하나 그 대신 가족 구성원들의 자유가 희생되는 일이 많았다고 지적합니다. 과거 유교적 가치관에 근거한 우리 사회의 대부분의 가정들이 이런 전통적 가정의 케이스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가 ‘현대적 가정’인데, 이런 가정은 전통적 가정과 정 반대의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적 가정은 권위가 부재한 가정으로 가정 구성원 모두가 개성과 자유를 만끽하는 케이스인데 그 대신 질서가 상실되고 혼란과 갈등을 겪는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전통 사회에서 현대 사회로 이양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이런 현대적 가정들의 모습을 적지 않게 우리 주변에서 목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잭 볼스윅은 이 두 가지 극단을 대치하는 건강한 가정의 대안으로 ‘성경적 가정’의 모델을 제시합니다. 그러면 성경적 가정에서의 권위는 누가 가져야 합니까? 물론 그 대답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참으로 하나님이 주인되어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가정이라면 거기에는 질서와 자유가 공존하는 아름다움을 보게 될 것이라고 그는 제시합니다. ‘성경적 가정’안에서 가족들은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기 위해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들인 부모를 존중하며 동시에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로서의 부모들은 하나님의 의도대로 권위를 사용하여 자녀를 사랑으로 양육함으로 이런 가정 안에서 우리는 따뜻한 질서와 절제 된 자유를 동시에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가정의 이상인지요!(세 가지 유형의 가정 ‘도표’ 참조) 그러나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권위라는 우상을 제거하는 일에 바쁜 사회가 되었습니다. 소위 진보적 인생의 표지는 권위에 대한 비판과 반항으로 상징되었고, 그 결과 우리 사회 여러 영역이 권위 부재의 혼란과 갈등을 경험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권위주의는 비성경적이지만, 권위는 성경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홍역은 권위주의를 배격하는 나머지 일체의 권위까지 부정하는데 까지 나아갔다는 사실입니다.
오늘의 본문인 민수기 20장에는 권위에 대한 세 가지 거역 사건의 결과가 증언되고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권위에 대한 거역의 결과로 모세의 형제들 미리암과 아론, 모세가 다 죽고, 결국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세 형제의 권위에 대한 거역의 진상을 알아봄으로 권위를 존중하는 가정의 회복, 삶의 회복이 일어나기를 기도하고 싶습니다.
1. 미리암과 아론의 거역입니다.
본래, 미리암과 아론의 거역 사건은 민12장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민12:1을 읽겠습니다.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구스는 전통적으로 에티오피아를 의미합니다. 모세가 국제결혼을 한 것입니다. 여기서 제기되는 의문은 모세가 처음 결혼한 여인 십보라는 어떻게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십보라가 본래 에티오피아 여인이라는 가정을 하는 이도 있지만 더 많은 학자들은 아마 모세가 상처하여 구스 여인과 재혼을 한 상황일 것이라고 가정을 합니다. 그런데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이런 국제결혼을 용납하지 못하겠다고(아마 그녀의 검은 피부를 용납할 수 없다는 피부색의 편견?) 나선 것입니다. 꼭 그런 여인과 결혼해야 하느냐고 항의했을 것이고 아마 모세는 나도 기도한 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결정했다고 대답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러자 미리암과 아론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민12:2입니다.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그들은 모세의 기도자체를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의 리더십, 더 나아가 하나님의 리더십에 도전하는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어떻게 되었습니까? 미리암에게 나병이 발발하게 됩니다. 아론과 미리암이 함께 이 결혼을 비방했지만, 미리암이 주동했기에 미리암에게만 징계를 국한하신 것으로 판단됩니다. 피부로 인간을 편애한 미리암에게 주께서 그녀의 피부에 징계를 내리십니다. 더 중요한 것은 모세의 리더십을 흔들어 출애굽의 여정에 지장을 초래 한일을 징계하십니다. 비록 이들은 가족적으로 연결된 형제 관계라 할지라도 지금 모세는 하나님이 세우신 리더로서 민족을 이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전혀 비본질적인 문제(국제결혼)로 리더를 흠집 내는 것을 하나님은 그대로 방관하실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명백히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에 대한 거역이요 불순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온유한 지도자 모세의 중보기도로 미리암은 치유되고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이 사건이 일어난 곳이 ‘하세롯’이었습니다.(민11:35,12:16) 본문 민20장 1절은 미리암의 죽음을 보도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첫째 달에 이스라엘 자손 곧 온 회중이 신 광야에 이르러 백성이 가데스에 이르더니 미리암이 거기서 죽으매 거기에 장사되니라”(출애굽지도 참조) 민 20장의 마지막 구절인 29절은 미리암의 죽음이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의 모세의 형 아론의 죽음을 또다시 보도합니다. 이 구절을 다시 민33:38과 비교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지 사십년 째 오월 초하루에 제사장 아론이 여호와의 명령으로 호르산에 올라가 거기서 죽었으니” 무슨 말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난지 이미 40년의 세월이 흐른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데스에 도착하기 까지 약 2년여, 그후 38년을 가데스를 축으로 방황하며 세월을 죽인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데스 부근에서 미리암과 아론이 세상을 떠남으로 두 사람은 약속의 땅을 밟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된 것입니다. 두 사람의 권위에 대한 거역은 결국 그들 자신의 꿈을 상실하게 한 것입니다. 기억하십시다. 권위에 대한 거역은 결국 자신의 인생을 무너뜨리는 범죄인 것을!
2. 모세의 거역입니다.
모세 또한 자신의 인생의 궁극적인 권위이신 하나님을 거역하는 가슴 아픈 역사를 남깁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의 본문의 사건 므리바의 샘물 사건입니다. 본문을 이해하는 열쇠는 민20:8입니다.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반석을 향해 명령을 함으로서 물을 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어떻게 했습니까? 본문 11절입니다.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 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자, 모세는 반석을 향해 명하는 대신 지팡이로 두 번이나 내리 친 것입니다. 물론 샘물은 솟았습니다. 그것은 목마른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요 긍휼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명백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한 것입니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12절 하반부에서 이 불순종으로 그들-즉 모세와 아론이-이 하나님께서 예비한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러면 도대체 왜 모세와 아론은 그렇게 했을까요? 다시 12절을 주의 깊게 묵상하십시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고로--” 여기 성경은 모세와 아론의 거역의 숨겨진 원인이 그들의 불신앙-‘나를 믿지 아니한 연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과거 르비딤의 비슷한 정황에서 물이 필요했을 때 모세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지팡이로 반석을 쳤습니다. 그리고 생수의 강이 쏟아져 나온 것입니다. 그때는 믿음으로 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유사한 환경에 처했을 때는 동일한 믿음을 의지하지 못한 것입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다시 본문의 10절을 읽어 보십시오.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모세가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물을 내랴” 누가 물을 낸다고 했습니까? 우리가~한다고 한 것입니다. 벌써 르비딤의 기적이 전적인 하나님의 도움인 것을 잊은 것입니다.
우리가 한 것으로 착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한다~’고 소리치며 지팡이를 내리 친 순간, 하나님은 반석은 열어 주셨지만 이미 하나님을 의지하기를 거부한 모세의 불신앙을, 그리고 그 불신앙에 입각한 그의 불순종을 간과하실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가 평생을 자신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고도 자신은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13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과 모세가 하나님과 다투고 거역한 그 곳을 ‘므리바’ 곧 ‘다툼’이라고 명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다투지 마십시오. 자신만 손해 볼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결심하실 것-믿고 순종하시는 일입니다. 모세와 그의 백성이 40년 만에 가데스를 떠나 본격적으로 약속의 땅을 향해 다시 나아가면서 배워야 했던 교훈, 거역의 심각함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므리바의 사건이었습니다.
3. 우리의 거역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미리암의 거역, 모세와 아론의 거역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생각할 더 중요한 일은 우리들 자신의 거역입니다. 오늘 우리 중에도 오늘의 므리바 샘터에 주저앉아 하나님이 세우신 리더십을 위해 기도하기보다 리더십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 이렇게 하시면 안 된다고 불평하는 분들은 안 계십니까? 아니면 우리의 자녀들이 부모를 거역하며 스승을 거역하며 반항하는 므리바의 아픔을 겪고 계신 분들이 계십니까? 그들은 어디에서 거역을 배웠을까요? 혹시 우리들 부모에게서 배운 것은 아닐까요? 우리 부모들이 늘 나라 지도자를, 혹은 영적 지도자들을, 혹은 가정의 어른들을 지극히 비본질적인 일들로 비방하고 거역하는 것을 보고 우리의 자녀들 또한 습관적으로 거역을 배운 것은 아닐까요? “자식은 부모 앞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뒷모습에서 배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릇된 모본을 보인 우리들 부모들 자신의 행적을 먼저 참회하십시다. 부모가 회개하면 자녀들이 제일 먼저 알아차릴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일관성 있는 새 인생을 사셔야 합니다. 거역이 아닌 순종의 모범을 보이셔야 합니다. 존중의 모범을 보이셔야 합니다. 그러면 그때 비로소 우리 사회의 거역의 문화, 파괴의 문화는 순종의 문화, 창조의 문화로 변혁될 것입니다.
우리가 거역하고 싶어질 때 언제나 기억하실 일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거역을 즐기는 옛 사람의 본성이 있다는 것을.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주어진 새 사람의 거듭난 성품은 우리에게 거역이 아닌 순종을 촉구하고 있음도 함께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이 일생을 두고 실천하시고자 하신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히5:8-9에 보면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빌2:8의 증언을 또한 기억하십시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 여러분과 제가 진정 이 예수님을 따르는 그의 제자이기를 소원하신다면 우리가 배울 일, 우리가 결단할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순종의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의 문화가 우리에게 무엇을 충동하든 중요한 것은 우리 주님의 명령, 주님의 모범이십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우리 주님에게도 선택의 여지가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거역이 아닌 순종을 결단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바로 그분의 제자입니다. 그러면 오늘 거역의 문화 한 복판에서 거역이 아닌 순종의 삶을 결단하시겠습니까?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 순종을 배우기를 거부하고 대신 거역을 선택하신다면 분명하게 기억해 두십시오. 이제 이후로 우리의 걸음은 약속의 땅을 향한 행진이 멈추는 미래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선택은 무엇입니까? 순종이십니까? 거역이십니까?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