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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검성 ‧ 섬서성 한성1 ‧ 하북성 한성2의 위치 |
그러면 강단사학계는 저 유명한 왕부의 『잠부론』에 나오는 기록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 것일까? 도대체 어떻게 해석하길래 이처럼 손쉬운 왕검성의 위치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잠부론』의 핵심에 해당하는 “그 후에 한韓의 서쪽에서도 역시 성을 한韓이라 하였는데, 위만에게 정벌당하여 해중으로 옮겨가 살았다(其後韓西亦姓韓, 爲魏滿所伐,遷居海中).”는 구절의 ‘한서韓西’에 대한 이병도의 해설을 살펴보자.
“여기의 한서韓西를 성명으로 보는 이도 있지만, 그렇게 보면 문장상 한韓이 겹들어 가고 또 동서同書의 문례로 보더라도 서西는 확실히 방위를 가리키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한후국韓侯國의 서쪽이라고 해서는 아래의 구절과 일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래의 구절은 분명히 조선에 관한 이야기인데, 조선의 위치가 한후국의 서쪽에 있다고 해서는 말이 되지 아니하므로, 나는 일찍부터 ‘한서’를 ‘한동韓東’의 오誤로 보았다.”『한국고대사연구 48쪽』
아니나 다를까 이병도는 조선의 위치가 한후국의 서쪽에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한서韓西’를 ‘한동韓東’의 오기로 보고 『잠부론』의 원래 뜻과는 정반대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한나라 낙랑군이 한반도 평양이라는 선입견에 사로잡혀 이와 다른 내용의 사료들은 모두 위서나 오기로 부정해버리는 것, 이것이 현 강단사학계 통설의 실체라고 할 수 있다.
(2) 준왕의 1차 망명지는 현 한반도 평양지역이다.
지금까지 왕부의 『잠부론』을 통하여 고조선의 준왕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부근에 위치한 왕검성에서 위만에게 패하여 바다를 경유하여 망명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 준왕이 망명하여 처음 도착한 곳은 어디인지 살펴보기로 한다.
『잠부론』에서는 “위만에게 정벌당하여 해중海中으로 옮겨 살았다( 爲魏滿所伐,遷居海中).”고 하여 준왕이 망명한 곳을 ‘해중海中’으로 표현하였다. 『잠부론』의 내용만으로는 준왕이 망명한 곳을 구체적으로 알기 어렵다. 『삼국지』에서는 준왕의 망명과정을 좀 더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조선)후 준이 참람되이 왕이라 일컫다가 연나라에서 망명한 위만의 공격을 받아 나라를 빼앗겼다. (준왕은) 그의 근신과 궁인들을 거느리고 도망하여 바다를 경유하여 한의 지역에 거주하면서 스스로 한왕이라 칭하였다. 『위략』에 이르기를 ‘준의 아들과 친척으로서 (조선)나라에 남아있던 사람들도 그대로 한씨라는 성을 사칭하였다. 준은 해중海中에서 왕이 되었으나 조선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그 뒤 준의 후손은 절멸되었으나, 지금 한인 중에는 아직 그의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 있다.’고 하였다(侯準旣僭號稱王, 爲燕亡人衛滿所攻奪, 將其左右宮人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 魏略曰: 其子 及親留在國者, 因冒姓韓氏. 準王海中, 不與朝鮮相往來. 其後絶滅, 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 『삼국지』「위지동이전」 ‘한전’
준왕의 망명과 관련한 원사료는 『잠부론』과 『위략』으로 볼 수 있는데, 두 사료는 모두 준왕이 망명한 곳을 ‘해중海中’으로 기록하였다. 이때까지도 중국에서는 한반도를 섬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위략』을 인용한 『삼국지』에서는 ‘해중海中’이라는 단어 대신 ‘한의 땅(韓地)’으로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후한서』에서는 아래와 같이 준왕이 망명한 곳을 마한이라고 더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과거에 조선왕 준이 위만에게 패하여, 자신의 남은 무리 수천 명을 거느리고 바다로 도망, 마한을 공격하여 쳐부수고 스스로 한왕이 되었다. 준의 후손이 끊어지자, 마한 사람이 다시 자립하여 진왕辰王이 되었다(初, 朝鮮王 準爲衛滿所破, 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海, 攻馬韓, 破之, 自立爲韓王. 準後滅絶, 馬韓人復自立爲辰王).” 『후한서』‘동이열전’
『후한서』는 중국 남조의 송나라 범엽(范曄 : 398~446)이 엮은 책으로 진수의 『삼국지』보다 150여년 후에 편찬된 사서이다. 『후한서』에서는 준왕과 함께 망명한 무리가 수천 명이라는 구체적인 망명자의 규모와 더불어 준왕이 마한을 공격하여 쳐부수고 스스로 한왕이 되었다는 새로운 사실을 덧붙이고 있다.
남조의 송나라(420~479) 시대에는 백제가 송나라와 사신을 교환하던 시기였으므로 『후한서』의 저자인 범엽은 한반도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준왕의 망명과 관련된 기록은 『후한서』가 앞선 기록인 『잠부론』‧『위략』‧『삼국지』등과 내용이 서로 어긋나지 않으면서도 가장 상세하므로 최종적인 것으로 인용하려고 한다.
그러면 『후한서』에서 ‘조선왕 준이 위만에게 패하여 무리 수천 명을 거느리고 바다로 도망하여 마한을 공격하여 쳐부수고 스스로 한왕이 되었다.’고 하였는데, 준왕이 공격한 마한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을 살펴보자.
“신라의 최치원은 ‘마한은 고구려, 변한은 백제, 진한은 신라이다.’라고 하였으니, 이와 같은 여러 설이 모두 유사하다고 할 만하다(崔致遠曰: ‘馬韓則高麗, 卞韓則百濟, 辰韓則新羅也’ 此諸說, 可謂近似焉).” 『삼국사기』 ‘잡지 제3’
“『위지』에 이르기를 ‘위만이 조선을 치니 조선왕 준이 궁인과 좌우를 데리고 바다를 건너 남으로 한 땅에 이르러 나라를 건국하고 이름을 마한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견훤이 태조에게 올린 글에 이르기를 ‘옛날에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혁거세가 일어나자 이에 백제가 금마산에서 나라를 창건하였다.’고 하였다. 최치원이 말하기를 ‘마한은 고구려요, 진한은 신라이다.’라고 하였다. 『본기』에 의하면 ‘신라가 먼저 갑자년에 일어나고 고구려가 그 후 갑신년에 일어났다.’고 하였는데, 이렇게 말하는 것은 조선왕 준을 두고 말한 것이다. 이로써 동명왕이 일어난 것은 이미 마한을 병합한 때문이란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고구려를 일컬어 마한이라고 한 것이다. 요즘 사람들이 더러는 금마산을 두고 마한이 백제로 되었다고 하지만 이는 대체로 잘못이다. 고구려 땅에는 본래 마읍산이 있었으므로 이름을 마한이라 한 것이다(魏志云 魏滿擊朝鮮 王凖率宫人左右 越海而南至韓地 開國號馬韓 甄萱上太祖書云 昔馬韓先起赫世勃興 於是百濟開國於金馬山 崔致逺云 馬韓麗也 辰韓羅也 㨿本紀則羅先起甲子 麗後起甲申 而此云者以王凖言之耳 以此知東明之起 已并馬韓而因之矣 故稱麗爲馬韓 今人或認金馬山以馬韓爲百濟者盖誤濫也 麗地自有邑山故名馬韓也).” 『삼국유사』 ‘마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모두 “마한은 고구려, 변한은 백제, 진한은 신라이다.”라고 하는 최치원의 설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운 최치원(崔致遠, 857년 ~ ?)은 통일신라시대의 대학자이며, 당시에는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 540 ~ 576) 때 거칠부 등이 편찬한 역사책이 전해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삼한의 역사와 관련하여 최치원의 말은 무게를 지닐 수밖에 없다.
특히 『삼국유사』는 ‘고구려 땅에는 마읍산이 있었으므로 이름을 마한으로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읍산은 현 한반도 평양지역에 위치한 산으로 비정되므로 마한의 수도가 현 한반도 평양지역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후한서』에서 조선왕 준이 위만에게 패하여 무리 수천 명을 거느리고 바다로 도망하여 공격한 마한 땅은 현 한반도 평양일대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위의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요즘 사람들이 더러는 금마산을 두고 마한이 백제로 되었다고 한다.’는 구절에서 보듯이 당시에도 마한을 고구려가 아니라 백제로 보는 견해도 상당했던 듯하다.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는 1285년에 편찬되었는데, 그보다 2년 늦은 1287년에 편찬된 이승휴의 『제왕운기』에서는 ‘준이 마침내 금마군으로 이거하였다(準乃移居金馬郡).’고 하였다. 준왕이 망명한 곳을 전라북도 익산지역으로 본 것이다. 권람의 『응제시주』에도 ‘기준이 위만의 난을 피하여 바다를 통해 남쪽으로 금마군에 이르러 마한을 세웠다. 지금의 익산군으로 52개의 작은 나라를 거느렸다(箕準避衛滿之亂 浮海而南至金馬郡 開國號馬韓 今益山郡 所統小國五十二).’고 하였다.
또『고려사지리지』에서도 아래와 같이 금마군을 마한으로 보았다.
“금마군: 본래 마한국이다(후조선왕 기준이 위만의 난을 피하여 바다를 통해 남쪽으로 와서 한의 땅에 이르러 나라를 열고 마한이라 하였다). 백제시조 온조왕이 병합한 이래로 금마저라 불렀으며, 신라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고려에 이르러 내속하였다. 충혜왕 후5년에 원순제 기황후의 외향이라는 이유로 익주로 승격시켰다. 미륵산 석성이 있다(세간에 전하기를 기준이 처음으로 성을 쌓았다고 하여 기준성이라 부른다). 또 후조선 무강왕과 왕비의 릉이 있다(속칭 말통대왕릉이라고도 하며, 또한 백제 무왕의 아명이 서동이었다고도 한다)(本馬韓國【後朝鮮王箕準, 避衛滿之亂, 浮海而南, 至韓地開國, 號馬韓.】.百濟始祖溫祖王幷之, 自後, 號金馬渚, 新羅景德王, 改今名. 至高麗, 來屬. 忠惠王後五年, 以元順帝奇皇后外鄕, 陞爲益州. 有彌勒山石城【諺傳, 箕準始築, 故謂之箕準城】. 又有後朝鮮武康王及妃陵【俗號末通大王陵, 一云, 百濟武王, 小名薯童】.” 『고려사지리지』 ‘금마군’
『고려사지리지』는 ‘금마군의 미륵산 석성을 기준성箕準城으로 부르며, 금마군에 후조선 무강왕과 왕비의 릉이 있다.’고도 하였다. 후조선 무강왕은 조선왕 준을 가리킨다. 청주한씨 족보의 마한세계馬韓世界에 따르면 마한은 1세 무강왕武康王으로부터 9세 계왕稽王까지 202년간 전해졌다고 한다. 『제왕운기』‧『응제시주』‧『고려사지리지』 등의 ‘조선왕 준이 바다를 통해 남쪽으로 도망하여 금마군(현 전라북도 익산시)에 이르러 마한을 세웠다.’는 이러한 견해는 훗날 일부 실학자들이 기자조선을 남쪽의 마한과 연결하여 삼한정통론을 내세우는 이론의 배경이 되었다. 현 강단사학계의 통설도 준왕이 도망한 곳을 익산‧금마 일대로 비정하여 이를 계승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왕 준이 망명한 마한의 위치를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한반도 북부지역으로 보는 견해와 전라북도 익산을 중심으로 하는 한반도 남부지역으로 보는 견해가 크게 엇갈리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삼한의 위치도 ‘고구려를 마한’으로 보는 견해와 ‘백제를 마한’으로 보는 견해가 서로 엇갈려 고려시대로부터 지금까지 일천여 년 동안 학자들 사이에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또 『후한서』에서는 ‘조선왕 준이 마한을 공격하여 쳐부수고 스스로 한왕이 되었다.’고 기록한 반면 『삼국유사』및 『응제시주』등 우리나라 대부분의 역사서들은 조선왕 준이 마한을 건국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먼저 조선왕 준이 마한을 건국한 것인지 아니면 준왕 이전부터 마한이 있었는지 살펴보자. 『후한서』와 『삼국지』의 ‘동이열전’ 기록에 의하면 “진한은 그 노인들이 스스로 말하되, 진나라에서 망명한 사람들로서 고역을 피하여 한국에 오자, 마한이 그들의 동쪽 지역을 분할하여 주었다.”고 하였다. 진나라의 고역이란 만리장성의 축조를 말하는 것이므로 진한의 유민들이 망명 한 시기는 대략 기원전 214년경으로 볼 수 있다. 반면 준왕의 망명은 기원전 194년경이므로 준왕이 망명하기 20여 년 전부터 이미 마한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후한서』에서 ‘조선왕 준이 마한을 공격하여 쳐부수고 스스로 한왕이 되었다.’고 한 기록이 정확한듯하다.
다음으로 조선왕 준이 공격하여 쳐부순 마한의 위치와 관련하여 필자는 최치원이 말한 ‘마한은 고구려이다.’라고 하는 설이 타당하다고 본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최치원은 통일신라시대의 대학자일 뿐만 아니라 당시에는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 540 ~ 576) 때 거칠부 등이 편찬한 역사책이 전해졌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도 최치원의 말을 따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마한을 고구려로 보면, 마한 땅은 마읍산이 있었다는 평양일대를 중심으로 한반도 북부지역 뿐만 아니라 만주일대까지 포함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당시 마한이 진한의 유민들에게 경상도 경주부근의 땅을 나누어 주었다고 하였으므로 마한은 한반도 전체를 다스렸다고 보아진다. 결국 준왕에게 격파되기 전의 마한은 평양일대를 중심으로 한반도 전체와 만주일대를 포괄하는 넓은 강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3) 준왕의 2차 망명지는 현 전라북도 익산시 일대이다.
고조선 준왕의 망명로 |
그러면 이승휴의 『제왕운기』를 비롯한 우리나라 대부분의 역사서에 준왕이 남쪽으로 도망하여 금마군(현 전라북도 익산시)에 이르러 마한을 세웠다고 한 까닭은 무엇일까? 또 『후한서』와 『삼국지』의 ‘동이열전’에서 ‘마한의 북쪽에 낙랑 또는 대방이 있다.’고 기록하여 마한을 평양 이남지역으로 보고 있는데 이러한 기록들도 가볍게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서로 상반되어 보이는 역사기록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후한서』‧『삼국사기』‧『삼국유사』등의 기록에 따라 준왕이 수천 명의 무리를 이끌고 망명하여 처음 도착한 곳은 마읍산이 있는 마한의 수도인 현 한반도 평양지역이 분명해 보인다. 당시 마한은 중국의 혼란으로 이전부터 많은 유민들이 유입되었으며, 준왕 집단의 망명은 마한사회에 상당한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준왕 집단은 고조선이라는 국가를 경영한 경험이 있으며, 무리가 수천 명에 달하였으므로 백여 척 이상의 배를 동원하여 상당한 양의 재물과 무기도 지니고 망명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한 상황에서 정변이 일어나서 마한이 분열되었으며, 마한의 수도였던 평양지역에는 낙랑국이 들어서고, 준왕은 또 다시 쫓기어 금마군(현 전라북도 익산시)으로 남하하여 새로운 마한을 세웠을 가능성이다. 또는 준왕 집단에게 격파당한 마한의 지배층들이 남하하여 새로운 마한을 세웠을 가능성도 있다. 이럴 경우 이승휴의 『제왕운기』를 비롯한 우리나라 대부분의 역사서에서 ‘준왕이 남쪽으로 도망하여 금마군에 이르러 마한을 세웠다.’고 하는 기록도 충족할 수 있다.
3. 마무리 글
고조선의 마지막 왕인 준왕의 망명과 관련하여, 준왕이 떠난 왕검성의 위치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는 직접적인 사료는 왕부의 『잠부론』이 유일하다. 『잠부론』에 의하면 옛날 주나라 선왕 때 한韓나라 제후가 있었는데, 그 한후가 다스리는 한성이 오늘날의 중국 하북성 랑방시 고안현 일대에 있었다. 그리고 그 한성의 서쪽에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이 있었다. 현 하북성 랑방시 고안현의 서쪽은 현 하북성 보정시 일대가 되므로 준왕이 떠난 왕검성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일대에 위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기원전 194년경 위만에게 왕검성을 빼앗긴 준왕이 바다를 통해 처음 망명한 곳은 마한의 수도인 한반도 평양일대였다. 『후한서』에 의하면 준왕은 망명할 때 수천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마한을 공격하여 쳐부수고 스스로 한왕이 되었다고 하였다. 준왕의 망명사건은 마한사회에 큰 변화를 몰고 왔다. 준왕이 한반도 평양일대에 위치한 마한을 쳐부수고 그곳에 안착하였는지 아니면 안착하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망명하였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다.
청주한씨 족보의 『마한세계』에 따르면 준왕은 전라북도 익산의 금마로 수도를 옮긴 후 그 해에 세상을 떠나고, 그의 후손들이 9세에 이르도록 202년 동안 마한을 다스린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승휴의 『제왕운기』이래로 『응제시주』‧『고려사지리지』등 여러 역사서에서 준왕이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 일대로 망명하여 마한을 세웠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러한 기록들을 긍정적으로 검토하면 준왕은 1차 망명지인 한반도 평양일대의 마한에서 안착하지 못하고, 다시 전라북도 익산의 금마일대로 2차 망명하여 그곳에서 새로운 마한을 세웠을 가능성이 있다.
지금까지 강단사학계에서는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을 현 한반도 평양지역으로 보고, 위만에게 왕검성을 빼앗긴 준왕이 바다를 통해 도망한 곳은 현 전라북도 익산부근으로 비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왕부의 『잠부론』에 나오는 준왕의 망명기록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또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등에서 최치원의 설을 인용하여 “마한은 고구려, 변한은 백제, 진한은 신라이다.”라고 하는 가장 기본적인 사료의 내용마저도 충족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하여 고조선에서 삼한을 거쳐 삼국시대에 이르는 한민족의 상고사가 아직도 짙은 안개 속을 헤매는 것이다.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일대에 위치하였다. 필자는 ‘동이족의 대이동(제1회) <신라인들은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글을 통하여 신라를 형성하였던 진한인들이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일대의 탁수유역에서 왔으며, 그곳 낙랑사람들을 ‘아잔’이라고 부르고 신라인들 스스로도 낙랑이라 불렀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신라를 형성하였던 고조선 백성들의 대이동은 마한이 그들에게 동쪽 땅을 떼어주어 살게 함으로써 안정될 수 있었다.
그러나 고조선 준왕의 망명은 일반 고조선 백성들의 망명과는 사뭇 달랐다. 준왕의 망명집단은 고조선이라는 나라를 경영하였던 경험이 있는 지배층으로 무리수도 수천 명에 달하였고, 상당량의 재력과 무기를 지니고 망명하였을 것이다. 『후한서』에서 ‘마한을 쳐부수고 스스로 한왕이 되었다.’고 기록한 것처럼 마한사회에 큰 변화를 몰고 왔다. 이로 인하여 마한이 분열하여 임진강 일대를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낙랑국 등이 들어서고 남쪽으로는 소삼한이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기원전 200년경을 전후하여 고조선 백성들의 망명과 뒤이은 고조선 준왕 무리의 망명사건은 고조선의 중심축이 현 중국 하북성 지역에서 한반도 지역으로 이동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므로 한민족 상고사의 정통성은 단군조선에서 삼한으로 이어지고, 삼한에서 삼국으로 이어졌다고 할 것이다. 진한 유민들의 망명과 준왕의 망명사건을 통하여 현 중국 하북성 지역에 있었던 고조선이 어떻게 수천 리 떨어진 한반도의 삼한과 연결되는지 이해할 수 있다.(다음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