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2년 갑술(1454년 5월25일 무인시(戊寅時) 생.
연산군 10년 갑자 1504년 10월1일(향년 51세) 졸.
성리학자, 자는 대유(大猷), 호는 한훤당(寒暄堂) 사옹(簑翁), 시호는 문경(文敬), 본관은 서흥(瑞興), 행용양위 호군(行龍驤衛護軍) 유(紐)의 아들. 한성부 정릉동(漢城府 貞陵洞=지금의 貞洞)에서 출생하였다.
30세까지 「소학」을 탐독하고 스스로 「소학동자(小學童子」라 일컬었다. 성종11년 1480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척불소(斥佛疏)를 상소. 성종25년 1494년 행의(行誼)로서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이극균(李克均)의 유일(遺逸) 추천으로 남부참봉(南部參奉)이 되었고 이어 전생서참봉(典牲暑參奉), 군자감 주부(軍資監主簿), 감찰(監察) 등을 거쳐 연산군3년 1497년에 형조좌랑(刑曹佐郞)이 되었다. 1498년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김종직 일파로 몰려 희천(熙川)으로 유배되었다가 후에 순천(順天)으로 이배(移配)되었으며, 1504년 10월 갑자사화 때 사사(賜死)되었다.
평소 6경(六經) 연구에 전심, 성리학(性理學)에 통달했으며, 특히 실천궁행(實踐躬行)하여 동방도학(東方道學)의 조종(祖宗)이 되었고, 충효대절(忠孝大節)이 조야(朝野)에 떨쳐 모두 경양흠모(敬仰欽慕)하였다(王朝實錄云忠孝大節, 聳動當世). 기국(氣局)이 단정하고 성행(性行)이 수결(修潔)하며, 언어동정(言語動靜)이 경건하고 순후(諄厚)하여 진실로 도학군자(道學君子)의 사표(師表)가 되었다.
중종 12년 1517년에 우의정(右議政)에 추증(追贈).
선조 8년 을해(乙亥) 1575년 12월 증영의정
(王朝實錄 24권 538면:贈領議政金宏弼,
燃黎室記述六券:柳西厓戊午黨籍等에 贈領議政),
광해군 2년 1610 9월4일에 오현(五賢)의 수위(首位)로 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과 더불어 문묘(文廟)에 종사되었다. 문하(門下)에 조광조(趙光祖)·김안국(金安國)·김정국(金正國)·이심원(李深源)·성세창(成世昌)·정붕(鄭鵬) 등 많은 학자가 배출되었다. 현풍(玄風)의 도동서원(道東書院), 순천(順天)의 옥천서원(玉川書院) 등 15개 서원에 배향(配享)되었다.
《著書》 景賢錄, 寒暄堂集, 家範 등.
《文獻》 韓國儒學史, 燕山君日記, 高峯集, 張旅軒集, 一蠹集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