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1월, 매서운 추위만큼이나 차가운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막바지 발악이 온 나라를 꽁꽁 얼어붙게 만들던 어느 날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회장 박종철 열사의 하숙방에 일단의 형사들이 들이 닥쳤다.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로 박종철 열사를 연행한 공안당국은 박종철 열사의 선배로서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으로 수배 중이던 박종운(현 한나라당 부천 오정 당협운영위원장, 경기도 경제단체연합 사무총장)씨의 소재를 추궁했다. 그러나 박종철 열사는 끝까지 박종운씨의 소재를 밝히지 않았고 결국 물고문 끝에 박종철 열사는 죽고 말았다.
공안당국은 박종철 열사의 죽음을 은폐하려 했으나 결국은 물고문에 따른 사망이었음이 밝혀졌다. 이에 분노한 국민들은 그해 6월 온 국민이 일어나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투쟁을 벌였고 마침내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을 끝장내고 이 나라의 민주화를 한 단계 발전시켰다.
그리고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박종철 열사의 고문치사 사건이 있은지 20년의 세월이 흐른 2007년 1월, 박종철 열사가 목숨을 걸고 지켜 내었던 박종운씨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를 가졌다. 인터뷰에서 박 씨는 말했다. "시장 경제를 지키고 북한의 민주화를 이루는 것이 박종철의 정신을 올바르게 발전시키는 것이다" 라고...
당시 인터뷰 기사를 읽은 나는 모멸감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가 소속되어 있는 한나라당과 경제단체연합, 그의 정치적 선택이고 호구지책일 수 있으니 그것을 탓할 마음은 없다. 다만 자신의 정치적 목적과 호구지책을 위해 이미 고인이 된 열사의 뜻을 악의적으로 왜곡하는 그의 발언에 열사와 동 시대를 살면서 같은 고민과 실천을 했던 나는 모멸감을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일본 정신대 위안부 할머니들이 일본의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는 수요집회를 900회가 넘게 개최하고, 구제역으로 수 많은 축산농민들이 피눈물을 흘릴 때 사실 보도조차 제대로 하지 않던 KBS가 지난 22일 일본을 돕기 위해 생방송으로 '일본 대지진 피해 돕기 희망음악회'라는 것을 열었다.
이 날 방송에서 가수 조영남씨가 출연하여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개사한 노래를 불렀다는 소식에 나는 또 다시 모멸감을 느낀다. 윤동주 시인은 일본 유학시절이던 1943년 7월 독립운동 혐의로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조국광복을 불과 6개월 앞둔 1945년 2월 16일 옥사한 대표적인 민족시인이다. 그리고 '서시'는 암울했던 일제 식민시절, 터져 나오는 울분을 한 글자 한 글자 내면의 성찰과 염원으로 승화시킨 피 맺힌 절규와 같은 시이다.
아무리 일제 강점기를 근대화의 시기라고 생각하는 뉴라이트가 판치는 세상이라고는 하지만 특별생방송까지 해 가며 일본국민에게 희망을 전하겠다고 호들갑을 떠는 공영방송 KBS, 윤동주 시인의 삶과 '서시'에 대한 이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이 제멋대로 일본 국민을 위한 노래로 번안해 부른 조영남 씨...총칼로 무장한 일본의 무력 앞에서 맨 손으로 '대한독립'을 외치던 선조들의 피 맺힌 절규가 아직도 귓전에 쟁쟁한 3월의 아침, 나는 또 다시 견디기 힘든 모멸감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