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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묵히 그들의 길을 걷다. - 허클베리핀
1997년 결성된 허클베리핀이라는 밴드는 이듬해에 모두가 격찬하는 첫 앨범 <18일의 수요일>이 내고 멤버가 바뀌고(남상아(보컬, 기타)와 김상우(드럼)가 팀을 나가고 이소영(보컬, 기타), 김윤태(드럼) 영입) 얼마 전 3집을 내 활발히 활동한다는 구태의연한 이야기는 여기서 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밴드에 대해 어떤 정보가 필요하다면 검색창을 활용하라. 아니 어쩌면 제반의 정보 없이 이들의 음악을 들어보는 것이 좋을 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의 얘기 속에 허클베리핀은 우울하고 화가나 있고 허탈하다. 이외에도 수많은 미사여구들의 그들의 음악을 규정짓고 있다. 그 말이 맞는지 어떤지 한번 확인해 보길 바란다.
이들의 음악에 대해, 이들의 약사에 대해 이렇고 저렇고 할 말이 없다. 단어들은 꺼내놓으려 하면 쪼그라들고 왜곡되어진다. 자료는 찾으면 얼마든지 널려 있다. 몹시도 담담하게.
*관련앨범
1. 오늘은 여러모로 이상한 인터뷰가 될 것 같다. 우선 붙박이 질문이다. 각자 음악을 하게된 결정적(?) 계기에 대해 부탁한다.
소영: 혁조야 넌 음악을 왜 하게 됐니?
혁조: 왜 나부터 시키고 그래? 생각 좀 하고
윤택: 후회되지?
혁조: 그렇다 웬만하면 안 할라 그랬는데
소영: 음악을 안 좋아했어야 돼. 음악을 좋아하는 게 아니었어. 부동산이나 이런걸 좋아했어야지 어릴 때부터.
일동: 맞아 맞아
윤택: 나 아는 친구는 전부터 부동산에 관심이 많았는데 중계 자격증 따 가지고 부업으로 복덕방 하면서 투자해 떼돈을 벌어서 빌딩사고 점차 재산을 불려나갔지...애들 잘 키우면서 말이지
소영: 재테크도 하면서
일동: 그렇지 (질문은 어떻게 음악을 시작하게 됐는지에 대한 질문인데 회한들이 많은지 다른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다. 상황수습 김기자 질문 다시 들어간다.)
-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서 언제부터 음악을 좋아하게 됐는지. 어떻게 시작하게 됐는지 얘기해 달라
소영: 어릴 때부터 라디오를 굉장히 좋아해서 밤새 음악 듣고 녹음하고 내가 좋아하는 노래 녹음해서 리스트 쫙 만들고 그랬다. 윤태: 나도 그랬었다.
소영: 중학교 때 내 방이 처음 생겼는데 나만의 공간에서 할 수 있었던 놀이였던 거 같다. 매일 녹음했다 지우고. 그렇게 매일 밤을 새고 했는데도 피곤하지도 않고 시간이 너무 빨리 갔다. 그때부터 음악을 좋아했는데... 좋아하다 보면 하고 싶어지지 않나? 뭐 하지만 그때는 방법도 모르고 길도 없었고. 또 강원도 시골출신이라... 그러다가 대학교 4학년 1학기 끝나고 취업을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클럽에서 종이에 써 붙인 멤버 구함을(그때는 인터넷이 상용화되지 않았던 때) 보고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오디션을 봤다.
- 기타는 원래 쳤던 건가?
소영: 아니다. 여기 들어오기 전에는 간단한 코드밖에 몰랐다. 들어와서 형한테 배운 거다. 계속 음악을 좋아하다 보니까 머릿속 한구석에는 어떤 생각들이 있었던 것 같다. 그 생각을 놓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음악을 하게 되지 않았나 싶다.
- 그 전에는 밴드나 이런 활동은 안 했나?
소영: 음..불문과였는데 ‘불문인의 밤’같은 때 재미 삼아 조금씩 노래하고 그런 정도였다. 밴드나 팀을 한다고 하면 책임감이 있어야 하고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하니까 처음에 할 때 고민을 많이 했다.. 그런 부분 때문에 많이 망설였다. 좀 무섭기도 했고
- 오디션은 어떻게 봤나?
소영: 형이 1집을 틀어놓고‘갈가마귀’,‘죽이다’,‘허클베리핀’3곡을 녹음해 오라고 했다. 그래서 요만한 아이와 테입을 녹음기에 넣고 녹음했다. ‘죽이다’를 그때는 정말 웃기게 불렸다.(웃음) 김경호처럼
기용: 그 데모 테입 어디 있을 걸
윤태: 팔자 그거 (웃음, 김경호 흉내를 내며) 헤매이는 멋진 청년∼
소영: 진짜 그렇게 불렀어. 왜냐면 샤우팅이 안되니까 그때는 그렇게 불렀어.
윤태: 나 여기서 앨범 따로 내고 싶어. 허클 1, 2, 3집 메탈화로(난리남)
소영: 허클베리핀 1집을 많이 좋아해서 이런 게 아니라는 걸 알긴 했는데 알아도 이게 어떻게 안 되는 거다. 아는 기술이 바이브레이션밖에 없어서 (웃음)
- 다른 인터뷰에서 많이 봤다. 기용씨가 바이브레이션은 안 된다고 했다고. ^^ 당시에도 이쪽 씬에 관심이 많았나보다.
소영: 당시 이쪽 씬이 부흥기였고 원래 허클베리핀 팬이어서 공연도 몇 번 봤었다.
윤태: 자, 다음은 너. 바로 너, 너 때문이야 (혁조씨를 가르키며)
혁조: 아 언제부터 했더라 ...
- 너무 어릴 때부터 해서 기억이 잘 안나나 보다 (웃음)
소영: 혁조는 어릴 때부터 음악교육을 받았다. 혁조: 초등학교 입학식하고 나온 날이었다. 엄마가 태권도장, 미술학원, 피아노 학원에 데리고 가서 그 중에서 하나 고르라고 했다. 나는 피아노를 골랐고 당시 동네에서 신동 났다고 난리가 났었다.(웃음)
윤태: 이게, 이게 불행의 시작이었어
소영: 진짜?
혁조: 어. 그래서 되게 열심히 쳤다. 그러다 콩쿨에 몇 번 나갔는데 동네부터 해서 서울시까지 나가봤다. 그때가 초등학교 4학년이었는데 콩쿨에 나가 상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대기실에서 되뇌이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었는데 어떤 아이 엄마가 손을 다 써놨으니까 그냥 하면 된다고 아이에게 말하는 걸 들었다. 그 아이가 대상을 먹었고 나는 예선에서 떨어졌다. 돈주고 그렇게 하는 걸 보니까 어린 마음에 충격을 받았다. 연주를 잘하는지 못하는지는 들어보면 아는 거다. 그 후 피아노를 그만뒀다.
- 전화 한 통 받고?
혁조: 그때 밴드가 좀 쉬었다 하자는 분위기였는데 그러고 얼마 안 돼서 기용이 형한테 전화가 왔다. “안녕하세요 저 이기용인데요” 그러고 바로 그 다음날부터 ...(웃음)
소영: 신동이 맞는 거 같다. 당시 지방에 급하게 공연을 가야 하는 게 있었는데 그 수많은 곡들을 이틀만에 다 외워 가지고 공연을 했다. 열 몇 곡이 넘는 걸..
- 전부터 허클베리핀 음악에 관심이 많았나?
혁조: 아는 노래가 거의 없었다. ‘사막’말곤. (일동웃음)
- 윤태씨
윤태: 난가? --; 음..다 마찬가지인데 시작할 때는 주위사람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초등학교 때 어머님이 들으셨던 딥퍼플, 레드 제플린, 레인보우를 들으면서 .. 소영: 보통 나훈아 같은 거 들으시지 않나?
윤태: 그런 것도 들으시고 이런 것도 들으셨다. 근데 어릴 때는 시끄러운 거지. 근데 지금생각해보면 그때 세뇌 당한 거 같다. 중학교 때는 마돈나, 마이클 잭슨, 아하 같은 팝을 좋아했는데 ‘음악세계’ 같은 잡지보고 고등학교 때 ‘핫뮤직’을 보기 시작하면서 옛날에 어머니가 틀어놓으셔서 들었던 그 음악들이 생각 났다. 또 메탈하는 사람들의 외양이나 이런 부분이 신기하고 흥미롭게 다가왔다. 가지에 가지를 치면서 음악을 찾아듣게 됐다. 예를 들어 기타리스트 잉베이 맘스틴이 딥퍼플의 리치 블랙모어를 좋아했다면 그걸 또 찾아서 듣고 그런 식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듣게 되는 거다.
기용: 별로 가지 안친 거 같은데 (일동 웃음) 윤태: 이 사람이 잘 모르는데 음악 취향이 굉장히 서로 다르다. 그러다 보니 나의 가지치기를 모르는 것 같다. 내가 얼마나 많은 가지를 쳤는지(일동 웃음)
- 악기는 언제 시작한 건가?
윤태: 대학교 1학년 때.
- 드럼을 치게 된 이유가 있나?
소영: 악기가 남는 게 드럼밖에 없었겠지. (웃음)
윤태: 아 .거 사람들이 말이지! 말 좀 하자 좀. 나 안 해.
음악을 너무 많이 들었지 않나 (일동웃음) 그러다 보니까 곡의 구성이나 흐름 같은 것도 다 파악이 되는 거다. 그런데 어느 날 라디오에서 메탈리카의‘마스터 오브 퍼펫’을 들었는데 예전까지의 익숙하던 록 메탈 드러밍이 아닌 거다. 난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도저히 그런 드러밍이 나올 수가 없는 거였다. 정말 신선하고 새로우며 복잡하고 단아하며 강하며 아주 충격적이었다. 그렇게 드럼에 경도되어 있던 찰나 대학교 1학년 때 음악을 좋아하는 애들끼리 모여서 밴드를 하기로 했다. 그때 기타를 좀 치던 친구가 리더를 하면서 애들에게 각자 포지션을 정해 줬는데 (날보며) “너는 아무것도 못하니까 드럼을 해라” 그래서 드럼을 시작하게 됐다.
- 그 이후의 행적은 어떻게 되나?
윤태: 친구들끼리 공연도 몇 번하고 그러다가 대학원 때 H모 밴드라고(허벅지 밴드) 어쩌다가 학생회에서 만나서 하게 됐다. 내가 거기 왜 갔지? 아 대학원 신문 편집디자인 때문에 갔었다. 그래서 그 밴드를 하다가 코코어도 할 뻔 했다. 한번 연습하다 말고 어떤 밴드도 할 뻔 하다가 한번 연습하다 말고...그러다가 이발소 포르노 씨도 하고 그러다가 허클베리핀 하게 된 거다.
- 기용씨와는 어떻게 만나게 됐나?
윤태: 같은 학교였다.
기용: H모 밴드(허벅지 밴드) 할 때 내가 한번 말을 시켰다. 그때 나도 H모 밴드였고(허클베리핀) H모 대학에서 N모 밴드 추모한다고 공연을 했는데 뒷풀이 장소에 그가 혼자 와 있었다. 머리도 긴 남자가 자세 바릇하게 해서 말이다. 허클베리핀은 모두 다 있었는데 딴 테이블에 혼자 덩그러니 와있으니 얼마나 불쌍해 보이나. 내 딴에는 학교 다니면서 오다가다 보기도 했으니까 이번 기회에 인사라도 해야지 해서 술을 들고 가서 “술 한잔 하실래요”했더니 “됐어요(매몰차게)”하는 거다. (일동 웃음)
윤태: 내 기억은 “됐어요(매몰차게)”가 아니었는데 서로 다르게 기억하고 있는 거다.
기용: 아니 웬만해선 나도 거만한 사람인데 일부러 술도 들고 가서 한 잔 따라줄려고 했더니...기분도 되게 안 좋아 보였다. 그래서 나를 싫어하나보다고 생각했다. 윤태: 전혀 아니다. “나중에 멤버들하고 같이 먹을께요” 이랬는데 이게 “됐어요(매몰차게)”로 들린거지.
기용: 그래서 자리로 돌아와서 ‘냉정한 사람이구나 재수없어 (웃음)’그러다가 2년인가 뒤에 멤버가 바뀌면서(보컬 남상아와 드럼 김상우는 3호선 버터플라이를 만든다.) 드럼을 구해야 했다. 홍대에서는 꽤나 유명했었다. 홍대에서(웃음)
그 맨날 남방, 요새는 안 입는데 한 5, 6년 입었을 거다. 비슷한 거 두 개 사 가지고 돌려 가면서. 머릿결이 무지하게 좋고 머리가 길어서 (이때 머리를 자랑스럽게 넘기는 김윤태) 가방 매고 주머니에 손 넣고. 홍대에서는 굉장히 유명했었다. 그래서 얼굴도 알고 있고 드럼 치는 것도 알고 있어서, 전에 당한 것도 있고(웃음) 찾아가서 술 한잔 먹자고 했다. 아무튼 만나서 꼬셨다. “드럼 잘 친다는 얘기 들었다. 등등”
윤태: 아주 사교성도 있고 처음 만나면 높임말도 잘하고 그래요. 처음 만날 땐.(웃음)
- 기용씨의 경우는 어떤가.
기용: 초등학교 때 음악을 굉장히 많이 들었다. 그때는 음악 듣는 것과 운동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때는 라디오에서 팝송이 주로 나왔는데 학교 끝나고 집에 뛰어가면‘2시의 데이트’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럼 그걸 녹음을 해 가지고 계속 돌려들었다. 박원웅의 뭐도 있었고, 서세원 씨도 DJ를 했었던 때다. 폴리스를 들으면서 설레여 했었고 당시 빌보드 차트는 다 외우고 다녔다. 그게 중학교 때까지 갔고 음악을 집중해서 들은 건 그때가 마지막이었다.(웃음)
그 후 스콜피온스 라는 메탈밴드의 곡 몇 개를 이정선 기타교실 놓고 카피를 하는데 재밌었다. 그러다가 오!부라더스의 이성문이라는 친구와 95, 96년도 쯤 카피밴드를 하나 했는데 볼빨간이라는 친구도 거기 있었다. 밴드를 굉장히 늦게 시작한 편이다.
- 그럼 그 전까지는 그냥 음악을 좋아하는 입장이었나?
기용: 그렇다. 한때는 공부에도 뜻이 있었고... 요즘 친구들, 넬 같은 경우에도 벌써 3집을 나고 그러는데 나의 경우 25이 넘어서 밴드를 시작했다. 어떻게 보면 그만큼 좋았다는 얘기도 된다. 밴드 하기 전에는 혼자 통기타 치고 유명한 밴드의 곡 같은 거 좀 쳐보고 그런 정도 였다. 그러다가 비트 헤프닝 이런 밴드를 들으면서 카피만 하는 게 아니라 나도 노래를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처음 만든 곡들이 자폐, 보도블럭, 워크. 그렇게 시작을 한 거다. 노래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96년도에 허클베리핀을 하게 됐다.
유감독: 허클베리핀은 어떻게 만들게 됐나?
기용: 음악을 늦게 했고 전문적으로 배운 것도 없고 악보도 볼 줄 모르고 그런 상황인데 노래를 만들어서 밴드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확’ 들어버린 거다. 일단 보컬을 구해야해서 소개를 받아 상아를 만나게 됐다. 상아도 카피밴드를 하고 있었는데 만나보니 얘기가 잘 통했다. 서로 만든 곡들을 녹음해서 들려주고 그러면서 같이 하게 됐다.
유감독: 어떻게 보면 당시에 감성이 굉장히 비슷한 세 사람이 만난 것 아닌가? 굉장히 날카롭고 예민한 사람들인데...
기용: 셋이 걸어다니면 귀신이 따라붙는다고 했다. 지금은 이 친구들 만나서 많이 바뀌었는데 이 사람들은 정말로 옛날보다 성격이 많이 안 좋아졌다. 옛날에는 화도 낼 줄 몰랐는데 요즘에는 어디 가서 말싸움했다고 자랑하고.
* 김기자의 되새김질: 다시 한번 느끼지만 될 人은 어떻게 해도 된다. 그리고 그들은 통하는 사람들끼리 자석에 끌리는 철가루처럼 모인다. 언제나 신기하게 생각하는 일들 중 하나지만.
2. 음악을 왜 하는가? (1번과 같은 류의 질문이 아닌 본질적인 각도에서의 질문이었으나 유감독님의 상이한 해석으로 이상한(?) 질문이 되어 버렸다.)
유감독: 젊었을 때는 멋도 있고 여자 꼬실려고 하고 그럴 수 있지만 지금은 생계도 그렇고..간단한 일은 아닌데.
기용: 어쩔 수 없어서 하는 사람들도 많다. 현실적이기만 한다면 음악을 못했다. 아까부터 얘기했지만 그런 식으로 20대를 보냈다. 그러다 보니 다른 거엔 잘 적응도 안되고. 그럴 때는 좀 당황되는 부분도 있다. 일주일에 몇 번씩 고민한다. 계속 해야되나 말아야 되나... 살짝 미친 거 같기도 하고 제정신이면 이렇게 오래 못한다.
그냥 나이가 들수록 ‘추한 음악하지 말자 좋은 음악하자.’ 오히려 그런 생각 더 많아진다. 자기에 대한 자존감을 지키는 그런 것 같다. 음악을 언제까지 할지는 모르겠지만 좀 후진 거 나오기 시작하면 빨리 그만 둬야지 그런 생각이다. 10집 내고 그러면 좋겠지만 좋은 음악을 해야지... 잘은 모르겠지만 데이빗 보위나 그런 사람들 보면 좋아 보인다. 얼마 전에 술 마시면서 체인지 있는 앨범을 듣게 됐는데 그런 음악은 나이 들어서 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멋있는 음악이고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혁조: 아직도 음악 가끔가다 들으면 막 소름이 돋을 때가 있다. 그 노래 하나만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듣고 많이 좋아하니까. 어려운 일도 많지만 좋아하는 음악 듣고 연습하고 공연하고 그러는 게 아직도 재밌다.
기용: 그렇다. 공연할 때 여전히 긴장되고 설레고 어떨 땐 이렇게 공연을 많이 했는데 아직도 그래? 그럴 때도 있지만 그게 좋다.
* 김기자의 되새김질:경제적인 부분이나 현실적인 부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는데 계속 그런 쪽으로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서 그들의 모습이 그렇게 일반적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떠올려 봤다. 말하지 않아도 받는 현실적인 압박이 무척 큰 것 같았다. 누구나 갈등은 한다. 그건 그들도 마찬가지이고. 하지만 그들은 묵묵하게 갈 길을 가고 있고 하나씩 방도를 생각해 내고 있었다. (결국에 나 자신에게 하고 싶었던 질문을 그들에게 함으로써 그들에게 음악이 자존감의 결과라는 것을 들으며 대리만족 했는지도 모른다.)
3. 3집 앨범이 얼마 전에 나오면서 3장의 앨범을 낸 밴드가 됐다. 각각의 앨범에 대해 간단한 코멘트를 한다면
기용: 1집은 좀 날이 서 있고 스트레이트하고 화나있는 감정이 많다. 2집부터는 그러한 것들이 안으로 많이 머금어진다. 음..그리고 .. 유감독님은 어떻게 들으셨는지? 3집 들어보셨죠?
유감독: 일반인중에는 내가 제일 많이 들었을 거다. 개인적으로 아트록을 좋아하는데 클래시컬한 분위기가 같이 녹아 들어가는 걸 선호하는 편이다. 3집은 아트록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기용씨가 매우 섬세하다. 기타에서 오는 맛들, 곡에서 느껴지는 느낌. 예민한 감각 그런 것들이 좋다.
* 김기자의 되새김질: 허클베리핀을 너무나도 좋아하는 유감독님은 인터뷰 내내 기회만 있으면 허클베리핀에게 질문을 했다. 최고의 인터뷰는 밴드에 대한‘관심’과 ‘애정’임을 다시 한번 느꼈다.
4. 3집이 자체제작 되었다는데 이전 앨범과의 진행 과정에서의 차이점을 얘기해 달라.
기용: 1집과 2집은 인디 레이블에서 발매되었다. 인디 레이블 개념은 돈 안되는 음악도 음악이 좋으면 낼 수 있는 그런 시스템이다. 강아지 문화예술원에서 1집이 나왔고 2집은 쌈넷과 작업해서 나왔다. 그때는 녹음실을 빌려서 하는 시스템이었다. 홈레코딩이 아니라 녹음실을 임대해서 하는 것이라 녹음실 비용만 700, 800 이 넘어가게 된다. 음악 하는 사람이 그만한 돈이 없고 유통 루트가 없기 때문에 기획사를 끼고 하는 경우가 많다. 1, 2 집은 그런 식으로 음반이 나온 경우다. 근래는 홈레코딩으로 자신들의 레이블을 만들어서 하는 경우도 많다. 우리의 경우 인디 레이블과 작업을 해 본 결과 아무런 득이 없다는 결론이 났다. 그 사람들이 매니지먼트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우리들이 레이블을 만들어서 작업하게 된 거다.
혁조: 인디 레이블을 끼고 스튜디오를 렌탈을 하면 자금적 여유가 안되기 때문에 녹음 일정이 빡빡하다. 그런데 앨범은 시간은 정말 여유 있게 잡고 작업할 수 있었다.
기용: 돈을 천 이백, 천 삼백 정도 빌렸다. 이 돈이면 인디 레이블에서 음반하나 내는 돈과 비슷하다. 작업을 원하는 만큼 해보자는 생각이 있었다. 보통 인디 레이블을 끼고 일을 하면 사이가 안 좋게 깨진다. 서로 이해가 부족해서 그런 거겠지만 이미 2번씩이나 경험을 했기 때문에 그런 것도 하기 싫었다. 이번 앨범은 녹음만 10개월을 했다.
2집을 하면서 좀 정당한 평가를 못 받았다는 생각이 들어 오기가 생겼다. 3집은 좀 좋은 음반을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과 그러지 않으면 음악을 하기 힘들겠다는 판단이 섰다. 3집이 좋으면 4집도 낼 수 있는 거니까. 음악 하는 사람은 생활도 불안정 하지만 다음앨범에 대한 기약도 원래 없는 거다. 그나마 평가라도 좋게 받고 매니아 층에서라도 인정을 받아야 다음 앨범을 낼 수 있는 거다. 앨범 한 장 내고 사라져 가는 밴드들은 무수히 많다.
- 자체적으로 하면 힘든 부분도 많을 텐데 3집을 내고 나서 활동이 굉장히 활성화된 것 같다.
기용: Sha Label에서 스왈로우 1집이 먼저 나왔는데 그 앨범을 하면서 많이 배웠다. 어떻게 해야 겠다는 뭐 그런 생각들. 어제도 배웠고 오늘도 배웠고 4집은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다행히 3집 평가가 좋아서 앞으로 음악 조금 더 할 수 있을 것 같다. (웃음)
- 초반에 홈레코딩을 고려하지 못한 건 비용 때문인가?
기용: 비용도 그렇고 음질도 그렇고. 노하우가 쌓여야 하는 거니까.
- 홈페이지의 경우는 어떻게 구축했나?
소영: 아는 친구에게 부탁해서 구축을 했고 관리는 내가 하고 있다. 기용: 윤태씨가 디자이너니까 안에서 다 해결된다.
* 김기자의 되새김질: 이번 앨범에 대한 이들의 애착과 공들임을 잘 알 수 있었다. 스왈로우 1집을 국가로부터 지원을 받으면서 홈레코딩에 대한 노하우가 생기고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음반제작에 대한 지원은 밴드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단순한 금전 지원을 넘어서 밴드들이 홈레코딩을 통해서 자신들의 음반을 자체제작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계기가 된다면 이는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다. 이들의 말처럼 자신들이 표현하고 싶은 것들을 좀 더 리얼하게 이끌어낼 수 있는 장점도 있고 말이다.
5. 이전 앨범 중 유통을 살펴보면 B-side 프로젝트 라는 것이 있던 데 어떤 프로젝트 였는지 궁금하다.
기용: 지금 그런 식으로 음반을 판매했으면 그때보다 나았을 거다. 지금은 인터넷 쇼핑이 일반적이니까. 당시 2001년에는 사람들이 온라인으로 음반 구매를 많이 안 하던 시절이었는데 우리가 처음으로 온라인 사이트 쌈넷, 튜브 뮤직, 창고, yes24 등 4군데에서만 음반을 판매하는 일을 벌였다. 오프라인에서는 하나도 안 풀렸고 온라인에서도 그 4군데 이외에는 음반을 판매하질 않았다.
그 때문에 2집이 발매되고 나서도 음반이 발매되었는지 모르는 사람들도 많았고 발매사실을 알아도 몇 군데 오프라인 샵을 돌아다니다가 없으면 더 알아보질 않는 현상이 발생해 아쉬운 점이 많았다. 목숨걸고 판을 구하러 다니고 그런 상황이 아니니까. 좋게 말하면 시대를 앞서가는 시도였다. 그 다음에 그런 시도는 없었고 우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6. 일반인과 평론가들에게 매번 극찬을 듣는 허클베리핀이지만 일반인들이 접하기엔 조금 어려운 부분이 없지 않았다. 이번 3집은 비교적 접근성이 용이한 것 같은데.
기용: 좀 편안하게 가려고 했다. Time 도 그렇고 I know, 연도 그렇고. 하지만 편안하게 가다가‘욱’하기도 한다. ‘불안한 영혼’이라던가 ‘올랭피오의 별’에서는 가만두질 못하고 뒤에 가서 한번 뒤집고.
윤태 : 곡이 너무 좋다. 그런 곡을..
기용: 그때 교대에서 녹음을 했는데 녹음비가 700 진행비 까지 해서 거의 천 만원 가까이 들었는데. 한 두 달 정도 녹음을 했는데 쫓겨서 녹음을 하니까 마지막에 믹싱은 몇 시간만에 세 곡 네 곡씩하고 그랬다. 이해가 안 가는 시스템일거다. 어쨌든 그러다 보니 믹싱 상태도 그렇고 원하는 걸 못해서 후회가 많이 남았다. 다시 내고 싶다.
유감독: ‘불안한 영혼’을 어떻게 만들게 됐는지 궁금하다. 개인적으로는 이기용이라는 사람의 예민함과 섬세함, 까다로움 등을 느꼈으며 허클베리핀의 감성이 이런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용: 개인적으로 가사를 쓸 때 나름대로 솔직함의 끝까지 가본 곡들이 있다. 불안한 영혼도 그 중 하나다. 불안한 어떤 느낌들.. 술을 먹어도 해결이 안되고 사람들을 만나도 해결이 안 되는 것들이 개인적으로 좀 많다고 생각이 된다. 이게 언젠가는 나를 죽일 수도 있겠구나. 존재를 가장 갉아먹는 게 실제로 어디 아프고 그런 게 아니고 진짜 고치기 힘든 건 우울증이나 무기력증 불안함 이런 게 아닐까 한다.
유감독: 스왈로우에서 첫 곡은 어떤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이기용: 영화 음악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클래시컬 함을 좀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많았는데 그 곡은 전에 만들어 놓은 연주곡이었다. 현과 피아노를 첨가하고(혁조가 연주) 어레인지를 오래한 곡이다. 고급스러운 클래시컬한 작품을 만들려고 작정을 하고 작업을 한 경우다. 그런 부분들이 앞으로 음악 하는 데 항상 있을 거다.
7. 3집의 경우도 거의 전부 이기용씨가 작사, 작곡 작업을 했는데 어레인지나 연주 그런 부분이외에 멤버들의 색깔이 좀더 발현될 예정은 없는지?
윤태: 그건 어떻게 될 지 모르는 거다.
기용: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되겠지만 밴드의 음악은 1/n이 아니다. 멤버가 다섯이라고 1/5씩 나눠 갖는 게 아니다. 설령 1/5씩 나눠 갖더라도 굉장히 다른 측면에서 미묘한 방식으로 나눠진다. 결과인 X가 중요한 것이지 수학적인 1/n이 중요한 건 아니라고 본다.
혁조: 이 질문을 굉장히 많이 하는데 이것도 하나의 편견인 거 같다. 외국의 밴드를 봐도 우리 같은 스타일이 많다.
기용: 우리는 우리 나름의 방식이 있다는 얘기다. 당연히 그래야 하는 거고.
혁조: 글쎄. 잘은 모르겠지만 다섯 명이 전부 투입 되서 작곡 다하고 편곡 다하는 밴드가 그렇게 많진 않다. 자기 밴드에 맞는 방식을 선택하는 게 제일 중요한 거 같다.
기용: 아까도 얘기했지만 우리는 진정한 인디펜던트다. 유통만 빼고 전부 우리가 다한다. 1/n 방식이 틀리다는 거다. 나름대로 우리는 해피하고 돈만 있으면 된다.(웃음)
8. 그럼 현재 경제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비정규직을 갖고 있고(윤태, 혁조) 다른 사람은 음악에 전념하는 것인가?
소영: 그렇다. 오빠에게 도움을 받고 있다.
기용: 근근히 살아가는 거다. 버틴다고 해야하나. 앞일을 알 수 없다.
- 이런 부분이 한 밴드의 문제는 아니다. 많은 밴드들이 이런 문제들을 안고 있는데. 2000년에 나온‘날아라 밴드, 뛰어라 인디’라는 책을 보면 어떤 측면에서 희망은 없다는 종지부를 찍은 거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나?
기용: 참고로 우리는 김모씨, 안모씨 같은 사람을 혐오한다. 김모씨 같은 경우에는 예전에 ‘인디 레이블’만들어서 마치 인디의 전도사인양 했지만 지금 뭘 하고 있나? 문화평론 한답시고 한마디로 딴 거 하고 있는 거 아니냐. 그런 사람이 무슨 인디 음악에 대해 이야기할 자격이 있는가? 없다, 없는 거다. 오히려 그런 건 DGBD의 현숙이 누나나 그런 분들이 얘기할 자격이 있는 거다. 안 그래? 갑자기 확 올라오네.
윤태: 안모씨는 교수하고 있다. 우리가 아주 안 좋아하는 두 사람이다.
기용: 우리가 싫어하는 스타일은 뭐 좀 안다고 해서 말 굉장히 많이 하고 실제로 자기 잇속 다 챙기면서 빠져나갈 거 다 빠져나가는.. 이런 사람은 싫어할 수밖에 없다. 현실에서 우리는 이렇게 진흙 묻혀가며 굴러다니고 있는데 그렇지 않나? 그걸 밖에서 바라보고 평가하고 분석하고... 제일 싫다.
- 전에 3호선 버터플라이 인터뷰할 때 성기완씨가 이런 말을 했다. 3호선 버터플라이의 음악은 (천만명의 분을 풀어주는 음악은 아니기 때문에) 사회적 효용가치의 측면에서 보면 그 모자라는 부분은 각자가 노동을 해서 충당한다는 것은 당연하다는 얘기가 있었다. (천 만 명이라는 숫자는 그냥 다수를 상징하는 상징적인 숫자이다)
기용: 그게 슬픈 현실이고 그런 자각을 하게 되기까지 아픈 흘러감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천 만 명은 좀 그렇지만 몇 천명은 충분히 좋아할 수 있는 음악이다. 방송에 나오면 몇 만 명도 가능하고. 우리가 천 장 팔려면 이렇게 안 한다. 길거리 가다가도 '만' 이라는 얘기만 나와도 흥분하고 그런다.
- 같은 뮤지션 입장에서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했다.
윤태: 아니야 그 사람 부동산 투기했을 꺼야. 재테크 했을 꺼야. 우리도 앨범 판 돈으로 당장 증권사고 재테크 해야 된다니까.
유감독: 개인적으로 비판들을 좀 많이 했으면 한다. 김기자가 인터뷰를 갈 때 많이 따라가서 밴드들의 이야기를 듣는데 거의 비판들이 없다. 다들 평화주의자라 그런지. 싫다 좋다를 떠나서 비판은 발전을 할 수 있는 걸 찾을 수 있는 거다. 나도 밴드들을 만나면 많이 비판을 하는데 왜 이렇게 게으르냐, 안 된다고 명제를 정해놓고 하지 않느냐, 또 다른 방식의 접근 방법이 있지 않느냐 그런 이야기들을 하는데 사실 그건 내가 그 판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판이고 아는 사람들이 발전이 없다. 모르는 사람은 그냥 열심히 한다. 앞날의 비전이나 그런 게 아니라 모르니까 열심히 하는 거다. 조금 더 다른 시각들이 있었으면 한다. 지금 올라온다고 하는데(화가 나서) 그런 모습들, 그런 얘기들이 좋은 것 같다. 그래야 발전 한다.
*김기자의 되새김질: 사실 많은 밴드들이 인터뷰 때에는 안 좋은 이야기는 거의 하질 않는다. 이 씬에서 활동하다보면 분명히 뭔가 아니다 싶은 것들이 있을 텐데도 대부분은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두루뭉실하게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아무래도 매체임을 의식하고 그러는 것 같은데 허클의 경우는 그런 생각들에서 자유로운 팀이었다. 그리고 어떤 방법을 찾아서 열심히 움직이고 있다.
9. 허클베리핀이 결성 된지 시간이 꽤 흘렀다. 1997년에 만들어 졌으니. 변한 것들이 많을 거 같은데. 음악적인 것일 수도 있고, 환경적인 것일 수도 있고 씬 자체일수도 있고.
기용: 이런 게 있다. 일본이나 이런 쪽에 음반을 낼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최근에 들어서 욕심이 많이 든다. 조금 더 여유가 되면 디밀고 싶다.
- 씬은 어떤 것 같나?
기용: 거의 씬이 만들어질 때부터 했다고 볼 수 있다. 클럽이라는 게 처음 생길 때부터. 윤태: 일단 환경이 너무 좋아졌다. 조명이나 사운드도 그렇고. 전에 큰 공연장이나 가야 엔지니어가 있어서 콘솔 조정해 주고 그랬는데 클럽엔 전무 했다. 지금은 클럽에도 엔지니어가 따로 있다.
기용: 조명도 옛날에는 뭐 그런 게 있나. 스팽글 때도 그냥 등 하나 켜놓고 하고 바에 앉아서 연주하고.
혁조: 그게 한번 쏵 가라앉았다가 사운드 홀릭이랑 DGBD생기면서 환경이 바뀌고 진짜 좋은 밴드들도 다시 나타나는 것 같다. 요즘엔 공연 보는 것도 재밌고 많이 좋아졌다.
윤태: 초창기에 96, 97년도에 한참 펑크가 뜨고 드럭이 뜨는 바람에 하드록 하는 양반들이 펑크를 싫어했다. 지금은 그런 것들이 없어지고 다양해진 것 같다. 전에는 튜닝을 못하는 밴드들도 있었다.(웃음) 지금은 대체적으로 실력들이 많이 향상됐다.
10. 여기저기서 록 페스티벌들이 끊이지 않고 열리고 있다. 이런 상황들을 어떻게 보나?
허클: 우리 나라에 페스티벌이 있는가? 없다. 단발적으로 생겼다 사라지는 행사가 페스티벌인가? 페스티벌이라면 다른 건 고사하고 기본적으로 운영이 잘 되고 지속성이 있어야 한다. 팀을 많이 세우는 것도 좀 문제고 사운드도 뭉개지고 모니터도 안 돼 좋은 음악이 안나오는데 무슨 페스티벌이냔 말이다.
유감독: 무슨 말인지 충분히 알겠다. 하지만 밴드들도 주인공이라는 생각이 없는 것 같은데 그냥 개런티 받고 행사에 출연하는 정도로 생각하는 면도 다분히 있지 않나? 공연만 하고 가버린다던가.
허클: 그건 우리가 주인공이라는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동두천은 최악이었다. 우리가 인정하는 페스티벌은 쌈지사운드 페스티벌 정도인데 물론 성격이 좀 다르긴 하지만(경연을 통해 올라오는 형식이기 때문에) 밴드들에게 신경을 굉장히 많이 써준다. 사운드 적인 부분도 괜찮고. 사실 사운드는 장비의 문제보다도 엔지니어가 무대에 서는 밴드들의 음악만 들어보면 끝나는 거다. 물론 장비업체 선정도 아주 중요하다.
* 김기자의 되새김질: 기획에 참여하는 사람으로써 여러 가지로 주의 깊게 들어야 할 게 많았다. 물론 그런 이야기를 들으려고 이런 질문을 한 것이기도 한데 록 페스티벌의 홍수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인정하는 페스티벌은 하나뿐이라는 것이 거꾸로 지금의 상황을 이야기해 주는지도 모른다.
좋은 사운드를 위한 준비와 원활한 진행, 밴드를 위한 배려들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는데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생각해보면 하이서울 때에는 테크니션 팀을 따로 두고 셋트를 두 개 마련해 진행해 셋팅 시간이나 진행 부분에서는 무리가 없었지만 밴드에 대한 배려라던가(대기실내지..) 사운드에 있어서는 부족한 게 사실이었다. (개인적으로 사운드도 맘에 안 들었다.) 이런 대화를 통해서 우리의 부족함을 알고 하나씩 바꿔나갈 것이지만 이렇게 소통을 하는 일 자체가 흔하지 않은 일임을 비추어 볼 때 록 페스티벌 전체 씬의 문제는 갈 길이 먼 것 같다. 밴드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이런 지적들을 해주고 함께 만들어간다는 생각을 가질 때 긍정적인 변화가 좀 더 빨리 일어날 것 같다. 물론 이건 서로가 노력해야 가능한 일이다.
11. 국가에서 밴드들의 앨범 제작비를 지원하는 정책이 있는데 스왈로우도 지원을 받은 걸로 알고 있다.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 한쪽에서는 앨범 제작에 금전적인 지원을 하는 것이 단발적이라는 지적도 있어 공연을 만들어 무대에 서는 밴드에게 공연 개런티로 지원을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는데
허클: 스왈로우 때도 그랬지만 이번 3집은 문화 컨텐츠 진흥원에서 녹음비를 지원 받아 진행된 것이다. 그 돈이 없었으면 앨범을 낼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입장에서는 공연이 더 단발성이 아닌가 싶고 정말 필요한 제도이다. 지금까지 총 65개 밴드 정도 지원 받은 걸로 알고 있다.
* 김기자의 되새김질: 전에 한국대중음악연구소 주최로 ‘대중음악’관련 포럼이 있었다. 자료실에 보면 자료가 올려져 있다. 그때 인디 밴드들에 대한 앨범 제작비 지원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부정적인 반응이 많았다. 홍보도 못할 사장될 앨범을 만드는데 돈을 지원하는 것은 일회적이고 단발성이라는 것이다. 되려 공연을 만들어서 밴드들을 무대에 세우고 개런티를 지급하는 형식으로 일이 진행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그 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허클의 이야기처럼 홈레코딩의 노하우를 쌓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밴드가 홍보와 같은 부분을 자체적으로 잘 소화해 낸다면 앞으로도 이런 방식으로 지속되어야 하는 것이 바람직 할 것 같다. 물론 예산이 늘어 두 가지가 같이 진행된다면 더 좋겠지만.
12. 앨범 발매 단독공연이 8월 초에 있던데. 공연 하니까 갑자기 생각난건데 나라에서 소규모 공연장을 지었으면 좋겠다 한 300∼400석정도 되는 공연장으로 무료로 대여해주면 밴드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지금은 단독공연을 하려고 해도 대관비와 제반의 것들을 생각하면 비용이 만만치가 않다.
* 김기자의 되새김질: 원래 국가에서 대중음악 전문 공연장을 지을 계획이 있었다. 5군데 정도 공연장을 짓는 다고 했는데 문제는 몇 천 석의 공연장을 지어놓은 것이다. 그런 공연장을 채울 수 있는 사람은 인기가수가 아니고선 힘들다. 밴드들에게 필요한 건 아까 나온 얘기처럼 몇 백 석 규모의 공연장인데 국가에서는 그런 사실을 전혀 알질 못했다. 아마 지어놓고 무척 뿌듯해 했을 텐데 이런 갭을 줄이고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지 않으면 이런 일은 반복될 것이다. 밴드 앨범 제작 지원비 같은 경우에는 이쪽 전문가들을 뽑아 심사를 통해 선정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대중음악 전문공연장을 지을 땐 왜 감수팀 같은 게 없었는지.
13. 혹시 인터뷰에 추천하고 싶은 팀이 있는가? 2004.9.9
* 더 리얼한 인터뷰 이야기와 비주얼은 ‘김기자의 인디 속 밴드 이야기’ |
첫댓글 1시간남짓 장대한 허클 인터뷰 너무 잘 읽었습니다, 김기자님, 상상공장 님, 유감독 님..( 어떤 분이신지 무지 궁금해요 ) 수고 많이하셨구요, 예전엔 전혀 몰랐던 허클 이야기를 알 수 있어서, 너무너무 좋았습니다
김기자 님, 이번 허클 인터뷰 저희 3호선 버터플라이 카페에 퍼 가도 될까요 ~~?? 출처는 명시하겠습니다.. 예전, 허클 멤버(현, 3호선 버터플라이 멤버)분들 애기 뿐만 아니라, 이번 인터뷰가 예전부터 읽어본 허클 인터뷰 중에, 가장 알차고 진솔한 인터뷰 인 것 같습니다.. 부탁 드릴께요 ^^
하하 제가 좋아하는 밴드들은 다 인터뷰를 하시는군요ㅎㅎ스키죠,프리마켓,에 이어 허클베리핀까지 아 저두 이거 따른데 펴가두 될까여?
최고의 인터뷰인 것 같군요......좋은 기사 감사해요..^^
네, 출처를 밝히시면 퍼가시는 것 가능하구요. 출처는 '김기자의 인디 속 밴드 이야기' (http://cafe.daum.net/Indiestory) 이렇게 남겨 주세요. 다른 인터뷰들도 출처를 밝히고 퍼가지는 것 가능합니다. ^^ 부족한게 많은데 관심 감사드립니다. 더욱 분발하겠습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인터뷰네요~ 잘읽었습니다 ^ ^
기사가 점점 더 잘 읽히는게 실력이 느시는것 같아요~
저도 퍼가고 언니 배너 좀 뿌릴께요 흐뭇~
디스코그라피에 베이스 장혁조씨가 세션으로 나온건 잘못된겁니다. 디자인하시는 분이 착각하신겁니다. 정정하구요. 조만간 디스코그라피 재작업해서 다시 올리겠습니다.
예전에 신해철 옹의 고스트스테이션에 "인디 스포트라잇"에 허클이 출연했을때의 이야기에 다른 의미있는 이야기들이 더해져 깊이 있게,,,잘 읽었습니다. 감사해요,,,
이제는거의 인디말하면 허클베리핀아닌가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