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익희선생 묘 |
☞ 조병옥박사 묘역을 돌아 나와서 주변의 사찰 한 곳을 둘러보고, 아카데미하우스로 향했습니다. 아카데미 하우스 주변의 북한산 자락에 선열들의 묘지들이 여러 곳 있어서 맨 위에 위치한 해공 신익희 선생의 묘 부터 둘러 보았습니다. ☞ 신익희 선생의 묘역도 북한산 매표소를 통과해야 합니다. 매표소를 지나서 조금만 올라가면 해공 선생의 묘역이 보입니다. 묘역을 둘러보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합니다. 아주머니 두 분이 소풍을 나오셨는지, 묘 역 한켠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싸 오신 음식을 드시면서 담소하고 계시더군요. |
▲ 묘역 입구의 계단 | ▲ 계단 위 양옆에 서 있는 호석 | ▲ 묘역 좌측 전경 |
☞ 묘역 입구의 계단을 오르면 양 옆에 호석 두 마리가 이빨을 드러내고 무섭게 참배객을 맞이 합니다. 묘역 좌우에는 망주석과 문인석이, 중앙에는 장명등이 있으며, 묘역 좌측에는 묘비(海公平山申公翼熙之墓)가 있습니다. |
▲ 해공 신익희선생 묘 | ▲ 신익희선생 묘역 전경 |
☞ 신익희 선생의 묘역 오른쪽에 다른 묘가 보이길래 가 보았습니다. 신익희 선생의 아들인 신하균(申河均) 의 묘였습니다. 신익희 선생의 아들인 신하균은 해공이 대통령 후보로 나온 해인 1956년에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부자(父子) 국회의원이더군요. - 2004.09.05 - |
▲ 조병옥박사 묘역 우측에 위치한 아들(신하균)의 묘역 전경 |
신익희(申翼熙)
선생의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자는 여구(汝耉)이며
호는 해공(海公)이다. 경기
광주에서 출생했다. 1908년 한성외국어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의 와세다대학에 들어가 한국 유학생들과 학우회를 조직하고 총무 ·평의회장 ·회장 등을 역임,
기관지인 학광지를 발간하여 학생운동을 하였다. 1913년 졸업과 동시에 귀국, 서울 중동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7년
보성법률상업학교 교수가 되었다. 1918년 최린·송진우 등과 독립운동의 방향을 논의, 1919년 3·1 운동 당시에는 해외와의 연락 임무를 맡았다. 그 해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수립과 동시에 내무차장·외무차장·국무원 비서장·외무총장 대리·문교부장 등을 역임, 내무부장으로 있으면서 광복과 더불어 귀국, 김구 등 임시정부 계통과는 노선을 달리하여 정치공작대·정치위원회 등을 조직하여 이승만과 접근하고, 1946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위원장, 자유신문사 사장, 국민대학 초대학장 등을 겸하다가 그 해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대의원에 피선, 1947년 의장이 되었다. 지청천의 대동청년단과 합작해 대한국민당을 결성하고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부의장이 되었다가 의장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자 의장에 피선, 정부수립 후 이승만과 멀어지기 시작한 한민당의 김성수의 제의를 받아들여 1949년 민주국민당을 결성하고 위원장에 취임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 다시 국회의장에 피선되고 1955년 민주국민당을 민주당으로 확대·발전시켜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다. 1956년 민주당 공천으로 대통령에 입후보, 자유당의 이승만과 맞서 호남지방으로 유세가던 중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급사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발췌 - |
신익희 생가(경기도 기념물 134호) |
☞ 신익희 선생의 생가는 허난설헌의 묘를 찾아 헤메이다가 동네 입구에 신익희선생 생가 표지판이 있어서 가 보았습니다. 도로에서 마을로 들어가면 신익희 선생의 생가가 보입니다. 생가 입구에는 불에 탄 목재 들이 가득 샇여 있었습니다. ☞ 생가 안으로 들어가 보면 2002년 12월, 화재로 안채가 전소되어 잔재들만 가득하며, 담장 뒤로 돌아가 보 면 여기 저기에 해공 선생이 써 놓으신 글이나 어록들이 크고 작은 돌에 새겨져 있습니다. 제가 다녀 온 몇 개월 후에 안채가 깔끔하게 복원되었다는 기사가 있어서 아래 소개합니다. - 2004.01.03 - |
▲ 신익희선생 생가 앞 새로 포장된 도로는 해공로라고 명명되었으며, 입구에 돌 표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
☞ 신익희선생 生家 불… 63세손자 참변[동아일보 2002-12-24 19:03] 신문기사 일부만 발췌하면... "해공 신익희(海公 申翼熙·1892∼1956) 선생의 생가에서 불이 나 해공 선생의 손자가 숨졌다. 손자는 지난달 세상을 뜬 어머니의 상(喪)을 지키던 중 불이 나자 아버지를 구하려다 변을 당했다.24일 오전 5시경 경기 광주시 초월면 서하리 해공 선생의 생가에서 원인 모를 불이 나 손자 복영씨(63·경기 군포시 산본동)가 숨지고 경기도기념물 134호로 지정된 생가 중 30평 규모의 안채(목조 기와집)가 전소됐다. 1867년 지어진 해공 선생의 생가는 안채와 바깥채(사랑채)로 이뤄져 있으며 1992년 경기도기념물로 지정됐고 유품으로는 목판과 고서, 휘호(친필) 등이 사랑채에 보존돼 있다. 해공 선생의 자녀 3남4녀 가운데 현재 장남 창현씨와 덕현씨(72)만 생존해 있다." |
▲ 화재로 전소되었던 곳에 지금은 깔끔하게 복원(아래 사진)이 되었네요. |
정치가이며 독립운동가인 해공 신익희(1894∼1956) 선생의 생가이다. 가옥은 안채와 바깥채로 구성되어 있는데,
원래 지금 있는 자리에서 동남쪽으로 약 200m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한다. 고종 2년(1865) 대홍수로 집이 파손되어 옮긴 건물은,
전체적으로 20세기 초에 크게 고쳐 지은 것으로 짐작한다. 안채는 T자형 평면을 이루는데 가운데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안방을 두고 왼쪽에 건넌방을 두었고 안방 앞으로는 부엌을 두었다. 바깥채는 ㄱ자형 평면으로 가운데에 대문을 두고 왼쪽에 2칸 사랑방을 두었다. 이 집은 전통 한옥의 외관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20세기 초 경기지역 중 소지주 계층의 가옥 형태를 취하고 있다. |
|
▲ 담장 뒤로 들어가 보면 해공 선생이 써 놓으신 글이나 어록들이 크고 작은 돌에 많이 새겨져 있습니다. |
☞ 신익희 생가 공매위기[한겨레 2004-12-21 23:12] "고손자 증여세 못내 가압류 2002년 12월 불에 탄 뒤 올해 5월 다시 지은 경기 광주시 초월면 서하리 해공 신익희(1894∼1956) 선생의 생가(경기도문화재 제134호)가 공매처분될 위기에 놓였다.안양세무서는 지난 9월30일 해공 생가 터 552평에 대해 근저당을 설정한 뒤 지난달 18일 압류했으며, 세금을 내지 않으면 한국자산관리공사를 통해 공매 절차를 밟겠다고 21일 밝혔다. 생가는 해공 선생의 증손자인 복영씨가 소유·관리해왔으나 화재 당시 복영씨가 사망하면서 지난 5월 복영씨의 아들이자 해공의 고손자인 동우(35·군포시)씨에게 상속됐다. 그러나 이 때 상속받은 집과 다른 재산에 부과된 세금은 모두 7억원에 이르렀고, 동우씨가 상속·증여세를 내지 못하면서 이 집도 압류됐다. 특히 광주시가 지난 5월 토지투기지역으로 묶이면서 상속·증여세가 실거래가로 부과되는 바람에 후손들의 세금부담은 더욱 늘어났다. 1992년 경기도 문화재로 지정된 해공 생가는 불에 탄 뒤 경기도와 광주시가 2억1천만원을 들여 다시 지었다. 이와 관련해 광주시 관계자는 “복원된 생가에 대해 후손들과 기부채납 문제를 논의하고 있고 종중에서도 이 문제 해결에 나선 것으로 알고 있다”며 “생가와 건물과 토지가 모두 경기도 문화재이므로 소유자가 바뀌어도 훼손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
신익희선생 옛집은 서울시 기념물로 지정되어... |
|
신익희선생 묘 위치도 |
지도상으로는 신익희선생 묘가 이준열사 묘의 위에 표시 되었으나 지도 위치가 바뀌어있습니다. 실제로 가 보면 신익희선생 묘가 더 산 위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지하철 4호선 수유역에서 1번 마을버스나 1119번 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하차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