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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은 없다.
우리나라의 산줄기 백두대간…..
조선 문종 때인 1451년에 완성된 고려사에는 9C 말 신라의 승려이자 풍수지리가인 도선의 저서
옥룡기와 관련한 글이 나오는데, 거기에는 “우리나라가 백두에서 시작하여 지리에서 마쳤으니
그 형세가 물을 뿌리로 하고 나무를 줄기로 한 땅인지라...”라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이는 우리 선조들이 백두대간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최초의 기록으로
우리나라의 산줄기가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지리산에서 끝을 맺는다는 관념의 반영이기도 하다.
그 후, 백두대간은 이익의 성호사설이나 신경준 이 편찬했다고 알려진 ‘산경표’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우리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우리나라를 동서로 가르며 우리나라 모든 산과 산줄기들의 근간이 되고
모든 강들의 시원(始原)이 되는 백두대간.
우리 선조들이 기대어 살았고 우리 민족의 애환이 녹아 있는 산줄기들의 아버지 격인 백두대간.
산맥(山脈)이라는 개념의 등장
제국주의 열강들이 호시탐탐 조선땅을 노리던 조선 말기, 일제는 1876년 강화도조약을 계기로
조선땅의 지질조사를 끈질기게 요구한다.
1897년 화폐제도를 금본위제도로 바꾼 일제는
조선의 금을 캐가기 위하여 광분하던 1900년 겨울
고토분지로(小騰文次郞)라는 일본 지질학자를 조선으로 파견한다.
금을 비롯한 조선의 지하자원 수탈을 목적으로 들어와 교통 수단도 변변치 않던 시절 고토는
조랑말 4마리와 6명의 대원 등 빈약한 규모로 은밀하게 지질조사를 하게 된다.
그 후, 고토는 1902년 겨울 재입국하여 같은 방식으로 조사를 실시한 다음
총 266일이 걸린 두 차례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조선산악론(An Orography Sketch of Korea)
및 지질구조도’라는 논문을 동경제국대학 논문집에 발표하게 되는데 이때가 1903년이다.
즉 고토는 조선땅 동서 1,000리, 남북 3,000리에 대한 지리 및 지질 검토를
단 266일만에 마무리하였고(1903년)
그 후 전도와 산악론, 지리지 등이 연속적으로 발간되는 데
단 2년이라는 시간 밖에 소요되지 않았으며(1905년)
후술하는 바와 같이 대한제국 학생용 교과서에 오르는 데에도
단 5년 밖에 소요되지 않았던 것(1908년)이다.
고토는 이 논문에 있는 지질구조도에 우리나라의 전통 산줄기 개념인 백두대간을 위시하여
1정간 13정맥 등 15개의 산줄기를 36개로 분해하여 각 산맥에 임의로 이름을 부여하면서,
이 중 우리나라 산줄기의 근간을 이루는 백두대간을
‘마천령산맥’, ‘함경산맥’, ‘태백산맥’, ‘소백산맥’ 등 4개의 산맥으로 토막을 내었다.
고토분지로의 "백두산을 없애자."
특기할 만한 것은 민족의 영산이며 사상의 지주인 ‘백두산’은
위 지도에 표기조차 되지 않았음은 물론 다른 산들과는 달리
산맥 이름에도 ‘백두’라는 단어를 올리지도 못하고
한낱 고개에 불과한 ‘마천령’에 그 이름까지 빼앗긴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여기에 더하여 고토는 백두산을 철천지 원수로 여겼는지
자신의 지질구조도에서 황해도나 전라남도, 경상남도는 바둑판처럼 지질구조선을
산맥이라는 이름으로 그어놓은 반면 백두산 부근은 허허벌판으로 놔뒀으며
마천령산맥의 지질구조선은 아예 백두산에 와 닿지도 않는다.
백두산에 대해서 이상하리만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던 일본은
백두산의 최고봉인 將軍峰을 兵使峰으로 격하시켜 부르다가
1909년에는 간도협약으로 백두산을 중국에 넘기 버리더니
그 이후에는 다시 大正峰이라고 자신들의 왕 이름을 따서 부르는 등 만행을 저지르기에 이른다.
한편 고토가 논문을 발표한 이듬해인 1904년 정치지리학자인야쓰쇼에이(矢津昌永)는
바둑판 같았던 고토의 산맥도를 ‘한국지리’라는 책을 통하여 어느 정도 정리를 하였으나,
여전히 소백산맥은 부채살 모양을 하고 있었으며
1905년 대한제국이 통감부 체제로 들어가면서
1906년 ‘실업실찬지리’에 이어 1908년 ‘고등소학대한지지’라는 지리 교과서를 편찬할 때
비로소 오늘날의 지도와 유사한 산맥도가 실리게 된다.
고토의 지질구조도 야쓰쇼에이의 한국 지리 실업실찬지리
상황이 이렇게 급박하게 전개될 때 1906년 정연호는 ‘최신고등대한지지’라는 교재에
우리의 산줄기를 있는 그대로 싣기는 하였지만 통감부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었으며,
1910년 육당 최남선에 의해 우리의 고전을 보존하기 위하여 설립된 조선광문회에서
1913년 편찬한 ‘산경표’에 실린 우리 산줄기 이름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지질구조선 = 산맥
이로써 산과 강을 기준으로 하여 그려진 실제 지형과 일치하는
자연스러운 지리개념인 백두대간 등 우리의 산줄기는 없어지게 되었고
눈에 보이지 않는 땅속의 지질구조선을 근거로 하여
중간에 강에 의하여 끊기기도 하며 실제 지형과 일치하지도 않는
인위적이고 가공된 지질학적 선(線)인 산맥이 자리잡게 되었다.
이는 일제의 교묘한 음모가 지리학에 앞서 지질학을 들여보냄으로써
자원 침탈의선두에 서게 되었고 결국 이 입양아가 적자를 몰아낸 꼴이 되었으며
지질학이 우리 전통 지리학을 밀어내면서 지리학의 뼈대로 자리잡게 되는 결과를 빚게 되었고
마침내 우리나라 국토인식의 왜곡, 문화전통의 왜곡, 역사의 왜곡 등
총체적 민족자존심의 왜곡 내지는 상실이 시작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백두대간 등 우리나라의 전통 산줄기 개념은 잊혀지게 되었고,
우리는 고토의 산맥체계가 산맥방향을 잘못 잡고 산맥의 성인(成因)이 과학성이 결여되었음에도
이를 무비판적으로 학교 교육을 통하여 인문지리와는 무관한
지질학적 개념인 ‘산맥‘을 전수 받았으며 우리나라의 지리 학자들 역시
산경표의 존재도 모르는 채 아무런 문제 의식 없이
그저 고토가 교육한 내용대로 땅속의 지질구조선을 산맥이라는 이름으로 교과서에 올리고
그것들을 가르쳤던 것이다.
산경표(山經表)의 재등장
그러던 것이 1980년 이우형이라는 지도쟁이에 의해 ‘산경표’가 우연히 발견된 이래
우리의 산줄기는 주로 지리학자 이외의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았으며
특히 노웅희, 조석필, 박성태 같은 이들은 책자를 통해 우리 산줄기 되살리기의 불씨를 지폈고
‘전국 지리교사들의 모임’을 중심으로 ‘우리 산줄기 이름 되찾기’ 운동도 전개 되었으며
2004년에는 국토연구원 김영표 부원장 등 연구원들에 의하여 GSI기법을 사용한
‘새산맥도’가 발표되기도 하는 한편
‘백두대간보호에관한법률’이 공포되어 2005년부터 시행됨으로써
어느덧 백두대간은 공식용어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국토연구원에서는 고토의 조랑말 대신 인공위성을 사용했고,
거기에 컴퓨터로 계산된 각종 수치와 정보를 덧보탰으며
한반도를 가로 세로 각각 30m 짜리 정사각형으로 나눈 다음에
이 정사각형의 한 가운데의 높이를 쟀다.
이렇게 실측된 수치에 위성 영상을 겹쳐 넣고,
지질학적인 분포도를 또 겹쳐 넣었고
여기에 기존에 알려져 있는 해발 200m이상 산봉우리와
고개 5103개의 좌표를 기록했다.
고토가 조랑말을 타고 다니면서 288일 동안
해안이나 강가 혹은 고개의 절개지 등을 다니면서 주운 돌로 기록한 논문보다
훨씬 정교하고 과학적이지 않은가?
이에 앞서 북한은
1996. 1. "우리나라의 산맥 체계에 일제잔재가 많아 남아 있어서…"라고 하면서
산맥체계와 이름을 재정비하는 작업에 착수하여
백두대간을 ‘백두대산줄기’라는 이름으로 복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질구조선을 산맥이라고 하며 제 자리를 고수하고 있는
우리나라 지리학자들은 요지부동이었고
이들의 도움으로 태백산맥은 여전히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
하지만 산맥이 옳다면 그게 일본인이 만들었건 미국인이 만들었건
그게 문제 될 리는 없을 것이다.
이러는 사이 산맥은 아직도 지리교과서의 한 쪽을 차지하고 있건만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이미 ‘태백산맥 종주’라는 단어는 없어져 버렸고
이 자리를 ‘백두대간 종주’라는 슬로건으로 벌써 30,000명 넘는 이들이 종주를 마쳤고
지금 이 순간에도 수 백 명의 산꾼들이 우리의 산줄기를 밟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 답사가 계속될 백두대간.
독일의 지리학자 훔볼트(humboldt)는
안데스 산지를 2만번 정도 오르내리면서 안데스 산지를 연구하였고,
페루 해류에 대해 연구를 하여 그 업적을 인정받아
페루해류를 훔볼트 해류라고도 하지 않은가.
우리나라의 지리학자들은 과연 백두대간을 걸어보기나 하였는가.
아니 그 백두대간이 그렇게 싫다면
태백산맥이나 차령산맥 혹은 노령산맥이라도 걸어보기나 했는가.
걸어 보았으면 그 산맥의 실체를 직접 확인해 보았는가.
지리 과목이라는 게 책상머리에 가만히 앉아서 연구하는 과목은 아니지 않는가.
지질구조선(地質構造線)의 다른 이름 山脈
산맥의 종주국이라 할 일본마저도 포기한 개념인 지질구조선을 근간으로 한 산맥 개념.
왜 지구과학 혹은 대학에서나 배워야 할 지질학 개념인 산맥을 굳이 ‘생성 원인 운운’하며
‘지질구조선’을 들먹이면서 중고등학교는 물론 초등학교에서까지
지리나 사회시간에 배워야만 하는 걸까.
산의 연속인 산(山)이 하나의 혈관(脈)으로 이어져 있는 참 의미의 山脈이 아니고
강에 의하여 몇 번이고 단절되었어도 여전히 산맥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야 하는 산맥.
일제의 잔재인 태백산맥
아직도 태백산맥이 백두대간의 자리를 꿰차고 눌러 앉아 있는 이유는
혹시 고토가 가르쳐 준 우리나라가 토끼 모양이거나
노인이 중국을 향해 절을 하고 있는 형상(사대주의와 지정학적 운명론)이라는 말에서 비롯된
"태백산맥이 우리나라의 등뼈인 척량산맥(脊梁山脈)"이라는 말과
"태백산맥이 우리나라를 동서로 가르고 있다."는
허무맹랑한 일제의 가르침을 아직도 신봉하고 있어서 그러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우리나라의 산맥이라는 개념은
에베레스트나 록키 혹은 안데스 같은 산맥의 개념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
그런 산체(山體)와 같은 산맥을 우리나라의 작은 산줄기와 비교하면서 가르치는 것은
무언가 은폐하고 싶어하는 것이 있는 것은 아닐까.
다른 영역에서는 일제의 잔재들을 많이 청산하였지만
아직도 태백산맥 등 산맥들이 백두대간 등 우리 산줄기들을 대신하여
굳건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이유는 고토의 이론이 옳아서가 아니라
바른 대안을 정립해 보겠다는 우리의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의지가 부족해서는 아닐까.
결론
우리가 산맥을 배우는 목적은 지질구조나 조산운동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산맥이 우리 생활에 어떻게 관련되어 있고
구체적으로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알기 위한 방편으로 배우는 것이다.
또한 산맥의 주향(走向), 그 시작과 끝, 그 산맥에 있는 산들을 궁금해 하고
그것들이 우리 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파악하는 도구가 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모든 것들을 대변해 주지 못하여 땅맥 혹은 지맥으로 불러야 온당할 우리나라의 산맥.
우리가 일제의 지배만 받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통일이 되었더라면 분명히 청산되었을 산맥.
일본이 아직도 제국주의의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이 나라의 미래를 책임질 우리의 아이들에게는 고토가 남기고 간 산맥과 산맥 이름 대신
올바르고 제대로 된 우리의 산줄기들을 쉽게 가르쳐 줌으로써 민족적인 자긍심을 되살리고
백두대간과 거기서 분기한 각 산줄기
그리고 거기서 발원한 강들에 기대어 살아왔던
우리 선조들의 역사나 지리, 문화 등을 재조명하고
우리 민족의 염원인 통일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그것을 되새겨야 할 시점이 아닐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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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공부함니다. 앞으로 백두대간으로 불러야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모든 국민이 백두대간을 노래 부를
그런날을 만들어 나갑시다
좋은글 바른 정보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많은 전파도 부탁드립니다
많이 배우고 갑니다.
읽어주시고 동감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기회닿는대로 많은 전파도 부탁드립니다
폭염이 계속됩니다
건강유의하시고 활기찬 발걸음 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