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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건국 설화]
(베트남 참파의 미손유적에서 발견된 658년의 산스크리트어 비문에 적힌 중국사신의 전언)
* 인도의 한 브라만계급의 카운디냐(Kaundinya)라는 청년이 꿈속에서 창조의 신 브라흐마의 계시를 받는다 "동쪽으로 가서 새 땅을 찾아라! 가는 길 큰나무 밑에 활과 화살이 있을 것이다. 가지고 가라!" 카운디냐가 탄 배가 캄보디아 지역을 접근했을 때, 나신의 여자군대로 구성된 함대가 카운디냐를 막았다. 카운디냐가 신비로운 화살을 쏘자 이 용맹스러운 나체의 여자들은 쉽사리 굴복되었다. 그들의 대장은 소마(Soma)라는 나신의 아름다운 공주였다. 이 발가벗은 공주를 그냥 처다보기가 민망해서 카운디냐는 입고 있던 천으로 된 겉옷을 벗어 공주의 아래를 가려주었다. 공주는 무릎 끓고 자지 몸을 가려주는 훤칠한 청년의 모습에 홀딱 반해버린다. 그리고 사랑에 빠져 곧 결혼을 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소마공주는 나가라자 (Nagara.ia). 즉 용왕의 딸이었다. 지참금 대신 응왕은 물에 잠계 있던 대지의 물을 들이켜 새 땅을 드러나게 만든다 그리고 그때 땅을 카운디냐에게 지배하라고 준다. 그 왕국은 캄부자(Kambuja)라고 불리게 되었다 캄부자는 "캄부의 후에들‘ 이라는 뜻이다. 캄부와 카은디냐와 관계가 있거나, 쩐라왕국의 시조라고 불리우는 깜부싸와 얌푸와와 관계가 있다고 추론되고 있다
* 우리는 이 건국신화이서 많은 사실을 읽어낼 수 있다
첫째, 캄보디아의 고대문화는 인도로부터의 이주민세력과 이곳 지역의 토착세력과의 습합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아마도 이 지역의 지배층은 인도의 브라만이나 크샤트리야계급, 혹은 인도의 문화를 전승한 뱅갈지역의 평범한 사람들일 수 있다.
둘째, 캄보디아에는 이 인도문화세력에 대항하는 원시적인 토착세력이 있었으며, 이들은 주로 나가(Naga)신앙을 토템으로 하는 종족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인도로부터의 문화세력에 곧 굴복하고 말았고 평화로운 화해의 길을 걸었다. 최소한 인도로부터의 지배자들은 잔인하지 않았으며 이 신친지에 새릅게 정착하려는 의지를 지닌 사람들이었다.
셋째, 캄보디아 지역은 지금으로부터 6,00()년 전만 해도 물에 잠긴 지역 이었는데 메콩델타로부터의 침적으로 인하여 응기된 것이며, 농사에 이상적인 미네랄이 품부한 지대로 변모한 것이다. 지금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나무로 각주(脚柱)를 만들어 한 층을 높인 원두막스타일의 집에서 살고 있는데, 이런 가옥구조는 수상에서 살았던 그들의 과거체험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러한 체험이 용왕의 물들이킴으로 표현된 것이다
넷째, 이 지역의 사람들은 완전 나체로 살았으며 문명의 훈도를 받은 후에도 상체는 가리지 않고 살았다. 요염하해 젖통을 드러내놓고 있는 여신상이나 압사라(요정)의 모습은 불란서식민지가 되기 이전까지의 이곳 사람들의 현실적 의상이나 생활상을 나타내고 있다.
다섯째, 결혼의 유습이 지금도 남자가 여자집에 와서 사는 매트리로칼의 모계구도로 되어 있다. 집의 유산은 큰딸의 몫이다.
[우유바다휘젓기 신화]
- 아주 옛날, 그 넷날에는 신(deva)이나 악마(asura)나 모두 죽음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신이나 악마나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신보다는 악마가 더 강했다. 악마와의 싸움에서 악마보다 약한 신이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불별(immortality)을 획득하는 것이다. 악마와의 싸움에서 계속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된 신들은 결국 이 세계를 유치하는 비슈누(Vishnu)신에계 도움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비슈누는 신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유의 바다를 휘저어라! 거기서 나온 불사의 감로수, 암리타(amrita)를 마셔라! 암리타를 마신 자는 불별을 획득하리라!" 그런데 그 광대한 우유의 바다를 휘젓는 데는 거대한 물 체가 필요했다. 비슈누는 그들에게 메루산(Mount Meru) 동쪽에 있는 만다라산(MountMaildara)을 우유의 바다 한복판에 옮겨놓으라고 충고했다. 결국 만다라산은 아난타(Ananta)가 뽑았고 그것은 인드라신의 득수리 가루다가 날랐다. 그런데 이 만다라산으로써 우유의 바다를 휘첫기 위해서는 그 산를 휘감을 기다란 로프가 필요했다 비슈누신은 거대한 뱀인 바수키에게 만다라산을 휘감도록 명령했다. 바수키가 만다라산을 휘감자 만다라산은 곧 바다 속으로 가라 앉으려 했다. 그리자 비슈누는 스스로 거대한 거북이 꾸르마(Kurma)로 변신하여 만다라산을 자신의 등 위에 올려놓았다. 이에 신과 악마는 협력하여 바수키 뱀을 서로 잡아당겨 만다라산을 회전시킴으로씨 우유의 바다를 휘젓기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악마들은 바수키 뱀의 머리부분을 잡았고, 신들은 바수키 뱀의 꼬리부분을 잡았다 이들은 옥신각신 천년 동안의 긴 시간동안 우유의 바다를 휘저어야 했던 것이다.
[캄보디아의 고대사]
- 후우난 시대 : AD 1세기~AD 550년경
쩐라 시대 : AD 550년경~802
앙코르시대 : AD 802 ~ 1432
-후우난은 부즉국가 시대로서. AD 1세기로부티 한 6세기정도까지를 잡고. 쩐라는 6세기로부터 8세기말까지의 통일왕권이 형성되어가는 시기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아주 본적적인 통일왕조의 문명시기는 자바(인도네시아)의 지배로부터 캄보디아를 해방시킨 자야바르만 2세가 AD 802년 앙코르의 동북 30㎞에 있는 프놈 쿨렌이라는 성산에서 자신을 데바라자(神王)로서 선포한 크메르제국 시기로부터 1431년 참족(타일랜드)이 기울어가고 있었던 크메르제국을 초토화시키기까지의 앙코르 유적군의 시기, 즉 앙코르시대에 해당된다. 우리의 관심은 이 제3의 크메르제국시기, 즉 앙코르시대이다
- 앙코르문명은 통일신라중기로부터 (802년에 해인사 창건) 조선 초기 세종조에까지 이르는 장수왕조로서 그 전성기는 우리나라의 고려에 해당된다고 보면 된다. 증국왕조로 보아도 당, 송, 원, 명에 걸치고 있다
[캄보디아 근대사]
* 노로둠왕 1세가 타이와 베트남의 위협으로부터 자국의 영토를 보전하기 위해 프랑서 보호령을 요청함으로써 시작
* 프랑스 명령을 잘 들을 것 같은 당시 베트남 유학생인 시아누크라는 18살의 청년을 택하였으나 시아누크가 제멋대로 하자 미cia는 시아누크가 프랑스 순방길에 올랐던 1970년 3월에 론 놀 장군을 앞세워 쿠테타를 일으켰다. 시아누크는 망명정부를 북경에 세운다. 김일성의 보호아래 평양에서 보내기도 한다.
* 관료부패의 극상을 노정시켰던 론 놀 정권에서 크메르 루즈가 인민의 동정을 얻으면서 창궐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 망명정부를 세운 시아누크는 잠정적으로 크메르 루즈를 지원하고 크메르 루즈는 사이공이 함락되기 2주전 프놈펜을 함락한다. 론 놀은 이미 4월1일 해외로 뺑소니를 쳐버린 후였다. 시아누크는 루즈의 승리를 축하하며 75년 9월 프놈펜으로 입성했지만 곧 왕궁에 연금되어버리는 신세가 된다.
* 시아누크는 4년 후인 1979년 1월초 월남이 개입하여 크메르 루즈를 격멸할 격랑기에 다시 중국의 압력에 힘입어 북경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 크메르 루즈를 이끌어 간 폴 포트
- 콤퐁 톰이라는 작은 농촌의 유족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 한때 사찰에서 양육되었고 스님의 계를 받기도 했다.
- 프놈펜 공업학교에서 목공예를 전공하다가 1940년대에는 호치민의 항불투쟁에 참가하였고, 1949년 8월 국비 장학생으로 불란서 유학의 길에 올라 라디오 전자학을 전공한다. 그는 1953년 1월 프놈펜으로 돌아와 54년부터 63년까지 프놈펜에서 초등학교 선생으로서 존경스러운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폴 포트는 1979년 1월 7일 축출하여 태국 접경 지역에서 숨어 암약하다 숨을 거둠
* 미국이 론 놀 정권을 세운 이유는 호지명 루트를 무차별 폭격하기 위해서였다. 1969년-1973년의 4년동안 53만9129톤의 네이팜탄, 에전트 오렌지(고엽제), 클러스터 밤(인명살상)을 공습경고도 한번 내린 적이 없었다.
* 폴 포트는 피폐된 농촌을 재건하기 위해 식량을 생산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도시로부터의 강제소거가 시작되었고 물론 이러한 과정에서 불평분자들, 론 놀 정권에 아부하고 타협한 반동분자들은 가차없이 처형되었다. 약 10만명의 반동. 불평분자들이 처형된 것은 사실이다. 폴포트 정권시기만에 한정하면 30만 정도가 희생되었다고 추산된다.
* 인도차이나란 프랑스 사람들이 이 지역에 식민지를 개척하면서 쓴 말로서 구체적으로 프랑스 연합에 속한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를 지칭하는 말이다(문헌상으로 1845년에 처음 등장, 식민지 개척은 1858-93년)
* 베트남은 중국의 문화 영향, 캄보디아는 인도 문화 영향
* 지금의 베트남 중부, 남부 베트남 지역은 역사적으로는 캄보디아 영토였다
* 베트남 유교 즉 공자. 맹자의 훈도를 쉽사리 느낄 수 있다. 월남인들의 냉철한 현실 감각은 역시 유교에서 오는 것이다. 그런데 캄보디아는 완전히 시바나 비슈누, 브라만성직자들, 산스크리트 덱스트, 온갖 휜두신들과 여신들, 신화적 우주와 별자리들로 도배질되어 버린다
* 인도문명 - 신화적. 중국문명 - 인문적
* 월와 구천의 월나라가 곧 ‘비�남(vietman)의 ’비�(越)‘이다
* 중국인들은 이 월나라 사람이면서 광동. 광서 이남의 남쪽에 자리잡고 있는 사람들을 남월사람들이라 불렀다.
* 베트남은 한무제가 한반도에 한사군을 설치할 때, 마찬가지로 중국에 복속되었다. 한무제는 광동.광서에 4군을 설치하고 홍강델타지역에 3군을 설치하였던 것이다(bc111). 중국의 월남 지배는 당이 말할 때까지 1천여년을 지속한다.(AD938)
* 킬링필드 - 롤랑 조페라는 영국 런던 출신의 감독이 1984년에 만든 영화
* 자야바르만 2세
- 프놈 쿨렌이라는 성산(본명은 마헨드라 산)에서 자바로부터의 독림을 선포하고 크메르젝국, 즉 앙코르시대를 열었다.
- 바로 목잘린 왕의 목아지가 쟈바로 갔을 때 인질로 잡혀간 인물이었다. 목짤린 왕의 아들이었거나 왕실의 중요한 인물이었거나 혹은 신하일 수도 있다.
- 자야바르만 2세는 10대에 쟈바에 갔고, 쟈바에서 시바신앙에 눈을 �다 당시 쟈바의 문화는 이미 대승불교가 지배하고 있었지만 시바신앙(Shaiyite)과 링가승배(Linga WorEhip)는 민간에 널리 유포되어 있었을 것이다.
- 쟈바는 파괴의 신이다. 파괴가 없이는 창조가 있을 수 없다. 자야바르만 2재는 파괴의 신으로 그의 새로운 왕조의 이넘을 세웠다. 그리고 그 자신을 시바와 동격화시켰다. 크메르의 제왕들은 모두 데바라자, 신왕(神王)으로서 자신을 인식했다.
- 자아바르만 2세는 수도를 프놈펜지역에서 북상하여 톤레삽호수를 지나 더 안전하고 산이 있는 앙코르지역으로 옮졌던 것이다 캄보디아에는 산이 귀하다.
- 왕이름에 붙는 접미사 "바르만"(varman)은 "갑옷"(armor)이라는 의미며 "보호" "수호" (protection)의 의 미를 지닌다.
- 802년부터 850년까지치세기간 앙코르 제국의 기초를 닦았다.
[프놈 바켕]
* 프레아 코와 바콩을 만든 인드라바르만1세는 현 룰루오스 지역 하리하할라야에 수도를 정했다(씨엠립 동남쪽 13㎞). 그는 889년 하리하랄라야에서 죽었다. 그의 아들 야소바르다나 왕자는 야소바르만 1세(889-910치세)라는 이름으로 왕위를 계승했다. 그는 즉위 초에는 하리하랄라야에서 왕도의 길을 걸었지만 곧 룰루오스 지역이 그의 야심을 만족시키기에는 부족한 곳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야소바르만 1세는 인도 마가다왕국의 나가리 알파벳을 도입했으며 당대의 대승불교, 시바교, 샤마니즘, 탄트라리즘, 마술 등 모든 종교에 관용과 포용적 자세를 견지했다. 이미 굽타시대 때부터 발전한 날란다 대학의 문화, ‘서유기’의 주인공 현장이 직접 와서 유학했을 때(7세기) 1,000여명의 학생이 우글거렸다. 그 날란다대학의 문화는 벵갈지역의 팔라왕조(750-1185)의 후원 아래 이 캄보디아 지역을 포함한 동남아시아 전역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이 날란다대학의 전도사들은 단지 대승불교만을 전파한 것이 아니라, 중세기 힌두이즘의 다양한 시바 ․ 비슈누 컬트와 탄트리즘을 동시에 전파했던 것이다.
* 야소바르만 1세는 당대의 국제정세에 매우 정통한 인물이었고 포용과 절충과 진보의 덕성을 구현한 인물이 었다.
* 야소바르만 1세의 아버지 인드라바르만1세는 아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아들아 반드시 세가지를 명심하거라. 첫째 조상들을 위하여 신전을 지을 것이다. 둘째, 자신이 죽어서 돌아갈곳을 위하여 신전을 지을 것이다. 넷째, 백성들을 위하여 저수지와 수로를 건설할 것이다 " 이 유언은 후대의 모든 왕들의 실천강령이 되었다. 야소바르만이 이 세가지 강령 중에서 제3의 강령, 즉 저수지와 수로의 건설에 모든 국력을 기울였다. 그는 먼저 이스트 바레이라고 부르는 직사각형의 거대한 저수지(8x2㎞)를 팠다. 그리고 그주변으로 하여 씨 엠립의 물줄기를 돌려 그가 건설하는 수도의 외곽을 따라 남북으로 흘러 내려가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강물을 이용하여 도시내의 수로를 만들었던 것이다.
* 프농 바켕에 신 수도의 국가신전이 지어졌을 때는 앙코르 와트도 앙코르 톰도 존재하지 않았다. 프논바켕을 중심으로 하여 현재의 앙코르 톰과 앙코르 와트를 포함하는 사방 4x 4㎞의 지역이 완벽한 신시가지였다. 그 신시가지의 주된 건자재는 목조였다. 그래서 모두 밀림 속에 잠겨버리고 말았지만 세밀한 발굴작업은 당대의 도시가 매우 잘 플랜된 것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정사각형의 반듯반듯한 도시 한가운데 바켕산이 우뚝 솟아있었던 것이다. 16㎢의 지역에서 발견되는 우물이 800여개나 된다. 그리고 도기와 타일이 여기저기 발굴된다. 앙코르 와트와 앙코르 톰은 바로 이 프놈 바켕의 설계를 그 영내에 새롭게 다시 구성한 것이다.
[프레아 코(신성한 소)]
* 프레아 코를 세운 인드라바르만 1세는 자야바르만2세, 자야바르만 3세를 뒤이은 크메르 제국(앙코르제국)의 제3대 제왕이다. 자야바르만 3세(850-877)에 관해서는 별 기록이 없다.
* 자야바르만 2세를 태조 이성계에 비유한다면 인드라바르만 1세는 태종 이방원에, 쟈야바르만 3세는 정종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 제3대 제왕 인드라바르만 1세는 12년(877-889)밖에는 다스리지 않았지만 크메르제국을 흔들리지 않는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향후의 모든 건물과 제식과 관행의 전형을 확립하였다.
* 프레아 코는 그가 그의 조상들을 위하여 지은 것인데, 그것은 신전인 동시에 무덤이라 할 수 있다.
* 앙코르 유적은 기본적으로 신전과 스투파의 구분이 없다.
* 프레아 코는 세겹의 엔클로저(담)의 중앙에 6개의 탑이 있다. 앙코르 사원들은 기본적으로 동향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앙코르 와트만 예외적으로 서향이다.
* 동쪽입구로부터 신도(神道)라 부를 수 있는 코즈웨이를 걸어들어가면 동향 정면으로 3개의 탑이 보인다. 이 3개의 탑중 중앙의 것이 높고 양쪽의 탑보다 약간 물러나 위치하고 있다.
* 중앙의 탑은 앙코르 제국의 개창자인 자야바르만 2세에게 봉헌된 것이다. 파라메슈바라에게 봉헌한다고 문틀에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파라메슈바라는 시바신의 다른 이름이며, 자야바르만 2세의 사후 이름이다. 시바신과 동일시한 것이다. 바라보면서 오른쪽(NE)의 탑은 인드라바르만 1세의 외할아버지 루드라바르만에게, 왼쪽의 탑(SE)은 자기의 친아버지인 프리티빈드라바르만에게 바친 것이다.
* 그 뒤에 있는 세 개의 탑은 각기 그 부인들을 모신 것이다.
* 뒷열의 3개 탑의 위치가 조금 부정형이라는 것인데 북쪽의 탑(NW)이 남쪽의 탑(SW)보다 중앙탑으로부터 더 가깝게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의 외할머니와 쟈야바르만 2세의 부인과는 각별히 가까운 사이였기에 그렇게 사후에도 가깝게 붙여 놓았을지도 모른다. 이 사원의 매력은 세부적인 곳에 자유로운 파격과 변조의 변양이 이루어지고 있다는데 있다.
* 앞의 동열(東列)의 세탑의 동쪽문은 열려있다. 각탑의 북.서.남쪽의 문은 닫혀 있다. 닫혀있다고 해서 실제로 문이 있고 닫혀있는 것이 아니라, 닫혀있는 형태로 돌조각이 되어 있을 뿐이다.
* 동열의 세탑에는 9개의 가문이 있다
* 앞 정면의 세 문 양옆 벽에는 부조로 남자문지기가 새겨져 있다. 그 남자 문지기들을 드바라팔라스라고 부른다
* 부인들을 모신 탑에는 남자문지기 대신 여자 문지기들이 지키고 있다. 데바타스(여신)라고 부른다.
* 동쪽 정면에는 각 탑마다 올라오는 세 개의 돌계단이 있다. 이 돌계단 양옆에는 한쌍의 사자가 입구의 수호자로서 웅크리고 앉아 있다. 전부 6마리가 된다. 앙코르 사자상은 시대가 밑으로 내려올수록 궁둥이가 쑥 내밀어지면서 우람차게 되는 양식적 변화를 일으킨다. 제국의 자신에 찬 모습이 후대로 갈수록 힘있게 표현되었을 것이다.
* 세 계단 정면에는 소가 웅크리고 앉아 있다. 난디라고 부르는 이 소는 시바신이 항상 타고 다니는 동물이다. 시바신이 나와 타실 것을 예비하여 엎드려있는 것이다.
* 400X500 규모의 거대한 해자의 동쪽 부위에 치우쳐 위치하고 있다. 이 해자 속에는 분명 생활하던 왕궁이 있었을 것이다.
* 씨엠립에서 동쪽으로 13㎞ 떨어진 곳으로 인드라바라만 1세가 새 수도로 정한 하리하랄라야라는 곳이다.
* 프레아 코 입구에서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이 돌로 된 창틀과 창틀 사이에 있는 원통 모양의 돌창살이다. 이것은 석공의 기법이 아니라 목공의 기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신전 입구 위를 장식하고 있는 린텔이라는 화려한 돌구조인데 크메르 문명에서 가장 독창적인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 건축 소재
- 구멍이 뚫린 돌 같은데 실상 그것은 돌이 아니라 철분함량이 높은 진흙인데 거대한 메주벽돌처럼 찍어 그늘과 햇빛에 번갈아 말리면서 양생하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말로 홍토라고 하고 영어로는 라테라이트라고 부른다.
- 현재의 붉은 벽돌과 유사하고 여러 식물의 수액을 개서 만든 독특한 접착제를 개발했다.
- 스터코 :소석회, 고운 모래, 타마린드 열매, 슈가 팜, 개미집 점토 등을 반죽하여 만든 소재로서 벽돌위에 발라 그것으로 조각을 하여 아름다운 신전의 모양을 내는 것이다.
- 내구성이 강한 사암 사용. 사암은 앙코르 동북부 30㎞에 있는 쿨렌산맥에서 씨엠립강을 따라 땟목으로, 코끼를 이용한 육로오 운반되었다. 사암을 무지막지하게 사용하여 자야바르만 7세(1181-1219)에는 동이 나버린다. 그 뒤 크메르 제국은 급격히 쇠락함. 사암은 회색빛, 붉은 빛, 초록색 빛이 있다.
반테이 스레이 신전의 사암은 홍조를 띠며 훨씬 깊고 샤프한 선을 잘 보존하고 있다.
코 크리엥의 여인 조각은 초록색 사암으로 만듬
* 린텔 예술
- 프레아 코(879) → 반테이 스레이(968) → 앙코르 와트(1150) → 앙코르 톰(1200)
- 반테이 스레이 린텔 : 깊고 화려하고 정교하고 또 매우 혁신적지만 너무 현란하고 이념적이다.
- 앙코르 아트 린텔 : 너무 반복적이며 설명적이며 신화적이며 느끼하다.
- 앙코르 톰 린텔 ; 불교적이며 거칠다.
- 프레아 코 린텔 : 이 모든 린텔예술의 창조적 가능성이 압축되어 있으면서 소담하고 무한한 상상력의 오리지날리티를 과시하고 있다.
* 프레아 린텔 - 칼라라는 괴물. 칼라는 흰두신화에서는 시바신의 또 하나의 변형이다.
- 칼라가 양쪽 팔뚝으로 나가(뱀)의 대가리를 움켜쥐고 있고, 입으로는 한 마리의 나가를 토해내고 있다.
- 가루다의 엄마 번타나(Yintalla)는 남편인 카샤파의 본치 카드루와 아주 사이가 나빴는데, 카드루는 모든 뱀의 어미였던 것이다. 인도신화에서는 가루다(독수리)와 나가, 크메르신화에서는 천적인 독수리와 뱀은 때로 한몸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것이다. 독수리는 하늘의 상징이며 생명과 선(善)의 상징이다. 뱀은 땅의 상징이며 즉음과 악(惡)의상정이다.
-프레아 코의 린텔이 앞면(등쪽)은 칼라로 뒷면(서쪽)은 가루다로 되어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후기 앙코르 건축의 신화적 양식에서 주테마를 이루고 있는 불사의 감로수신화와 암시적인 연관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 분명히 물소뿔모양으로 가로지른 원통은 칼라의 입에제 나온 나가의 몸통이다. 이 나가의 몸통은 뻗쳐내려가면서 가늘어지다가 꼬리가 다시 쪽 올라간다. 그 꼬리는 다시 코끼리가 쓸어 치켜을리고 있고. 그 코끼리 위에는 인드라신이 양손에 바즈라(금강저, 인도에서는 오를손에만 들고 있다)가 활약하고 있다. 바즈라는 번개의 신이며, 구름을 가두어 가뭄을 야기하는 브리트라와 항상 용감히 싸운다. 그는 가뭄을 제거시켜주고 땅에 비를 내려준다. 땅에 비를 내려주는 인드라의 행위는 물론 땅에 사는 나가의 생명의 원천이다. 우리나라의단군신화에서도 아들 환웅에게 풍백 ․ 우사 ․ 운사를 주어 신단수 밑으로 내려가게 하는 환인이 인드라신의 다른 이름이라 할 수 있다.
- 나가의 몸통 아래로는 정교하게 6개의 잎사귀가 흘러내리고 있다. 그리고 흘러내린 잎사귀의 끝은 세 갈래 모앙을 하고 있는데 모두 또 다시 나가의 대가리로 변모하고 있다. 그리고 그 세 갈래 뱀대가리의 중앙에는 남신이 타학고 있는데, 이미 6명의 남신의 오른손에 모두 방망이 모양의 것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인드라 신일 가능성이 높다. 이 신전의 봉헌 자의 이름이 인드라바르만이라는 사실과 연관시켜 볼 때 나가와 인드라의 결합은 매우 토착적인 농경사회의 풍요로움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 린텔에 그려지고 있는 모든 신상은 인드라바르만 자신의 변용일 수도 있으며 풍요로운 비와도 같은 자신의 처세의 상징 일 수도 있다.
- 중앙의 칼라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칼라의 벌려진 입에서 나가가 뻗쳐나오고 있고 그 나가 몸둥아리 밑에는 칼라의 두손이 마치 여인의 궁둥이를 움켜쥔 것처럼 몸둥아리를 움켜쥐고 있다. 칼라대가리 위에는 시바신으로 상정되는 사람형상의 상체가 의젓한 자세를 과시하고 있다. 그런데 그 윗몸통에서 보자면 바로 칼라가 흉악한 입을 벌리고 있는 곳은 시바신의 성기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그리고 나가의 몸둥이는 여인의 좌악 별린 허벅지로부터 발가락 끝까지의 모습에 해당된다고 볼 수도 있다. 여기에 린텔의 전체 모습이 매우 양다리를 좌악 벌린 여인의 음부와 그 음부에 라이온의 갈기처럼 뻗친 음모를 연상하던 이 성적 함의는 시바의 상징이 링가(남자성기)와 요니(여자성기)라는 의미는 농경사회의 생산력 수배로 모아지고 있다.
[바콩]
* 롤루오스 지역에는 프레아 코 외로도 바콩 신전과 룰레이 신전이 있다.
- 인드라바르만 1세를 계승한 야소바르만 1세(889-910)가 905년에 프놈 바켕(앙코르 지역의 센터)이라는 곳으로 수도를 옮기기 전 불과 30년도 채 안되는 사이에 지어진 것
* 바콩 신전 - 인드라바르만 1세의 묘
- 7개의 대가리를 가진 거대한 나가
- 향후 앙코르 지역의 모든 거대한 신전의 모델이 됨
- 담(엔클로저)은 우리나라 토담 위에 기와를 얹은 형태와 기본 구조는 같은데 이곳의 외벽담은 육중한 홍토벽돌로 이루어져 있다. 군사적 목적의 담이 아니라 신화적 열망이 지어낸 것임을 알 수 있다.
- 고푸라 : 신도(코즈웨이)와 벽이 만나는 지점에 십자모형으로 지어진 현관을 말한다.
- 최외벽과 중간벽 사이에 3m 깊이의 바깥해자가 있고 그 표면적은 15헥타르에 이른다.
- 중간벽과 내벽사이의 기다란 제방의 신도 양옆에 거대한 나가가 배를 땅에 깔고 있다.
- 이러한 구조는 바콩에서 처음 시작되었고 앙코르 와트에 가면 난간구조로 바뀐다.
- 배의 주름의 리얼한 묘사
- 나가의 주욱 뻗은 다리는 여인의 허벅지 상징. 중앙에는 무덤(여자 성기 상징)
- 제3의 벽, 내벽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솟은, 수미산을 상징하는 시바신전이 눈에 들어온다. 사암으로 뒤덮여 있는 바콩의 색깔은 폐허의 칙칙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낯익은 황토의 환한 느낌을 던져 준다.
- 다섯 층 기단 위에 솟아있는 신전 시카라(신전의 지성소<무덤>가 자리잡고 있는 봉우리)도 또 다시 다섯 단으로 되어있고 네 모퉁이에는 무엇인가 뾰족하게 안쪽으로 감싸며 올라와 전체적으로 불꽃같은 느낌을 주는데, 그 모서리의 화염모양도 역시 나가의 대가리다.
- 다섯 층의 피라밋 기단은 점점 폭이 좁아지기 때문에 시카라 신전이 가파르게 높게 보이는 효과가 있다. 이 다섯 개의 기단은 각각 나가의 세계, 가루다의 세계, 락샤사스의 세계, 약샤의 세계, 신들과 대왕들의 세계를 상징한다.
- 1,2,3 기단의 4모퉁이에는 코끼리가 있고, 4기단에는 각면에 4개씩으로 보이는 동일간격으로 배령된 12개의 작은 탑이 있다. 그 탑에는 시바를 상징하는 링가가 모셔져 있다.
- 881년에 봉헌된 것이며 5기단까지의 높이는 14m, 제5기단 위에 솟아 있는 시카라의 높이는 15m이다.
- 시카라의 동쪽 입구문은 열려있고 나머지는 모두 가문이다. 문위에는 린텔이 있고 린텔 위에는 삼각형 모양의 프론톤이라는 새로운 양식의 조각이 있다. 이러한 양식은 반테이 스레이에서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 문과 문 사이의 이중의 벽감에는 여신들이 조각되어 있는데 동쪽 정면을 바라보면서 왼쪽(se)에 나타나는 두 여신의 모습은 인상적이다.
- 프레아 코의 여신의 모습에 비하면 치마의 주름이 매우 선명하고 허리의 장식도 리얼하다. 치마는 요즈음의 월남치마처럼 휘감아 묶는 것이다.
- 앙코르 와트의 압사라 무희들의 치마는 비치는데 바콩의 무희 치마는 비치지 않는다.
- 바콩신전의 시카라의 동쪽 문 린텔 위 프론톤에는 춤추는 시바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다 깨져 버렸다.
- 북쪽 프론톤에는 마왕 라바나의 아들인 인드라지트의 성난 뱀과도 같은 화살에 수없이 맞아 전신에 붉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락슈마나를 라마와 하누만 그리고 원숭이들이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위로하고 있다. 락수마나는 옆으로 누워 들것 위에 있다. 원숭이들의 표정에는 애통과 근심과 환호가 동시에 잘 표현되고 있다.
- 자야바르만 7세91181-1219)는 ‘라마(‘라마야나’라는 작품에서 신적인 존재)가 14년간 숲에서 망명세월을 보냈듯이 그도 기나긴 13년의 세월을 박해를 받으며 유랑의 세월을 보내야했다. 그리고 참족의 지배로부터 크메를 다시 탈환하고 왕의 자리에 올랐다.
- 서쪽 프론톤에는 거대한 나가 아난타 위에서 편안하게 팔벼개하고 드러누워 우유의 바다위에 둥둥 떠 있는 비슈누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비슈누의 다리는 무릎꿇은 락슈미 위에 얹혀져 있는데 락슈미는 잠자는 비슈누의 다리를 마사지하고 있다.
- 바콩 신전은 니드라바르만 1세가 현 루루오스 지역에 세운 수도 하리하랄라야의 중심이다.
- 하리하랄라야란 하리-하리로부터 유래된 이름인데 이것은 시바의 비슈누를 합한 신의 이름이다. 이 바콩 신전은 바로 수미산의 상징이다.
- 앙코르 와트는 그 봉우리가 5개의 시카라를 형성하여 주변 메루산맥 봉우리들까지 다 표현했지만 바콩은 중앙의 수미산 중심 축에, 동문에다가는 춤추는 시바를, 서문에다가는 잠자는 비슈누를, 북문에다가는 ‘라마야나’의 장면을, 남문에다가는 ‘마하바라타’에 나오는 악마의 신들의 ‘우유바다휘젓기’를 새겨 넣었던 것이다.
- 남쪽의 제5 제4 기단의 사암벽면에 이후의 앙코르 와트의 앙코르 톰의 벽화의 효시를 이루는 부조가 새겨져 있는데, 하도 마모되어 그 모습을 알 수 없다. 전쟁에서 패배당하고 있는 놀라고 일그러진 아수라들의 표정이 매우 강렬하게 묘사되고 있다. 좁은 한 벽돌의 공간에 6명의 아수라를 담고 있는 솜씨는 뛰어나다.
- 5단의 피라밋드 신전의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면 4면의 지면에 두 개씩 총 8개의 작은 탑이 둘러 서 있다. 작은 탑이라고 해야 중간의 피라밋드 신전의 탑에 비하면 작지만 그 하나 하나가 프레아 코의 6개의 신전들의 양시과 규모에 비견할 만한 것이다. 중앙의 피라밋드 신전은 대부분이 사암을 소재로 한 것이지만 주변의 작은 탑들은 프레아 코의 것과 동일한 소재의 벽돌로 만든 것이다.
- 바콩에 있는 사자들은 궁둥이가 더 자신있게 튀어 나왔으며 이것은 크메르 제국의 자신있는 모습이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어떤 놈은 똥을 누고 있는 놈도 있다. 그런데 삼족이 쳐들어왔을 때 크메르제국의 기를 꺽는다고 사자등 뒤로 치켜올린 꼬리를 다 잘라버렸고 어떤 것은 씨를 말리기 위해 불알을 싹둑 잘라버렸다.
[반테이 스레이 사원] - 여성의 성채라는 뜻
* 앙드레 말로가 아름다운 여신상을 밀반출하려다 프놈펜에서 감옥에 갇힌 사건을 간직한 사원
* 초기(802-10020의 최후 시기에 해당되는 최걸작품(중기 - 앙코르 와트. 말기 - 앙코르 톰)
* 자야바르만 5세의 즉위년, 968년에 봉헌되었다. 이신전은 자야바르만 5세의 아버지이며 선왕인 라제드라바르만 2세시대에 지어졌고 967년에 이미 완성된 것이다. 그런데 이 신전을 지은 사람은 라젠드라바라만 2세가 아니고 그의 각료 중의 한 사람이었던 브라민 야즈냐바라하가 지은 것이다.
* 야즈냐바라하는 특수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며 이슈바라뿌라라는 이 지역을 왕으로부터 봉토로 허락받았다. 그는 미래의 왕이 될 어린 왕자 자야바르만 5세의 교육을 맡았고 그의 역량에 의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고 한다.
* 라젠드라바르만 2세로부터 자야바르만 5세에 이르는 시기는 문운(文運)이 극성한 시기였다.
* 라젠트라바르만 2세 때는 참족(베트남)과의 약간의 전투있었지만 대체로 평온한 시기였다.
* 자야바르만 5세의 33년 치세는 매우 정력적있고 지적이었으며 거의 전쟁이 없는 평화의 시기였다.(우리 나라 세종대왕 시기)
* 왕권의 권위에 얽매일 필요가 없었던 반테이 스레이는 여러 가지 특이한 성격이 나타나고 있다.
- 사이즈를 줄였다. 대부분의 건물이 두 번째 담속에 밀집되어 있는데 그 규모가 38x42m 밖에 안된다.
- 자리잡은 터뿐만 아니라 건물도 모두 모두 평균 신전 사이즈의 반밖에 안된다. 문의 높이 1.3.m 정도며, 지성소 내부의 높이도 1.6-2.0m밖에 되지 않는다.
- ‘크메르 예술의 보석’이라고 부를 정도로 벽돌이 최소화되고 전체가 사암으로 덮였는데 한 치의 바늘구멍도 남김없이 장식된 느낌을 준다.
- 건축양식적으로 볼 때 프레아 코의 인드라바르만 시대양식을 기본으로 계승하면서도 그 틀을 창조적으로 혁식하면서 향후의 모든 가능성을 열었다. 전통의 계승과 일탈, 반복과 창조, 연속과 단절, 차용과 혁신의 복합체라 할 수 있다. 야즈냐바라하는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그 전통에 구애받음이 없이 자유로운 상상력을 발휘했으며 어떠한 파격도 크게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프레아코의 린텔은 가로누운 기둥 스타일에서 화려한 삼각형의 돌조각으로 확대했다. 또 프론톤을 3중으로 겹치게 쌓아올렸다.
- 가장 인도적인 내음새가 나는 건축이다. 한가운데 남북으로 배열된 세 신전의 정 중앙신전은 타 신전에서 볼 수 없는 전실이 있고 본존과 전실은 안타랄라라고 부르는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는 인도의 동시대의 걸작품인 찬텔라왕조의 카쥬라오의 사원들과 그 구조에 있어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 거의 2.3중으로 겹쳐지는 부조의 입체성. 특히 시바가 악마를 죽이는 장면은 시바의 몸짓 뒤로 악마의 모습이 겹쳐서 조각되고 있다. 이 모든 조각의 완성품을 쌓아올려 맞춘 것이 아니라, 원석을 먼저 올려 집형태를 만들어 놓은 다음, 석공들이 서서히 조각한 것을 알 수 있다. 크메르 목공들은 단단하고 거친 사암을 자단(紫檀)보다 훨씬 더 무르게 다룰 줄 알았던 것이다.
- 반테이 스레이는 매우 본격적인 신들의 이야기가 생동하는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는 최초의 사원이다. 크메르인들이 인도 신화를 취사선택을 통해 해석하는 방식, 그리고 그 창조적 변용을 볼 수 있다.
* 최외곽 제4고푸라 린텔
- 삼각형의 박공의 최외곽은 나가의 몸뚱아리 대신 마카라의 몸뚱아리로 변했고 양옆의 마카라 아가리에서는 다섯 대가리의 나가가 생성되어 나오고 있다.
- 중앙에는 인드라신이 오른손에 금강저를 들고 있고 세 대가리를 한 코끼리 아이라바타를 타고 있다. 인드라 신이 타고 있는 세 대가리 코끼리는 인도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 모티프이지만 이곳에서는 흔히 나타나고 있다. 이 모티프는 앙코르 톰의 남문의 게이트 타우어에 거대하게 재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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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권
[앙코르 와트의 발견]
* 16세기 말부터 포르투칼 탐험가들이 다녀감
* 프랑스 신부 에밀 부유보는 1850년 12월에 앙코르를 이틀간 방문
* 앙리 무오는 부유보의 방문기를 보고 1958년에 앙코르를 방문한다.
* 원나라 중국 사신으로 견문기록을 남긴 주달관 - 진랍풍토기
* 원나라 원수 사도(SOTU)는 베트남 중부 참파를 정벌하고 참파행성의 우승이 됨
* 참파행성에서 크메르고 두 장수를 보냈는데 그 때 수행한 사람이 주달관이다.
[앙코르 와트]
* 앙코르 - 나가라(왕궁, 수도) → 노코르 → 옹코르 → 앙코르
* 와트 - 타이말로 절이라는 뜻
* 3중 회랑으로 되어 있다.
* 중앙탑에서 남쪽 제1회랑으로 가극 복도에 새겨져 있는 우아한 압사라들의 부조는 앙코르 와트의 모든 예술품 중에서 가장 찬탄을 자아내는 작품이다.
* 절규하는 하누만 부대의 원숭이들의 모습
- 압사라 무희 조각의 반대편, 북쪽 회랑 프론트에 있다.
- 이 장면은 ‘라마야나’ 대서사시에 나오는 시타를 구한 라마가 시타의 정절을 시험하기 위해 불구덩이로 뛰어들어 갈 것을 명령하자 시타가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순간의 애통과 절규를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 앙코르 와트는 앙코르 제국이 멸망후에 상좌부 불교사원으로 사용되면서 붙여진 이름이며 그것은 1632년의 명문에 처음 등장한다. 정확히 ‘제도(帝都)의 탑’이라는 뜻
* 앙코르 와트를 지은 수리야바르만 2세(1113-1150)의 시대야말로 비슈누 숭배의 전성시기이며, 이 앙코르 와트가 비슈누신에게 봉헌된 제식의 장소이다.
* 앙코르 와트는 비슈누신을 위한 신전으로 지어졌고 또 동시에 비슈누신의 구체적 화신인 수리야바르만 2세의 무덤으로 기능하였던 것이다. 수리야바르만 2세를 화장한 재단지가 그 메루산 스투파 정중앙에 모셨젼던 것이다.
* 수리야바르만 2세는 지금은 타일랜드 동북방에 속하는 계곡의 영주로서 자야바르만 6세(1080-1107)의 누이의 외손자이긴 했지만 크메르 왕위를 물려받을 수 있는 적통의 사람은 아니었다. 그 허약해진 왕권을 보호 하기 위하여 왕위를 탈취했다. 하룻만의 혁명으로 선왕 다라닌드라바르만 1세를 폐위시켰다.
* 수리야바르만 2세의 친구이자 보좌역을 했던 디바까라빤디타가 앙코르 완트의 설계자라고 추정한다.
* 앙코르 와트의 가장 중요한 특색 중의 하나는 그 전체건물이 서향으로 지어졌다는 것이다. 서향은 차거움 서방 금(金)이며 가을(秋)이며 죽음이며 끝이며 어둠이다.
* 앙코르 와트는 묘이며 10리에 이르는 주위사곽으로 싸여 있는 방대한 건물이며 수백칸에 이르는 돌 회랑이다.
* 부조 - 서쪽회랑 중앙에서부터 시작하는데 이것은 음택의 양식이라는 것이다. 양택의 양식은 반드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진행하게 되어 있다. 이것으로도 앙코르 와트는 무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수리야바르만 2세의 군사행렬도
* 프놈 바켕을 중심으로 하여 현재 앙코르 톰의 일부분을 포괄하는 지역에 왕궁과 민가가 펼쳐져 있었을 것이다.
* 앙코르 와트는 왕궁이나 민가로부터는 소외된 하나의 거대한 무덤에 불과했던 것이다.
* 코끼리의 삼두상은 아이라바타라고 불린다. 그 위에 타고 있는 신은 물론 인드라다. 이 삼두상은 반테이 스레이사원의 프론톤 부조에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다.
* 중국인 주달관의 기록 -석탑이 있는 산이 앙코르 톰 남문 밖을 나서면 반여리 되는 곳에 있다. 통속적으로 노반이 하룻밤에 조성한 것이라고 전하여지고 있다.
- 노반 : 노나라 애공 때의 유명한 공수반
- 석탑이 있는 산 : 프놈 바켕
- 야소바르만이(노반에 해당) 야소다라뿌라로 천도를 결심하고 국가신전으로 프놈 바켕을 비교적 단시간에 지었기 때문에 생긴 설화
* 앙코르 와트의 동쪽회랑 남반부 벽에 있는 49m의 장쾌한 부조 - 암리타의 생성을 위하여 신들과 악마들이 바수키의 머리와 꼬리 부분을 잡고 서로 당기는 줄다리기 모습이다. 악마들은 다섯 대가리를 하고 있는 바수키의 머리부분으로부터 91명이 나열하고 있고, 신들은 만다라산을 휘감은 바수키의 몸통으로부터 하늘로 치솟은 바수키의 몸통으로부터 하늘로 치솟은 날렵한 꼬리에 이르기까지 88명이 나열하고 있다.
* 앙코르 와트의 남쪽 갤러리 서쪽섹션에 94에 달하는 수리야바르만 2세의 군사행럴이 조각되어있는 것은 그 선구라해야할 것이다 역사적 인물을 신화적 세계속에 병치하여 그 생생한 모습을 전하려 했던 것은 크메르 에술가들의 창작이다. 비록 왕이라 할지라도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살아있는 인간을 신화의 세계를 구현한 성전속에 조각한 것은 앙코르와트를 효시로 하는 것이다 그 전통이 49년 후에 바이욘사원으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것이다
[진랍풍토기]
* 실녀 - 아직 시집을 가진 않은 처녀
* 도이잡기 - 스캔 35
* 진담(陣毯) - 미성년의 남•여. 부잣집 딸은 7살에서 9살 사이에, 가난한 집은 적어도 11살에 이르기까지는 반드시 승려나 도사에게 명하여 그 동신의 처녀막을 제거케 하는 의식
* 관청에서는 중국의 4월에 해당하는 한달 사이에 처녀가 진담을 해야하는 집에 큰 양초를 하나 지급한다. 그 양초 어느 부분에는 시각을 나타내는 눈금이 그려져 있다. 진담이 양속된 그날 황혼에는 촛불을 켜게 되는데, 황혼이 어두워지면서 그 시각의 눈금까지 타들어가게 되면 바로 그 때가 진담의 시각이 되는 것이다.
* 진담이라는 제식의 중요한 의미는 근원적으로 여성을 어렸을 때 이미 순결이나 정조라는 도덕의 관념으로부터 공적으로 해방시키는 것이다. 또한 여성을 일찍 가정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켜 독자적 삶을 살게 함으로써 사회적 노동력을 확보한다는 의미도 된다.
* 크메르 사회는 노에가 분명 있었지만 인도의 카스트적인, 그러니가 수드라나 불가촉천민과 같은 그런 노예가 아니었다. 그들은 직책ㄷ에 의해서 분류되는 사람들로서 성스러운 상원을 자유롭게 활보했으며 돌기둥의 명문에도 그 이름이 들어가 있기도 했다. 그들은 사람의 노예가 아니라 신의 노예였다.
* 처녀막의 피를 신부 본인. 신부의 부모 그리고 제식에 모인 친척 전원의 이마에 찍는 것인데, 이것은 바로 악마를 가지고 악마를 방어하는 액땜의 제식이며 동시에 악마와의 화해를 의미하는 것이다. 오늘날 인도여성들이 이마에 빨간점을 찍는 화장법의 습관도 그 원초적 유래를 따져올라가면 이러한 습관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우리 나라 전통혼레에서 연지(뺨에 점을 찍는 것)와 곤지(이마에 찍는 것)의 유래도 고대사회의 진담과 같은 어떤 풍습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앙코르 톰]
* 앙코르 - 도시, 톱 - 크다 : 거대한 도시
* 12세기말에서 13세기 초 자야바르만 7세가 불교 사원으로 지은 바이욘 사원은 앙코르 톰의 중심으로 앙코르와트 북쪽 1.7킬로미터 지점에 있다. 크메르 왕조의 마지막 수도인 앙코르 톰은 그 규모를 비교하면 앙코르와트가 지어진 시대의 앙코르보다 훨씬 거대한 도시이다.
* 앙코르와트에서 북쪽으로 1.5km떨어져 있다. 가로 3 km 세로 4km인 장방형 모양인 앙코르톰은 높이 8m로 홍토석 라테라이트 성벽과 너비 약 100m의 수로로 둘러싸여 있었다. 인구 100만의 사방 10km로 뻗어가던 도시였으나 현재는 석조물 만이 옛날의 영광과 상처를 가늠케하고 있다
* 왕궁의 왼편에는 피메아니카스 사원(Pimean Akas)과 바푸온 신전(Baphuon)이 있고, 그 위쪽으로는 코끼리 테라스(Elephant Terrace)가 있다.
* 해자를 가로 질러 들어가는 다섯 개의 다리(코즈웨이)가 있고 5개의 웅장한 고푸라가 대문 역할을 하면서 서 있다. 남.북.서에 하나씩 있으나 동쪽에만 두 개가 있다.
* 남문의 나가 발루스트레이드 - 신54명, 악마54 전부 108개의 석상이 난간기둥(발루스터)의 기능을 하고 있다.
* 다리 양쪽으로 신과 악마가 나열하고 있기 때문에 바수키 뱀은 한 몸통으로 연결될 길이 없다. 따라서 바수키 뱀은 좌우 대칭의 두 마리가 될 수 밖에 없다.
* 다리의 상징성은 우유바다휘젓기 신화와 관련이 있다기보다는 나가는 무지개를 상징하며 그 무지개는 인간의 세계와 신의 세계를 연결하는 다리라는 것이다. 이 다리는 성과 속을 연결하는 무지개다리로서 더 강렬한 상징적 의미가 있다.
* 앙코르 톰은 우유의 바다 한복판의 만다라 산이며 불사의 감로수를 생산하는 영원의 땅인 것이다.
* 남문의 54명의 신과 54명의 악마가 양옆에서 지키고 있는 나가의 다리는 결국 여자의 성기로부터 태어나서 여자의 성기로 다시 회귀하는 인간의 운명을 상징하기도 하며 성과 속을 연결하는 무지개이기도 할 것이다.
* 앙코르 와트가 비슈누신앙의 산물이라면 앙코르 톰은 이미 관세음보살의 대승신앙에 의해 지배된 사원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는 108이라는 숫자의 의미를 불교적으로 연상시켜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 다리가 5개이며 앙코르 톰의 다리 석상은 총 540개가 되는 것이다.
* 남문을 나와 내려가다 보면 오른쪽에 프놈 바켕(동쪽)이 나타나고 왼쪽에 아코르 와트(서쪽)가 나타나고 그 중간쯤에 프놈 바켕이 있다. (프놈 바켕은 앙코르 남문으로부터 300m 정도 떨어져 있고, 앙코르 와트는 1.5㎞정도 떨어져 있다.)
[바이욘 사원]
* 앙코르 톰의 중앙 사원인 바이욘은 크메르왕조가 붕괴되기 직전인 1,200년 자야 바르만 7세에 의해 세워진 앙코르 사원 중 최후의 사원이다.
* 남문에서 북쪽으로 반듯하게 뻗은 길을 1.5㎞정도 올라가면 바이욘사원이라는 거대한 돌더미가 눈앞을 막는다. 이 사원은 명백하게 대승 불교의 영향을 표방하고 있다. 현재의 37개의 봉우리만 서있다.
* 한 봉우리에는 4면의 얼굴이 조각되어 있는 것이 원칙이지만 한 봉우리는 3면만 있기도 하고, 어떤 봉우리는 2면만 있는 것도 있다. 최중앙에 높이 솟아있는 세트랄 타우어는 매우 복잡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여기에 있는 수많은 얼굴들은 제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하나의 어떤 심층구조를 공유하고 있다. 그것은 미소와 명상이다.
* 자야바르만 7세의 현실적 얼굴에다 관세음보살상을 합친 모습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 참족에 의하여 점령된 국가를, 독립군을 조직하여 참족을 물리치고 수복한 탁월한 용사요 전략가였던 자야바르만 7세는 수많은 인간들을 전장의 잿더미로 만들고 왕위에 올랐지만 그는 그이 이미지가 무서운 무인으로서보다는 자애로운 민중의 어버이로서, 세상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는 자비로운 관세음보살로서 기억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 바이욘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자야바르만 7세의 두상이 아니라, 사방 600m에 이르는 외부 회랑을 장식하고 있는 장대한 석벽부조였다. 이 석벽부조가 우리의 감동을 자아내는 가장 결정적인 사실은 이것이 인도나 크메르의 신화를 주제로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체험한 생생한 역사적 사실과아주 비근한 평소의 민중의 삶을 기로하려 앴다는 것이다.
* 바이욘사원은 그 사원을 지은 위대한 성굴 자야바르만 7세가 참족의 침탈로부터 크메르제국을 구원하고 재건한 그 전쟁의 액사를 기록하러했다. 바이욘 석벽화의 주제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그것은 "전쟁과 평화‘였다.
* 앙코르 와트의 벽화는 너무 완벽하고 너무 양식적이다. 바이욘의 벽화는 어설프고 거칠지만 생등하며 비양식적인 만큼 리얼하다. 그리고 혼란스러운 만큼 해석의 여지를 많이 남긴다. 또한 신화적 냄새가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 전쟁 장면 중간 중간에 일상적인 삶의 이야기가 끼워져 있다.
- 전장에 나가는 남편에게 거북이를 건네주는 여인의 애처로운 모습과 남편은 여인을 뒤돌아 보며 우악스럽게 거북이 목을 쥐고 있다.
- 16폭 바퀴가 달린 수레의 모습은 지금 현재 씨엠립의 시중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 입김으로 불씨를 살리며 밥을 짓고 있는 사람
- 전장으로 데리고 나가는 군량 맷돼지
- 가옥구조를 알 수 있는 벽화
- 아이들의 서캐를 잡아주고 있는 엄마
- 애기 낳는 여자와 산파
- 크메르 여인의 손을 잡고 희롱하는 이방의 중국인
- 멧돼지 싸움에 흥을 돋우고 있는 크메르인
- 식당안의 모습
- 공병들의 모습
- 서당과 같은 학교의 모습
- 월사금으로 닭을 내고 있는 모습
* 군대나 민간인 중 중국인이 상당히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 차이나 타운이나 중국인 주저집단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을 헤아리게 만든다
* 이 방대한 외부회랑 말고도 바이은사원에는 80m x 70m에 이르는 내부회랑이 있다. 이 내부회랑에는 ‘라 마야나’와 ‘마하바라타’의 신화적 모티프가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자야바르만 7세가 만든 것이 아니라 후대 에 바이욘사원의 불교적 성격을 거부한 자야바르만 8세의 작품으로 간주되고 있는데 그 조각이 조잡하고 성격이 불투명한 것이 많다
[바푸온 사원]
* 바이욘사원을 벗어나 북쪽으로 올라가면 11세기 중엽 우다야디타바르만 2세의 야소다라뿌라 국가신전이었던 거대한 바푸온사원이라이 있다.
* 중국인 주달관의 기록에 의하면
‘금탐에서 북쪽으로 이르는 1리 정도의 거리에 동탑 1좌가 있다. 그것은 금탑에 비해 더욱 높다. 바라보면 울창한 모습이 압도적이다 그 아래에는 또한 돌회랑 십수 칸이 있다’
- 금탑은 바이욘 사원의 중앙탑을 말하는데 당시는 금으로 도금을 했을 것이다.
- 동탑은 바푸온사원의 중앙탑을 말한다. 당시에는 50m 높이의 목조의 꼭대기에 동으로 만든 탑을 있었을 것이다.
* 바푸온 최외곽 북벽, 다 쓰러져가는 거대한 돌담 아래 4각으로 뚫린 소문을 지나가면 ‘피메아나카스’라는 또 하나의 충격적인, 천상의 궁전을 만나게 된다
[피메아나카스]
* 피메아나카스는 규모는 크지 않지만 매우 유니크한 성격이 있다 이곳은 오로지 왕이 제사지내기 위한 순수한 제단으로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 3단의 피라밋은. 시간과 공간을 달리하는 전혀 상호교섭이 없었던 이질적인 문명이었지만, 마야문명 유적지군에서 발견되는 피라밋 제단과 너무도 흡사하다. 4방으로 나있는 가파른 계단과 그 꼭대기에 지어져 있는 신전, 그 양자의 디프 스트럭쳐에는 놀라운 공통점이 있다. 피메아나카스는맥시코 유카탄반도의 치첸잇차에서 본 피라밋, 엘 카스틸로를 연상하게 한다.
* 엘 카스틸로는 9단으로 되어 있지만. 피메아나카스는 3단으로 되어 있다. 가파른 계단 양옆으르 각단마다 돌출된 받침대 위에는 후리미끈하게 고재를 쳐든 늠름한 사자들이 지키고 있다. 그러니까 한 계단에 6개의 사자가 있다. 그리고 각단의 코너에는 코끼리가 코를 늘어뜨리고 있다. 그린데 코끼리가 사자보다 작게 조각되어 있다. 계단은 매우 가파르다. 서편계단이 악간 완만한데 왕도 이 서편계단을 이용했다고 한다. 이런 계단을 밤에 성장을 하고 오르내리려면 여간한 담력과 몸의 균형감각이 없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마야의 계단은 더 가파르다 그러니까 더 비인간적이다. 마야의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죽은 왕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마야인들은 그렇게 왕의 체력을 가늠질했다.
* 꼭대기 중앙에 있는 지성소에 대한 주달관의 이야기
- 궁궐의 한가운데는 금탑(피데아나카스)이 있다. 국왕은 밤이 되면 이 글탑 아래 지성소 위에 드러눕는다. 지역 사람들미 모두 나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탐 속에는 머리가 아홉 개 달린 뱀의 정령이 살고 있는데 그는 이 나라의 토지으 주인이다. 이 정령은 매일밤 여자의 몸으로 변하여 나타난다. 국왕은 먼저 이 여인과 동침하여 섹스를 해야한다. 이 시각에는 국왕의 부인이라도 감히 들어올 수가 없다. 두 번 북이 울리면(약 4시간이 지나면) 국왕은 이곳에서 나와 비로소 처첩과 함께 잠을 잘 수 있다. 만약 이 정령이 하릇밤이라도 나타나지 않으면 해당 국왕은 죽음의 때에 이르게 된다. 만약 국왕이 하룻밤미라도 이 성소에 가지 않으면 반드시 재앙을 얻게 된다.‘
* 피메아나카스는 라젠드라바르만 2세 때 착수되었다가 반데이 스레이가 지어진 자야바르만 5세 때 그 일부가 지어졌고 수리야바르만 1세 때 그 중앙신전 금탑까지 완성되었다. 피메아나카스는 앙코르 톰의 전체 플랜에서 보면 중앙에 위치해 있다. 피메아나카스에서 동쪽으로 걸어나가면 엘레판트 테라스(코끼리 데라스)라고 하는 거대한 광장이 나온다. 그 테라스로 나오기 전에 화려한 왕궁의 정문을 지나게 되는데 그곳에는 매우 정교한 산스크리트 명문이 새겨져 있다. "적의 왕의 머리에서 화려하게 빛나는 보석의 빛으로 인하여 이 위대한 왕의 발톱이 빛났다."라는 내용이다.
[코끼리 테라스]
* 피메아나카스의 동쪽 정문을 지나오면 남북으로 300m 뻐친 사열대(테라스) 돌벽이 거대한 코기리들로 조각되어 있다.
* 사열대는 가루다(독수리)와 사자들이 번갈아 떠받치고 있다. 앙코르 와트보다 앙코르 톰이 더 우리에게 충격을 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성시의 다양한 공간기능이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 테라스 광장으 맞은편에 12개응 타워가 있는데, 이곳은 쟁송을 다루는 곳이다. 분쟁이 생기면 분쟁의 당사자들을 옥탑에 며칠을 가두어 버리낟. 그래서 쓰러지거나 부스럼이 나거나 하는 쪽이 죄인이 되는 것이다. 사람이 죄를 가리지 않고 하늘이 죄를 가린다 하여 ‘천옥(天獄)’이라 한다. 협의자를 붙잡아 기름이 끊는 냄비에 손을 넣게하여 손이 아무렇지 않으면 무죄고, 벗겨지거나 문드러지면 도둑놈이 되는 것이다.
[타 프롬]
* 바이욘 사원의 주인공인 자야바르만 7세가 왕위에 오른 지 5년만에 자기 엄마에게 봉헌한 사원이다.(1186).
* 입구의 관ㅅ음보살의 거대한 얼굴을 얹은 고푸라(제5 엔클로저의 고푸라)에서 이미 바이욘 사원의 내음새를 느낄 수 있다.
* 타 프롬사원은 바이욘과 매수 다르다. 원래의 이름이 ‘라자비하라’라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것은 순수하게 왕실의 수도원과도 같은 곳이다.
* 최외곽의 담은 동서 1㎞, 남북 650m나 된다. 과거에는 수도원 역내가 거대한 도시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12,640명이 살았다 한다.
* 제5고푸라에서 제4고푸라까지 약 500m에 이르는 기나긴 숲길이 뻗쳐있다. 양옆으로 치솟은 나무들은 이행나무로 이 나무의 수지로 가정에서 호롱불로 가장 많이 쓰인다고 한다.
* 타 프롬은 앙코르의 유적군 중에서 가장 그윽한 원시적 감동과 신비감을 던져주는 사원이다. 에페오(프랑스 극동학원)가 앙코르 유적들을 복원하면서 타 프롬은 19세기 발견 당시 모습 그대로 남겨두기로 함
* ‘툼 레이더’에서 안젤리나 졸 리가 낙하산을 타고 떨어진 곳이 야소다라뿌라의 중심 사원인 프놈 바켕이다. ‘춤추는 빛의 무덤’의 입구가 바로 타 프롬 사원이다.
* 사원 자체를 감싸고 있는 엔클로저의 범위는 250m∼220m 정도인데 그 내부구조는 매우 복잡하다.
* 남쪽 벽면에 있는 어떤 문은 로댕의 ‘지옥의 문’을 연상시킨다.
[닉 펜]
* 새끼 꼬인 뱀이라는 뜻으로 700m 평방의 4각 호수 안에 직경 14m의 작은 원형섬이 있는데 그 섬이 두 마리의 나가로 둘러쳐져 있는 모습에서 그 이름이 유래된 것이다.
* 동쪽에 나가의 대가리가 양쪽으로 쳐드록 있고, 서쪽에는 두 마리 나가의 꼬리가 새끼 꼬이듯이 서로를 휘감고 있다.
* 닉 펜은 자야바르만 7세가 붓다의 자비로 인간을 질병으로부터 구원하는 곳이다.
* 크메르 인은 인간의 질병은 죄악의 결과라고 믿고 있고 그 죄는 모두 발로 내려간다고 믿었다.
* 닉 펙은 질병(죄악)을 치료하기 위해 중앙에 4각의 큰 호수가 있고(70x70) 또 그 4면의 외곽에 4개의 작은 호수들(25x25)이 연접해 있다. 그리고 중앙호수의 한 가운데 동그란 섬 위에 붓다의 자비르 상징하는 사원이 우뚝 서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호수에는 무릎이 잠길 정도의 물이 담겨져 있어 약 8천명의 인원이 둘러 앉아 발을 물에 담고 치료를 하는 곳이다.
& 환자가 오면 먼저 진맥을 하고, 병과를 넷으로 분류한다. 그 4개의 병과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미 병과가 분류되었단 것 자체가 환자들에게 자기의 병이 나을 수 있다는 신심을 불어넣어 줄 수도 있다. 그러면 그 해당된 호수를 점벙거리고 걸어가서 그 굴(가운데 호수에 연결된 아취형의 굴) 속을 들어간다. 그리고 코끼리나 말, 사자, 인드라의 아가리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마신다. 그리고 다시 중앙 호수에 가서 부처님의 자비를 빈다.
[톤레 샵 호수]
* 톤레삽 호수 - 동정호를 무색하게 하는 동아시아 최대의 호수. 동정호는 2860㎢ 톤레삽 호수는 우기 때는 13000㎢이상으로 불어난다.
* 씨엠립
- 톤레삽 호수 위에 있는 도시로 샴족(타일랜드 사람들)을 물리쳤다라는 의미
- 앙코르 와트를 위시한 거대한 유적군의 게이트웨이 노릇을 하고 있다.
* 우리 남한의 두배 정도 되는 캄보디아(181,035㎢) 늪지대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낮은 거대한 평원이다. 그 가운데 톤레삽이라는 거대한 호수가 자리잡고 있다.
* 톤레삽으로부터 프놈펜의 메콩강 본류까지는 100㎞정도의 긴 지류가 연결되어 있다.
* 5월부터 10월까지는 습한 남서풍의 몬순이 강한 바람과 엄청난 량의 비를 몰고 온다. 11월부터 4월까지는 차겁고 건조한 북동북의 몬순의 영향으로 거의 비가 내리지 않는다.
* 우기때는 메콩강의 수위가 높아지면 강물은 남쪽의 프놈펜에서 톤레삽 호수로 역류하고 건기때는 톤레삽 호수의 풍부한 수량은 다시 메콩강의 물이 마르기 시작하면 톤레삽 호수의 물이 메콩강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 톤레삽 호수
- 지구상에서 단위면적당 고기가 가장 많이 사는 호수
- 1㎢당 5만톤 정도의 어획
* 입구에 총 크니스라는 수상마을
[프사르 짜아]
* 씨엠립에서 가장 큰 재래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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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열일 제쳐두고 오늘 홈피를 찾았는데 벌써 점심시간을 넘겼네요. 담에 다시 찬찬히 읽고 느낌표를 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