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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기행, 대초원 박하 香에 입맞춤하다
-한·몽 국제미술교류전을 치르며-
가을은 설렘의 창(窓)이다.
우린 그 창을 통해 사유(思惟)한다.
나는 미지의 몽골을 생각한다.
그 나라 하늘과 땅과 물도 생각한다.
위대한 정복자 칭기즈 칸도 생각한다.
그의 첫 사랑 보르테도 생각한다.
생각할 게 무진장 많다. 하지만,
자연의 경이로움과 인간의 위대함이 있는
그런 몽골을 사랑으로 간직하고 싶다.
시대를 그리는 민미협 사람들, 이 아름다운 절기에 작년 이어 올 8월 19일부터 26일까지 한·몽 간 미술교류를 우호적이고 진취적으로 펼쳤다. 결론을 미리 말하면 이번 한·몽 국제미술교류전은 작년 경험이 특효가 되어 진일보했다. 앞으로 더 알찬 교류가 확대되리라 믿는다. 여기에 참여한 한·몽 작가는 민미협 박흥순 회장을 비롯해 36명(비 민미협 회원 약간 명 포함)이었다. 무릇 우리 일행은 전시회 목적 외 7박 8일 여정으로 그동안 말로만 들어왔던 미지의 몽골을 직접 피부로 부대끼며 느끼는 것이다. 원초적인 자연 속에 그들의 생활, 문화와 예술, 역사 등 우리의 다양한 관심사를 체험하는 것이다.
첫 단추를 잘 끼었을까? 첫날 인천공항의 기상상태는 최적이었다. 우리 일행은 설렘 속에 달려오는 하늘을 가르며 3시간 가깝게 춤추듯 창공을 날았다. 그리고 12세기 영웅의 이름을 딴 ‘칭기즈 칸 국제공항’에 밝은 햇살과 호흡하며 초원에 미끄러지듯이 사뿐히 착륙하였다. 그곳엔 7박 8일 우리를 안내할 Bat 님이 얼마 전에 결혼한 그의 초보신랑 이삭과 함께 반가운 얼굴로 우릴 맞아줬다. 몽골기행의 앞날이 화창할 거라는 예감이 든다.^^
몽골의 첫인상, 우린 짐을 챙겨 곧바로 관광버스에 몸을 실었다. 벅찬 마음은 달리는 버스의 창을 통해 몽골을 하나씩 접수한다. 맨 먼저 들어온 풍경은 공항로 주변의 마을이었다. 70~80년대 우리나라의 어설프고 혼란스러운 모습과 흡사 닮았다. 울란바토르 시내에 들어서니 서울 못지않게 교통체증으로 좁은 도로가 거의 주차장 수준이었다. 반가운 모습도 보였다. 그 많은 차 중에는 우리의 대우·현대차가 눈에 띄게 많았다. 또 공산국가의 잔재처럼 느껴지는 전동버스도 보였다. 몽골은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옛 소련의 붕괴와 함께 사회주의도 저물어갔다. 이 과정에서 진정한 독립국으로 주권을 회복했고, 또 민주화의 길로 들어섰다. 그때부터 서서히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자연의 법칙인 밀물과 썰물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설렘의 첫걸음, 첫 방문지는 몽골 국립현대미술관이었다. 미리 와 있던 몽골 작가들은 이방인 우릴 보고 처음엔 서먹했지만, 금방 얼굴이 풀어지고 환한 얼굴로 맞아 줬다. 정말 오래된 죽마고우처럼 말이다. 작년에 왔던 작가들은 진한 포옹도 했다. 우린 다음 일정을 고려해 짊어지고 온 작품들을 서둘러 풀었고, 그들과 함께 디스플레이를 했다. 그런 뒤 만찬장으로 가서 술과 식사를 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서로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렇게 하루는 저물어 갔다.
말(馬)의 나라 몽골에서의 첫날밤, 일명 게스트 하우스 통나무 외양간. ㅋㅋ 겉모습만 통나무집인 이 숙소는 한국인이 운영한단다. 먼저 언어의 편안함 그리고 같은 민족이라 그랬을까? 딱딱한 군대식 2층 침대와 샤워 시설 부족에도 우린 별 불만 없이 기꺼이 받아들이고 여장을 풀었다. 비행기와 버스에 지쳐 있는 우린 그 침상에 대충 맡겨 버렸다. 그 틈에도 취침나팔 소리를 외면한 체, 한쪽에선 밤새껏 몽골 보드카파티가 벌어졌다. 새벽은 어김없이 오고 기상나팔 소리는 우릴 재촉한다. 차질 없는 전시회 오픈을 위해서란다. 고양이 세수, 번개 식사 등 모든 걸 그렇게 처리하고 후다닥 나왔다. 아뿔싸! 울란바토르 시내로 들어가는 길 역시 교통지옥이었다.
한·몽 국제미술교류전 성황리 개막, 몽골 국립현대미술관 갤러리에서는 오랜 친구처럼 인상이 편안한 몽골 국립예술대학 총장과 우리 측 박흥순 회장을 비롯해 많은 미술관계자의 참여 속 따뜻한 성원을 받으며 성황리 개최되었다. 여기서 특이사항은 박영균 작가가 서울서 준비해온 ‘스페셜 한-몽 미술교류 영상다큐’가 백미였다. 한마디로 감동의 물결이었다. 특히 몽골 작가들이 더~. 전시회 오픈을 기분 좋게 마친 우리는 그들과 같이 몽골 전통음식점으로 갔다. 그런데 몽골 특유의 여유랄까? 빨리빨리 문화에 젖어 있는 우리는 음식 기다리는 시간이 참기 어려울 정도로 지루했다. 그래도 시간이 약이라 했잖니? ㅎㅎ
헨티아이막과 세기의 지도자 칭기즈 칸, 여기서부터는 본격적인 몽골기행이다. 여행가 토니 휠러는 “여행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준다.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서로 돕는 것이다. 나에게 여행이란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라고 했다. 우리는 이 말을 상기하며 칭기즈 칸 고향 ‘헨티’로 마냥 달렸다. 가는 길에 우연히 이명박 대통령 몽골 방문을 지켜봤다. 도로 곳곳엔 몽골 경찰들이 쫙 깔렸었다.
칭기즈 칸의 어릴 적 이름은 ‘테무친’이다. 그리고 헨티아이막은 위대한 정복자의 고향이자 축복의 땅 드넓은 초원이다. 그래서 그는 대초원과 말이 자연스레 친구가 되었고, 높은 하늘과 강렬한 햇살은 큰 야망을 키울 수 있는 기운이 되었다. 또 그의 첫 사랑 ‘보르테’도 빼놓을 수 없다. 그녀는 내조자로서 역할을 다한 지혜를 겸비한 현명한 여인이었다. 테무친은 그녀의 헌신적인 사랑으로 훗날 강한 지장(智將)이 되었다. 결국은 여러 부족을 통합하는 데 성공하였고, 정치력에서도 출신이 아닌 능력에 따라 대우하는 가장 합리적인 인사제도를 펼쳤다. 이것이 몽골의 정신과 힘이 되었고, 더 나아가 세계를 지배하려는 원동력이 되었다. 또 당시 몽골의 기마문화는 최상의 전투력으로 활용되었다.
우린 연신 종마를 타고 칭기즈 칸처럼 광야를 달리고 달렸다. 동공 속으로 들어오는 것은 오직 지평선에 걸려 있는 평원과 하늘뿐이었다. 그 속엔 평화롭게 박하, 로즈마리, 허브 등 다양한 풀을 뜯는 소, 말, 양, 염소 떼의 모습이 정겹다. 또 이들을 몰고 가는 목동의 고단함과 외로움이 와 닿는다. 더 멀리 선 고즈넉한 게르에서 아련히 연기도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런 목가적 풍경은 정말 자연주의의 한 폭의 그림이요. 무릉도원과도 같았다.
몽골은 지리적으로 거친 스텝 지역이라 나무는 뿌리내리기가 어려운 토양이라고 한다. 하지만, 가축들이 좋아하는 향기가 가득한 약초나 다름없는 박하, 로즈마리 등은 잘 적응한다. 그래서일까? 지천에 널려 있었다. 그런 풀을 먹고 자란 가축들은 자연스레 육질이 매우 뛰어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나라는 산업화 과정에서 도시가 성장하고 유목민은 급격히 감소하는 실정이다. 그런데도 말을 비롯해 가축의 수는 국가 인구에 수십 배가 된다고 한다. 틈틈이 가이드 혜수(Bat)님이 서투른(?) 한국어로 몽골의 문화를 정성껏 설명해줬다.
또 분위기가 식어갈 즘이면 민미협 박흥순 회장이 불쑥 나타나 마이크를 잡고 구수한 달변으로 좌중을 휘어잡았다. 그 수준은 개그로 밥을 먹고 사는 사람을 뛰어넘었다. 어느 때는 오버해 목이 터지도록 노래도 했다. 그 덕분(?)에 한동안 목이 쉬어 말을 제대로 못 했다. 그건 박애 정신의 발로이자 말로였다. ㅋㅋ 이참에 아예 직업을 전환해서 몽골전문가이드로 나서길 이구동성으로 권했다. 이 순간 우레와 같은 박수~ ㅉㅉㅉ
또 여기에 박 화백의 대타로 평론가 최석태 회원이 등장, 故 권진규 조각가의 말 조각과 관련하여 ‘몽골의 기마문화’에 대해 진지하게 차내 강의가 있었다. 말의 기원에서부터 몽골 순수혈통 말(馬)의 장단점 그리고 장신구까지... 결과적으로 몽골은 어느 민족보다 말을 잘 다뤘기에 위대한 정복자 ‘칭기즈 칸’이 탄생할 수 있었음을 깨닫게 해줬다. 아무튼, 이 기회에 박 화백과 최 평론가를 통해 몽골의 역사와 일반상식에 대해서도 제법 터득하게 되었다. 그 감사한 마음 오래도록 간직하겠다.
여기서 잠깐, 우리가 지금 타고 다니는 이 말(대우버스)은 첫날 공항에 왔던 말이 아니다. 그 말이 너무 노쇠해서 가이드가 부탁해 다음날 힘 좋은 종마로 교체한 것이다. 또 여기에 우릴 여행 마치는 날까지 수호할 기마 장군은 바로 ‘가가’라는 젊은 몽골 친구였다. 얼굴은 조금 시금털털하게 생겼지만, 인간 내비게이션이나 다름없었다. 이정표도 없는 그 대제국을 눈감고도 구석구석 찾아가는 그런 지능을 가진, 양고기를 무척 잘 먹는 몽골리언이었다. 어쨌든 우리는 여행 끝나는 날까지 그에게 운명을 담보하고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몽골은 한마디로 칭기즈 칸으로 시작하여 칭기즈 칸으로 끝나는 나라였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곳곳에 대형 조형물이 힘의 상징처럼 서 있었다. 더불어 그의 위대한 영웅적 정신 또한 사회, 정치, 문화, 예술, 스포츠 등 깊숙이 파고 들어가 민족정신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잊을 수 없는 다양한 체험 그리고 테를지 국립공원, 우린 기회가 있을 때마다 몽골을 배우고 익혔다. 첫 체험은 헨티의 소금호수에서다. 이곳은 염도가 높고 여러 물질이 함유된 미끈미끈한 물이었다. 피부병에 아주 특효란다. 우린 몽골인과 뒤섞여 그 곳에서 어린애처럼 수영과 머드팩으로 망중한을. 그리고 헨티 캠프를 떠날 때 전통의상을 입은 몽골 처녀가 떠나는 우리에게 일일이 인사하며 마유주를 마시게 했다. 또 우린 ‘헨티’에서 ‘테를지’로 가는 도중에 잠시 위대한 칭기즈 칸의 오벨리스크型 유적碑를 감상했고, 그가 마셨다는 약수터에서 약수도 경험했다. 그 주변 초원에 群을 이뤄 환하게 핀 야생화는 더 장관이었다.
‘페를지 국립공원(세계자연유산지정)’에 도착한 우린 이곳 캠프에 여장을 풀고 이틀을 묵었다. 캠프 가까운 곳에 거대한 거북바위가 있었는데 그 위용에 감탄했고, 또 병풍처럼 펼쳐진 주변의 기암괴석과 협곡은 쥐라기 공원과 금강산이 연상되었다. 사뭇 드넓은 평원과는 전혀 다른 고생대의 느낌이었다. 여기저기엔 그런 분위기에 걸맞게 공룡의 모형들이 디오라마처럼 펼쳐져 있었다. 우린 여기서 간단히 승마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몽골 현대의 영웅 ‘수흐바타르’ 장군처럼 무게를 잡으며 무려 2시간 동안 머리카락 휘날리며 말을 탔다. 필자인 내게도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이었다. 이밖에 낙타 타기, 독수리 다루기, 사막걷기와 양고기 전통요리(허르헉-구운 돌을 몸통에 넣고 다시 익힌), 이름 모를 짐승요리 등 다양한 생활문화 체험을 신기하고도 즐거움 마음으로 경험했다.
전시 기행 중 어려웠던 일, 먼저 대초원에서의 배설. 문명이전에는 별일 아니었겠지만, 지금에는 난감한 문제. 급한 나머지 버스를 중심으로 앞쪽은 남성, 뒤편은 여성들이 열린 자연을 향해 통쾌하게 실례했다. 그러고 보면 이 나라는 뒷간이 온 천지다. 이곳 사람들도 들판에서 일을 보고 싶으면 여성들은 ‘양(羊) 보러 간다.’ 남성들은 ‘말(馬) 보러 간다.’로 통한단다. 프로이트 말이 생각난다. ‘사람은 배설을 통하여 질서라고 하는 사회적 관념을 배운다.’ ㅎㅎ 또 샤워시설 부족으로 여성들의 어려움이 더욱 컸다. 그리고 이번 기행 팀원 중에 엄마 따라온 6살 난 마스코트 주현이가 있었다. 초반엔 아무 탈이 없었는데 결국 아팠다. 필자 또한 치통으로 몇 날을 고생했다. 의료시설이 없어 감당할 길이 없었다.ㅠㅠ
전시 기행 중 행복했던 일, 세상 모든 여자는 어머니이다. 나는 이 말을 실감했다. 이번 몽골기행에는 큰누나에 큰언니격인 김종례 회원, 민미협 김영중 부회장을 비롯해 여러 여성회원이 참여했다. 그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한국에서 고추장을 비롯해 맛있는 여러 반찬을 손수 마련해 온 것이다. 그래서 회원들이 몽골 음식이 느끼해질 때면 곧바로 내놓기도 했다. 또 수시로 대형 마켓을 찾아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챙겨오곤 했다. 그때마다 잃어버렸던 입맛을 되돌려 줬다. 그뿐만 아니라 기행 끝나는 시점까지 뒷일을 챙겨줬다. 이에 공로상이라도 줘야 후한이 없을 듯...^^
몽골의 옛 수도 ‘하르허린’ 그리고 에르덴조 사원, 우리가 찾아간 날은 공교롭게도 잔뜩 흐린 날이었다. 바람도 세차게 불었다. 번개와 천둥도 동반했다. 하지만, 몽골에서 비는 보물이다. 몽골의 1년 평균 강수량은 약 200mm 정도란다. 그런데 우리가 몽골기행 4일째 되는 날부터 사흘 동안은 한국의 장맛비처럼 그랬다. 짧은 시간에 1년 강수량 반은 온 듯했다. 우리에게는 약간의 불편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에게는 단비를 만나 더없이 행복했던 일로 기억된다. 결국, 우리는 비를 몰고 다니는 물의 전령사들이었다.
이곳에서의 특별한 기억은 하르허린 가는 길이었다. 평소 다니던 길은 비에 젖어 있었다. 우리의 수호전사 ‘가가’는 사고를 염려했을까? 새 길을 만들며 개척자처럼 질주하였다. 조금은 두려웠지만, 처음 밟은 땅의 기운은 우리의 온몸으로 에너지처럼 스며들었다. 전율을 한껏 느끼며 부풀렸던 마음은 캠프에 도착해서도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우린 전날 못한 허르헉 양고기 몬도가네 파티가 끝내 이뤄졌다. 일부 회원은 살생을 보지 않겠다면 일부러 그 자릴 피했다. 또 그 후편으로 야밤에 뜬금없이 황재형 화백의 부부가 캠프 내 게르를 각각 돌며 각설이타령으로 익살을 피웠당. 덩치에 걸맞지 않게...ㅋㅋ 그날 밤 찬조금이 제법 모금되어 뒷날 잘 활용되었다는 후문이다.^^
다음날, 단비를 맞으며 하르허린 캠프를 떠나 에르덴조 사원으로 향했다. 이 사원은 멀리서 보며 그리 크게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가까이 가보니 그 느낌은 완전히 달랐다. 면적도 넓었고, 건물 또한 작지 않으면서 고풍스러웠다. 내부는 매우 화려했다. 몽골은 모든 것이 그렇다. 워낙 땅이 넓다 보니 상대적으로 건물이나 조형물이 작아 보일 뿐이다. 이 사원은 108번뇌를 상징하는 108개의 석탑을 사방으로 담처럼 연결하였고, 그 안에 몽골 최초 라마사원을 축조한 것이다. 13세기 칭기즈 칸의 아들 오고타이 칸이 유럽으로 확장하면서 이곳에 세운 것이다. 건축 양식은 다른 사원과 달리 이슬람 양식을 혼합한 것이다.
기행 후반 몽골 알타이 리조트에서의 추억, 우린 또다시 에르덴조 사원을 떠나 울란바토르로 달렸다. 이젠 그동안 타고 다녔던 말과 사람도 매우 지쳐있었다. 비도 여전히 내렸다. 그런데 얼마쯤이었을까? 지성이면 감천, 정다운 간판이 보인 것이다. 한국인이 운영한다는 주변 풍경이 매우 아름다운 ‘몽골 알타이 리조트’였다. 드뎌 휴식타임.^^
여긴 엘승타사르해 사막지대와 이어지는 곳이다. 하얀 모래와 초원과의 조화로움, 또 원경은 하늘을 찌를 듯 뾰쪽한 높은 암산이 절경이었다. 우린 이곳에서 잠시 공간을 빌려 휴식을 취하며 점심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조금 후 빅뉴스가 터진다. 동행한 우리 회원과 이곳 리조트를 운영하는 대표하고 친구사이란다. 결과적으로 적은 비용으로 이곳에서 하루를 묵기로 했다. 그 소식에 모두가 환호했다. 그래서 그날 오후는 한가롭게 말~타기와 모래언덕에 곧 지워질 여행의 발자취를 남기며 주변 자연경관 속으로 빠져들었다. 서서히 땅거미가 질 무렵, 서울에서는 무상급식 찬반투표 결과가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또 저 멀리선 우릴 감싸듯 행운의 무지개가 자연이란 화폭 위에 매혹적으로 크로키~했다.
다음날, 우리는 울란바토르로 돌아와 전시장에서 차분히 작품을 꾸렸고, ‘수흐바타르’ 광장으로 나와 마지막 단체 기념사진을 찍었다. 또 틈새를 이용해 어느 소극장에서 화려한 몽골 전통 민속공연을 의미 있게 관람하였다. 그다음은 몽골작가와 서울 클럽으로 가서 한식을 먹으며 서로의 우정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내년을 기약하고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이제는 기행문 마무리 시간,
가을의 창(窓)은 Art이다.
Art는 Aura이며 화가의 참된 벗이다.
우리 함께 Art와 Aura를 사랑하자.
이것이 이번 한·몽 국제미술교류전의 화두이자 미래의 다짐이다.
여행가 토니 휠러의 말, “여행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준다... ”를 다시 상기한다. 그렇다. 우린 짧은 일정 속에 많은 사람을 만났다. 또 몽골의 자연, 드넓은 초원~ 푸른 하늘~ 하얀 구름도 만났고, 단비를 뿌려주는 검은 구름도 만났다. 그들의 天-地-水를 진정으로 섬기며 사는 위대한 모습도 만났다. 우린 이 에덴과도 같은 때 묻지 않은 자연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이번 한·몽 국제미술교류전을 지원한 몽골 국립예술대학교 Bumandorj. L 총장님과 몽골기행 끝까지 동행하며 수고한 몽골작가 S. Badral~, Jadamba Shagdar~님 또 안내자 Bat~님도 사랑한다.
끝으로, 처음부터 마지막 날까지 아낌없이 수고하신 민미협 박흥순 회장님과 이구영 회원님께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또 이 두서없는 졸필을 읽어 주신 회원님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늘 건강과 행운을 빈다. 꾸벅^^
-한·몽 국제미술교류전에 참여한, 我雨裸 이성완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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