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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소설)
Speck
趙 官 善
1
비록 지방대학이지만 법학과라는 단순한 이유 하나만으로도 그는 입학초기에 꿈이 컸었다. 아니할말로 자신의 학력이나 이력에 단순한 스펙 한줄을 더 올리기 위해 국내에서 가장 높은 경쟁률에 도전했다거나, 그런저런 막연한 심정으로 법학과에 도전한 것이 아니었듯 그는 두 손에서 법전을 놓지 않았다. 기왕이면 도성의 사대문 안에 소재한 대학이나 수도권에 소재한 명문대학에다 자신의 학적을 올려놓고 싶었지만 그는 그것이 언감생심임을 모르지 않았다. 전국의 가장 우수한 머리들이 등용을 위해 호시탐탐 한 곳에다 초점을 맞추고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성에 밀려 그는 자진하여 한발 뒤로 물러서기를 주저하지 않았었다. 그리하여 재학 중에 응시했던 사시에서 1차 합격자 명단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한 과거사가 있었지만 그래도 그 길이, 그 고지만이 자신이 정복해야 할 유일한 길이며 고지임을 작심했고 언젠가는 그 길에서 자신의 방점이 찍힐 것이란 것에도 믿음이 컸었다. 때문에 대학을 졸업하고도 그는 직장 쪽으로 눈길을 돌리는 대신 곧바로 고시원에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그에게 내재된 히스토리 중의 하나였다.
지독한 이기주의가 아닐 수 없었다. 출세주의에 매달려 연로하신 홀어머니를 매형과 누님에게 보살핌을 부탁하고 그는 주위를 둘러보는 일에도 소홀했었으며 그 세월 또한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자기이기自己利己의 세월 속에서 끝내 노친과의 영원한 이별을 맞이해야 했지만 그는 자신의 존재가치가 어디에 있는가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어머니가 지키고 있던 얼마 되지 않은 전답과 남루한 주택을 처분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효용가치가 하락할 뿐 여하히도 보존가치가 없다는 자기지론과 자신의 목표점에 적으면 적은 대로 효용성이 있을 것이란 기대치 때문이었다. 아울러 그가 어머님의 분신과도 같은 남루한 유산을 처분하고자 했을 때 누님과 매형의 만류가 있었지만 고맙게도 매형과 누님은 자기들의 몫을 주장하지 않았었다. 돌이켜보면 가슴 아픈 기억의 한 페이지에 다름 아니었다. 그렇듯 고향에서의 어머님의 흔적을 지우고 마련한 자금도 보태어져 그렇게 고시원 생활에 충당했었지만 그렇다고 은행계좌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은 액수는 흡족한 미소를 안겨주지를 못했었다. 그 또한 불과 몇 년 전의 일이었다. 자신에게 허용된 시간이 무한하지 않다는, 절망감이 또아리를 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또한 그는 그러한 현실성을 간과할 수 없었다. 자신에게 점지되고 할애된 세상은 더 넓고 높은 것이라던 자만과 자신감이 모두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간, 주먹 속에 남아있는 촌각의 시간을 목전에 두고 그는 다음 기회를 도모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임을 깨달아야 했다. 그에게 있어 그 문제는 기어코였다.
목표점의 거리를, 접근의 정도를 짐작도 할 수 없는 싯점에서 계좌 속의 금전이 모두 쇄진하자 그는 자신의 진로를 고민했다.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건강한 남자로서 부여된 당연한 과제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에 그는 순간적으로 ‘오마이 갓’을 외쳤었다. 그를 초대한다는 듯 안내문은 도처에 있었다.
그는 부사관으로 자원입대했다. 명분상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의 행태였지만 궁극적인 원인은 계좌에 찍힌 은행잔고가 원인의 전부였다. 물론 대한민국의 건장한 남자로서 한 번은 치루어야할 국가에 대한 의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라도 마냥 미루는 것이 이롭지만은 않을 것이란 나름대로의 계산도 작용했던 게 사실이었다. 비록 긴 시간은 아니지만 부사관 복무로 인해 계좌에 찍힐 금전의 액수도 나름대로 계산했었으며 전역 후에 자신의 목표점을 정복하기 위한 시간의 허용치도 계산 속에 넣어야 했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이 어떠한 경우이든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의 방법론임을 명심해야 했다. 그렇듯 그는 애초부터 부사관으로 청춘시절을 마감할 생각이 없었으며 그리해서도 아니될 일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이미 한참이나 지난 시간의 저쪽에서 바벨탑을 향하여 몇 년의 시간을 투자한 과정론이 아니더라도 자신에겐 정복해야 할 고지가 두어 발짝 앞에 분명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아니할말로 대학을 졸업하고 전공을 찾아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시간을 잡아먹으며 세월을 허비하다 보면 배필이나 천생연분이라는 명분의 짝이 생기고, 아이가 생기고, 그리고 그저그런 삶을 영위하다가 아주아주 평이한 생애를 마감하게 될 수도 있겠지만 인간의 분복이, 인간의 가치가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를 상이하게 소유하고 출생한다는 미신론적 사고思考 또한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일보 후퇴의 결심에 피리어드를 찍도록 부추긴 유일한 방법론에 그는 서둘러 부사관원서를 제출했었다.
2
그는 이즈음의 몇 개월간을 통장의 잔고만을 생각했다. 자기만의 바벨탑을 정복하고자 방향을 설정하고 준비해야할 것들의 목록을 하나하나 적어나가면서도 가장 커다랗게 대두된 통장의 잔고를 염두의 바같 세상에 놓아둘 수 없었던 것이다.
그가 계획한 연한은 이 년이었다. 그 이 년 동안에 필수적으로 소요될 금전의 액수를 계산했을 때 단 한 푼이라도 허투로 허비하면 사단事端이 발생할 수치의 금액이 계좌의 끝자락에 가부좌를 틀고 있다는 게 약간의 불안요인이기도 했지만 그는 그러한 불안전한 요소에 대해 누님과 매형에게 도움을 청해볼 요량이었다. 바늘구멍보다 좁은 통로를, 길을 뚫고나가자면 여타한 계산에도 소흘함이 없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는 철저히 계산기를 두드렸다. 매월 소요될 고시원 임대료와 학원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여하히도 제외할 수 없는 식음료비, 아울러서 없어서는 아니될 도서구입비와 독서실 이용료 등은 이미 정형화 돼 있는 액수였기에 필요금액의 계산은 어렵지 않았다.
여유가 없는 금액이었다. 도전해야할 고지를 가슴속에 넣고 꼬박 4년 여를 노심초사하였지만 만에 하나 예상치 못한 일들이 발생한다면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이 와해되는 사상누각보다 못한 결과가 목전에 도사리는 위험한 계획이었다. 그에게 대두된 불안감의 원천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그는 한동안 전역을 망설이기도 했었지만 직업군인으로서의 사명감보다 이미 오래전에 설정해놓은 자신의 길에서 이탈하는 것이 오히려 인생의 패착이 될 것이라는, 가슴에 음각된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고민과 번민으로 며칠 낮밤을 지새우고 그는 망설임을 물리치고 전역서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휴가를 청원하고 하명 날짜를 기다렸다. 명분이 휴가였지 사실 휴가와는 거리가 먼 미래로의 도전을 위한 또다른 걸음의 시작이었다. 휴가라야 갈 곳은 오로지 한 곳, 누님과 매형이 있는 동해안에 위치한 바닷가 마을이 유일했다. 담보되지 않은 미래를 추구하고자 흘린 피땀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신이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했고, 가장 많은 부분을 알고 있는 세상사에서 지난 시간의 한 페이지를, 상류사회로의 꿈을 꾸었었다는 사실성은 더 이상 군복을 입어서는 아니될 것이라는 생각의 촉매제가 됐던 것이다. 그의 그 휴가가 부사관 생활을 마감하는 마지막 휴가임을 아는 사람은 그때까지 아무도 없었다. 앞으로의 진로를 자신 속에 깊이 감추고 대두된 하나하나를 그는 그렇게 진행해갔던 것이다.
“매형! 전역할까 해요. 아무리 생각해도 제 길은 따로 있어요. 한 이 년을 계획하고 준비할까 해요. 그런 다음에 도전해볼 생각인데……. 물론 쉽진 않겠지만 그래도 지금 이 생활은 내가 갈 길이 아니라는 결론이…….”
그는 아직 존재하는 군인정신을 앞세워 자신 있다는 어조로 앞에 앉은 매형과 누님에게 자신의 진로를 발설했다. 시간적으로 이 년이면 충분할 것 같았다. 전공은 물론이거니와 재학 중에 이미 한 번 발을 들여놓았던 세상이라 막연한 도전이 아니기에 그는 자신감을 그렇게 풀어놓았던 것이다.
“난다긴다 하는 사람들도 어려워 한다는데 처남 고생만 하는 거 아니가? 나야 그 방면으로는 잘 알지 못하지만…….”
매형의 걱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 않았지만 그는 이 년이면 충분한 시간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속내에 자리잡고 있는 기우를 앞세워 안전장치를 걸어두어야 한다는 생각도 절대 배제하지 않았다.
“매형! 혹시 알 수 없어서 그럽니다. 제가 준비한 돈으로 이 년을 준비하려고 하는데 만약 그 기간에 패스하지 못한다면 매형이 일 년만 뒤를 봐 주십시오. 삼 년이면 정말 충분합니다. 부사관생활을 하면서도 틈틈이 책을 손에 들고 있었기 때문에……, 장담합니다.”
그렇게 하여 그의 사 년 여의 병영생활은 종료되었으며 곧바로 상류사회로 향하는 방향타를 잡고 두 번째의 항해를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세상사 무엇 하나 녹록한 게 없음을 알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의 상류사회로의 걸음발은 계속하여 목전에서 도돌이표를 만나야 했다. 그리하여 기약없는 기다림은 영육의 고통을 수반하게 했다. 하지만 자신이 목표한 그것이 아니고는 눈길을 돌릴 만한 것이 세상 어디에도 없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전역하면서 계획했던 모든 그래프의 꼭지점 아래에 뚫린 휑한 구멍을 메우고자 그는 서둘러서 누님과 매형을 찾아야 했다.
3
그날, 매형은 늦은 시각에야 돈을 마련했다며 그의 손에 일천만 원을 들려 줬다. 매형이나 누님네로선 거금이었다. 일천만 원의 배액을 손에 쥐고 이 년이라는 세월을 버티기도 해봤었지만 매형은 물론 그로서도 쉽게 만져볼 수 있는 금액이 아닌, 거금이었다. 그 돈이라면 꼬박 일 년 동안은 돈 걱정 하지 않고 한 번 더 공부에 매달려 시험 때까지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첫차로 올라가라는 매형의 말에도 그는 서둘러 막차를 탔었다. 막차라서인지 빈 자리가 별로 보이지 않았다. 그의 자리는 창쪽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승차권 번호의 좌석에는 이미 누군가가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나이를 짐작할 수 없었지만 젊은 여자였다. 차내 불빛에 얼굴을 드러낸 여자는 나름대로 흡인력을 갖추고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가 자신의 좌석번호를 확인하며 통로쪽의 빈자리 곁에서 머뭇거렸다. 좌석번호는 창쪽을 지정하고 있었다. 순간, 창쪽 좌석에 앉았던 여자가 자리를 옮기는 시늉을 했다.
“괜찮다면 그냥 앉아계세요. 제가 이 자리에 앉겠습니다.”
먹은 마음도, 준비도 없이 그는 창쪽 자리를 여자에게 양보했다. 여자가 목례를 앞세우며 옮기려던 시늉을 접고 있었다. 버스가 출발하고 차체가 조금씩 흔들거리자 자신의 몸피로 인해 옆 자석의 여자가 불편함을 느낀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해서 가능한 대로 그는 몸피를 자꾸 통로쪽으로 기울이고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괜히 저 때문에…….”
여자가 정말 죄송하다는 표정을 담아 말을 건네왔다.
“아, 아닙니다. 제가 쓸 데 없이 몸피만 커가지고요.”
“겸손하신 말씀을-요. 전 몸피가 큰 분들이 보기 좋더라구요. 우선 믿음직하잖아요.”
그가 무어라고 대답을 했는지는 정말 지금도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오랜만에 친척 집엘 다녀간다는 것과 이번이 세 번째 방문이라는 것, 항구가 외국영화에서나 본 듯한, 볼 때마다 아름다운 도시 같다는 여자의 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의미 없는 웃음을 흘렸다는 게 P와의 첫 만남에 대한 그의 기억의 전부였다. 터미널에서 헤어지기 전에 그는 여자에게 에프터를 제의했다.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헤어지기가 싫었다는 것이 그의 진정한 속내였다. 누구의 흡인력이 강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P의 속내에도 그와의 약속없는 헤어짐을 기대하지 않았으리라는 게 그의 결론이었다.
그렇게 만나지게 된, P와의 만남이 필연이길 바램한 건 자신만이 아니라고 그는 미루어 짐작했다. P 또한 누군가를 만나야 할 시기를 넘기고 있다는 것에 그는 안도했다. 바벨탑을 정복할 때까지는 어떠한 경우라도 한눈 팔지 않기로 각오한 그였지만 사람이 사람과의 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거나, 미래를 예측하거나 예견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용이한 것이 아님을 그는 알지 못했었다. 그렇게 시작된 만남이었고 지속성을, 나아가 해피엔딩까지를 기대했던 그였다. 만나는 횟수와 비례하여 미래를 설계하는 정도도 깊어갔으며 구체적이고 노골적이 되어갔다. 학부 4년에 모든 학생들이 사시를 패스하는 것이 아님을 모를 리 없는 그였지만 이미 자신에게 그 시간은 과거사였기에 새롭게 주어진 마지막 시간 안에서 최대치로 노력하여 정복시간을 단축하리라 다짐하고 각오를 다졌다. 그렇듯 자신이 설정한 고지의 높이가, 난이도가 얼마이든 그는 다른 길을 생각해보지 않았다. 진정으로, 아니 오로지 그 길에서 끝장을 내리라 생각했다. 자신의 길에 정도가, 또는 단축로가 어디에 있는지,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없지만 그는 죽기살기의 방법론으로 길을 찾고자 했다. ‘생즉사사즉생’을 골수 깊이 간직하고 자신에게 할애된 모든 것을 오롯이 쏟아붓는 방법밖에 없다는 생각이었다. 돌이켜 생각하여도 P가 자신에게 다가온 유일한 이유라고 짐작되는 부분이었다. 분명히 밝히건대 P가 그것을 간과하지 않았을 것이리라 그는 미루어 짐작했다. 지나치듯이 만날 수도 있는, 지나치듯이 헤어질 수도 있는, 아니 만남이 아니라 스쳐 지나칠 수 있는 일반론적 과정을 특별하게 조성하고자 자신에게 할애된 또 한 번의 시간을, 기회를 오롯이 투자하리라는 각오를 전제하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인간의 각오가 마음먹은 대로 움직여 주리라는 법이라도 있지 않은 바에야…….
일 년을 더, 죽자사자 기출문제와 예상출제문제들과 씨름하다보면 바람직한 결과를 도출해내지 않겠는가라는 자기 암시와 자신감을 전제로 그는 계속하여 고시원생활에 매달렸다. 어떤 고시생들은 고시원생활을 즐겼다고도 한다지만 지내놓고 보면 그것은 즐길 만한 과정이 아닌, 그에게 있어서는 오로지 수행과도 같은 고행의 연속일 뿐이었다.
P의 발길이 빈번했다. 결과를 도출하기 위한 과정의 고통을 십분 이해할 수 있다는 P의 격려가 지속됐었지만 다음 해 초에 도전했던 합격자 명단에서도 그는 자신의 이름 석자를 등재하지 못했다. 매형과의 약속에 대한 결과를 도출하지 못한, 오로지 시작일 뿐인 1차 시험에도 등재하지 못한 결과로 인해 그는 매형에게 죄인이 돼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상류사회로의 항해를 포기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매형과의 약속이었다. 목적한 바를 추진할 수 있는 여력의 쇄진으로 그는 잠시 방황했다. 상류사회로의 문을 열지 못한 열패감과 상실감에 더해 낭패감을 털지 못하고 진로를 고민해야 했다. 절망의 날들이 오고 갔다. 기약할 수 없는 암울한 미래가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그러한 때에 P가 옆에 있어 주겠다고 했다. 자청한 P의 조력이었다.
“이미 시작하신 것, 중도에 그만 두긴 투자한 지난 시간이 너무 아깝잖아요. 그리고 사시 패스를 아무나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아니할말로 사시에 도전했다가 중도에 포기하거나 좌절한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아요? 사시에 패스하는 사람들이란 선택된 몇몇이잖아요. 제가 듣기로는 십수 년을 투자하는 사람도 있다더구만요. 물론 사람마다 환경이 다를 것이며 정도의 차이가 있고 투자한 시간의 차이 또한 같을 수 없을 터인데 지금까지의 환경과 시간으로 그 고지를 점령하시겠다는 계획은 당초에 무리한 욕심이었다고 생각돼요. 물론 짧은 시간내에 그 고지를 점령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바람직한 일이겠지만 그게 어디 뜻대로 될 일이에요. 그게 뜻대로 마음 먹은 대로 된다면 세상사람 모두가 판검사가 됐겠지요. 그게 아니니 아무나 도전하지 못하는 것 아니겠어요.”
“……내 형편이 그렇게 여유롭지가 못해서요.”
자신의 속내에 백납처럼 깊이 감추어야 될 말을 그는 여과하지 않고 쏟아냈었다.
“제가 돕겠어요. 제 인생을 투자하고 싶어요. 다만 일 년이에요. 제게 부여된 시간도 넉넉하진 않다는 걸 아시잖아요.”
일 년! 약속된 새로운 시간의 시작이었다.
시한부였다. 학부시절을 차치하고라도 어차피 삼 년을 투자했으니 새로운 일 년 동안 가속도를 붙여보라는 지상명령 같은 시간의 부조에 그는 할 말을 찾아내지 못했다. P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해야 하는 것인지도 판단하지 못한 채 그는 잠시 P를, P의 얼굴을 주시했다.
“투자예요. 제 인생을…….”
상류사회로의 갈망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P에게도 그러한 욕구가 내재돼 있지 않다고 딱 잘라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P가 자신의 인생을 투자한다고 했을 때 자신의 가슴속에 샘솟던 각오를 그는 시간이 흐른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전역 후의 지난 삼 년이 자신에게 있어 죽기살기의 시간이었다면 P로부터 부조된 일 년이라는 시간은 또 다른, 타인의 인생까지를 제곱하여 투자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4
새벽녘부터 불기 시작한 바람이 저녁 무렵으로 접어들면서 한결 기세를 높이고 있었다. 조반 굶은 시어미 얼굴인 양 하늘은 종일토록 우중충했다. 상강霜降을 지난 무렵이라 바람에 의해 행인들의 몸피는 축소될 대로 축소돼 있었다. 금방이라도 비가 뿌려질 것 같은 으스스한 날씨였다. 바람 탓인지 아니면 일기 탓인지 포도 위에 형태를 나타낸 행인은 평소처럼 많지 않았다.
그는 공중전화부스를 찾아들어 또 P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우뚜우’ 신호음은 수화기 저쪽을 향하고 있었지만 수화기 저쪽의 반응은 어제와 다름없었다. 며칠 전만 해도 코맹맹이 소리를 담아 전하던 P의 음성이 차단된 지 꼬박 일주일이 지나고 있었다. 갑자기 허기가 그의 육신을 휘감고 있었다. 자신의 육신 속으로 곡기를 밀어넣은 지가 며칠째인지 그는 알지 못했다. 육척의 사내가 며칠 동안 곡기를 끊었다는 걸 아는 사람은 그의 주변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며칠을 굶든 P와 통화만 연결된다면 곡기를 끊은 지난 시간만큼의 시간이 더 보태어진다고 해도 그는 회생할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아니 회생이라니, 어불성설이었다. 언제 자신이 쓰러지기라도 했단 말인가? 쓰러지다니, 천만의 말씀이라고 그는 생각했고 건재했으며 건강했다. 아니할말로 이백 근의 몸피를 소유한 자신이 그깟 몇 끼니를 굶었다고 해서 심신을 주체하지 못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자신이 몇 끼니를 거부해는지 모를 일이었지만 그는 평소와 다름없었으며 늘상의 자기로 존치되고 있음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정말 그는 건강을 자신하고 또 자부하고 있었다.
공중전화부스를 뒤로한 채 대지를 훑고 있는 밤바람 속으로 그는 육신을 던졌다. 지나가던 바람이 옷깃 속을 헤집고 들어왔다. 그는 목을 움츠렸다. 외부로부터의 공격을 방어하려는 자라목처럼 아주 깊이 자신의 육신 안에 목을 집어넣고 한참을 걸어 숨소리도 빠져나가지 못할 듯 꽉 막힌 고시원으로 돌아왔을 때 절간처럼 조용하던 고시원은 평소 같지 않았다. 고시원의 좁은 공간은 출처를 노출하지 않은 채 약간의 소란을 피워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발걸음 소리는 물론 기침소리도 함부로 허용하지 않는 협소한 공간에서 때아닌 소란을 아궁이 속의 연기처럼 피워올리고 있는 내용이 궁금했지만 그는 신경줄을 연결하지 않고 자신만의 공간에 육신을 던졌다.
하늘에 맹세코 짐작마저 못한 일이라 생각했다. 아니할말로 평소의 P에게서 이별의 낌새가 조금이라도 보였다면 그는 지금과 같은 결과를 초래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불확실한 미래의 결과에 대해 인간관계의 결과가 극과 극으로 변할 수 있다는 냉혹한 현실에 사로잡혀 그는 가슴속에 피멍을 새기고 있었다. 이러한 별리의 결과를 조금이라도 예측했었다면 P에게 건네지는 자신의 연정을 조금이라도 조정했을 것이란 부질없는 후회도 뇌리에 담아보기도 했다.
심장이 멈출 것 같은 아픔을 잊고자 자리에 누웠지만 그는 잠이 오지 않았다. 비수로 심장을 도려내는 것 같은 아픔을 떨치는 방법론의 한 방편으로 인사불성이 되도록 소주라도 마시고 싶었지만 그의 주머니는 그러한 여유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자신의 영육을 인사불성이 되도록 하자면 적어도 소주가 여남은 병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육신이 인사불성이 되도록 소주를 마셨던 지난 날의 경험론으로 자타의 공인을 받은 터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주머니 사정이 허락하는 만큼만의 주정酒精을 창자 속에 넣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동안 그는 어떠한 주정과도 조우하지 않았었다. 바벨탑을 쌓고자 전전긍긍하는 이들의 대체적인 공통점이 그에게도 통용됐었다. 한동안 주정을 멀리하여 완전히 빠져버린 주기로 인해 어쩌면 두어 병의 소주에도 인사불성이 될지도 모를 일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그는 소주를 뱃속에 넣기 위해 방문을 나서지도 않았다. 잠이 올 리 만무였다. 자신을 지탱해온 힘의 근원이 유리된, 회복할 수 없는 상실감과 별리의 현실로 야기된 고통을 잠시라도 잊어보고자 눈을 감았지만 수면력은 마이동풍처럼 그를 외면했다. 불면증은 그렇게 시작됐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무너진, 싸늘한 공기만 가득한 공간에서 그는 죽음의 실체 속으로 가슴을 밀어넣어보기도 했다. 허탈감이 그의 육신을 더욱 두텁게 덮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완전하고 완벽한 상실감에서 헤어나올 길도, 방법도 없었다. 불을 끄기도 했고 불을 켜기도 하면서 눈을 감았다 떴다를 반복했지만 수면세포들은 오히려 생기를 찾은 듯 한올한올 더욱 생생하게 살아나고 있었다. 그렇듯 그의 육신은 불면의 세포에게 나포된 나약한 미물일 뿐이었다. 이백 근을 상회하고도 남는 육신이 한 톨도 안 되는 정신에게 지배를 당하리라고는 일찍이 상상도 해보지 않았었다. 지나온 시간의 저쪽에서 바벨탑으로 존재하는 꼭지점을 향해 한눈 한번 팔지 않고 오로지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려왔을 뿐인데 목표점은 무지개인 양 그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그만한 거리를 유지한 채 미소를 보내는 듯 했다. 그것이 고통이었다. 그에 더하여 사랑의 별리로 인한 자신의 인생사에 이토록 지대한 고통이 존재하리라는 것조차 예감하지 못했던 것 또한 후회막급한 요소 중의 하나였다.
밤은 깊고 길었다. 극지의 밤 같은, 가늠할 수 없는 길고 긴 밤을 며칠 동안 불면으로 지새고 그는 P를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섰다. 방치할 수도, 더 이상 미룰 수도 없는 우선순위의 선택이라 생각했다. 지하철역을 빠져나와 육척의 건장한 몸으로도 한참을 걸어야 하는 거리였다. P의 집은 언제나처럼 그의 눈길에 붙잡혔다. 직장인들의 출근시간을 생각하지 않고 새벽 같이 나선 길이라 천지간을 비집고 들어차는 밝음과 비례하여 인적이 불어나고 있었다. 그는 주위의 눈들을 의식했다. 자격지심이었다. 그렇다고 선택한 우선순위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그는 초인종을 눌렀다. 처음으로 누른 P의 집 초인종이었다. 설마 이 시간에 불청객이 자신의 집 초인종을 누르리라는 생각은 꿈에서도 못 했다는 양, P의 어머니가 놀란 토끼눈을 하며 마루문을 나서고 있었다. 조반준비를 하던 중이었는지 입고 있던 옷자락에 자신의 젖은 손을 닦는 듯 했다. 첫 대면이었지만 모전여전의 행색이 순식간에 읽혀졌다.
“죄송합니다.”
그가 조각한 첫마디였다.
“………….”
“실례지만 P 어머님이신지요?”
“누구신지……?”
“……….”
그는 대답을 찾아내지 못했다. P를 만나 P에게 자신을 피하는 이유를 묻고자 머릿속에 숱한 질문을 쟁여넣고 온 터였지만 P의 어머니의 질문에는 준비된 답변이 없었던 것이다.
“우리 애를 아시는 것 같은데……, 아니, 우리 애와 아시는 사이에요?”
대문이랄 것도 없는, 세월의 풍파에 아래쪽이 삭아 금방이라도 내려앉을 것 같은 철문 고리를 잡고 선 채 던지는 어른의 질문에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나 대답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예! 교제하는 사입니다. 요즘 며칠 연락이 안 돼서…….”
“우리 애 한테서 아무런 얘기를 못 들었는데……. 알고지낸 지 얼마나 됐나요?”
“이 년이 넘었습니다.”
“이 년?…….”
P의 어머니가 놀라는 눈치였다. 정말 당신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듯 경계하며 긴장하던 표정을 조금 누그려뜨렸다.
“예.”
그는 대답을 하면서도 허름한 철대문 너머로 힐끗힐끗 눈길을 던져보았다. 집 안에 사람이 없는지 대문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일단 들어오세요. 그게 사실이라면 나도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어요.”
“아닙니다. P의 얼굴만 잠간 보고 가겠습니다.”
“우리 애, 지금 없어요. 사흘 전에 LA 오빠네로 간다며 떠났어요. 갑자기 잠시 바람쐬고 온다고 하며 갔는데…….”
“예……?”
사흘 전이란 2차 합격자 명단이 발표되고 나흘 후를 말함이었다. 그렇다면 P의 뇌리에서 자신이 지워진 건 이미 일주일 전, 그러니까 2차 함격자 명부에 자신의 이름을 등재하지 못한 날부터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 말이 없었다. 이미 모든 상황이 종료된 시점에서 면전의 상대가 누구이든 그는 더 이상 미련을 떨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면전의 어른이 정말 바른 말을 하고 있는지조차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들어와 차라도 한 잔 하고 가세요. 정말 물어보고 싶은 말도 있고요.”
P가 없다는 말에도 돌아서 나오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이 어른의 깊은 속내를 조금이라도 알고 싶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기에 그는 P의 어머니가 이끄는 대로 집 안으로 발걸음을 했다.
“……몇 번 맞선 자리가 들어왔었는데 그때마다 시집갈 생각이 없다며 거절을 하길래 진심인 줄 알고 우리는 정말 걱정을 많이 했었어요. 알다시피 혼기가 약간 늦은 감이 있는 애라 속이 탔죠. 만나는 사람이 있다는 낌새라도 있었다면 내가 어떻게 해서라도 알아냈을 거예요. 우리도 너무 속이 타서……. 우리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는데…….”
“………….”
그는 목이 말랐다. 일주일 째 식음을 전폐했으며 조반도 거른 채 찾아온 자신에게 전해진 P의 소식은 이미 천리만리 날갯짓을 했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영화와 드라마에서나 보았던 LA를 P가 자신의 행선지로 아니, 도피처로 정한 것을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순간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새롭게 자리를 마련하고 있었다.
그는 P의 어머니에게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그간의 사정을 참작하고 어쩌면 P의 어머니가 앞장서서 끊어지려는 두 사람 사이의 줄을 이어주고자 노력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을 앞세우고서였다.
“제 무능이 P를 떠나게 했다는 걸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험에 낙방한 것 보다 P와의 단절에서 오는 상실감에 더욱 가슴이 아립니다. 그러나 기회는 또 있습니다. 그래서 찾아 왔습니다. 만약 P가 국내에 있다면 한 번만이라도 P 얼굴을 볼 수 있도록 주선해 주십시요. 만약 이번 일로 실망하고 저를 떠난 것이라면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번 일이 제 인생의 종점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도 제 인생을 걸고 도전한 시험이었습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신다면……, 몇백 배 더 노력하겠습니다. 그때 가서 저를 내쳐도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겠습니다. 하나 뿐인 제 목숨이라도 걸고 약속할 수 있습니다.”
그는 애원했다. 자신이 이토록이나 초라한 몰골로 누군가에게 머리를 조아리라곤 상상도 해본 적이 없다는 것에 마음 아파하면서도 그는 머리를 조아리고 또 조아렸다. P를 잃어서는 안 된다는 절대성이 회오리처럼 생성된 것이 아니었기에 그는 어떤 수모라도 감내할 각오를 전제하고 여기까지 온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보장되지 않은 타인의 미래를 인정해줄 준비가 돼 있지 않은 어른임을 그는 알지 못했다.
“잘 알았어요.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 애를 빨리 들어오라고 하는 것밖에 없어요. 포기하지 말고 기다려봐요.”
P의 어머니의 그 말이 시작과 끝을 동시에 몰아오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끝맺음의 시작이었다. P의 어머님의 속내에 스며 있는 온전한 단절감과 P의 속내에 내재된 그즈음의 의식의 표징들을 일각이라도 빨리 알아채지 못한 게 오히려 원망스러울 뿐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그는 며칠째 식음을 전폐하고 있었다. 음식물을 먹기 싫은 게 아니라 마치 거식증에라도 걸린 것처럼 음식물이 목구멍으로 넘어가 주지 않았다. 그러한 사이 기력은 점점 더 떨어졌고 기동력 또한 상실해 가고 있었다. 이젠 정말 자신을 잃게 될지도 모를 일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두렵지 않았다. 죽음이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란 것도 그는 그 때 처음 알았다. 그렇게 누워 있는 시간이 얼마인지, 며칠째인지를 알지 못했다. 고시원이라는 공간이 폐쇄성이 짙은 곳이라 한 평 반의 닫힌 공간에서 그에게 전개되고 있는 일련의 사건은 오로지 자신 하나의 것으로만 충족되고 있었다.
누님을 앞세우고 매형이 면전에 나타난 시기는 그의 육신의 아우라가 이미 모두 빠져 나간, 진정으로 기진맥진해 있을 때였다.
“꼴이라곤…….”
하나 뿐인 동생의 목불인견한 꼬라지에 탄식 가득한 누님의 자기 설움 같은 한마디였다.
“………….”
“처남! 참말로 우리 따라 내려 가자. 출세도 중요하지만 우선 사람이 살아야 안 되겠나. 지금 처남 꼴은 참말로 관 속에 들어가기 직전 같아 보인다. 어쩌다가 이 꼬라지가 됐나? 참말로 사람이 잘 못 될까 걱정이다. 참말로 이참에 내려가자. 형제가 많은 것도 아니고……. 참말로 누나 생각도 해야 안 되겠나. 참말로 누나한테 처남은 동생 이상이라는 거 생각 안 해봤나? 나야 또 한 손 건너라지만 누나는 그게 아니다. 참말로 이참에 내려가서 재호 공부도 좀 도와주면서 지내다 보면 참말로 어떤 길이 열리지 않겠나. 안 할 말로 건강 다 잃고 사시 패스하면 뭐하나. 처남 건강부터 챙기자.”
매형의 버릇 말인 ‘참말로’에도 기우가 가득 실려 있었다. 참말로 하나 뿐인 매형의 한마디 한마디였지만 오히려 그의 고막에까지 도달하는 소리는 탄식 가득한 누님의 한숨소리 뿐이었다.
어쩌다가 자신이 이 지경이 됐는지를 그는 모르지 않았다. 심신의 영육이 파괴된 모든 원인이 자신에게 있고, 그 결과 또한 모두 자신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결코 정복되지 않은 바벨탑의 높이를 그는 원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혼탁한 도회지 생활에 시달리며, 관 속 같은 이 방을 하루라도 빨리 떠나야지 떠나야지를 허구헌 시간 노랠 불러왔으면서도 결코 자신 안에 깊숙히 도회지를, 상류사회를 깔아놓았던 터라 어떠한 방법으로든 쉽사리 그곳이 버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말이 소용있을지 모르겠지만 우리도 참말로 처남한테 큰 기대를 걸고 있었고 참말로 지금도 기대하고 있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 안 있나? 기회되면 참말로 우리가 또 도울게. 한번 투자로 성공할거라고 우리도 참말로 처음부터 생각 안 했다. 참말로 힘 내거라, 처남!”
자신에게 의지를 주고자 매형이 억지춘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 안에 존재하던 모든 아우라를 상실한 지금 당장의 운신은 쉽지 않았다. 그는 몸을 일으켜 물을 마셨다. 마치 관장을 하듯 비워놓은 위 속으로 차거운 물이 들어가자 위장이 놀라고 있었다. 비몽사몽하던 정신줄도 조금씩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는 듯했다.
“처남! 참말로 우리 손 잡고 한 번 해보자. 우선 우리하고 내려가서 참말로 건강부터 챙기자. 시간은 얼마든지 있다. 참말로 처남 의지가 문제지 돈과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다. 어서 일나거라. 참말로 내가 약속하고 장담할께.”
그가 좁은 고시원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한 건 그때였다.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의 심정과 각오를 전제해야 했다. 우선적인, 연명을 위한 여타한 방법론이 존재하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그것만은 꼭 전제돼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렇게 각오를 다지며 그는 매형과 누님의 뒤를 따라 바닷가 마을까지 내려와야만 했다.
창문이 흔들리는 소리에 그는 눈을 떴다. 넓디넓은 태평양의 해면을 훑고 달려온 바람이 조그마한 포구의 긴 방파제를 넘어와 그의 방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잠자리 탓만은 아닌, 지난 밤 늦은 시간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다 새벽녘에야 잠이 들었지만 창문이 흔들리는 소리에 그는 눈을 뜨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전신을 세상 밖으로 드러냈다. 창문을 두드리던 바람이 그 자리에 있었는 듯, 그의 전신을 휘감고 있었다. 새벽바람에 그는 한기를 느꼈다. 수평선 너머에선 드넓은 바다가 이미 둥근 태양을 밀어올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늘과 바다는 온통 황금빛으로 가득했다. 황금빛 세상은 아름다웠다. 마치 잘 촬영된 한 컷의 사진작품을 보는 것 같았다. 언젠가 유명한 사진작가의 전시회에서 본 듯한 사진 한 장이 온 세상에 펼쳐져 있는 듯 했다. 하지만 그의 가슴속엔 그 순간에도 황금빛 세상에 대한 아름다움보다 P가 더욱 깊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미 무너져버린 세상에 대한 가치관이, 희망이,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을 느끼기에는 맺혀 있는 아픔이 너무 컸다. 그는 몸을 추스르는 대로 서울을, P의 집을 한 번 더 찾아가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하지 않고서는 정말 평생을 아무것도, 어떠한 일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남자는 사랑을 얻기 위해 출세에 매달리고 여자는 출세를 얻기 위해 사랑을 한다’라는 말을 실감하고 있는 그였다. 또한 상사병이라는 말을 듣기는 했었지만 약으로도 의술로도 통제할 수 없는 병이 상사병이라는 사실 또한 체험하고 있었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P의 얼굴이 눈 앞에 아롱거렸다. 식음을 전폐하고 있는 원인이 자의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경험론으로 부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살기 위해 그는 타의로 진행되던 식음물 거부를 제어해야 했다. 어려운 일이었다. 입 안에 쑤셔넣으면 자동적으로 식도를 타는 것이라 생각했던 음식물이 식도쪽으로 용이하게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도 경험론으로 체득하고 있었다. 그러한 시간이 조금씩 지나면서 차츰차츰 그에게도 영육의 안정이 자리를 잡아오고 있었다.
그가 바닷가 마을로 내려온 지도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저녁 밥상을 앞에 놓고 둘러 앉아 곧바로 수저를 들지 않고 매형은 무엇인가를 망설이는 듯 했다. 아니 어쩌면 망설임을 애써 감추고 있는 것은 누님쪽이 더한 듯 했다. 그는 눈치가 보였다. 매형과 누님의 깊은 속내에 내재된 망설임이 무엇인지 알 바 아니라고 도리질을 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순간 뜬금없는 자격지심이 그의 뇌리를 채웠다. 식객의 입장이 전재된 자격지심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내색도, 표현도,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그 어떤 내색도 해서는 안 되는 처지임을 명료하게 알고 있었다.
“저…, 내가 말 안 할려고 했는데 병희네가 하도 딱해서…….”
그 말을 쏟아놓고 그의 누님은 무안한 듯한 표정을 거두지 않고 수저질을 시작했다. 망설임의 원인이 공개된 것도, 해결된 것도 아닌 싯점이라 그는 매형의 얼굴을 일별했다.
“병희네가 문제가 생겼나바. 참말로 법 없이도 살 사람들인데…….”
법 없이도 살 사람에게 문제가 생겼다고 언급하며 누님과 매형이 쌍으로 동생의 눈치를 살핀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매형의 말에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병희네가 얼마나 어려운 일을 당한 것인지 알 바도 아니지만 알고 싶지도 않았다. 설령 병희네에게 닥친 난관을 알아낸다고 한들 자신이 개입할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 일이라 생각했다. 아울러 자신에게 개입할 만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라고 그는 생각했다. 설령 자신에게 누군가의 어려움에 조력을 줄 만한 능력이 있다한들 그것이 법원이나 검찰청 문턱을 드나들어야 하는 문제라면 누구이든 함부로 나설 일이 더더욱 아님을 그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 동생이 몇 년째 고시공부를 하고 있는데 우리가 한 번 알아볼게요’ 따위가 전제돼 있다면, 그러한 따위의 추측이, 그것이 그의 명치에 가볍지 않게 걸려 있었다.
“……혹시 저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 된다니?”
밑도 끝도 없이,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저런 경우’를 전제하며 동생의 속내에서 삐어져 나올 언어의 내용을 기대하고 있는 누님을 향해 그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몇 번, 사시에 도전하여 두 번은 일차에서, 한 번은 2차에서 낙방한 낙방거사에게 ‘저런 경우’를 전제하며 도움주기를 기대하고 있는 누님과 매형에게 자신이 나설 하등의 이유없음 보다 지금 시점에서는 만사가 귀찮다는 것이 우선하고 있다는 사실을 매형 내외는 알지 못했다. 정말 만사가 귀찮은 시점이었다.
“………….”
병희네라면 그도 아는 집이었다. 이미 장성한 아이들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모두 도회지에 나가 있고 늦둥이로 낳은 막내딸을 노리개 삼아 키우고 있는 장 사장네를 마을에서는 막네 딸아이 이름을 택호처럼 불렀던 것이다. 병희는 사춘기에 접어든 중학생 여자아이였다.
“무슨, 해결 방법이 없는지?”
분명히 동생의 입을 통해 무슨 시원한 소리라도 들을 수 있을까 기대하며 내뱉은 누님의 말이었지만 그는 아무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누님이 알고 있는 만큼의 자초지종을 듣다보면 그가 알고 있는 만큼의 상식으로도 해결방법이 없진 않겠지만 한두 번의 조력으로 종결될 문제가 많지 않다는 걸 알고 있는 터라 그는 가급적이면 자신 안에 타인의 사건을 입장시키지 않을 작정을 했었던 것이다. 설령 그것이 모질게 보인다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 생각했다. 아니할말로 비린내가 진동하는 이곳 사람들에게 그러한 일에 조금이라도 아는 체를 하고 나섰다가는 누구랄 것 없이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여기저기서 너도나도 손을 내밀 게 자명하리라는 생각이었다. 그는 누님에게 다짐을 받아두기도 했다. 차마 매형에게까지는 다짐을 둘 수 없었지만 인정으로 인해 나서기에 둘 째 가라면 서러워할 누님이라 병희네의 일에 동생이 나서주기를 기대하는 눈치가 가득함을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입에 발린 소리로 누구누구는 법이 없어도 살 사람이라는 소리들을 쉽게 했다. 하지만 세상살이에서의 법이란 규범적 가치를 불문하고 힘 없는 사람들에게 올가미로서의 가치로만 존재하는 강력한 제어장치 같은 것이었다. 사회적 가치와 양명의 유무로 인한 상대적 제어력에 오금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저급한 또는 나약한 생을 존치하고 운용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것인가를 그는 흘려 들은, 소문 같은 것으로도 충분히 채득해온 터였다. 일찍이 상류사회로의 발돋움을 계획한 것도 밑바닥 인생의 면면을 수 없이 목격해온 그들의 처참한 결과에 기인한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물론 소수자에게만 허용된 사시패스라는 과정이 용이하리라고 생각한 적은 애초에 없었다. 오히려 목적한 고지를 정복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자기희생이 필요하리라는 전제에 망설임도 많았었다. 그러나 정복할 고지가 있다는 사실에 그는 하늘에 감사했고 공부에 매진했었다. 그렇게 시작된 상류사회로의 발돋움을 지속하지 못하고 세 번의 실패를 끝으로, 그에 기인하여 사경을 경험하는 결과까지 초래하다가 바닷바람이 상존하는 해변마을 언덕빼기에 임시로 거처를 마련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속내가 편하지만은 않다는 것 또한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다.
누님의 말을 그는 끝내 못 들은 척 했다. 매형의 말이었어도 그는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병희네의 사정이 어떠한 것이든 간섭도 개입도 아니할 것이라 자신 안에 깊이 마음을 가두기로 했다. 이러한 때 더러의 사시준비생들이나 도전에서 실패를 맛본 사람들은 나름대로들 아는 체를 하기도 한다지만 그것이 결국 자신에게 족쇄가 된다는 사실 앞에 손을 놓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힘 없는 사람들이라도 자신들의 테두리를 벗어나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약간의 법지식을 전제로 서슬 푸른 법을 역으로 악용하여 치부를 한다든가 잘 못된 입신양명의 기회로 도모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또한 세상에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모르는 바도 아니지만 법의 테두리를 이탈하여 얼마나 많은, 또는 흉악하고 악랄한 자들이 자기 이익을 도모하는 지도 그는 알고 있었다. 법이 또는 법률이 제대로 된 기능으로 운용되기 위해서는 그 법을 운용하는 사람들의 사회적 의식과 인간적 자세와 가치 등에 더하여 법의 보편성이 전제되어야 함에도 사회구조는 부지기수 일탈된 과정과 결과들을 초래하였고 더러는 그것들이 불법한 대로 운용되고 있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병희네가 어떤 곤란한 사태에 직면하고 있는지 또는 어떠한 해결책을 보유하고 있는지를 알려하지 않은 채 였다. 비록 내 일이 아니지만 동생에게서 병희네를 위한 조력의 말을 얻어낼 눈치에 여념 없는 누님으로인해 형제간의 대면에 조금씩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눈치보기에서의 약자라고 생각했다. 조석으로 대면하게 되는 방상머리에서 애써 무심한 척 하려 했지만 그럴 때마다 부자연스러운 분위기만 방안 가득 자리를 깔곤 했다. 그는 흔들렸다. 누님이나 매형으로부터 전해지는 불편함이 아니라 알지 못할 자격지심이 자신의 내부 깊숙이 깔려 있음을 그는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아침부터 바다가 휜히 바라보이는 거실이라고도 할 수 없는 작은 마루에 앉아 바다를 조망하고 있었다. 바다와 하늘이 사돈을 맺었는지 경계를 허물고 있는 듯 했다. 어디가 수평선인지를 분간할 수 없는 몹시도 흐린 날이었다. 수평선 어디쯤에서 눈이나 비가 오고 있는 듯 했다. 갑갑했다. 답답함이 전신을 휘감고 있었지만 그는 갈 곳이 없었다. 서울을 떠나 이곳에 온 지 두어 달이 지나고 있었다. 누님과 매형의 이끌림에 고시원을 떠날 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 되어 있음을 그는 거울 속의 얼굴에서 변한 자신을 읽을 수 있었다. 건강이 돌아왔다고 생각되자 다시 법전에 매달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지만 보장되지도 담보되지도 않은 세월을 지켜낼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갯내음이 천지간을 진동하는 이 바다마을에서 속절없는 세월을 견뎌댈 자신은 더더욱 존재하지 않았다. 먼 바다쪽에서 북향하는 상선 같은 배 한 척이 보였다. 순간 서울을 다녀오고 싶다는 생각이 그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하게는 P의 집 부근을 한 번 쯤이라도 돌아보고 오고 싶다는 생각에 지배되고 있었다. 그는 지갑을 열어봤다. 세어볼 것도 없이 액수가 한눈에 들어오는 얇은 지갑이었다. 간단한 계산으로 한차례 서울을 다녀올 정도가 되는 액수였지만 그 돈을 함부로 탕진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탕진이라는 생각을 되새김하며 그는 자신의 무능을 자책했다. 그러나 진로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그의 가슴은 보다 깊은, 백랍 같은 무게를 달고 있었다.
누님네와 동거하면서 단 한번도 변화를 일으켜본 적이 없는 그의 지갑이었다. 자신의 이름자가 찍힌 은행계좌의 숫자는 제로베이스를 차지한 지 이미 오래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몇며칠 가슴을 짓누르던 답답함의 원인이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에 그는 한번 더 전신의 기운을 빼앗겨야 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의 계좌에 호기롭게 숫자를 찍어본 적이 전역서를 쓸 무렵을 제외하고는 별로 존재하지 않았음을 새롭게 알았다. 이제껏 전전긍긍, 빠듯한 금전에 매달려 항상 빈한한 시간을 지켜오지 않았던가. 돌이켜 보노라면 국가의 의무를 부사관이라는 명분으로 수행하면서 더불어 수입으로 얻게 되던, 얼마간의 금전을 전리물처럼 채곡채곡 쌓아올리던 재미가 간단하지 않았지만 계획된 미래를 추구하는 방법론으로서의 한계가 있음이라 생각하고 그 굴레를 탈출하지 않았던가. 그리하여 자신의 주변공간에 변제할 수 없는 채무를 제공하며 지낸, 지난 사 년간의 모든 것을 제백사하지 못하고 있지만 자신의 실패에 기인하여 매형과 누님은 물론 P에게 끼친 금전적 손실을 생각하면 진정으로 몸 둘 자리가 없는 듯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 안에 깊이 도사리고 있는 여타한 감정들에 대해서도 당분간은 모르쇠로 일관하기로 했다.
사람의 마음이란 참으로 이해불가한 것이었다. 영화나 소설 또는 드라마 줄거리 같은 사연의 중심인물로 자리하고 있는 시간에 생채기가 발생한 지난 사간의 필름을 돌리듯 P는 그렇게 그의 가슴속에 깊이 도사리고 있었다. 인연이든 아니든 그러한 것에 시비를 할애할 생각 또한 없었다. 물론 필요에 의해서였지만 모처럼만에 찾았던 바닷가 마을에서 상경하는 마지막 고속버스의 같은 의자에 같이 앉았다는 것만으로도 범상함을 넘어선 것은 아닌지? 그것이 만남의 동기였고, 매개였고, 모태였다면 누구라도 인연론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혈육이라는 연결고리를 전제로 동해안의 바닷마을까지 내려온 걸 그는 피할 수 없는 과정이며 운명이라 생각했다. 세상만사 새옹지마라고 어디에서든 다음의 기회를 도모할 수만 있다면 형편이 되는 한 참고 견뎌낼 것이라 했다. 그는 건강에도 신경을 썼다. 그러면서도 P를 놓지 못했고 P를 떠나보내지 못했다. 자신에게 있어 선결돼야할 문제가 있다면 P로부터의 해방임을 부인하지도 않았다. 생각이 그렇게 미치자 순간적으로 P의 행위에 괘씸함이 파문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막연하지만 장차 사모님 소리를 듣게 될 꿈을 꾸면서 도박꾼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올인한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에까지 미치자 P의 속내가 마치 MRI 나 CT카메라에 찍힌 암세포처럼 확연한 모습을 드러내는 듯 했다. 그것은 1차시험을 통과했을 때와 2차 시험에서 진로가 차단됐을 때 명징하게 증명되어졌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P의 얼굴을 지워놓고 지내지를 못했다. 만남과 헤어짐의 과정과 결과가 오로지 자신에게 존재한다는 것에만 마음 아파할 뿐, 오래지 않은 단 며칠 동안이라도 진정으로 P를 원망해본 적은 없었었다. 이미 과거형으로 종결된, 그리하여 오롯이 자신의 상처로 남겨진 과거사에 대해 다만 치유의 방법안을 찾고자 부심하고 있을 뿐이었었다. 그런데 P가 괘씸하다는 생각이 봄날 눈더미 속에서 노란 얼굴을 밀고 나오는 복수초처럼 싹을 틔우고 있었다.
“누나! 서울을 한 번 다녀왔으면 해.”
“무슨 일로?……”
“일은 무슨, 그냥.”
“그래, 머리도 식힐 겸 다녀와. 안 그래도 나도 생각하고 있었는데.”
망설임을 뭉치고 있던 그는 저녁밥상을 물리고 텔레비전 앞에 앉은 누님에게 속내를 꺼내놓았다. 매형이 친구들과 막걸리잔을 나누고 있다는 전화를 보내온 날이었다.
“이거면 되겠나?”
장롱 서랍을 열어 지갑을 찾아낸 누님의 손에 지폐 몇 장이 들려 있었다. 그의 지갑 속의 액수를 상당히 상회하는 액수였다.
“차비 정도는 내게도 있어.”
“그래도 받아둬. 남자는 주머니가 너무 비어 있어도 힘이 안 생겨.”
사양할 수도, 사양하고 싶은 생각도 없는 누님의 돈이었다. 그렇다고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를 앞 세우고 그 돈을 불쑥 받기에도 미안하고 쑥스러운 일이었다.
“돈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 매형도 말 하더라. 처남 좀 살피라고.”
누님의 말인 것만은 아니라고 그는 생각했다. 자상한 매형은 아니지만 속내가 깊은 매형임을 그는 오래전에 알고 있었다. 차마 손을 내밀지 못하고 엉거주춤히 앉아 있는 그의 무릅에 쥐고 있던 돈을 놓으며 미안해할 동생의 속내를 읽고 있는 누님이 말을 잇고 있었다.
“큰 돈이 있는 건 아니지만 꾸러다닐 정도는 아니니 부담 갖지 말고 말해.”
“내가 돈 쓸 일이 어디 있어? 그런데 병희네는 어떻게 됐어?”
누님의 손에서 그의 무릅에 놓여진 돈을 자신의 주머니로 집어넣으며 미안함과 쑥스러움을 덜어내고자 불쑥 뱉어낸 그의 말이었다.
“몰라. 변호사를 산다고 하는 말은 들었는데 샀는지 안 샀는지. 나서서 물어볼 일도 아니고.”
“사건 내용이 뭔지는 몰라도 변호사 선임비가 만만치 않을텐데.”
“알아서 하겠지-뭐.”
자신이 관심없어 했던 병희네 일이었는데 오히려 누님쪽에서 시큰둥하는 것이 이상하여 그는 더 이상 묻지를 않았다. 그의 속내를 채우고 있던 미안함과 쑥스러움이 자연스레 사위고 있었다.
다음날 새벽, 그는 상경하는 버스에 몸을 싣고 밤새 짜놓은 그날 하루 일정을 다시 생각하고 있었다. 상경의 목적은 P를 만나는 것이었다. 유일한 목적이었다. 그러나 P의 어머니가 말했던 것처럼 만약 P가 LA에 간 것이 사실이고 여태까지 귀국하지 않은 것 또한 사실이라면, 그리하여 대한민국 땅에 P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다음 상황에 대한 다음순서의 결정이 있어야 된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밤새 여타한 잡념에 빼앗겼던 잠에 빠져들었다.
사경 같은 잠에 빠져들었다가 그가 눈을 뜬 것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였다. 문득 목마름이 왔다. 그는 목마름을 해결하고자 차에서 내렸다. 고도가 높은 휴게소인지라 바람이 찼다. 그는 자판기커피를 뽑아 목마름을 해결하고 서둘러 차에 올랐다. 군것질을 즐겨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은 그였기에 휴게소에서 서성거릴 이유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승객들이 휴게실에서 저마다의 볼일에 여념없을 시간에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순간 누님이 말 했었던 병희네 일이 무슨 일이며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뜬금없는 생각이었다. 나아가 병희네와 누님네의 친소관계도 궁금했다. 어쩌면 누님을 통해 자신에게서 도움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라고 기대 같은 걸 하고 있던 병희네가 누님에게서 또는 자신으로부터 아무런 언급이 없자 거리를 두고 있는 게 아닌가 라고 그는 미루어 생각했다.
타고온 고속버스를 내려 지하철을 탓고 지하철을 내려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목적지로 향했다. 그리고 그는 P의 집을 향해 빠른 걸음을 옮겼다. 역시 변함없는 코스였다. 예전처럼 길은 익숙했다. 아니, 익숙하다는 생각따위마저도 그는 사치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다녀간 지 한 철이나 지나 있었다는 것을 불현듯 생각했다. 입고 있는 행장의 변화가 계절감을 느끼게 했다. 그는 동해안의 누님네 마을로 출발하는 막차가 끊길 시간까지 P의 집이 보이는 언덕빼기에서 P의 집쪽에 던졌던 시선을 거두지 않았었지만 끝내 그는 P의 모습을 잡아낼 수 없었다. 그러나 막차가 떠날 시간에 맞추어 그는 서 있던 자리를 물러나야 했다.
서울을 다녀온 며칠 후 아침 식사를 하면서 그는 병희네 얘기를 꺼냈다. 누님과 매형에 대한 미안함이 생선가시처럼 목에 걸려 몇며칠 자신을 놓아주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더 이상 입을 닫고만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글쎄, 변호사를 살려고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갔는데 변호사라는 사람은 코빼기도 못 보고 사무장이라는 사람이 나서서 자초지종을 묻더니 수임빈가 뭔가를 먼저 줘야 한다는데 글쎄 그 돈이 상당했대. 그리고 또 재판에서 이기면 성공보순가 뭔가를 더 줘야 된다고 하더래. 병희네는 이것저것 포기하고 차라리 저쪽에서 하는 대로 내벼려둘 생각인가봐.”
저쪽이란 원고측을 말함이었다.
“재판을 건 사람을 누나가 알어?”
그가 물었다. 그동안 누님과 병희 엄마와의 친분 정도, 매형과 병희 아버지와의 친분 정도를 어느 정도 알아낸 후라 두 집안의 거리를 한 발짝 가까이 붙여주고 싶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던 것이다.
“알어. 시내에서 사채업을 사람인데 들리는 소문으로는 법원 근처에 있는 변호사와 고등학교 동창이라며 자주 변호사 사무실을 드나들기도 하는가바. 급한 사람들이 그 사람한테 돈 몇 푼을 빌려 쓰고 부동산등기를 넘겨준 사람도 몇이나 된대.”
그는 호기심이 솟았다. 법원 근처를 배회하며 변호사들에게 일감을 물어다 주고 거래가 성사되면 얼마간의 거마비를 얻어 쓰는 소위 법원 브로커들이 생각났던 것이다.
“누나, 내가 병희 아버지 한 번 만나볼까?”
그냥 해 본 소리가 아니었다. 사건 해결에 자신이 있고 없음을 떠나 저토록 안타까워하는 매형과 누님을 생각해 나름대로 마음과 시간을 할애해 볼 요량이 었다. 해서 좀 더 자세한 자초지종을 알아보고 자신이 도울 수 있고 없음도 알아야 할 일이라 생각했다.
“그래줄 수 있겠냐?”
누님이 웃었고 그도 따라 웃었다.
“만나는 거야 어렵잖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들어봐야 성패를 알 수 있어. 아니 성패보다 내가 나설 수 있고 없음도 얘기를 들어봐야 알고. 누나는 그 집 사건을 얼마나 알어?”
그는 단편적이나마 병희네 사건을 알고 싶었다. 자신에게 덮여 있던 무력증이 지속중인 때라면 엄두도 못 낼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깊이 있게는 몰라. 다만 병희네가 하던 사업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사채업자 돈을 좀 빌렸는가바. 그런데 어느날 사채업자가 병희 아버지한테 동업을 하자고 하더래. 이미 빌린 돈도 투자금으로 바꾸고 투자금이 반반이 되도록 추가 투자를 하겠다더래. 병희 아버지는 마침 돈이 더 필요한 때라 투자지분을 반반으로 하는 조건을 제시했대. 사채업자도 승낙하고. 아마 법무사 사무실에 가서 서류도 만들었는가봐. 사채업자는 자기가 아는 변호사한테 가서 서류를 만들자고 했다는데 병희 아버지가 단골 법무사한테 가서 서류를 만들지 않으면 동업을 못하겠다고 버텼대. 그 무렵에 게임장 주인들이 돈을 갈퀴로 쓸어담는다는 소문이 있던 때라 사채업자도 양보할 수밖에 없었는가봐. 그런데 사채업자가 추가로 투자를 하기 며칠 전에 병희 아버지가 하던 사업이 하루아침에 서리를 맞았어.”
“그럼 병희 아버지가 게임방을 했다는 거야?”
“그래, 게임방인가 뭔가를 했어.”
더 이상 얘기를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는 소문에 의해 건물마다 한자리씩 차지하고 있던 게임방 간판들, 우후죽순처럼 그렇게 게임방 간판들이 늘어나던 시절이 있었던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좋던 호시절도 사행사업이라는 이유를 전재한 정부의 게임방 폐쇄발표로 전국의 모든 게임방들이 종지부를 찍고 말았던 것이다.
“들으나 마나 사채업자가 추가투자를 포기하고 기 빌려준 돈에 대해 제시했던 동업조건을 무시한 채 그 돈을 돌려달라는 대여금반환청구소송을 제기했겠구먼?”
미루어 짐작 가능한 일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법이 없어도 살 사람들은 그러한 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악용하는 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당할 수 있는 개연성이 충분한 것이었다. 자신이 개입한다면 승산 가능한 싸움이라 그는 생각했다.
시간을 미룰 일이 아니었다. 솟장 부본을 받은 지가 얼마나 됐는지가 궁금했다. 어쩌면 항변기일을 넘겨 모든 상황이 종료된 것은 아닌지도 궁금했다. 솟장의 부본을 받았다면 심리기일 전에 재판부에 답변서를 제출해야 하는데 답변서나 여타한 증명서를 제출할 기일 등은 사실 피고에게 찰나 같은 시간일 뿐이었다. 그렇듯 여기에서 묻고 저기에서 물을 시간도 없는 찰나 같은 시간을 얼마나 허비했는지 그는 알고 싶었다. 답변서와 여타한 증명서를 작성하고 구비하여 제출할 시간을 고려해 그는 당장 누님을 앞세우고 병희네를 방문하고 싶었지만 저쪽에서 자청하지 않은 조력이라 마냥 나설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오전 중으로 누나가 한 번 알아봐. 가급적 빨리.”
“오전 중은 무슨 오전 중이야. 내가 바로 다녀올께.”
그의 누님은 조반 그릇이 반도 비워지기 전에 수저를 놓고 집을 나섰다. 말릴 일도 아니었고 말릴 틈도 없었다. 그리고 그의 밥 그릇이 비워지기 전에 전화가 왔다. 누님이었다.
“지금 당장 여기 와 볼래?”
송수화기를 서둘러 놓으며 그는 병희네 집으로 달려갔다. 어쩌면 촌각을 다투는 시간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항변이나 방어기일을 상실했다면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할 일임이 자명한 마당에 중도에 놓은 자신의 수저질 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무것도 몰라서 변호사를 살려고 했는데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서…….”
그가 자초지종을 물었고 자리에 누워 있던 병희 엄마는 소금 먹은 채소처럼 기진하여 겨우 말문을 열고 있었다.
“혹시 법원에서 온 서류들을 지금 볼 수 있겠습니까?”
“병희 아버지가 아침에 들고 나갔어요.”
“어디 가셨습니까?”
“답답한 마음에 단골 법무사를 한번 더 만나본다고 서류를 들고 나갔어요.”
그는 마음이 바빴다. 여기저기를 찾아다니면서 되는 대로 묻고 또 묻고 있겠지만 가슴속에 속 시원한 답변을 담지 못하고 있을 병희 아버지의 지친 모습이 눈에 선 했다. 그렇듯 소송에 문외한인 일반인들은 마음이 바쁘고 답답함은 물론 기일의 이익과 소송에 막연한 만큼 진행절차를 몰라 오히려 둔감하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더러는 답변서와 제 증명원의 중요성과 그 절차를 알지 못해 변호사나 법무사들에게 사건을 위임하지만 위임사무자들의 불성실한 자세나 태도로 승산 있는 사건도 패소하는 때가 종종 있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수임사무자들은 승소에 대한 추가 이익에는 눈을 돌리지만 반면 패소에 대한 책임에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로 사건을 종결한다는 사실에 불쾌해 했었다. 그러나 그것이 관례였고 관행이었다.
병희 엄마의 연락을 받고 병희 아버지가 서둘러 돌아왔다. 답변서의 마감일은 사흘을 남겨두고 있었다. 그가 돕겠다고 하자 병희 아버지는 사건을 맡아달라고 했다. 도와달라는 게 아니라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위험성이 내재된 말이었다. 무지의 정도를 짐작하고 그는 다짐을 받았다. 누구에게든 내가 도왔다는 말을 하지 말 것이며 서류를 도와 주는 사람이 있다는 말도 하지말고 아울러 수고비 따위는 아예 생각에 담아두지 말 것이며 어떠한 감사표시나 그에 준하는 표시 등등은 더더욱 하지말라는 다짐이었다. 그는 진정으로 병희 아버지를 돕고 싶다는 생각에 스스로 나섰던 것이다.
서류뭉치 속에는 동업관계 서류를 작성하며 회수했어야 할 차용증이 없었다. 그는 사채업자에게서 돈을 빌리면서 써준 차용증을 어떻게 했는가를 물었다. 차용증은 회수되지 않았었다. 병희 아버지의 무지를 직감했다. 사채업자는 그것을 제소의 원인으로 사용했음이 자명했다. 악용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동업에 관한 서류가 있었다. 원고의 기 차용금에 대한 투자전환에 대한 내용도 또렷하게 기재돼 있었다. 마침 컴퓨터가 있어 그는 그 자리에서 답변서를 썼다. 입증서류로 법무사가 작성한 동업에 관한 서류를 첨부하여 법원에 제출할 것을 알려주고 병희네를 나왔다. 앞으로 준비서면만 제대로 작성하여 제출된다면 백프로 승산이 있는 싸움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시작된 병희네의 재판이 간단히 종료될 성질이 아님을 그는 알고 있었다.어느 날 피고에게 송달된 원고의 준비서면은 변호사 수임사건으로 변경돼 있었던 것이다. 준비서면 용지가 변호사 사무실에서 사용하는 것이었다. 변호사가 개입된 사건이 아니라면 그러한 용지를 피고에게 송달할 이유가 없다라고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웃었다. 원고와 변호사가 정말 중고등학교 동창지간인지는 알 수 없으나 만약 그들 둘 관계가 중고등학교 동창지간이라면 두 사람은 잘 못 맺어진 사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준비서면은 피고의 답변서에 반하는 내용들로 가득했다. 준비서면은 동업자로서의 투자에 대한 허위내용과 반박으로 가득했다. 피고가 자금사정이 여의치 않아 원고에게 동업을 제안한 적은 있으나 원고는 여하히도 동업에 대해 동의는 물론 생각해본 바도 없다는 내용이었다. 만에 하나 원고가 동업에 동의했다면 피고가 차용증을 회수하지 않을 리 없는 것 아니냐며 반문적인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준비서면을 작성하면서 조소를 흘렸을 그들의 모습이 눈에 선 했다. 변호사와 원고가 가증스러운 인간들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의뢰인의 진술내용이 횡설수설이라도 변호사로서는 자초지종을 대충 알고 있는 경우가 허다할 터인데 한술 더 떠서 변호사가 의뢰인을 현혹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들 둘 만의 커넥션이 있는 듯 생각됐다. 그는 끝을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병희 아버지에게서 건네받은 서류뭉치를 헤쳐보았다. 법무사에게서 동업관계 서류를 작성하며 지불한 영수증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영수증을 인수하지 않은 것인지 물어보았지만 생각나지 않는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그는 병희 아버지를 앞세우고 동업서류를 작성했다는 법무사를 찾아갔다. 나이 지긋한 법무사는 병희 아버지를 모르는 체 했다. 병희 아버지가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그가 보충설명을 했다. 이 서류를 여기서 작성했는데 동업서류를 작성할 때 참석했던 사람이 사채업자라는 사실만 밝혀내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법무사는 서류를 작성할 때 함께 있었던 사람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세상에 이런 낭패가……. TV를 통해 중계된 적이 있는 국회청문회에서 전직 공직자들에 대한 청문관들의 질문에 피청문인들이 한결같이 모른다는 답변으로 일관하던 장면장면들이 그의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병희 아버지가 음성을 높여 자총지종을 얘기했지만 끝끝내 알지 못하는 일이라고 법무사는 시치미를 땠다. 동업에 관한 서류라고 쓰인 용지의 말미에 인쇄된 법무사사무실 주서를 보고도 기억이 안 나느냐고 다그쳤지만 자신이 써준 서류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것들 하나하나를 모두 기억하겠느냐고 대답할 때엔 그의 중치마저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그 순간 그는 알았다. 이미 변호사가 다녀갔거나 아니면 전화라도 넣어 다짐을 받아놓았거나 또는 사채업자가 찾아와 입을 맞춰놓은 것임을. 더 이상 사정할 일도, 애원할 일도 아니라 생각했다. 그 자리에 있으면 있는 만큼 자신들만 비참할 일이라 생각했다.
그는 다음 방법론을 생각했다. 일단 소송이 진행되면 동업서류 작성인으로 하여 법무사를 증인으로 신청할 생각이었다. 개인간에야 여하히도 거짓을 말할 수 있겠지만 법정에 증인으로 세운다면 위증죄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바른 말을 할 것이라 생각했다. 위증 여부는 서류의 가장자리에 찍힌 주서가 완벽한 증거였다. 아울러 대부분의 노인들은 위증으로 인하여 처벌을 받는다는 것에 무심하다가도 자신이 처벌을 받게될 상황에 처하게 되면 대부분이 이실직고하는 경향이 허다하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것이 주효했다. 결국 법무사는 위증죄의 덫에 걸리지 않고자 자기가 작성한 서류라고 했으며 원·피고가 함께 와서 만들어간 서류라고 증언 했던 것이다. 선고기일에 재판부는 피고의 승소를 선고했고 그는 마음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항소기일이 지나지 않는 한 어떠한 낙관도 허용되지 않았다. 얼마 후 항소장이 배달됐다며 병희 아버지가 연락을 해왔다. 이미 우려했던 일이었다. 항소장 부본을 보지 않아도 청구취지와 청구원인 정도는 불문가지였다. 일심에서 변호사를 선임하고도 패소한 사건이라 항소심을 준비할 것이란 생각을 했었기에 그에 대응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항소심에서 몇 번의 공방이 있었지만 처음부터 승소를 자신했던 사건이라 그의 준비와 대응은 철저했다. 그렇게 속개된 항소심에서도 원고패소를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것은 변호사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름대로 투자한 시간의 보상이라 생각했다. 항고장을 기다렸지만 기일을 한참 넘기고도 병희 아버지는 항고장이 배달됐다는 소리를 전해오지 않았다. 항고기일을 한참이나 넘기고도 법원으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다는 것은 항고권자의 항고포기이며 그것은 곧 병희 아버지의 승리를 의미했고 나아가 자신의 승리라고 그는 생각했다.
작은 마을에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재호 삼촌이 병희네 재판을 도와 이겼다는 소문은 소용돌이 치는 소沼 속의 물감처럼 온 마을에 번져나갔다. 재호 삼촌이 고시공부를 했다더니 고시에는 떨어져도 병희네 사건은 이기게 했다는 소문에 그의 누님과 매형이 인사받기가 민망할 지경이었다.
그는 매형과 누님에게 병희네로부터 어떠한 인사도 받지 말라고 다짐을 받아두기도 했다. 만에 하나 고맙다는 인사를 금전이나 어떠한 물품으로 받았을 경우 변호사법위반이라는 중대한 처벌이 뒤따를 것이며 그것은 곧 구속이라는 것을 부언하며 다짐을 받아두었던 것이다. 일반인들의 사고방식에 접근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다짐으로 인해 오히려 병희네 부모님이 서운해 한다는 것도 모르는 바가 아니었지만 설마를 전제할 생각은 애초부터 머금지 않았기에 그의 마음은 시종일관이었다. 가끔 메스컴에 오르내리는 이러한 사건의 결과론에 패가망신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있는 것도 그들의 무지보다 설마라는 안일주의가 야기한 결과라고 다짐에 다짐을 더하였던 것이다. 우선 먹기에는 곶감이 달다는 속담처럼 고맙다는 인사에 편성하여 거절하기 미안하다는 이유로 몇 푼의 금전을 수수하게 된다면 결국 그것이 자충수가 된다는 것을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대체적으로 몇 푼의 금전을 봉투에 넣어 건네는 게 인사의 대부분이지만 그러한 행위의 결과가 무엇인지 또는 어떤 것인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특권층이라 자처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사회적 질서를 무시하고 잘난 체 나대다가 조그마한 성공이라도 거두게 되면 마치 자신을 대단한 능력자인 듯 과시하며 세상의 중심부로 진출하거나 그러한 것에의 자격론자로 치부하는 이들을 종종 보아왔으며 또한 그러한 일들로 인하여 그들의 몰락을 심심찮게 보아왔던 그였다.
그는 그것을 경계했었다. 설령 상류사회로 발을 들여놓고자 투자한 시간이 헛되는 한이 있더라도 얄팍한 지식을 앞세워 함부로 나섰다가 스스로 파멸하는 오류는 범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자신 안에 깊이 새겨놓았던 것이다.
병희네 사건을 종결지은 얼마 후 누가 제부 삼기를 원한다는 소리를 그의 누님이 안고 왔다. 자신이 생각해도 입장入丈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는 거절했다. 거절은 정중했다. 세 번씩이나 고시에 낙방한 것은 차치하고라도 주머니에 땡전 한 푼 없는 자신에게 동생을 맡기겠다는 사람이 오히려 고마울 뿐이었다. 入丈을 하더라도 자신이 가솔을 거느릴 수 있을 때 입장할 생각이었다. 그것은 그의 철칙이고 철학이었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그 시간은 어느 곳에도 보장되지 않은 시간임을 자신이 자명히 알고 있었다.
“삼촌아! 편지가 왔다. 등기우편인데 경찰서에서 보냈네…….”
순간 그는 아차 했다. 내용을 열어보지 않아도 변호사법 위반 운운하며 시간을 정해 출석을 명하는 출석명령서임을 직감했다.
그는 자신의 매형과 누님에게 다짐해 둔 바를 확인했다. 만에 하나 고마움에 대한 인사라며 여타한 것이라도 받지 않았는지를 확인했다.
“안 그래도 병희 엄마가 봉투를 가져왔더라. 인사라고 할 것 없지만 니 고기국이라도 끓여주라고 하면서 봉투를 내 놓길레 뭐든지 받으면 니가 영창간다고 하면서 돌려 보냈다. 하늘에 맹세하건데 믿어라. 절대 걱정하지 마라. 매형도 병희 아버지가 마련한 술 자리에는 안 간다고 말했다. 하늘에 맹세코 받은 것이 없다.”
그는 안심했다. 수사관이 어떤 정보를 입수하고 자신에게 소환장을 발부했는지를 모르겠지만 적어도 변호사법 위반에 대해서라면 오히려 큰 소리를 치고 떳떳하게 대처할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지정한 날짜에 경찰서를 찾아가 지정된 수사관의 앞 의자에 앉았다.
“소환장이 왔길레 왔습니다.”
그가 내민 소환장을 훑어본 수사관은 ‘예, 아니요’로만 대답하라며 컴퓨터 앞에 바짝 붙어 앉고 있었다. 불혹을 막 넘겼을 나잇대의 수사관은 관행상 필요하다며 인정 질문을 했고 그는 허트러짐 없이 대답했다.
“……듣자 하니 고시공부를 하셨다는데……?”
약간의 반말이 섞여 있었다.
“예.”
“투서가 들어왔습니다. 민사소송사건을 봐주고 돈을 받았다는 내용의 투섭니다. 의뢰인에게서 돈을 받았습니까?”
“아니요.”
“거짓말 하셔도 다 들어나게 돼 있습니다. 투서한 사람이 거짓말로 투서를 했겠어요?”
“그건 내가 알 바 아닙니다. 진위를 떠나 투서야 투서인의 자유의사 아닌가요? 결국 때론 그러한 것이 무고가 되기도 하니깐요.”
그를 선두로 병희 아버지와 병희 엄마가 차례로 경찰서를 드나들고 나서야 사건은 잠잠해졌다. 그러나 그는 짐짓 없었던 사건으로 치부하고픈 마음이 없었다. 그 누군가를 무고죄로 고소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라 생각했다. 그는 자신을 소환했던 경찰서장을 상대로 정보공개를 청원했다. 그러한 경우 투서한 사람의 신분은 밝혀지게 마련이었다. 상대가 누구이든, 누구에게든 보호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임을 법률이 정해놓고 있음이었다. 그리고 그는 손수 고소장을 작성하여 제출하였고 피고소인의 애원에도 처벌을 주장했다.
“삼촌아! 저쪽 집에서 또 사람을 보냈더라.”
어느 날 저녁 그의 누님이 뜬금없이 뱉어낸 말을 시작으로 남매의 대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로서는 진정으로 뜬금없는 대화였다.
“당사자를 바야 더 자세한 걸 알겠지만 먹고 사는 건 괜찮은 모양이더라.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여자가 무슨 사업인가를 한다는데 내가 알기로는 언니라는 사람도 나무랄 데가 없고……. 안할 말이지만 친정이 밥술깨나 먹고 사는 집안이라고 소문났더라. 얘기하는 아줌마 말로는 삼촌 생각이 괜찮다면 고시 패스할 때까지 뒤를 바 줄 각오도 준비돼 있다더라. 아마 니 하나 보고 욕심을 내는 모양이더라. 나도 약간은 아는 집인데 언니가 니를 밨는갑더라. 어째 한 번 안 만나볼래?”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떠한 준비도 안 된 상황에서의 입장관계의 언급은 더더욱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립而立을 한참이나 넘긴 나이에 마냥 준비만을 고집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누나 생각은?…….”
“나야 밑져도 본전 아니가.”
그는 웃었다. 믿져도 본전이란 제 삼자적 위치일 때 가능한 얘기라고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만에 하나 동생의 입장이 늦어 부득이 입장을 서둘러야할 시기라면 애써 끌고다니면서라도 혼처를 찾아야할 상황이리라 생각했다.
“이 내용, 매형도 알아?”
“매형도 잘 됐으면 하더라. 내보다 매형이 더 애타 하고 있다.”
“믿져바야 본전 아니가? 속는 셈 치고 한 번 만나바라.”
그렇게 시작된 얘기가 미지의 저쪽편으로 전해졌고 그로인해 중간에서 거간을 주선해주는 사람이 전해온 바에 따라 조우의 시간을 마련했다. 시간과 장소를 머릿속에 넣고 집을 나선 그에게 조우의 장소는 멀지 않았다. 그러나 그로서는 미래를 향한 걸음이, 가슴이 아니었다. 자신에 대한 주변인들의 따스한 마음을 배척할 수 없어 조우를 응답 했지만 결코 자신의 처지가 누구를 만나 이상된 결과로 발전시킬 형편이 아님에 일면 가슴속에 시니컬한 바람이 일고 있었다.
오후의 카페는 조용했다. 음악을 자주 듣는 건 아니지만 고막에 닫는 음악이 생경하지 않았다. 라흐마니노프의 무언곡「보칼리스」가 홀을 메우고 있었다. 홀은 깔끔했다. 창 옆 테이블 서너 곳에 젊은 남녀들이 쌍쌍이 앉아 무슨 말인가를 속살거리고 있었다. 카페의 분위기를 직감할 수 있는 곳이라 생각했다.
종업원인 듯한 여급의 인사를 받으며 그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찾는 사람이 있을 터라 언급하고 안내를 부탁했다. 벽시계는 십 분이나 앞당겨 자신이 카페에 도착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갑자기 쑥스럽다는 생각이 그를 업습했다. 그러나 그 자리를 일어설 생각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무료했다. 그는 십 분 여의 여유시간을 채우고자 종업원에게 신문을 요구했다. 그날치의 조간신문은 곧바로 그에게 전달됐다. 신문의 기사내용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건성으로 헤드타이틀에 시선을 붙여놓고 미지의 사람에게 전할 첫마디에 신경을 할애하고 있었다. 어떠한 인사도 부여잡지 못한 채 십 분이 흘렀다. 벽시계를 일별하고 다시 신문의 헤드타이들에 시선을 붙였지만 자신에게마저 흡족한 인사말은 그의 뇌리를 채워놓지 못했다. 그 때 종업원의 인사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종업원에게 소곤거리는 소리를 앞세웠고 이어서 발걸음 소리가 자신을 향하고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주렴이 걷히며 낯선 여자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순간 용수철에 튕기듯 자리에서 벌떡 이어서며 그는 말을 더듬었다.
“안녕하-아-세요? 오-오시느라 수-수고가- 많으셨죠?”
준비된 인사말은 없었지만 자신이 더듬을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었다. 자신에 대한 첫인상이 긍정적일 수 없음을 알았다.
“서둘러서 온다고 왔는데도 늦었습니다. 많이 기다리셨겠어요?”
통상의 인사가 건네지는 찰나 같은 순간에도 그는 흡족한 미소를 머급고 있었다. 자신이 상상했던 미모도 체형도 아니었지만 어쨋든 상상 이상의 현실이 눈앞에 전개돼 있다고 생각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언니가 좋은 말씀을 많이 하셔서…….”
다음의 인사말은 본래의 그의 것이었다.
“아, 예.”
짧게, 단음으로 아주 짧게 대답을 쏟았지만 그로서는 무엇이든 할 말이 준비돼 있지 않았다. 그러나 처음 만나는 여자에게 지속하여 말을 하게 할 수는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분위기를 이을 당장의 언어가 그의 머릿속에서 회오리를 쳤지만 그의 뇌리에서 모든 언어는 블랙홀에 갇혀있는 듯 했다.
“…………”
“원래 말씀이 없으신가 봐요?”
“아닙니다. 말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니지만 말을 못하는 것도 아닌데 지금은 좀 그렇습니다. 입이 잘 떨어지지……, 아니 재미있게 할 말이 잘 생각나지 않 아서요. 제가 낯가림을 하는가 봅니다. 하하.”
그는 멋쩍게 웃었다. 아울러 자신의 말이 여자에게 거절의 의미로 해석되지 않을까 염려했다. 그녀가 자신과의 시간을 좀 더 연장해 주었으면 하는 기대치가 높았지만 여자가 먼저 자리를 일어설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염려스러웠다. 시간의 저쪽 지점에 기다리고 있는 결과론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는 앞의 여자와 좀 더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자신의 생각을 전해주고 싶었다.
“저, 재미 없죠?”
어색한 분위기를 떨치고자 던진 말이었다. 초면의 자리에서 대책없이 나불거리는 것도 문제지만 맞선이라는 명제를 전재한 자리라면 자신의 태도에도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어떻게든 시간을 연장해보고자 잔 머리를 굴렸다.
“이런 때는 밖으로 나가는게 좋은데…….”
그는 혼자말처럼 뱉어놓고 또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말을 하고 나서도 괜한 소리를 했다는 생각에 자책을 했다.
“여기서 나가고 싶으세요? 말씀드리기 뭣하지만 제가 차를 가지고 왔습니다.”
생각지 못한 여자의 말에 그는 입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제가 운전이 능숙하지 못해서…….”
자신을 바라보며 살며시 미소를 머금는 여자의 얼굴에서 그는 버릴 데가 없는 여자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아울러 직업군인으로 몇 년 동안 운전을 했었던 지난 시간을 떠올렸다.
“말씀드리기 죄송하지만 운전-할 줄 아세요?”
“예, 조금요. 군에 있을 때 차를 조금 몰고 다녔습니다.”
그는 자신있게 말하지 못했다. 자가용도 없었거니와 고시에 매달리느라 운전대를 잡아본 지가 서너 해를 훨씬 넘겼기 때문이었다.
“잘 됐네요. 그러시면 운전 좀 해주세요. 이곳은 해변도로가 소문났다면서요? 제가 운전도 서툴고요.”
두 사람은 카페를 나왔다. 시내권에서 바다가 보이는 해변도로까지는 지척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바다가 보고 싶으세요?”
“예. 사실 몇 년 만에 언니네에 왔거든요.”
그때에야 그는 알았다. 그녀가 어느 지방에서 왔는지, 고향이 어디인지, 이름이 뭔지를 아직도 알지 못한다는 걸. 여자의 나이가 자신보다 세 살쯤 아래라는 건 이미 들어 알고 있었지만 맞선을 전제로한 남자와 여자의 만남에 서로간에 알아야 할 것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는 것을 알고 있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운전을 잘 하시네요. 저는 운전 잘 하는 분들이 너무 부러워요. 천만번을 잘 하다가도 단 한번의 실수로 인생을 망칠 수 있는 게 운전이잖아요. 저는 핸들을 잡을 때마다 기도를 해요. 우습죠? 그 정도라면 차라리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게 편할텐데 그게 안 돼요, 호호…….”
“기돌 하신다는데 종교가?……”
“호호, 믿는 종교도 없어요. 그렇지만 기도를 한다는 건 나쁜 일이 아니잖아요. 기도를 하고나면 기도에 대하여 막연하지만 어떤 안전장치 같은 믿음도 생기고요. 혹시 종교가?……”
“저도 무종굡니다.”
“………….”
여자는 한동안 말이 없었지만 둘 만의 공간에 어울리는 언어가 무엇인지를 생각했다. 말을 아끼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지만 함부로 말을 해도 아니될 일이라 생각했다.
“정말 운전을 잘 하세요. 저는 걱정이 남 달라 남이 운전하는 차를 타면 괜스레 긴장하거든요.”
“편하신가 봅니다. 운전이든 뭐든 처음부터 잘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되겠어요. 세상만사가 꾸준한 연습과 훈련이 있어야만 베테랑이 되는 것이지요. 물론 그렇게 한다고 모든 것이 다 흡족하게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지만요.”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시간을 잊게 했다. 그 사이 여자는 남자를 읽고 있었다.
5
이미 혼기를 넘긴 동생을 걱정해오던 그녀의 언니는 고시공부를 해오다가 몇 번 낙방하고 건강이 나빠져 누님네에 잠시 쉬러 왔다는 재호 외삼촌을 눈여겨 관찰하고 있었다. 비록 낙방을 했다지만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고 계속하여 사시에 도전하고 있다는 히스토리가 관심의 절대요인이었다. 아울러 언니는 재호 외삼촌의 육척의 몸피에 마음을 빼앗겼다. 언니는 첫눈에 동생을 생각했다. 종종 전화통화에서 결혼을 전제로 마음을 나누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들어둔 터라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언니는 재호 외삼촌의 또다른 히스토리가 궁금했다. 도회지에서 고시동부를 했고 몇 번 낙방도 했었다는 소문을 들은 터라 그만한 스펙이면 이미 入丈에 가까운 히스토리 등은 있었지 않았겠나라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지켜보고 관찰하는 도중에 병희네 사건이 소문을 탔던 것이다. 언니는 재호 외삼촌의 히스토리를 더 자세히 알지 못하면서도 다리를 놓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병희네 사건을 해결했다는 소문이 이렇게 속절없이 시간을 끌어서는 아니될 일이라고 슬그머니 생각이 머리를 들었던 것이다. 언니는 재호 엄마에게 다가가는 자신을 만들었다. 서너 마을 건너에 상거하는 사이지만 오고가며 눈인사 정도는 나누는 사이였기에 슬그머니 슬그머니 거리를 좁혀갔던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기회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언니는 차츰 마음이 조급해졌다. 세상만사 새옹지마라 했거늘 사람 사이에 어떤 변화가 미래치로 존재하고 있는 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라 생각했다. 우선 외형적으로 사람이 그만하면 더 바랄나위가 없을 터이며 재호 외삼촌에게 내재된 스펙을 생각한다면 분명 가능성과 희망이 있다는 결론에 따라 언니는 양쪽 집안을 잘 알고 있는 이웃의 아낙을 중간에 내세웠던 것이다.
길게 이어진 해변길을 미끄러지듯 흘러가는 자동차와, 무리없이 핸들을 잡고 있는 남자에게 여자는 신경줄을 잇고 있었다. 카페에서 의식적으로 다물고 있는 듯 하던 남자의 말문은 조곤조곤 했고 여자의 질문에도 답변은 막힘이 없었다. 자신의 자동차핸들을 처음 잡은 남자의 운전 솜씨도 거침없었다. 여자의 자동차핸들을 잡았던 남자는 예전에도 더러 있었지만 지금의 남자와는 격이 달랐다고 여자는 생각하고 있었다. 여자의 가슴속으로 남자가 조금씩 자리를 잡아오고 있다고 생각했다. 기회가 마련된다면 몇 번 더 만남을 이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첫 만남에서 그는 여자에게 에프터를 제의 했다. 자신 안에 내재된 분명한 속내를 노출하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잠시 주저함이 눈에 보였지만 여자의 대답은 망설임을 밀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의 만남은 그 주의 주말에 있었다. 그날은 남자의 운전으로 작은 도시를 벗어나 인근의 중소도시로 범위를 넓혀갔다. 빈번하진 않았지만 언니네를 다니러 왔을 때 여자도 몇 번 다녀갔었던 도시에서 남자와 여자는 즐거웠다. 고시공부를 하고 있다는 준수한 육척의 남자를 옆에 세우고 걸으며 조곤조곤 나누는 대화에 여자는 남자가 손을 잡아주길 기다렸다. 그러나 남자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여자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생각했다. 어쩌면 이대로는 더 이상의 발전이, 진전이 뒤따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여자는 남자의 팔에 자신의 팔을 감았다. 싫지 않은 듯 남자가 여자에게 눈웃음을 건내고 있었다. 여자는 더 깊은 미소를 남자에게 담아보냈다.
6
그는 다시 각종의 법률서적과 법전과, 사시에 필요한 수험서적과 기출문제와, 출제예상문제에 매달렸다. 어떠한 방법으로도 표현하지 않았지만 결혼에 대한 아내의 조건이었고 아내와의 내약이었다. 의식주 걱정없이 사시에 매진할 수 있다는 건 그의 생애에서 처음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내재된 자신감은 예전의 것이 아닌 듯 했다. 헤어날 수 없는 궁핍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할 수 있는 당위라던 생각 따위가 사치였음을 부인하지 않았다. 이식위천以食爲天을 설파한 공자의 철학을 비웃었던 자신을 자책하기도 했다. 먹는 것이 최고의 가치라면 사람이 아니라 금수와 다를 게 무어냐고 반문하기도 했었던 그였는데 스스로를 견인할 수 없을 만큼 깊은 나락을 경험한 다음이라 대철학자의 경구를 함부로 폄훼할 수 없음도 알았다.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자신의 가치를 확대포장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아니 누군가의 조력에 보답할 기회를 조각하자는, 그리하여 그 누군가의 가슴에 자신으로 인한 환희를 제공하자는 마음도 깊게 내재됐었다는 사실을 그는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지난 몇 개월 전과는 점지된 상황이 판이했다. 자신감의 원천이었다. 이름이 좋아 불로초였던 고시촌 생활과는 견줄 바도 아니었다. 고시촌의 고시원들조차 쪽방이나 다름없음을 체험한 그에게 산사의 요사채는 더할나위 없는 맞춤식 공부방이었다. 그것이야말로 안성마춤었다. 그는 자신했다. 지난 날과 판이한 환경이 조각된 것을 천재일우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이곳에서 자신의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야 한다는 각오도 새로웠었다. 이미 몇 명의 율사가 배출된 산사라는 소문을 등에 업고 찾아온 산사였다.
그는 첫날부터 게으름을 배척했다. 공양시간과 해우소를 드나들어야 하는, 용변시간을 제외한 여타한 시간은 문지방을 넘지 않을 각오였다. 자신에게 있어 미래는 오직 사시만이 최대치의 공약수였다. 그는 객관식 문제들을 기억의 회로에 한톨한톨 저장하며 지난 날의 경험도 기억의 회로에 함께 저장했다. 아니할말로 그는 죽기살기로 매달렸다. 이미 경험했던 과정이라 일차를 준비하는 것에는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렇듯 자신이 있었다. 그와 동시에 이차를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 가에도 신경을 할애했지만 그래도 우선의 목표는 일차였다.
하루의 밤이 지나고 두 번 세 번의 밤이 지났다. 많은 시간 이미 올빼미 생활을 경험한 그에게 그러한 밤은 익숙했다. 일주일이 지나고 열흘이 흘렀다. 그는 자신의 기억의 회로에 노이즈가 생기고 있음을 감지하고 있었다. 애기치 못한 노이즈였다. 산사를 휘감는 밤의 풍경소리가 뇌파를 흔들고 있음을 알았다. 예감하지 못했던 노이즈였다. 그러고도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흘러갔다. 하지만 풍경은 계속하여 무심했다. 바람의 질량을 고스란히 담은 풍경소리에 그는 목표치를 조금씩 차압당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와 동시에 기억의 회로에 저장되던 최대공약수에도 노이즈가 발생하고 있음을 알았다. 아내의 또는 처형의 알선으로 이곳까지 찾아온 것에 대해 후회할 겨를도 없었다. 강물이 바다를 찾아가지 못하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소沼를 만나 방황하고 있는 꼴이었다.
그렇듯 노이즈의 파장은 간단하지 않았다. 자신의 뇌리에 아내의 환영이 곡두되고 있다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님이 확실했다. 최대공약수와 풍경소리와 아내의 환영이 삼 박자로 엉키며 하루의 모든 시간을 강탈하고 있다는 것은 완벽한 상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님이라 생각했다.
그는 아내가 오는 날을 기다렸다. 달포에 한 번, 아내가 산사를 찾아와 잠깐 동안 인근 도시를 다녀오기로 한 약조가 유일한 기약이었고 유일한 호사였다. 그러나 그에게 허용된 아내와의 조우는 희열을 수반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시간은 더뎠다. 일 초 일 초가 여삼추였다. 깊은 산사에 들어앉아 한 달을 넘기고 다음 한 달을 기다리는 것은 뼈를 깎아내는 고통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고 나머지 세월을 허송세월 할 수는 더욱 없는 일이었다. 그는 주지스님에게 자신이 거주하는 동안만이라도 풍경을 떼어줄 것을 청하였다. 어렵게 청한 부탁에 주지스님은 망설임 없이 처사를 불러 경내의 모든 풍경을 떼어오라 했다. 그렇게 제거된 풍경이 사찰의 어느 창고에서 불면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알 바 아니지만 밤이 되자 풍경소리는 트라우마로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귀를 막았다. 그러나 풍경소리는 아내의 환영을 이끌고 나타났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아악-’하고 고함을 내질렀다. 고요했던 경내가 파괴되고도 남을 만한 고함소리였다.
“처사님! 처사님!”
요사채 문 밖에서 누군가가 그를 부르는 듯 했다. 그는 여타한 잡념에 휘둘리다가 자신을 부르는 듯한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문을 열었다. 주지스님이 문 밖 두어 걸음 뒤쪽에 서 있었다.
“무슨 일이 있으신겝니까?”
“………….”
“혹여 무슨, 나쁜 꿈이라도 꾸신겝니까?”
“아닙니다, 스님! 잠깐 환청이 들리는 듯하여 저도 모르게 그만 고함을 질렀는가 봅니다. 죄송합니다.”
“어디 편찮으시면 말씀하세요. 급한 대로 제가 진맥을 조금 할 줄 압니다. 비록 돌팔이지만요.”
“………….”
“잠깐 진맥을 봐 드릴까요?”
“아닙니다, 스님!”
“주무세요. 혹여 편찮으시면 말씀하시고요.”
대화는 그것으로 종료되었지만 다음 날 아침 해가 그림자를 만들기 전에 그의 아내가 산사를 찾아왔다. 그는 아내가 반가웠다. 그런데 아내의 얼굴이, 육신이 둘 또는 셋으로 겹쳐보였다. 그리고 보니 자신의 시야에 잡히는 모든 사물들이 뚜렷한 형체를 보여주지 않고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물건들이 제대로 보이질 않아요. 다‥당‥신‥도‥요. 보이는 것들이 모두 앵글이 빗나간 사진 같아요.”
그는 아내에 대한 또렷한 호칭을 찾지 못한 채 자신에게 허용된 그대로의 내용을 말했다. 원인이 무엇이며 어떤 이유로 발생된 증상인지를 알 수 없어 답답했지만 그는 아내의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부터 그러셨어요?”
“어제 밤새도록 너무 많은 잠념에 시달려 공부를 할 수 없었는데 지금 자고나서 보니 이런 현상이……, 저도 황당하구요.”
“안 되겠어요. 시내, 가까운 병원에라도…….”
그는 아내가 운전하는 차에 실려 30여 분을 달려서 종합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남편의 병명을 알 수 없는 그의 아내가 담당의사에게 증상을 얘기하고 그가 보충설명을 했다.
“자고났는데 사물들이 겹쳐 보였습니다. 제 아내도 지금 둘 또는 셋으로 보입니다.”
“언제부터 이런 증상이 있었습니까?”
“오늘 처음입니다.”
“지금 하시는 일은…요?”
“………….”
“사시를 준비하고 계세요.”
그가 입을 떼지 못하자 그의 아내가 대답했다.
“언제부터 하셨어요?”
“오륙 년 됩니다.”
그의 아내가 뱉는 소리를 귓전으로 듣는 듯 하며 의사는 그를 다시 한 번 쳐다보고 있었다.
“응시하신 적은……?”
의사가 그의 아내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묻고 있었다.
“이차에 두 번요.”
비록 부부지간이긴하지만 남편의 과거사를 잘 알지 못하면서도 그녀는 의사의 질문에 막힘 없이, 그리고 자신있게 대답했다. 그녀는 당당했고 자랑스럽다는 생각도 배제하지 않았다. 인연임을 자처하며 다가왔던 숱한 만남을 거부하고 조각된 인연에 그는 자랑스러움을 앞세웠다. 여자는 포커페이스가 무엇인지도 알고 있었다.
“제 손가락이 몇 개로 보이시죠?”
“………….”
의사는 자신의 손가락을 펼쳐 보이며 손가락 개수가 몇 개냐고 물었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몇 개인지 모르시겠어요?”
“정확하게 몇 개인지를 모르겠습니다.”
의사는 그에게 몇가지 사항을 더 묻고는 그를 잠시 밖으로 내보냈다.
그는 궁금했다. 사물의 개수를 제대로 헤아릴 수 없음은 물론 모든 사물들이 두세 겹 또는 서너 겹으로 겹쳐보인다는 건 간단치 않은 문제임이 명백하다고 생각했다. 응급실 의사는 그의 아내에게 정신과 진료를 권했다. 자신은 전공이 아니라 정확하게 말할 수 없지만 아마도 정신분열증 초기증세 같다고 했다. 여자는 실소했다. 이제 막 결혼한 자신의 남편이 증신분열증 환자 같다는 수용할 수 없는 아니, 수용하기 어려운 진단결과를 제시함에 그 자리에 주저앉아 통곡이라고 쏟아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여자는 눈 앞이 캄캄했다. 노처녀 소리를 들어가며 보다 자랑스러운 남편 감을 고르고 골라서 늦은 나이에 결혼을 했는데 그 남편이 정신분열증환자라니, 목전에 전개된 엄청난 결과를 어떻게 수용해야 할지 여자는 혼란한 정신을 수습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자는 남편을 대기실에 앉혀놓고 신경정신과를 예약했다. 어차피 이상증세를 발견하고 병원을 찾아온 것이라면 의사를 믿고 의사의 처방에 순종해야할 판이었다.
“정신분열증입니다. 초기증세라 의사의 지시에 잘 따르면 완치가 가능합니다만 술과 담배는 무조건 멀리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보고 듣고 하는 것도 한동안 피하시고 처방해드린 약은 빠트리지 말고 꼬박꼬박 드셔야 하고요.”
그날 밤, 여자는 남편의 눈을 피해 손수건을 흥건히 적셔야 했다. 이를 악물고 굳세게 마음을 닫으려 하였지만 여자는 흐르는 눈물을 막아낼 수 없었다. 전생에 무슨 죄가 있어 이토록 가혹한 죄값을 치르게 하는가 라는 자탄도 입술을 헤집고 흘러나왔다.
여자는 남편의 이상증세에 대해 함구했다. 시누이는 물론 친정과 언니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여자는 자신에게 귀착된 모든 짐을 홀로 짊어지기로 했다. 비록 큰 규모는 아니지만 하고 있는 자신의 사업이 어려운 것도 아니며 나아가 당장은 내것이 아니지만 다행스럽게도 부모의 재산이 넉넉했고 아울러 그것을 물려 받을 형제가 많은 것도 아니라는 것 등도 여자가 안도하는 원인 중의 하나였다.
저녁을 먹고 약을 먹은 후 그는 깊은 잠에 빠졌다. 난생 처음 맛 보는 깊고깊은 잠이었다. 그리고 그 잠은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계속됐다. 여자는 남편이 깊은 잠에 빠지기 시작한 삼일 째 날에 산사를 찾아가 남편의 짐을 모두 찾아왔다. 짐이라야 거의가 사시를 준비하던 참고서들이었다. 주지스님에게는 모든 것을 함구하여 주십사 부탁을 해야 했다.
여자는 남편의 증세호전을 위해 일주일에 한 번 병원을 찾았다. 약을 먹고 자고, 또는 자고 먹고의 연속 속에서, 아니 약을 먹으면 자연스레 잠을 자게 되고 약 기운이 떨어지면 눈을 뜨는 연속 속에서도 여자는 남자에게 걸었던 희망을 거둬들이지 않았다. 지난 세월동안 남편에게 시나브로 유착된 병인을 생각하면 남편이 가엾기조차 하다는 생각이었다. 아니할말로 남편의 이상증세에 대한 완치유무론이 설령 환자나 환자의 보호자에게 던지는 의사의 립스비스였다 할지라도 여자는 꿈을 품어온 한 남자의 아내로서 남편의 영육에 덮여 있는 질환을 빠른 시간 내에 거두어내고야 말겠다는 각오와 나아가 언젠가는 남편이 간직해온 원대한 꿈을 열어내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자신 안에 깊이깊이 쟁여넣으며 그 밤, 약 기운에 의해 세상사를 잊고 깊이 잠 든 남편의 이불 속으로 여자는 자신의 몸을 조용히 밀어넣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