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연은 형인 병하의 목소리를 듣고 그의 신방이기도 하고 글방인 윗방에서 아랫방으로 통하는 장지문을 열고 성급히 들어선 형을 바라보았다.
"형님. 불렀어요?"
"응. 내 지금 읍내에서 일을 마치고 들어오는 길인데, 이틀 후 영월부 관풍헌(觀風軒)에서 백일장(白日場)을 연다고 읍내 곳곳에 방(傍)을 붙였더라."
"백일장이라고 했느냐?"
아랫방에서 듣고 계시던 어머니의 반문이었다.
"네. 비록 영월에서 열리는 향시(鄕詩)라고는 하지만 이 시험에서 장원을 한다면 이곳 관아에서 벼슬자리도 얻을 수 있고, 나라에서 치루는 과거시험에도 원님의 천거로 어렵지 않게 응시할 수 있다고 방 앞에 모인 사람들이 수순거리더군요."
병하는 방 앞에 모인 사람들이 자기네들끼리 수군거리는 말을 듣고 마치 나라에서 치루는 과거시험인양 말을 늘어놓았다.
"그렇지는 않느니라. 백일장에서 장원을 한다고 해서 나라에서 관직에 등용시키는 시험은 아니란다. 이는 태종 임금 때부터 성균관 유생들에게 나라의 일에 대한 계책방안을 논하기 위해 글로 쓰게 한 것이 백일장의 시초가 돼 그 후로 지방의 각 고을마다 인재들을 권장하기 위해 백일장 제도가 생긴 것이란다."
함평 이씨는 말을 끝내고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혹 장원을 하면 고을 원님의 천거로 이곳 동헌에 등용은 될 수는 있겠지만, 그도 쉬운 일은 아니란다. 백일장에서 쓰는 글도 과체시(科體詩)의 엄격한 율을 따라야 하니까 쉽게 볼 일은 아니니라. 만약 글을 겨루는 백일장에서 장원을 한다면 그도 큰 명예를 얻는 일이지."
함평 이씨는 간략하게 여러 말을 하면서도 병연에게 이번 백일장에 나가서 글을 겨루어 보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다음날 저녁, 병연은 저녁상을 물린 다음 어머니에게 다가와 앉으며 입을 열었다.
"어머니. 내일 관풍헌에서 열리는 백일장에 나가서 글을 겨루어 보겠습니다."
병연의 이 한마디에 온 가족이 환한 미소로 변했다.
"성심아! 잘 결정했다. 아우는 꼭 장원할거야. 지금까지 높이 쌓은 글을 이번 기회에 겨뤄보지 못하게 될까 마음 졸였는데 나가기로 했다니 형은 정말 기쁘구나."
"지금까지 어머니 혼자 저희들을 기르고 글공부를 깨우치시느라고 온갖 고생을 다하셨는데 이번 기회에 글을 겨루어 보지 못하면 어머니에게 크나큰 불충을 저지르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비록 나라에서 치루는 과거는 아니지만 그래도 버금가는 과시(科試)격인 백일장에 나가서 앞으로 치러야 할 과거시험에 대비해 경험도 쌓을 겸 마음을 정했습니다."
"그래. 나가서 글을 겨루어 보아라. 기왕이면 장원을 했으면 더욱 좋은 일이고...."
병연이의 불타는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함평 이씨는 간략한 말로 승낙해주고 자신만이 알 수 있는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두 아들 내외를 내보내고 잠자리에 누었으나 잠을 이울 수가 없었다.
더욱이 병연의 학문이 너무도 높이 쌓여가면서 그녀의 한숨은 더해갔다.
경국대전 예전(經國大典 禮典)에 "대역죄에 연좌된 사람은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없다." 고 기록돼 있기 때문이었다.
"불쌍한 녀석! 그가 취한 학문이 헤아릴 수도 없는데... 차라리 글공부를 가르치지 말고 농사일이나 시킬걸."
함평 이씨는 밤새 뒤척이며 이런 생각을 하다가 새벽녘에야 잠을 이루었다.
다음날 아침.
병연은 이른 조반을 마치고, 아내인 장수 황씨가 다듬어 놓은 명주 바지저고리를 입고 흰 두루마기를 걸치면서 옆에서 시중을 들어주는 아내를 바라보았다.
"여보? 고맙소. 내 오늘 꼭 장원하리다!"
그녀는 대답 대신 부끄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한 그녀의 모습이 더욱 예뻐 보였다.
그러는 사이, 병연은 두루마기의 고름을 마무리하고, 갓을 쓰고 필낭과 한지로 풀칠해 겹 붙인 두루마리를 들고 마당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