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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동지회 'HI-AN' Member]… ‘문경 회동’[1]
▶ 2013년 11월 29일(금요일)~30일(토요일) : 1박 2일
◇ 제1일 문경 새재 트레킹 여정(1)
* [프롤로그-청운각 회동]— 반가운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트레킹 동지들!!
☆… 오늘은 지난 3~4월,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트레킹에 동행했던 산우들이 만나는 날이다. 이름 하여 <2013-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동지회>의 만남이다. 히말라야를 다녀온 지 6개월 만이다. 그때 히말라야 트레킹에는 부산에서 이상배(李相培) 대장을 위시하여 전민수(田旼秀), 여삼동(呂三東), 김석순(金錫淳), 노재성(盧宰成) 대원 등이 참석하였고 서울에서 기원섭(奇元燮), 오상수(吳尙洙) 대원이 동참했었다. 장장 15일간의 험난한 여정을 동고동락했던 산우들이다. 그 동안 시간을 맞추기 힘들어 미루어 오다가 이번 주말을 기하여 부산과 서울의 중간지점인 문경새재에서 회동하기로 하여 오늘 그 첫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기원섭과 백파는 아침 9시 15분, 서울 서초동을 출발했다. 기원섭이 운전하는 완강한 렉스톤에 부인 이진애 여사와 동행 김옥련 여사와 백파가 동승하여 일로 문경을 향하여 질주했다. 부산 대원들은 이른 아침 7시에 출발하였다. 우리가 중부내륙고속도로 충주휴게소를 통과할 즈음에 이미 문경에 도착했다는 전화가 왔다. 우리는 휴게소에서의 휴식을 취소하고 그대로 달려갔다. 문경에 가까워질수록 온 산야는 일전에 내린 눈으로 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한데 밖의 날씨는 매우 차갑다. 달리는 차창으로 밖을 내다보니 온 산야가 눈으로 덮여 환상적인 풍경을 보여주었다. 중부 이남지방에서는 매우 많은 눈이 내린 것이다. 서울의 아침 기온이 영하 5℃를 기록했는데 낮이 되어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 11시 10분, 문경의 <청운각(靑雲閣)>에서 남북의 대원들이 반갑게 조우(遭遇)했다. 비록 공기가 쌀쌀하기는 하지만 하늘은 청명하고 쏟아지는 겨울햇살이 눈부시다. 문경의 진산(鎭山)인 주흘산 거봉이 선연히 솟아있다. 대원들은 히말라야 등반을 기념하여 다 같이 맞춘 ‘카키색 등산복’을 차려 입고 있었다. 대원들의 면모 한 분 한 분이 정겹다. 그 특유의 하얀 구렛나루 수염이 빛나는 이상배 대장이 환호하고, 변함없이 차분하고 정정하신 전민수 사장님이 반갑고, 사나이다운 기골이 장대한 여삼동 사장님의 풍모가 여전하였다. 그런데 부산에서 두 대원이 오지 못했는데, 그 중 김석순 대원은 허리를 다쳐 올라오지 못했고, 노재성 군은 대학입시 관계로 참석하지 못했다. 참 아쉽다. 파랗게 맑은 하늘 아래 청운각의 지붕과 마당에는 아직 두꺼운 눈이 쌓여 있었다.
☆… 오늘, 우리가 만나는 <청운각>은 고(故) 박정희 대통령의 유적지이다. <청운각(靑雲閣)>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4월 이곳 '문경서부심상소학교'(현 문경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1940년까지 2년 9개월 동안 근무할 때, 거쳐하던 하숙집이다. 약관의 박정희 교사가 첫 부임지의 교단에 설 무렵은 강압적이 일제 식민통치가 극(極)에 이르렀는데 그 당시 한민족말살정책은 교육 현장에서 더욱 기승을 부렸다. 우리의 말과 글은 물론, 민족의식을 자각시키는 역사를 가르치지도 못하게 했다. 그러나 민족의 굴욕과 아픔을 몸으로 느낀, 혈기왕성한 청년교사 박정희는 틈만 나면 아이들에게 유서 깊은 우리의 역사와 민족 문화와 정신을 일깨웠다. 특히 이순신 장군의 해전과 호국정신을 많이 강조했다고 한다. 결국 일련의 그런 행동이 일본인 교사에게 발각되어 집단폭행을 당하기도 하고, 당시 일인 교장으로부터 모욕적인 질책을 받고 분연히 맞받아치고 교직을 떠났다. <청운각>은 당시의 퇴락한 초가집을 수리 복원하여 단장하고, 그 옆에 기념관을 지어 경내를 아름답게 조경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 [기원섭의 교촌농원]— 파란 하늘에 날아가는 비행기
☆… 우리는 그 청운각 마당에서 만나, 우선 만남의 기쁨을 따뜻한 인사로 나누면서 한 컷의 포즈를 사진에 담았다. 멀리 뒤쪽으로 주흘산의 장엄한 모습이 청람(靑藍)빛 하늘에 솟아있었다. 점심식사를 하기에는 조금 이른 시각이라, 기원섭이 안내하는 교촌농원을 찾았다. 교촌농원은 기원섭 내외가 연전에 농막이 딸린 텃밭을 매입하여 여름철이면 텃밭을 가꾸는 재미가 넘쳐 나는 곳이다.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자연 속에서 땀을 흘리며 자연의 생명을 나눌 수 있는 흙이야말로 심신을 건강하게 하는 생명의 텃밭이다. 부산에서 사업을 하는 전민수 사장도 고향인 경남 함양군 서상면 백운산 중봉 아래의 천하 산골인데, 요즘 얼마간의 땅이 있어 마음을 많이 두고 산다고 했다. 한참 동안 농장에 머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고개를 들어보니, 파란 하늘에 높이 뜬 비행기 한 대가 하얀 연기의 긴 흔적을 남기며 날아가고 있었다. 청명한 하늘이 보여주는 겨울날의 정화경이다.
* [청운주막의 국밥] — ‘배차적’에 곁들인 막걸리 한잔
☆… 우리는 교촌농막의 뜨락에서 따스한 겨울 햇살을 받으며 한참동안 텃밭 가꾸기와 전원생활에 대한 방담을 나누었다. 그리고 다시 청운각 앞에 있는 <청운주막>에 돌아와서 식사를 했다. 이 집의 원래 이름은 <국밥집>이었다. 오직 그것을 주(主) 메뉴로 장사를 해 온 것이다. 이집의 ‘국밥’은 일제 말 박정희 교사가 자주 찾아와 먹던 바로 음식에서 유래한다. 담백하고 구수한 시골의 장터국밥 바로 그 맛이다. 주문한 국밥이 나오기 전, 우리의 식탁에는 이 고장 특유의 ‘배차적’(배추전)을 내놓았다. 막걸리 한 사발로 만남의 기쁨을 나누었다. 전민수, 여삼동 사장을 비롯하여 모두들 ‘배차적’이 아주 고소하다고 하면서 아주 맛있게 들었다. 이 지역에서만 전해오는 배추전은 이곳 말로 ‘배차적’이라고 하는데 싱싱한 배추를 묽은 밀가루 반죽에다 살짝 담갔다가 건져내어 기름을 두른 솥뚜껑 위에 굽는 것이다. 배추에 밀가루를 코팅하듯 살짝 얇게 덮어서 지진, 배추전의 싱싱한 맛이란! 그 담백한 뒷맛이 아주 일품이다. 고소하게 굽힌 배추전은 섬유질과 수분이 풍부하여 사각사각 씹히는 질감이 좋고 뒷맛이 산뜻한 게 특징이다. … 방안은 서울에서 함께 내려온 두 분의 ‘꽃부인’이 있어 한결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 [문경(聞慶)새재-한국관광 100선 중 1위] —
☆… 식사를 마치고 문경새재 트레킹을 했다. ‘문경새재’는 우리나라 아름다운 길 1위에 오른 명승지이다. 제1관문에서 제3관문에 이르는 새재의 고갯길은 우리나라 '명품 길 10선'에 들어있다. 그리고 올해 한국관광공사가 국내 관광지를 대상으로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한국 관광 100선' 투표한 결과, 문경새재가 1위를 차지했다. (<조선일보> 2013년 9월 5일(목요일) 섹션 ‘주말매거진’ 보도) 이미 명승 32호로 지정 문경새재는 영주 죽령, 영동 추풍령과 함께 조선 시대 3대 고갯길로 꼽히며, 백두대간인 조령산 마루를 넘는 고개라고 해서 '조령(鳥嶺)'으로 불리기도 한다.
문경새재는, 한반도의 중추(中樞), 백두대간(白頭大幹)의 남한 구역 중에서 산맥의 남북(南北)과 동서(東西)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그 주변의 장엄한 산군(山群)의 기세가 자못 하늘을 찌른다. 새재는 우람한 조령산과 마역봉 사이의 안부(鞍部)를 넘는 고개이다. 조령산은 충청북도 괴산군과 경상북도 문경시의 경계에 있는 정상 1,017m의 산줄기…. 하늘을 향하여 솟아오른 주변의 암봉에는 강건한 기상(氣象)이 서려 있고, 연면히 이어지는 산의 능선은 줄기찬 인간 기질의 표상으로 다가온다. 조령계의 맑고 깨끗한 물은 영남지방 사람들의 생명과 정신의 원천이다. 그렇다. 백두대간 새재를 분수령(分水嶺)으로 하여 북으로 흐르는 물은 한강(漢江)의 원류가 되고, 남으로 흘러가는 물줄기는 낙동강(洛東江)의 근원 중의 하나이다.…
* [문경새재 트레킹]— 제1관문에서 제3관문을 왕복하는 14km
☆… 새재 주차장에서 차를 세우고 트레킹을 시작했다. 날씨가 차갑다. 볼을 찌르는 싸늘한 기운이 매섭지만 방한복을 단단히 차려 입었으므로 산행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지금은 겨울이라 푸르던 잎들이 다 떨어져 울창한 수림의 싱그러운 분위기를 느낄 수는 없지만, 겨울 특유의 앙상한 나목(裸木)의 가지마다 하얀 눈이 쌓여 있고, 길목과 주변의 산록에도 어제 내린 눈으로 백설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새재 길 초입의 길목 오른 쪽에 의관과 도포를 차려 입은 조선의 <선비상>이 서 있고, 그 옆 아담한 비각 속에 <문경현감신길원충렬비>가 자리 잡고 있다. <선비상>은 군자의 학문과 올곧은 삶을 추구했던 조선 선비들의 표상이다. 그야말로 이 곳 새재는 학문을 갈고 닦은 그 선비들이 청운(靑雲)의 뜻을 품고 한양을 향하여 가는 길목이다. 어디 그뿐인가. 이곳 새재는 1592년 임진년, 잔인무도한 왜군들이 휩쓸고 지나간 처절한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 [문경새재] — 문희경서(聞喜慶瑞), 그 청운(靑雲)의 고갯길 …
☆… 영남대로(嶺南大路)로 지칭되는 문경새재 과거(科擧) 길은, 조선 태종 때 개설 되어 약 600여 년 동안 영남과 충청도-경기도-한양을 잇는 요로(要路)였다. 조선시대 최고의 성리학자인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을 비롯한 많은 선비들이 과거에 등극하여 금의환향한 길목이 이곳이다. 조선시대의 사림(士林)의 중심은 영남의 선비들이었다. 고려가 망하자 자신의 고향인 경상도 구미로 낙향하여 채미정(採薇亭)을 짓고 제자를 길러낸 야은(冶隱) 길재(吉再)를 위시하여, 그 계보에서 용출한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등이 모두 이 길을 오고가면서 문명(文名)을 떨치며 세상의 영욕을 다했다. 무엇보다 조선 성리학의 최고봉인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비롯하여 그의 문하에서 배출된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등 기라성 같은 인재들이 모두 이곳을 통해 관직에 나아갔으며, 조선시대 전기 대문장가 서거정도 대구의 양친을 그리워하며 이 고개를 넘었고, 한때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안동 예안의 퇴계를 찾아오면서 지나간 길도 이 길이었다. 다산 정약용도 이 길을 넘어서 영남의 민정을 살피러 갔다. 새재를 지나는 수많은 선비들의 사연이나 감상도 많다. 그래서 이름난 시인 묵객들이 이곳을 지나면서 한두 편의 시를 남기고 가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새재의 과거옛길을 따라가다 보면 이들의 시(詩)를 미끈한 자연석에 새겨 곳곳에 세워놓았다.
♣ [문경새재] — 때로는 처절한 역사의 현장이었다!
☆… 그러나 새재는 때로 비운(悲運)의 현장이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1592년 4월 14일 부산 동래에 상륙한 왜장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가 18,500명의 왜군을 이끌고 한양으로 진격하던 곳도 바로 이 길이었다. 파죽지세로 북상하던 고니시의 부대는 부산에서 열흘만에 척후병들이 그렇게도 경계한 문경 새재 입구에 도착했다. 비조불입(飛鳥不入), 문경새재는 나는 새도 못 들어간다는 천혜의 요새였고, 여기만 뚫으면 한양까지는 일사천리였다. 그러나 선조 임금으로부터 삼도도순변사로 임명된 신립(申砬)은 천혜의 요새인 이곳을 그냥 왜적에게 내줌으로써 충주 탄금대에서 참패하고 처절한 최후를 맞았다. 전투 이틀 만에 신립 장군은 자결했고, 부장 김여물은 전사했다. 그리고 열흘이 채 안 되어 한양은 왜군에 넘어갔다. 고니시는 한양 입성 사흘 전 피난 간 선조를 쫓아 함경도로 진군했다. 백성들은 몰래 도주한 왕과 관료들에 분노해 궁궐과 관아를 불태우며 분노했다. 그렇게 새재는 7년 왜란의 아픔이 서려있다.
☆… 그러나 문경새재는 처절하도록 비장한 충혼(忠魂)이 살아있다.… 임진년 4월 26일, 문경현감 신길원(申吉元)은 고니시의 왜군이 접근해오자 피하지 않고 대적하다가 몇 안 되는 군사마저도 다 달아나고 홀로 남게 되자. 공(公)은 의관을 정제하고 관인을 차고 앉아 왜군의 길을 막았다. 적장이 칼을 빼어들고 속히 항복하여 길을 비키라고 협박하자, 공은 손을 들어 자신의 목을 가리키며 "내가 너희를 동강내어 죽이지 못함을 한탄하니 빨리 죽여서 나를 더럽히지 말라"하며 꾸짖었다. 적병이 성내어 먼저 한 팔을 자르고 계속 위협을 가해 왔으나 공은 얼굴빛도 바꾸지 않고 꾸짖기를 계속하니 마침내 살을 발라내는 모진 죽음을 당하였다. 왜란 끝난 후, 숙종 32년(1706년) 조정에서는 공의 장렬한 순국을 기리어 '현감신길원충렬비(縣監申吉元忠烈碑)를 세웠다. 새재 <옛길박물관> 입구의 오른쪽 길목에 있다.
♣ [문경새재-<옛길박물관>] — 백두대간 문경새재의 역사와 문화
☆… 새재의 관문에 들어가기 전, 초입의 오른 쪽에 날아갈 듯한 전통기와집으로 지어진 정갈한 <옛길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다. 여기에는 문경새재의 역사와 지리, 그리고 이 지역의 민속문화가 전시해 놓은 곳이다. 그런데, 오늘 <옛길박물관>에는 ‘문경구곡원림 <石門九谷> 사진전’(2013.11.29~12.08)의 현수막이 내걸려 있었다. 시간이 여의치 않아 관람하지 못해 아쉬웠다.
♣ [문경새재] — 천혜의 요새(要塞), 나라의 중요한 요로(要路)였다.
☆… 우리 일행은 먼저 문경새재 제1관문을 지났다. 날씨가 추워서인지 오늘따라 탐방객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설경이 아름다운데 한적한 새재 길을 걷는 맛이 아주 호젓해서 좋다. 곳곳의 유적지와 산천의 풍경을 천천히 음미할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시간이다. 우선 새재길의 본격적인 출발점은 관문(關門)이다. 문경새재에는 사적 147호로 지정되어 있는 세 개의 관문이 있다. 관문은 신라시대부터 외적의 방비나 입국자의 조사를 위해 국경·군사요충지에 세운 성(城)의 출입문이다. 임진왜란을 겪은 조선의 조정은 문경새재에 3개의 관문을 축성했다. 제1관문이 주흘관(主屹關)이요, 제2관문은 조곡관(鳥谷關), 제3관문은 조령관(鳥嶺關)이다.
제1관문인 주흘관(主屹關)은 새재의 가장 아래쪽에 위치해 있다. 오른쪽의 주흘산(1079m) 정상에서 뻗어 내려온 산줄기와 왼쪽의 조령산(1,026m)에서 뻗어 내려온 산맥이 만나는 자리에 위치해 있다. 자연적 지형을 잘 살린, 그 규모가 아름답고 위엄이 있는 성문이다. 좌우의 성곽은 학(鶴)의 날개처럼 앞으로 뻗어내어 축성하고 그 성문 앞은 시야가 확연하게 열린 광장을 조성하여 모든 상황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도록 설계했다. …♣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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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ㅎㅎ조은만남이엿습니다
역사공부 많이 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