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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의 땅을 향한 로드맵(15)아버지의 유산(민 20:22-29)
지난 5월 8일 어버이 날에 이어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어버이 날의 유래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우선 이 날은 철저하게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시작된 날이라는 것이 강조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미국 웨스트 버지니아의 한 감리교회에서 25년간 주일학교 교사로 섬겼던 앤나 잘비스(Anna Jarvis)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11명의 형제중 9번째였던 그녀의 나이 41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어머니의 무덤에서 그녀는 자신을 낳고 키운 어머니의 고마운 사랑을 정기적으로 기념하는 날로 만들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그것은 그녀의 나이 12살에 자신처럼 주일 학교 교사였던 자기 어머니가 어느 주일 ‘성경의 어머니들’이란 공과를 마치면서 “주님, 언젠가 이 땅의 모든 자녀들이 어머니를 기억하는 어머니 날을 지키게 하소서”라는 어머니의 기도를 기억해낸 까닭이었다고 합니다. 앤나는 어머니 무덤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어머니, 하나님의 은혜로 당신이 반드시 어머니 날을 갖게 해드리겠습니다.” 그래서 그녀가 섬기던 앤드루 감리교회에서 1907년 5월 12일 주일 예배에 참석한 약 500여명의 교우들에게 손수 준비한 흰색 카네이숀 500송이를 나누어 주고 어머니 기억하기 ‘어머니 날’ 캠패인을 시작합니다. 다음 해인 1908년 이 캠페인에 유명한 그리스도인 백화점 왕 워너메이커가 동참하여 버지니아 앤드루 감리교회와 필라델피아 백화점 강당에서 어머니 날 캠패인이 동시에 이어집니다.
다시 6년 후인 1914년 헌신적 그리스도인 대통령이었던 우드로우 윌손(Woodrow Wilson)의 사인으로 어머니 날이 국가적인 날로 탄생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잘비스 여사는 자기 생애 마지막 20여년을 어머니 날을 상업화하려는 사회 풍조에 대항하여 진정하고도 순수한 날로 이 날이 회복되기 위한 싸움에 다시 헌신합니다. 예를 들어 가게에서 카드를 사는 대신 편지를 쓰자고, 가게에서 카네이숀을 사지 말고 우리가 손수 카네이숀을 만들어 어머니의 사랑을 기억하자는 등의 캠패인을 말입니다. 물론 그녀의 그런 노력은 상업주의를 극복하지는 못했습니다만, 이 한 그리스도인의 헌신으로 우리는 오늘 날 어버이 날, 어버이 주일을 갖게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56년 국무회의에서 처음 어머니 날이 제정되고, 1973년 대통령령으로 어버이 날로 변경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앤나 잘비스의 어머니의 죽음으로 어머니 날이 탄생한 배경을 살펴 보았습니다만, 오늘의 본문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을 향해 가데스에서 출발한지 얼마 안되어 호르 산(에돔의 변경-출애굽 지도)에서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던 아론의 죽음 사건이 발생합니다. 전통적으로 호르산은 지금의 요르단의 최대 관광지인 페트라의 가장 높은 산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어버이 주일에 우리는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던 ‘아버지 아론’의 죽음이 남긴 레슨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두 가지만 생각하겠습니다.
은 누구에게나 공과를 남긴다는 레슨입니다.
우리 한국인들의 인물 평가는 늘 흑백 논리에 의해 지나치게 지배당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증언처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한 것”이 사실이라면 아무도 완벽하게 결함이 없는 삶을 산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가장 존경할만한 사람의 삶의 장에서도 한 두 가지 결함의 흔적들을 찾아내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의 한 두가지 소위 결함의 흔적 때문에 그의 삶의 가치 자체를 온통 부정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겠습니까? 성경은 어떤 사람의 인생의 우상화도 허용하지 않습니다만, 동시에 어떤 특정한 허물로 인한 그의 존재 가치를 부인하는 일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 소위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어떤 믿음의 사람도 흠이 없는 완벽한 인생을 산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과오나 허물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인생을 산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들을 여전히 믿음의 사람들로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장미에 가시가 있다고 해서 장미의 아름다움을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누군가가 영어의 ‘beautiful’이란 단어에는 ‘티’(t)가 들어가 있다고 조크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아론의 생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존경을 받아 마땅한 이스라엘의 리더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본문은 므리바의 거역 사건으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지 못함을 안타깝게 기술합니다. 24절입니다. “아론은 그 조상들에게 돌아가고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에는 들어가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므리바 물에서 내 말을 거역한 까닭이니라” 성경은 그의 거역을 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사실 시내산의 금송아지 우상 숭배 사건이나 미리암의 모세의 아내 시기 사건등의 책임에서도 아론은 자유로운 지도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론의 거역을 고발하는 것만이 본문 기록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29절을 읽어 보십시오. “온 회중 곧 이스라엘 온 족속이 아론이 죽은 것을 보고 그를 위하여 삼십일 동안 애곡 하였더라” ‘30일간의 애곡’은 한 지도자에 대한 백성들의 최고의 경의의 표현이었다고 성경학자들은 증언합니다. 아론에게 약점이나 허물이 있었다고 해서 이스라엘은 그의 기여를 함께 망각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모세 곁에서 제2인자로 모세의 대언자로 말없이 백성을 리드했던 아론의 소중한 기여를 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유대인의 전승에 의하면 아론은 철저하게 평화 지향적 지도자이었다고 합니다. 가말리엘의 조부 라반 힐렐(Hillel)은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아론과 같이 되십시오. 그는 화평을 사랑하고 화평을 추구하며 이웃을 사랑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런 아론을 잊지 않았습니다.
어버이 주일에 우리가 기억하는 우리의 부모들은 어떤 분들이었습니까? 인간이기에 결코 완전할 수 없었던 우리의 부모님들도 아론처럼 공과가 함께 공존하는 삶의 유산을 남긴 분들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부모의 어떤 허물 때문에 자식들을 향한 부모의 그 지극한 헌신까지 망각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자식된 우리도 결코 완전할 수 없는 인생을 살고 있다면 과연 우리가 부모를 원망할 자격이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우리들 부모님들의 인생의 비틀거림이 많은 경우 우리들 자식들 치닥거리로 말미암은 것이었음을 안다면 우리가 무슨 자격으로 부모를 원망한단 말입니까? 최근 인터넷 서핑중에 발견한 어떤 아버지가 자기 딸에게 보낸 인터넷 편지를 읽고 정말이지 유쾌한 웃음을 웃을 수가 있었습니다. 마지막 문단만 읽어 보겠습니다. “--가빈아, 저번에 니가 노래를 불러 주었잖냐?-아빠, 힘내세요, 가빈이가 있잖아요-라고. 이 노래 제목이 ‘아빠, 힘 내세요’라고 하더라. 근데 가빈아, 아빠가 진짜 힘든 게 뭔지 아니? 진짜로 힘든 건 바로 너 때문이다. 우선 한 달 놀이방비가 25만원이라고 하더라. 이게 말이 되니? 6개월로 계산해 보자. 순순히 놀이방비만 해도 150만원이더구나. 거기다가 간식비, 견학비, 책값, 니가 대학생이니? 아빠는 요즈음 미치지 않을려고 노력하고 있단다. 그러니 가빈아, 앞으로 아빠 앞에서는 그런 노래하지 말라. 니가 노래 부르면 무슨 돈 벌어오라는 주술 소리로만 들린단다.” 거창한 부모님 효도를 들먹이지 않아도 저는 이 시대의 자녀들이 부모님 입장을 이해하기만 해도 우리의 가정의 분위기는 매우 달라지리라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론의 레슨-삶은 누구에게나 공과를 함께 남긴다는 레슨입니다.
2. 선배의 사역은 계승되어야 한다는 레슨입니다.
우리의 부모들은 큰 그림으로 본 다면 우리의 인생의 선배들이십니다. 그들은 결코 완전했던 분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치열한 삶의 소명은 후배들인 우리 자녀들에게 계승되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부모가 하시던 일을 그대로 자녀가 해야 한다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식을 주신 목적에는 큰 그림으로 ‘역사의 계승’이라는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부모대로 모든 것을 중단하지 않으신 이유-그 자손을 통해서 계속적으로 하시고자 하는 그 무엇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생육하라 번성하라”는 창조 명령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부모가 죽고 자손이 부모의 자리를 대신하는 순간은 매우 엄숙한 바톤 터치의 순간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비판하던 그 부모의 자리에 서서 우리가 다음 세대의 비판을 받아가며 역사의 임무를 수행해야한 한다는 역사적 소명의 순간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인류는 한 사람의 죽음을 그냥 사건이 아닌 장례 곧 의식으로 치루었던 것입니다.
아론의 죽음 사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론이 죽기전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하시어 아론이 그 아들을 데리고 호르산에 함께 설 것을 명하십니다. 그리고 26절을 보십시오. “아론의 옷을 벗겨 그의 아들 엘리아살에게 입히라. 아론은 거기서 죽어 그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라.” 그 명령이 수행되는 28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아론의 옷을 벗겨 그의 아들 엘리아살에게 입히매 아론이 그 산 꼭대기에서 죽으니라” 얼마나 엄숙한 임무 교대의 순간입니까? 그런 의미에서 성경적으로 죽음은 개인적인 사건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동시에 하나님의 역사를 계승하는 공동체의 의식이었던 것입니다. 아론의 아들의 이름이 엘르아살이었던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하나님이 도움이시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엘르아살, 그가 하나님의 도움을 의지하고 새로운 리더가 되어 역사를 이끌어 가야 한다는 뜻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인 후배는 부모인 선배를 계승하여 선배가 다하지 못한 약속의 땅을 향한 로드맵을 완성하는 그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모님을 생각하는 이 계절 부모님의 기도 제목이 무엇이었습니까? 부모님의 기대는 무엇이었습니까? 우리의 부모님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하시는 소명은 무엇입니까? 부모님을 통해 내게 계승되어야 할 과제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이 날 단순한 효도를 결심하는 일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훨씬 더 의미있는 물음이 아니겠습니까?
작년(2007년)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하면서 시각 장애인 송 경태씨(47세,시각 장애인 도서관장)가 아들 원씨(21세)와 함께 해발 3,000-4,000m의 고지에 위치한 칠레 아타카마 사막 250km 코스를 6박 7일간 완주한 기사가 소개된 적이 있었습니다. 이로서 송 관장은 사하라 사막, 고비 사막에 이어 세계 3대 사막 마라톤을 완주한 기록을 세웠다고 합니다. 송 관장에게 산소가 희박한 그 곳, 평지가 거의 없는 험준한 그 코스를 달리며 포기의 유혹이 없었느냐고 묻자 그는 담담하게 “왜 없었겠어요, 너무 여러번 있었지요. 그러나 포기할 수 없었던 중요한 이유-아들 때문이지요. 제가 포기하면 아들도 포기하게 될 까봐 이를 악물고 달렸습니다”고 고백합니다. 처음 이 마라톤에 참여한 아들의 고백도 유사했습니다. “제가 아버지의 눈인데 어떻게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대회 4일째 무릎에 이상이 생겼지만 아버지가 저렇게 달리시는데--하며 달렸지요”라고 말했습니다. 250km의 결승지점을 통과하고 포옹을 한 부자는 오래 포옹을 풀지 못했다고 합니다.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아들은 이런 대답을 남겼습니다. “아버지의 그늘이 이렇게 크고 시원한 것을 평소엔 정말 몰랐습니다. 아버지는 정말 대단한 분이라고 느꼈습니다. 사막에서 아버지와 함께 달린 7일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어떻게 이 부자만의 이야기이겠습니까? 오늘도 인생의 사막을 달리는 수많은 부모들이 “내가 아직도 이렇게 달리는 이유-자식들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들 자식들 중에도 이젠 부모들의 눈이 되고 손이 되고 발이 될 자녀들도 일어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호르 산에서 죽는 아론의 마지막 소감이 궁금해집니다. 그는 아마도 자기가 입고 있던 제사장의 옷을 입은 아들 엘르아살을 보는 순간 그는 미소지으며 이렇게 고백했을 것으로, 이렇게 마지막 기도를 했을 것으로 믿어졌습니다. “하나님, 제가 꼭 약속의 땅을 밟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엘르아살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아들 엘르아살이 그 땅을 밟을 것을 믿습니다. 저는 이제 그만 감사함으로 하늘 아버지께로 가겠습니다. 제 영혼을 받아 주옵소서. 아-멘”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