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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 29호 성덕대왕신종 (에밀레종)의 진실
1. 통일신라 기술의 결정체 성덕대왕 신종 진실
통일신라의 성덕대왕신종은 그 오묘한 소리와 아름다운 형태로 세계의 칭송을 받고 있다. 아름다운 종소리를 만들기 위해 어린아이를 넣었다는 전설 때문에 우리에게는 에밀레종이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것의 아름다운 소리보다 더 놀라운 점은 앞으로 성덕대왕신종과 같은 종을 다시 만들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데 있다. 현대기술로도 만들기 힘들 만큼 뛰어난 기술로 만들어졌다는 뜻이다.
맑고 긴 천상의 울림을 만드는 ‘맥놀이’
성덕대왕신종은 장중하면서도 맑은 소리가 난다. 특히 유난히 길고 특별한 소리의 여운을 남기는 것으로 유명하다. 가히 천상의 울림이라 할 만 하다. 이 특별한 소리는 유리잔이나 종 같이 속이 빈 둥근 몸체를 두드릴 때 나타나는 ‘맥놀이 현상’ 때문이다.
맥놀이란 두 음파가 서로 간섭을 일으켜 진폭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것을 말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원래의 소리(진동)와 반대편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소리가 마주치면서 합해지거나 적어지는 현상이다. 두 소리가 합해질 때는 소리가 커지며 적어질 때는 소리가 사라지는 느낌이 든다.
성덕대왕신종은 타종 후 9초부터 ‘에밀레~’ 소리가 한번 나면서 사라지는 듯하다가 다시 9초 후 약하게 울음을 토해내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이렇게 9초를 주기로 맥놀이를 한다. 또 사람이 숨을 쉬는 듯한 ‘허억~’ 하는 작은 소리도 같은 방식으로 3초마다 한 번씩 맥놀이를 한다.
이 소리가 가장 나중까지 남는데, 3초는 사람의 숨소리 주기와 비슷해 익숙한 느낌을 준다. 맥놀이 횟수는 1초당 6회 정도까지는 좋은 느낌을 주지만 30~40회 정도가 되면 불쾌감을 준다.
성덕대왕신종 소리의 주성분은 기본진동수 64헤르츠(Hz) 근방의 음파와 168Hz근방의 음파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이 음파들은 각각 진동수가 조금씩 차이 나는 두 쌍의 음파로 구성된다. 각각 64.06Hz와 64.38Hz, 168.31Hz와 168.44Hz의 음파가 섞인 소리인 것이다. 이들 진동수의 미묘한 차이가 맥놀이를 일으킨다
그림 1 성덕대왕신종의 맥놀이 현상 ⓒ 한국과학창의재단 / 작가 김화연
성덕대왕신종의 낱소리 음파는 1,000Hz 이내에서만 무려 50여 가지나 된다. 이에 비해 일반 종소리의 낱소리는 20여 가지여서 성덕대왕신종 소리보다 빠르게 소멸된다. 성덕대왕신종은 낱소리 수가 많아 타종 후 소리가 거의 사라진 후에도 숨소리 같은 64Hz와 어린아이 울음소리 같은 168Hz의 음파가 남아 심금을 울린다.
성덕대왕신종이 맥놀이를 유발하는 원인은 두 가지다. 우선 종의 재질이나 두께가 균일하지 않아 종소리의 진동수가 미세하게 차이 난다. 겉보기에는 완전한 대칭을 이루지만 표면의 문양과 조각이 비대칭을 이루고 몸체 곳곳의 밀도나 두께도 미세하게 다르다.
또한 범종 내부에는 쇠 찌꺼기 같은 것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서양종은 이 같은 비대칭성과 비균일성을 가능한 한 제거하기 때문에 맥놀이 현상이 제대로 발생하지 않는다. 그래서 은은하게 울리지 않고 소위 ‘학교종이 땡땡땡’처럼 다소 경박한 소리가 난다.
한국과학기술원의 이병호 교수는 주파수 스펙트럼 분석(Frequency Spectrum Analysis)으로 화음상의 평점을 계산해 여러 종소리를 비교 평가했다. 이 분석방법은 음질 평가치를 정의해 그 수치를 계산하는 방법이다. 종을 100점 만점으로 평가했을 때 결과는 다음과 같다
일본의 범종학자인 쓰보이 료헤이(坪井良平)는 일찍이 일본의 NHK방송국에서 세계적인 명종들의 종소리를 모두 녹음해 일종의 ‘종소리 경연대회’를 연 일이 있다. 당시 성덕대왕신종의 종소리는 단연 으뜸이었다.
우리나라 종 제작기술의 결정체
그림 2 용뉴와 음관 ⓒ 문화재청
성덕대왕신종은 여러 가지 독특한 특징을 갖고 있다. 종을 매다는 고리인 용모양의 용뉴 부분에는 음관(용통)이라고 부르는 대나무 모양의 통이 하나 있다. 중국이나 일본 종에서는 볼 수 없는 이 구멍은 종이 울릴 때 내부에서 나는 잡음을 배출한다. 64Hz와 168Hz의 기본 진동은 내부로 되돌려 보내고 높은 진동수의 잡음은 재빨리 방출해 버리는 것이다.
서양의 종과 달리 우리나라의 종은 타격 위치(당좌, 撞座)가 정해져 있다. 성덕대왕신종의 당좌는 종의 안전이나 수명에 유리하며 소리의 여운도 길어지도록 절묘하게 제작됐다. 수학적으로 계산하자면 종을 매단 지점에서 당좌 중심까지의 이상적인 거리는 260cm다. 성덕대왕신종의 경우 당좌 중심까지의 거리는 238cm로 불과 22cm 차이를 보인다.
또 다른 구조적인 특징은 종 아래에 반원형으로 움푹 패인 부분인 명동(鳴洞)에 있다. 성덕대왕신종은 종각(鐘閣)에 높이 매달고 치는 것이 아니라 지상보다 조금 위에 매달고 친다. 이때 종구(鐘口) 바로 밑에 만들어 놓은 명동은 소리가 울리도록 하는 공명동(共鳴洞)의 역할을 한다.
아래 반원형으로 움푹 패인 명동(鳴洞)은 종소리가 울리도록 하는 공명동 역할을 한다
이 명동 시스템은 세계 다른 나라 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신라 특유의 시스템이다. 이렇게 음관으로 종 내부의 잡음을 빨아내고 명동 시스템으로 공명진동을 일으키기 때문에 종을 쳤을 때 긴 여운이 남는다.
성덕대왕신종은 납형법(蠟型法)으로 제작됐다. 만형법(挽型法) 또는 회전형법으로 제작된 일반종과 비교하면 그 형태나 소리 모두에서 차이가 난다. 납형법은 청동으로 범종을 만드는 방법 중 가장 어려운 기술이다. 주로 작은 종을 제작할 때 쓰이는 방법인데, 거대한 성덕대왕신종이 납형법으로 제작됐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성덕대왕신종을 만들려면 20여 톤의 쇳물에 여분 20∼30%를 더해 총24∼26톤의 쇳물을 끓여 동시에 부어야 한다. 끓는 쇳물을 거푸집에 일시에 부을 때는 압력이 대단하기 때문에 거푸집을 웬만큼 튼튼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또 뜨거운 쇳물을 쏟아 부으면 거품이 일어나 부글거린다. 이때 공기가 미쳐 빠져 나오지 못하고 굳으면 범종에 기포가 생기게 된다. 그러나 성덕대왕신종에는 기포가 없다.
정말 어린아이를 쇳물에 녹였을까?
성덕대왕신종을 만들 때 종의 소리를 좋게 하려고 어린아이를 쇳물과 함께 녹였다는 전설에 대해서는 찬반의견이 분분하다. 청동을 주물 할 때 뼈 속에 있는 인(燐, Phosphorus)을 섞으면 산화석이 제거돼 강도가 세지고 녹슬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의 무쇠와 청동불상에는 인이 소량 들어있으므로 성덕대왕신종에서 인이 발견된다 해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1970년대 한국과학기술연구소에서는 성덕대왕신종에서 한 어린아이의 유체 분량에 해당하는 인이 검출됐다고 발표했다. 통일신라시대에 불교가 매우 성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성덕대왕신종에 포함된 인은 동물의 뼈라기보다는 인신공양으로 사람의 뼈일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1998년 포항산업과학원의 분석 결과 인은 전혀 검출되지 않았다.
하지만 포항산업과학원에서도 전설이 사실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사람의 비중이 구리보다 가벼우므로 만일 어린아이를 넣었다면 위에 뜬 상태에서 타기 때문에 쇠 찌꺼기처럼 남게 된다. 만일 성덕대왕신종 제작 당시에 이것을 불순물로 취급해 제거했다면 인이 검출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견해다. 기록이 없는 한1,300여 년 전의 일을 정확하게 아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통일신라 시대 때 우리 조상들의 종 제작기술이 종의 주조와 설계뿐 아니라 음향학, 진동학 등 최적 시스템을 활용해 성덕대왕신종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참고문헌] - 권영일, “에밀레종의 신비를 푼 맥놀이 지도”, 『과학과기술』 2005년 4월호.- 전용훈, “에밀레 종 비밀은 맥놀이”, 『과학동아』 1998년 9월호.- 『에밀레종의 신비』, 네이버 emille2000, 2004.7.18- 『종의 용뉴』, 네이버 raifen, 2004.2.4- 신형준, “에밀레종, 여자애 끓는 구리물에 넣었을 가능성은”, 『조선일보』 2007.11.5- 박상준, “에밀레~ 에밀레~ 진짜 우는 아이 소리?”, 『과학향기』 2004.12.29- 이헌주, 『신라 과학기술의 비밀 ① 성덕대왕신종』, 국가지식포털 테마체험관, 2010.08.10- 이종호, 『현대과학으로 다시보는 한국의 유산 21가지』 (새로운사람들, 1999)- 이종호, 『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 (컬쳐라인, 2001)- 이광표, 『국보이야기』 (작은박물관, 2005)- 월정사, 『오대산 월정사?상원사』 (월정사, 2005)
[출처] : 이종호 한국과학기술연구원 국내장기전문가·과학저술가 /한국과학창의 재단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종이 있다. 웅장하고도 해맑은 이 종 소리를 듣는 순간만큼은 누구라도 마음이 편안해지면서도 세속의 번뇌와 망상을 잊게 해 줄 수 있는 그야말로 오묘한 천상의 소리이다.
이처럼 소리와 아름다움에서 단연 우리나라 종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국보 성덕대왕 신종은 꽤 오랫동안이나 그 어엿한 본명을 나두고 에밀레종이라는 애절한 이름으로 불려 왔다. 그런데 이 종에는 종의 몸체에 ’성덕대왕 신종지명(聖德大王神鐘之銘)’이란 명문이 양각되어 있으며 원래는 경주 봉덕사란 절에 걸려 있던 종이다.
다시 말해 호적등본상의 이름이 성덕대왕 신종이라면 주민등록상으로는 봉덕사종이 맞지만 별칭에 해당되는 에밀레종에 관한 기록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면 이 종에 얽힌 전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잠깐이나마 성덕대왕 신종이 지나온 과거를 더듬어가 보도록 하자.
우리나라 범종 가운데 가장 오래된 강원도 상원사(上院寺) 종(725년) 보다 불과 50여년 뒤에 만들어진 성덕대왕 신종은 한국 범종가운데 가장 큰 크기인 동시에 맑고 웅장한 소리와 아름다운 형태를 지녀 일찍부터 한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예술품으로 평가받아 왔다.
이 종이 걸려있던 절 이름을 따라 봉덕사종(奉德寺鐘)으로 불리기도 하였는데, 봉덕사는 폐사되어 그 위치가 분명치 않지만 기록에 의하면 성덕왕의 원찰로서 경주 북천의 남쪽인 남천리에 있던 절로서 효성왕(孝成王) 대인 738년에 완공하였다고 전한다.
그 후 효성왕의 아우인 경덕왕이 성덕왕을 위해 큰 종을 만들기로 하였으나 오랜 세월 이루지 못하다가 결국 혜공왕(慧恭王)대인 771년 12월 14일에 이르러서야 완성을 보게 되어 성덕대왕의 신성스런 종(聖德大王 神鍾)으로 이름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봉덕사종은 절이 폐사됨에 따라 이후에 여러 번 그 거처를 옮겨가게 되었다. [동경잡기(東京雜記)] 2권에 보면 북천이 범람하여 절이 없어졌으므로 조선 세조(世祖) 5년(1460년)에 영묘사(靈廟寺)로 옮겨 달았다고 기록되었다.
그 후 다시 중종(中宗) 원년(1506)에 영묘사마저 화재로 소실되면서 당시 경주부윤(慶州府尹)이던 예춘년(芮椿年)이 경주읍성의 남문 밖 봉황대 아래에 종각을 짓고 옮겨 달게 되었는데, 징군 때나 경주읍성의 성문을 열고 닫을 때 쳤다고 한다.
한편 일제강점기 이후인 1915년 8월에 다시 봉황대 아래에서 관아가 있던 동부동 자리로 옮겨가게 된다. 그 사진은 마침 조선고적도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후 관아 자리를 박물관으로 개조한 동부동 옛 박물관에 오랜 기간 동안 보관되어 오다가 1975년 5월에 현재의 인왕동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져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종의 형태는 위, 아래가 좁고 배 부분이 불룩한 항아리형의 몸체에 상, 하대라는 문양띠를 두고 방형의 연곽(蓮廓)과 당좌, 주악상을 배치하였다. 몸체 위쪽으로는 한 마리의 용이 목을 구부려 천판에 입을 붙이고 목 뒤로 굵은 음통이 솟아있는 통일신라 범종의 전형적인 모습을 갖추었다.
그러나 성덕대왕 신종은 다른 통일신라 종과 구별되는 몇가지 독특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연곽 안에 표현된 연꽃봉우리가 돌출된 일반적인 통일신라 종과 달리 8잎의 연판이 새겨진 납작한 연꽃 모습으로만 표현된 점이다.
또한 악기를 연주하는 일반적인 주악천인상과 달리 손잡이 달린 병향로를 받쳐 든 모습의 공양자상이 앞, 뒷면에 조각되어 있다. 이는 종의 명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성덕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제작된 것인 만큼 성덕대왕의 왕생극락을 간절히 염원하는 모습을 담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특히 이 공양자상은 그 배치에 있어서도 종신의 앞, 뒷면에 새겨진 양각의 명문을 중심으로 좌우에 2구씩 마치 명문을 향해 간절히 염원하는 모습이라는 점에서 이 종의 중심은 다른 종과 달리 기록된 명문임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종구를 8번의 유연한 굴곡(八稜形)을 이루도록 변화를 준 점과 굴곡을 이루는 골마다 마치 당좌의 모습과 같은 원형의 연화문을 8곳에 새긴 점도 다른 종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요소이다.
종신 앞, 뒤의 가장 중요한 공간에 배치된 양각의 명문은 앞과 뒤의 내용을 구분하여 한쪽에는 산문으로 쓴 [서(序)]를, 다른 한쪽에는 네자(四句)씩 짝을 맞춘 [명(銘)]을 배치하였다. 특히 서의 첫머리에 있는 구절은 성덕대왕 신종을 치는 목적과 의미를 잘 전달해 주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무릇 지극한 도는 형상 밖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눈으로 보아서는 그 근원을 알 수 없다. 큰 소리는 천지 사이에서 진동하여 귀로 들어서는 그 울림을 들을 수 없다. 그러므로 가설을 세우는데 의지해 세가지 진실의 오묘한 경지를 보듯이 신종을 매달아 놓아 [일승의 원음(一乘之圓音)]을 깨닫는다는 내용이다.
글을 지은 사람은 김필오(金弼奧)이며 종의 제작자로는 주종대박사(鑄鍾大博士)인 박종일(朴從鎰)과 박빈나(朴賓奈), 박한미(朴韓味), 박부악(朴負岳) 등이 차례로 기록되었다. 구리 12만근이라는 엄청난 양이 소요된 내용을 밝히고 있는데, 실제 달아본 종의 무게만도 18.9ton에 달했다.
한편 이 종에 얽힌 에밀레종 설화는 일반적으로 종을 만들 때 시주를 모으는 모연의 설화와 달리 인신공양에 관계된 전설인 점에서 주목된다.
어린아이를 넣어 종을 완성함으로써 종소리가 어미를 부르는 것 같다는 애절하면서도 다소 잔인한 설화의 내용은 다른 한편으로 성덕대왕 신종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실패와 어려움이 따랐는가를 말해 준다.
발원으로부터 제작까지 3대에 걸쳐 30여년이나 소요된 시간은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그러나 실제로 불가에서 종을 치는 가장 궁극적인 목적은 종소리를 통해 지옥에 빠져 고통 받는 중생까지 제도하고자 하는 대승적(大乘的) 자비 사상을 담고 있다.
하물며 범종을 완성하고자 살아있는 어린아이를 공양 하였다는 내용은 범종의 가장 궁극적인 조성 목적과 상반되는 그야말로 신빙성 없는 전설에 불과하다. 다행히 성덕대왕 신종의 과학적인 성분 분석에 의하면 상원사종과 유사한 구리와 주석의 합금이었으며 미량의 납과 아연, 그리고 아주 극소수의 황 , 철, 니켈 등이 함유되어 있었다.
결국 세간에 떠도는 바와 같은 인은 전혀 검출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인체의 성분이 70%이상 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주조 당시에 사람을 공양하여 쇳물에 넣는 다는 것은 주조의 과정상 처음부터 종을 완성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과학적으로도 에밀레종의 유아희생 설화는 전혀 근거가 없는 전설에 불과할 뿐이다.
이러한 전설이 언제부터 전해 내려온 것인지에 대한 확실한 자료도 분명치 않다. 우리나라 범종의 최대의 걸작인 성덕대왕 신종에 관련된 조성에 관련된 내용이라면 그것이 비록 전설이나 설화이던 간에 어디에서라도 남아있어야 할 것인데 그러한 기록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것도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 한다.
아마도 조선 후기쯤 유림의 세력이 드높았던 경주 지역에서 불교의 인신공양을 범종에 결부시켜 종교적 폄훼를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추론해 본다.
분명한 것은 이 종의 이름이 일반적인 종과 달리 성덕대왕 신종이라는 그야말로 가장 신성스런 종이란 것을 처음부터 강조하고 있는 점이다. 기록된 명문에서 보이듯 일승의 원만한 소리인 부처의 말씀과 같은 종소리를 들음으로써 지옥에서 고통 받는 중생을 제도할 수 있다는 범종의 참 뜻을 성덕대왕 신종은 가장 잘 말해주고 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성덕대왕 신종이라는 어엿한 본명 대신 확인되지도 않은 에밀레종이란 별명으로 부르는 우를 다시는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출처] : 최응천 동국대학교 미술사학과교수 / 문화재청 헤리티지 차넬
[출처] 국보 제 29호 성덕대왕신종 (에밀레종)의 진실|작성자 ohyh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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