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할애비가 살았던 어린 시절은 말이다 / 임보
어리석은 무리들이 일으킨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외로운 사람들이 많았단다
이어지는 흉년과 공출로 곡식을 잃고
끼니를 거르며 굶주리고 살았단다.
그러나
길을 가다가도 목이 마르면
개울물을 손바닥으로 움켜쥐어 마셨단다
젊은 여인들이 아무데서나 가슴을 열고
그들의 새끼에게 자랑스레 젖을 물렸단다
나막신 짚신도 귀찮아서
그냥 맨발로 들판을 뛰어다녔단다
어머니가 손수 지어주신 무명, 삼베
고이 적삼을 입고 살았단다
티브이도 냉장고도 자동차도 없었지만
이웃들과 오순도순 잘 지냈단다
통조림 햄버거 핏자 아이스크림 대신
칡뿌리나 찔레순을 씹으며 놀았단다

너무 헷갈린다 / 임보
갯가에 가면
도다리와 광어가 나를 헷갈리게 한다
어느 쪽으로 기운 놈이 그놈인지
수차례 설명을 들었건만 구분이 안 간다
가오리와 간재미
부서와 조기 놈들도 나를 홀린다
낙지볶음에 주꾸미를 넣어도 나는 모른다
이른 봄에 산에 가면
노란 수술꽃 매달고 있는
산수유 생강나무 헷갈린다
여름 들어 잎들이 무성하면
단풍, 은행잎이야 나도 잘 알건만
물푸레, 오리, 상수리, 굴참나무 들은
그놈이 그놈 같아 혼란스럽다
중국집에 가면
잡탕과 팔보채가 헷갈리고
양식집에 가면
수프며 스테이크들이 골치 아프게 한다
코 큰 서양놈들 보면
게르만, 앵글로색슨
터키, 아라비안들이 다 한 족속만 같다
더군다나
한잔 걸치고 돌아오는 저녁이면
지하철역의 상행선 하행선이 헷갈리고
아파트의 이 동 저 동이 나를 홀린다
층수를 잘못 잡아
남의 집 문앞에서 초인종을 누르다
망신을 당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유심 2007. 여름호)

사랑에 관한 충고 / 임보
눈은 보기 위해 열려 있고
귀는 듣기 위해 뚫려 있다
닫힌 눈, 막힌 귀가
우리를 슬프게 한 것은 그 때문이다
발은 걷기 위해
손은 잡기 위해
울리지 않는 종은 종이 아니다
열매를 모르는 꽃은 꽃이 아니다
아, 사랑을 모르는 척하는 그대여!
잔인한 적막이여!
그것은 순결이 아니라
우주의 파산(破産)이다.

개구리 울음소리 / 임보
새벽에 눈이 떴다
뜬금없는 개구리 울음소리
요란도 하다
논밭도 없는 이 메마른 동네
어디서 그렇게 울어대나
참, 이상도 하다
일어나
가만 가만 찾아가 봤더니
부엌의 자동 압력솥에서
열심히 밥이 끓고 있다
한여름 내내 들판에서
벼들이 집어삼켰던
그 울음들이 뜨거워
다시 토해내는가 보다.

매미와 차 / 임보
매미가 운다
삼복 한여름에 매미들이 소리를 지른다
오동나무 느릅나무 버드나무 팽나무
가지가 찢어지도록 악들을 쓴다
오동나무에 앉은 놈이 맴 맴 맴 하고 울면
맞은 편 느릅나무 녀석이 앵 앵 앵 하며 소리를 돋군다
그러면 버드나무 놈이 쏴 쏴 쏴 하며 뭉갠다
그러자 핏조지 핏조지 핏조지 피―
어떤 놈이 팽나무에 숨어서 약을 올린다.
온천지가 한동안 매미들의 세상이 된다
문득 소리들이 죽고 정적이 흐른다
짹 짹 짹
재수 없는 어떤 놈이
산까치에 쫓겨 도망치면서 지르는 비명이다
차가 달린다
고속도로 위를 차들이 신나게 달려간다.
소나타가 100으로 달리자
SM이 110으로 따라 잡는다
그랜저가 120을 뽑아대자
BMW가 140으로 기를 죽인다
그러자 티코며 다마스며 똥차들도 뒤뚱거리며
140을 좆이 빠지라 좇아간다
속도위반
차선위반
경적을 울리고
전조등을 껌벅거리고 난리들이다
이윽고 백차와 앰뷸런스가
앵앵거리며 달려간다.
(우리시 2007. 7월호)

나는 무수히 찍혔다 / 임보
지하철을 타고 내릴 때마다
교차로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우체국 창구며
24시간 자동코너에서
슈퍼마켓에서 일용품을 사다가
세콤이 붙어있는 대문 앞을 지나다
나도 모르게 나는 찍힌다
아니,
현금 출납 시는 말할 것도 없고
도서관의 도서 대출이며
식당에서 카드를 그을 때도
전화기의 버튼을 누를 때도
인터넷 사이트를 드나들 때도
나는 여지없이 찍힌다
영상과 기호로만 존재하는 나
빛의 칼날에
만신창이로 찢긴 채
무수한 공간에 분해 감금되어 있다
핀에 찔린 곤충처럼
전자 그물에 사로잡혀
꼼짝달싹 못 하는 신세다
아,
어떻게 그 구속을 벗어난다?
주민번호에
군번, 학번
ID며 PASS WORD들
이것들을 어떻게 빠져나온다?
그러니 속수무책 찍힐 수밖에
(우리시 2007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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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牛♡│ 시 선 ‥|
이 할애비가 살았던 어린 시절은 말이다 외 / 임보
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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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0.31 11:21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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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선생님의 시를 읽으며 오늘도 울다 웃다 합니다.....
저도요. 저는 울다 웃다, 쿵쿵 뛰는 가슴을 쓸기도 하고 그러다 손뼉도 크게 치고 그래요.
그래요, 정말.... 공명현상입니다
가을비 오는 아침 개구리 소리 들리는가 ... 오월인가 찔레순을 따먹으며... 한껏 햇갈려도 좋음서 ♬ 선생님 맛난 시 읽습니다. 행복한 시 읽기입니다. 11월도 선생님 행복한 글쓰기 기원합니다.
선생님의 시를 읽으면서 느끼는 일이지만 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다시 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공감합니다. 계곡물처럼 맑기만 합니다. 머리를 다 비워내고 다시 담아야 할 것 같습니다
ㅎㅎㅎ 오늘도 도 혼자서 한참 웃음을 터뜨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