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장읍 대변리(大邊里)
너무나 달라진 대변항 - 엄청난 규모의 매립지
대변리 유래는 조선시대 ‘대동고 주변의 포구’에서 유래되어 1914년 ‘대변마을’로 정착되었다. 대동고(大同庫)는 조선시대 대동법에 따라 공물납세를 위한 창고로 ‘대변은 큰 창고 주변의 마을이다’라고 할 수 있다.
말그대로 대변은 큰 창고 주변이란 말인데 지금은 그때의 창고를 수백 개를 더 짓고도 남을 만큼의 매립지가 생겨났다. 대변항 주위를 매립한 덕분에 넓은 주차장과 더불어 공원과 항구가 새롭게 만들어 졌으며 기존의 방파제를 둘러싼 더 큰 방파제가 건설되었다.
그리고 연화리와 대변항을 잇는 해안도로가 새롭게 만들어지고 테크 전망대까지 설치되어 먹거리만의 대변항이 아니라 볼거리도 추가하고 있다. 더욱이 죽섬 앞으로 구름다리가 놓여 져 죽섬의 해안을 돌아볼 수 있으며 구름다리 위에서 대변항 전체를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아주 넓게 마련된 연화리나 대변항 주차장에서 주차한 후 여유롭게 대변항의 풍성한 해산물과 해안의 정취와 더불어 낚시까지 즐길 수 있다.
현재의 대변리는 자연마을인 대변마을, 그리고 무양마을을 합하여 정하게 된 동리명이다. 예전엔 기장현 읍내면 무지포였다가 1895년 기장군 읍내면 용암동과 무양동으로 되었고 1914년에 두 동을 합하여 동래군 기장면 대변리 라는 명칭을 처음으로 쓰게 된다. 자연마을은 대변마을, 무양마을, 흙구덩이 새마을 등이 있다.
이 자연마을 중에 대변마을이 대변리 명칭의 유래가 전해오는 마을이며 1886년경 김성련이라는 선비가 기록한 병술일기에서 ‘우기이대변포문생원가’라는 기술이 있었고 ‘대동고변포’ 라는 긴 지명을 줄여 ‘대변포’라고 불리우다가 대변마을로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 이전에는 이 곳에 기장진이 있었으며 선두포라고도 하였다. 이 곳에 관의 진이 형성되고 또 마을이 들어서면서 처음에는 용암동이라고 하였다가 일제 강점기때에 대변리라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무양마을은 이 곳에 남산봉군의 무영이 있었던 곳이 유래가 되어 무영에서 무양마을로 전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말의 풀이를 해보면 남쪽 산에 봉화를 점검, 관리하던 관군의 소임을 하던 무리의 영(營-무인들의 막사)이 있었다는 말이며 예 전에는 남바우, 남바오, 나암바, 등으로 불리웠는데 남은 남쪽의 산 즉 남산을 바오, 바우는 무영 즉 남무영의 옛말로 보면 되겠다.
흙구덩이 새마을은 말 그대로 진흙과 같은 흙이 많으며 새로이 형성된 마을이라는 뜻이 유래가 된 마을이며 재미있는 이름이라 하겠다.
지금도 엄청난 양이지만 대변에서 포획, 생산되는 멸치는 예전에 우리나라의 멸치 중에 7할을 기장에서 잡았으며, 그만큼 어류가 풍부하며 좋은 환경의 수질을 반증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여러 가지의 멸치요리법이 전해지며 또 작업하시는 분들은 힘드시겠지만 그물에 붙은 멸치를 털면서 부르는 노랫가락은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기장 대변항의 정취다.
[출처] 기장군청
대변항 산책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