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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33호 - 공식명칭 :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昌寧 新羅 眞興王 拓境碑)
- 분류 : 기록유산 / 서각류/ 금석각류/ 비 - 시대 : 신라
- 주소 : 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 28-1번지
빛벌가야(지금의 창녕군)를 신라 영토로 편입한 진흥왕이 이곳을 순시하면서 민심을 살핀 후 그 기념으로 세운 비이다. 당시 창녕군은 신라가 서쪽으로 진출하는데 있어 마치 부채살의 꼭지와 같은 중요한 길목이었는데, 진흥왕 16년(555) 신라에 병합되었고, 565년에는 대야주(지금의 합천군)와 합쳐져 비사벌군(比斯伐郡) 또는 비자화군(比自化郡)으로 불리워지게 되었다. |
척경비(拓境碑)
북한산 비봉에 세워진 진흥왕 순수비(巡狩碑)는 듣기에 비교적 익숙한데 척경비(拓境碑)라는 말은 웬지 낯설고 어렵게 들린다.
학교 다닐때 암기식 입시위주 교육의 산물, 신라 진흥왕 순수비 4개는 북한산비, 마운령비, 황초령비, 창녕비의 바로 그 창녕비인데 북한산비는 순수비인데 반하여 창녕비는 왜 척경비인가? (마운령비, 황초령비는 함경남도에 있다.)
순수(巡狩)는 예전에 임금
비석은 언제, 어떻게 세웠나?
진흥왕때 다른 순수비들과 함께 세워졌으나 위치적으로 보아 먼저 영토에 편입되었을것이므로 비석도 그만큼 먼저 세웠을것이다.
즉, 삼국사기에 보면 진흥왕 16년(555년)에 비사벌(창녕의 옛이름)을 병합하였다고 하였는데 그 직후인 561년 진흥왕은 창녕을 직접 찾아 점령지 통치에 대한 정책들을 신하들과 함께 발표하니 이 사실을 새긴것이 창녕비이다. 한반도에서는 가장 오랜 비석이다.
비석의 외형은 삼국시대 비석이 대개 그렇듯이 대석(臺石)이나 개석(蓋石)을 사용하지 않고 자연암석을 그대로 이용하였으며 그마저 한쪽 편이 찌그러진 모습인데 이 비석은 원래 이곳이 아니라 화왕산록(火旺山麓)에 있었으며 소풍나온 학생이 발견하여 세상에 알려진 후 1924년 현재 위치로 옮겨왔다고 한다.
아쉽게도 글자는 전체적으로 27행 600자가 넘지만 그중 약 400자 정도를 판독할 수 있고, 그나마 육안으로는 대부분 식별이 어렵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알려진 비문의 내용은 다른 진흥왕 순수비와 같이 진흥왕이 이곳 점령지에 행차하여 국왕의 통치정책과 이념을 당부한 내용, 그리고 함께 행차한 신하들 42명의 속부(屬部), 인명(人名), 관직(官職), 직위(職位)를 모두 적어 놓았는데 삼국시대 신라비문의 통상적인 기록방식으로 보인다.
<비석의 글씨를 식별하기 어렵고 내용의 이해가 쉽지 않아 비석 옆에 설명판을 세워 놓았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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