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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도의 영성
1. 들어가는 말
이용도목사(1901.4.6-1933.10.2)는 고루했던 교회 풍토, 한국의 가난하고 참담했던 정치적, 경제적 상황 속에 태어나 고픈 배를 움켜쥐고 공부하면서, 일본경찰들마저 감동시킬 정도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미친 듯이 싸우다가 홀연히 하나님께 붙들리어 예수처럼 죽기만을 오직 바라며, 자신의 삶을 복음으로 불태웠던 우리 민족의 위대한 신앙의 선각자(先覺者)이다. 그는 김재준 목사(함경도), 함석헌 선생(평안도)과 같은 시기에 황해도에서 태어나, 1930년대 한국 교회에 큰 영향력을 미친 부흥사로서 한국 교회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중의 한사람이다.
2. 이용도의 시대적 배경
(1) 사회적 배경
이용도의 시대적 배경에서 가장 중요했던 사실 가운데 하나는 바로 3·1 운동이었다. 민중의 희망으로 수용되었던 한국의 기독교, 특히 개신교가 3·1 운동 이후 민족운동의 주도권을 잃고 민중의 현장에서 떠나갔으며, 한국의 독립을 열망했던 많은 사람들, 그 중에서 지도자격이었던 사람들이 대거 친일화해 감으로서 한국 민중들이 내면적, 현실 도피적 신비주의로 기울게 되는 근거를 마련해 준 것이다.
그리고 이용도의 활동시기에 중요했던 사건으로는 신간회 운동이 있다. 3·1 운동의 실패 이후에 좌·우 합
작으로 결성된 신간회는 대중에 대한 지도적 역량을 가지고 활동했지만 이것이 와해된 후, 민족은 해방에 대한 방향성을 잃고, 민중들은 경제적 파탄 속에서 신음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나타난 것이 이용도이며, 표출된 것이 신비주의 운동이라 하겠다.
1925년 이후 민족주의 운동이 변질되고 사회주의 운동은 이제의 가혹한 탄압과 분파투쟁으로 침체상태에 빠지면서, 좌파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운동의 활로를 찾기 위해 서로 제휴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들은 친일적 노선과는 선을 긋고 독립을 목표로 한 민족운동을 대중적으로 전개할 필요를 통감하면서, 1927년에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자의 협동단체이며 공공연한 대중 단체인 신간회가 결성되었다. 신간회의 활동을 보면, 중앙의 경우, 강연회 등을 통해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비판하는 방식을 택했고, 1929년에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은 신간회가 존재했던 전 기간을 통해서 가장 본격적으로 투쟁했던 사건이었다. 당시 이용도는 이러한 분열과 분파주의로 인한 대중운동의 한계에 대해 실망하였다. 한 때 민족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수차례 옥살이를 하고 일제경찰의 블랙 리스트에 까지 올랐던 이용도가, 공산주의 분파투쟁이 극심하던 1924년경에 신학에 입문하게 되고, 신간회가 해체에 대해 비난한 것은 당시 교계에서 몰리우던 이용도 자신의 입장에 대한 변론임과 동시에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실망이 짙게 서리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2) 교회의 현실
1920년대에 한국교회는 새로운 상황을 맞게 되었다. 이 때 한국교회는 반미적 경향, 경제적 시련, 그리고 민족 말살을 획책하는 일제의 탄압 등 복합적인 상황 속에서 반성의 목소리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1920년대에 한국교회의 심각한 문제는 한국 기독교가 그 정체를 상실해 가고 있었다는 점이다. 3·1 운동의 여파로 교계의 지도자가 투옥되거나 외국으로 망명하고, 그 결과 한국 내에 남아있던 교역자의 질적 수준의 저하, 또는 선교사들이 교회의 비정치화를 결의하면서 한국교회의 방향을 저지한 점등의 문제점이나 현실적인 여건이 있었다 할지라도 이 때 한국교회는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던 농민·노동자의 삶에 그리고 적극적으로 확대되어 갔던 학생들의 항일 운동에 호흡을 같이 할 자세를 잃고 있었다. 민중의 현실을 외면했던 한국교회에서 이용도의 신비주의와 같은 종파 운동이 일어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이용도는 바로 이러한 시대 속에서 병든 교회에서는 예언자적 음성으로, 상심한 민족들에게는 희망으로 다가왔다. 그가 취한 신비주의라는 형식은 우리 민족의 기저에 흐르는 영성과, 일제의 폭아 속에서 대응한 한 양식이며 당시 상황에서 기독교가 보여줄 수 있는 자기 위상의 한 뚜렷한 모습이었다.
3. 이용도의 생애와 사상형성의 배경 (1901.4.6-1933.10.2)
이용도는 1901년 4월 6일 황해도 금천군 서천면 시변리에서 非신자인 아버지와 경건한 기도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더없이 가난했고 장터 거간꾼이었던 아버지의 방탕과 어머니의 병고는 그가 자라난 가족 환경이었다. 이용도는 어려서 잔병을 많이 앓았고(특히, 학질을 언제나 앓았다고 한다. 신경이 과민한편이었으며 울기를 잘하는 등 보통 이하의 변변치 않은 아이였다 한다.
이용도는 이처럼 大酒家인 부친과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 사이의 편치 않은 가정 속에서, 어머니의 신앙에 깊은 감화를 받아 13세 때부터 예배당 종각에 올라가 여러 시간 혹은 밤새도록 기도를 올린 일도 있었다 한다.
어느 날 중풍에 걸리신 백부(伯父)의 약을 구하기 위해 캄캄한 밤길을 가는데 키가 9척이나 되는 마귀(魔鬼)가 나타나 길을 막았다. 이때에 이용도는 놀라지 않고 마음을 침착히 한후 찬송가를 큰 소리로 불렀더니, 하늘에서 천사의 날개가 내려와 그 마귀를 밀어내고 보호하여 주어서 그 길을 무사히 가서 목적한 바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것이 그가 세상에서 환상을 본 처음 경험이었다. 시변리 공립 보통학교를 졸업(1914)한 이용도는 1915년에 개성 한영서원에 입학하였다.
이용도는 1919년에 손봉애(1976.8.23일 작고)와 결혼하였고, 3·1운동 때에는 개성에서 독립운동에 가담
하였고 약 2개월간 구금되었다가 석방되었다. 1920년 2월 11일에는 기원절 사건으로 6개월간, 1921년 성탄절에 불온문서 사건으로 6개월간, 1922년 가을에 태평양 의회 사건으로 2년 징역 언도를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는 등 3년 이상을 감옥에서 살았다.
이용도는 1924년 윤치호와 왓슨 교장의 추천으로 협성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오직 애국심에 불타고 독립운동에만 열중했던 이용도는 이 당시 신학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잡지, 시가, 법률, 소설, 정치 서적을 읽으며 이론가, 논쟁가, 말썽꾼, 싸움패, 과격파로서 잘 알려져 있다.
이용도의 폭풍우 치는 마음은 우원 이호빈, 이환신과의 만남으로 어느 정도 안정되어 갔으나, 1925년 가을, 사형선고와 같은 폐병 3기 진단은 이용도가 이환신의 손에 이끌려 江東으로 가는 계기가 되었다.
강동에서 이용도는 동리 작은 교회의 부흥회 인도를 맡는 기회가 있었는데 이때의 체험은 이용도의 삶에서 커다란 전환의 시작이 되었다. 찬송가를 부르다가 강단에서 한없이 쏟아져 내린 눈물은 이용도를 딴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 후 그의 병은 호전되었고 음식도 상당히 섭취하면서 자진해서 여러 교회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1928년 1월 28일 이용도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강원도 통천 구역으로 파송받았다. 그의 교회 담임 초기의 활동은 이성적인 전도인이요 문화적인 교역자였다. 사실상 그가 기도에 전력하게 된 것은 통천에서 만난 박재봉이라는 청년과의 만남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통천읍 서북쪽 백정봉에서의 10일간의 금식 기도 후 이용도는 변화되었고, 특히 1928년 12월 24일 새벽에 환상 속에서의 마귀와의 투쟁(승마체험)은 그가 대부흥사로 전환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용도는 1929년에 자기가 담임한 교회 이외에 20여 교회에서의 부흥회 인도를 시작으로 1930년도에 여러곳에서 부흥회를 인도하였고 1930년 주일학교 연합회 간사로 부임한 후에도 부흥회 인도를 멈추지 않아 1931년에는 5년 목회기간동안 약 100여개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그는 찬송과 기도와 설교의 사람이었다. 성령이 임하면 열정적으로 부흥회를 인도했던 이용도는 기도, 체험, 성령 충만을 강조함으로서, 특히 영혼만을 구원한다는데 집중하였다. 신학보다는 삶, 형식보다는 은혜, 제도보다는 사랑의 은사를 강조하였고, 현실 교회의 실패 원인을 성령 받지 못한 탓에 있다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이용도의 부흥 운동이 결국 몰락하게 된 원인은 교회의 이용도에 대한 강경한 결의와 1932년 10월 한준명과의 관계로부터 시작되는데, 그는 원산에서 한준명과 백남주, 유명화의 강신극 사건에 휘말려 들었던 것이다. 이용도가 이들 일파에 접속된 동기는 두 가지로써 하나는 유명화가 원산에 있을 때 이용도가 그의 말소리에서 예수의 음성을 들었다고 착각하여 그 앞에 엎드리어 "주여"라고 한데서 시작되었으며, 다른 하나는 이용도가 원산에 있던 한준명이 평양에 갈 때 그에게 평양으로 보내는 소개장 때문이었다. 원산에서 평양으로 온 한준명은 그곳에 있던 접신녀 이유신과 한 달 동안 머물면서 3일간 강신극을 벌였는데, 이 때 사람을 구타하고, 예언이라 하며 욕을 하고 난리를 벌리는 통에 한준명과 이를 소개한 이용도에 대한 비난의 소리가 높아지고, 결국 이용도를 노리고 있던 평양 교회의 목회자들로 부터 '한준명이 그릇되며, 그를 소개한 것이 잘못이며, 그와 관계를 앞으로 끊겠다는 성명을 발표하라'는 압력이 이용도에게 가해졌다. 그러나 이용도는 이를 거절했던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용도 목사는 몰락의 길에 접어든다.
그 후 이용도 목사는 1933년 1월 28일에서 2월 4일까지 황해도 해주에서 지극히 소수의 사람들 앞에서 설교를 하고 그곳에서 또 과격한 몇 청년들에게 폭행당한 것이 그가 공식 석상에 섰던 마지막 기회였다. 결국 그는 불치의 병, 폐결핵으로 1933년 10월 2일 파란 만장했던 생(生)을 조용히 마감한다.
4. 이용도의 사상
이용도의 사상은 책상에 앉아 구상된 것이 아니었고 체계적으로 저술된 바도 없다. 그가 처했던 안팎으로 극단적인 상황을 이해하지 않는 연구는 오해를 불러올 뿐이다
(1) 예수 중심주의
이용도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육신의 질병과 마음의 병의 치유자였다. 그는 고백한다.
"예수보다 더 귀한 존재는 나에게 있지 아니합니다. 나의 이름이나 소유나 나의 고난이나 평안이 다 예수를 위하여만 필요하였고 가난하거나 부하거나 죽거나 살거나 내 평생 사랑할 이는 예수뿐입니다. 어찌하여 예수를 사랑하느냐? 나는 예수를 믿어 병 나음을 얻었고 모든 난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나는 중한 폐병으로 절망의 죽음만 기다리다가 기도하는 중에 그리스도의 은혜로 그 무서운 난치병이 나아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입니다. ...나는 또한 극빈한 가정에 태어나서 춥고 배고픔의 고통도 맛보았고 이 시대를 만나 감옥살이도 하여보는 동안에 갖은 고생을 맛보았습니다...또 하나는 일의 실패와 성문제와 인생문제의 번민에 접하여 극도의 고민을 견디지 못하여 한때는 자살 할려고 생각한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예수를 믿어 이 모든 인간고를 해결하였습니다....그래서 나는 예수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내가 예수를 사랑하는 것은 어떤 조건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폐병을 고쳐주었기 때문에, 모든 슬픈 문제를 해결해주었기 때문에, 천당에 보내주시기 때문에 예수를 사랑함이 아니라 아무 조건 없이 예수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가 없어서 예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중심주의는 우리 삶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가? 이용도목사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가 어떻게 예수를 사랑할까? 우리 신자는 맛있는 음식을 대할 때 번번이 주리시던 주님을 생각하여야겠고 뜨뜻한 방에 누울 때 머리 둘 곳도 없으시던 주님을 기억하여야겠으며 좋은 의복을 얻을때 수의 한 벌도 없이 벗은 몸으로 십자가에 달리시던 것을 생각지 않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신자! 우리주님의 예전 생활을 기억하여 받은 음식상과 입은 의복에 눈물 떨어질 때가 있지 아니한가? 우리는 이제 의복과 음식을 주님께 드리고 싶으나 子欲養而 親不待란 말과 같이 주님이 이미 하늘에 오르셨으매 어찌 할 수 없는 것이올시다. 그리고 또 이런 것들은 주님에게 직접 필요치도 아니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 드리고 싶은 그의 복을 불쌍한 형제에게 나눠주고 주님께 대접하고픈 그 음식을 거지에게 나눠 먹여 이로써 예수를 사랑하고싶은 애끓는 정을 표하는 것이올시다."
(2) 죄와의 투쟁
이용도목사는 안으로는 개인적 욕망과 투쟁하면서 밖으로는 교회의 죄와 투쟁하였다.
"예루살렘 다락방, 웨슬레와 몇사람이 든 그 밀실 이는 세계에 불을 던진 성화의 발화원이요 죄악의 성을 폭파한 성신의 폭탄제조소였습니다. 다락방에서 만들어진 첫 폭탄은 스데반이었습니다. 원컨대 우리교회는 그때의 그 다락방이 되게 하소서 이곳-한국의 교회 안에 장난하고 있는 악마의 계획을 폭파할 폭탄 제조소가 되게 하소서 온 한국, 온 세계에 날라가는 폭탄의 불의 발화소가 되게하소서. 그리고 그 제 일탄이 내가 되게 해주시면 그런 영광은 없겠나이다."
이러한 전투적인 서원을 하면서 그는 당시 교회를 비판한다.
"조선교회는 점점 무력해간다. 점점 속화해간다. 교회 안에는 훈훈한 맛이나 따뜻한 맛이 조금도 없고 들어서면 찬바람이 쓸쓸히 돌 뿐이다. 시기가 가득하고 분쟁이 사람의 이목을 놀라게 한다. 대구사건 마산사건이 이를 증명한다. 하나님을 위한 봉사나 남을 위한 봉사를 하기는커녕 도리어 자기의 이익만을 찾기에 눈이 벌게서 덤빈다. 연회의 보고 중에는 내용 없는 숫자만이 교역자의 입을 통해서 들어옵니다. 허위가 가득 차고 싸움이 가득 찼습니다."
또한 당시의 직업적 부흥목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일갈한다.
"강단에서 한 주일에 한 번씩 생명 없는 연설이나 하고 이집 저집 억지로 말놀이나 하는 따위의 심방을 주의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도저히 죄악이지 주의 일은 아닐 줄 압니다."
또한 그는 선교사들을 무자비하게 비판했다.
"아 선교사들의 교만함이여 너희가 화 있으리로다. 겸비하여 배울 줄을 모르고 남을 인도하고 가르치는 자로만 자처하였으며 너희의 눈을 막아 의인을 보지 못하게 하였도다. 예수를 잡아 죽인 유대교의 대제사장과 장노와 영수들이 곧 너희들이었나니라."
(3) 기도의 사람
이용도의 부흥운동의 핵심은 그의 기도생활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아무 말을 하지 않고 그저 기도로 주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생각으로 기도했다. 그의 기도에 관한 말을 들어보자.
"오! 주여 기도할수있게 해주옵소서. 나의 모든것은 다만 기도에 있습니다....나의 생은 기도로 시작하여 기도로 마치게 하여 주옵소서-아멘"
기도로 살며 기도로 죽겠다는 기도의 사람 이용도목사는 또한 사람들에게 기도할 것을 권면했다.
"항상 기도하시요 신앙에 관한 이야기 외에는 쓸데없는 세상 이야기나 남의 비평은 일절 하지 마시요 그리고 늘 침묵! 입을 열지 말고 마음속으로 주를 사모하는 가운데서 지낼 것입니다......기도하는 때가 능력이 이르는 때요 기도하는 곳이 능력이 생기는 곳이요. 기도하는 사람이 능력 있는 사람이외다. 기도하는 때에 소망이 생기고 기도하는 곳에 기쁨이 넘치고 기도하는 사람에게 성신이 임하십니다."
위와 같은 말을 하면서 이용도 목사는 그의 아호를 시무언이라고 지으면서 너무 기막힌 상황이 전개될 때는 차라리 침묵과 명상으로 주님만 사귀고 주님만으로 위로를 얻었다. 그는 진리는 말하는데 있지 않고 사는 데 있으며 종교는 설교가 아니라 삶이라고 선언하며 자신의 좌우명이자 아호인 시무언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무언, 겸비, 기도, 순종, 이것을 우리의 좌우명으로 삼아 잊지 맙시다. 나의 별명을 시무언이라 함은 말 없음이 옳다는 의미와 메시아 오시기를 기다려 일생을 성전에서 지내다가 마침내 만나서 즐거워하던 시므온을 그리워하여 그리 지었습니다."
(4) 사랑의 사람 이용도
그의 삶은 예수를 따르는 것에서 뛰어넘어 예수와 같이 되고자 하는 것이었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이용도 목사는 예수의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감히 말하기를 그의 인생은 계급과 인종과 교파와 종교를 초월한 사랑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 그의 사랑에 대한 말을 들어보자.
"사랑시대- 신앙만을 가지고도 오히려 불만족을 느끼게 되나니 이는 사랑이 없음을 자각함으로써이다. 신앙으로 용기와 담력을 얻어 죄와 싸울수는 있고 죄인을 책망할수는 있으되 죄인을 긍휼이 여길수는 없음을 어찌하랴! 이에 오--주님이시여 나의 신앙이 사랑에 있게 하옵소서. 나에게 사랑안에 있게 하옵소서. 나에게 사랑과 긍휼을 주옵소서 하고, 빌게 되는지라 이에 사랑에 들어가나니 이곳이 절정이라 여기서부터 영생이 시작되는 것이다. "
5. 이용도 목사의 신비주의의 영향과 그 평가
첫째, 그는 새로운 스타일(용도식)의 부흥회를 시작하였다. 그의 부흥회 스타일은 선교사들이 주도했던
1907년의 부흥회와는 아주 다른 토착적인 신비주의 타입의 집회 형식이었다. 그는 사람을 인위적으로 모으려고도 하지도 않았고 조직하거나 선전하며 꾀를 부리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는 영감이 떠오르지 않으면 설교를 하지 않고 기도만 몇 시간씩 하거나 또는 공중 기도를 3-4시간씩 시킴으로써 집회를 끝마치기도 하였다. 그의 설교는 어떤 인간적 기교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 삶 전체를 청중들에게 문자 그대로 주는 것이었다. 집회기간동안 그는 먹지도 자지도 않고 엎드려서 기도하면서 스스로가 은혜를 사모함으로써 청중들에게 그 本을 몸소 보여주었다.
둘째, 이용도 목사는 자기 만족에 빠진 당시 교계 지도자들 곧 선교사, 목사, 부흥사들에게 교만과 파벌 등에 대한 그들의 자성을 촉구함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바리새적인 교리와 형식으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하였다. 비록 짧은 기간이긴 하였으나, 그는 새 생명의 바람을 전국 교회에 불러 일으켜 1930년대 초기의 교회를 부흥 내지 개혁시켰다. 1923년부터 계속 내리막길에 있었던 전국 교회의 교세가 1929년부터 1933년까지 계속 다시 올라가기 시작하고 회복되었던 원인(原因)도 이용도의 개혁 운동 내지 그에게 자극을 받은 교인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셋째, 당시 그는 전국적으로 기도의 혁명을 일으켰던 장본인이다. 한국 교회에 기도가 없다는 것을 크게 한탄한 그는 자기 스스로가 기도에 미치고 기도의 사람이 됨으로써 기도의 열심에 불을 붙였고, 이러한 그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들과 산골짜기는 기도할 곳을 찾아 모여드는 사람들로 덮이게 되었다.
넷째, 이용도 목사의 감화와 부흥 운동을 통해 많은 젊은이들이 평생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몸바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즉 유능한 청년들이 교역에로 결심하게 된 것이다. 이들 중에 대표적인 인물로는 조경우, 조신일, 이호운, 명관조, 김광우, 변종호, 김용련, 박재봉 목사 등의 쟁쟁한 인물들이 성직으로 부름 받아 해방 전후의 한국 교회를 실질적으로 재건 부흥시키며 성장시켰던 주역들이 되었다.
다섯째, 서양과 대조적인 성격을 가진 동양적이며 한국적인 신비주의 운동을 시도를 하였다. 그의 感의 神學에 기초한 설교와 전도 활동은 한국 교회의 신도들에게 광범위하고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으며 그의 목회 스타일과 신앙 양태는 지금까지 한국적 신앙의 밑바닥에 흐르고 있다. 이용도 목사는 한국 문화신학의기저에 '신비주의'의 고유한 수맥을 전개하였고 그 전통은 오늘의 자리에도 유유히 흐르고 있다.
여섯째, 이용도는 에크하르트 같은 범신론적 신비주의가 아니라 버나드 같은 생애적 사랑으로 영적 신랑 그리스도를 사모하는 영성이다. 버나드가 아가서 주석을 통하여 생애적 그리스도 사랑을 묘사하였듯이 아가서를 좋아하고 시 쓰기를 좋아하는 이용도는 버나드적 신비주의 운동가였다.
일곱째, 성프란치스코가 가난과 고난을 사랑하고 자연을 특히 사랑하고 친구 삼았듯이 이용도는 가난과 고난을 사랑하고 자연을 벗으로 생각하는 자연사랑의 영성주의자였다. 프란치스코가 그렇게 주님의 십자가의 흔적을 지니기를 원하였듯이 이용도도 주님의 십자가를 그 몸에 지니기를 애절하게 사모하였다. 프란치스코처럼 가난과 고난의 자세로 주님을 따르기를 소원하였다. 그러므로 이용도의 영성은 성프란치스코의 영성에 가장 가깝다고 정의 할 수 있다.
6. 나오는 말
이용도 목사에 대해 비판하는 이들은 대체로 그가 너무 지나친 열광 주의자, 광신 주의자였다. 혹은, 부흥회 이후의 교육적 책임을 지지 않았다. 혹은, 지나치게 개인주의화되었다, 현실 도피적이었다, 또는, 낭만주의적 감상주의에 빠진 사람이었다, 혹은, 지나치게 영육 이원론을 강조하였다, 또는, 역사성이 결여되었다. 부조리의 현실을 구조적으로 개혁하고 변혁하려는 정치의식이 부재하였다. 사랑의 실천이 이 세계에서 라는 역사의식이 결여되었다. 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아무튼 그가 비록 많은 문제를 안고는 있지만, 우리는 이용도의 신비주의에서 일제의 식민지 통치의 암흑시대에 사는 겨레의 아픔과 고난의 현실이 반영되어 있음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용도의 신앙운동은 당시 민족 기독교의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출현할 수밖에 없었던 극단의 신비주의적 운동이라 볼 수 있으며, 그것은 바로 상처받은 민족과 민중의 가슴을 싸매고 치유하는 흔적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이용도는 파란 많은 인생을 살았다. 그는 자기 자신의 내면의 고통과 투쟁했고 한국 교회의 부패와 싸웠다. 그는 교회를 떠나고 싶지 않았으나 교회는 그를 밀어냈고, 그는 교회를 개혁하고자 했으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정죄 했다. 그의 몸부림은 차가운 지성에 의한 것이 아니었고, 마음속에서부터 울려나오는 예수에 대한 열정과 그를 알고자 하는 열망이었으며 그의 선포는 교회를 사랑하는 방법이었다.
참고자료
1. 일반서적
민경배, "이용도의 신비주의", [이용도 목사 관계문헌집], 인천:초석 출판사, 1986.
변종호, 이용도 목사傳, 인천:초석 출판사
변종호편, 용도신학, 신생관, 1975.
변종호편저, 이용도목사의 일기, 신생관, 1966.
이상윤, "이용도 목사, 그 인간과 역정Ⅱ", (『기상』,1984.7).
2. 사상집
김홍기, "시무언의 영성", 기독교사상사, 2000 12월호, 서울, 1960.
변선환, "이용도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신학과 세계, 제4호, 1978.
3. 논문
손미자, "1920년대 한국교회 부흥운동에 관한 고찰", 한신대 신대원, 1995
윤병민, "이용도 신비주의의 배경에 관한 연구", 한신대 신대원, 1988
4. 인터넷자료
http://doingtheology.co.kr/ 김남중신학연구.
종합 : 이용도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이용도는 에크하르트와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다. 독일 신비주의가 중세기 말기의 구원을 잃은 인간의 고난을 반영한다고 본다면, 이용도의 신학 역시 일제의 폭정이 극에 달하였던 암흑시대의 겨레의 아픔과 고난을 반영하는 것이다. (p. 83.)
이용도는 외적(外的)인 것을 모두 제2차적인 것으로 보고, 독일 신비주의처럼 영혼과 신과의 직접적 접촉,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합일에서 기독교의 본질을 보았다.(p. 85.)
인도 게르마니카의 종교적 심성에서 복음을 토착화시킨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는 동서 신비주의의 만남을 문제하고 있는 종교적 다원시대의 대화의 광장이 될 뿐 아니라, 동양적 영성 특히 한국적 종교성에서 기독교를 재해석하려는 한국적 신비형성의 과제에도 크게 도움이 된다고 본다.(p. 104.) 그렇기 때문에 이용도의 '한국적 기독교' 이해와 관계시켜볼 수 있는 것이다.
에크하르트는 신과의 "합일"에 이르려던 '욕정'(Begehrung)의 충일(充溢)에서 이성의 냉철한 각성에로의 전환, 수면기(睡眠氣)와 꿈에서 각성에로의 근본적 전환과 전진이 생긴 것이다.(p. 105.) 이렇게 본다면 일원론적 범신론적 풍토에서 나온 성애적 이용도의 고난의 신비주의는 여성 신비주의, 희열 신비주의인데 반하여 에크하르트는 극히 서양적 남성미를 나타내는 위엄의 신비주의, 권위의 신비주의라고 볼 수 있다. 이용도의 그리스도 신비주의의 출발점이 샤머니즘적이며 신플라톤적, 어거스틴적인 것으로 감정의 엑스타시스 위에 서 있다고 본다면, 에크하르트의 신(神) 신비주의의 출발점은 인도 게르마니카적이며 아퀴나스적인 것으로 이성과 인식 위에 서 있다고 보겠다.(p. 106.)
이용도의 고난의 신비주의, 그리스도의 십자가 신비주의에는 위대한 독일 신비주의의 영향이 있다. 어떻게 보면 여성 신비가처럼 극히 정감적(情感的) 욕구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지만 이용도에게는 여성적인 종교적감정, 성애감(性愛感)의 깊음과 함께 남성적인 기독모방(基督模倣)의 의지의 굳셈이 결합을 이루고 있었다.
에크하르트의 부정의 길의 단계로 보면 아직 감성의 단계인 초심(初心)의 생활과 정신의 단계인 증진하는 생활에서 형상과 비유를 사용하며, 고난의 그리스도와의 합일, 기독자의 완전에 이르려고 하였던 것이다.(p. 120.)
비록 에크하르트나 이용도가 사회윤리를 주장하지 않았다고 하여도 저들의 현실에 대한 무차별의 사랑이 현실변혁의 격동적 파토스를 조금도 약화시키지 않았다는 역설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p. 123.)
첫댓글 감사함다 잘 읽었슴다. 오늘도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