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문안드립니다. 여기는 인천광역시 남동구 만수6동 1039-2 번지 에 위치한 대한 예수교 장로회 제자훈련교회입니다. 제자훈련교회는 교회 명칭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훈련하는 사명을 위하여 설립된 교회입니다. 제자훈련교회는 제자훈련 사명을 위하여 오랫동안 기도하며 준비하였고 2005년 3월부터 본격적인 제자훈련을 시작하였습니다.
제자훈련교회는 제자훈련과 한국기독교 개혁을 병행 합니다. 제자훈련교회가 추진하고 진행하는 제자훈련과 한국기독교개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안내합니다.
1.제자훈련 사명.
제자훈련교회는 제자훈련교회라는 명칭이 말하는 바와 같이 제자훈련에 대한 특별한 사명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자훈련 사명을 받은 자들을 모아 제자훈련교회를 설립하셨고 길게는 20년, 짧게는 7년 동안 그들을 교육, 훈련, 연단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자훈련 사명자 들에게 제자훈련 사명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절대적인 사명감을 부여하셨고, 어떠한 환난과 어려움도 극복하고 헤쳐 나갈 수 있는 강하고 담대한 신념을 부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다양한 영역을 이끌어 갈 수 있는 능력과 은사를 부여하셨습니다. 제자훈련 사명자 들의 삶은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삶이며 따라서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제자훈련을 위한 삶이며 곧 하나님을 위한 삶입니다. 그들에게는 어떤 무엇에 대한 소유욕이 전혀 없으며 오직<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한 오직<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세우기 위한 목표만이 있을 뿐입니다.
2. 제자훈련 목적.
제자훈련교회는 다음과 같은 목적 하에 제자훈련을 실시합니다.
1) 제자훈련을 통하여 기독교인들의 신학적 경륜을 정립합니다.
2) 제자훈련을 통하여 기독교인들의 신앙적 경륜을 정립합니다.
3) 제자훈련을 통하여 기독교인들의 인격적 경륜을 정립합니다.
4) 제자훈련을 통하여 기독교인들의 사명적 경륜을 정립합니다.
5) 제자훈련을 통하여 교회의 갈등과 반목과 분열을 종료합니다.
6) 제자훈련을 통하여 한국기독교를 정상화합니다.
7) 제자훈련을 통하여 세계선교를 진행합니다.
8) 제자훈련을 통하여 한국 기독교를 세계 기독교의 중심으로 발전시킵니다.
3. 제자훈련 결과.
제자훈련을 통하여 기독교인들의 신학적 경륜, 신앙적 경륜, 인격적 경륜, 사명적 경륜이 정립되면 한국기독교는 다음과 같이 발전할 것입니다.
1) 한국 기독교의 위상이 크게 신장될 것입니다.
2) 한국 기독교인들이 존경받고 인정받을 것입니다.
3) 기독교 지도자들의 비 진리와 오류가 통하지 않고 오히려 거부되어질 것입니다.
4) 저급하고 오류 되고 변질된 지도자들은 설 자리를 잃게 되어 자연적으로 퇴출되거나 아 니면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하여 회개하고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여 바른 신학, 진리의 신학으로 복귀할 것이며 지도자로서의 순전한 신앙을 회복하고 지도자로서의 인격과 사명감을 재정비하여 소명을 다하는 신학적, 신앙적, 인격적, 사명적 삶을 살게 될 것 입니다.
5) 한국 기독교는 차원 높은 기독교의 본질과 기독교의 본래적 사명을 회복할 것입니다.
6) 한국 기독교의 정상화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교회에는 이제 더 이상 분열, 반목, 갈등, 투쟁 등등의 비 진리적 사건들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교회와 교회의 연합 속에서 각각 의 사명을 지원하고 추진할 것입니다.
7) 한국 기독교가 세계 기독교의 중심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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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결과가 이루어지기 까지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요구되어질 것입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방법에 대하여 회의를 갖습니다. 어떤 극단주의자들은 차라리 16세기의 기독교 개혁과 같은 극단적인 개혁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합니다. 저들은 한국기독교가 개혁되기 위해서는 부패하고 타락한 기독교 지도자들을 일거에 몰아내고 새로운 지도자들로 구성된 기독교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와 같은 방법에 반대합니다. 16세기의 기독교개혁이 부패하고 타락한 기독교를 청산하고 새로운 기독교를 탄생 시킨 것은 분명하지만 부패하고 타락한 기독교<로마카토릭>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여전히 존재하면서 오히려 자신들이 기독교의 본체라고 주장 하면서 개혁주의 기독교를<변절자><불순종자>로 정죄합니다. 뿐만 아니라 16세기의 기독교 개혁은 기독교를 모래알처럼 분열시켰습니다. 기독교 개혁이라는 깃발아래 수많은 교파들이 우후죽순처럼 발생하였고 그 교파들은 다시 수많은 교단들로 분열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참담함을 반복할 수 없습니다.
어떤 착한 사람들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이 문제에 대한 책임의식을 느끼고 자신들의 오류와 부패에 대하여 철저히 회개하며 진리로 복귀하면 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그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불행한 일이지만 기독교 지도자들이 회개하고 변화되어 진리로 복귀하기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하늘이 무너지고 세상이 무너지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더 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요구될지라도 성경에 계시되고 명령된 바에 의한 <제자훈련-마28:19-20>을 통하여 기독교의 회복과 개혁을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과 기독교 역사를 통하여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법이며 하나님의 섭리적 역사라고 믿습니다. 이와 같은 방법은 성경에도 수없이 명시되어 있지만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도 증명됩니다. 기독교 역사를 고찰해 보면 하나님의 섭리는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오만방자한 각종 불순종들과 비 진리적 악행들을 갑자기 다스리지 아니하시고 오랫동안 수많은 선지자들로 하여금 그들에게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촉구하셨으며, 그리하여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는 충분한 기회와 시간을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교회와 지도자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많은 불의와 비 진리를 행하였음에도 그것을 즉시즉시 단죄하지 아니하시고 수많은 시간과 기회를 주시면서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면서 서서히 바로 잡아 나가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러한 속성과 섭리 역사를 보고 배운 자들로서 당연히 하나님의 방법과 섭리에 입각하여 우리의 사명을 진행 할 것입니다.
4. 제자훈련 방법.
1) 일반성도 교육 훈련.
제자훈련교회는 일차적, 기본적으로 교파, 교단, 직분 등등을 초월한 일반성도들을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으로 교육합니다. 이 교육훈련 과정에서는 기독교인들이 갖추어야할 기초적이며 일반적인 신학과 신앙을 강의하며 기독교에 대한 제반 질서와 규율 등을 강의합니다. 일반 성도에 대한 교육은 일상적인 <정규교육>과 교육생들의 형편을 고려한 <수시교육>과 여름, 겨울방학을 이용한 <특별교육> 등으로 진행됩니다.
2) 지도자 교육 훈련.
제자훈련교회는 일반 성도들을 교육 훈련하는 과정에서 지도자, 사명 받은 자들을 특별히 선발하여 지도자로 양성합니다. 지도자들은 제자훈련교회와 같은 소속 하의 교육기관인 바울신학교에서 대학부 4년의 교육과정을 이수한 후 바울신학 연구원에서 3년의 교육과정을 이수합니다. 저들은 7년 동안 조직신학, 역사신학, 성경신학, 목회신학, 실천신학, 선교신학 등등을 비롯한 전문적인 지도자 교육을 받는 것입니다. 지도자들은 7년간의 교육과정을 이수한 후 각자 부여받은 사명에 따라 직분자로 세움 받으며 직분에 따라 지도자로서의 직무를 이행합니다. 목회자로 사명 받은 지도자들은 목사<남자> 전도사<여자>로 장립되어 목회, 강의, 제자훈련, 등등을 실시합니다.
3) 청소년 교육 훈련.
제자훈련교회는 기독교에 소속된 학생들을 유치부에서 대학부까지 단계별로 구분하여 그들에게 적합한 교육을 실시합니다. 그리고 또한 종교에 관계없이 전국적인 청소년교육을 실시합니다. 이 때에 기독교 학생들은 기독교적인 교육을 실시하지만 일반 청소년들은 기독교적인 교육을 실시하지 않고 청소년에 적합한 인성교육과 국가관, 민족관, 사회관, 가족관, 등등에 관한 교육을 실시합니다.
4) 일반 사회인 교육.
제자훈련교회는 일반 사회인들에 대한 교육도 실시합니다. 일반 사회인들에 대한 교육은 일반 청소년 교육과 마찬가지로 이성교육, 인성교육, 국가관, 민족관, 사회관, 가정관 등등을 교육합니다.
5. 제자훈련교회의 소망.
1) 제자훈련소 설립.
제자훈련교회는 위와 같은 교육을 실시하기 위하여 우선적으로 교육을 전담할 남녀 지도자들을 집중적으로 육성하며 전국 각처에 교육시설인 <제자훈련소>들을 설립 할 것 입니다. 전국 각처에 세우는 <제자훈련소>들은 기도와 휴양을 겸할 수 있는 시설들로 세워지며 아울러 양로원과 청소년 가장들의 삶의 터전도 아울러 세워집니다. 제자훈련소에 소속된 모든 기관은 모든 기독교인들이 무료로 사용하게 됩니다. 모든 기독교인들은 교육, 침식 등등의 일체를 무료로 공급받으며 각종 편의 시설도 무료로 사용합니다. 이와 같은 운영 방침은 예수그리스도의<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10:8>의 명령에 따른 것입니다. 방대한 제자훈련소를 무료로 운영하면 과연 운영이 되겠는가? 하고 우려하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심 없이 정직하고 진실하게 운영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책임지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하여 매월마다 수입과 지출 일체를 게시판에 상세하게 계시 하면서. 제자훈련소를 하나님의 섭리대로 운영할 것입니다. 수입과 지출 일체를 게시판에 상세하게 계시 하는 이유는 투명성을 과시하기 위함이 아니라, 혹시라도 부주의하여 비 진리적 운영이 되는 것을 스스로 방지하기 위함 입니다.
제자훈련소는 집회를 통하여 헌금을 강요하는 일이나 각종 편법, 위법, 탈법 등등은 결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자훈련소는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운영할 것이며 없으면 없는 대로 운영할 것입니다. 결코 하나님의 진리를 모독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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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훈련소 설립되기까지.
제자훈련소가 설립되기 이전의 제자훈련은 지역단위로 진행 할 것입니다. 전국 어디서나 그리고 누구나 제자훈련을 원하시면 저희들이 방문하여 교육을 실시 할 것입니다. 제자훈련 교육에 필요한 일체의 비용은 저희들이 부담 할 것입니다. 교통비는 물론 교재대금도 받지 않습니다. 제자훈련에 뜻이 계신 분 들은 시간과 장소만 제공 하시면 됩니다.
지금 현재의 제자훈련은 제자훈련교회에서 매주 월요일 오전 10시에 실시하고 있습니다.
2) 교회 설립.
제자훈련교회는 전국에 교회를 세우고 바울신학교와 신학연구원을 통하여 양성된 목회자들을 파송할 것입니다. 현재 바울신학교와 신학연구원에 대한 운영은 제자훈련교회에서 모든 경영 일체를 전담하고 있습니다. 교육생들은 등록금을 비롯하여 일체의 부담 없이 완전 무료로 교육받고 있습니다.
제자훈련교회는 그들이 목사, 전도사로, 장립 될 때까지는 물론이요 그들이 원하는 곳에 교회를 설립하고 자립 할 때까지 모든 것을 지원 할 것입니다. 제자훈련교회는 재정이 넉넉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일을 진행하는 이유는 진정과 신령의 교회를 설립하고 운영하기 위함이며, 진정과 신령의 목회자들을 세우기 위함이며, 성도들이 진정과 신령의 신앙적 삶을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제자훈련교회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함이며,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이루어 드리기 위함입니다. 그것이 제자훈련교회에 부여된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명과 원리에 의하여 제자훈련교회는 교회, 목사, 전도사, 장로, 권사, 집사, 등등을 세움에 있어서 개인 당사자들에게 전혀 부담을 주지 않고 모든 경비 일체를 교회에서 부담합니다. 이미 말씀 드렸듯이 제자훈련교회는 재정이 넉넉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없으면 없는 대로><주시면 주시는 대로>를 운영 원칙으로 합니다.
제자훈련교회는 성도도 많지 않고 재정도 빈약 하지만 진리대로 경영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모든 것을 주관 하신다는 것을 배워 알았고, 실제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보고 깨달아 알고 있습니다. 제자훈련교회가 넉넉지 않으면서도 원대한 계획과 소망으로 전진 하는 것은 진리대로 전진하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믿음과, 또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받아왔기 때문입니다.
3) 한국기독교 개혁.
제자훈련교회는 제자훈련을 통하여 한국 기독교가 개혁되기를 소망합니다. 한국 기독교 성도들이 제자훈련을 통하여 바른 신학과 신앙을 정립하고, 그 신학과 신앙에서 비롯되어진 기독교적 인격과 사명을 수립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어 드리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바울 신학교와 바울신학 연구원을 통하여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이 양성되고 배출되어, 한국기독교를 기독교 본연의 위치와 권위로 회복시키며 나아가서 세계 기독교를 바로 세우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4)세계선교.
제자훈련교회는 제자훈련을 통하여 세계 복음 선교를 진행 할 것 입니다. 현재 많은 교파, 교단, 교회, 개인 들이 열심히 세계선교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물론 다 그렇지는 않으나 대부분의 경우 세계선교 의 기본적 원칙들이 완전히 무시된 채 경쟁적인세계선교가 진행되고 있으며 선교사의 자격이 전혀 없는 자 들이 선교살 파송되어 온갖 물의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은 북한 선교에 대한 한국 기독교의 선교준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북한 선교는 한국 기독교의 가장 시급하고 절실한 당면 문제 입니다. 그러나 만약 내일이라도 북한선교 가 허락 되었다 고 가정 해 보십시다. 틀림없이 교파, 교단, 교회, 단체, 개인, 등등의 북한선교가 경쟁적으로 진행되는 가운데 북한에 교회설립, 기도원설립, 신학교설립, 등등이 실시 될 것이고 그러한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혼란과 무질서가 일어나겠습니까?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이러한 비 진리적 세계선교를 계속 해서는 않됩니다. 제자훈련교회는 100년 대계의 계획 하에 세계선교의 원칙을 준수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세계선교를 진행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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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소망을 정리하는 제자훈련교회의 마음은 심히 안타깝습니다. 제자훈련교회는 이제 시작하였기 때문에 제자훈련소 건립, 한국기독교 개혁, 세계선교, 등등 을 진행하기에는 경륜이나 능력에서 매우 부족합니다. 제자훈련소 건립, 한국기독교 개혁, 세계선교, 등등은 경륜과 능력을 겸비한 몇몇 대형교회들이 연합한다면 즉시 시작될 수 있습니다. 현재의 제자훈련교회가 감당하기에 그것은 너무나 큰 과제이며 따라서 언제 그와 같은 일들이 본격적으로 추진될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때문에 심히 안타깝고 답답한 것 입니다. 그러나 제자훈련교회는 결코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할 수 있는 경륜과 능력을 갖춘 대형교회들이 침묵하므로 하나님께서 그 사명을 제자훈련교회에 부여하셨으며, 따라서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실 것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제자훈련교회는 먼 훗날, 제자훈련교회가 이와 같은 결실을 맺었을 때를 소망하면서 더욱 큰 소망을 갖습니다. 제자훈련교회는 이 소망을 제자훈련교회만의 소망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범 기독교적이면서 또한 국가적, 민족적 소망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기독교가 그와 같은 열매를 맺으면 한국 기독교는 세계 기독교를 아우르고 지휘하는 세계 기독교의 중심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우리 조국 대한민국은 세계의 열강들을 아우르고 이끌어 가는 세계의 지도국가가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자훈련교회의 소망을 이루어질 수 없는 헛된 노망이라고 비웃으며 공자나 노자와 같은 이상주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제자훈련교회는 결코 이상주의자가 아닙니다. 공자나 노자에게는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없었지만 제자훈련교회는 하나님의 <영원적 함께 하심>이 계십니다. 제자훈련교회는 이러한 승리의 역사를 <다윗과 솔로몬의 이스라엘> <로마의 기독교>를 통하여 확인하고 보증 받습니다. 다윗과 솔로몬의 이스라엘은 동양의 변방 팔레스타인의 작은 국가였지만 하나님의 함께하심 속에서 <시바의 여왕>에게 조차 조공을 받는 세계적 국가로 부상하였고, <로마의 기독교>는 처음에 수많은 순교의 박해 속에 <카타콤 예배>를 드렸지만 세계에 기독교를 전파하고 세계 기독교를 지휘하는 위업을 달성하였습니다. 문제는 국력이나 국토가 아니라 기독교 지도자들의 신학과 신앙과 인격과 사명입니다.
세계를 호령하던 <다윗과 솔로몬의 이스라엘>은 기독교 지도자들의 배교와 부패와 타락으로 인하여 멸망하였고, 세계에 기독교를 전파하고 세계 기독교를 지휘하였던 <로마의 기독교>는 기독교 지도자들의 배교와 부패와 타락으로 인하여 기독교에서 이탈되어지는 비극을 맞았습니다.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신학, 신앙, 인격, 사명을 갖추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며,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룬다면, 한국의 기독교는 <로마의 기독교>처럼 세계 기독교를 아우르고 지휘하는 세계 기독교의 중심이 될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 조국 대한민국은<다윗과 솔로몬의 이스라엘>처럼 세계 각국을 지도하고 이끌어가는 세계적 지도 국가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훈련교회는 이러한 결과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압니다. 이러한 결과들은 적어도 백년 아니 어쩌면 수백 년 이상의 긴 시간과 수많은 지도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요구될 것입니다. 따라서 제자훈련교회는 백년 아니 어쩌면 수백 년 후의 승리를 소망하면서, 지금 이 순간 벽돌 한 장을 만드는 신념으로 일하는 것입니다. 제자훈련교회는 제자훈련을 통하여 한국 기독교가 세계 기독교의 중심이 되는 아름다운 결과를 내다보지만, 그것이 자신들의 시대에 이루어지리라는 기대와 욕심을 갖지 않습니다.
제자훈련교회는 다만 현재 자신들에게 주어진 시간과 단계까지의 사명완수에 충실하며 그 후의 문제는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합니다. 제자훈련교회는 모세가 가나안을 바라만 보고 들어가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한마디 불평하지 않은 것을 본 받으며, 초대교회 시대의 기독교인들이 로마 제국의 극심한 탄압 하에 죽음으로 신앙을 지켜야 했던 절망스러운 순간에도 결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원형 경기장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순교했던 것을 본 받아, 오직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을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을 온전히 드립니다.
제자훈련교회는 먼 훗날 이루어질 하나님의 역사를 미리 자축하면서, 그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에 자신이 부름 받고 쓰임 받는다는 것에 감사하고 만족하는 것입니다.
한국 기독교가 세계 기독교의 중심이 되기를 소망하는 것을 오해하여 제자훈련교회를 민족주의자, 국가주의자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제자훈련교회는 다만 우리 조국 대한민국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하여 하나님께 쓰임 받는 영광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
개혁자료
한국 기독교 개혁.
한국 기독교 개혁을 말하기 에 앞서.........
목회 연륜 이 짧고 신학적 경륜이 부족한 작은 종들이 한국 기독교 개혁을 말한다는 것은, 하나님께는 물론이요 선배 목사님들 을 비롯한 모든 목회자들과 전체 기독교 성도들 앞에 참으로 민망스러운 일이기에, 심히 두려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에 누가 되지 않을까 두렵고 하나님의 섭리 역사에 반역이 되지 않을까 두려우며,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리는 신실한 하나님 종들의 노고에 먹칠을 하는 것은 아닐까 두려우며, 한국 기독교 전체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것은 아닐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기독교 개혁을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것은, 한국 기독교가 심히 오류 되고 왜곡 되어 기독교의 본질로부터 너무나 멀리 이탈되었기 때문입니다. 작은 종들은 하나님께서 한국 기독교에 함께 하심을 절대 믿습니다. 작은 종들은 특히 하나님께서 한국 기독교에 세계 복음 선교의 대과업을 맡기셨다고 확신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한국 기독교가 장차 세계 기독교를 이끌어 가도록 하셨다고 확신합니다.
한국 기독교가 그와 같은 사명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기독교의 본질과 본연의 권위와 권세를 반드시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나 심히 유감스럽게도 현재의 한국 기독교는 기독교의 본질과 본연의 권위와 권세를 전혀 갖추지 못하였습니다. 때문에 작은 종들은 한국 기독교가 세계 기독교를 이끌어가고 세계 복음 선교를 진행하기 위하여 다시 태어나는 차원의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1.한국 기독교 개혁의 당위성.
한국기독교가 개혁 되어야 하는 당위성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저희는 그것을 제자훈련교재를 통하여 어느 정도 정리 하였습니다. 따라서 그중에 가장 중요하고 심각한 것을 다음과 같이 정리 합니다.
1)한국기독교 신학의 변질과 오류.
(1)한국기독교 신학의 변질과 오류에 대한 내용.
종교전문가들은 인류역사에 존재하는 종교들을 3대종교, 5대종교, 등등으로 구분합니다. 때문에 학교에서도 그와 같은 구분을 통하여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를 3대종교로 구분하고 거기에 힌두교와 유교를 포함하여 5대종교로 구분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와 같은 종교적 구분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일반종교와 기독교를 구별하여 일반종교들은 종교라 명칭하고 기독교는 기독교라는 명칭을 사용합니다. 그것은 기독교는 일반종교와 결코 자리를 같이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일반종교는 사람들에 의하여 설립되었지만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설립하셨습니다. 때문에 일반종교에는 신학이 없는 반면에 기독교는 모든 것을 신학으로 시작하고 진행하고 결과합니다. 때문에 종교학자들은 기독교를 말씀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기독교의 신학은 하나님에 의하여 수립된 것으로서 인류역사 및 우주역사의 시작과 진행과정은 물론이요 미래와 결론에 대한 모든 것이 완전무결하게 정립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의 계시이며 섭리로서 일반 종교는 엄두조차 낼 수 없는 형이상학적 진리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진리의 원천이시고 원형이시기 때문에 당연하고 필연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기독교는 이러한 기독교 신학을 오류, 왜곡 하여 비진리로 격하시켰습니다. 한국기독교의 오류, 왜곡, 변질 된 신학을 모두 소개하기에는 너무 많기에 그중에 가장 심각하고 중요한 것을 소개합니다.
①기독교 본질의 오류, 왜곡, 변질.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독교의 본질이 구령사업<救靈事業>인 것으로 이해합니다. 때문에 기독교를 <예수 믿고 구원받아 천국 가는 종교> 인 것으로 생각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한 오류입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다음과 같은 것 입니다.
A.하나님의 창조에 나타나는 기독교의 본질.
성경은 기독교의 본질을 창조 기사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하나님이 자기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 : 27-28>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어 모든 만물들 위에 더욱 뛰어난 존재가 된 것은 하나님의 목적 있는 특별하신 섭리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피조세계, 특히 지구를 중심으로 하는 일단의 우주 영역을 인간을 통하여 정복하고 다스리고 관리하게 하셨습니다. 물론 <창1 : 27-28>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한다면 그것은 자연에만 국한된 것으로 제한하여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하나님의 주권과 속성과 섭리적인 차원에서 광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그러한 원리에서 해석할 때에 인간이 하나님의 모든 창조세계를 관장하도록 창조되어졌다는 것에 대한 증거이며 선포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그 외에도 여러 곳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모든 창조세계를 관장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라는 사실을 증거 합니다.
B.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에 나타나는 기독교의 본질.
기독교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를 통하여 정립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기독교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 : 13-16>
<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 33>
기독교의 본질은 결국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선택되고 부름 받은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교회들이 하나님의 전 피조세계를 하나님의 말씀과 자신의 신앙적 삶을 통하여 정복하고 다스리고 관리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는 것이 기독교의 본질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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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국 기독교는 이와 같은 기독교의 본질을 <영혼구원> 과 <복음전파> 로 제한하였습니다. <영혼구원> 과 <복음전파> 가 중요한 기독교의 본질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 을 이루는 기독교의 본질 중에 하나의 영역 인 것입니다. 한국기독교는 이와 같은 오류를 바로잡기 위하여 당연히 그리고 필연적으로 개혁 되어야 합니다.
② 성령 하나님에 대한 오류.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의하여 진행됩니다. 성령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 영으로서의 절대적 주권과 성자 하나님 영으로서의 왕권으로 하나님의 전, 피조 세계를 운행 하십니다. 특히 기독교는 성령 하나님의 조명하심 속에서 모든 것을 진행합니다. 하나님의 성도들은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하나님께 나아오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깨달으며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이행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신학부재의 사이비 비 진리자들 에 의하여 사정없이 오류, 왜곡, 변질되었습니다. 그중에 대표적이며 가장 심각한 것은 성령 받는 문제 입니다. 현대 기독교 성도들 중에 많은 이들이 성령 하나님을 받으려고 노력합니다. 성령 하나님은 받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성경이 성령 하나님에 대하여 보낸다, 받으라, 등등으로 표현 했다하여 성령 하나님을 받는다, 라고 해석하는 것은 신학적 무지에서 비롯되어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성령 받는> 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내주, 내재, 임재, 역사> 하신다. 라고 표현 하는 것이 바른 신학적 표현입니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은 인간이 노력하여 <내주, 내재, 임재, 역사>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부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에 따라 성도들에게 무상으로 이루어지는 초자연적인 역사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은 처음 교회에 나오려는 마음이 발동 되었을 때 이미 성령 하나님의 <내주, 내재, 임재, 역사> 하심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지도자들 중에 신학이 없는 자들<특히 부흥 강사들>이 그동안 <성령 받으라> <성령 충만> 등등의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하여 성도들에게 <성령 받으라> <성령 충만하게 받으라>고 강조하였고 <교회 수십년 다녀도 성령 받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 한다> <기도 많이 하고 은혜 많이 받아야 성령 받는다.> <성령 충만하게 받지 않으면 사단의 미혹에 넘어가 범죄 한다> <성령 충만하게 받지 않으면 복 받지 못 한다> <성령 충만하게 받지 않으면 은혜 받지 못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저들이 이와 같이 가르치게 된 배경은 성령 하나님 사역의 완전성에 대하여 증거하고 보장한 성경들을 괴상하게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성령 충만에 대한 성경 구절들을 성령 하나님의 완전하신 역사하심으로 해석하지 않고 일반 3류 종교들에 존재하는 개념인 <신비적인 영적 상태의 충만함>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즉, 성령 충만의 성경 구절들을 기독교적 신학으로 해석하여 <성령 하나님의 완전하신 역사하심> <성령 하나님의 완전하신 내주 내재하심>으로 해석하지 않고 일반 3류 종교적 개념인 <성도의 영적 상태>로 해석하여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한 것입니다. 이러한 강조로 인하여 성도들은 상대적으로 자신에게 완전하게 내주 내재하시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의심하게 되었고, 따라서 <성령 하나님께서 과연 자신에게 충만하게 임재하시는가?>하는 의심과 <성령 하나님께서 때로는 자신으로부터 떠나 계신다.>라는 오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신앙적 상태가 때로는 바르지 못하다는 자각<自覺>과 연합하여 성령 하나님께서 자신으로부터 떠나 계심으로 자신들의 신앙 상태가 바르지 못하게 되었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자신이 성령을 받지 못했다고까지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 문제는 제자훈련 교재에서 상세하게 정리하였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2) 한국기독교 신학의 오류, 왜곡, 변질 원인.
한국기독교 신학의 오류, 왜곡, 변질에 대한 원인에는 은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저희는 그것을 크게 집약하여 두 가지로 구분 합니다.
① 신학자들의 신학부재.
기독교 신학은 신학자들을 통하여 전수되고 교육됩니다. 목회자들은 신학교에서 저들로부터 신학을 배웁니다. 따라서 신학자들의 신학수준 여부에 따라 목회자들의 신학수준이 결정됩니다.
현재 한국기독교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신학교들이 있습니다. 그중에는 문교부로부터 학력을 인정받는 신학교가 있는가하면 신학교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작고 열악한 차원의 신학교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신학교의 크고 작은 규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신학을 강의하는 교수들에게 있습니다. 신학교의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들 중에는 오류 왜곡된 비진리를 진리로 알고 가르치는 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저들 중에는 도저히 교수라고 명칭 할 수 없는 자들도 많습니다. 이러한 자들의 오류, 왜곡, 변질된 비진리들이 그대로 전수됨으로 목회자들의 신학이 함께 오류, 왜곡, 변질된 것입니다.
②목회자들의 노력부재.
한국기독교 신학의 오류, 왜곡, 변질에 대한 또 하나의 원인은 목회자들이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신학교를 목회자가 되는 하나의 과정으로 인식하여 공부를 등한히 합니다. 저들 중에 어떤 자들은 신학교에 입학 한 후 바로 교회를 설립하고 목회자 행세를 하면서 전혀 공부 않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어떤 자들은 공부에는 전념하지 않으면서 능력 받겠다고 <산기도> <금식기도> 에 전념 하면서 <능력봉> <능력천><능력암>을 헤매기도 합니다. 이러한 자들은 말씀<신학>을 아예 모르거나 또는 오류 되고 왜곡된 비진리들을 진리로 알고 추종합니다. 말씀을 모르기 때문에 진리와 비진리를 구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저들은 모든 것을 신비주의적으로 해석하며 그리하여 3류 무속종교의 무당들과 같은 현세위주의 기복주의 논리를 전개 하는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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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는 이제 더 이상 이와 같은 상황을 방치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루속히 기독교를 개혁하여 오류, 왜곡 변질된 신학을 바로잡고 기독교를 말씀의 기독교로 환원 시켜야 합니다.
2) 신앙의 변질과 오류.
한국기독교 개혁의 또 다른 당위성은 신앙의 변질과 오류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모범적인 기독교신앙에는 여러 가지 유형이 있겠으나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은 <현세 보다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의 신앙> <자신의 개인적 삶 보다는 교회 위주의 신앙적 삶><목회자에 절대 순종, 봉사, 충성하는 신앙><사회와 이웃에 대한 자선, 봉사의 신앙적 삶> 등등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물론 그러한 것들을 포함하지만 그보다 더 한층 차원 높은 형이상학적 신앙을 요구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기독교본 질, 기독교 사명, 등등과 밀접한 연관을 이루는 것으로서 곧,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는 것> 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3-16>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 31-33>
이와 같이 기독교 신앙은 자신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세우고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는 이와 같은 기독교 신앙을 <구원적 신앙><교회적 신앙><목회자적 신앙> 으로 제한하였고 나아가서는 <은사위주신앙><체험위주신앙><기복신앙>등등으로 오류, 왜곡, 변질 시켰습니다. 차원 높은 기독교신앙을 일반종교 신앙, 3류 무속신앙 등등으로 격하 시킨 것 입니다.
한국기독교는 이와 같은 신앙의 변질을 더 이상 방관해서는 안 됩니다. 하루속히 개혁하여 기독교 본연의 신앙을 회복하여 하나님을 위한 영광 적 삶을 살아야 합니다.
3) 기독교 사명의 오류, 왜곡, 변질.
(1) 기독교사명.
① 진리의 사수와 보존.
하나님께서는 교회에게 진리<하나님의 말씀>을 주시고 교회로 하여금 진리의 귀중한 보화를 지키는 수호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교회는 모든 비 진리 자들로부터 진리<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섭리>를 사수하고 보존해야할 막중한 의무와 책임을 부여받은 것입니다.<딤전1: 3, 4> <딤후1: 13> <딛1: 9-11>. 따라서 수많은 비진리적 도전자들이 말씀에 대항하고 오류의 세력들이 도처에 난무할지라도 교회는 진리의 말씀인 성경을 사수하고 보존하는 사명을 완수하면서, 어떠한 경우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진리가 승리한다는 것과 진리는 영원히 불변한다는 사실을 입증하여야합니다.
② 진리의 보전. <말씀의 생육, 번성, 충만>
교회는 진리<하나님의 말씀>을 사수하고 보존할 뿐만 아니라, 그 진리를 보전해야할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이러한 책임과 의무는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받은 사명이며<마28 : 19-20>, 뿐만 아니라 아담이 태초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본래적 사명<창1 : 28>에 기초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교회는 온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치되, 온 세계에 복음이 생육되고 번성하여 충만하도록 그 사명을 끝임 없이 진행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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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매우 유감스럽게도 한국기독교회 이 신성한 책임과 의무를 온전하게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지난 수 세기동안에 수많은 교회의 지도자들은 성경에 대한 적대적 비평을 오히려 받아들였고,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에 동조하였습니다. 특히 근자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이 도처에서 함부로 오류 되고 변질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막고 바로 잡아야할 책임과 의무를 가진 자들이, 그것을 수수방관<袖手傍觀>하고 있으며 오히려 그들과 연합하고 있고 야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 어떤 종교와도 비교 될 수 없는 기독교 진리가 3류 일반 종교와 같은 저급한 것으로 하락, 변질, 오류 되었고 기독교가 무속종교와 같은 차원으로 변질 되었습니다. 현세적 복이나 인간의 길흉화복에 매달리는 무속 종교가 되어버린 것 입니다.
③ 복음에 의한 정복과 통치.
기독교는 복음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통치하고 관리하는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세워진 하나님의 섭리적 도구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도,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의 지위를 회복하신 것도 그리고 그들에게 교회라는 조직 사회를 세워 주신 것도, 궁극적으로는 그들을 통하여 세상이 복음<하나님의 말씀>으로 정복되고 통치되고 관리되어지는 가운데 세상이 하나님 영광을 찬양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섭리를 요약하여 다음과 같이 선포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마6 : 13-16> 교회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복음으로 무장시켜 그들을 사회 각 영역에 빛과 소금의 전사들로 파송하여 그들을 통하여 세상이 밝고 깨끗하며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이 되게 함으로서, 온 세상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원하심을 찬양할 수 있게 하여야할 막중한 책임 의무를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와 국가의 분리가 완전한 독립적 체제를 이루는 것으로 주장합니다. 그러나 국가와 교회의 독립은 상호 불가침의 독립이지만, 교회는 국가에 대하여 선지자적 직무를 행하여야할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국가 정부가 비 진리적 상태에 직면하면 교회는 선지자의 직무를 행사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국가 정부에 권면하고 충고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이러한 사명을 외면하였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교회와 국가 정부를 분리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예 교회와 세상을 분리했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비 진리적 분리를 요약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A. 영적 분리.
한국기독교는 교회와 세상을 영적으로 구분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교회는 거룩하고 신성한 반면에 세상은 악하고 추한 것으로 구분하였습니다. 교회는 이와 같은 영적 구분에 의하여 교회의 영적 순수함을 보호한다는 개념 하에 교회와 세상을 엄격히 구분하였고, 성도들의 삶을 교회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으로 또한 구분하여, 세상적인 삶을 버리고 교회적인 삶으로 가꾸어가도록 유도하였습니다. 의식주와 문화적인 것을 교회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으로 구분하여, 성도들의 삶을 세상으로부터 계속하여 격리시켜 나간 것입니다. 이러한 구분은 하나님의 세계를 사단의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 하에 있는 하나님의 것으로 간주하는 반면에 세상은 사단의 통치 하에 있는 사단의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현존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으로서 모두가 하나님의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통치 하에 있는 하나님의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구분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결코 악하고 추한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하여 창조되었으며 완전하신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큼 거룩하고 신성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상태적으로 저하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여전히 거룩하고 신성하고 아름답습니다. 악하고 추한 것은 세상이 아니라 그 세상을 운영하고 인도하는 인간이 악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빛과 소금의 사명을 부여하신 것은 악하고 추한 세상을 정화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악하고 추한 인간들을 정화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이러한 구분은 교회의 사명을 외면한 어리석은 구분입니다. 교회는 성도들을 세상으로부터 격리시킬 것이 아니라 그 세상을 정복하게 해야 합니다.
B. 영역적 분리.
한국기독교는 교회와 사회를 영역적으로 분리시켰습니다. 정치, 경제, 교육, 문화, 예술, 상공 등등의 조직 사회로부터 교회를 분리시킨 것입니다. 그리하여 교회는 그러한 영역에 대하여 전혀 관계하지 않고 오직 복음 전도를 통한 인류 구원에만 전념해야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교회가 이러한 사회적 격리를 추구하는 동안 교회는 사회로부터 점점 무시당하고 거부당하는 가운데 비난과 조소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세상을 정복하고 통치하고 관리할 수 있는 능력과 은사와 책임과 의무를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교회가 그것을 스스로 포기하고 사회로부터의 격리를 자초하여 ,이제는 사회로부터 정복되어지고 통치되어지고 관리되어지는 역<逆>현상을 초래한 것입니다.
C. 시간적 분리.
한국기독교가 구분한 또 다른 것은 시간적인 구분입니다. 한국기독교는 시간을 <주의 것>과 <세상적인 것>으로 구분하여 주의 것은 거룩하고 신성한 반면에 세상 것은 악하고 추한 것으로 주장하였습니다. 주일날은 거룩하고 신성한 반면에 그 외의 날들은 악하고 속된 날들이라고 강조하였으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간은 거룩하고 신성한 반면에 그 외의 시간은 악하고 속된 시간으로 분리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구분은 시간을 하나님의 것과 사단의 것으로 구분하는 것으로서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현존하는 모든 것은 시간까지도 하나님의 것으로서 거룩하고 신성하고 아름답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선포하심으로서 시간조차도 자신의 통치 영역에 속한 것임을 만 천하에 선포하셨습니다. 시간이나 장소에 대한 거룩함이나 신성함, 또는 악함이나 추함은 그 시간 그 장소에서 어떤 일들이 진행되느냐 하는 것에 의해서 구분되어지는 것이지 그곳이 교회 안이냐? 교회 밖이냐? 하는 것과 또한 그 시간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간이냐? 아니냐? 하는 것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곳이 비록 교회 안이라 할지라도 그곳에서 비 진리적인 일들이 진행되고 있다면 그곳은 악하고 추한 곳입니다. 그러나 교회 밖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한 일들이 진행된다면 그곳은 거룩하고 신성하고 아름다운 곳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간이라 할지라도 그 예배가 진정과 신령의 예배가 아니라 비 진리적 예배라면 그 시간은 악하고 추한 시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간이 아니라도 그 시간에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한 어떤 역사가 진행되어진다면, 그 시간은 분명히 거룩하고 신성하고 아름다운 시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시간을 내적, 진리적으로 구분하지 못하고 외적 형식적 차원에서 구분하는 것은 비신학적이며 비 진리적인 것입니다.
④ 복음의 교육과 성도의 관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에게 성도의 신앙적 관리를 사명으로 부여하셨습니다.<마28 : 19-20>. 교회에게 부여된 성도의 신앙적 관리는 성경이 증거 하는 바와 같이 다음의 세 가지입니다.
a. 세례의 집행.
교회가 성도들에게 삼위 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시행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의한 것으로서 법적, 행정적인 것입니다. 성도들은 세례를 통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법적, 행정적으로 보증 받으며 또한 확인하게 됩니다. 기독 세례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행되는 것으로서 1회로서 완전한 효력을 발휘 합니다. 그러나 침례교를 비롯한 일부 교단들이 이와 같은 원리를 무시하고 다른 교단에서 받은 세례를 <약식세례> 라고 폄하 하면서 다시 <침례>를 시행합니다. 이와 같은 오류는 이미 기독교 역사에 이단자들에 의하여 여러 차례 있었으나 그때마다 종교회의를 통하여 이단으로 정죄되고 추방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국기독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오류를 정리하지 않고 그들과 여전히 교류 하면서 그것을 묵인하고 있습니다.
b. 복음의 교육.
교회 교육은 일반적인 교육과는 전혀 다릅니다. 교회 교육은 신학이라는 하나의 학문을 가르치는 것이지만 그 학문은 일반적인 학문과는 근본부터가 다릅니다. 신학은 하나님에 관한 것으로서 어떤 이론이나 학설이나 사상과 같은 학술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이며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교회 교육은 또한 교회의 역사를 가르치지만 그 역사는 인간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로서 과거는 물론이요 이미 예고되어진 미래의 것까지를 포함하는 전 우주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 교육은 하나의 이론이나 역사적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서는 않됩니다. 교회 교육은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속성과 하나님의 섭리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진행되어 왔으며, 또한 앞으로 어떻게 진행되어지고 그 결국이 어떻게 되어지리라, 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하나님의 섭리 역사가 왜 그렇게 시작되었고, 왜 그렇게 전개되어져 왔으며, 왜 그렇게 종료되어지게 되는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필연성들을 가르쳐야합니다. 때문에 교회 교육은 사실상 교육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계시와 하나님의 섭리 역사에 대한 증거이고 선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교회 교육의 원리를 실천적 교육 방법을 통하여 전수하셨습니다.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기까지<요13 :4-10> 하시면서 철저한 실천적 삶을 통하여 교육의 방법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사도들의 교회 교육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육 방법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었고, 초대 교회들의 지도자들 역시 그와 같은 전통을 이어갔습니다. 따라서 교회 교육은 이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육 방법을 그대로 전수받아 철저하게 실천적으로 시행되어져야합니다.
그러나 한국기독교 목회자들은 이와 같은 교회교육을 실시하지 않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제자훈련을 실시하고 있으나 거의 대부분 구원, 교회봉사, 순종, 충성, 등등에 대한 교육만 실시하며 특히 목회자의 실제적 삶을 근거로 하는 교회교육을 실시하지 않습니다.
c. 성도의 관리.
교회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 가르치기만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천적인 삶을 살도록 지도 관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지도 관리는 사역자들을 비롯한 교회의 지도자들, 직원들의 실천적 삶을 통하여 이루어져야합니다. 교회 교육은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실천적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요구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워진 교육의 원리이고 사도들을 통하여 전수되어진 교회적 전통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을 비롯한 직원들의 실천적 신앙의 삶은 성도들의 신앙적 삶의 모범이 되고 귀감이 됩니다. 성도들은 지도자들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보게 되고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됩니다. 따라서 교회의 지도자들과 직원들은 자신의 삶을 통하여 성도들을 교육하고 관리해야 합니다.
그러나 한국기독교 목회자들의 성도관리는 이러한 원리를 적용하지 않습니다. 저들의 성도관리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책망 하셨던 것과 같이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하고 행치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않는-마23:3-4> 것 입니다. 뿐만 아니라 저들은 목회자가 성도들을 위하여 세움 받은 것을 모르고 성도들 위에 군림하면서 심지어는 축복권 과 저주권 까지 주장하면서 성도들을 기만하고 착취합니다.
⑤ 교회의 설립.
기독교에는 계속하여 하나님의 교회들을 설립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부여 되었습니다. 초대 교회시대에 사도들을 비롯한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이 로마의 극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세우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한 것은, 그것이 자신들에게 부여된 절대 절명의 책임과 의무였음을 자각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교회 설립은 성도 개인이나 또는 신앙적 단체들에 의하여 이루어질 수도 있으나, 그 보다는 노회나 총회 등의 연합 기관 주도 하에 설립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개인이나 사설 단체들이 교회를 설립하게 되면 그들이 교회의 재정권이나 운영권을 주장하게 되는 경우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또한 교회법에 의하여 운영되어야합니다. 개인이나 사설 단체가 교회의 운영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설립이 교회의 주관 하에 이루어지지 않고 개인이나 사설 단체에 의하여 이루어지면 그러한 폐단이 발생하게 됩니다. 따라서 어떤 개인이나 사설 단체가 교회를 설립하고자 하면, 그 취지를 노회나 총회에 알리고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맡기어 노회나 총회의 주관 하에 교회가 설립되어지게 할 것이며, 교회의 모든 재정권과 경영권이 교회법대로 시행되어지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한국기독교는 이와 같은 교회 설립의 원칙을 무시합니다. 특히 군소 교단들은 연합 기관들이 교회를 설립할 능력이 없음으로 인하여 개인들이 교회를 설립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고, 따라서 교회의 재정권이나 경영권도 전적으로 설립자 개인에게 일임되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설립자의 의사에 따라 교회의 위치나 소속이 함부로 변경되는 경우가 허다하며, 교회의 재정과 운영 문제로 인하여 교회 내에 심각한 갈등과 내분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한국기독교는 이와 같은 비 진리적 병폐를 더 이상 방관해서는 않됩니다. 하루속히 개혁하여 교회 설립과 교회운영이 하나님의 섭리대로 진행되게 해야 합니다.
(2) 현대 목회자들의 교회 사명.
기독교의 본질이 구령사업<救靈事業> 으로 오류, 왜곡, 변질됨에 따라 기독교의 사명도 함께 오류, 왜곡, 변질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복음전파가 기독교의 사명인 것으로 축소, 제한되었습니다.
일부 사이비 이단들은 교회의 사명이 <귀신을 물리치고 병자를 고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반면에 대부분의 현대 기독교 목회자들은 교회의 사명이 <복음 전도>인 것으로 이해합니다. 이러한 개념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행1:8>에 근거하며 인류 구원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를 전제로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기독교라는 명칭이 의미하듯이 인류의 구세주이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조직사회입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인류의 구속사<救贖史>와 연관됩니다. 기독교는 창세로부터 예정된 것이지만 그것은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인간이 타락함에 따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 구원을 결정하심에 따라 설립하기로 예정된 것입니다. 만약에 아담이 범죄 하지 않으므로 인류 구원에 대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더라면 메시야 <그리스도>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리스도가 존재하지 않는 한 그리스도교<기독교>도 당연히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인류 구원문제로 인하여 설립되어졌다고 하여 기독교의 본질과 설립 목적을 인류 구령사업<救靈事業>이라고 정립하면 않됩니다. 기독교가 인류의 범죄와 그에 대한 구속사 차원에서 설립되어졌다고 할지라도 기독교의 본질과 설립 목적은 여전히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는>것이며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리는 인류 창조의 목적과 인류에게 부여된 사명에 근거한 것입니다.
한편 기독교의 사명은 에덴교회를 통하여 전체교회에 영원히 부여되었습니다. 에덴교회는 하나님께서 전체 교회들에게 부여하신 사명을 모든 교회의 선두교회이며 또한 대표교회로서 수령하였습니다. 에덴교회가 받은 교회의 사명은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궁극적 목표로 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생육과 번성을 통한 충만 이며 그 충만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정복하고 다스리고 관리하는 것으로 압축되어집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8>
어떤 신학자들은 <창1:28>을 다만 문자적인 것으로만 해석하여 그것을 자연에 대한 정복과 관리와 다스림으로만 해석합니다. 따라서 저들은 <창1:28>을 교회적인 사명으로 이해하지 않고 자연에 대한 인간적인 사명으로만 이해합니다. 물론 <창1:28>을 당시의 입장에서만 적용한다면 그것은 교회적인 차원의 사명이라고 할 수 없으며 따라서 당연히 자연에 대한 인간적인 사명으로만 해석될 수 있습니다. 신학적 무지로 인한 좁은 안목에서 볼 때에 하나님의 기독교 교회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에덴은 교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차원에서 <창1:28>이 당시의 에덴교회에게만 적용되어질 때에 그것은 우선적으로 자연에 대한 것만을 의미하게 되며 뿐만 아니라 그것은 인간들의 숫자적인 생육과 번성을 통한 지구 전역에 대한 충만함으로 제한되어집니다. 이러한 사실은 아담 이래의 초기 인류의 생명이 매우 장구하였던 점을 통하여 분명하게 증명되어집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아직은 오직 에덴교회 하나뿐이었으며 따라서 교회적인 연합이라던가 하는 유기적 조직체제하에서의 교회적 사명은 아직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기독교>을 창조<설립>하신 궁극적 목적은 인간<교회>들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우주적인 창조세계를 주권적으로 다스리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따라서 인간<교회>는 하나님의 창조세계 전역에 생육하고 번성하여 <확장되고 발전하여> 충만한 가운데 하나님의 모든 피조세계를 정복하고 다스리고 관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에 부여된 정복과 관리의 사명은 인류 사회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시공간을 초월하여 자연, 정신, 사상, 학문, 문화, 예술, 등등의 영역 사회에 이르기까지 전, 포괄적으로 적용됩니다. 반면에 그러한 정복과 통치는 일반적이며 물리적인 권력과 수단에 의하여 실시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에 주어진 수직적인 권위와 권세인 하나님의 말씀<신학>과 수평적인 권위와 권세<사랑과 봉사>와 실천적인 권위와 권세인 <신앙과 사명>으로 실시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기독교 목회자들은 기독교의 사명을 <영혼구원> 과 <복음전파> 로 제한하였습니다. <영혼구원> 과 <복음전파> 가중요한기독교의 사명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는 기독교 사명 중에 하나의 영역 입니다. 한국기독교는 이와 같은 오류를 바로잡기 위하여 당연히 그리고 필연적으로 개혁 되어야 합니다.
(3) 교회의 불법과 오류.
많은 교회들이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법대로 운영되지 않고 몇몇 사람에 의하여 비 진리적으로 운영되는가하면 심지어는 한사람에 의하여 독단적, 독재적으로 운영되는 가운데 수많은 불법과 오류들이 발생합니다. 교회의 비 진리와 오류 중에 가장 심각하고 중대한 것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교회 직분에 대한 오류.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다양한 직분자들을 세우셨고 그들에게 서로 합력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운영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종들 사이에는 직무적 구별은 있으나 직분적 구별은 없습니다. 때문에 바울은 함께 사역하는 자들을 구별하지 않고 자신의 동역자로 각별히 예우하였습니다. 그러나 한국기독교는 이와 같은 역사와 전통을 무시하였고 유례없는 비 진리적 규례와 전통을 세워 하나님의 종들을 차별하고 차등하였습니다. 동역하는 목사들을 군대식, 회사<會社>식으로 구별, 차등하여 부목사라는 직분을 신설하였고 그들을 군대 지휘관의 부관이나 회사의 부사장과 같은 직분으로 차별하였습니다. 강도사, 전도사들은 아예 담임목사의 부하로 격하시켰고 심지어는 비서로 까지 강등하였습니다. 그리고 구약시대 때부터 교회의 지도자였고 신약시대의 목사 직분이었던 장로들을 담임목사의 보좌관으로 전락시켰습니다. 이러한 류와 비 진리는 오류와 비 진리라고 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만행이고 악행이라고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것은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법을 임의로, 함부로, 뜯어 고친 것이기 때문입니다.
② 목회자들의 독단과 독선.
하나님께서 교회에 다양한 직분자들을 세우신 것은 그들이 합하여 교회를 운영하게 하심입니다. 그러나 많은 교회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무시하고 몇몇이 주동하여 교회를 장악하고 독단적, 독재적으로 운영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담임목사가 무소불위의 절대적 주권을 행사하면서 교회를 독단적, 독재적으로 운영합니다. 어떤 목사는 이러한 독단적 운영에 이의를 제기하는 직분자들을 <마귀새끼>라고 호통 치면서 <목사가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것에 반대하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 이라고 저주까지 합니다. 이러한 행위 역시 악행이며 만행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과 질서를 만홀히 여기어 무시하고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③ 여자장로, 여자목사의 오류.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여자목사, 여자장로를 세우고 있습니다. 여자목사, 여자장로 제도는 성경은 물론이요 기독교 역사에도 전례가 없는 것으로서 불법이고 오류입니다. 우리는 여자목사, 여자장로가 되기 위하여 목숨을 거는 자들과 그것을 지지하는 자 들 및 그동안 그 제도를 반대하다가 이제 와서 그 제도를 수용하는 자들에게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엇을 근거로 성경에 없는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는 규례>를 억지로 만들면서 까지 여자목사, 여자장로를 세우는 목적이 무엇인가요? <이 문제는 제자훈련 교재에 상세하게 정립 했으므로 그것을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④ 교회 직분자 세우는 과정의 오류.
교회에서 장로, 안수집사, 권사, 등등의 직분자를 세우거나 또는 노회, 총회에서 목사, 강도사, 전도사, 등등의 직분자를 세울 때에 헌금 명목의 상납금을 요구하는 비 진리적 규례가 관행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당연히 불법이며 위법으로서 정확하게 표현하면 매관매직<賣官賣職>입니다. 이러한 전례는 성경에 전혀 없는 반면에 기독교 역사에는 수없이 많았습니다. 하나님의 종들이 세워지는 과정에 소요되는 비용은 해당 소속기관에서 담당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에 증거 되는 전통이며 규례입니다. 물론 본인이 하나님께 감사하여 드리는 예물은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예 정해진 액수나 또는 자원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헌금 아닌 상납금을 거출하는 것은 비 진리요 오류이며 악행이고 만행입니다.
4) 한국기독교 지도자들의 오류와 변질.
(1) 목회자들의 신앙이 오류 되었습니다.
성도들에게 신앙을 정립해 주어야 할 목회자들의 신앙이 오류 되었다는 주장은 논리적으로는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엄연한 현실입니다. 한국기독교 목회자들의 신앙 오류는 저들의 신학부재와 비 진리적 신학에서 비롯되어진 것입니다. 저들은 기독교 신학의 진수를 모르기 때문에 기독교가 얼마나 위대하고 거룩하며 형이상학 적 인지를 전혀 모릅니다. 때문에 돈, 명예, 권위, 권세, 등등에 집착하며 하나님의 나라보다 현세에 더욱 집착하며 그리하여 국가와 민족을 배반하고 성도와 교회를 배반하고 심지어는 하나님 까지 배반하면서 온갖 불법, 불의, 편법, 위법을 행사 하면서도 그것이 잘못인지를 모르며 때문에 타락하고 부패하면서 호화찬란한 삶을 살면서도 전혀 부끄러워 하거나 회개 할줄 모르며 매우 뻔뻔하고 당당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저들의 그러한 신앙적 삶을 개선하기 위하여 한국기독교가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저들의 그러한 삶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교회가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더 이상 가려지고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한국기독교가 개혁되어야 하는 것 입니다.
(2) 목회자들에게 사명감이 없습니다.
한국기독교 목회자들에게 사명감이 없습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을 위하여 세워진 자로서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살고 하나님을 위하여 죽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한국기독교 목회자들 중에 과연 그러한 사명적 삶을 사는 이들이 몇 명이나 될까요? 목회자가 과연 하나님을 위하여 살고 하나님을 위하여 죽느냐? 하는 결론은 그들의 목회 현장과 실제적 삶을 통하여 내려집니다. 그러나 그러한 목회를 하고 그러한 삶을 사는 목회자들 보다는 그 반대의 경우에 해당하는 목회자들이 더욱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오히려 저들 때문에 성도들이 상처받고 고통당하며 그리하여 교회를 떠나거나 심지어는 신앙생활을 중단하는 사태들이 속출하건만 저들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으며 오히려 목회자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자들은 사단의 부하들이라고 호통 치거나 하나님께서 저주 하신다고 공갈 협박까지 합니다. 교회와 성도를 위하여 자신이 세워졌다는 것을 모르고 자신을 위하여 교회와 성도가 존재 하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의양들을 자신의양으로 착각하며 자신이 교회의 주인인 것으로 착각하며 하나님의 성도들이 자신의 부하인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리하여 순종과 충성을 명령하고 강요하며 무소불위의 권력과 권세를 휘두르며 군림하고 독선 하는 오만 방자한 악행과 만행을 자행하는 것입니다. 한국기독교는 더 이상 저들의 누리고 즐기는 군림의 도구가 될 수 없습니다. 하루빨리 개혁하여 저들을 퇴출하거나 회개하게 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성도가 저들의 오만방자한 악행에 시달리지 않게 해야 합니다.
(3) 목회자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종들을 향하여 <합력하여 선을 이루라-롬8:28> 고 명령 하십니다. 그러나 한국기독교 목회자 들은 절대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지 않습니다. 저들은 오히려 자신을 위하여 교단을 위하여 교파를 위하여 분파하고 분당합니다. 저들에게는 하나님보다 자신, 교파, 교단이 더욱 중요합니다. 목사의 권세, 권위, 명예가 하나님보다 더욱 중요하고 노회장 총회장의 권세, 권위, 명예가 하나님보다 더욱 중요하고 교단 과 교파의 신학, 행정, 법규가 하나님보다 더욱 중요합니다. 때문에 그것들을 사수하기 위하여 절대로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한국기독교의 분파와 분단의 역사를 압니다. 한국 기독교는 이미 전래 될 때부터 분파, 분단되어 전래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국기독교가 왜 아직도 여전히 하나가 되지못하고 교파, 교단, 으로 4분5열 되어 있어야 하는지를 이해 할 수 없습니다. 한분 하나님의 기독교가 왜 무엇 때문에 다른 교파, 다른 교단으로 나뉘어 각각 자기 교파, 자기 교단을 고집하는지 이해 할 수 없습니다. 한국에 기독교가 전래 될 당시에 이미 그렇게 분파, 분단되어 전래 되었다고 해서 그것을 역사와 전통으로 삼아 그 체제를 그대로 존속해야 하는가요? 목회자들이 자신, 교단, 교파 등등을 초월하여 연합하면 무엇이던지 할 수 있는 것이 기독교이건만 목회자들이 절대 합력하지 않고 모든 것을 각자 따로 따로 하기 때문에 물자, 시간, 인력을 막대하게 투자하고도 규모나 내용에 있어서 빈약하고 낮은 차원의 역사를 진행하는 반면에 그 과정에서 교회 대 교회, 교단 대 교단, 교파 대 교파간의 갈등과 반목이 심각합니다.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해외선교 입니다. 하나의 해외선교 지역에 개인, 교회, 교단, 교파들이 서로 다른 선교사를 파송하여 선교 경쟁을 하기 때문에 <어떤 교단의 하나님이 가장 능력 있는 하나님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정도 입니다. 우리는 아직 북한선교가 허락되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만약에 북한선교가 허락된다면 어떠한 사태가 일어날까? 하는 것을 생각하면 눈앞이 깜깜해 집니다. 명예욕, 권세욕, 권위욕, 등등에 눈이 멀고 이성이 마비된 자 들이 북한선교 의 깃발을 휘날리며 개인, 교회, 교단, 교파, 별로 달려가겠지요. 그리고 교회를 건축하고 신학교를 설립하고 야단법석이 발생 하겠지요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이러한 사태를 막아야 합니다. 한국기독교를 개혁하여 그러한 목회자들을 퇴출시키거나 도는 그들이 회개하고 바른길을 가게 함으로서 한국기독교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
(4) 목회자들이 타락하고 부패 하였습니다.
한국 기독교의 현재 상황은 수많은 선지자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눈물로 호소하던 구약시대 말기와 같습니다. 당시의 교회 지도자들은 심히 타락하고 부패하였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맡은바 소임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직분을 이용하여 부귀와 권세를 누리며 호화로운 삶을 살기에 급급하였습니다.
현재의 한국 기독교는 기독교 개혁이 깃발을 올리던 중세시대의 로마 카토릭과도 같습니다. 당시의 교회 지도자들 역시 심히 타락하고 부패하였습니다. 저들은 교권주의를 강화하여 사제들의 권위를 최고의 권위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 예배를 사제중심의 미사제도로 바꾸었고 찬양, 기도, 성경은 오직 사제들만의 전유물로 제한하였으며, 일반 성도들은 사제들이 드리는 미사에 참석하는 것으로 예배제도를 바꾸었습니다. 저들은 사제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장로 제도를 파기하였고, 교회의 모든 권한을 사제들에게 귀속시켰으며, 교황을 비롯한 사제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문을 닫고 열수 있는 열쇠가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저들은 교황의 사면권을 강조하기 위하여 연옥교리와 면죄부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신학은 실종되었고 교황의 면죄부가 있어야 하나님 나라가 보장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보다 교황의 권위가 더욱 절대적인 로마 카토릭이 된 것입니다. 사제들은 온갖 부정과 불의와 불법을 행하면서 부와 권세를 누렸고 호화롭고 풍요한 삶을 누렸습니다.
한국기독교 목회자들이 구약시대 말기의 유대교 지도자들과 중세시대 로마 카토릭 지도자들이 행했던 타락, 부패, 불법, 불의, 등등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습니다. 들려오는 바에 의한 대로라면 저들의 온갖 만행은 일일이 소개하기가 민망할 정도입니다. 비 기독교인들이 알까보아 무섭고 볼까보아 두려워 일일이 열거하여 소개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목회자는 재벌 경제의 총수인 그룹회장 보다도 호화로운 삶을 산다고 합니다. 또 어떤 목회자는 수 천 억원 의 재산을 소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어떤 목회자는 자녀를 군대 안보내기 위하여 한국 국적을 버렸다고 하며 어떤 목회자는 한국이 전쟁으로 위험하다 하여 아예 전 재산과 가족들을 해외로 이주시켜 놓고 일단 유사시에 비행기만 타면 되도록 조치해 놓았다고 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지 우리는 도무지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목회자는 선지자 직무를 행사하는 자입니다. 선지자 직무를 행사하는 자는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섭리대로 살아야 할 책임과 의무와 사명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개인적 삶이란 있을 수 없으며 심지어는 가족까지도 포기하고 잊어야 하는 것 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종의 도를 가리키심에 있어 <부친의 장사> 까지도 잊으라<마8:21-22>고 명령 하셨고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마10:8-10>하셨으며 자신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마8:20> 하실 만큼 검소, 청빈의 삶을 사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선지자 직무를 행사하는 자들의 당연하고 필연적인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도 이러한 가르침 과 원리에 따라 <오직 주를 위하여 살고 죽는 이외에 다른 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 삶-롬13:7-8>을 살았습니다. 따라서 목회자들은 절대로 호화롭게 살 수 없으며 절대로 많은 돈을 소유 할 수 없다.
목회자는 또한 교회적 지도자 일뿐만 아니라 사회적, 민족적, 국가적, 지도자 입니다. 따라서 목회자는 당연히 그리고 필연적으로 애국 애족 적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많은 목회자들이 그와 같은 삶을 살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러한 자들을 향하여<저들은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6:2>라고 선포하며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섭리대로 살지 아니한 자들을 향하여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7:23>고 책망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의 악행과 만행에 대하여 어떤 이의를 제기할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악행들 대문에 한국기독교가 아울러 타락하고 부패하였으며 불법과 불의에 오염되어 3류 무속종교로 전락하였습니다. 때문에 한국기독교가 개혁되어 본연의 위치와 사명을 되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2. 한국기독교 개혁의 방법.
한국기독교 개혁에 대한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합니다.
1) 한국 기독교 개혁은 회개를 통하여 이루어져야 합니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기독교에 대하여 대단한 자부심과 긍지를 갖으며 또한 많은 것들을 자랑합니다.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를 놀라게 한 부흥과 발전, 그리고 교회의 숫자와 교회의 크기에 대하여 자부심과 긍지를 갖습니다. 성도들의 숫자를 자랑하며 성도들의 신앙 수준과 열정을 자랑하고 한국 기독교의 세계 선교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의 실상을 아는 사람들은 결코 한국 기독교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갖지 못하며, 또한 아무것도 자랑하지 못합니다. 저들은 오히려 한국 기독교로 인하여 고뇌하고 고통하며 절망합니다. 한국 기독교가 신학적으로 이탈되었고 신앙적으로 이탈되었고 사명 적으로 이탈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성도는 어쩌면 한국 기독교에서 하나님의 촛대가 옮겨갈지도 모른다는 우려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 한사람 분연히 일어나 한국 기독교의 오류, 왜곡, 타락, 부패 등등의 비 진리에 대한 시정과 개혁을 외치지 않습니다. 진리를 외침에 있어서 신분의 구별이 있을 수는 없겠으나 직무 적, 직분 적 차원에서 그것은 목회자, 신학자, 등등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해야 할 몫입니다.
그리고 한국 기독교가 오늘날과 같은 상황이 된 것은 누구보다도 목회자, 신학자, 등등에게 그 책임이 있습니다. 따라서 저들은 당연히 한국 기독교에 대한 시정과 개혁을 외쳐야 합니다. 그러나 저들은 여전히 침묵하고 방관하며, 여전히 외면합니다. 이와 같은 상황을 바라보는 저희 작은 종들의 가슴은 너무나 무겁고 안타까우며, 하나님 앞에 죄송함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종으로서 더 이상 침묵하며 바라만 본다는 것은 사명에 대한 직무 유기며, 하나님 앞에는 물론이요 전체 기독교 앞에 죄를 짓는 것이라는 결론 하에 한국 기독교 개혁을 외치게 된 것입니다. 여러 가지로 부족하고 허물이 많은 저희들은 감히 누구를 비난하고 비판하는 뜻에서 한국 기독교 개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희들은 다만 예레미야 선지자의 심정으로 한국 기독교 개혁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1) 목사들의 회개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위와 같은 이유에서 작은 종들은 한국 기독교 개혁이 목사들의 회개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한국 기독교 타락과 부패에 대한 책임은 목사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에게도 있습니다. 따라서 한국 기독교 개혁을 위하여 목사들만 회개할 것이 아니라 전체 기독교가 함께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은 종들이 목사들의 회개를 선행 조건으로 제시하는 것은, 한국 기독교 부패와 타락의 주범이 목사들이며, 한국 기독교의 오류와 왜곡으로 인한 비 진리의 원흉들이 바로 목사들이기 때문입니다. 작은 종들이 목사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것은 그들에게 책임을 물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한국 기독교 전체가 회개하고 진리에 복귀한다 할지라도 목사들이 회개하고 진리에 복구하지 않는다면 한국 기독교의 타락과 부패, 오류와 왜곡으로 인한 비 진리는 결코 시정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속담은 진리입니다. 한국 기독교 전체가 회개하고 진리에 복귀한다 할지라도, 교회를 이끌어가는 목사들이 계속하여 탁류를 흘러 보낸다면 교회는 결코 정화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작은 종들은 목사들이 자기 과오들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하나님께는 물론이요 교회와 성도들 앞에 철저하고 진실한 통회자복의 회개할 것을 강력히 호소합니다.
목사들의 회개를 호소하면서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작은 종들은 목사를 두 가지로 분류합니다. 하나는 목사님이시고 다른 하나는 그냥 목사입니다. 목사님은 공부 열심히 하셔서 차원 높은 신학을 정립하신 분이시며, 오직 하나님 나라에만 소망을 둔 신앙을 정립하신 분이시며, 성령이 요구하는 신앙적 열매를 맺으신 분이시며,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격자이시며,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시고 포기하신 분이시며,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고 세우는 분이시며,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하여 사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종입니다. 따라서 목사님은 존경받고 사랑받고 예우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목사님들도 회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목사님들은 교회적, 사회적, 민족적, 국가적, 지도자로서, 대표자로서 모든 것에 대한 총체적인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목사는 목사님과는 반대로 공부 제대로 하지 않아 신학을 모르며,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은 없고 현세의 권위, 권세, 명예 부귀영화 등등에만 집착하며, 성령이 요구하는 신앙적 열매와 전혀 관계없으며, 인격적으로 저급하고 문제가 많은 자이며, 입으로는 하나님을 위하여 살지만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을 버린 자이며, 교회와 성도들로부터 섬김 받고 대접받기를 즐겨하는 자이며, 자기 유익을 위하여 성도들을 핍박하고 공갈사기 협박하는 자입니다. 따라서 저들은 명함만 목사이지 실제로는 전혀 목사가 아닙니다. 저들은 당연히 무시당하고 비난받고 탄핵받아야 합니다. 물론 그중에 저희 작은 종들도 포합됩니다. 때문에 목사는 당연히 그리고 필연적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① 신학적 차원에서 회개합시다.
A. 최선을 다하여 공부하지 않은 것 회개합시다.
기독교는 말씀<성경-신학>으로 출발하고 진행하고 종료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 자녀, 종들에게 임재하실 때에 말씀으로 하시고, 그들에게 사명을 부여하시거나 섭리를 계시하시거나 명령하실 때도 역시 말씀으로 하십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말씀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은 신앙과 신학과 사명을 정립합니다.
a. 말씀<성경-신학>에 근거한 신앙.
기독교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삶을 살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현세의 작은 것들에 연연하는 3류 무속 종교적 삶을 살지 않으며 자신을 위한 삶을 살지 않습니다. 말씀은 이러한 기독교의 신앙적 삶을 <오직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삶-마6:33>이라고 선포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천국>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意섭리-義-거룩>가 나타나고 실현되는 것으로서 이웃, 사회, 민족, 국가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현세적인 것으로서 이웃, 사회, 국가, 민족을 사랑하여 그것들이 번영하고 평화를 이루게 하는 삶인 것입니다.
b. 말씀<성경-신학>에 근거한 인격.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으므로 형이상학적인 최고의 인격체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그러한 인격이 손상되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의 범죄를 용서하셨고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 그러한 인격적 삶을 다시 살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하심은 오직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성도들에게만 적용되며, 비 기독교인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비 기독교인들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격적 삶이 없는 반면에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격적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성도들의 인격적 삶을 <빛과 소금의 삶-마5:13-16>이라고 선포합니다. 즉, 인류사회를 정화하고 아름답게 하는 삶으로서 인정받고, 존경받는 명예로운 삶인 것입니다.
c. 말씀<성경-신학>에 근거한 사명.
모든 기독교인들은 자신을 위한 개인적 삶을 살지 않고 하나님을 위하여 삽니다. 성경은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는 삶-고전10:31>>이라고 선포하며 바울은 이러한 사명적 삶을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롬14:8>고 선포합니다.
이와 같은 신학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 가르치는 책임을 맡은 목사들은 최선을 다하여 공부함으로서 기독교 본질에 근거한 차원 높은 신학을 정립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명령을 말씀으로 가르치고 깨우쳐주며, 성도들에게 말씀에 근거한 신앙, 인격, 사명, 등등을 정립시켜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목사들 중에 많은 자들이 자신들에게 부여된 사명의 막중함을 간과하여 최선을 다하여 공부하지 않았으므로 이러한 신학을 정립하지 못하였습니다.
때문에 저들은 성도들에게 차원 높은 신앙을 정립시켜 주지 못하였으며,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격을 형성시켜 주지 못하였으며, 자신에게 부여된 사명을 바로 이행하지 못하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빛과 소금의 인격적 삶>을 살지 못하는 것, 기독교인들이 <하나님 나라와 의를 이루는 신앙적 삶>을 살지 못하는 것,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는 사명적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은 모두 목사들의 책임입니다.
한국 기독교의 변질과 이탈, 오류와 왜곡은 목사들의 신학 부재에서 비롯되어졌습니다. 그것은 목사들이 열심히 공부하지 않아 기독교 본질에 근거한 차원 높은 신학을 정립하지 못했기 때문에, 각종 오류와 왜곡과 비 진리들을 양산하여 기독교를 3류 무속종교로 전락시킨 것입니다. 따라서 목사들은 자신들의 과오를 하나님께와 교회 앞에 철저하게 그리고 진심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B. 하나님의 말씀보존, 보전하지 못한 것 회개합시다.
목사들에게는 신학적 차원에서 크게 두 가지의 사명이 부여되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존<保存>하고 사수<死守>하는 것이요,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전<保傳>하는 것입니다. 목사들은 비 진리자들의 사이비 이단 사설들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보존, 사수하여 하나님의 진리가 온 천하에 그 빛을 찬란하게 비취게 해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땅 끝까지 보전하여 온 천하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정복되고 다스려지고 관리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목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으므로 신학이 바로 정립되지 않아 하나님의 진리와 사단의 비 진리를 구별하지 못합니다. 기독교 역사에는 언제나 사단의 비 진리가 난무하였으며, 현재 한국 기독교에도 사단의 비 진리들이 시도 때도 없이 범람하고 있습니다. 교활한 사단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종들로 위장 침투하여 성도들을 미혹하고 유혹합니다. 때문에 성도들은 신학 부재의 목사들이 마구잡이로 쏟아놓는 사단의 비 진리를 하나님의 진리로 믿게 됩니다. 1991년에 예수 그리스도 재림의 날자까지 예고하며 성도들을 미혹시켰던 극단적 종말론자들, 이미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성령 받으라고 외치면서 성령 하나님이 마치 떠돌아다니는 도깨비불인 것처럼 <저기 성령 간다> <저기 불 간다> <불 받아라 불 불 불 불>을 외쳐대는 부흥 강사들의 망령됨, 기도원을 차려 놓고 신앙 상담한다면서 <조상의 저주로부터 벗어나는 주문>을 가르치는가 하면, 병자를 고치고 예언을 한다면서 안수, 안찰하고 복채를 받아 먹는 기독교 무당들, <목사 섬기는 것이 곧 하나님 섬기는 것>이라면서 목사에게 순종과 복종을 강요하는 자들, 등등은 모두 사이비 이단이며 비 진리자들로서 사단의 괴뢰들입니다. 이러한 사이비 이단자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수없이 오류 되고 곡해되었으며, 드디어는 기독교 신학이 3류 무속 점술<占術>로 변질되었습니다.
목사는 이러한 사이비 이단자들의 신상과 비 진리의 내용들을 낱낱이 공개하고, 그것을 신학으로 변증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보존하고 사수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삯군 목자, 양의 탈을 쓴 이리들로부터 하나님의 성도들을 지키고 보호하는 책임과 의무입니다. 그러나 목사들 중에 많은 자들이 신학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아 진리와 비 진리를 구별하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오히려 저들의 오류와 비 진리를 진리로 알고 받아드리며 그들과 연합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목사들이 비 진리자들을 찾아가 그들의 이단 교리를 배우며, 의도적으로 사이비 부흥 강사들을 초청하여 야합하는 가운데 목적적 부흥집회를 합니다. 이러한 목사들의 신학 부재 목회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리가 오류, 왜곡되어 비 진리로 둔갑하였고, 기독교는 3류 무속종교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결과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여 둘이다 구덩이에 빠진다.-마15:14>고 선포하셨습니다. 따라서 신학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소경된 목사들은 자신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리가 보존, 사수, 보전되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하나님께와 전체 기독교 앞에 통회 자복의 회개를 해야 합니다.
C. 하나님 말씀 함부로 수정한 것 회개합시다.
하나님의 말씀은 전지, 전능, 완전, 무결하신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서 일점일획의 하자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의 말미에
<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계22:18-19>
라고 선포하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완전성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은 인류의 시대, 장소, 역사, 문화, 전통, 풍습, 관습, 등등에 전혀 관계없이 동일한 원리로 적용됩니다.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함에 있어서 그러한 것들에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아우르고 다스려야 합니다. 그것들은 모두 부족한 인간들에 의하여 형성된 것으로서 민족에 따라 천차만별이며 또한 시대, 장소, 역사에 따라 수없이 변천하는 것인 반면에 성경은 전지, 전능, 완전, 무결하신 하나님의 것으로서 영원히 완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학 부재의 목사들은 이와 같은 원리를 모르는 반면에, 하나님의 섭리보다 자신의 입장과 자신의 유익에 눈이 어두워지고 양심에 화인 맞아서, <시대적 요구, 문화적 변천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이 다르게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을 임의로, 함부로, 수정, 보완, 추가, 누락, 변경하는 행악을 범하였습니다. 저들의 그러한 악행 중에 대표적인 것이 여자장로, 여자목사를 세우는 것입니다. 여자장로, 여자목사, 제도는 기독교 역사상 전례가 없을 뿐만 아니라 성경은 분명히 그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학을 모르는 저들은 <시대적 요구, 문화적 변천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이 다르게 해석되어야 한다.>는 주장 하에 성경을 마음대로 해석하고 함부로 조작하여 그 제도를 합법화시키는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이 제도는 기독교 장로회라는 이단 종파와, 감리교, 순복음 교회 등등에서 시행해 왔으나, 장로교를 비롯한 전통적 개혁주의 교회에서는 기독교 역사상 전례가 없을 뿐만 아니라 성경에도 분명히 그것을 금지하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시행하지 않던 제도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오히려 그것이 성경적이며 하나님의 섭리라고 주장하면서 그 제도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저들의 이러한 악행에는 두 가지 사연이 있습니다. 하나는 신학을 모르는 무지로 인하여 그것이 성경적인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이며, 다른 또 하나는 여자 장로를 세워야 교회 재정에 유익이 되고 여자 목사를 세워야 신학교 재정에 유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자장로, 여자목사 문제는 제자훈련교재에서 충분히 정립하였으므로 그것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목사들이 성경을 함부로 임의로 뜯어 고친 또 하나의 대표적인 사례는 목사의 <매고 푸는 권세>와 <축복권과 저주권>에 대한 주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교회 설립의 원리와 목사들의 사역 원리를 다음과 같이 선포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 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마16:18-19>
이 말씀에는 두 가지의 신학이 정립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교회설립의 원리이고 다른 하나는 목회자들의 사역원리 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이 말씀을 통하여 먼저 베드로가 한 것과 같은 차원의 신앙고백 위에 교회가 설립된다는 것을 선포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두 번째로 복음 전파자들에 대한 목회사역 원리를 선포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복음 전파자들에 대한 엄중하고 무서운 경고였습니다. 즉, 천국에 입국하는 원리<열쇠>인 복음을 맡은 자들이 땅에서<복음전파 사역 현장에서> 복음을 전파하지 않거나 또는 마음대로 오류, 변경 하면<매면>, 그가 하나님께 그것에 대한 징계를 받을 것이요<매일 것이요>, 복음을 맡은 자들이 땅에서<복음전파 사역 현장에서> 복음을 열심히 그리고 바로 전파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에 대한 상급을 주신다는 엄중한 경고의 말씀인 것입니다.
로마 카토릭은 이 말씀을 교묘하게 왜곡하여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좌정시킨 뒤, 로마의 감독들을 베드로의 후계자로 만들어 역대 교황으로 계승시켰습니다. 그리고 교황의 절대권위를 세우기 위하여 베드로에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권세<열쇠>를 부여하였고, 그 권세가 역대 교황들에게 계승된다고 조작하였습니다. 그것은 명백한 오류였고 사기극이었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배운 사람이라면 이러한 로마 카토릭의 악행을 분명하게 압니다. 따라서 목사들은 그것을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목사들의 권위 신장에 혈안이 된 목사들은 오히려 로마 카토릭의 악행을 그대로 답습하였습니다. 저들은 목사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입국권과 거부권, 즉 <매고 푸는 권세>가 있는 것처럼 주장하였고, 한술 더 떠서 목사들에게 <축복권과 저주권>이 있어서 목사가 축복하는 대로 축복받고, 목사가 저주하면 저주가 내려진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저들의 주장은 분명한 사기요 공갈이며 협박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신학 부재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목사들의 권위를 하나님의 보좌에까지 올려놓으려는 교만한 악행입니다.
<매고 푸는 권세, 축복권과 저주권에 대한 문제는 제자훈련 교재에서 충분히 정립하였으므로 그것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목사들이 성경을 교묘히 적용하여 자신들의 권위를 세우는 또 하나의 사례는, 목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 3직인 <대제사장직-선지자직-왕직>이 위임되었다는 것과, 목사는 하나님을 대표하는 <하나님의 사자>로서 성도들을 위하여 <중보기도>하는 <하나님의 종>이라는 주장입니다. 이와 같은 주장은 성경에 전혀 없는 것이며, 로마 카토릭도 만들어 내지 못한 차원 높은 사기입니다. 저들은 목사의 권위를 드디어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적 보좌로 만들은 것입니다. 저들은 이러한 주장을 근거로 하여 목사는 어떠한 경우에도 성도들에게 탄핵받을 수 없으며 목사를 탄핵하는 자들은 이유 불문하고 하나님께 징계 받는다고 주장합니다. 저들은 이러한 악행을 합법화하기 위하여 <모세의 잘못을 탄핵한 미리암의 징계-민11장>를 근거로 제시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 역시 신학적 무지이며 명백한 사기, 공갈, 협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선지자 직-왕 직>이 목사들에게 위임되었다는 주장은 성경 어디에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메시야로서의 3직이기 때문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주어진 직분이며, 따라서 목사는 그러한 직무를 행사할 능력도 자격도 전혀 성립되지 않는 것입니다.
목사가 <하나님의 사자>로서 성도들을 위하여 <중보기도>한다는 주장도 사기이며 거짓입니다. 목사는 결코 <하나님의 사자>가 아니며, <중보기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오직 유일한 중보자인 예수 그리스도만 할 수 있는 고유적 권능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들이 이러한 주장들을 용감하게 하는 것은 저들이 심히 무식하기 때문입니다. 목사들은 하나님의 전권대사<全權大使>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을 섬기고 돌보는 사명을 위하여 세워진 <섬김의 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와 같은 원리를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면서 가르치셨습니다.<요13장>
<이에 관한 문제들은 제자훈련 교재에서 충분히 정립하였으므로 그것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저희 하나님의 작은 종들은 목사들의 이러한 과오들을 바라보면서 슬픔과 그들에 대한 연민의 정을 함께 토로합니다. 도대체 이 다음에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얼마나 심한 책망과 책벌을 받으려고 저토록 용감하고 저토록 망령된 행악을 하는 것일까요 성경은 이와 같은 행악자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선포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 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2-23>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13:39-42>
목사들의 회개는 한국 기독교 개혁을 위해서도 필연적이지만 본인 자신들을 위해서도 필연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영원히 하나님의 나라에서 복락을 누릴 수 있는 길입니다. 현세의 일시적인 권위와 권세와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하여 영원무궁의 하나님 나라를 버리시렵니까? 목사들이여 회개합시다.
D. 비 진리자들의 범람 방관한 것을 회개합시다.
하나님께서 교회 위에 종들을 세우신 이유 중에 하나는 날로 흉악해져가는 사단의 흉계로부터 하나님의 진리를 보존, 사수, 보전하고, 하나님의 교회와 하나님의 자녀들을 보호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따라서 목사는 자신의 사역현장을 수시로 점검하고 항상 확인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오류, 왜곡, 변질되는 것을 막아야하며, 비 진리자 들을 퇴치시켜야 합니다. 목사들은 사이비 이단자들에 의하여 비 진리가 주장되면 즉시 신학적 회의를 소집하여 그것을 연구 검토하고 그 내용의 비 진리성을 신학적으로 변증하며, 비 진리자 들의 신상을 공개함으로서 하나님의 진리를 보존, 사수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비 진리에 현혹되지 않게 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들이 이러한 사명을 이행하지 않고 비 진리자들의 범람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수수방관하고 있습니다. 사단의 사주 하에 있는 사이비 비 진리자들이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 하나님의 진리를 마구잡이로 훼손, 오류, 왜곡하여 한국 기독교가 뿌리 채 위협을 받고 있건만, 목사들은 전혀 개의치 아니하며 방관하고 있습니다. 목사들은 그러한 일들을 자신과 무관한 일로 생각하거나, 또는 나섰다가 어떤 불이익을 당할까 두려워 몸을 사리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목사들은 사이비 이단들의 비 진리 범람을 통하여 자신이 진리자라는 것을 과시하고 자랑하면서 그러한 사태를 오히려 즐기고 있습니다.
이러한 목사들의 자세는 명백한 직무유기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목사들의 직무유기로 인하여 사이비 비 진리자들의 활동이 더욱 기세를 올리고 있으며,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진리가 오류, 왜곡, 변질되고 있습니다. 목사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께와 교회 앞에 통회 자복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E. 하나님을 잘못 가르친 것을 회개합시다.
목사들이 회개해야 할 이유 중 또 하나는 하나님을 잘못 가르치는 것입니다. 많은 목사들이 하나님을 모릅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섭리를 부분적으로만 알뿐, 하나님께서 얼마나 위대하신 지를 전혀 모릅니다. 목사들 중에 많은 자들이 하나님을 자기와 같은 차원의 성정을 가지신 분으로 오해합니다. 때문에 성경적인 하나님을 가르치지 못하고 하나님을 3류 일반종교의 가공된 신적 존재로 낮추고 변형시켜 가르칩니다. 이러한 목사들의 오류 중에 대표적인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a. 하나님의 주권을 잘못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절대적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타협할 수 없으며, 절충할 수 없는 절대성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주권은 다만 아멘으로 수납하고 순종하며 충성해야 하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오해하여 하나님을 독재자로 생각하고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독선적인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은 인간의 타협과 절충을 용납하지 않으므로 오히려 인간에게 유익이 되고 자비가 됩니다. 인간은 이기주의적이어서 언제나 자신을 먼저 생각합니다. 이러한 이기주의적 사상 때문에 인간의 생각은 최선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에게 위해가 됩니다. <밤새 연구한 결과가 자기 무덤을 팠다>는 속담이 증명하듯이 인간의 사고는 때로는 저급하고 때로는 무지하여 오히려 자신을 고난에 빠트리는 경우가 비일비재<非一非再>합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그러한 점까지 모두 감안하시어 인간에게 최고 최상의 유익을 하사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전지전능 완전무결하신 절대 주권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많은 사람들이 죄와 선악과 문제,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관한 문제로 인하여 하나님의 주권을 오해합니다. 저들은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세우신 이유와, 누구는 구원하고 누구는 구원하지 않은 점에 대하여 의문과 이의를 제기합니다. 이러한 의문과 이의 제기는 기독교 역사에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그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17세기에 일어났던 네델란드 자유주의 신학자 알미니우스의 <예지 예정론입니다.> 예지 예정론은 현재 침례교파를 비롯한 일부 교파에서 여전히 신봉하지만 당시에 종교회의를 통하여 이단으로 정죄되고 퇴출된 비 진리입니다.
<이 문제는 제자훈련 교재에 상세하게 정리하였으므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학원리를 모르는 목사들이 하나님의 주권을 잘못 이해하여 하나님을 일반 종교의 가공된 잡신과 같은 존재로 가르칩니다. 저들은 토기장이의 비유를 곡해하여 성도들은 하나님의 절대성에 다만 이의 없이 순종해야 하는 숙명적인 존재로 가르칩니다. 저들은 토기장이의 비유 속에 나타나는 토기장이<하나님>의 토기<성도>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자비와 긍휼과 사랑을 모르는 것입니다.
b. 하나님의 속성을 잘못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은 능력적 속성에 있어서는 전지, 전능, 완전, 무결, 자존, 영원, 불변, 무한, 공의하신 분이시며, 상태 적 속성으로는 거룩, 온유, 자비, 긍휼, 사랑의 원형이십니다. 이러하신 하나님의 속성 중에 가장 대표적인 속성은 온유, 자비, 긍휼,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온유, 자비, 긍휼, 사랑은 하나님의 절대적 공의까지도 초월하고 우선합니다. 성경은 그것을 <허다한 죄를 덮는다 -약5:20-벧전4:8>로 선포합니다.
우리가 원죄는 물론이요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일상 죄까지 용서함 받은 근거가 바로 하나님의 온유, 자비, 긍휼, 사랑이며, 하나님나라 백성,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이 된 것도 모두 하나님의 온유, 자비, 긍휼, 사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는 목사들이 온유, 자비, 긍휼, 사랑의 하나님을 공의, 책망, 징계, 심판의 하나님으로 가르치는가 하면, 심지어는 자녀들을 저주하는 하나님으로까지 가르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때로는 자녀들에게 책망과 징계를 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녀들의 유익을 위한 교육적, 교훈적 차원의 책망과 징계일 뿐, 노여움에 의한 보복적, 심판적 책망과 징계가 아닙니다. 특히 하나님께 저주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분상 속성상 저주를 하실 수 없는 분이시며, 하시지 않는 분이십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저주는 교육적, 교훈적 차원의 책망과 징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학을 모르는 목사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하여 하나님의 책망과 징계를 보복, 심판, 저주로 가르칩니다. 뿐만 아니라 저들은 성도들이 목사에게 순종하지 않거나, 목사에게 충성 봉사하지 않거나, 목사를 지극정성으로 섬기고 대접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시어 책망하시고, 보복하시고, 저주하신다고 가르치어, 하나님을 무서운 하나님, 공포의 하나님으로 가르칩니다.
c. 하나님의 섭리를 잘못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 전체에 대한 섭리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섭리는 현존하는 다양한 영역 전체에 대한 섭리입니다. 해, 달, 별, 등등의 우주 전체와, 산, 바다, 강, 광야 등등의 지구 전체와, 정치, 경제, 종교, 군사, 교육, 문화, 예술, 과학, 스포츠 등등, 국가적, 사회적, 민족적, 영역 전체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하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 세계 전체에 대한 섭리 역사를 인간을 통하여 진행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하라-정복하고 다스리라-창1:28>고 명령하신 것은 하나님의 피조 세계 전체에 대한 운영이 인간에 의하여 주도된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때에 인간이라 함은 곧 기독교를 말하는 것입니다. 최초의 인간인 아담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최초의 목회자이며, 그가 시무하는 교회는 에덴교회였습니다. 반면에 하나님 섭리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 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5:13-16>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1-33>
따라서 기독교는 빛과 소금의 전사들을 교육하고 양육하여 하나님의 피조 세계 전체 영역을 이끌어가는 주역들로 배출하며, 그들의 신학적, 신앙적, 사명적, 인격적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세워지고,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학을 모르는 목사들은 기독교에 주어진 사명을 함부로 제한하고 임의로 축소함으로서, 결국은 하나님의 우주적인 섭리를 제한, 축소하였습니다.
가. 하나님의 섭리를 인류 구원으로 제한하였습니다.
목사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오직 인류 구원으로 제한하였습니다. 저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정치는 정치가에게, 교육은 교육자에게, 경제는 경제인에게 맡기고 기독교는 오직 복음 전파에만 전념해야 한다.>
이와 같은 주장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한국 기독교를 극심하게 탄압할 때에 미국, 호주, 카나다, 등등의 선교사들이 그들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기 위하여 시행한 정치와 종교의 분리정책이었습니다. 당시에 교회가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독립하기 위하여 독립군들을 지원하고, 기미년 3월 만세사건과 신사 참배 반대 운동 등등에 전념하자 일본이 교회를 극심하게 탄압하였고, 이에 선교사들이 교회를 보호하기 위하여 그러한 선교정책을 시행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사명은 복음 전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 세계 전체를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직접적으로 국가, 민족, 사회 등등의 전 영역을 물리적으로 정복하고 다스린다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가 빛과 소금의 전사들을 교육하고 양육하여 그들로 하여금 국가, 민족, 사회 등등의 전 영역을 이끌어가게 함으로서 그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섭리대로 운영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지한 목사들은 이러한 기독교의 사명을 모르기 때문에 기독교의 사명은 오직 복음 전파인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목사들의 이러한 무지는 기독교의 사업을 교회적인 것으로 제한하고 축소시키는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목사들은 교회가 성장하면 교회건축, 교육관 건축, 기도원, 수양관 건립, 교회 묘지 구입, 등등 오직 교회적인 사업에만 전심전력한 것입니다. 교회 밖에는 <청소년 가장, 독거노인> 등등 돌아보아야 할 이웃들이 산재해 있으며, <애국애족 차원의 국가관 민족관> <윤리, 도덕, 준법차원의 사회관 가족관> 등등, 일반 교육기관들이 담당하기엔 너무나 벅찬 각 분야적 정신교육이 기독교를 기다리고 있건만, 목사들은 그것들을 전혀 외면하였습니다. 때문에 기독교는 국가적, 민족적, 사회적 지도자가 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행하지 못함으로서 기독교 본연의 위대하고 찬란한 영광의 권위를 스스로 저버리고 3류 일반 종교영역으로 주저앉았습니다.
나.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이원론<二元論>적으로 격리시켰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세계는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한 하나님 섭리 역사의 시간적 공간적 무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창조하시면서 심히 기뻐하셨고 창조 사역을 마치신 후에는 그것들에게 강복하신 후 스스로 만족하시고 자축하셨으며, 안식하시면서 그날을 더욱 복되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모든 창조 세계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모두가 아름답고 거룩합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모든 창조 세계가 징계 받아 원래의 상태보다 현저하게 저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창조 영역은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한 섭리 역사의 무대라는 이유에서 여전히 그리고 당연히 아름답고 거룩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신학 원리를 알지 못한 기독교 지도자들은 구약시대, 로마 카토릭 시대는 물론이요 현대 개혁주의 기독교 시대에 이르도록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거룩한 곳과 속된 곳으로 이원화<二元化>시켰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거룩한 곳인 반면에, 교회 밖은 세속적인 곳으로서 악하고 더럽고 추한 곳으로 구분하였던 것입니다. 저들은 이러한 구분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시면서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마21:12>에 의한 것이라 주장하지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곡해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은, 교회 안은 거룩하고 교회 밖은 악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예배와 기도에 전념해야 하는 교회 안에서 각종 상업행위를 하는 악함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교회 안과 밖을 이원화한 것은 고대 헬라 철학사상과 3류 일반종교의 개념을 도입한 것입니다. 고대 헬라 철학자들은 신<神>은 선한 반면에 물질은 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개념은 대부분의 일반 종교에서도 교리로 정립되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마니교>의 교리이며 불교에서도 세상은 속된 것이라 하여 세상을 떠나 승려가 되는 것을 <속세>를 떠나는 것, <출가>하는 것, 등등으로 표현합니다. 어떤 장소가 거룩하냐? 또는 악하냐? 하는 것은 장소적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행위에 따라 구분됩니다. 비록 교회라 할지라도 그곳에서 악하고 더럽고 추잡한 행위가 진행된다면, 그곳은 당연히 악하고 더럽고 추잡한 곳입니다. 반면에 어떤 장소에서 선하고 아름답고 거룩한 행위가 진행된다면, 그곳은 현재적으로 거룩한 곳입니다.
저들은 또한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시간적으로 이원화시켰습니다. <주일>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하나님의 날로서 거룩하고, 주일 이외의 다른 날은 사람의 날로서 속된 날로 구분한 것입니다. 때문에 저들은 주일날 오전 예배를 시작할 때에 <엿새 동안 악하고 추한 세상에 살다가 거룩하고 복된 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의 성전에 나와....>라고 기도하며, 저녁 예배를 마칠 때에 <거룩하고 복된 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에서 하루를 보내다가 다시 악하고 추한 세상으로 돌아가 엿새 동안 속된 삶을 살게 되오니......>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장소와 마찬가지로 어떤 시간이 거룩하냐? 또는 악하냐? 하는 것은 시간적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에 진행되는 행위에 따라 구분됩니다. 어떤 시간에 거룩하고 이름다운 행위가 진행되면 그 시간은 당연히 거룩하고 아름다운 시간이 되며, 어떤 시간에 악하고 추한 행위가 진행되면 그 시간은 당연히 악하고 추한 시간이 됩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장소 모든 시간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로서 하나님의 것입니다. 주일만 하나님의 날이어서 거룩하고 주일 이외의 날은 사람의 날 또는 사단의 날이라 악하고 추한 것이 아니며, 교회만 하나님의 집으로서 거룩하고 교회 밖은 사람의 영역 또는 사단의 영역이라 속된 것이 아닙니다. 그 모두는 본래 하나님의 창조 세계이며,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시간이요 영역입니다. 문제는 그 시간과 영역들을 인간들이 악하고 추하게 하는 것이지, 그 시간과 영역 자체가 악하고 추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목사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섭리를 잘못 가르쳐 성도들로 하여금 비 진리에 거하게 하고 기독교를 3류 일반종교로 전락시킨 과오를 통회 자복해야 합니다.
② 신앙적 차원에서 회개합시다.
목사의 신앙은 곧 성도 신앙의 표본입니다. 목사의 신앙은 성도들의 신앙으로 직결됩니다. 성도들은 목사들의 신앙을 보고 배우고 따르며, 신앙을 형성합니다. 따라서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는 신앙을 정립해야 하며, 신학이 요구하는 신앙의 9가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목사는 특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천 신학적으로 교육하셨던 신앙적 삶을 살고, 그것을 성도들에게 전수해야 합니다. 한국 기독교에는 이와 같은 신앙을 정립하시고 그 신앙에 입각한 실천 신학적 삶을 사시는 목사님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그와 같은 목사님들보다는 그 반대의 목사들이 더 많은 듯 합니다. 작은 종들은 이 문제에 있어서<휼륭한 목사님들은 항상 겸손하시고 검소하시며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자랑하시거나 과시하시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외면상으로 나타나지 않고, 비난받고 탄핵받아 마땅한 목사들이 오히려 부끄러운 줄 모르고 자신들을 나타내고 자랑하기 때문에, 미꾸라지 한 마리가 강물 전체를 흐려놓듯이 몇몇 안 되는 목사들 때문에 훌륭하신 목사님들까지 도매 값으로 싸잡아 비난받고 탄핵받는 것이다.>
라는 소망을 가져 봅니다. 그러나 작은 종들이 지금까지 보고 겪은 목사들 중에 비난받고 탄핵받아 마땅한 목사들이 너무나 많다는 생각을 하면, 그러한 소망이 부질없는 것이라는 개념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작은 종들은, 목사님들은 많은 반면에 목사들은 몇 명 안 될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그, 일부 몇 명 안 되는 목사들에게 함께 회개하자고 호소합니다.
A. 현세적 신앙 회개합시다.
현세는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위한 하나님 섭리 역사의 무대로서 매우 귀중합니다. 현세는 또한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종들이 장차 하나님의 백보좌 심판 때에 상급과 면류관을 받기 위한 시간적 기회요 장소적 영역이기에, 기독교인들 모두에게 소중하고 귀중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현세를 중시하지만 현세에 연연하거나 집착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신체는 현세에 살지만 영혼은 이미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을 삽니다. 특히 목사는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목사가 그러한 신앙적 삶을 살아야 성도들이 목사의 삶을 본받아 그러한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목사들이 하나님 나라적인 신앙적 삶을 살지 않고 현세위주의 신앙적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저들은 먹고 마시는 일에 매우 연연하며, 현세적 명예, 부귀, 영화, 권세, 권력, 등등에 심취하여 그것들을 쟁취하기 위해 온갖 불법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어떤 목사는 나이가 80세가 넘었는데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더 살아야 한다고 온갖 보약을 챙겨 먹으며 살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어떤 목사는 동료 목사들의 장례식에 참석할 때마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인생의 허무함을 호소합니다. 이러한 목사들의 신앙을 보면서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갖습니다. 그리고 목사의 신앙을 따라서 함께 비 진리적 삶을 살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목사가 그토록 죽음을 두려워하고 현세에 집착하는 것을 보면서 <과연 하나님 나라가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되며, 목사들의 신앙에 전염되고 오염되어 그러한 비기독교적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행태들은 사명적 으로 명백한 직무유기일 뿐만 아니라 상태적 으로 매우 불쌍하고 가련합니다. 목사가 현세에 집착한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없다는 것이며,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전혀 모른다거나 아니면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목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목사들은 사실상 회개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모르거나 거부하는 자는 목사 아닙니다. 따라서 이제 더 이상 하나님과 기독교를 모욕하지 말고 퇴출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작은 종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에게 회개할 것을 호소합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자녀라고 전제할 때에, 그들이 돌아오기를 가슴조리시며 기다리시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사랑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B. 기복적 신앙 회개합시다.
기독교는 하나님께 최고, 최상, 최대의 복을 받았습니다. 질병, 늙음, 이별, 죽음이 없는 무한 복락의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무궁토록 사는 복보다 더 큰 복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 위에 상급과 면류관의 복을 더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현세를 사는 동안에도 자애로운 아버지로서 자녀에 대한 사랑으로 모든 것을 챙겨주시고 보살펴 주십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복을 받아야 하는 자들이 아니라, 이미 받은 복을 누리는 자들이며, 약속된 복을 누릴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강복을 원하고 요청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그 크신 자비와 긍휼과 사랑과 은혜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기독교는 더 이상의 복을 원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세우는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하나님의 강복을 외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모독하는 목사들이 있습니다. 저들은 기독교의 본질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주장하면서 <삼박자 축복> <영통, 물통, 만사형통> 등등의 3류 종교적 신앙을 강조합니다. 저들은 심지어 현세의 삶의 척도가 하나님 나라에서의 생활수준이 된다고 가르치는가 하면, 담임 목사가 하나님께 복 받아 부귀영화를 누리면 성도들도 하나님께 복 받아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주장하면서 성도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열심히 섬기고 대접하게 하여 풍요로운 삶을 즐기고 누립니다. 그리고 작은 교회, 빈곤한 교회, 목사의 생활이 어려운 교회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없으므로 그러한 교회에 다니면 안 되며, 큰 교회, 재정이 넉넉한 교회, 목사가 풍족하게 잘사는 교회에 다녀야 하나님께 복 받는다고 주장합니다.
목사들이여! 성경 어디에 그와 같은 말씀이 있던가요? 그리고 그렇다면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으셨던-마8:20>, 그리하여 빈들이 숙소였고 광야가 식탁이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교회는 어찌되는가요?
염치를 모르는 목사들이여! 부끄러움을 모르는 목사들이여! 하나님의 심판대에 섰을 때 하나님의 준엄하신 책망을 무엇으로 어떻게 감수하려고 그와 같은 망령된 주장을 하십니까? 더 이상 행악에 머무르지 말고 이제 그만 하나님께 통회 자복하고 하나님의 진리로 복귀합시다.
C. 신비주의적 신앙 회개합시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어떤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때, 인간의 상식과 지식을 초월하는 경이롭고 신비한 방법을 사용하시어 성도들의 비상사태를 해결하십니다. 사람들은 그러한 경우를 기적, 이적 등등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적이나 이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며, 신학은 그것을 하나님의 비상 섭리라고 정의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상섭리는 지극히 드물고 하나님께서는 대부분 현존하는 모든 질서를 통하여 역사를 진행하십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 역사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과학적이어서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를 모르는 목사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오류, 왜곡하여 각종 신비주의적인 신앙 형태를 조성합니다.
a. 하나님의 질서를 무시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 사회의 모든 영역을 주관하시어 그 영역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게 하십니다. 이와 같은 원리에서 정치, 경제, 군사, 교육, 문화, 과학, 의학, 예술, 스포츠 등등, 인류 세계에 현존하는 모든 영역들은 각자에게 주어진 분야에서 각자에게 부여된 능력을 계발하고 발전시키어 하나님의 섭리에 충성, 봉사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원리를 모르는 무지한 목사들은 그러한 모든 영역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 질서를 거부합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사례가 질병에 대한 것입니다. 목사들 중에 참으로 어리석은 자들은 질병이 발생했을 때, 믿음으로, 기도로, 질병을 고쳐야한다고 생각하여, 병원, 약국, 의사, 약사, 등등을 찾지 않고 엎드려 기도하는가 하면, 안수, 안찰 등등을 통하여 질병을 고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와중에서 각종 불미스러운 일들이 발생합니다. 어떤 목사는 맹장염이 발생했는데 <목사가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고 병원을 간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고집하며 기도만 하다가 결국은 맹장이 터져 사망할 뻔하였습니다. 또 어떤 기도원에서는 정신질환자를 귀신들렸다 하여 안찰로 귀신을 퇴치하겠다고 그를 집단적으로 구타하여 사망시켰습니다. 기도하여 치료할 수 있는 질병이 있고, 의사나 약을 통하여 치료할 수 있는 질병이 있습니다. 그리고 병원, 약국, 의사, 약사, 등등은 모두 하나님의 섭리적 도구들이며 방편들입니다. 믿음과 기도로만 질병을 고치려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무시하는 어리석음이요 악행입니다.
b. 신비주의에 전념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섭리 역사를 말씀<성경-신학>에 정립하셨습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언제나 그리고 모든 것을 말씀으로 진행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임재하시고 말씀으로 계시하시고 말씀으로 명령하십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신상에 특별한 비상사태가 발생할 때에 꿈, 환청, 환상, 등등을 통하여 위험을 예고하시어 성도들로 하여금 대비하게 하십니다. 기독교 신학은 그것을 <하나님의 비상섭리>라고 정립합니다. 이때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계시하시는 꿈, 환청, 환상, 등등은 일상적인 것들과는 구별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말씀과 동행하시기 때문에 이때의 계시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며 조화를 이룹니다. 따라서 말씀을 아는 자들은 그러한 것들이 보통의 일상적인 것인가? 또는 하나님의 비상 섭리에 의한 계시인가를 구별하게 됩니다. 성경은 그것을 <영분별 은사 또는 영분별 능력>이라고 선포합니다.
한편, 말씀이 정립되지 않은 목사들은 모든 것을 말씀 속에서 구하지 않고 꿈, 환청, 환상, 등등을 통하여 구합니다. 때문에 저들은 말씀을 열심히 연구하지 않고 그 대신 기도를 통하여 무엇을 보고 느끼고 깨달으려 합니다. 이러한 자들은 <능력봉> <능력천> 등등을 찾아다니며 기도를 통하여 계시능력을 받으려 합니다.
사단은 이와 같은 자들을 목표로 하여 역사를 전개합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방법을 흉내 내어 같은 방법으로 저들을 미혹합니다. 그러나 사단의 흉내 내기는 한계가 있고 말씀과 일치되지 않기 때문에, 말씀을 아는 자들은 그것이 사단의 흉계인 것을 구별하게 됩니다. 때문에 저들은 사단의 미혹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씀에 무지한 목사들은 <영분별 은사 또는 영분별 능력>이 없기 때문에 사단의 역사를 하나님의 계시인 것으로 착각하여 비 진리에 빠집니다. 그리하여 전혀 비기독교적인 주장과 행동을 합니다.
c. 일상의 모든 것에 영적인 의미를 부여하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의 삶이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 있으나,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기독교인들의 삶도 일반인들의 삶과 동일합니다. 성도들의 삶에도 먹고 자고 일하는 등등의 일상적인 생활이나, 질병, 사고, 등등의 일상적인 일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에는 무지한 반면, 신비주의적인 것에 심취해 있는 목사들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일상적인 것들에도 무조건 영<靈>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하나님의 섭리라고 주장하면서 매우 엉뚱한 사건을 만들어냅니다. 저들은 성도들의 부주의로 일어난 작은 사고들에도 특별한 영적 의미를 부여하여 그들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사례가 <사명자>에 대한 문제입니다. <기도하는 자>를 자처하는 목사들이나 기도원을 운영하는 자들 중에 많은 자들은 경제적 공황이나, 또는 본인의 실수로 사업에 실패한 성도들이나, 또는 특별한 사고나 질병을 얻어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이 상담을 요청할 때에, 그들의 고난과 사고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사명자>의 길을 가게 하시려는 의도적인 섭리라고 주장합니다. 그들로부터 사명자라는 말을 들은 성도들은 그 말을 믿고 신학교에 입학하여 사명자로서의 길을 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 진정한 사명자는 사실은 별로 없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신학생들의 정신상태와 사명감과 신앙상태를 통하여서도 입증되지만,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 길을 가는 이들 중에 진정한 사명자가 별로 많지 않고 사이비 이단자. 비 진리자들이 오히려 더욱 많은 현실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일상적인 일들에 영적인 의미를 함부로 부여하는 목사들 때문에 <사이비 사명자>들이 대거 속출하며, 성도들과 교회가 혼란에 빠지거나 또는 비 진리적 신앙에 빠져 큰 홍역을 앓게 됩니다. 이러한 사태는 저들에게 진리를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반면에, 신비주의적인 개념이 있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진리를 분별할 영적 능력은 말씀에서 비롯되어집니다. 결국 저들의 그러한 무분별은 저들에게 말씀이 전혀 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따라서 저들은 당연히 말씀 부재와 신비주의적 신앙에 대한 자숙과 회개를 병행해야 합니다.
d. 일상의 모든 것에 사단을 결부시켰습니다.
위에 소개한 것과는 반대로 일상적인 것들을 사단의 시험이라고 주장하여 문제를 일으키는 목사들이 있습니다. 저들은 지극히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일들을 사단의 시험으로 몰아붙이어 대단한 사건으로 크게 부각시킵니다. 이러한 목사들 때문에 성도들과 교회가 혼란에 빠지거나 또는 비 진리적 신앙에 빠져 큰 홍역을 앓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외면하고 신비주의에 빠져 하나님의 섭리를 왜곡하고 오류하는 목사들이여 회개합시다. 그대들로 인하여 성도들이 피해를 당하며, 교회가 비 진리에 빠져 병들었습니다.
③ 사명적 차원에서 회개합시다.
기독교는 일반종교와는 전혀 비교할 수 없는 수준과 차원의 형이상학적 진리 체계 하에서 모든 것을 진행합니다. 기독교는 이러한 진리를 하나님의 말씀<성경-신학>이라고 선포하며, 나아가 그것을 <로고스 신학>이라고 정의합니다.
일반 종교들은 모두 한결같이 인간의 길흉화복<吉凶禍福>에 매달리는 반면에, 기독교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고<세우고>,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는<세우는> 역사를 전개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사회적, 민족적, 국가적, 영역을 포함하여 현존하는 모든 영역을 정복하고 다스리고 관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역사는 목사의 진두지휘 하에 진행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진리를 모르는 목사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차원 높은 사명이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목사로서의 임무를 바로 이행하지 못하고, 3류 무속종교의 무당들과 같은 짓들을 하고 있습니다. 저들이 하는 어이없는 짓들을 모두 다 열거하려면 너무 많기에 그중에 대표적인 몇 가지를 지적하면서 회개할 것을 호소합니다.
A. 체험주의적 신앙 조성한 것을 회개합시다.
이미 앞에서 여러 번 말씀드렸듯이 기독교는 말씀<성경-신학>으로 모든 것을 진행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임재하시고,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고, 알고, 믿으며, 말씀을 통하여 자신들이 구원받았음을 또한 보고, 알고, 믿으며,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고, 알고,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차원 높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성도들 중에는 성격 때문에 체험을 해야 비로소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는 자들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하여 다양한 신앙적 체험을 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진리를 모르는 목사들은 성도들로 하여금 말씀 안에서 모든 것을 보고, 알고, 깨닫고, 믿는 신앙을 정립하게 하지 않고 체험을 통하여 모든 것을 확인하고 정립하게 하였습니다. 특히 저들은 이미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 속에 있는 성도들에게 <성령 받아야한다>고 강조하면서, 방언 받는 것이 곧 성령 받는 것이라는 해괴한 주장을 하여 방언을 하지 않는 성도들은 자신이 성령을 받지 못한 것으로 알아 좌절하고 낙심하게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방언 못하는 목사는 목사도 아니라는 개념이 형성되어, 방언 못하는 목사들이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방언받기 위하여 동분서주하였고, 이러한 틈을 노려 사이비 이단자들이 방언 학교를 개설하여 방언을 가르치고 전수하는가 하면, 심지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언 못하는 목사들은 거짓 방언까지 하는 해괴 망칙한 일들이 도처에서 벌어졌습니다. 체험 없는 성도들은 성령을 받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어리석고 무식한 목사들이여 기독교가 체험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안에 거하는 3류 무속종교입니까? 그렇다면 체험 없이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모든 것을 보고, 알고, 깨닫고, 믿는 차원 높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성도가 아니라는 말입니까?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가 아니며, 체험 없는 성도들은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 속에 있는 자들이 아니겠군요? 어리석고 무식한 목사들이여 회개하십시오! 그대들의 어리석고 무식함 때문에 하나님의 계시<성경-신학>이 불신되었고,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거부되었으며, 차원 높은 성도들의 신앙이 오히려 무시되고 모욕 당했습니다
B. 은사위주 신앙 조성한 것을 회개합시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유익과 섭리 역사의 진행을 위하여 종들에게 다양한 은사와 능력을 부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은사는 매우 다양하나 그중에 대표적인 은사를 성경은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고전12:6-11>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
성경이 증거하고 선포하는 바에 의하면, 모든 은사 중에 사랑의 은사가 가장 최고의 은사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모든 섭리 역사가 사랑에 근거하며, 사랑으로 진행되며, 사랑으로 결과되는 원리와 일치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원리를 모르는 어리석고 무지한 목사들은, 병 고치는 은사와 귀신 쫓는 은사와 예언하는 은사를 가장 최고의 은사라고 주장하면서, 그러한 은사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부흥회의 주제는 한결같이 <병 고치는 은사, 귀신 쫓는 은사, 예언하는 은사>였고, 이러한 와중에 기독교 내에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러한 은사자 들이 높이 평가되는 반면에, 그러한 은사가 없는 목사들이 무시당하고 배척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목사들이 그러한 은사를 받기 위하여 노력하는 가운데 금식기도가 성행하였고, 그 틈을 노려 사이비 이단들이 병 고치는 은사, 귀신 쫓는 은사, 예언의 은사를 가르치고 전수하는 학교를 설립하여 문전성시를 이루는 사기 행각을 벌이기도 하였습니다. 저들은 특히 예언의 은사를 오해하여 그것이 마치 무당들이 말하는 미래에 대한 예언인 줄로 착각함으로서, 기독교 내에 무수한 무당들을 확산시켰습니다. 도처에 소위 <기도하는 사람>들이 활개를 쳤고 성도들은 자신의 미래를 알기 위하여 그들을 찾아 다녔습니다. 이 무렵부터 예언을 전문으로 하는 기도원들이 우후죽순처럼 난립하였습니다. 저들은 소위 신앙상담이라는 명분 하에 성도들의 미래를 점쳐 주었고, 그러한 과정에서 조상 대대로 전래된 저주까지 등장하면서 저주를 면할 수 있는 기도문<주문>까지 읽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예언은 삼류 무당들의 예언과는 전혀 차원이 다릅니다. 기독교의 예언은 성도들의 미래적 신상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역사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말씀<성경>에 이미 계시된 것을 정확하게 풀어 설명하는 것입니다.
어리석고 무식하고 무책임한 목사들이여 회개합시다. 그대들의 망동으로 인하여 한국 기독교는 3류 무속 종교가 되었고, 무당들의 독무대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만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진심으로 부탁드리오니 정신 좀 차리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복귀하십시오!
C. 하나님의 섭리 무시한 것 회개합시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법과 질서에 의하여 운영됩니다. 교회의 정치운영 원리는 이원적<二元的>인 것으로서, <목회>와 <치리>입니다. 이러한 정치원리는 이미 구약교회 시대 때부터 수립된 것이며, 특히 신약교회 시대에 사도들에 의해서 수립된 것입니다.
사도들은 목회에 전념하기 위하여 집사들을 세워 교회의 치리를 맡겼고<행6장>, 바울은 이러한 정치 원리에 입각하여 교회에 <가르치는 장로와 다스리는 장로>를 세워 <목회와 치리의 이원적 정치>제도를 세웠습니다<딤전5:17>. 따라서 신약 초기 교회들은 장로들에 의하여 운영되었는데, 이때에 가르치는 장로들은 목사의 직무를 행하였고, 다스리는 장로들은 교회를 운영하였습니다. 한때 로마 카토릭이 사제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장로 제도를 유명무실하게 만들었고, 나중에는 아예 폐지하였으나, 개혁주의자들에 의하여 장로 제도가 다시 부활하였습니다. 이때부터 교회는 <목회와 치리의 이원적 정치>를 근거로 하는 <장로들에 의한 의회 민주정치>를 실시하였습니다.
개혁주의 기독교 정치 원리에 의하면 목사들은 예배 인도, 교육, 기도, 성도관리, 등등의 목회 사역에 전념하며, 교회의 치리는 장로들로 구성된 당회에 의하여 진행됩니다. 담임 목사가 교회의 대표로서 당회장이 되지만, 교회 운영은 장로들에 의하여 진행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르는 반면에 권위와 권세는 아는 목사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무시하고, 독재적, 독단적으로 교회를 운영합니다.
현대 한국 기독교에서 당회는 있으나 당회의 기능은 없으며 다만 당회장을 보좌하고 담임 목사의 들러리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법과 질서를 무시하고 거부하는 악행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악행자들은 당연히 하나님과 교회 앞에 통회 자복의 회개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당회의 기능을 살려 장로님들로 하여금 교회를 운영하게 해야 합니다.
D. 하나님의 교회 황폐하게 만든 것 회개합시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목사들의 비 진리와 독재적, 독단적, 전횡으로 인하여 황폐해져 가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목사파 장로파로 분열되어 분규를 거듭하고 있고, 또 어떤 교회에서는 전임 목사파 신임 목사파로 양분되어 조직 깡패들에 관한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해괴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분란에 휩싸일 때에 담임 목사는 누구의 잘잘못에 관계없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비록 그것이 자신과 전혀 무관한 일이라 할지라도, 또는 자신이 관련된 문제이지만 자신의 잘못이 전혀 아니기 때문에 심히 억울하고 분해도, 교회의 평안을 위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이 책임져야 합니다. 만약에 자신이 퇴진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면 당연히 퇴진해야 하며, 이때에 교회의 분열을 막고 교회를 안정시키기 위한 모든 노력을 강구해야 합니다. 그것이 목사의 책임이며 의무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깝게도 목사들은 그렇게 할 줄을 모릅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영광은 안중에 없고, 오직 자신의 명예와 권세와 권위와 유익에만 집착합니다. 때문에 교회는 황폐하고 성도들은 흩어지거나 아니면 고통 속에 신음합니다.
자신의 명예와 권세와 권위와 유익에 집착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황폐케 하는 무책임한 목사들이여 회개합시다. 그대들이 억울하면 얼마나 억울한가요? 빌라도의 법정에 선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억울한가요?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십자가에 달리시고, 침 뱉음 당하고, 강도에게마저 모욕당하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억울한가요? 그대 하나만 희생당하면 교회가 평안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어지지 않는다면, 무슨 일인들 못할까요? 빌라도의 법정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분은 그대를 위하여 그곳에 서셨고, 그곳에 달리셨습니다. 지금 곧 회개 하십시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희생을 더 이상 모독하지 마십시오.
E. 하나님의 교회 분열시킨 것 회개합시다.
이미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목사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특히 교회가 분란에 휩싸여서 분열할 위기에 쳐하면, 목사는 살신성인의 자세로 백의종군하여 그것을 막아야 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깝게도 목사들은 그렇게 할 줄을 모릅니다. 저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권위, 권세, 유익을 위하여 고군분투 하다가 일이 여의치 않아 자신에게 불리하면, 추종 세력들을 규합하여 독립하므로 교회를 분열시킵니다. 이때의 교회 분열은 하나님의 은혜, 기독교의 사랑, 하고는 아무 관계없습니다. 어제의 형제들이 피차에 원수가 되어 핏발선 눈을 부라리며 팔을 걷어붙이고 삿대질을 하며, 입에 담아서는 안 될 험담과 욕설을 하며, 심지어는 멱살을 잡고 주먹을 휘두르며 그렇게 헤어집니다. 도저히 기독교라고 할 수 없는 광경이 연출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면서 많은 성도들이 가슴을 치며 통곡합니다. 그러나 상황을 그렇게까지 몰고 간 목사는 매우 당당하고 의연합니다. 아니 오히려 그러한 상황을 은밀하게 <어떤 자들은 매우 당당하게> 진두지휘합니다. 그리고 독립하여 교회를 설립한 후에 <매우 은혜스럽고? 매우 당당하게?>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립니다. 일반 사회에서도 있을 수 없는, 아니 있어서는 절대 안 되는 악행을 저지르고서도 오히려 승리한 자처럼 의기양양 합니다. 양심에 화인 맞은 목사여 그대는 결코 목사가 아닙니다. 그대는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는 자입니다. 아니 그대는 사단의 괴뢰입니다. 그대는 회개할 가치도 없는 자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은 종들은 그대에게 회개를 호소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하나님께서 심히 안타까운 심정으로 가슴 조리시며 그대의 회개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곧 바로 회개하십시오.
F. 하나님의 교회 무시한 것 회개합시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라는 이유에서 당연히 그리고 필연적으로 존귀하고 거룩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원리를 모르는 목사들이 작은 교회, 농어촌 교회, 미자립 교회들을 무시하고 홀대합니다. 특히 도시의 큰 교회 목사들이 그러한 교회들을 무시하고 홀대하며, 그곳에서 목회하시는 하나님의 종들을 무시하고 홀대합니다. 저들의 이러한 비 진리적 행동은 목회자들의 모임에서 확실하게 들어납니다. 총회나 노회가 소집되었을 때, 도시의 큰 교회 목사들은 개선장군처럼 가슴을 내밀고 어깨를 흔들며 기세 있고 보무당당하게 입장하고, 큰 소리로 떠들며 여기저기 활보합니다. 반면에 작은 교회, 농어촌 교회, 미 자립 교회 목사들은 무슨 죄 지은 자들처럼 조용히 그리고 기세 없이 입장하고, 한쪽 구석에 모여앉아 소곤소곤 대화합니다. 인사하는 모습도 전혀 다릅니다. 작은 교회, 농어촌 교회, 미 자립 교회 목사들은 허리를 굽혀 공손하게 인사하는 반면에, 도시의 큰 교회 목사들은 독일 군 처럼 한손을 높이 들어 인사합니다. 대화할 때도 한쪽은 경어를 쓰고 한쪽은 반말을 합니다. 회의를 진행할 때도, 식사할 때도, 그리고 폐회하여 흩어질 때도, 이러한 양상은 계속됩니다.
이러한 모습은 분명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식과 같은 후배들을 깎듯이 동역자로 예우하여 하나님 종들의 위상을 높였습니다. 모든 교회는 그리고 그곳에서 사역하시는 모든 하나님의 종들은 교회의 규모와 관계없이 동등합니다. 함부로 무시당할 이유 없으며, 홀대 받을 이유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규모를 근거로 하여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종들을 무시하고 홀대한 목사들은 반드시 회개해야 합니다.
G. 하나님의 종들 함부로 대한 것 회개합시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교회들이 하나님의 섭리대로 진군되어지게 하기 위하여 교회에 다양한 직분자 들을 세우셨습니다. 교회의 직분자 들은 모두 하나님을 위하여 세워진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따라서 직분자 들 간에는 직무에 따른 구별과 질서는 있으나 직분간의 우열이나 서열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원리를 모르는 목사들은 교회 직분자 들을 군대 사령관이 부하직원 대하듯 합니다. 명령하고, 지시하고, 그것도 거의 반말로 합니다. 저들은 동역자 목사들을 <부목사> 또는 <부교역자>라고 호칭하며, 자신을 보좌하는 직분자로 대합니다. <부목사-부교역자>라는 명칭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리고 목사 직분에 <부>라는 용어가 추가될 이유 없습니다. 저들이 말하는 <부목사>는 담임 목사 아래의 <부목사-부교역자>로서 담임 목사를 보좌하는 직분자가 아니라 담임 목사와 함께 사역하는 동역자입니다. 바울은 동역자들을 한번도 폄하하여 호칭하거나 대우하지 않았습니다. 동역자 목사를 부하직원으로 대하는 자들이 강도사님, 전도사님들은 어떻게 대하겠습니까? 저들에게 있어서 강도사님, 전도사님들은 아예 개인비서입니다.
저들은 또한 장로님들이 목사를 보좌하는 직분자라고 공공연하게 주장합니다. 본래 장로님들은 목사보다 우선했던 직분자 들입니다. 장로님들은 목사제도가 세워지지 않았던 구약교회 시대 때부터 하나님께 세워졌었고 아직 목사제도가 없었던 신약교회 시대 초기에 교회를 이끌어가던 직분자 들이었습니다. 목사는 장로 직분에서 파생되어 세워진 직분입니다. 교회가 점점 크게 발전하고 성장하여 전문 목회자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을 때, 장로들 중에서 목사를 세웠는데 그때의 목사 직분은 <가르치는 장로>였고, 그 후에 가르치는 장로들을 목사로 세웠습니다. 따라서 최초의 목사들은 장로들 중에서 세워졌고 장로들에 의하여 안수되어 세워진 것입니다.
목사들은 신학교에서 기독교 역사를 배웠기 때문에 이러한 역사적 전례를 당연히 압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들은 목사의 권위를 세우기 위하여 이러한 전례를 외면하고 장로님들을 목사의 보좌관으로 강등시켰으며, 심지어 어떤 목사는 목회에 걸림돌이 된다 하여 아예 장로님들을 세우지 않습니다. 장로님들을 보좌관으로 대하니 집사님들은 어떻게 대하겠습니까? 저들에게 있어서 집사님들은 아예 목사에게 충성하고 순종하는 병졸들입니다.
하나님의 귀한 종들을 함부로 폄하하고 홀대한 목사들은 하나님께와 교회 앞에 엎드려 통회자복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H. 하나님의 자녀 섬기지 않은 것 회개합시다.
목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섬기기 위해 세워진 하나님의 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목사가 섬기는 종이라는 사실을 때때로 가르쳤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면서까지 가르쳤으며, 부활 승천하시기 직전에 베드로를 통하여 <사랑의 목회원리>를 가르치시어 섬김의 목회를 철저하게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목사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섬김을 명령하고 요구합니다. 저들은 아예 <목사를 섬기는 것이 곧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사르밧 과부의 엘리야 대접을 적용하여 목사를 섬기면 하나님께 복 받는다고 주장합니다. 부흥 강사들은 한술 더 떠서 아예 목사에게 양복 사드려라, 차 사드려라, 목회비 드려라, 등등의 구체적인 섬김을 요구합니다.
저들은 교회와 하나님 자녀들을 위하여 목사가 세워진 것을 모르고, 반대로 목사를 위하여 교회가 세워지고 성도들이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섬길 줄은 모르고 대접받기를 즐겨하고 섬김 받기를 좋아하는 어리석은 목사들이여 그대들의 행동이 직무유기라는 것을 아십니까? 그대들은 이다음에 <너희는 이미 자기 상을 받았느니라-마6:2>의 원리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아무것도 받을 것이 없음을 모르십니까? 아니 그보다는 <불법을 행하는 자여 내게서 떠나라-마7:23>의 원리에 의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내침당할 것을 모르십니까? 회개합시다! 지금 곧 회개합시다. 그것이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I.하나님의 말씀 가르치지 않은 것 회개합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 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19-20>
이 명령은 <빛과 소금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라는 명령과 연계됩니다. 따라서 목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그들에게 차원 높은 신학을 정립시켜주고, 그 신학으로부터 비롯되어진 신앙과 인격과 사명적 삶을 살아 그들의 빛과 소금적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선포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목사들은 이러한 사명을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성도들에게 차원 높은 신학을 가르치지 않고, 기복신앙, 체험적 신앙. 목사 섬기는 신앙, 등등의 일반 종교적 관행들만을 열심히 가르치어 성도들을 3류 무속 종교인으로 추락시켰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지 아니한 목사들이여 회개합시다. 그대들의 직무유기로 인하여 성도들이 차원 높은 기독교로부터 추락하여, 신학부재, 신앙부재, 인격부재, 사명부재의 3류 무속 종교인이 되었습니다.
J. 합하여 선을 이루지 않은 것 회개합시다.
현대 한국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대부분의 경우 교회가 성장하면 교회건축, 교육관 건축에 전력하였고, 다음에는 기도원, 수양관 건립을 추진하였으며, 다음으로는 교회묘지, 신학교 설립, 해외 선교에 주력하였습니다. 작은 종은 그러한 기독교의 사업들을 모두 잘못이라고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건축, 교육관 건축은 개교회에 맡겨진 당연한 사업이며, 필연적인 사업입니다. 기도원, 수양관, 신학교, 해외 선교, 등등도 기독교가 마땅히 전개해야 할 필연적인 사업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업들은 사업의 성격이나 규모에 있어서 개교회적으로 진행될 사업이 아니라, 범 기독교적 차원에서 진행해야 할 연합 사업들입니다. 그러한 사업을 범 기독교적 차원에서 연합적으로 했다면, 기도원, 수양관, 신학교, 해외 선교 등등의 사업들이 규모도 방대하였을 것이고 사업도 매우 혁신적이며 진취적인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들이 연합하지 않고 개교회적으로 진행하였기 때문에 모든 것이 구멍가게 수준이 되었고, 사업 자체도 심히 열악하고 조잡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특히 부활의 기독교에서 무엇 때문에 묘지구입 같은 허망한 짓을 합니까? 만약에 기독교가 그러한 사업들을 범 기독교적 차원에서 진행했다면, 한국 기독교는 국가적, 민족적, 사회적 차원의 지도적 위치에 섰을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목사들이 그렇게 하지 못한 이유를 잘 압니다.
한국 기독교는 수많은 교파로 분열되어 있으며, 교파는 또 다시 수많은 교단으로 분열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생각이 다르고 입장이 달라서 연합이 잘 안됩니다. 이와 같은 상황은 기독교가 한국에 전래될 때부터 되어진 상황이라 그것을 현직 목사들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작은 종들은 그에 대한 책임을 현직 목사들이 당연히 져야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비록 한국에 기독교가 전래될 때부터 분파되어 전래되었다 할지라도, 교파와 교단을 초월하여 하나가 되지 못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목사들은 오히려 분파되어 전래된 한국 기독교를 당연히 하나로 연합해야 했습니다. 신학이 다르면 신학자들이 모여서 하나로 통일하면 됩니다. 교회 행정이 다르면 목사들이 모여서 하나로 통일하면 됩니다. 한분 하나님의 섭리 하에 한권의 성경을 사용하는 기독교가 교파마다 신학이 다르고 행정이 다르다는 것은 하나님께 심히 죄송한 일이며, 사회적으로도 종교적으로도 심히 부끄럽고 민망한 일입니다.
이렇게 사분오열된 상황 하에서 어떻게 <기독교는 일반종교와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종교라는 명칭으로 일반 종교와 같은 반열의 예우를 받을 수 없으며, 따라서 오직 기독교라는 명칭으로 예우 받아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한국 기독교가 이와 같은 분열 속에 교파별로, 그리고 또 다시 교단별로 각자 독립하여 존재하는 것은, 모두가 목사들의 무지, 무식, 아집, 욕심, 신학부재, 신앙부재, 인격부재, 사명감 부재 때문입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영광보다 총회장, 노회장, 당회장 등등, 자신의 영광이 더욱 중요하며, 하나님의 섭리보다 담임 목사 자신의 뜻이 더욱 중요하며, 하나님의 기쁨보다 자신의 유익이 더욱 중요한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합하여 선을 이루라고 하시지만 저들은 오히려 합하면 시기하고, 질투하고, 다투고, 싸우고, 그리하여 파국을 이룹니다. 따라서 작은 종들은 그들에게 한국 기독교 분열의 책임을 준엄하게 묻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들은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그리고 교회와 성도들 앞에 엎드려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보다도 교파가 더욱 중요하고 교단이 더욱 중요하고 자신의 권위, 권세, 명예 유익이 더욱 중요한 목사들이여! 그대들은 정녕 누구의 종이며 누구를 위해 세움 받았으며 누구를 위해 일하는가요?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 날에 바깥 어두운 곳으로 내침 받아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됩니다. 회개 하십시오! 지금 곧 회개 하십시오! 그것이 그대가 살길입니다.
K. 하나님 위하여 일하지 않고 자신위하여 일한 것 회개합시다.
목사는 하나님을 위하여 부름 받고 세워진 하나님의 종입니다. 따라서 목사에게 개인적인 사생활은 없습니다. 목사에게는 오직 하나님을 위한 공적 삶 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7>
그러나 목사들은 절대로 그렇게 일하지 않으며 그렇게 살지도 않습니다. 저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위하여 살고 하나님을 위하여 죽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저들은 오직 자신을 위하여 살고 자신을 위하여 일합니다. 저들의 그러한 비 진리적 태도는 저들의 사역현장과 삶의 모습에서 그대로 나타납니다. 저들은 자신의 직분을 이용하여 자신이 하고 싶은 일, 자신이 좋아하는 일, 자신의 명예와 유익을 도모하는 일을 하며 누리고 즐기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뻔뻔하고 가증스러운 목사들이여! 눈 가리고 아웅하는 이중인격자들이여! 그대들의 귀에는<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마23:3>라는 하나님의 책망이 들리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대들의 악행을 모두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성도들도 그대들의 악행을 다 알고 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서시려고 그러십니까? 이제 그만 악행을 중단하고 하나님께 회개 하십시오 그래야 살수 있습니다.
L. 하나님의 영광 가로챈 것 회개합시다.
목사는 하나님의 역사에 사용되는 도구입니다. 목사에게 부여된 권세, 권위, 은사, 능력, 등등은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게 하기 위해 부여된 것이지 자신을 위하여 사용하라고 부여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러한 것들은 목사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며, 그것이 행사될 때에 목사의 위치는 도구일 뿐이며, 그것의 행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수많은 능력을 행사하셨으나 단 한번도 그에 대한 공로를 자신의 것으로 자랑하지 않고 언제나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때문에 사도들 역시 복음 전하는 과정에 일어난 모든 영광을 자신의 것으로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드리게 하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행14:14>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앉은뱅이를 일어서게 했을 때, 사람들이 그들을 신으로 추대하자 심지어 옷을 찢으며 무리 가운데 뛰어들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원리를 모르는 무식하고 어리석은 목사들은, 그것들이 마치 자신의 것인 줄로 착각하여 내세우고 자랑하며 과시하고 군림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할 영광을 자신들이 가로채어 대신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건축가가 집을 지을 때 사용된 연장<도구>들이 자신들이 집을 지었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항상 <목사에게 순종> <목사에게 충성>을 명령하고 강요하면서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할 영광을 가로채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할 순종, 충성, 영광을 가로챈 목사들이여, 도적들이여, 그러고도 하나님의 심판 날에 무사할줄 아십니까? 그대들의 귀에는 <독사의 자식들이여-회칠한 무덤이여-양의 탈을 쓴 이리여>라는 하나님의 준엄하신 책망이 들리지 않습니까? 회개 하십시오! 지금 곧 회개 하십시오!
M. 하나님께 드린 예물 가로챈 것 회개합시다.
하나님께 드려진 예물을 가로채는 목사들이 있습니다. 심방 때 드려진 예물을 목사의 것이라고 주장하며 당당하게 가로채는 자들이 있고, 부흥집회 후 드려진 예물을 뻔뻔하게 나누어 가지는 자들이 있습니다. 또 어떤 자들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사용하라고 헌금한 것을 마치 자신의 용돈으로 착각하여 가로채는 자들이 있습니다. 목사는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자이며,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입니다. 목사의 삶은 이미 그 자체가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공적인 삶이지 개인적인 삶이 아닙니다. 따라서 비록 성도들이 마음대로 사용하라고 주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써야 하는 전제가 필연적으로 적용됩니다. 왜냐하면 목사의 마음은 하나님을 위한 마음이며, 따라서 목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T.V. 라디오 신문 등등을 통하여 보도되는 바에 의하면, 목사들 중에 많은 자들이 수천 억대의 재산을 가지고 있으며, 자녀의 이혼 비용으로 수억을 지불하며, 자녀들에게 수억대의 아파트를 구입해주며, 자녀의 사업자금으로 수백억을 지불하며, 자녀들의 해외 유학비로 수십억을 지불하며, 수십 억대의 별장을 구입한다고 합니다.
목사의 자녀도 하나님의 백성이니까 그들을 보살피는 것도 하나님을 위한 일이 될까요?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으며, 무슨 양심으로 그렇게 하는지 작은 종의 상식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가고 납득이 안 됩니다. 주변에 돌아보아야 할 어려운 이웃들이 산재해있는데, 미자립 교회, 어려운 교회들이 전국 각처에 그토록 많은데, 하나님을 위하여 고군분투하시는 목사님들이 경제적인 고난으로 그렇게 힘들어하시는데, 양심에 화인 맞아 마비되었거나 아니면 하나님을 포기했거나 둘 중에 하나가 아니라면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자들에게 회개하라고 호소하는 것이 오히려 잘못 되었겠지요 그러나 그럼에도 작은 종들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심정으로 그들을 향하여 회개를 호소합니다.
회개 하십시오! 지금 곧 회개 하십시오!
N. 교회 재정 함부로 사용한 것 회개합시다.
교회 재정은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께 드려진 것으로서 액수에 관계없이 귀중하고 소중합니다. 따라서 교회 재정은 오직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집행되어야 하며, 교회의 법과 질서에 따라 집행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목사들이 교회 재정을 마음대로, 그리고 함부로 사용합니다. 저들은 그것을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어떤 목사는 <목사는 교회 재정의 70%를 마음대로 쓸 수 있다>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또 어떤 목사는 <목사가 하나님 일하기 위하여 교회 재정 쓰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 사탄이다>라고까지 주장합니다. 과연 그런가요? 그렇다면 차라리 재정부를 없애고 목사가 재정 관리하는 것이 오히려 정당하겠네요? 아닙니다. 절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교회의 법과 질서에 따라야 하며 교회 재정 집행도 같은 원리에 의하여 시행되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재정을 마음대로 그리고 함부로 사용하는 목사들이여 회개합시다. 목사가 먼저 교회의 법과 질서를 준수해야 성도들에게도 교회의 법과 질서를 준수하라고 가르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목사는 마음대로 멋대로 교회의 법과 질서를 위반하면서 성도들에게만 그것을 요구하는 것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요구는 결코 통용되지 않습니다.
O. 비 진리자들과 동행하고 야합한 것 회개합시다.
진리는 비 진리와 동행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사이비 이단자들의 비 진리와 동행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종들은 사이비 이단자들의 비 진리로부터 기독교의 진리를 사수, 보존, 보전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종들에게 부여된 사명이며, 책임이고 의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목사들이 그러한 선배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비 진리자와 동행하고 야합하고 연합합니다. 비 진리를 남발하는 사이비 이단 부흥강사들과 야합히여 목적적 부흥집회를 개최하고, 성도들을 기만합니다. 총회장 노회장이 되기 위하여 온갖 불법, 탈법, 편법을 행사하는 불의한 자들을 추종하고 비호합니다.
기도원, 신학교, 등등을 통하여 온갖 불의를 행사하면서 자기 유익 챙기기에 혈안이 된 자들을, 추종하고, 비호하며, 동행하고, 야합하고, 연합합니다. 기독교계는 물론이요 사회적으로도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자들이, 각종 기독교 단체의 요직에 앉아 온갖 거드름을 피우고 있는 현실은 그들을 추종하고 비호하는 목사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진정한 하나님의 종이었다면 그러한 사이비 이단자, 비 진리자들을 기독교의 이름으로 추방하고 퇴출시켜야 했건만, 오히려 그들을 상전 받들 듯 받들고 추종하고 비호하였기 때문에 저들이 여전히 오만방자하게 행세하고 군림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근래에 이르러서는 아예 우상숭배자들과 동행하고 야합하고 연합합니다. 천주교가 종교적 교류라는 명목 하에 불교, 원불교 등과 야합하고 연합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들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아니라, 3류 일반 종교와 같이 하늘님을 섬기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천주교는 이미 주후 4-5세기부터 기독교로부터 서서히 이탈하여 교황 중심의 새로운 종교를 형성하였고, 근래에 이르러서는 기독교로부터 완전히 떠났습니다. 따라서 저들의 그러한 행동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제 기독교 목사들마저 불교, 원불교 등등의 일반 종교와 동행하고 연합 합니다. 그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며, 결단코 있어서도 안 되는 일입니다.
기독교가 종교적 차원을 떠나서는 그들과 동행하고 연합할 수 있습니다. 국가적, 민족적, 사회적 차원에서 그들은 같은 국민이요, 같은 민족이요, 같은 사회인들로서 우리의 동족이요,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종교적 차원에서는 절대로 그들과 동행할 수 없고, 연합할 수 없습니다. 우상은 감히, 그리고 절대로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일반인들은 기독교와 다른 종교들의 연합에 박수를 보내면서 칭송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반인들을 즐겁고 기쁘게 하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이루어 드리는 자들입니다. 감히 우상을 하나님과 한 자리에 동석시키는 자들은 하나님을 모독하고 무시하는 악행을 범하는 자들입니다.
우상과 하나님을 한자리에 동석시킨 패악 무도한 목사들이여 도대체 어쩌려고 그토록 패악 무도한 짓을 하십니까? 그대들이 아무리 신학이 없어서 하나님을 잘 모른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상 따위와 동석하실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것조차도 모르십니까? 그대들은 블레셋의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목이 부러지고 손발이 잘라져 나간 것을 잊었습니까?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을 모독하고 무시하는 악행을 중단하시고, 하나님께 통회 자복하고 회개 하십시오 그리고 제발 부탁드리오니 목사의 위치에 머무르지 마시고 목사님들의 위치에 오르시옵소서.
P. 각종 불법 행한 것 회개합시다.
목사는 하나님의 섭리를 진행하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따라서 목사는 진리의 종입니다. 목사는 어떠한 경우에도 불법, 탈법, 위법, 편법, 불의, 부정, 등등을 행사할 수 없는 직분자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들이 오히려 온갖 불법, 탈법, 위법, 편법, 불의, 부정, 등등을 행하고 있습니다. 목사들의 온갖 불의와 부정을 다 말하기에는 창피하고 부끄러워 그중에 대표적인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목사들이 자기 유익을 위하여 교회에 장로님들을 세우지 않는가 하면, 장로, 권사, 안수 집사 등등을 세울 때에 기부금을 징수합니다. 노회에서는 목사를 장립할 때에도 기부금을 징수합니다. 물론 그것을 교회 재정에 입금하고, 노회 재정에 입금하므로 목사들이 개인적으로 착복하는 것이 아니라고 변명하겠지요.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막대한 기부금 중에 단 한 푼도 챙기지 않았을까요?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말씀 하지 마십시오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 모르나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목사님들의 주장을 전적으로 믿고 전혀 한 푼도 챙기지 않았다고 합시다. 그래도 그것은 분명한 오류입니다. 목사들이여 아직도 그것이 헌금이라고 주장하십니까? 그리하여 <기부금 징수>라는 말에 이의를 제기하실 수 있습니까?
헌금이란 본인이 자원하여, 기뻐하는 신앙으로, 분수에 맞게 드리는 것이 헌금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그러한 원리가 전제되지 않은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헌금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기부금을 내지 않는 자들은 목사, 장로, 권사, 안수집사, 등등으로 장립하지 않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까요? 아직도 그들이 자원하여 감사함으로 드리는 헌금이라고 주장하시렵니까?
불법을 행사하는 불의한 목사들이여 가슴에 손을 얹고 그대들이 하는 일에 대하여 냉정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하기야 양심에 화인 맞아 양심이 뜨거운 불로 활활 타고 있으니 냉정하게 생각할 수 있는 기능이 있을 리가 없겠지요. 그런 자들에게 회개하자고 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짓이겠지요.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그래도 회개하자고 호소할 수밖에요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니까요.
④ 삶에 대하여 회개합시다.
목사의 삶은 실천신학 삶이어야 합니다. 목사의 삶은 그 자체가 곧 교육이며 교훈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목사의 삶은 검소와 청빈의 삶이어야 하며, 오직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둔 삶이어야 하며, 삶 전체가 오직 하나님을 위한 삶이어야 합니다. 성경은 목사의 삶을 세례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하여 정립합니다.
세례요한과 예수 그리스도는 다함께 검소와 청빈의 삶을 살았지만 그들이 그러한 삶을 살게 된 원인과 배경은 다릅니다. 세례요한은 메시야의 오심을 예비하는 하나님 종의 차원에서 그러한 삶을 살았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종의 실제적 표본으로서 그러한 삶을 살았습니다. 본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메시야로서 본질상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할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삶을 살아야 했던 이유는 모든 하나님 종들의 삶의 원형을 실제적으로 가르치고 보여주어, 그대로 살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장차 재림주로 오실메시야를 예비하는 사도들은 세례요한처럼 살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은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았습니다. 그리고 <목사님들>들도 같은 차원에서 그렇게 삽니다. 그러나 목사들은 결코 그러한 삶을 살지 않습니다. 목사들은 호의호식하며 호화찬란하게 살며, 타락, 부패, 방종, 부도덕한 삶의 극치를 누리고 즐기며 삽니다. 이러한 목사들의 삶은 구약 말기의 유대교 지도자들의 삶과 로마 카토릭 교권주의자들의 삶을 그대로 계승한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모독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거부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섭리에 불순종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목사들은 당연히 회개해야 합니다.
A. 누리고 즐기는 삶 회개합시다.
목사는 현세의 삶을 누리고 즐길 정도로 여유 있는 직분자가 아닙니다. 목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가르치고 섬기는 일에 자신의 촌각을 다 바쳐야 하며, 잠시라도 틈이 생기면 오직 말씀연구와 기도에 전심전력을 다해야 하는 직분자입니다. 뿐만 아니라 목사는 사회적 민족적, 국가적 지도자입니다. 물론 목사도 인간이기 때문에 때로는 휴식도 필요하고 취미생활도 필요합니다. 적당한 휴식과 취미생활은 목사의 사역에 큰 도움을 줍니다. 그러나 목사의 휴식과 취미생활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아하고 건전하며 신선한 것이어야 합니다. 부유한 자들이나 퇴폐적인 자들이 즐기는 차원, 그리하여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는 휴식이나 취미생활은 목사의 신분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많은 목사들이 목사의 신분을 망각한 채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휴식과 취미생활을 누리고 즐깁니다. 성지 순례와 선교라는 명분을 내세워 세계적 관광명소들을 누비고 다닙니다. 휴식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세계적으로 유명한 온천 휴양지를 찾아다닙니다. 노회나 총회를 유명 관광호텔에서 개최하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토지에 관한 안식년 제도를 목사의 안식년으로 변경하여 누리고 즐깁니다.
목사들이여 도대체 왜 그러십니까? 관광호텔에 내걸린 노회나 총회의 현수막을 보고 사람들이 뭐라고 욕하는지 아십니까? 목사들이 관광지를 우르르 몰려다니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얼마나 욕하는지 아십니까? 토지에 대한 안식년이 언제부터 목사의 안식년으로 둔갑했습니까? 목사들이 6년 일하고 7년째는 쉬어야 하는 토지입니까? 아니 그보다 그렇게 흥청망청 쓰는 돈들이 어떤 돈인지 아십니까? 그대들이 신바람 나게 쓰는 돈 중에는 한겨울 시장에서 손을 호호 불며 콩나물을 팔아 드린 헌금도 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이익을 보아 드린 것이 아니라 큰 손해를 보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여 정성껏 드린 아름다운 예물도 있습니다. 물론 부자 성도들이 부담 없이 쓰라고 준 용채도 있겠지요 그렇다고 그렇게 써도 되는 것입니까? 우리 주변에 돌아볼 이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십니까? 목사들이여! 성지 순례가 목회사역에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혹시 도움이 된다면 다녀오십시오. 그러나 최소한의 경비로 반드시 다녀와야 할 곳만 다녀오십시오. 성지 순례라는 명분을 내세워 여기저기 싸돌아다니지 마십시오. 목사들이여 세계 관광 안하면 설교 못합니까? 유명한 관광지가 아무리 아름답고 멋있기로 하나님 나라만 하겠습니까? 천국에 갈 때까지 참고 기다리십시다. 멋있는 곳 보고 싶고, 아름다운 곳 가고 싶을 때에는 경비 많이 들지 않는 국내의 산천을 다녀오십시다. 국내에도 아름다운 곳 많습니다. 몸이 예전 같지 않거든, 그리하여 온천에 가서 푹 쉬어야 할 필요가 있거든 해외 온천 가지 말고 국내 온천으로 갑시다. 국내 온천도 매우 좋다고 합니다. 그리고 제발 부탁이니 관광호텔에서 노회나 총회 좀 하지 마십시오. 관광호텔에서 노회나 총회 안하면 도저히 회의가 진행되지 않거든, 절대로 현수막 걸지 말고 밤에 조용히 불 끄고 회의하십시오. 사람들이 욕하는 소리 참으로 듣기 민망합니다. 세계 관광 다녀오지 않으면 도저히 목회할 수 없거든, 유명 온천 안다녀오면 도저히 설교할 수 없거든, 목사라고 광고하지 말고 그냥 조용히 좀 다녀오십시오. 사람들이 목사들 욕할 때마다 창피하고 부끄럽습니다. 제발 부탁이오니 목사의 안식년 이야기 하지 마십시오. 안식년은 토지에 대한 제도이지 사람에 대한 제도가 아닙니다. 특히 목사에게는 안식이란 것이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종들에게 <죽도록 충성하라>고 명령할 뿐 <안식하라>는 명령은 전혀 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기독교 역사에 하나님의 종들이 6년 일하고 1년 쉬었다는 전례는 전혀 없습니다. 성경과 기독교 역사에는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한평생을 불철주야로 일하다가 순교한 이야기들만 있을 뿐입니다. 목사의 안식년 이야기는 <나는 신학을 모릅니다. 나는 성경을 모릅니다. 나는 기독교 역사를 모릅니다. 나는 목사의 사명이 어떤 것인지를 모릅니다>라고 광고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한심하고 안타까운 목사들이여! 이제 그만 회개 하십시오 잘못했다는 생각이 전혀 안 들거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사셨나하고 다시 한번 성경을 보십시오. 그러면 회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B.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삶에 대하여 회개합시다.
목사는 검소하고 청빈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목사가 검소하고 청빈한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서 다음과 같습니다.
a.실천 교육입니다.
목사는 성도들을 빛과 소금의 전사로 양성하는 교육자입니다. 기독교 교육은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시고 그토록 검소하고 청빈한 삶을 사셨던 것은, 자신의 실제적 삶을 통하여 제자들을 교육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승천 하시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20>고 명령하신 것은, 가르치는 것에 머물지 말고 가르친 대로 살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가르친 대로 살도록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가르치는 자가 가르치는 대로 살면서 이와 같이 살라고 할 때에 가능한 일 아닙니까? 목사 자신은 가르치는 대로 살지 않으면서 성도들에게 그것을 요구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자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 회칠한 무덤, 양의 탈을 쓴 이리, 불법을 행하는 자. 소경된 인도자, 외식하는 자, 모세의 자리에 앉은 자> 등등으로 분류하시고,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마23장>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곧 <목사의 가르침은 들으나 목사의 행위는 본 받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만약에 목사들에게 이 말씀이 해당된다면, 얼마나 죄송하고 부끄러운 말씀입니까? 따라서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셨던 것처럼, 청빈하고 검소한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도들을 빛과 소금의 전사들로 양육해야 합니다.
b.지도자로서의 모범적 삶입니다.
목사는 시무하는 교회의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사회적, 민족적, 국가적 지도자입니다. 지도자는 말로 인도하는 자가 아니라 삶으로 인도하는 자입니다. 따라서 목사는 청빈하고 검소한 자신의 삶을 통하여 교회, 사회, 민족, 국가를 계도해야 합니다. 목사가 청빈하고 검소한 삶을 살지 않으면 존경받지 못하고, 오히려 비난과 지탄의 대상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목사는 지도자로서의 직무를 행사할 수 없습니다.
c. 가난한 이웃이 너무 많습니다.
목사가 검소하고 청빈한 삶을 살아야 하는 가장 크고 중요한 이유는, 주변에 돌아보아야 할 이웃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여유 있고 넉넉한 삶을 살 여가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시는 말씀은 언제나 이웃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도덕적, 윤리적 차원의 의무나 책임이 아니며, 종교적 차원의 선행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에 근거한 사랑이었습니다. 따라서 주변에 가난한 이웃들이 산재해 있는데 호의호식한다는 것은 기독교인으로서는 도저히 행할 수 없는 죄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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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오늘날 목사들 중에 많은 자들이 이와 같은 원리를 전혀 도외시한 채 너무나 호의호식하며 너무나 사치하고 호화찬란한 삶을 삽니다. 어떤 목사는 크고 훌륭한 저택에 살며 고급 별장까지 갖추고 삽니다. 비싸고 거대한 외제 승용차를 타는 목사도 있고, 호텔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차 마시는 목사도 있습니다. 어떤 목사는 양복이 몇 벌인지, 구두가 몇 켤레인지, 셀 수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또 어떤 목사는 대기업의 총수들보다도 더욱 호화찬란한 삶을 산다고 합니다. 어떤 목사는 부유한 삶을 살아야 품위 있고 권위 있으며 존경받는다고 주장합니다. 또 어떤 목사는 하나님의 종은 최고, 최상의 삶을 살아야 할 권리가 있다고 하면서, 성경 어디에 목사가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고 되어 있느냐?고 호통 칩니다. 물론 목사가 너무 가난하게 살면 아름답지 못합니다. 그러나 가난과 검소, 청빈은 전혀 다릅니다. 목사의 품위와 권위는 부유한 삶, 사치하고 호화로운 삶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전혀 품위 없고 권위 없으며, 존경받을 수 없었겠습니다. 목사의 사치하고 호화로운 삶은 오히려 목사의 품위와 권위를 떨어뜨립니다. 사람들이 목사들을 무시하고, 경멸하고, 비난하고, 지탄하는 이유는, 그들이 너무나 사치하고 호화롭게 살기 때문입니다.
호의호식하며 사치하고 호화찬란한 삶을 목사들이여 회개합시다. 그대들의 주변에 돌아보아야 할 이웃들이 산재해 있는데 그들에게 미안하지도 않습니까? 그대들은 <네가 온전하고자 할찐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마19:21>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들리지도 않으십니까? 회개합시다. 제발 회개합시다.
C. 타락하고 부패한 삶에 대하여 회개합시다.
목사는 하나님의 성도들을 빛과 소금의 특전사로 양육하고 훈련시키는 교관이며 조교입니다. 교관과 조교는 이론적으로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친 것을 직접 본을 보여 완전하게 정립시키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목사는 자신이 가르친 것을 자신의 삶을 통하여 본을 보여 성도들을 진정한 빛과 소금의 특전사로 만들어야 합니다. 때문에 목사는 어떠한 경우에도 불의, 불법, 편법, 탈법, 위법, 불의, 부정, 부패, 타락, 부도덕, 등등으로부터 완전히 초월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목사들 중에 많은 자들이 그와 같은 삶을 살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그 반대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저들은 목회하면서 온갖 불법과 불의를 행사하며 노회장이 되기 위하여, 총회장이 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면서 금품으로 표를 매수하는가 하면, 상대방을 비방, 중상, 모략, 음해, 모함하며, 심지어는 폭력을 휘두르기까지 합니다. 저들의 불의와 부정은 저들의 삶에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어떤 목사는 아들 셋 모두를 군대 보내지 않기 위하여 외국으로 빼돌렸고, 어떤 목사는 한국이 위험하다 하여 재산과 가족들을 외국으로 이주시켜 놓고 여차하면 비행기 탈수 있도록 조처해 놓았다 합니다. 어떤 목사는 교회 재정을 빼돌려 땅 투기를 하는가 하면, 교회 재정으로 증권 투자하는 자들도 있다고 합니다. 저들은 자그마한 유익하나를 얻기 위하여 위정자들과 결탁하고 작당하는가 하면, 별것도 아닌 직함하나를 얻기 위하여 권력에 아부하고 뇌물을 상납합니다. 사회의 불의와 부정을 척결하여 밝고 아름답고 명랑한 사회를 이루어야 할 막중한 사명을 받은 목사들이 오히려 불의, 부정, 부패, 타락에 심취하여 온갖 비 진리적 악행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목사들이 가는 곳에 빛과 소금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암흑과 추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때문에 사람들이 기독교를 무시하고 비난하고 규탄합니다.
불의와 부정과 부패와 타락에 젖어 헤어날 줄 모르는 목사들이여 회개합시다. 그대들 때문에 하나님의 아름다운 세상이 암흑과 추악함에 빠져들고 있으며, 기독교가 멸시 천대받고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이 무참하게 훼손되고 있습니다. 이제 그만 회개합시다.
(4) 장로님들도 회개하셔야 합니다.
장로님들도 회개해야 합니다. 한국 기독교가 이토록 부패하고 퇴락한 책임이 목사들에 있는 것은 분명하나, 그렇다고 장로님들이 이 문제에서 전적으로 자유 할 수는 없습니다. 목사들의 독재, 전횡, 불의, 부정, 부패, 타락, 등등은 장로님들의 방관, 외면, 묵인, 동참, 협력, 순종, 맹종, 충성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장로님들이 그렇게 하신 것에 그만한 이유가 있음을 압니다. 장로님들을 목사의 보좌관으로 격하시킨 목사들의 전횡과 독재 앞에 장로님들이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장로님들이 목사들의 비 진리와 불의, 불법, 부패, 타락, 등등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면, 목사들은 목사의 권위를 빙자하여 불순종자. 거치는 돌, 목회 방해자로 몰아붙이고 심지어는 사탄이라고까지 공격하면서 퇴출시키는 상황 하에서, 장로님들이 무슨 힘이 있었겠습니까? 어디 그뿐인가요 장로 중에는 <그냥 장로>들이 있습니다. 그냥 장로들은 뒤에서는 함께 불평하고 비난하지만 목사의 비위를 거스렸다가 행여 불이익이라도 당할까 염려되어 목사 앞에서는 절대 순종, 절대 맹종, 절대 충성, 절대 아부합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장로님들이 홀로 정의를 부르짖으며 독야청청해 보았자 자신만 바보 되고 퇴출당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장로님들께서 목사들의 온갖 부정과 불의를 보시고 아시면서도 어쩔 수 없이 방관, 외면, 묵인, 동참, 협력, 순종, 하셨겠지요 뿐만 아니라 장로님들께서 그렇게 하셔야만 했던 것은, 교회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또한 교회의 혼란과 파경을 막아야 하는 장로님으로서의 책임과 의무, 그리고 사명감 때문이었다는 것도 우리는 압니다. 장로님들이 목사들의 독재와 전횡을 막기 위하여, 또는 목사들의 비 진리와 불의, 불법, 부패, 타락, 등등을 근절시키기 위하여, 목사들과 맞서게 되면 저들은 죽어도 달라지지 않는 반면에, 그로 인하여 교회가 혼란에 빠지게 되고, 성도들이 상처입고 시험들고 그리하여 교회가 파경을 맞이하게 되므로 장로님들이 그와 같은 결과를 초래하지 않으려고 차라리 방관, 외면, 묵인, 동참, 협력, 순종, 하셨겠지요. 장로님들은 그렇게 하시면서 심히 괴롭고 힘드셨겠지요. 우리는 오늘날 많은 장로님들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교회를 떠나 수없이 방황하셨고, 이교회 저 교회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시다가 이제는 아예 집에서 가족끼리 예배를 드린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장로님들의 심정이 오죽 하시겠습니까? 동백 아가씨도 아니시면서 헤일 수 없이 수많은 세월을 가슴 도려내는 아픔으로 얼마나 괴로워하시고 얼마나 슬퍼하시면서 얼마나 울었겠습니까? 그러한 장로님들의 노고를 알면서도 장로님들께 회개하라고 말씀드린다는 것은 장로님들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해드리는 무례함이겠지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시고 장로님들은 회개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장로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목사의 독재와 전횡을 견제하고, 저들의 불의와 불법과 부패와 타락을 책망해야 하는 막중한 사명을 받으신 장로님이시기 때문에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타락하고 부패한 목사들이 회개하고 진리에 복귀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 줄을 잘 압니다. 저들은 양심에 화인 맞은 자들로서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스스로 거부한 패역무도한 <성령 훼방자>들로서, 이 땅에서는 물론이요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자라는 것을 잘 압니다<마12:31-32>.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시고 장로님들은 회개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장로님들의 책임이고 의무이며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 기독교 전체 장로님들이 힘을 합하여 궐기대회라도 개최하면서 살신성인하심으로 백의 종군하셨다면 그만큼 목사들의 비 진리가 줄어들었겠지요. 특히 장로 장립할 때에 목사들이 강요하는 헌금 아닌 기부금을 내면서까지 장로 장립한 것은 참으로 잘못하신 일입니다. 그렇게 장로가 되시는 것 보다는 차라리 그것을 거부하고 장로가 안 되시는 것이 더욱 옳았습니다. 장로님들이 그렇게 하셨더라면 그러한 비 진리들이 관례가 되는 불행한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때문에 장로님들은 당연히 회개하셔야 합니다.
장로님 아닌 그냥 장로들은 더욱 회개해야 합니다. 그냥 장로란 목사들에게 무조건 순종, 맹종, 아부, 충성한 어리석고 무지하고 무능한 장로들을 말하는 것이며, 또한 최선을 다하여 열심히 일하시는 목사님들에게 장로의 권세와 권위를 내세워 시비 걸고 제동 걸고 방해하고 중상모략하고 음해하는 거짓 장로 삯군 장로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장로란 직분은 목사의 보좌관이 아니며, 따라서 목사들에게 무조건 순종, 맹종, 아부, 충성하는 직분자가 아닙니다.
장로는 목사의 전형이며, 원형으로서 목사와 같은 반열이며, 동등합니다. 장로는 목사와 합력하여 교회를 이끌어가는 교회의 지도자입니다. 따라서 목사가 진리 안에 거할 때는 격려하고, 협력하고, 지지하고, 감싸주는 반면에, 목사가 비 진리를 행사할 때에는 충고하고 설득하여 바로 서게 해야 합니다.때문에 이와 같은 소임을 다하지 않고 비 진리를 행사하는 목사들에게 무조건 순종, 맹종, 아부, 충성한 그냥 장로들과 진리 안에 거하여 최선을 다하시는 목사님들에게, 시비 걸고, 제동 걸고, 방해하고, 중상모략하고, 음해한 거짓 장로 삯군 장로들은 당연히 하나님 앞에 와 기독교 앞에 진정과 신령의 회개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5) 진정과 신령으로 회개합시다.
기독교 회개는 진정과 신령의 회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진정>으로 회개하고 삶이 동반하는 <신령-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수반되는> 회개입니다. 말로만 하는 회개, 형식적인 회개는 기독교 회개가 아니라 위선적 회개요 거짓 회개이며, 진정과 신령의 회개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목사들은 회개와 동시에 회개의 열매를 맺어, 진정과 신령의 회개를 이루어야 합니다.
누리고 즐기는 삶을 살던 목사들은 이제 그러한 삶을 마감하고 교회를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사회와 민족과 국가를 위하여 헌신,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치하고 호화찬란한 삶을 살던 목사들은 자신의 전 재산을 교회 앞에 내놓고, 검소와 청빈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타락하고 부패한 삶을 살던 목사들은, 이제 그러한 삶을 완전히 청산하고, 오직 하나님의 진리 안에 사셔야 합니다. 얼마 전에 기독교의 원로 목사님 세분이 참회하셨다는 신문보도가 있었습니다. 그분들이 무엇을 얼마나 회개하셨는지 알 수 없으나 그분들은 틀림없이 진정과 신령의 회개를 하셨을 것이고 그리하여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셨을 것으로 압니다. 자신의 전 재산을 하나님 앞에 모두 내놓으셨을 것이고, 더 이상의 비 진리적 삶을 완전히 청산하셨을 것이며 이제부터는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이루며,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이루는 신학적, 신앙적, 사명적, 인격적 삶을 사실 것으로 압니다. 그리하여 진정한 목사님으로서의 삶을 살 것입니다. 만약에 그와 같이 아니하시고 말로만 회개하시고 입으로만 회개하시고 삶의 회개가 뒤따르지 않았다면, 그분들의 회개는 위선적 회개, 거짓 회개, 보여주기 위한 회개, 과시하기 위한 회개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진정과 신령의 기독교 회개가 아닙니다. 설마 한들 그분들이 그러한 회개를 하셨겠습니까? 틀림없이 진정과 신령의 회개를 하셨겠지요
우리 목사들도 그리고 장로들도 그와 같이 회개하고, 그와 같이 회개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존경받고 사랑받는, 진정과 신령의 목사님들로, 장로님들로 거듭나야 합니다. 목사들이여! 우리 이제 더 이상 <그냥 목사>에 머물러 있지 말고, 진정과 신령의 <목사님>들이 되십시다. 장로들이여 우리 이제 더 이상 <그냥 장로>에 머물러 있지 말고, 진정과 신령의 <장로님>들이 되십시다.
2)제자훈련 을 통하여 개혁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지도자들의 회개와 변화를 통한 한국기독교 개혁론을 제기하였습니다. 지도자들만 회개하고 돌아선다면 한국기독교는 즉시 달라질 수 있습니다.
지도자들이 회개하고 바로서서 교파와 교단을 초월하여 하나가 되면 신학이 하나가 될 것입니다.
지도자들이 교파와 교단을 초월하여 하나가 되면 모든 사업이 일사분란하게 진행 될 것이며 해외선교, 신학교, 기도원, 교육, 등등을 비롯한 각종사업들이 규모나 내용에 있어서 상상을 초월하는 위업을 달성 할 것입니다.
저들이회개하고바로서서교회를하나님의섭리대로운영하면모든교회들이아름답고거룩해질것이며성도들이하나님의섭리안에서평안하고행복할것입니다.
지도자들이 회개하고 바로서서 신학과 신앙에 의한 삶을 살면 성도들은 물론이요 사회가 국가가 그들을 존경하고 흠모할 것이며 아울러 기독교 자체가 존경과 흠모를 받을 것 입니다. 기독교가 모든 국민들로부터 존경받고 흠모 받을 때 위정자들은 기독교 지도자를 경외하고 두려워 할 것이며 기독교를 전적으로 지원하고 후원 할 것입니다. 이때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교회 로 교회 로 몰려올 것 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는 어쩌면 한여름 밤의 꿈에 불과 할 수도 있습니다. 한번 권세와 권위와 호화찬란한 삶에 맛을 들이게 되면 그 영광을, 그 권세를, 그 권위를, 그 명예를, 포기 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것 이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러한 결과를 기대합니다. 반면에 우리는 또 하나의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제자훈련을 통한 한국기독교 개혁입니다. 이미 제자훈련에 대한 부분에서 정리 한 바 있습니다만 우리는 제자훈련을 통하여 성도들의 신학적, 신앙적, 사명적, 인격적 차원을 높이고 정립함으로서 한국기독교를 개혁해 나갈 것 입니다. 그렇게 되면 각종 비 진리적 지도자들은 자연적으로 퇴출 되거나 아니면 스스로 노력하여 진리의 지도자로 다시 태어날 것이며 그리하여 한국기독교는 자연스럽게 진리로 복귀 할 것입니다.
3)동역자 들 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한국 기독교 개혁은 저희들만의 사명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한국 기독교 전체에 주어진 사명 일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 기독교 개혁을 진행하기에 저희들의 힘은 너무나 미약합니다. 따라서 한국 기독교개혁에 뜻을 같이하시는 동역자 여러분을 모시고 저 합니다. 한국 기독교 개혁을 위하여 함께 고민하고 함께 의논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땀 흘릴 수 있는 분이시라면 그 누구도 좋습니다. 동역자 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한국 기독교 개혁은 더욱 힘차게 진행 될 것입니다. 한국 기독교 개혁에 관심 있는 분들은 교파, 교단, 직분에 관계없이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함께 모여서 의논하고 계획하고 분담하여 한국 기독교 개혁을 이루어 나가십시다.
어떤 분은 한국기독교 개혁을 전혀 불가능 하다고 말 합니다. 저희들이 한국 기독교 개혁을 신바람 나게 주장 할 때에 어떤 분이 이렇게 말 했습니다. <한국기독교 개혁은 매우 훌륭한 일이고 반드시 해야 될 일이지만 그것은 절대 불가능 합니다. 왜냐하면 한국 기독교 개혁을 단행해야 할 목사들이 전혀 회개하지 않으며 전혀 바뀌지 않으며 전혀 협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목사님의 개혁 의지는 한낱 이상에 불과합니다. 목사님은 마치 공자나 노자와 같은 이상주의자 이십니다.> 저희는 이 말에 전적으로 공감 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것을 경험 했으니까요 제가 1994년, 미국에서 공부를 마친 후 귀국하여 한국 기독교개혁에 대한 청사진을 가지고 개혁을 주장하는 몇몇 선배목사님들을 찾아뵈었습니다. 그들은 매우 반가워하면서 격려하였고 후원과 지월 할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그들은 다시는 저를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그 뒤로 다시 여러분들을 찾아뵈었으나 시작과 결론은 서로 약속이나 한 것처럼 언제나 같았습니다. 그 분들이 왜 그랬는지에 대해서 저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제가 내린 결론은 <아니었구나> 였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결코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욱 기도하면서 이 문제를 추진 해 왔습니다. 그리고 절대 불가를 주장하는 자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공자나 노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공자나 노자에게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이상주의자로 끝났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이상주의자로 끝나지 않고 반드시 한국 기독교 개혁을 이루어 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우리는 한국기독교 개혁을 위하여 부름 받고 세워진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계십니다. 때문에 우리는 강하고 담대하며 소명의식과 사명감을 가지고 이일을 진행합니다. 우리에게는 먼 훗날에 대한 소망이 있습니다. 먼훗날.....그 때가 언제 일지는 모릅니다만 그 때에도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에 의하여 한국기독교 개혁이 계속하여 진행 될 것입니다. 그리고 드디어는 결실을 맺을 것 입니다. 그때에 한국기독교는 세계기독교를 인도하고 진행 시키는 중심이 될 것입니다. 먼훗날.....그날에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 가 있을 것입니다.
첫댓글 귀한자료 감사합니다
귀한 자료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뜻 기도로 후원합니다.
저도 그런 마음과 뜻이 있지만 제 능력이 안되는군요
대신 이 땅의 교회를 위한 기도는 계속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