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 곡 학 회 논 문 집 율곡사상연구 제16집 葛庵 李玄逸의 栗谷 性理學 비판 리 기 용 (연세대) 한글 요약 이 논문은 퇴계학파의 율곡비판에 관한 것으로 율곡비판의 수장인 갈암(葛庵) 이현일 (李玄逸)의 율곡비판인 「율곡이씨논사단칠정서변(栗谷李氏論四端七情書辨)」 분석에 초점 을 맞추었다. 필자는 퇴계학파의 율곡비판에 대한 대강을 발표하면서 다음과 같이 퇴계 학파의 율곡비판의 유형을 구분한 바 있다. 첫째 퇴계와 율곡의 우열적 차별 즉 퇴계의 호발론적 입장의 옹호와 율곡의 성리설 비판, 둘째 비판적 입장을 전제로 하되 퇴계와 율곡의 절충 혹은 종합, 그리고 퇴계와 율곡 양자의 우열적 차별이 아닌 서로의 다름으 로 파악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퇴계학파의 율곡비판의 내용을 대별해 보면 율곡의 기발 이승일도(氣發理乘一途)설, 인심도심상위종시(人心道心相爲終始)설, 그리고 리통기국(理通 氣局)에 관한 것 등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 갈암 이현일의 율곡비판은 첫 번째 입장의 가장 대표적 예라고 할 수 있다. 퇴계학파의 율곡비판의 본격적인 시도는 갈암 이현일의 「율곡이씨논사단칠정서변」에 의해 시작된다. 그런데 갈암의 비판은 기발이승일도설과 그에 근거한 심성정에 관한 이 론에만 국한되어 있다. 즉 갈암의 비판은 율곡학 전반에 대한 이해와 그 문제점 지적보 다는 율곡학의 비판을 통한 퇴계학의 옹호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갈암의 율곡비판은 퇴계의 입장에서 율곡과의 원론적 차이를 드러내려는 데 있 으며, 율곡에 대한 이해보다는 비판에 전적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다. 주제어 :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율곡(栗谷) 이이(李珥), 사단칠정(四端七情), 인심 도심(人心道心), 리기(理氣) 6 리 기 용 1. 서론 율곡이후 율곡설에 대한 의혹이나 문제 제기는 율곡의 제자들의 해석을 통해서 조심스럽게 제기되기 시작한 한편, 퇴계학파에서는 율곡설에 대한 총체적인 비판이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필자는 이전 퇴계학파의 율곡비판 에 관한 연구에서 퇴계학파의 율곡설 비판을 대별하면서 다음과 같이 세분 한 바 있다. 첫째 차별을 의식한 총체적 비판, 둘째 상대의 장점을 인정하되 원론적 관점에서 문제 지적, 셋째 퇴계와 율곡의 우열의 차별이 아닌 서로의 다름을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세 가지 지평으로 나누어 보고 율곡의 학설에 대한 비판 혹은 평가들들을 통하여 각각의 지평을 대표하는 학자들로 갈암 (葛庵)과 우담(愚潭), 반계(磻溪)와 성호(星湖), 대산(大山)과 다산(茶山)들을 배 분한 바 있다.1) 본고에서는 이와 같은 퇴계학파의 율곡비판에 대한 대별적 고찰이후의 구 체적 각론으로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1627-1704)2)의 율곡비판을 심층적 으로 논구하고자 하였다. 구체적으로는 퇴계학파의 율곡 성리학 비판의 수 장(首長)이라 할 수 있는 갈암의 율곡 비판을 대표적 저술인 율곡이씨논사 단칠정서변(栗谷李氏論四端七情書辨)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말하면 갈암의 총체적 율곡 비판을 통하여 퇴계설과 율곡설의 극단 적인 차별화를 시도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며, 그의 비판을 통해서 퇴계와 율곡의 리기, 심성정 즉 사단 칠정, 인심 도심 등 양자가 사용하는 개 념의 외연과 내포의 차이와 및 문제의식의 차이를 대비시켜 볼 수 있을 것 이다. 따라서 이 논문에서는 갈암의 성리학적 입장과 그 변화보다는 율곡 성 리학에 대한 극단적 비판의 면모에 초점을 맞추어 고찰할 것이다. 2. 당쟁 시기 속의 갈암 이현일 갈암 이현일은 퇴계와 율곡이후 성리학적 문제들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고 1) 졸고, 「퇴계학파의 율곡 인심도심론 비판」, (동서철학연구37집 2005) 참조. 2) 본관은 載寧, 자는 翼升, 호는 葛庵, 南嶽이다. 李時明(1590-1674)과 안동장씨 사이의 셋째 아들로 형 存齋 李徽逸(1619-1672)과 恒齋 李嵩逸(1631-1698)과 함께 17세기 퇴계 학파의 성리학을 계승하였다. 7 사회전반에까지 영향을 미친 17세기 영남 산림의 전형적인 성리학자이다. 그는 퇴계와 율곡이후 주로 율곡의 문제들이 전개되던 시기에 퇴계 학설을 가장 급진적으로 옹호하며 율곡에 본격적인 비판을 가한 퇴계학파의 적통을 이어 받은 ‘배율영퇴(排栗迎退)’3) 즉 율곡비판의 수장으로 자리매김 된다.4) 조선왕조실록 속의 갈암 이현일 퇴계학파의 적통을 계승하며 율곡비판의 수장으로서의 자리를 확고하게 굳힌 갈암에 대한 평가는 당시 당쟁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으며, 남인의 몰락에 따라 그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으로 기록된다. 조선왕조실록에 전하 는 이현일의 졸기는 갈암의 생애와 사후 그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으로 이루 어졌음을 단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다. 방귀전리(放歸田里)한 죄인 이현일(李玄逸)이 죽었다. 이현일은 대대로 영남의 영해(寧海)에서 살았는데, 가문이 원래 한미(寒微)하였다. 기사년 이후에 은일(隱逸) 의 우두머리가 되어 수년 사이에 순서를 뛰어넘어 정경(正卿)에 올랐고, 전장(銓長) 을 제수받기에 이르렀는데, 용루(庸陋)하고 무식하며 행실이 매우 비루(鄙陋)하였 다. 일찍이 경영관으로 시강(侍講)할 때에 춘추(春秋)를 이해하지 못하여 핑계하 기를, ‘궁벽한 시골에는 서적이 없어서 이 책을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하였는데, 임금이 명하여 춘추한 질을 인쇄(印刷)하여 하사하게 하니, 사람들이 모두 전해 듣고 비웃었다. 명릉(明陵)이 사제(私第)로 쫓겨나게 되었을 때 이를 배척하는 소를 올려, ‘스스로 하늘에 끊김을 당하였다.’고 하기에 이르렀었다. 환국(換局) 후에 갑 술년 그 죄로 여러 해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죽으니, 나이 78세이다.5) 3) 최영성, 『한국유학통사』 하권 (심산, 2006) 111면. 4) 이동환은 국역『갈암집』 해제 2장 2절 생평에서 갈암의 생애를 다음과 같이 5시기로 나누어 정리하였다. 제1기, 22세까지(1627-1648) 기초학문 수학기, 제2기, 23-50세 (1649-1676) 존재, 항재와 함께 한 학문정진기. 제3기, 51-62세(1677-1688) 정치입문 및 학문정립기, 바로 이 시기에 퇴계학파의 체계적 율곡 비판서인 「栗谷李氏論四端七情 書辨」(1688)를 저술한다. 제4기, 63-67세(1689-1693) 남인 정권의 산림으로 징소되어 입 조와 환향이라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격변기, 제5기, 68-78세(1694-1704) 유배와 강 학, 논변 등이 펼쳐지는 학문적 완숙기. 이 시기 정시한, 신익황 등과 이기 사칠에 대 하여 논변을 주고 받으며 62세 율곡 비판의 입장이 일부 수정 보완되며 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 필자는 이동환의 시기 구분에 따르며 각 시기의 특징들을 위와 같이 정 리해 보았다. 8 리 기 용 용루와 무식, 그리고 비루 등 갈암에 수식어로 붙는 부정적 단어들은 당시 붕당정치가 가장 극렬하였던 숙종 때 소외된 남인들이 처한 정황과 그 대표 자 중 한 인물인 갈암에 대한 평가를 쉽게 추정할 수 있게 한다. 이 밖에도 갈암에 대한 실록의 평가들을 찾아보면 “이현일은 학문이 무엇인지도 모른 다.”, “선비의 이름을 칭탁하여 아름다운 벼슬을 차지하고 부름이 있으면 곧 행하였다.”, “강연에서는 시론에 부회하여 그릇되고 어리석은 말이 많았다.” 등등의 부정적 평가들이 대세를 이루며 점철되어 있다. 갈암은 1674년 숙종의 즉위로 남인이 집권하면서 처음으로 관직을 제수 받았으나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서인이 집권하면서 물러나게 되었 으며,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다시 남인이 집권하고, 1694년 갑술환 국(甲戌換局)을 통하여 서인이 재집권하면서부터 1702년(74세)까지 유배생활 을 하게 된다. 이와 같이 정치적으로 남인과 서인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가운데 갈암은 정치적 흥망성쇠를 겪게 된다. 남인의 두 번의 집권 이후 정치적으로 거의 소외되었던 것을 단적으로 드 러내주듯 갈암은 남인의 핵심인물로 부각되면서 10여 년간의 유배생활을 시 작으로 사후 약 200여 년간 신원(伸寃)되지 못한 채 계속되는 신원(伸寃)과 환수(還收)가 되풀이되는 당쟁의 곡절을 겪게 된다. 그의 관직 회복은 철종 때 이루어 졌으며6) 문경(文敬)이라는 시호는 고종 때 시호가 내려졌으나7) 철회된 후 순조 때 이르러야 신원복관(伸寃復官)되기에 이른다.8) 갈암의 성리학적 입장은 주로 60세 이후에 나타나는데, 1688년(62세) 율곡 의 이기사칠론에 대하여 19조목으로 나누어 비판한 율곡이씨논사단칠정서 변(栗谷李氏論四端七情書辨)을 저술한 시기를 그의 성리학이 정립된 시기 로 볼 수 있다. 특히 1680년 낙향과 1688년 율곡이씨논사단칠정서변을 저 술, 그리고 이듬해인 1689년의 기사환국을 통한 정치적 진출 등은 그의 율곡 비판과 정치적 진출의 문제가 별개의 것이 아님을 추정케 한다. 이현일의 학맥 : 율곡 비판의 수장(首長) 5) 『숙종실록』 40권, 30년(1704) 11월 3일 조 6) 『철종실록』 4권, 3년(1852) 9월 6일 조 7) 『고종실록』 8권, 8년(1871) 3월 16일 조 8) 『순종실록』 2권, 1년(1908) 4월 30일 조 9 퇴계 사후 17세기 초기 서애 유성룡과 학봉 김성일의 적통 문제로 첨예하 게 대립되면서 퇴계학파 내에 병파(屛派)와 호파(虎派)의 계보를 형성하게 된 다. 일반적으로 갈암은 퇴계학파의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의 학맥으로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 1564~1634)의 제자9)로 분류된다. 부친인 이시명이 근시재(近始齋) 김해(金垓, 15551593)의 딸과 사별한 후 김성일의 고제 장흥효의 사위가 되면서 갈암 형제는 퇴계학봉경당으로 이어지는 퇴계학파 도통의 맥을 사사 받으며 퇴계 학맥의 정통을 계승하였 음을 표방한다.10) 경당은 김성일, 유성룡 두 문하의 고제로 알려져 있으며 한강 정구의 문하에도 출입하였으나 갈암이 경당집 발문에서 위의 도통 계 열을 표방함으로써 위와 같은 계보가 부각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갈암의 학맥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 가계 및 수학한 바에 근거를 두어 학봉, 경당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표방했으나, 실질적으로는 퇴 계학파 전반의 인물들과 원활한 교유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퇴계학파 내의 분파들을 뛰어 넘을 수 있는 학연을 갖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뒤에 서 다시 살펴보겠지만 갈암의 율곡 비판이 부각된 이유는 이러한 퇴계학파 내의 개방성을 전제로 한 적전(嫡傳)적 계보에 힘입어 그 대표성을 부여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갈암집의 간행 갈암의 시문은 저자가 졸하기 이전부터 아들 밀암(密庵) 이재(李栽, 1657-1730)에 의해서 수습(收拾)되었으며, 문인 신익황(申益愰)이 1705년에 쓴 취정록(就正錄) 후지(後識)에 의하면 갈암 사후 이듬해인 1705년에 수정을 착 수했다고 되어 있으며 1724년에 이르러 본집(本集) 15책, 별집(別集) 2책으로 완성된다. 모든 준비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간행되지 못한 것은 1694 9) 葛庵先生文集부록 권1 「年譜」 26년조 10) 갈암의 가계 및 학문의 연원, 사우관계는 김학수의 다음 논문 참조, 「갈암 이현일 연 구-정치활동을 중심으로-」(조선시대사학보, 권4. 1998) 2장 3장 및 이동환의 갈암집 해재 2장 2절 참조. 17세기 영남학파는 안동 상주의 서애 유성룡계열(병산서원파:屛 派), 성주이하의 한강 정구계열, 안동의 학봉 김성일계열(호계서원파:虎派), 예안의 월 천 조목계열 등으로 나누어지지만, 갈암을 학봉-경당으로 이어지는 호파로만 한정시 켜 이해하는 것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필자도 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10 리 기 용 년 갑술옥사(甲戌獄事) 이후 시의(時議)를 염려하여 간행을 미루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갈암의 문집은 그 완성에도 불구하고 사후 100여 년이 지난 1810 년경 영해(寧海)에서 간행되었으나 신원(伸寃)이 이루어지지 않은 죄인의 문 집을 사사로이 간행했다는 이유로 훼판분서(毁板焚書)된다.11) 유치명(柳致明) 에 의하면 “소차(疏箚), 강의(講義), 시문(詩文), 잡저(雜著) 20권이 세상에 전 해지며, 또 돈전수어(惇典粹語), 존주록(尊周錄), 충절록(忠節錄), 영모록(永慕 錄), 신편팔진도설(新編八陣圖說), 단수도설발휘(舟水圖說發揮), 홍범연의(洪 範衍義)가 집안에 보관되어 있다”(신도비명神道碑銘, 1855)고 되어 있는 것으 로 미루어 볼 때 잔본(殘本)이 전해 진 것으로 추정되며, 1909년에 이르러야 증보 중간(重刊)되었다. 중간본은 목록, 본집 29권, 별집 6권, 부록 5권의 체 제로 구성되어 있다. 1973년경 계축추보(癸丑追補)가 간행된다. 현 국역 갈암 집은 본집 29권, 별집 6권, 부록 5권, 속집 4권 및 계축추보와 성유록(聖諭錄), 기갑신계록(己甲辛癸錄)12)까지 첨보되어 1999년 민족문화추진회에서 완역 간행되었다. 갈암 성리학에 대한 연구성과 갈암에 대한 소개는 현상윤의 조선유학사를 통해 당쟁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으며 부정적 시각에서 소개된다. 그런데 율곡사칠서변은 대개 퇴계의 이기호발설을 옹호하고 율곡의 기발이승설 을 공격하는 입장에서 쓴 것인데 당쟁의 감정이 농후하여 서론 벽두에서부터 율곡 을 혹론한 것은 독자로 하여금 자못 그의 공평을 의심케 하는 동시에 실망의 느낌 을 가지게 한다. 그리고 그 논평은 19조에 分하여 하였으나 대체에 있어서 율곡의 설을 꺽을 만한 유력한 이론이 없고 … 다시 주자의 리유동정(理有動靜) … 과 황 면재의 … 소재지리 안득위지무동정(所載之理 安得謂之無動靜)이란 말을 들어 율 곡에게 육박한 것은 과연 논란할 가치가 있는 듯 하나 그러나 이것도 율곡으로 하 여금 굴복케 못할 것은 율곡은 벌써 이에 대비하여 …13) 한편 이병도는 학봉 김성일 문파의 갈암 이현일 형제들을 언급하면서 갈 11) 경오판변(庚午板變) 12) 일명 백의편(白衣篇) 13) 현상윤, 조선유학사(서울, 민중서관, 1948, 현음사, 1896) 245-247면 11 암의 퇴계 존숭과 율곡 비판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14) 그는 갈암의 율곡 비 판을 크게 칠정포사단설(七情包四端說)과 기자이설(機自爾說) 두 가지로 나 누어 퇴계의 사단 대(對) 칠정과 리발(理發), 리동(理動) 즉 호발(互發)의 입장 에서 율곡의 주장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음을 간략히 보여주었다. 이 밖의 갈암 성리학에 대한 연구성과들을 살펴보면, 단행본으로 재령이 씨대구종친회의 갈암의 철학사적 위치와 그의 성리학(發行年未詳)15)과 교 문회 편, 17세기 한 영남 도학자의 생애 : 갈암 이현일의 연보 외(성남 : 嶠文會 , 2001)이 있다. 학위논문으로 김학수의 갈암 이현일 연구 : 경세론 과 학통관계를 중심으로(정신문화연구원, 2002)와 안유경의 갈암 이현일 의 성리학 연구(성균관대학교 대학원, 2006)가 있으며, 배종호16), 유명종17), 금장태18), 박홍식19), 이동희20), 이애희21), 최영성22) 등의 연구논문들이 있 다. 이 밖에 문학, 역사, 정치사상 등에서 발표된 다수의 논문들을 찾아 볼 수 있다.23) 14) 이병도, 『한국유학사』(아세아문화사, 1989,) 209-211면. 15) 이 책은 1996년 새한철학회(영남철학회)의 철학논총12집의 기획주제인 “갈암의 철 학사적 위치와 그의 성리학”에 게재된 박홍식, 이갈암 성리학의 조선유학사적 의의, 유권종, 갈암의 이기론에 관한 고찰, 송석준, 갈암의 율곡비판, 김낙진, 갈암 이현일의 경세사상, 장세호, 갈암 이현일의 예학사상 등의 논문을 수록하여 간행한 것이다. 16) 배종호, 한국유학사(연세대학교 출판부, 1983) 161-166면. 17) 유명종, 조선후기성리학(이문출판사, 1988). 18) 금장태, 「葛庵 李玄逸의 四七論」(東洋學國際學術會議論文集, Vol.2 No.1, [1980]), 금 장태, 「갈암 이현일」(조준하 외, 한국인물유학사3, 한길사, 1996). 19) 박홍식, 「이현일의 인물과 학문사상」(동방학회 편, 영남학파의 연구, 1998), 박홍식, 「갈암 이현일과 영해지역의 퇴계학맥」(한국의 철학28집, 2000). 20) 李東熙, 「嶺南 性理學의 형성과 전개」(동양철학권8 1997), 이동희, 「퇴계학파는 퇴 계의 성리학을 어떻게 이해하고 계승했는가?-갈암 이현일의 율곡 비판을 중심으로-」( 哲學硏究, 권89. 2004). 21) 이애희, 「이현일의 사단칠정론」(민족과사상연구회편, 사단칠정론, 서광사, 1992). 22) 최영성, 한국유학통사하권 (심산, 2006) 109-129면. 23) 송재소, 「갈암 이현일의 詩에 대하여」 (동방한문학, 14집, 1998), 동방한문학 14집에 는 김시황의 「갈암 이선생의 사면지평겸진오조소」, 김윤수의 「갈암집의 경오판변과 남명합집의 갈명첨삭본」, 장재헌의 「갈암선생의 경연강의를 통해 본 주역관」 등의 논 문이 함께 실려 있다. 이 밖에 정호훈, 「17세기 후반 영남남인학자의 사상-이현일을 중심으로-」(역사와 현실, 권13. 1994) 등 참조. 12 리 기 용 3. 갈암의 율곡 성리학 비판 퇴계와 율곡이후 리기사칠논변에 대한 율곡의 이론에 대한 퇴계학파의 비판적 견해를 잘 나타내 준 초기의 비판서로 중 하나가 바로 갈암의 율곡 이씨논사단칠정서변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기존의 연구에서 퇴계학 파의 율곡비판은 갈암의 율곡이씨논사단칠정서변과 우담 정시한 (1625-1707)의 사칠변증(四七辨證)24)(1796) 등 에서 비롯된 것으로 간주하였 으나,25) 최근의 연구성과에 의해 활재(活齋) 이구(李榘, 1613-1654)의 변론이 기서(辯論理氣書)26), 졸재(拙齋) 유원지(柳元之, 1598-1678)의 리기설(理氣 說)27)(1670) 등의 비판서들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졌다.28) 굳이 퇴계학파 율 곡비판을 더 소급해 올라가면 근시재(近始齋) 김해(金垓, 15551593)의 리 기설(理氣說)29)이라는 짧은 글에 율곡의 퇴계 비판이 잘못된 것임을 비판 하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원론적 차원에서의 지적일 뿐 본격적인 율곡 비판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것들을 종합해 볼 때 퇴계학파의 율곡 비판은 1654년 이전 활재의 변 24) 우담의 「사칠변증」에 나타난 율곡의 학설에 대한 비판의 주요 내용은 그가 총론에서 밝히고 있듯이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상 율곡서 중에서 표출標出한 말이 무릇 40여조인데, 그 대략을 살펴보면 처음은 人心道心相爲終始를, 중간에는 發之者氣 所以發者理를, 끝에는 理通氣局을 말하였는데, 이 세 가지로서 추연하여 많은 논의들 이 나왔다.(愚潭全集8:27a 「四七辨證 總論」) 25) 영남학파 가운데서도 … 장여헌, 정우복 양씨는 퇴계의 주장에 반대하고 도리어 율곡 의 견해에 찬동을 허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율곡의 설을 공격하고 퇴계의 설을 옹호하 기 시작한 것은 퇴계 몰후 양 백여년 이후의 일인데, 현저하게 대성질호격으로 드러난 것은 이갈암에서 처음으로 보게 된 것이다. 현상윤, 조선유학사 355면, 금장태의 「갈암 이현일」1205면 등 참조 26) 리기는 본래 하나의 물건이 아닌데, 단지 그가 억지로 합하여 하나로 하여 마침내 어 찌 할 수 없어서 말하길 이통기국이라고 하였다. 이미 통한 것이 있고 국한된 것이 있 다고 말했으니 이것은 다른 것인데 어찌 리기가 하나라고 보는가? 이러한 즉 변론을 기다리지 않아도 분명해진다.(『活齋集』3:10b,「辨論理氣書」) 27) 拙齋先生文集권8. 「理氣說」 28) 김용헌의 「活齋 李榘의 율곡 비판」(율곡사상연구6집, 2003), 김경호 「존퇴양율 - 퇴 계학의 첨병으로서의 이구」(율곡사상연구6집, 2003) 등 및 금장태, 「졸재 유원지의 경학과 성리설」 (퇴계학파와 리철학의 전개, 서울대 출판부, 2000), 설석규, 「拙齋 柳 元之의 理氣心性論 辨說과 政治的 立場 : 17세기 退溪學派 理氣心性論의 政治的 變用 1」( 조선사연구권6) 등 참고. 29) 『近始齋集』 3:21ab 13 론이기서가 가장 앞서는 것으로 보인다. 활재의 율곡 비판에 리통기국에 관 한 조목은 제17조에 나타나 있으나 그 자체의 이론적 문제라기보다는 호발 설 옹호를 위한 비판의 연장에서 다루어지는 것일 뿐, 위에서 언급한 바 갈 암이후 나타나는 인심도심상위종시 문제나 리통기국의 문제에 대한 본격적 인 비판은 제기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즉 율곡 비판과 퇴계 옹호라는 우열을 따지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활재의 변론이기서가 이와 같이 갈암의 율곡이씨논사단칠정서 변에 앞서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연구에서 갈암의 율곡 비판이 중점 적으로 부각되었던 것은 갈암의 말년이후 완전한 신원복관(伸寃復官)이 이루 어지는 1908년까지 당쟁이라는 정치적 갈등 속에서 갈암에 대한 평가가 끊 임없는 논란의 쟁점으로 부각되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갈암의 율곡 비판은 퇴계의 이기호발의 입장에서 율곡의 학설을 구체 적으로 비판한 퇴계학파 내 초기 율곡 비판에 해당하는 것 중 가장 대표할 수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갈암의 율곡이씨논사단칠정서변 퇴계와 율곡 이후 리기 사칠논변에 대한 율곡의 이론에 대한 퇴계학파의 비판적 견해를 잘 나타내 준 대표적 초기의 비판서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갈암은 율곡의 리기심성 론에 대한 비판을 체계적으로 정리해주면서 율곡의 견해가 가질 수 있는 문 제점들도 적실하게 지적하기도 하였다. 특히 갈암의 율곡 성리학 비판은 율 곡설 비판의 정점을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기발이승일 도에 근거한 율곡 사단칠정론 및 인심도심론에 대한 치밀하고 총체적인 비 판을 통해서 퇴계와 율곡의 철학적 쟁점들을 압축적으로 살펴볼 수 있을 뿐 만 아니라 퇴계의 입장을 변론하면서30) 어떻게 그들의 철학적 문제들을 체 계화시켰는지 확인할 수 있다. 갈암의 율곡 성리학 비판 19조+2조 갈암의 율곡이씨논사단칠정서변에 나타난 율곡비판은 갈암 스스로 19 조목으로 구분하여 율곡의 견해를 인용하고 자신의 변증을 덧붙이는 방식으 30) 이병도는 갈암이 마치 퇴계를 神처럼 존숭하며 믿었다고 하였다. 『한국유학사』 210면. 14 리 기 용 로 구성되어 있다. 후기에 밝히고 있는 두 문제 즉 답성호원논이기 제6서 의 도심(道心) 본연지기(本然之氣) 문제와 답성호원논이기 제2서의 “인생 기품 리유선악(人生氣稟 理有善惡)”의 리(理)를 승기유행(乘氣流行)의 리로 본 두 문제를 더하면 모두 21조목이 된다. 즉 갈암이 문제 삼은 쟁점은 갈암 이 설파한 율곡설 비판 및 퇴계설 옹호의 변(辨) 19개 뒤에 2개의 문제를 여 운으로 제시하였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갈암이 구분한 매 조목은 율곡의 우계와의 이기, 사 단칠정, 인심도심 등의 문제를 다룬 답성호원(答成浩原)임신(壬申) 즉 ‘논 이기서(論理氣書)’에서 쟁점들을 선정하여 인용한 뒤에 율곡의 원문 인용 출 전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으며, 여기에 대하여 갈암 자신의 율곡 비판 혹은 퇴계설 옹호변호 등을 덧붙이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갈암이 문제 제기한 19조목의 출전을 밝혀 주었는데, 초답성우계서(初 答成牛溪書) 3조, 재답우계서(再答牛溪書) 10조, 답우계별지(答牛溪別紙) 1 조, 중답우계제1서(重答牛溪第一書) 2조, 답우계장서(答牛溪長書) 2조, 답 우계제5서(答牛溪第五書) 1조 등 19개의 조목을 인용하고 있다. 이는 율 곡전서의 순서에 따르면 각기 논이기 제1서, (제2서), 제3서, 제4서, 제5서, 제6서에 해당한다.31) 갈암이 제기한 조목들을 분석해보면 다음과 같이 31) 牛溪와 栗谷의 9 차례에 걸친 왕복서한(1572년)은 栗谷全書에는 구분되어 있지 않으 나, 牛溪集에는 「與栗谷論理氣書」가 차례로 구분되어 있다. 그리고 栗谷全書와 「 答(與)成浩原」과 牛溪集의 「與栗谷論理氣書」에는 모두 牛溪의 三⋅七⋅八⋅九의 問 書가 遺失되어 전하지 않고 있다. 이 논문에서는 栗谷全書의 「答(與)成浩原書」를 주 로 참고하되 그 논의의 심화과정을 좀 더 쉽게 알 수 있도록 牛溪集의 구분을 병기 하였다. 구체적으로는 栗谷全書의 순서에 따라 「答(與)成浩原」(論理氣 第X書)라고 병기할 것이다. 牛溪集에 의하면 牛溪의 「答成浩原」(論理氣 第三書)를 낳게 한 선행 질문이 유실되 어 載錄하지는 않고 栗谷의 答書만 실었다고 했다. 그런데 栗谷全書에서는 牛溪集 상의 「答成浩原」(論理氣 第三書)가 牛溪集상의 「答成浩原」(論理氣 第二書와 附問 書) 앞에 실려 있다. 다시 말하면 栗谷全書에서는 牛溪集의 論理氣書가 第一, 三, 二의 순서로 실려 있는 것이다. 栗谷全書의 「答成浩原書」는 1611년 栗谷의 文集 이 편찬되었을 당시부터 전해져 온 것으로서 牛溪集의 편찬보다 앞서고 또 내용적 으로 牛溪集상의 第四問書(與栗谷理氣四書)가 牛溪集에서 이른바 栗谷의 第三答 書에 기인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였으나( 牛溪集4:15a 細註. 第三書旣失不錄, 而 猶載此答者此下. 先生第四書, 卽因栗谷此答而發故錄.) 내용적으로 관련성이 없다. 따라 서 牛溪集의 이것을 참고하되 더 신빙성 있는 栗谷全書의 순서에 따라서 구분 표기하였다. 15 정리해 볼 수 있다. 葛庵先生文集권18 栗谷李氏論四端七情書辨분석32) 첫 번째 조목은 율곡의 칠정이 사단을 포함하는 것은 인심도심을 상대해 서 말하는 것과 같지 않다는 것에 관한 것이다.33) 갈암은 사단과 칠정의 소 종래(所從來)가 각기 주로 하는 바가 있어 근본에서부터 그러한 것이라고 보 았다. 그는 주자가 사단과 칠정을 도심과 인심에 분속(分屬)시켰다는 것에 근 거하여 율곡처럼 칠정이 사단을 포섭(包)하는 관계로 보는 것을 비판한다.34) 두 번째 조목은 율곡이 칠정이 사단을 포함하는 것처럼 기질지성이 본연 지성을 포함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견강부회라고 비판한 것이다.35) 갈암은 사단칠정과 본연지성기질지성이 율곡이 말한 바처럼 기질을 겸하여 말한 것 과 겸하지 않고 말한 것이 있다고 본 것은 옳다고 인정하지만, 칠정이 사단 을 겸한다고 하여 모두 기가 발하는 것임을 밝히고자 한 것은 주자의 뜻과 는 다르다고 비판한다.36) 32) 독자의 이해를 위하여 각 항목의 논점 혹은 쟁점이 되는 문제를 ○으로 제시하였으며, 갈암의 율곡 인용 중 [ ]는 필자가 栗谷全書에 의거 생략된 부분 혹은 축약된 부분 을 표시하거나 논의의 이해를 위하여 그 내용을 밝힌 부분이며, 율곡 인용 중 갈암이 추가한 부분은 밑줄로 표기하였다. 33) 李氏曰: 四端不如七情之全, 七情不如四端之粹. […] 七情則統言人心之動有此七者, 四端 則就七情中擇其善一邊而言也. 固不如人心道心之相對說下矣. [葛庵先生文集 18:2a 「 栗谷李氏論四端七情書辨」 ; 栗谷全書9:34b…35a 「答成浩原」 (論理氣 第1書)] 34) 愚謂: 七情固是性之欲, 然却觸形氣, 緣境而生, 故有有節與無節, 中節與不中節. 四端固 是乘氣而發, 然以其直出於仁義禮智之性, 故曰乃若其情則可以爲善, 乃所謂善也. 蓋其所 從來, 各有所主, 自其根本而已然, 初非發則一途, 而旣發之後, 擇善一邊而爲四端也. 愚 故曰, 四端七情, 立言命意, 自不相蒙, 不必牽引配合而強爲一說也. 李氏謂四端七情, 不 如人心道心之相對說下矣, 而朱子曰, 喜怒人心也, 惻隱羞惡辭遜是非道心也, 則朱子固以 四端七情, 分屬人心道心而相對說下矣. [葛庵先生文集18:2ab 「栗谷李氏論四端七情書 辨」] 35) 李氏曰: 四端七情, 正如本然之性氣質之性. 本然之性, 不兼氣質而爲言[也], 氣質之性, 則 却兼本然之性. 故四端不能兼七情, 七情則兼四端. […] 孟子擧其大槩, 故只言惻隱羞惡恭 敬是非, 而其他善情之爲四端, 則學者反三而知之. 人情安有不本於仁義禮智而爲善情者 乎. [此一段, 當深究精思] [葛庵先生文集18:2b-3a 「栗谷李氏論四端七情書辨」 ; 栗谷 全書9:35ab…35b 「答成浩原」 (論理氣 第1書)] 36) 愚謂: 李氏謂四端七情, 如本然之性氣質之性, 有兼氣質不兼氣質而爲言者固是. 旣知其然, 則當各就本文, 以究其指意之所在可也, 何必強爲牽合, 尋覓仁義禮智之端於血氣勞攘人 16 리 기 용 세 번째 조목은 마음이 발함에 기의 용사(用事) 여부에 따라 인심과 도심 을 설명하며 전자를 칠정의 선악을 합한 것, 후자를 칠정의 선일변으로 설명 하는 것을 비판한 것이다.37) 갈암은 인심의 경우 칠정의 선악을 합한 것이라 고 본 것과 도심의 경우 기가 용사하지 않는 것은 인정하지만, 도심을 칠정 의 선일변이며, 기가 용사하여 인심이 된다고 보는 것은 옳지 않다고 비판하 고 있다. 특히 갈암은 율곡이 이와 같이 인심도심과 칠정을 연계해 설명하는 것은 첫 번째 항목과 서로 모순이 된다고 지적하고 있다.38) 네 번째 조목은 율곡이 마음과 천지의 변화를 같은 맥락에서 파악하여 천 지의 변화에 두 근본이 없듯이 내 마음의 발함도 두 근원이 없다며 호발설 을 부정한 것에 대하여 비판한 것이다.39) 갈암은 율곡설의 그럴싸하다며 태 극과 음양에 두 가지 원리가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형상이 없다는 측면과 기가 있다는 측면을 가지고 말할 경우에 도(道)와 기(器)의 구분이 없을 수 없다며 원론적 측면과 현상적 측면을 구분해 보아야 한다고 보았다. 태극음 양과 인심도심의 미발시 근저(根柢)와 묘맥(苗脈)을 인정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40) 欲膠擾之中乎. 蓋孟子之前, 未有言性善者, 孟子懼是理之不明, 思有以明之. 而但性之本 體, 無聲臭形象之可言, 惟其端緖之發, 最可驗. 由其有四端, 必知其有仁義禮智之性, 猶 百尺之木, 自根本至枝葉, 同一條貫也. 孟子本意, 但以四端爲仁義禮智之發, 而不曾說到 氣上. 故朱子之註解孟子, 未嘗及氣稟之說, 乃曰, 孟子分明是於人身上挑出天之所命者說 與人, 要見得大源皆善也. 今必曰七情兼四端, 欲明四端七情同爲氣發之驗, 其亦異乎朱子 之旨矣, [葛庵先生文集18:3ab 「栗谷李氏論四端七情書辨」] 37) 李氏曰: [發者氣也, 所以發者理也.] 其發而直出於正理, 而氣不用事則道心也. 七情之善 一邊也, 發之之際, 氣已用事則人心也, 七情之合善惡也. 此三條, 出初答成牛溪書, [葛庵 先生文集18:3b 「栗谷李氏論四端七情書辨」 ; 栗谷全書9:36a 「答成浩原」 (論理氣 第 1書)] 38) 愚謂: 李氏言直出於正理, 而氣不用事則道心云者則是矣. 而其曰七情之善一邊云者則不 是. 蓋道心之發, 原於性命而不生於形氣也. 其曰七情之合善惡也者則是矣, 而其曰發之之 際, 氣已用事則人心也者不是. 蓋人心本生於形氣, 不待其發, 而氣已用事而後爲人心也. 李氏旣謂七情包四端, 不如人心道心之相對說下矣, 而又以道心爲七情之善一邊, 又曰氣 已用事而後爲人心, 則不免其說之自相矛盾矣. [葛庵先生文集18:3b - 4a 「栗谷李氏論 四端七情書辨」] 39) 李氏曰: 吾心之用, 卽天地之化也, 天地之化無二本, 故吾心之發, 無二源矣. […] 人心道 心雖二名, 其原則只是一心. […] 若[來書所]謂理氣互發, 則是理氣各爲根柢於方寸之中. 未發之時, 已有人心道心之苗脈, 理發則爲道心, 氣發則爲人心矣. [葛庵先生文集 18:4ab 「栗谷李氏論四端七情書辨」 ; 栗谷全書10:3b-4a … 4b … 4b 「答成浩原」 (論理 氣 第3書)] 17 다섯 번째 조목은 율곡의 인심도심의 관한 비판이다. 율곡은 혹원혹생을 이미 발한 상태를 보고 입론한 것[見旣發而立論]으로 도심은 의리를 위해서 발하고 인심은 식색을 위해서 발한 것으로 이를 미루어 보면 각기 성명이 마음에 있고 혈기로 형체가 이루어졌기 때문으로 호발설의 주장과는 다르다 고 보았다.41) 갈암은 율곡처럼 이미 발한 상태를 보고 입론하였으면서 그 흐 름을 거슬러 올라가 그 근원을 안다고 한 것[泝其流而知其源]은 오히려 호발 설을 발명하기에 알맞은 방식이라고 주장하였다.42) 여섯 번째 조목은 ‘발하는 것은 기이며, 발하는 소이는 리이다’라는 율곡 의 리기 정론에 관한 비판이다.43) 갈암은 율곡이 별 특별한 것도 아닌 것을 자기 주장처럼 천명하며 성인이 다시 나더라도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 였다고 비난하고 있다. 특히 갈암은 율곡이 리기의 체용도 채 파악하지 못하 였으면서 남의 견해를 완색(玩索)하지 않고 임의로 파악하는 병통이 있다고 40) 愚謂: 李氏以天地之化無二本, 明吾心之發無二源, 則似矣而實不然也. 夫形而上者謂之道, 形而下者謂之器, 太極陰陽, 不可謂有二理. 然以無象與有氣而言之, 則不能無道器之分. 故朱子曰, 太極在陰陽中, 非能離陰陽也. 然至論太極, 則太極自是太極, 陰陽自是陰陽, 惟性與心亦然, 所謂一而二, 二而一者也. 朱子語止此. 此言天道人道皆然也. 由此推之, 則天道之元亨利貞, 人性之仁義禮智, 皆是形而上而全是理. 故由是而出焉者, 在天爲繼成 通復之化, 在人爲惻隱羞惡辭遜是非之情. 若天之陰陽氣化, 人之血氣軀殼, 皆是形而下而 雜以査滓. 故造化之施, 或有夏寒冬熱之變, 而所生人物, 便有厚薄美惡, 人心之發, 或有 中節不中節之差, 而食色攻取, 至於化物窮欲. 此何爲而然哉. 於穆不已之命, 純粹至善之 性, 固無有不善, 而以氣化騰倒, 好惡無節, 而有此常變淑慝之分也. 夫然則豈可謂陰陽太 極, 終無形而上下之殊, 而人心道心, 果無根柢苗脈於未發之前耶. [葛庵先生文集18:4b - 5a 「栗谷李氏論四端七情書辨」] 41) 李氏曰: [其]所謂或原或生者, 見其旣發而立論矣. 其發也爲理義, 則推究其故, 何從而有 此理義之心乎. 此由於性命在心, 故有此道心也, 其發也爲食色, 則推究其故, 何從而有此 食色之念乎, 此由於血氣成形, 故有此人心也云爾, 非若互發之說, 或理發或氣發而大本不 一也. [葛庵先生文集18:5a 「栗谷李氏論四端七情書辨」 ; 栗谷全書10:4b-5a 「答成浩 原」 (論理氣 第3書)] 42) 愚謂: 李氏以或原或生之說, 爲見其旣發而立論, 欲以明理發氣發之失. 然孟子欲明人性之 善而先言四端, 以明性之本然, 今以此心之發由義理者, 謂之原於性命, 以此心之發由食色 者, 謂之生於形氣者, 意亦如此. 蓋所謂泝其流而知其源者也. 李氏今所推說, 適所以發明 人心道心發於理發於氣之義, 而猶復云云, 是猶言十, 不言二五而曰五二也, 不亦惑乎. 蓋 李氏之於退陶, 則顯加譏誚, 無所忌憚, 在朱子則多方遷就, 曲求其合, 而卒不能出乎本旨 之外, 其所蔽亦可見矣. [葛庵先生文集18:5b - 6a 「栗谷李氏論四端七情書辨」] 43) 李氏曰: [大抵] 發之者氣也, 所以發者理也. 非氣則不能發, 非理則無所發. 此[=發之以 下]二十三字, 聖人復起, 不易斯言. 無先後無離合, 不可謂互發也. [葛庵先生文集18:6a 「栗谷李氏論四端七情書辨」 ; 栗谷全書10:5a 「答成浩原」 (論理氣 第3書)] 18 리 기 용 비판하였다.44) 일곱 번째 조목은 주자의 리에서 발하고 기에서 발한다는 것[發於理 發於 氣] 전거와는 달리 율곡이 사단은 리만 말한 것이고, 칠정은 기를 겸하여 말 한 것으로 파악한 것에 관한 것이다.45) 갈암은 주자의 혹원혹생과 리발기발 의 주장은 너무나도 명백한데 율곡이 자기 주장만을 위해 그 말의 본지를 잃어버렸다고 비판하였다.46) 여덟 번째 조목은 율곡이 퇴계가 사단을 리발이기수지(理發而氣隨之)라고 한 것에 대해 리기의 선후를 있다고 인정한 것이 되니 이치에 어긋난다고 비판한 것에 대한 변호이다.47) 갈암은 율곡이 퇴계의 리발기수 문제를 제대 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끝까지 문제 삼는다고 보면서 주자와 면재(勉齋) 황간 (黃幹, 1152-1221))의 설을 인용하며 퇴계의 주장을 옹호하고 있다. 특히 여기 서 기가 움직임에 리가 따르고[氣動而理隨之]와 리가 움직임에 기가 리를 낀 다[理動而氣挾之]는 면재의 주장은 퇴계의 설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 퇴 계설의 새로운 전거를 제시하여 준 것이라 할 수 있다.48) 44) 愚謂: 李氏所謂發之者氣, 止 非理則無所發此二十三字, 掇拾前人言句, 揣摸爲說, 則初 非分外奇特, 而便自誇詑以爲聖人復起, 不易斯言則已過矣, 況其所以爲說, 不能無失. 蓋 其意以爲氣之始雖自理發, 及其旣發則動靜云爲機自爾也, 而理無與焉, 殊不知理之所以 爲理者, 其體沖漠無眹, 而爲生物之本, 其用發於事物之間, 而無所不周也. 李氏又譏老先 生理氣互有發用之說, 謾罵虛喝, 前後重沓. 然竊詳老先生當日所論, 則以二者相須, 互在 其中爲說, 初無理氣有分合先後之意. 而李氏勒加把持, 障斷人話頭, 亦可見其不能盡乎人 言, 從容玩索之病也. [葛庵先生文集18:6a - 7a 「栗谷李氏論四端七情書辨」] 45) 李氏曰: 朱子發於理發於氣之說, 意必有在, [… 朱子之意] 亦不過曰四端專言理, 七情兼 言氣云爾, 非曰四端則理先發, 七情則氣先發也. [葛庵先生文集18:7a 「栗谷李氏論四端 七情書辨」 ; 栗谷全書10:5a … 5a 「答成浩原」 (論理氣 第3書)] 46) 愚謂李氏以朱子理發氣發之說, 爲意必有在而釋之曰, 是不過曰四端專言理, 七情兼言氣 云爾, 則其言闊疏無情理. 若朱子之意果出於此, 則其命辭措語必不如此, 安有欲說四端專 言理, 七情兼言氣之故, 而謂四端是理之發, 七情是氣之發乎. 蓋或原或生理發氣發之說, 分外明白, 終不可作別意看. 故羅氏以爲有二岐之見, 奇氏以爲偶發而偏指, 是雖不得其理, 而猶不失其言之本指. 今李氏乃欲驅率前言, 以從己意, 幷與其言而失之, 可謂惑之甚矣. [葛庵先生文集18:7ab 「栗谷李氏論四端七情書辨」] 47) 李氏曰: 退溪[因此而]立論曰, 四端理發而氣隨之, 七情氣發而理乘之. 所謂氣發而理乘之 者可也, 非特七情爲然, 四端亦是氣發而理乘之也. […] 若理發氣隨之說, 則分明有先後 矣, 此豈非害理乎. [葛庵先生文集 18:7b 「栗谷李氏論四端七情書辨」 ; 栗谷全書 10:5ab … 5b 「答成浩原」 (論理氣 第3書)] * 중략부분 9항으로 분리 48) 愚謂: 李氏以理發氣隨一款, 爲決正公案, 持之不置, 然不能盡乎人言, 而遽爲之鍛鍊羅織 者也. 夫所謂理發而氣隨之者, 猶太極動而生陽, 靜而生陰之謂也, 理纔動, 氣便隨之, 豈 有先後之可言乎. 如屈伸在臂, 反復惟手, 屈之伸之, 臂便隨之, 反之復之, 手便隨之. 又如 19 아홉 번째 조목은 율곡이 유자입정(孺子入井)의 비유를 기발[見之而惻隱] 과 리승[惻隱之本則仁]으로 파악한 것과 음양이 동정함에 태극이 이를 탄다 는 것[陰陽動靜而太極乘之]은 맹자와 렴계(濂溪) 주돈이(周敦頤, 1017-1073)) 의 본지를 잃어버렸다고 비판하고 있다.49) 갈암은 맹자가 이 비유를 통해서 밝힌 것은 측은해 하는 것은 리가 발한 것이며, 주렴계는 태극은 스스로 동 정함이 있다는 것을 말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50) 열 번째 조목은 율곡이 퇴계의 사단칠정을 내출외감(內出外感)으로 설명 한 것에 대한 비판에 관한 것이다.51) 갈암은 율곡이 퇴계의 주장을 작위적으 로 해석한 것일 뿐이며, 그 근거로 고봉 기대승에게 보낸 편지에 ‘사단이 외 人乘馬, 馬隨人, 人纔動著, 馬便隨出, 非謂人已出門, 馬尙在廏, 待驅策牽引而后從之也. 朱子曰, 太極動而生陽, 靜而生陰, 非是動而后有陽, 靜而后有陰, 截然有兩段, 先有此而 後有彼也. 朱子說止此. 此其爲說, 較然明甚, 其於理發氣隨, 無離合無先後之義, 可不爲 明證乎. 且李氏必以四端爲氣之發, 欲與七情配合爲說, 則孟子說出四端, 發明人性之善, 大有功於聖門之意, 果安在哉. 勉齋黃氏之言曰, 方其未發, 此心湛然, 及其感物而動, 則 或氣動而理隨之, 或理動而氣挾之, 實與理發氣隨氣發理乘之說, 同條而共貫也. 勉齋之學, 精微縝密, 其於義理源頭處, 不應亂道而誤人. 今若以退陶之說爲非, 則又將指摘勉齋追論 而幷案耶. [葛庵先生文集18:7b-8b 「栗谷李氏論四端七情書辨」] 49) 李氏曰: 見孺子入井, [然後]乃發惻隱之心, 見之而惻隱者氣也, [此]所謂氣發也, 惻隱之本 則仁也, 此所謂理乘之也, 非特人心爲然, 天地之化, 無非氣化而理乘之也. 是故陰陽動靜 而太極乘之, [此]則非有先後之可言也. [葛庵先生文集18:8b -9a 「栗谷李氏論四端七情 書辨」 ; 栗谷全書10:5b 「答成浩原」 (論理氣 第3書)] 50) 愚謂: 李氏以理氣不相離, 非有先後之故, 而謂見孺子而惻隱者氣也, 則失孟子之旨矣, 謂 陰陽動靜而太極乘之, 則又失周子之旨矣. 夫理氣固不相離, 然方其乍見孺子入井時, 心中 本有之理隨觸而發, 心包蓄不住, 氣著脚手不得, 此三轉語節略朱子語. 則惻隱豈非理之 發耶. 孟子元初本意固出於此, 而今以四端爲氣之發則其可乎哉. 夫太極固無聲臭影響之 可言, 然實爲造化之樞紐, 品彙之根柢, 在無物之前而未嘗不立於有物之後, 在陰陽之外而 未嘗不行於陰陽之中, 此亦朱子語. 則不是空虛冥寂, 但爲陰陽氣化所乘載而已也. 故周 子曰, 太極動而生陽, 靜而生陰, 又曰, 動而無動, 靜而無靜, 神也. 朱子釋之曰, 此說動而 生陽, 靜而生陰, 自有箇神在其間, 不屬陰不屬陽, 自是超然於形氣之表, 貫動靜而言, 其 體如是而已矣. 朱子語止此. 此言太極自有動靜也, 何關於氣乎. 今曰陰陽動靜而太極乘 之, 則是以太極爲箇虛無空寂一物事而已, 其可乎哉. 所謂乃發亦未安. [葛庵先生文集 18:9ab 「栗谷李氏論四端七情書辨」] 51) 李氏曰: 竊詳退溪之意, 以四端爲由中而發, 七情爲感外而發, […] 天下安有無感, 而由 中自發之理乎. […] 今若以不待外感, 由中自發者爲四端, 則是無父而孝發, 無君而忠發, 無兄而敬發[矣], 豈人之眞情乎. […] 見孺子入井然後, 此心乃發, 所感者孺子也, 孺子 非外物乎, 安有不見孺子之入井, 而自發惻隱者乎. 就令有之, 不過爲心病耳, 非人之情也. [葛庵先生文集18:9b-10a 「栗谷李氏論四端七情書辨」 ; 栗谷全書10:6a … 6b … 6b … 6b 「答成浩原」 (論理氣 第3書)] 20 리 기 용 물에 감촉하여 발하는 것은 칠정과 다름이 없다’고 한 것을 인용하여 제시하 여 주었다.52) 열한 번째 조목은 율곡이 칠정포사단을 전제로 칠정을 사단에 배속하는 문제에 관한 것이다.53) 갈암은 사단과 칠정은 그 출전이 다르고 그 소종래 (所從來)의 근저도 있어 그 논의의 차원[地頭]이 다른 것으로 이 둘을 뒤섞 여 같게 하거나 비교해 합할 수 없다고 비판하였다. 율곡이 양자의 차이를 궁구하지 않은 채 일도(一途)라고 단정한 것이 그의 병통이라고 애석해 하 고 있다.54) 열두 번째 조목은 율곡이 사단을 주리라고 하는 것은 가능하나 칠정은 리 기를 포괄하여 말한 것이기 때문에 주기라고 할 수 없다는 것 즉 인심도심 과는 달리 사단칠정은 주리주기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55) 갈암은 칠정을 사단과 상대하여 말하였기 때문에 주리주기로 말할 수 있다 52) 愚謂: 李氏謂老先生以四端爲不待外感而由中自發, 張皇其說, 肆爲譏揣. 然今按老先生所 與奇氏書, 則有曰四端感物而動, 固不異於七情. 但四則理發而氣隨之, 七則氣發而理乘之, 未嘗有不待外感, 由中自發之語, 則李氏何從而得此無稽之言乎. 孟子本以見孺子入井而 有怵惕惻隱之心, 明在中之理隨觸而發之義, 老先生固不應背却孟子本義, 而向別處做出 葛藤之說也. [葛庵先生文集18:10ab 「栗谷李氏論四端七情書辨」] 53) 李氏曰: [若]七情[則已]包四端, 不可謂四端非七情, 七情非四端也. 夫人之情, 當喜而喜, 臨喪而哀, 見所親而慈愛, 見理而欲窮之, 見賢而欲齊之者, [以上]喜愛哀欲四情, 仁之端 也. 當怒而怒, 當惡而惡者, 怒惡二情, 義之端也. 見尊貴而畏懼之者, 懼情, 禮之端也. 當喜怒哀懼[之際], 知其當喜怒哀懼[=知其所當喜, 所當怒, 所當哀, 所當懼], 此屬是, 又 知其不當喜怒哀懼者, 此屬非, 智之端也. 善端之發, 不可枚擧, 大槪如此, 七情之外, 更 無四端矣. [葛庵先生文集18:10b-11a 「栗谷李氏論四端七情書辨」 ; 栗谷全書10:7a 「 答成浩原」 (論理氣 第3書)] 54) 愚謂: 四端七情, 各自爲一說, 其不可牽合爲說也久矣. 朱子旣曰四端是理之發, 七情是氣 之發云, 而於七情分配四端之說, 未嘗頷可. 其答喜怒哀樂愛惡欲却似近仁義之問曰, 固有 相似處, 於喜怒愛惡是仁義, 哀懼主禮, 欲屬水則是智之說曰, 且麤恁地說, 但也難分, 其 答喜懼哀欲都自惻隱上發之問曰, 七情不可分配四端, 七情自於四端橫貫過了. 蓋其所從 來, 各有根柢, 所以爲說, 各有地頭, 不可混而同之, 比而合之. 李氏於此未嘗低心下意, 參 互紬繹, 以究其同異, 遽欲以一途槩之. 故其所爲說, 每有巴牽合支離遷就之病, 殊可惜 也. [葛庵先生文集18:11ab 「栗谷李氏論四端七情書辨」] 55) 李氏曰: 四端謂之主理可也, 七情謂之主氣則不可也, 七情包理氣而言, 非主氣也. [人心 道心, 可作主理主氣之說, 四端七情, 則不可如此說, 以四端在七情中, 而七情兼理氣故 也.] 子思論性情之德曰, 喜怒哀樂之未發謂之中, 發而皆中節謂之和, 只擧七情而不擧四 端, 若以[=兄言]七情爲主氣, 則子思論大本達道而遺却理一邊矣, 豈不爲大欠乎. [葛庵 先生文集18:11a 「栗谷李氏論四端七情書辨」 ; 栗谷全書10:7b-8a 「答成浩原」 (論理 氣 第3書)] 21 고 보았다. 바로 이 대목에서 갈암의 혼륜해서 말할 때[有渾淪說底]와 분별 해서 말할 때[有分別說底]의 구분이 제시된다.56) 열세 번째 조목은 율곡이 정암 나흠순의 인심도심체용설은 명의(名義)상 의 잘못이며, 퇴계의 호발설은 대본상의 잘못이라는 것에 대한 변이다.57) 갈 암은 율곡이 사용하는 대본이라는 개념을 리기가 혼륜하여 분개할 수 없음 을 말하는 것으로 모호하게 사용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즉 율곡은 대본 상 분리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혼잡될 수 없음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58) 열네 번째 조목은 율곡이 리기의 설과 인심도심의 설은 한 맥락으로 일관 된 것이기에 인심도심의 두 근원이 없다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59) 이 문제에 대해 갈암은 지각이 의리로부터 나오는 것[從義理上去]과 혈기로부터 나오 는 것[從血氣上去]이 도심과 인심으로 지각하는 것은 하나이나 그 소종래가 각기 위주하는 바가 있는 것이라는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며 율곡처럼 인심 도심을 일도(一途)라고만 주장한다면 성(性)과 기(氣)를 변별하지 못한 것이 56) 愚謂: 李氏謂中庸只言喜怒哀樂而不擧四端, 以明七情之包四端, 似亦有理. 然惜其於聖賢 之意, 得其一而遺其二也. 蓋子思是渾淪言之, 以明未發之前, 一理渾然, 旣發之後, 眞妄 始分, 孟子是挑出言之, 只論其性, 不及氣質, 要人見得源流皆善. 子思說自是子思說, 孟 子說自是孟子說, 語意自不相蒙. 若孟子只就子思所說喜怒哀樂中, 擇取善一邊而爲四端, 則其誰曰孟子專指其發於理者言之, 而爲發前聖所未發乎. 夫以一个物事指而言之, 各有 地頭. 朱子曰, 孔子說性相近, 都渾成, 孟子却只說得性善, 其所言地頭, 各自不同, 必要去 牽合, 便成穿鑿. 又曰, 人心有分別說底, 有不恁地說底, 如單說人心, 都是好, 對道心說, 便是勞攘物事. 愚亦以爲七情有渾淪說底, 如中庸,樂記,程子好學論所說. 有分別說底. 如朱子理之發氣之發, 黃勉齋氣動理隨理動氣挾之類. 今以七情對四端說, 故爲有主氣主 理之分也. [葛庵先生文集18:11b - 12b 「栗谷李氏論四端七情書辨」] 57) 李氏曰: 必以人心道心爲辭, 欲主理氣互發之說, 則寧如羅整庵以人心道心作體用看, 雖失 其名義, 而却於大本上, 不[=未]至甚錯也. 已上十條, 出再答牛溪書. [葛庵先生文集 18:12b 「栗谷李氏論四端七情書辨」 ; 栗谷全書10:9a 「答成浩原」 (論理氣 第3書)] 58) 愚謂: 李氏於羅整庵人心道心爲體用之說, 顯斥其說而陰主其意, 以爲於大本上未錯, 夫李 氏所謂大本者何. 理氣渾淪, 不可分開之謂也. 夫理氣自相依附, 離了陰陽, 固不可以理言. 然就此上面, 當見其本體元不相離, 亦未嘗雜耳. 今以不相離之故, 而不復辨別其所從來者 各有根柢, 以爲人心道心其源則一, 旣發而流於人欲然後, 方有人心道心之別云爾, 則是未 發之際, 理氣混爲一物, 及其旣發然後, 方揀別天理與人欲也. 如此則其所謂大本者, 將不 免和泥帶水, 爲一箇汩董底物事, 豈不大謬乎. [葛庵先生文集 18:12b - 13a 「栗谷李氏 論四端七情書辨」] 59) 李氏曰: 理氣之說與人心道心之說, 皆是一貫. […] 理氣之不相離者, 若已的[→灼]見, 則 人心道心之無二源, 可以推此而知之耳. 惟於理氣有未透, 以爲或可相離, 各在一處, 故亦 於人心道心, 疑其有二源耳. 右出答牛溪別紙. [葛庵先生文集 18:13ab 「栗谷李氏論四 端七情書辨」 ; 栗谷全書10:11a … 11ab 「答成浩原」 (論理氣 第4書)] 22 리 기 용 라고 비판한다.60) 열다섯 번째 조목은 율곡이 리기가 서로 분리될 수 없음을 전제로 인심도 심의 문제를 원일류이[源一流二)의 문제로 파악하면서, 이는 입언하여 사람 을 깨우칠 때 각각 위주로 하는 바[各有所主]를 둔 것이라며 만약 리기를 호 발로 보았다면 주자 역시 잘못된 것61)이라는 견해에 대한 것이다. 갈암은 율 곡이 자기 방식으로 퇴계의 견해를 곡해하였다며, 주자가 성(性)과 기(氣)가 합하여진 것일 따름이니 이미 합한 것을 분석하여 말하면, 성은 리를 위주로 하여[主於理] 형체가 없어 공정하고 선하며, 기는 형체를 주로 하여[主於氣] 질료가 있어 사사로워 선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 바로 도심인심의 구분이 있게 되는 까닭이라고 퇴계설의 정당성을 역설하며 변호하고 있다.62) 열여섯 번째 조목은 열세 번째 조목과 일부 중첩되는 주제로 정암의 잘못 은 명목(名目) 상에 있고 퇴계의 잘못은 명의(名義) 상에 있으니 퇴계의 잘못 이 더 크다63)는 것에 대하여 갈암은 정암에 대한 비판은 인정할 수 있지만, 60) 愚謂: 心之虛靈知覺非有二體, 而其知覺從義理上去者, 謂之道心, 從血氣上去者, 謂之人 心. 知覺則一, 而所從來者, 各有所主, 則不害其以一心而有兩樣也. 故程子以人心道心, 判爲天理人欲, 分作兩邊說, 朱子亦以爲人心者, 血氣和合做成, 道心是稟受得仁義禮智之 心, 自其根本而已, 劈做兩片說. 蓋天理人欲, 不是同體而異用者也. 今以理氣渾淪不可分 開之故, 而謂人心道心之發, 本是一途云爾, 則是以天理人欲渾爲一區, 有辨別性氣兩字不 出之病. 其可以此, 而譏別人於理氣有未透耶. 所謂舍己黼頇, 而謂人黼頇者也. [葛庵先 生文集18:13b - 14a 「栗谷李氏論四端七情書辨」] 61) 李氏曰: 理氣[=二者]不能相離, […] 人心道心, 孰非原於理[乎. …] 源一而流二, 朱子豈 不知之乎, 特立言曉人, 各有所主, [… 朱子] 若眞以爲理氣互有發用, [… 相對各出] 則是 朱子亦誤也, 何以爲朱子乎. [葛庵先生文集18:14a 「栗谷李氏論四端七情書辨」 ; 栗谷 全書10:12a … 12a … 12a … 12b 「答成浩原」 (論理氣 第4書)] 62) 愚謂: 李氏以爲人心道心皆原於理, 朱子非不知源一流二, 但立言曉人, 各有所主, 則是不 得於言而不反求諸心, 從而爲之辭也. 夫或原或生之說, 已極分曉, 而彼猶且多方遷就, 曲 生訓解, 則固無可言者. 然朱子答蔡季通書曰, 人之有生, 性與氣合而已, 卽其已合而析言 之, 則性主於理而無形, 氣主於形而有質. 主理故公而無不善, 主形故私而或不善, 公而善, 故其發皆天理之所行, 私而或不善, 故其發皆人欲之所作. 此所以有人心道心之別. 蓋自其 根本而已然, 非爲氣之所爲有過不及而後流於人欲也. 朱子語止此. 此其爲說, 八字打開, 少無疑晦難明之處. 其與李氏所謂人心道心源一而流二者, 果何如耶. 此則不待辨說, 而其 同異判然矣, 朱子若道我本意如此, 莫枉帶累我, 則將何辭以對耶. [葛庵先生文集 18:14a -15a 「栗谷李氏論四端七情書辨」] 63) 李氏曰: 羅整庵識見高明, [儒近代傑然之也.] 有見於大本, 而卽疑朱子有二岐之見, 此則 雖不識朱子, 而却於大本上有見矣. 但以人心道心爲體用, 失其名義, 亦可惜也. 雖然, 整 庵之失, 在於名目上, 退溪之失, 在於性理上, 退溪之失較重矣. [細註] 已上二條, 出重答 牛溪第一書, [葛庵先生文集18:15a 「栗谷李氏論四端七情書辨」 ; 栗谷全書10:13b 「 23 퇴계에 대한 언급은 견강부회한 것으로 변설할 필요조차 없다고 문제 자체 를 애써 부정한다.64) 열일곱 번째 조목은 천지의 변화와 마음의 발용 모두 기발이승(氣發理乘) 이라는 율곡의 주장65)에 대한 반론이다. 갈암은 바로 이 주장이 율곡이 주장 하는 본원강령(本原綱領)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만약 율곡과 같다면 리를 허 무공적한 것[虛無空寂底物]으로 보아서 만화의 근본이 될 수 없다고 보았다. 갈암은 퇴계처럼 ‘하나의 리가 혼연하여 동정을 관통하고 주장한다[一理渾 然, 貫動靜而爲之主]’라는 전제 하에 주자의 리유동정(理有動靜)에 관한 전거 와 면재의 ‘동정은 리가 탄 바의 작용이다[動靜者所乘之機]’라는 주장 등을 미루어 리에 동정이 있다는 퇴계의 주장이 보다 타당함을 역설하고 있다. 그 는 율곡이 리를 음양이 동정하기 전[未然]에 있는 것으로 보고 유행 발용함 [已然]에는 간여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음양의 기화가 스스로 동정하는 것 으로 오해하였다고 비판하고 있다.66) 答成浩原」 (論理氣 第4書)] 64) 愚謂: 李氏推尊整庵, 以爲大本上有見, 而却譏其不識朱子者, 所謂販私鹽者, 得數片鯗魚, 鯗音想, 乾魚腊. 遮蓋過得關津者也. 羅氏顯斥朱子有二岐之見, 誠爲可罪. 然自立己見, 別作一義, 不復強爲牽合, 差却本文正義, 則猶賢於郢書燕說多方遷就者之爲尤無謂也. 其 以人心道心爲體用之說, 爲名目上失, 其以四端七情互有發用之說, 爲性理上失者, 尤所未 曉, 今不必辨. [葛庵先生文集18:15ab 「栗谷李氏論四端七情書辨」] 65) 李氏曰: 氣發而理乘者,[何謂也.] 陰靜陽動, 而機自爾也, 非有使之者也. 陽之動, 則理乘 於動, 非理動也. […] 陰之靜, 則理乘於靜, 非理靜. […] 陰靜陽動, 其機自爾, 而其所以 陰靜陽動者, 理也. 夫所謂動而生陽, 靜而生陰者, 原其未然而言也. 動靜所乘之機者, 見 其已然而言也. […] 理氣之流行, 皆已然而已, 安有未然之時乎. 是故天地之化, 吾心之發, 無非氣發而理乘之也. 右出答牛溪長書. [葛庵先生文集18:15b-16a 「栗谷李氏論四端七 情書辨」 ; 栗谷全書10:26b … 26b … 26b-27a … 27a 「答成浩原」 (論理氣 第5書)] 66) 愚謂: 李氏謂陰陽動靜, 機自爾也, 非有使之者也, 陽動則理乘於動, 陰靜則理乘於靜, 非 理動靜也, 此實李氏主意所在本原綱領. 前後許多云云, 皆自此一模中脫出也. 夫理雖無爲, 而實爲造化之樞紐, 品彙之根柢, 若如李氏之說, 則此理只是虛無空寂底物, 不能爲萬化之 原, 而獨陰陽氣化, 縱橫顚倒, 以行其造化也, 不亦謬乎. 夫一理渾然, 貫動靜而爲之主. 故 化生發育, 錯行代明, 萬端千緖, 不失條序, 夏熱冬寒, 水流山峙, 馬鬣牛角, 李白桃紅, 亘 萬古如一日. 若不以理爲主, 而一任陰陽氣化之爲, 則必將夏寒冬熱, 山夷川涌, 馬生牛角, 桃樹生李花, 其詭異差忒殆不可名狀矣. 故朱子之解太極曰, 性爲之主, 而陰陽五行, 爲之 經緯錯綜. 又曰, 春夏爲陽, 秋冬爲陰, 從古至今, 只是這箇陰陽, 是孰使之然哉, 乃道也. 其答鄭子上書曰, 理有動靜, 故氣有動靜, 若理無動靜, 氣何自而有動靜乎. 又有問太極是 兼動靜而言曰, 不是兼動靜, 太極有動靜. 又勉齋黃氏推說動靜者所乘之機之義曰, 太極是 理, 陰陽是氣, 然理無形而氣有迹, 氣旣有動靜, 則所載之理, 安得謂之無動靜. 凡此數說, 發明理有動靜之義, 如此分曉, 其與李氏所論陰陽動靜, 其機自爾, 非有使之者也, 理乘於 24 리 기 용 열여덟 번째 조목은 리는 작위함이 없고[無爲] 기는 작위함이 있다[有爲] 는 율곡의 리기 원론의 전제67)에 대한 비판이다. 갈암은 율곡성리학의 주장 들이 바로 이 전제에 근거한 것으로 ‘있는 것들을 비어 있다고 여기는 것[空 諸所有之遺意]’이라는 불교의 전형적인 오해에 다름 아니라고 비판한다. 그 는 리는 반드시 쓰임이 있으며[理必有用], 리가 마음 속에 있어 일에 따라 발한다[理在心中 隨事而發]는 주자의 말을 원용하면서 리가 스스로 작용 함이 있다[理自有用]고 반론을 제시하고 있다.68) 열아홉 번째 조목은 율곡이 리기의 불상리(不相離)의 오묘[妙]함을 전제로 호발설을 비판한 것69)에 대하여 퇴계설을 옹호한 것이다. 율곡은 퇴계의 견 動靜, 非理自有動靜之說, 果不相戾耶. 李氏又謂夫所謂動而生陽, 靜而生陰者, 原其未然 而言也, 動靜所乘之機者, 見其已然而言也. 理氣之流行, 皆已然而已, 安有未然之時乎. 蓋其意似若以理爲在陰陽動靜未生之前, 及其流行發用, 則理無所與, 而獨陰陽氣化, 自爲 動靜者然, 何其說之謬耶. 夫靜卽太極之體也, 動卽太極之用也, 一箇太極, 流行於已發之 際, 斂藏於未發之時, 動便屬陽, 靜便屬陰, 卽此陽動陰靜, 便是所乘之機, 又豈有未然已 然之分乎. 此與蘇氏所謂物生而陰陽隱, 善立而道不見者, 語意相類. 蓋不知理之所以爲理 而揣摸言之, 故其說每如此. 雖自謂於理已融會沕合, 而亦可見其未嘗實有所見也. [葛庵 先生文集18:16a -17b 「栗谷李氏論四端七情書辨」] 67) 李氏曰: 所謂氣發而理乘之者, 非氣先於理也, 氣有爲理無爲, 則其言不得不爾也. […] 若 非氣發理乘一途, 而理亦別有所爲[=作用], 則不可謂理無爲也. 孔子何以曰, 人能弘道, 非 道弘人乎. 上同. [葛庵先生文集18:17b-18a 「栗谷李氏論四端七情書辨」 ; 栗谷全書 10:27a … 27a 「答成浩原」 (論理氣 第5書)] 68) 愚謂: 李氏主張氣發理乘之說, 而以理發氣隨, 爲有先後離合之失. 故恐其說之自相矛盾, 以爲其所云云, 非謂氣先於理也. 氣有爲理無爲, 若非氣發理乘一途, 而理亦別有所爲, 則 不可謂理無爲也, 其說百端千緖, 參錯重出, 然考其要歸, 則惟此段及上段, 爲其關棙. 蓋 李氏嘗聞理無爲之說, 常認理爲虛無空寂, 不復知其妙萬物而樞紐乎造化, 豈釋氏所稱空 諸所有之遺意耶. 或有問於朱子曰, 大學或問中有曰理雖散在萬物, 而其用不外乎人心, 不 知是心之用否. 曰理必有用, 何必又說是心之用. 又曰, 理在心中, 心包蓄不住, 隨事而發. 又曰心無私欲, 卽是仁. 然又須識得此處, 便有本來融融洩洩氣象, 乃爲得之. 夫理自有用, 隨觸而發, 藹然有如許氣象, 雖其方在氣中, 氣不用事時, 乍觸便應, 氣著脚手不得也. 然 而理才動, 氣便隨之, 曷嘗有判作兩片, 各自爲動靜而別有所爲者乎. 惟其不相離, 而亦不 相雜, 故雖當天地之氣昏明駁雜之時, 只是氣自如此, 理却只恁地. 但理弱而氣強, 管攝 他不得, 故有人能弘道, 非道弘人之說也. 雖然, 仁義禮智根於心, 雖化物窮欲, 反復梏亡 之餘, 或因反躬而求, 或因夜氣之息, 惻然而動, 藹然而發, 天理初未嘗息滅也. 其可以理 之無爲, 而只做空蕩蕩底物事看耶. [葛庵先生文集18:18a -19a 「栗谷李氏論四端七情 書辨」] 69) 李氏曰: 退溪互發二字, [則似非下語之失] 不能深見理氣不相離之妙[也]. 性情本無理氣互 發之理. [… 凡性發爲情,] 只是氣發而理乘[等之語, …] 除是有二性, [然後]方有二情耳. 若如退溪之說, 則本然之性在東, 氣質之性在西, 自東而出者, 謂之道心, 自西而出者, 謂 25 해와 같다면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은 각기 동서에 나뉘어져 있어 이로부터 도심과 인심이 나오는 것과 같다고 지적하였다. 갈암은 퇴계의 인마의 비유 야말로 정밀하고 타당한 설명으로 각기 위주 하는 바에 나아가 말한 것[各就 所主言之]으로 어세(語勢)가 부득불 그러한 것일 뿐인데 율곡이 잘못 파악한 것이라고 비난하고 있다.70) 스무 번째 조목과 스물한 번째 조목은 갈암이 후기에서 밝히고 있는 바 와 같이 율곡의 성리설에 적지 않은 의혹들도 많으나 분별할 겨를이 없다며 예시적으로 들은 것인데, 율곡이 도심을 본연지기(本然之氣) [그리고 인심을 소변지기(所變之氣)]로 파악한 것71)은 정자의 인심인욕 도심천리의 본지를 잃고 기(氣)의 정수를 성(性)으로 본 잘못에 빠진 것이는 지적72)과 정자의 인생기품리유선악(人生氣稟理有善惡)의 리를 기를 타고 유행하는[乘氣流行] 리로 본 것73)에 대하여 이 리(理) 자는 합(合) 자로 보아야 한다는 주자의 뜻 을 잃은 것으로 가린 것이 정밀하지 못하고[擇焉而不精], 말한 것이 상세하 지 못하다[語焉而不詳]고 비판적 관점에서 제시한 문제들이 바로 여기에 해 당한다.74) 之人心, 此豈理耶. 若曰性一, 則又將以爲自性而出者, 謂之道心, 無性而出者, 謂之人心, [此]亦豈理耶. 右出答牛溪第五書. [葛庵先生文集18:19a 「栗谷李氏論四端七情書辨」 ; 栗谷全書10:29a … 29b … 29b-30a 「答成浩原」 (論理氣 第6書)] 70) 愚謂: 李氏謂退溪不能深見理氣不相離之妙, 而有理氣互有發用之說. 然今按老先生所與 奇氏反復之意, 其答辨曰, 之五曰古人以人乘馬出入, 比理乘氣而行. 蓋人非馬不出入, 馬 非人失軌途, 人馬相隨不相離. 或指言人行, 則不須幷言馬, 而馬在其中, 四端是也. 或指 言馬行, 則不須幷言人, 而人在其中, 七情是也. 其取譬精切, 語意完備, 曷嘗有離氣言理 之失乎. 孟子曰, 志壹則動氣, 氣壹則動志, 朱子曰, 志在此, 氣亦隨之, 此則志氣互有所動, 而志動氣亦隨也. 夫志, 氣之帥也, 氣, 志之卒徒也, 其相依附而不相離, 豈有以異於理之 與氣哉. 然而各就所主而言之, 語勢不得不爾. 又可指謂互有所發而譏之乎. 大抵看文字, 各就地頭, 觀其指意之如何耳. 今以理氣不相離之故, 而將理發氣發字, 作理發時氣在一 邊, 氣發時理在一邊樣. 至發在東在西有性無性之語, 則非惟不察於理, 亦失看文字之法矣. [葛庵先生文集18:19b -20a 「栗谷李氏論四端七情書辨」] 71) 栗谷全書10:28ab 「答成浩原」 (論理氣 第6書) 72) 凡此十九條所辨, 雖不能切中其膏肓, 然已略執其咎矣. 自餘背理害義處, 亦多有之. 如以 道心爲本然之氣者, 失程子人心是人欲道心是天理之旨, 而反陷劉叔文以氣之精者爲性之 失. 73) 栗谷全書9:39a 「答成浩原」 (論理氣 第2書) 74) 以人生氣稟理有善惡之理字, 說作乘氣流行之理[栗谷全書 9:39a 「答成浩原」 (論理氣 第2書) , 則失朱夫子此理字當作合字看之旨, 豈非韓子所謂擇焉而不精, 語焉而不詳者耶. 如此類計亦不少, 而今不暇盡辨. 26 리 기 용 이상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갈암이 율곡이씨논사단칠정서변에서 지적 한 율곡의 성리설 19조목(+2조목)은 모두 우계와의 논변 속에 나타난 답성 호원(答成浩原)임신(壬申)에서 개진된 율곡의 견해나 주장으로 제한되어 있 다. 즉 율곡의 다른 여러 저작들에 나타난 견해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그 리고 그가 비판으로 삼은 내용도 대부분 기발이승일도(氣發理乘一途)에 이에 기초한 사단칠정, 인심도심에 관한 심성정에 관한 내용들에 국한되어 있다. 퇴계학파의 율곡비판의 쟁점은 일반적으로 이상에서 나타난 갈암의 비판 의 주제인 율곡의 리기 정론 및 그에 따른 심성정의 견해에 관한 것 외에 인 심도심상위종시(人心道心相爲終始)와 리통기국(理通氣局)에 대한 의혹제기나 비판을 포함하고 있다. 여기서 뒤의 두 문제는 퇴계학파 뿐만 아니라 기호학 파 내부에서도 제기되는 쟁점이기도 하다. 그런데 갈암의 율곡비판은 이 두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며, 율곡의 리기 정론 즉 기발이승일도 및 심 성정에 대한 주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갈암의 문제 지적과 이에 대한 변 을 살펴보면 퇴계의 리기 호발설과 사단칠정, 본연지성기질지성, 도심인심을 대설로 파악하는 유비적 체계를 옹호하며 율곡의 리기 심성론의 문제들을 비판하는 것으로 일관되어 있다. 이러한 관점은 율곡 성리학에 대한 이해보 다는 비판에 초점을 맞춘 전형적 유형의 대표적 예라 할 수 있다. 특히 갈암의 율곡이씨논사단칠정서변모두(冒頭)에 갈암의 저술 의도가 잘 드러나 있는데, 한마디로 율곡이후 기호지방에서 이루어진 세태를 지적 하며 율곡의 주장을 체계적으로 비판하며 퇴계설을 옹호, 변호하려는 것이 갈암 자신이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저술 동기이자 목적이다. 지금 율곡의 설이 양호지방에 많이 퍼져 리기무호발론(理氣無互發論)으로 전고 에 발명하지 못한 것을 드러낸 것은 문자가 생긴 이래 일찍이 없었던 것이라고 생 각하여 공공히 서로 전하는 것이 만연히 행해지니 학문이 끊어지고 도가 쇠미해져 세상 사람들이 자못 현혹되고 있다. 그러므로 나의 역량을 헤아리지 못하고 율곡 이 우계(牛溪) 성혼(成渾)에게 보낸 편지 중 이치에 해가 되는 것을 모아 조목조목 변파(辨破)함으로써 당세의 미혹을 깨우치고자 하였다.75) 75) 葛庵先生文集18:1b 「栗谷李氏論四端七情書辨」. 今其說頗行於兩湖間, 以爲理氣無互 發之論, 發前古所未發, 書契以來未嘗有, 公相傳道, 蔓延肆行, 學絶道衰, 世頗惑之. 故竊 不自揆, 掇取其所與牛溪成氏書中所言尤害於理者, 輒敢逐條爲之辨, 欲以曉當世之惑. 27 갈암은 율곡의 리기 심성론의 전제가 되는 리기정론(理氣定論) 뒤에 덧붙 인 성인이 다시 나더라도 이 말은 바꿀 수 없다는 것 등을 의식하며 문제를 제기하였는데, 여기서 리기무호발론(理氣無互發論)은 곧 즉 율곡의 주장과 이를 계승하는 기호학파의 기발이승일도(氣發理乘一途)를 말하는 것이며 이 에 대한 갈암의 비판은 곧 기호지방 곧 당시 서인들을 향해 퇴계의 주장을 옹호하며 율곡의 이론적 문제점들을 지적한 것이다. 갈암의 아들 밀암 이재에 의해 작성된 갈암의 연보에 따르면 앞에서 살펴 본 바 갈암의 율곡이씨논사단칠정서변에 나타난 쟁점들이 더욱 명료하게 정리되어 있다. 퇴계선생이 기고봉과 함께 사단칠정에 논한 것이 있는데 반복하여 토론하여 오 랜 뒤에야 의견이 합일된 것으로 참으로 백대 뒤라도 의혹이 없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율곡은 바로 의리가 명확하지 않다고 배척하면서 멋대로 비난을 가하기를 거리낌 없이 하였으며 그 무리들은 서로 조술하면서 리기는 호발함이 없다는 주장 을 전대의 성현들이 미처 밝히지 못한 점이라고 하면서 기(氣)를 리(理)로, 인욕(人 欲)을 천리(天理)로, 리(理)를 공허 적멸한 것으로 간주하는데 이르니 그 유폐를 말 로 다 할 수 없다. 선생은 마침내 율곡이 우계에게 보낸 편지들 중에서 특히 이치 에 맞지 않는 부분들을 조목조모 변론하여 깨뜨리고 이름하여 율곡사단칠정서변 이라고 하였다.76) 여기서 밀암이 칭한 ‘율곡사단칠정서변(栗谷四端七情書辨)’은 갈암의 율 곡이씨논사단칠정서변으로 그가 이해한 부친 갈암이 제기한 율곡과 기호학 파의 성리설이 갖는 원론적 문제들을 밀암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정리하 였다. 첫째 기(氣)를 리(理)로 간주하는 것[認氣爲理], 둘째 인욕(人欲)을 천리 (天理)로 간주하는 것[認人欲爲天理], 그리고 셋째 리(理)를 공허 적멸한 것으 로 간주하는 것[認理爲空虛冥寂底物事]이 그것이다. 76) 葛庵先生文集부록 1:13a-4b 「年譜」 14년 戊辰(1688)조. (愚潭丁公來訪 … ) 八月, 栗 谷四端七情書辨成. [세주] 先生以退陶李先生與奇高峯有四端七情辨, 反復論訂, 久乃歸 一, 眞所謂百世以俟而不惑者. 栗谷李氏直斥以義理不明, 肆加譏誚, 不少顧忌, 其徒轉相 祖述, 至以爲理氣無互發之說, 發前聖所未發. 公然認氣爲理, 認人欲爲天理, 認理爲空虛 冥寂底物事, 其流之禍, 將有不可勝言者. 遂就其所與成牛溪渾書中尤無理者, 逐條辨破, 名之曰栗谷四端七情書辨. 28 리 기 용 더 나아가 밀암은 율곡의 잘못을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쟁점으로 정리하였 다. 첫째, 갈암은 율곡이 칠정이 사단을 포함한다는 것은 근사하지만 하나만 알았지 다른 하나는 모른 것이라고 지적하며, 이것은 선현들이 혼륜해서 말 하는 것[渾淪言之]과 도출해서 말하는 것[挑出言之]을 구분하지 못하고 주장 하는 것 즉 그 말한 바의 입장 혹은 상황이 각기 다른 것[其所言地頭, 各自 不同]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는 것이다. 갈암은 인심과 도심 의 문제도 지적하며 혼륜해서 말할 때[渾淪說底]와 분별해서 말할 때[分別說 底]로 나누어 보아야 하며, 사단 대(對) 칠정의 문제는 분별해서 말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리와 주기로 구분해서 말한 것이라고 퇴계의 주장을 옹호 하며 율곡의 설을 비판하였다. 둘째는 밀암은 퇴계와 갈암의 견해를 리는 비록 작위함이 없지만 조화의 추뉴(樞紐)이고 만물의 근저(根柢)가 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율곡의 본 원 강령을 “음양동정 기자이야(陰陽動靜, 機自爾也)”라고 주장하는 부분에 있다고 보고, 만약 이와 같다면 리는 허무하고 공적한 것이 되어 버리니 기 를 리로 간주하게 된 것이라고 비판하며 리에 동정이 있다는 것을 명확히 밝혔다고 정리해 주었다.77) 77) 葛庵先生文集부록 1:13a-4b 「年譜」 14년 戊辰(1688)조. 略曰, 李氏謂中庸只言喜怒哀 樂而不擧四端, 以明七情之包四端, 似亦有理. 然惜其於聖賢之意, 得其一而遺其一也. 蓋 子思是渾淪言之, 以明未發之前, 一理渾然, 旣發之後, 眞妄始分, 孟子是挑出言之, 只論 性, 不及氣質, 要人見得源流皆善. 子思說自是子思說, 孟子說自是孟子說. 若孟子只就子 思所說喜怒哀樂中擇善一邊而爲言, 其誰曰孟子專指其發於理者言之, 而爲發前聖所未發 乎. 朱子曰, 孔子說性相近, 都渾成, 孟子却只說得性善, 其所言地頭, 各自不同, 必要去牽 合, 便成穿鑿. 又曰, 人心有分別說, 有不恁地說, 如單說人心, 都是好, 對道心說, 便是勞 攘底物事. 愚亦以爲七情有渾淪說底, 有分別說底. 今以七情對四端說, 故有主理主氣之分 也. 又曰, 李氏謂陰陽動靜, 機自爾也, 陽動則理乘於動, 非理動也, 陰靜則理乘於靜, 非理 靜也. 此實李氏主意所在, 本源綱領也. 夫理雖無爲, 而實爲造化之樞紐品彙之根柢, 若如 李氏之說, 此理只是虛無空寂, 不能爲萬化之原, 而陰陽氣化縱橫顚倒, 以行其造化也, 不 亦繆乎. 夫一理渾然, 貫動靜而爲之主故化生, 發育, 錯行代明, 萬端千緖, 不失條序, 若不 以理爲主, 而一任氣化之爲, 則必將夏寒冬熱, 山夷川涌, 馬生牛角, 桃樹生李華, 其詭異 差忒, 不可名狀矣. 故朱子曰, 春夏爲陽, 秋冬爲陰, 從古至今, 只是這箇陰陽, 是孰使之然 哉, 乃道也. 又曰, 理有動靜, 故氣有動靜, 若理無動靜, 氣何自而有動靜乎. 凡此數說, 發 明理有動靜之義, 如此分明, 其與李氏所論陰陽動靜自爾也, 非理自有動靜之說, 果不相戾 邪云云. 後與知舊往復論辨亦多. 29 4. 결론 이상에서와 같이 갈암의 율곡이씨논사단칠정서변에 나타난 율곡 성리 학 비판의 문제들은 율곡의 리기론적 이해 즉 기발이승일도설과 이에 기초 한 사단칠정, 본연지성기질지성, 인심도심 등에 관한 것이었다. 갈암이 지적 한 19조목들을 쟁점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사단 칠 정의 일도설과 주리 주기 배분여부, 칠정 포(包) 사단과 칠정 대(對) 사단, 퇴 계와 율곡의 리기 정의와 사단칠정과 인심도심의 일치, 그리고 이에 따른 사 단칠정과 인심도심, 칠정의 사단 배속과 사단칠정 불가분배설, 기발이승일도 의 비판을 통한 이기호발설의 천명 등의 문제들이 그것이다. 이것은 다시 율 곡의 기발이승일도적 혼륜설에 대한 비판과 퇴계의 리기호발적 분개설 변호 라고 요약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기호학파 내에서 제기된 율곡비판과 퇴계학파에서 제기한 율곡비판의 공 통점과 차이점이 있다. 퇴계학파와 율곡학파의 율곡 비판의 공통점은 율곡 의 리통기국 및 인심도심 상위종시에 대한 해석의 이견이며, 양 학파의 차이 점은 리기호발과 기발이승일도의 원론적 차이 및 그에 따른 심성정에 대한 입장의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갈암의 율곡비판은 앞선 활재가 변론 이기서에서 언급하며 한 조목으로 삼은 리통기국에 대한 언급이나 우담이 사칠변증에서 지적한 인심도심상위종시설과 리통기국에 대한 구체적 비판 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갈암의 율곡이씨논사단칠정서변 저술에 영 향을 미치고 후에 더 치밀한 사칠변증을 저술했던 우담은 퇴계학을 무조 건적으로 신봉하면서 퇴계의 설만 옹호하기에 급급하지 않았다. 그는 율곡 의 문제들을 핵심적으로 파악·분석하고 그것을 비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율곡의 견해 가운데서 타당하다고 생각한 부분에 대해서는 수용하면서 비판 하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이것은 갈암의 율곡비판은 퇴계와 율곡의 원론적 차이에 초점을 맞추고 있 을 뿐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갈암은 율곡의 리기심성론에 대하여 율곡이씨논사단칠정서변을 통하여 원론적 차이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비판 을 하며 퇴계의 설을 옹호변호하는데 일방적으로 급급한 듯 보인다. 즉 갈암 의 율곡 성리학 비판은 율곡학 전반에 대한 이해와 그 문제점 지적보다는 율 곡학의 비판을 통한 퇴계학의 옹호변호에만 초점이 맞추었다는 것이다. 30 리 기 용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암은 이후 상대의 장점을 인정하되 원론적 관점에서 문제를 지적할 수 있는 선하를 열어주었으며, 혼륜해서 말할 때[渾淪說底]와 분별해서 말할 때[分別說底]를 대별하여 구분해 줌으로써 퇴계와 율곡의 성 리설을 우열의 차별이 아닌 서로의 다름이라는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서술할 수 있게 한 단초를 제시하였다. 이러한 점들을 통해서 볼 때 갈암의 율곡 비 판은 논문 모두에서 분류한 첫째 범주인 ‘우열의 차별을 의식한 총체적 비 판’의 수장(首將)으로 자리매김하기에 충분하다 할 수 있다. □ 참고문헌 □ 1. 葛庵集, 민족문화추진회, 한국문집총간 127․128집. 2. 葛庵先生文集 3. 栗谷全書,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1978. 4. 朝鮮王朝實錄 5. 拙齋先生文集 6. 退溪全書,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1958. 7. 活齋集 8. 민족과 사상연구회 편, 사단칠정론, 서울, 서광사, 1992. 9. 배종호, 한국유학사, 연세대학교 출판부, 1983. 10. 유명종, 『조선후기성리학』, 이문출판사, 1988. 11. 이병도의 한국유학사(아세아문화사, 1989,) 209-211면. 12. 조준하 외, 한국인물유학사3, 한길사, 1996). 13. 최영성, 『한국유학통사 , 서울, 심산, 2006. 14. 현상윤, 조선유학사 (서울, 민중서관, 1948, 현음사, 1896) 245-247면. 15. 황의동, 기호학파의 철학사상, 예문서원, 1995. 16. 리기용, 율곡 이이의 인심도심론 연구, 서울, 연세대 대학원, 1995. 2. 외 다수논문 (각주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