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다미가 있는 숙소 이시쵸에서 아침을 맞이한다. 07:00 친절한 종업원에게 감탄하며 아침식사. 느끼하지만 그런대로 먹을만했다.
08:35 숙소에서 출발하여 청수사로 향한다. 함박눈이 내린다. 30년만에 최고한파라고 한다. 지구촌의 이상기온이 여기에도 따라왔네~ 교토는 우리나라 경주처럼 고도이다. 현재 2000개가 넘는 절과 신사, 궁궐 및 수십개의 정원이 있다고. 794년에서 1868년까지 일본의 수도였던 교토.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총공격때 폭격대상에서 제외되었던 곳으로 오랜 역사를 자랑하며 보존된 도시라고 한다.
청수사는 798년에 처음 세워졌고 1633년에 재건되었다. 단청을 입히지 않은 모습이 아름다워보인다. 세개의 물이 떨어지는 곳에서 물을 받아마셨다. 기원하는 바가 다 다르지만 난 믿지 않기에 아무거나 받아 마셨다. 그 물 마시고 다 소원이 이루어진다면 웃긴 일이다~
임진왜란때 조선의 병사들의 귀를 베어오라는 것이 시초가 되어 나중에는 코를 베어오게 했다고 한다. 상하지 않게 소금물에 절구어서 운반했다고 한다. 끔찍한 역사. 역사는 미치광이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굴러가는 것 같다. 91세 되신 노인분이 한국에 속죄하기 위해 지키고 계셨다. 60년간을 돌보고 계신다고 하였다. 어디든 양심은 살아있어 마음을 훈훈하게 한다.
조금 떨어진 곳에 커다란 종하나만이 남아있는 방광사가 있다. 도요토미가 천하통일 후 어머님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은 절이 그 후 화재로 불타버리고 그의 아들 히데요리가 방광사를 재건하는 과정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모함에 넘어가 가문이 멸망하는 계기가 되었던 유명한 절이라고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미천한 신분. 15세 때 무사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고 집을 나와 여러지방을 돌아다닌 끝에 18세 때 오다 노부나가의 말을 관리하는 일을 하였다. 19세때에는 오다 노부나가의 신을 들고 따라다니는 일을 맡았다. 어느 추운 겨울날 주군인 노부나가가 긴급히 출동하기 위해 신발을 신었는데 훈기가 배어 따뜻하여 알아본즉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신발을 밤새 품속에 안고 자신의 체온으로 따뜻하게 하여 감동했다고- 주군을 위해 열심히 일했던 히데요시의 생활태도나 유머와 인정미 등이 주군의 마음을 끌어 지휘관으로까지 오르게 되었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최대의 라이벌 모리를 공격하였으나 고전하자 자신을 도와주려고 오던 주군이 부하에게 불의의 습격을 당해 자살한 것을 알고는 적장인 모리와 강화를 맺는다. 즉시 군대를 되돌려 반란을 일으켜 주군을 자살하게 한 미쓰히데 군대를 공격하여 무찔러 주군의 뒤를 이어 천하의 실권을 잡게 되었다. 그리하여 1590년 전국을 통일하고 다도를 보급시켰으며 농민들의 봉기를 방지하고 경작에만 전념하도록 하기 위해 일체의 무기를 빼앗는 [가타나가]를 실시하였다고 한다. 우리에게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다음으로 간 곳은 금각사.
금분을 입힌 곳. 눈이 더 아름답더이다. 세심하게 꾸며진 정원을 돌아 나왔다. 춥고 배고프다.
광륭사는 일본 국보 1호가 모셔져 있는 절이다. 몇 군데의 절을 돌아다니며 스님을 보지 못했는데 일본의 스님은 절에서 기거하는 것이 아니라 출퇴근한다고~ 우리의 국보 금동미륵반가상과 매우 비슷하게 생겼고 고대 일본에는 없는 적송으로 만들어져 신라(혹은 백제)가 왜 황실에게 선물한 것으로 학계에 알려져있지만 안내문에는 절대로 적혀있지 않다고 한다. 그 옆으로는 우는상투머리 불상, 광륭사를 짓고 불상을 안치시켰다는 신라인 진하승 부부상이 안치되어 있으나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고 기록되었단다. 우리의 국보는 유리안에 전시되어 있는데 이곳의 국보들은 그런 테두리가 없다. 저렇게 보존해도 되는건지..다른 기술적인 것이 숨어있는건지 궁금해진다. 저들의 기술력이 얼만큼인지도 모르면서 웬지 뭔가가 더 있을것만 같으이...
14:40 니조성도착. 1601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축성을 명령하여 1603년에 입성하였다고 한다. 마루를 밟으면 소리가 나는데 우구이수바리(꾀꼬리마루)라고 하였다. 마루판을 밟으면 꺾쇠가 위아래로 움직이고 꺾쇠와 못의 마찰음이 마치 휘파람새 소리처럼 나도록 하여 적이 침입할 경우 이 소리를 듣고 즉시 반격할 수 있는 용도로 쓰였다고 한다. 빈틈이 없는건지 그만큼 자리가 위태로웠던건지.. 그렇게 해서라도 그 자리를 지켜야하는 것. 새삼 한숨이 나온다.
15:50 성에서 나와 버스로 교토민자역사로 감. 16:20 자유시간주어서 관광. 계단을 오르고 또오르고..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그들의 발전상이 부럽고 얄밉기까지하다. 120엔짜리 커피를 마시고 속이 메스꺼워지기 시작한다. 17:30 버스가 있는 곳에서 일행을 만나 숙소로 향함. 이틀동안.. 어떻게 하면 먼지를 털어내듯 내 머릿속을 털어낼 수 있을까.. 생각한다. 밤시간에 아이들과 라면을 먹으러 갔다. 한국의 라면맛과는 엄청 차이가 있는 느끼한 맛이다. 골목길에서 뿜어져나오는 음식냄새가 메스껍게 느껴진다. 싱싱한 생선회를 상상했던 내게 이 고약한 냄새는 또다른 서글픔을 안겨준다.
2005 겨울- 비몽사몽 일본행3
08:30 출발예정이라 로비에 앉아 출발을 기다린다. 처음보다 많이 친해진 아이들. 어젯밤 일본라면에 만족하지 않고 컵라면에 도전한 아이들. 대단해요~ 라면은 역시 신라면이야!! 친절한 일본사람들. 버스타는 곳까지 따라나와 손흔들어주며 미소를 잃지 않는 모습. 속마음이 어떻든 밖으로의 모습은 상대방의 마음을 열게 해주는 친절이다. 무뚝뚝한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습이라 생각된다. 특히 나~~
10:05 동대사 도착함. 세계 최대의 목조건물과 함께 최대불상이 안치되어 있는 곳이다. 들어가는 길에 커다란 사슴들이 어슬렁거려서 흠칫 놀란다. 사슴공원이라고 해서 울타리 안에 있는 것인줄 알았는데 아무곳이나 배회한다. 동대사는 가람의 총책임자로 고구려인 고려복신이 맡았고 대불의 주조는 백제인 국중마려, 대불전 건축은 신라인 저명부백세가 만든 삼국인의 합작품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나 잘 만들어 보존했으면 좋았을텐데... 사천왕의 표정은 험악하기 이를데 없다. 우리나라 사천왕의 표정은 애교에 가깝다. 그럼 이 절을 만든 고대 삼국인의 마음이 본토에 사는 삼국인의 마음과 달랐단 얘긴가요? 안다는 것은 무엇인지.... 표출하는 것만이 다가 아닌데 우리는 종종 오류에 빠져든다. 표현되고 있는 것만이 전부인양..
동대사의 그 커다란 비로자나불은 금동불로서 두번의 병화를 입어 나라시대 면모를 전하는 것은 무릎 부분이나 대좌의 연꽃 등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윤선생님이 좋아하는 숫자놀이 해볼까요? 대불전의 높이는 47.34m, 길이는 57.01m. 금동좌불상의 높이는 14.98m, 무게는 452t, 눈 길이가 1.02m..... 나라 지역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큰 불상이라는 명성을 얻는다고 한다. 불교에 의한 국가진흥을 바라던 쇼무천황이 일본 전국의 구리를 모아 9년에 걸쳐 8차례의 주조 끝에 만들어진 대불이라고- 대불 오른쪽에 있는 굵고 커다란 기둥 구멍의 크기가 대불의 콧구멍 크기와 같다고 하는데 이 구멍을 빠져나가면 1년치 액땜을 할 수 있고 소원성취가 이루어진다고. 저마다 구멍을 통과했는데 오덕만 선생님만 통과를 못했대요~
오덕만 선생님이 이런말을 해주셨다. 성장의 두려움. 가장 큰 장애는 내부의 두려움이다. 자기자신의 꿈을 이루는데 가장 큰 방해는 자신이다. 아이들은 알아들었을까요? 말의 의미를 깨달아야만 수용할 수 있고 바뀔수 있는건데 때때로 내부에서 철컥~하고 빗장이 걸릴때는 어쩌지....
나라박물관에서는 여러가지 전시유물을 보았는데 저는 너무 지쳐서 제대로 보이질 않더이다. 특별전으로 중국의 청동기를 볼 수 있었는데 제대로 보지 못해서 이제와 안타깝네요. 잘 따라다니는 아이들보며 무지 부러웠어요*
13:10 나라를 출발해서 14:15 오사카성에 도착. 그 사이에 버스에서 지쳐 떨어졌는데 윤선생님이랑 초등학생들은 아주 열심히 얘기하며 놀더이다. 대단한 체력이다. 처음 오사카 성을 들어갈 때 해자와 어우러진 성벽을 보며 감탄을 했다. 성벽에는 130톤짜리 돌을 통째로 사용한 것도 있다고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사카성을 축성한 이후 천수각은 여러 번 전란에 의해 불탔다고 한다. 천수각은 진도 7의 지진에도 견딜 수 있도록 보강되었으며 오사카상의 상징적인 건물로 알려져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생애를 소개하고 있는 전시실. 그가 만든 황금의 다실을 실물 크기모형으로 복원해 놓았는데 차를 아주 즐기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당시 최고의 귀족문화는 차문화였고 조선 도자기로 차를 마시면 상류집단에 속했다고 한다. 전쟁터에도 막부를 설치하고 차를 마셨다고 하니 분위기를 즐기는 사람이였을까, 아님 상류문화에 대한 컴플렉스였을까..
옛날 일본에서 일본도를 차는 것은 무사에게만 허락되던 특권으로 일반 상인과 농민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고 한다. 무사들은 일본도를 신성한 것으로 생각하여 집안의 영예를 나타내는 보물로 여겼기 때문에 칼을 항상 빛나게 하여 소중하게 취급했다고 한다. 16세기 중반에 총포가 전래되기까지 일본도는 전쟁시에 아주 중요한 무기였다. 서양의 칼은 찌르는 목적이기때문에 양쪽에 날이 있는 검이 대부분. 일본칼은 자르는 목적이기 때문에 한쪽 날 칼이 대부분이다.
사천왕사는 백제계 양식의 목탑이 있는 곳. 강당에 많은 사람을 수용 못하므로 야단법회가 열려지는 곳. 유네스코에 등재. 서울의 조계사와 같은 역할을 하는 곳. 하지만 내게는 가고 싶은 화장실을 못간 곳. 시간이 늦어서 탑안으로 입장을 못해 더욱 아쉬운곳.
저녁을 회전초밥으로 하고 스타벅스에 가서 커피를 마셨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우측통행을 해서 자꾸 부딪쳤다. 습관이란 무서워서 머릿속으로는 인지하면서도 몸이 말썽이다. 숙소는 ILGRANDE 비지니스 호텔이란다. 지하철도 타보고 쇼핑도 가보았지만 우리나라랑 크게 다를바가 없는데다 돈도 없어서 별 의미를 느끼지 못했다. 택시타고 다시 숙소로 돌아와서 일찍 잠자리에 든다. 꿈을 꾼다. 빛이 내게로 온다. 따스한 빛이다. 그 빛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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