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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 괴인상 (아마도 역사)- 흰뱀을 두손으로 쥐어잡고, 디스코헤어스타일, 턱수염, 역시 날카로운 이빨, 커다란 귀고리
동쪽 괴인상 (아마도 역사)- 날카로운 이빨과 이상한 뿔, 이빨하나는 턱을 뚫고..
이렇게 좌우로 배치
우리에게 벽화를 제외한 '삼국시대'의 그림은 현전하는 것은 필자가 아는 한 신라 지증왕대의 천마도가 거의 유일한 듯 합니다. 벽화를 포함하면 한국사회의 대중적 인식에 박혀있는 삼국시대의 그림은 고구려고분벽화들중 일부와, 신라의 천마도 정도가 아닐까요.
이런 가운데 삼국시대의 신라의 '벽화'들을 알고 계신분이 별로 없을 듯 합니다. 1985년 대구대학교에 의해 최초 발견 정식 발굴·조사된 영주 순흥면 읍내리 고분에 벽화들이 있습니다. 바로 위의 그림들로 서기 538년의 봉분이라고 합니다. ‘기미(己未)’라는 간지가 있어 무덤의 연대를 5~6세기로 대충 추정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지만 결국 479년이냐 539년이냐는 명확히 밝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연도에 따라 고구려 벽화고분인지,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신라고분인지 달라질 수 있지요. 명확하게 알아내진 못했지만 현재 통설은 후자 (539년) 즉 고구려영향의 신라고분이란 설이 강합니다.
벽화는 주로 먹선으로 윤곽을 그린 후 그 안에 색을 칠하는 방식으로 그렸으며 비교적 필치가 조잡하고 거친 편입니다. 아마도 이 때문에 세상에 그렇게까지 많이 알려지지는 않고 있는 듯 합니다만, 그럼에도 신라시대의 '그림', 그것도 불화가 아닌 당시의 수문장들의 느낌을 생생히 전해주는 벽화라는 점에서 지금보다 인식적으로 많이 알려지는게 마땅한 듯 합니다.
이 고분의 구조나 양식은 고구려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는데 이는 순흥이 당대 신라의 변두리이자 고구려의 변방에 위치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영향은 바로 인근의 어숙묘 (1971년발견)에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아래 보이는 그림은 여인의 얼굴인데, 당시 신라여인중 미인을 그린 것으로 생각됩니다. 단순하나마 머리스타일을 볼수 있군요.
신라여인도
위의 서쪽 괴인상은 복원도이고, 이것이 원본
동쪽괴인의 더 큰 버젼 (원래 삼지창을 들고 있다고 하는군요)
어떠한 새일까요?
참고로 같은 순흥면에 있는 어숙묘는 벽화의 각명(刻銘)으로 인해 이 고분은 595년에 만들어졌음을 알수 있습니다 [을묘년어숙지술간(乙卯年於宿知術干)]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 각명으로 신라의 관리봉분임이 밝혀집니다. 이 어숙묘에 그려져 있는 역사그림은 가장 유명한 것이 신라여인. 아래의 그림인데, 치마아랫부분 (마치 고구려벽화의 여인치마와 비슷한)을 제외하곤 뭐가 뭔지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속히 '복원도'가 나오면 좋겠네요.
순흥 어숙묘- 여인상
이외에도 어숙묘에도 괴인상(역사상)이 있는 듯 합니다. 역시 복원도가 없어서 정확한 형체를 모르겠군요. 뭔가를 들고 있고, 가슴가운데 무슨 장식인듯한 동그라미가 눈에 띕니다.
어숙묘 괴인도
순흥지역에는 지금도 천기가량의 고분이 있다고 합니다. 당국이 관리를 해야할 시점같은데, 아래 어느 당지역 블로거님의 글중 일부입니다
우리지역에 산재한 고분에 대해 발굴 보존대책이 시급한 현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가운데 지역 문화단체인 영주문화유산보존회(회장 박창규 경북전문대 교수)가 8일 하루 동안 장윤석 국회의원과 김종천 도의원, 시청 심인섭 문화관광과장, 회원 등 18명과 함께 안정면 소재 용암산 일대와 순흥면 비봉산 일대에 흩어진 고분군에 대한 현장답사를 벌였다.
순흥문화권에 해설자로 나선 류춘식 직전회장은 “순흥 일원에만 흩어진 고분이 1천여개지만 대부분이 사유지이기 때문에 매년 그 숫자가 크게 줄어들고 있어 대책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류씨는 “순흥 일원의 고분 형태는 석실을 만든 후 그 위에 흙으로 봉을 지은 석실 봉토분이 대부분이며 그 규모는 어숙묘에 버금가는 것만 80여기에 달한다”며 “보존 발굴 여하에 따라 제2, 제3의 사적 313호인 순흥벽화고분이 나올 가능성이 크고 도굴을 면한 원형 그대로의 고분도 다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비봉산 일원의 고분은 일제시대 때 대부분 도굴됐고 읍내리 고분도 일제 때인 1920년경 화물차로 수십차 실려 나갔다는 증언도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순흥초등학교 앞 우회도로 공사 지점에서도 상당한 유물이 출토돼 현재 동양대에서 발굴 조사 중이고 순흥은 현재의 초암사보다 훨씬 규모가 큰 폐사지 터가 있었지만 지금은 빈터에 큰 석축과 연화무늬의 주춧돌만 사현정 등에서 수십개 나뒹굴고 있어 사찰의 규모만 짐작할 뿐이라고 설명했다. 사현정 비석에 대해서도 조선시대에는 비의 크기가 관직과 관계가 있음을 볼 때 광개토대왕순수비에 버금가지만 특정 씨족이 사유지에 소재하고 있다는 이유로 비문을 지우고 문중비로 활용하고 있어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연화좌대 등도 특정 씨족의 묘지에 장식용으로 쓰이고 있는 등 귀중한 문화재 관리에 행정당국이 손을 놓고 있는 실정이다.
류씨는 “순흥고분군은 비봉산성 토성주변과 동서남북에 조성된 네군데의 큰 못 주변에 집중되어 있다“며 ”규모면에서 고령군의 대가야 고분보다 뒤질 이유가 없지만 지역사회의 관심권에서 멀어지면서 방치돼 사라지고 있다“고 했다. 그는 “아무 권한도 없는 회원들의 노력은 도굴꾼으로 오해를 받기도 하고 더 큰 문제는 섣불리 조사하다가는 도굴꾼들에게 정보만 제공하기 일쑤”라며 민간차원의 발굴 보존의 한계를 호소하기도 했다. (이놈의 도굴꾼들 손발을 잘라버리는 법을 만들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흥미로웠던 두 고분의 발굴 스토리중 일부를 나눕니다
1960년대 중반부터 대구·경북지역 골동품상 사이에는 영풍군 순흥면 어딘가에 벽화고분이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다. 그 소문을 토대로 1971년 영풍군 순흥면 태장리에서 최초의 신라벽화고분인 ‘어숙묘(於宿墓)’를 발견하였다. 무덤의 구조는 경주 통일기 석실분의 특징을 보이지만, 벽화는 고구려 벽화분의 특징과 성격이 짙게 배여 있다. 신라에서는 한참 변두리인 순흥의 비봉산 중턱에 위치한 이 묘의 주인공은 고구려계 신라 관리로 추정되며, ‘을묘년어숙지술간(乙卯年於宿知述干)’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연대(595년)의 추정도 가능한 돌방무덤이었다. 이 무덤은 곧바로 사적 238호에 지정되었다.
마을 주민의 말에 따르면 발굴 전 오랜 기간 묘벽에 바른 횟가루를 뜯어먹으면 만병통치라는 어처구니없는 속설이 나돌아 벽화 역시 심하게 훼손되었다. 지금은 거의 퇴락하여 천장의 연꽃 그림과 인물상만이 희미하게 남아있으나 모형조차 남기지 않고 덮어버린 상태다. 그것으로 순흥면 일대의 벽화무덤을 둘러싼 소문의 진상은 규명된 듯 보였으나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1980년대부터 순흥의 벽화고분에 대한 소문이 다시 나돌았다. 도굴꾼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내용들이었다. 대구대학교 이명식 교수의 귀에도 그 소문이 흘러들었을 것이다. 1985년 1월27일 지금으로부터 꼭 28년 전이다. 이명식 교수는 어숙묘에서 불과 1㎞ 떨어진 순흥면 읍내리 일대에서 학생들과 함께 유적 지표조사를 하고 있었다.
“이상한 무덤 하나를 발견했어요. 다른 폐고분들은 다 눈으로 덮여 있는데 유독 한 무덤은 눈이 쌓여 있지 않고 흙빛 그대로였어요. 도굴된 무덤이었지요.” 도굴 구멍은 사람 하나가 겨우 들어갈 정도의 크기였다. 본능적으로 내부를 살피고자 몸을 들이미는데 어두운 무덤 내부엔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무덤 북벽에 연꽃과 함께 구름 그림이 보였던 것이다.
“숨이 멎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발에 걸리는 것이 있어 보았더니 인골이었어요.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지요.” 아마 당시엔 영화 ‘인디아나 존스’에서 존스박사가 된 기분이었을 것이다. 일단 철수하고 며칠 뒤 다시 무덤을 찾아 정신없이 실측하고 촬영했다. 학교로 돌아와 필름을 인화한 그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인물상이 선명하고, 벽면에 먹으로 쓴 글씨 9자 ‘기미중묘상인명OO(己未中墓像人名OO)’를 발견한 것이다.
순흥 읍내리 벽화고분의 극적인 부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무덤내의 유물들은 이미 도굴범이 싹쓸이해간 상태였고, 인골만이 도굴로 인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이명식 교수는 문화재관리국에 정식 발굴허가를 신청하고서 6개월 뒤에야 국립문화재연구소와 대구대 공동으로 본격적인 발굴을 실시할 수 있었다. 보안을 유지하며 추진하는 과정에서 청와대 보고용 서류를 모 신문사 기자가 선수를 치고 읽어버린 바람에 부랴부랴 기자회견을 갖게 되었고 다음날 전국 신문의 1면 톱기사로 게재되는 일화가 있었다. 중략.
마지막으로 서쪽괴인의 얼굴확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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